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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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갑자기 자신의 인생에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이 펼쳐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분명 그것을 반기거나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려 들거나 이 둘 중에 하나겠지.

 옛날에 어디선가 스치듯 읽었던 문구를 나는 머릿속에서 되새겼다. 글 쓴 양반이 모험가였나, 아니면 소설가였나. 그것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후욱! 후욱!”

 

 뺨을 부풀린 채 연신 입술 밖으로 거친 숨을 내달아 쉰다. 그리고 팔을 직각으로 굳히고 허리를 앞으로 내린 채 다리를 쭉 뻗어낸다. 군대에서 죽어라 배운 정석적인 뜀박질 자세. 그때는 이딴 걸 알려주기 위해서 연병장을 무한정으로 돌라는 거냐고 온갖 쌍욕을 내뱉었지만 정말 기술이라는 건 배우고 볼 일이다.

 

타-닥! 탁!

 

 지금 이렇게 잘 써먹고 있질 않나. 셔츠 아래는 이미 땀범벅, 머리카락이 땀에 젖은 것이 느껴질 정도로 나는 온몸을 땀에 적신 채 이 폐허의 복도 위를 내달렸다.

 

“헉! 허어억!”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이라, 그래. 그때 이 문구를 읽었을 때 나의 머릿속에 그려졌던 것은 우연히 고대 유적을 발견한다던가, 아니면 아름다운 경치를 눈에 담는 것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학!”

 

탁!

 

 무너져 내린 석벽을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발을 박차고 올라 뛰어넘었다. 지금은 걸음 하나라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 무조건 직선, 아니. 우선 저 괴물로부터 내 몸을 숨길 곳을 찾아야 한다.

 

끼-리릭!

 

“-히익!”

 

 제법 멀리서 들려오는 불길한 마찰음에 내 눈썹이 휘어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나는 재빨리 두꺼워 보이는 석벽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투-두두두두!

 

“흐아아악!!”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 위로 수십 발의 총탄이 내리꽂히는 광경에 나는 여태껏 꾹 참아왔던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다. 지금 나는 그때 보았던 문구 그대로,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을 두 눈에 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씨..씨바알!”

 

 뭔 생각을 해. 미친. 딴 생각을 하다가는 곧 뒤질 판국인데. 흙먼지가 일렁이는 바닥을 응시하던 나는 석벽 밖으로 고개를 내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내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곤 나는 내 신세를 한탄하기 시작했다.

 

“씨발..씨발...”

 

끼-리릭!

 

“씨발!”

 

투-두두두두!

 

픽! 티-티틱!

 

 또다시 들려오는 마찰음과 이번에는 내가 등을 기댄 석벽을 향해 빗발치는 총알에 나는 최대한 몸을 안쪽으로 웅크렸다.

 

투-두두두!

 

픽! 피-픽!

 

 제법 두껍다 해도 돌덩이는 돌덩이. 초당 수십 발에서 수백 발까지 뿜어내는 기관총의 화력에 석벽의 군데군데가 깎여나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나는 공포와 절망을 가득 담은, 회심의 비명을 내질렀다.

 

“살려-주세요!”

 

4)

 

 분명 평범한 하루의 재개를 맞이할 아침이었다. 평소처럼 소파에서 일어나 어제 퇴근했던 옷 위에 대충 탈취제를 뿌리고는 문 앞에 내려두었던 사무용 가방을 집어 들곤 집 밖으로 나선다.

 매일 반복하는 일상, 똑같은 하루의 시작. 그래. 분명 응당 그랬어야 할 터였다.

 

짹! 째짹-!

 

“...흐아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들의 합창 소리에 나는 감았던 눈조차 뜨지 않은 채 하품을 내쉬었다. 창문을 열어뒀었나? 바깥소리가 방안까지 들려오다니.

 

“..에어커언. 켜 뒀는데. ㅈ댔..”

 

 잠결에서도 다음 달 날아올 고지서를 걱정하던 나는 바닥을 이리저리 더듬어가며 에어컨의 리모컨을 찾아 헤맸다. 눈을 뜨면 곧장 찾긴 찾을 테지만, 아직 이 쇳덩이 같은 눈꺼풀을 위로 올리기에는 내 의지가 부족했다.

 

턱!

 

“찾았..”

 

 무언가 직사각형의 물건이 손에 잡히자 나는 그것이 에어컨 리모컨인 줄 알고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에어컨 리모컨이라기에는 겉면이 거칠고, 또 무게는 평소보다 배로 무거웠다. 

 

“...이게 뭐야?”

 

 방 안에 조촐한 가구 몇 점과 일상생활에 쓰일 물건밖에 두지 않는 내게 이런 정체불명의 물건을 들인 기억이 없다.

 계속해서 더듬어 봐도 이건 에어컨 리모컨이 아니다. 이건 마치..

 

“..돌덩이?”

