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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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한때, 라스트 오리진 커뮤니티에서 후회물이라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라스트 오리진 채널에서 말이다.

 후회물이 뭐냐고? 뭐, 말 그대로 누군가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참회하고 후회하는 장르다. 다만 그 주체가 바이오로이드라는 게 문제였지만.

 

‘씨발. 씨발.’

 

 갑자기 왜 그런 후회물 바람이 분 지 그 이유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없었다. 하지만 점점 사령관과 바이오로이드들의 섹스 묘사가 심해지는 원작의 달달한 분위기와 정반대로 기존의 사령관이 가진 설정을 무시하고 그 주변 캐릭터를 붕괴시키는 것이 그 장르의 주 서사였다.

 

‘좆같다. 씨발.’

 

 씹