 

 물건의 정체를 유추해내자마자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감고 있던 두 눈을 부릅떴다. 눈꺼풀이 무겁니 마니 할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두 눈을 뜨자마자 내 눈에 들어온 건-

 

“..여긴 어디야?!”

 

 -익숙하지 않은 천장. 말끔하게 벽지로 도배되어 있던 천장이 아닌 다 허물어져 가는 폐건물의 천장이 날 반기자 나는 반사적으로 바닥에서 등을 떼곤 주변을 둘러다 보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전혀 색다른 풍경에 잠깐이나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말끔한 벽지로 잘 포장되어 있던 벽은 벽지 대신 쩍쩍 갈라진 금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것은 천장이나 바닥도 마찬가지, 회색의 콘크리트 외벽들로 둘러싸인 이 이색적인 방 안에, 나는 홀로 덩그러니 누워 있었던 것이었다.

 

짹! 짹!

 

 눈을 뜨기 전 들었던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갈라진 외벽 틈 사이로 또다시 들려오자 시선을 그 방향으로 돌리니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벌어진 벽 사이로 비춰 들어와 이 황폐한 광경에 현실감을 더해주었다.

 

“...씨벌? 꿈인가?”

 

 방금까지 내가 더듬거린 것은 예상대로 천장에서 갈라져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콘크리트 돌덩이였다. 나는 그 돌덩이에서 손을 떼고는 곧바로 내 볼을 강하게 꼬집었다. 제발 안 아프-

 

“-아얏!”

 

 절대로 약하게 쥘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내 볼 위로 강렬한 통증이 몰려오자 나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꿈은 아니다. 꿈이라면 이렇게 아플 리가 없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그렇다면 더 이해가 가질 않았다. 분명 나는 내 좁다란 원룸 방에서 분명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생뚱맞게도 폐건물의 허름한 방이 나를 반긴다. 누가 이런 상황을 상상이나 하겠나.

 

“몰카인가? 아니면 납치?”

 

 아무리 머릿속으로 해답을 내놓으려고 해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결국에는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였다.

 

“..저기요?! 누구 없어요?!”

 

 흙먼지를 털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나는 폐건물의 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뜨듯한 열기를 몰고 들어오는 여름 바람뿐.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 현 상황에 나는 무작정 허물어져 내린 복도 위를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저기요! 재미없거든요!”

 

 나올 거면 빨리 나와서 절 회사까지 데려다주세요! 나 짤리면 너네가 책임질 거냐! 분명 몰래카메라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을 뜨니 이런 폐허에 덩그러니 던져져 있을 이유도 연유도 없다.

 요즘 세상에 출연자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몰래카메라를 한다니. PD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내 주머니에 돈 몇 봉투는 가볍게 넣어줘야 할 거다. 머릿속에 이름도 얼굴도 모를 원수 놈을 그려가며 아무도 없는 복도 위를 걷던 내 발에서 갑작스러운 통증이 밀려왔다.

 

“아씨..신발도 없었네.”

 

 양말만 신겨서 내보내는 건 뭐야. 흙먼지 범벅이 된 양말만 신은 채 다 허물어진 이 복도 위를 걸으니 날카로운 돌조각이 박혔나 보다. 양말의 겉면을 집어 탈탈 털어내고 있자니 여태껏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던 상 하의의 꼬라지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탁! 탁!

 

“진짜 발견하기만 해봐라. 가만두지 않을 테다.”

 

 입고 있던 셔츠부터 바지까지 전부 먼지투성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곧장 옷에 묻은 먼지를 이리저리 털어대었다. 당장에 출근할 때 입을 옷이 이 단벌뿐인데, 이 꼴로는 출근도 못 한다.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대충 옷 여기저기를 털고 있을 때, 복도의 끝자락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대신 구-르릉 거리는 차 엔진의 소음이 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구-릉! 쿠-르응!

 

“...새끼들. 찾았다.”

 

탁!

 

 아마 내 반응이 시원찮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지들도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한 귀로 들어봐도 다급함이 묻어나오는 거친 차 소리에 나는 양손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캉-! 카앙!

 

“아, 거 양반들. 안전운전도 모르시나.”

 

 점차 가까워지는 영문 모를 소음에 나는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올리며 이 몰래카메라의 주최자들을 어떻게 구워삶아 먹을지 고민했다. 잘만 하면 오늘 저녁은 치킨이다, 맥주는 그 썩을 냉장고에 잔뜩 있으니 문제없다.

 

“선생님들! 여기요! 여기!”

 

 무너져 내린 복도의 끝자락에 고개를 내미니 환한 태양 빛이 나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제는 여름이라는 건가, 그런 생각으로 푸르른 녹음이 눈부시게 빛..나..는?

 

“...뭐야. 여긴 대체 어디야?”

 

 미처 이 폐건물의 밖에 대해 염두에 두고 있지 않던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현대식 풍경을 갖추고 있던 이 폐건물의 바깥은 내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자연이 펼쳐져 있었다.

 

“아니. 여기 대한민국 맞아?”

 

 우거진 수풀과 폐건물 주변을 가득히 메운 잡초들, 거기에 푸르른 하늘 아래에는 높디높은 산과 산림이 쭉 펼쳐져 있는 생애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우로 돌려도 숲과 산뿐. 좌로 돌려보아도 숲과 산뿐. 사람이 지나다니는 도로나 민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폐건물을 빼고는 사방이 죄다 나무와 산뿐인 주변 환경에 나는 여느 때처럼 머릿속에서 합리화를 시전했다.

 

“캠..캠핑장도 이런 캠핑장이 있구나. 이야. 세트장은 신경 많이 썼네?”

 

 인위적이라기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로 녹음이 선사하는 청량한 공기 내음을 한껏 맡고 있자니 폐건물 아래의 수풀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저기요! 누구세요?!”

 

 어느샌가 들려오던 소음과 새들의 짹짹대는 합창이 멈추었다는 걸 미처 알아채지 못한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수풀로 고개를 돌렸다. 당장에 저 수풀을 해치고 나오는 놈이 날 여기 던져두고 떠난 놈인지 아니면 이 근방에 사는 사람인지. 하여튼 이 산 중턱 한가운데서 사람을 찾았다는 생각에 들떠 도움을 청하려는 순간.

 

타앙!

 

-픽!

 

 총알이 내 구레나룻을 지나 내 머리 뒤의 석벽에 위에 꽂혔다.

 

“...어라?”

 

 혹 군대에서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띨빵한 후임 놈이 약실에 총알이 남았는지 안 남았는지 확인도 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총구를 자신한테 들이밀었던 경험.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왜 지금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이거. 실..탄이네?”

 

 소리부터 이 피부 위로 느껴지는 소름이 그때와 같은 찌르르한 감각을 내 뇌 내로 보내자 머릿속에 시끄러운 경보음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어...어?”

 

 군대를 전역한 이후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실탄의 총성. 그리고 이 싸늘한 감각. 나는 벽에 박힌 총흔을 빤히 바라보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목을 총알이 날아온 방향으로 억지로 돌렸다. 그리고 나에게 총알을 쏜 이가 누구인지 확인한 그 순간, 난 내 눈을 의심하고야 말았다.

 

“...하아?” 

 

철-컥! 철-컥!

 

 천천히 숲속의 그늘에서 걸어 나오는 물체는, 살면서 처음 보는. 아니, 대체 오늘 처음 보는 게 몇 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족히 2M는 가까워 보이는 둥그런 몸체, 그리고 겉면은 검은색을 베이스로-

 

“...철충?”

 

 아니. 저건 본적이 있다. 처음이 아니다. 분명 휴대폰 화면 속이었지만 생김새는 분명 내가 게임 속에서 수도 없이 파괴했었던 폴른이 철충에 의해 감염된 모습, 흔히 잡몹이라고 불렀던 놈이다.

 

차르르르-

 

“히이익!”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철충은 곧바로 붉은 빛을 뿜어내며 가랑이 사이로 기관총의 총열을 빙그르르 돌리기 시작했다. 방금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무언가를 떠올린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복도 쪽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투-두두두두!

 

파-바박! 파바박!

 

“허..허허..”

 

 방금까지 내가 머리를 내밀고 있던 자리 위로 수십 발의 총알이 지나가 다 무너져가는 폐건물의 벽면을 꿰뚫었다.

 처음보는 곳에서 마주한 게임 속 괴물,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폭력의 현장. 단시간만에 납득하기 어려운 정보들이 계속해서 시신경을 타고, 달팽이관을 타고 머릿속으로 들어오자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저 생존본능에 몸을 맡긴 채, 등을 돌려 지나왔던 복도 위로 뜀박질을 개시하였다.

 

“-으아아악!”

 

철-컥! 철컥!

 

 철충, 그리고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거진 녹음과 그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폐건물. 꿈을 꿔도 이것보다는 현실적일 거라고 내가 중얼거리던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 퍼져있던 퍼즐들이 하나둘 맞춰가기 시작했다.

 

‘뜬금포 전개. 게임 속에서나 보던 괴물. 이거 설마..’

 

“-이세계물이라니! 이런 씨발!”

 

 나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세상에 홀로 덩그러니 내던져진 것이었다.

 

5)

 

피-비비빅!

 

픽!

 

“씨발..씨발..”

 

 불과 몇 분 전까지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고 있자니, 대체 자기가 왜 여기에 있는지. 내가 무슨 죄를 지어 게임 속 이야기처럼 콘스탄챠와 그리폰의 도움도 없이 이 폐허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것인지. 한껏 석벽에 웅크린 채로 나는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을 계속해서 되뇌고 있었다.

 

투-두두두두!

 

“아 제발! 그만!”

 

 귀청을 찢는 강렬한 소음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나는 무너져가는 석벽에서 등을 떼고는 군대에서 배웠던 낮은 포복으로 천천히 전진해 나아갔다.

 

“후욱-! 후욱!”

 

‘씨발. 이걸 진짜 써먹네.’

 

 아주 천천히, 석벽의 착탄 범위 밖으로 나서지 않고 그림자를 따라 앞으로 천천히 나아간다. 이렇게만 하면 저 철충의 사격 범위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지. 그런데 이렇게 도망을 친다고 해서 저 철충을 과연 내가 따돌릴 수 있을까.

 

“제발..제발 누가 좀 도와-”

 

 이제는 눈가 사이에서 눈물이 찔끔 흘러나오려 하는 동시에 나는 그만 오른 허벅지를 내 예상보다 더 넓게 벌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저 괴물은 놓치지 않았다.

 

타-앙!

 

“-!”

 

 여태껏 들려오던 연사 소리 대신 단발의 총성이 들어오는 동시에 내 허벅지에서 후끈한, 아니 뜨겁다 못해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차가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끄윽!”

 

 무슨 일인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천천히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이 뜨거운 열기는 곧바로 내 머리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하자 난 악물고 있던 입술을 터트리고 말았다.

 

“-끄아아악!”

 

 허벅지를 관통한 총알이 내게 선사하는 이 강렬한 첫 경험에 나는 포복 자세고 나발이고 흙먼지가 가득한 복도 바닥에 드러누운 채 천장을 향해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아아악!”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오른 다리와 그저 희뿌연 복도 위를 연신 내리치는 양 주먹. 그리고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눈물과 닫힐 줄 모르는 위아래 입술. 나는 온몸을 찢어발기는 이 강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또 내질렀다.

 

“아악! 아아아악!”

 

철컥!

 

 먹통이 되어버린 뇌와 달리 멀쩡한 귓바퀴에 철컥거리는 기계의 구동음이 들려왔다. 철컥! 철컥!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마치 다잡은 사냥감을 유유히 마무리를 지으러 오는 맹수와 같이, 그 철충은 내게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철컥! 철컥!

 

“흐윽! 흐으윽!”

 

 철충이 내게 다가온다는 사실에 격통이 올라오는 오른 허벅지를 힘겹게 내려다보았다. 눈물이 눈썹 위로 번진 탓에 희뿌옇긴 하지만, 그래도 여실히 내 허벅지의 상태를 볼 수 있었다.

 

“흐윽! 하악!”

 

 뻥 뚫린 바지 위로 시뻘겋다 못해 시꺼먼 혈액이 마치 분수의 물줄기처럼 꿀렁이며 바깥으로 튀어나오고 있는 광경, 분명 허벅지에는 대퇴정맥이었나 뭔지는 몰라도 큰 혈관이 있다고 했다. 만약 재수 없게 총알이 그 위로 지나가면 과다출혈로 사망의 위험이 있다고, 예전에 군대에서 배운 적이 있다.

 그러면 지금 내 총상은 어떻지? 위험한가? 피가 철철 나오고 있기는 한데 이걸 지금 지혈할 방도는? 응급 키트는 있나? 그것보다-

 

철-컥!

 

“..하악! 하아! 하아!”

 

 -이놈으로부터 나 살아남을 수나 있나?

 

차-륵! 차-르르르!

 

 햇빛을 등진 채 내 앞까지 걸어와 기관 총열을 연신 돌리는 이 철충은 마치 내가 고통받는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여유롭다. 이제는 먹잇감이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모습을 즐기면 그만이다. 말은 하지 않아도 내 눈앞에서 기관 총열을 까닥대는 이 녀석의 속내는 내게 훤히 보였다.

 

찰-칵!

 

“흐헉! 헉! 허억!”

 

 방금까지 뇌 속을 뒤흔들던 강렬한 고통은 어디 가고 이제는 식은땀의 차갑고 찐득한 감각이 내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맹렬히 흔들고 있었다. 정말이지, 꿈만 같은 일이다.

 

“하..하하하!”

 

 매번 똑같았던 일상, 매번 반복되는 일상이 얼마나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이었나. 이렇게 허무하게,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곳에서 비명횡사할 바에는 그 좁은 원룸에서 그저 맥주나 홀짝이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이었나.

 

“...꿈이야. 응. 이건 악몽..악몽이야.”

 

 덜덜 떨리는 온몸이 외친다. 이건 꿈이 아니라고, 하지만 내 생존본능은 말한다. 이건 꿈이라고. 체온이 급격히 떨어진다. 차라리 이렇게 고통 없이 죽는 게 나을지도.

 철충은 내가 더는 도망치려 들지 않자 이제는 끝내주겠다는 것처럼 제 총열을 딱 한 칸, 한 칸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돌아가는 것이 내 눈에 보일 만큼.

 

“..씨발. 좆같은 벌레 새끼”

 

 마지막까지 날 놀리는 그놈의 커다란 얼굴을 두 눈에 담은 채, 나는 점차 멀어지는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이렇게 홀로, 연유도 모를 이유로 죽는 게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니.

 

“..씨발. 차라리 죽기 전에..”

 

털썩-!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걔들 얼굴이라도 봤으면 여한이라도..없지.”

 

 철충의 총구가 완전히 돌아간 순간, 나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부디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내 안락한 원룸의 소파 위이길 빌며. 나는 어둠 속으로 점차 빠져들어 갔다.

 

쿠-웅!

 

“-얏호! 벌레 하나 처치했..아니. 뭐야! 이거!”

 

6)

 

“흐흐흥-!”

 

 슬레이프니르는 신이 나 있었다. 불과 며칠 전 성황리에 끝마친 오르카 아이돌 프로젝트. 사령관, 아니. 프로듀서의 강력한 후원과 푸시로 온 오르카 저항군 전체에 자신과 전대원들의 이름을 알린 대규모 콘서트.

 

“헤헤..헤헤헤헤!”

 

 평생에 걸친 염원을 이룩한 슬레이프니르는 공연을 끝마친 이후에도 여전히 헤실헤실 미소를 지은 채 푸르른 하늘 아래를 자유로이 누비고 있었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볕도 제 앞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공기층도, 그 어떤 것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축복과도 같았다.

 

“러버 러버러버~저 하늘 넘어 높이!”

 

 자신이 직접 작곡한 노래를 여전히 흥얼거린 채 하늘 위를 날고 있는 그녀의 본 목적은 정찰..이라고 읽는 산책이었다.

 

“날아갈게~그대를 따라서~”

 

 그녀의 전대원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눈살을 찌푸릴 만큼 주책스러운 광경이었으나 그녀 역시 눈칫밥이라면 오래도록 먹어왔기에 오늘만큼은 그녀 홀로 예고에도 없던 정찰에 나섰다.

 

“흐흥~역시 내가 작곡한 노래라니까! 중독성 하나만큼은 최고야!”

 

 전대원들과 다 같이 노래와 춤을 연습하고 또 뮤즈라는 새로운 친구와 합심해 마지막에는 완벽한 무대를 완성을 시켰었다. 그리고 그 이후..

 

“-헤헤헤!”

 

 투명한 바이저 아래로 뺨을 붉히던 슬레이프니르는 그 날의 뜨거웠던 밤을 떠올리며 공중에서 빙그르르 돌며 열 오른 이마를 시원한 바람으로 식히려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거진 산림 위에서 개인기를 선보이던 슬레이프니르의 정찰망에 무언가 께름칙한 신호가 포착되었다.

 

삑-삑-

 

“응? 이 지역에 아직 철충이 남아 있었나?”

 

 갑작스럽게 바이저의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붉은 점이 점등하자 슬레이프니르는 녹음으로 가득한 산맥 위에서 멈추어섰다. 이윽고 신호의 위치가 어디인지 파악한 그녀는 새초롬한 얼굴로 허리에 양손을 얹곤 중얼거렸다.

 

“정말. 철충이 둘이나 남아 있었잖아. 수색대대 애들이 적당히 하고 갔나?”

 

 만일 이를 사령관에게 보고한다면 또 함 내의 누군가는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터였다.

 

“..뭐. 함 애들한테는 빚도 있으니까. 히히!”

 

 일전의 콘서트에서 열심히 자신들에게 환호성을 내질러 주던 그녀들이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로 혼꾸녕이 나는 것을 그녀는 원치 않았다. 자신의 최고속력이라면 이런 철충 두 놈쯤은 가뿐했다.

 

“어디..어라? 왜 두 신호가 겹치지?”

 

 상당히 서로 밀착해 있는 것인지, 두 철충의 신호가 겹치는 모양새로 보이자 슬레이프니르는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제 기동장치의 부스터의 불을 최고조로 점화시켰다.

 

“-한 방에 둘! 일타쌍피!”

 

슈욱!

 

팡!

 

“이-얏호!”

 

 슬레이프니르가 최고속력으로 수풀 위를 지나쳐가자 그녀가 가로지른 하늘의 선로 아래에 있던 나무들이 좌우로 휘청이며 온사방으로 나뭇잎들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박!

 

콰-아아아!

 

“이 맛에 하늘을 나는 거지!”

 

 제 눈앞의 모든 것을 추월한다. 그저 앞만 보고 보이지 않는 공기층마저 제 부리로 꿰뚫고 나아가는 제비의 형체를 따라가는 것은 오로지 그녀의 머리 위를 감싼 햇빛뿐이었다.

 

콰-아아아!

 

“-한 놈 발견!”

 

 몇 초가 지나지도 않았지만 이미 수십 키로를 날아온 그녀의 눈앞에 다 허물어져 가는 폐건물과 바깥으로 노출된 건물의 복도 한가운데 서 있는 둥글고 검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왜인지 신호에는 두 놈이 잡혔으나 목표가 하나밖에 보이지 않아 그녀는 어딘가 께름칙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속도를 늦춘다는 선택지는 애당초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철충 확인! 안녕! 그리고!”

 

 슬레이프니르는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제 기동장치의 끄트머리를 정수리 앞으로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가 철충의 몸체 위에 닿는 데에는 1초라는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쿠-직!

 

 딱딱하고 튼튼한 철혈의 갑주는 어지간한 총알 정도는 쉽게 튕겨낸다. 하지만 제비의 날카로운 부리는 그 철갑마저 꿰뚫고 제 갈 길을 지나간다.

 

-콰앙!

 

“잘 가!”

 

 저만 치리 날아가 버린 철충의 시그널이 로스트 신호로 뒤바뀌자 슬레이프니르는 당당한 포즈로 방금까지 철충이 서 있던 자리에서 멈추어서며 싱긋이 미소를 짓곤 양팔과 양다리를 쭉 뻗어 올리며 자신의 공적을 만끽했다.

 

“-얏호! 벌레 하나 처치했..”

 

툭!

 

“...?”

 

“...으..어억.”

 

“-뭐야! 이거?!”

 

 제 발에 치인 남자의 신호를 뒤늦게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7)

 

삑-삑-삑-!

 

 긴박한 비프음 소리가 오르카 1호의 갑판 위를 가득 메우자 갑판 위를 빙 둘러싸고 있던 이들의 얼굴에도 한껏 긴장감이 맴돌았다. 저마다 목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저 침을 삼키는 것조차 참아가며 그녀들과 그는 가만히 하얀 침상 위에 드러누운 남자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기만 했다.

 

삑-! 삑-! 삑-!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남자의 허벅지에 나 있는 시뻘건 구멍의 안에서 은색의 로봇침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격렬하게 울리던 소음이 점차 안정적인 템포로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변화에 침상의 곁에 서 있던 아담한 체구의 남성이 갓 변성기로 들어선 소년의 목소리로 제 곁에 선 간호사에게 질문을 건네었다.

 

“다프네. 이 남성의 상태는?”

 

“우선 터졌던 대퇴정맥은 봉합이 끝났어요. 혈류도 안정적으로 흐르기 시작했고요. 손상된 근육이나 뼈 부분도 어느정도 봉합했습니다만 정밀한 검사에 관해서는 닥터양에게 맡기는 편이..”

 

“응. 수고했어. 그런데 이 남자, 얼굴이 새하얀데 무슨 문제야?”

 

“출혈이 많아서 핏기가 가신 것뿐이에요. 혈액형을 알아내었으니 이것도 닥터양이 해결해드릴 거에요.”

 

“..고마워.”

 

 다프네의 친절한 설명에도 사령관은 시선을 남자에게서 떼지 않은 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언뜻 보아도 성인 남성으로 보이는 이 환자는 사령관의 말마따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가만히 가슴을 위아래로 움직일 뿐, 쉽사리 눈을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생긴 사람이었구나.”

 

 마치 처음 보는 신기한 동물을 보듯 사령관은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은 채 멍한 시선으로 침상 위의 정체불명의 남성을 빤히 응시했다. 그에게 있어선 세상 처음으로 마주한 자신 이외의 또 다른 남성.

 슬레이프니르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그를 데리고 갑판으로 내려왔을 땐 한껏 미소를 짓고 있던 그 역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야 말았었다.

 

“그는 운이 좋았습니다. 대퇴정맥이 찢어졌다고는 하나 깔끔한 관통상으로 총알이 몸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사령관과 함께 침상을 빙 두른 8명의 여성 중 적색의 군모를 쓴 성인 여성이 담담하게 입을 열자 사령관은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만약에 총알이 몸 내에 남아 있었으면..”

 

“..우선 총상은 단 한발이니 크게 문제 될 건 없었겠습니다만 아마 파편으로 갈려 나간 총알들이 그의 주변 근육이나 혈관 역시 터트렸겠지요. 허벅지는 총상을 입었을 때 빠른 지혈을 요구하는 부위입니다. 복부처럼 주요 장기는 없지만 굵직한 혈관이 있는 부위이기에..”

 

“..휴우.”

 

 불굴의 마리의 세세한 설명이 끝나자 그녀의 곁에 서 있던 또 다른 금발의 여성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다른 건 몰라도 불굴의 마리 소장 말대로 운 하나는 정말 좋은 남자네. 총상을 당하자마자 우리 전대장에게 발견되고.”

 

“어허. 아무리 정체를 모른다지만 환자에게 그런 말을 하면 못쓰오. 레오나 소장.”

 

“...실례. 내가 무례했어.”

 

 짙은 속눈썹 아래서 회색빛 눈동자를 빛내며 침상에 드러누운 남성을 평가하던 철혈의 레오나는 제 반대편에 선 짙푸른 머릿결의 여성의 말에 고개를 까닥였다.

 철혈의 레오나가 무심한 얼굴로 제 말을 되받아쳤으나 무적의 용은 그것에 대해 불쾌한 기색 대신 한층 진중해진 얼굴로 침상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사령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군. 우선 바닷바람이 차오. 우선 그에 대한 인계는 우리에게 맡기시고 주군은..”

 

“...아냐. 용. 나도 여기 있을게.”

 

“...음.”

 

 자신의 부름에 항상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쳐주던 사령관이 눈동자조차 굴리지 않고 재빨리 제 말을 끊자 무적의 용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하지만 사령관은 그녀의 얼굴색이 변하든 말든 여전히 침상에 누운 남자만 빤히 응시할 뿐, 별다른 추가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

 

 그런 사령관의 모습에 지휘관급 여성들은 저마다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서로의 시선을 맞추다 이윽고 모두가 한 갈색의 여장부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흠. 내가 나설 때인가.”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이 시대의 진정한 상여자, 로열 아스널은 지휘관들의 시선에 싱긋이 웃음으로 회답하고는 청소년의 신체로 몸을 바꾼 사령관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사령관. 그대는 이 남성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군.”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나 말고 다른 남성을 본 건 이 남자가 처음이니까.”

 

 로열 아스널의 직설적인 말에도 여전히 그는 침상 위의 남성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로열 아스널의 입꼬리가 위로 향하기 시작했다.

 

“혹 그를 보고 남색에 눈이라도 뜬 건가? 그건 내게 좀 위험한 일이다만.”

 

“..남색?”

 

 어딘가 께름칙한 느낌이 드는 단어가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자 사령관은 그제야 남성에게서 시선을 떼곤 음흉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스널에게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그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로열 아스널, 하지만 그녀가 내뱉은 말의 파장은 그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었다.

 

“뭐라는 거야! 이 변태 지휘관이!”

 

“..맞소. 로열 아스널.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오.”

 

“..각하께 무례한 발언은 삼가라.”

 

“사령관? 저런 여자의 말은 곧이곧대로 들을 필요도, 염두 할 필요도 없어. 자, 가만히 있어. 내가 귀를 닦아줄 테니.”

 

 지휘관들이 제각기 분기가 어린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자 로열 아스널은 그녀다운 호탕한 웃음으로 그 시선을 받아 쳐냈다.

 

“모두 너무들 하는군. 내게 짐을 씌우더니 이러기가 있나?”

 

“...사령관의 관심을 우리한테로 돌리라고 했지. 이상한 방향으로 돌리라고는 안 했어.”

 

“흠? 멸망의 메이. 그대는 눈으로 그렇게 다양한 신호를 보낼 줄 알았나? 거참. 미안하네. 난 그런 독해능력이 없어서 말이야.”

 

“...우씨. 말 한마디를 안 져요. 진짜.”

 

“다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자기만 모르는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들의 모습에 사령관은 눈썹을 한껏 찌푸렸다. 도대체 남색이 무슨 말이길래 철혈의 레오나가 제 귀를 티슈로 꼼꼼히 닦질 않나,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불굴의 마리와 무적의 용의 얼굴이 저렇게 벌겋게 달아오른단 말인가.

 

“남색이 대체 무슨 단언데?”

 

“사령관. 그대가 별로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단어다.”

 

“칸.”

 

“우선 닥터가 곧 이리로 올 테니 사령관은 나와 함께 이동하는 게 어떻나?”

 

 제 어깨를 부여잡은 채 담담하게 말을 걸어오는 신속의 칸을 올려다보던 사령관은 이윽고 콧김을 크게 분 뒤에야 침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알겠어. 대신 그가 일어났을 땐 내가 직접 찾아갈 거야.”

 

“..알겠다. 그럼 난 먼저 사령관과 함께 가지.”

 

“? 너희들은?”

 

 왜 자기만 자리를 뜨냐는 식으로 되물어오는 사령관에게 알파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저흰 이분을 마중해 드리고 회의실로 들어갈게요. 사령관님.”

 

“...치사하게 나만 돌려보내기야?”

 

“후훗. 아무리 그래도 이분도 인간님이시니까요. 다른 병사들이 흥미 위주로 이분께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알았어. 그럼.”

 

 등을 떠미는 알파와 어깨를 이끄는 신속의 칸의 힘에 못 이겨 사령관은 곧장 갑판을 떠나 함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령관이 함 내부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한 6명의 지휘관과 그의 비서는 갑판 문이 닫히고 나서야 참아왔던 깊은 한숨을 다 같이 내쉬었다.

 

“하아...정말 산 넘어 산이라더니.”

 

“..그 말에 격하게 공감해요. 레오나님.”

 

“주군도 주군이시군. 새로운 인간이 발견되었다고 하자마자 성인 남성 신체에서 청소년의 신체로 바꾸다니.”

 

“바꾸실 거면 더 어린 신체로 바꾸시는 게 나으..”

 

“..여기서 더 골머리 아프게 하지 말아주겠어?”

 

“음! 으흠!”

 

 자신의 부끄러운 속내가 한숨에 섞여 나오자 불굴의 마리는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런 그녀를 한심하다는 눈치로 한 번씩 바라본 지휘관들은 곧장 그녀에게서 침상에 누워 있는 인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때? 내가 보기에는 무진장 평범한 남자 같은데.”

 

“공감이야. 딱 보아도 전투 경험이 전무한 남자 같네. 겨우 총상 하나에 기절할 정도면..”

 

“음. 소인도 그렇게 생각하오. 하지만 그가 눈을 뜨기 전까지는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 알파, 그대가 보기에는 어떻소? 그가 펙스의..”

 

 무적의 용이 채 제 물음을 다 내뱉기도 전, 알파는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이렇게 온전한 남성의 인체가 그녀들에게 있었다면 굳이 저희 쪽으로 보낼 리가 없어요.”

 

“그 늙은 노괴들 중 하나가 이 남성의 몸에 있을 수도 있잖나.”

 

“..아스널 소장님 말씀대로 만일 노괴들의 부활에 진척이 생겨 한 명을 저희 쪽으로 보내 내분을 유도한다는 가능성은 아주 제로는 아닙니다만.”

 

 아스널의 이어지는 물음에 알파는 턱을 괴며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를 이어갔지만 이내 고개를 또다시 내저었다.

 

“아마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면 철충의 코앞까지 제 주인들을 내던져 두지는 않았겠죠. 좀 더 안전한 방법으로 저희 쪽엔 접촉하려고 들었을 거예요.”

 

“흥! 하긴. 애당초 이 녀석을 발견한 지역은 기존 계획에는 없었던 정찰 지역이었다며? 거기다 출격한 게 그 천방지축 전대장이기도 했으니 조금만 타이밍이 어긋났으면..”

 

“시체가 되었을 남자였지. 정말, 다른 건 몰라도 운 하나는 억세게 좋은 남자네.”

 

“음.”

 

 멸망의 메이에 뒤이어 침상 위의 남성을 평가하는 철혈의 레오나의 말에 그 자리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지금 당장으로서는 이 남성의 신원에 대해 파악하기는 어렵겠구려. 이보게, 간호사. 이 남성이 일어나기까지 얼마나 걸리듯 하오?”

 

“아..아마도 3시간 이내로 일어나실 거에요. 진정제를 투여해드린 했지만 보통 첫 총상을 입은 분들은 오랜 시간 취침을 유지하시기 어려우니.”

 

“음. 우선 각하의 요구대로 먼저 이 남자와 각하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게 어떤가 합니다만.”

 

 불굴의 마리의 무덤덤한 물음에 무적의 용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께서 노리신 건 아니시겠지만 청소년의 모습을 한 주군께 이 남성이 어떻게 다가서는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어 보이구려.”

 

“만약 사령관이 어리다고 무시하는 언동을 보이거나 만만하게 본다면..”

 

“그땐 내게 맡겨 주겠나? 하룻밤 만에 인류 재건의 임무를 완수시키게 해주지.”

 

 대화의 맥락을 뚝 끊는 로열 아스널의 포부에 그 자리 모두의 눈매가 가늘어지다 못해 찡그려 들었다. 자신을 향해 혐오스럽다는 시선을 보내든 말든 로열 아스널은 제 아랫배를 통통 내리치며 싱긋이 눈웃음을 그렸다.

 

“보낼 땐 보내더라도. 다양한 씨앗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겠나? 유전병의 문제도 있고 말이야.”

 

“...그땐 고환에서 정액만 채취한 뒤 살처분할 거야. 쓸데없는 짓은 관둬.”

 

“에잉. 아깝게 시리.”

 

“진짜 천박하다..”

 

 질색하다 못해 얼굴을 잔뜩 찡그리는 멸망의 메이의 말에 로열 아스널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이 녀석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네?”

 

“음. 부디 각하께서 원하는 인재여야 할 텐데.”

 

“...소년 몸으로 바꿔가면서까지 그에게 친근하게 굴고 싶다는데. 우리가 뭐 어쩌겠어.”

 

“주군께서도 외로움을 많이 타신 듯하구려.”

 

“우리에겐 풀 수 없는 남자만의 외로움이라는 거지. 후후. 이 남자는 생각보다 무거운 역할을 맡게 될지도 모르겠군.”

 

“부디 사령관님의 희망에 맞는 남자이길 빌어야겠네요.”

 

 지휘관들은 알파의 말을 끝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 남성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저마다의 요망이 담긴 그녀들의 부담스러운 눈길이 깊이 잠든 그에게도 전해진 탓인지, 일순간 편히 잠들어있던 남성의 눈썹이 파르르 떨어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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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편은 사령관과 마주한 라붕이 이야기. 일상물인데 왜 유혈씬과 전투씬을 내가 쓰고 있는데스우. 너무 힘든 데스.


참고로 중간에 나오는 띨빵한 후임 이야기는 내 친구 실화임. 심지어 대상이 자기가 아니라 중대장이어서 더 난리였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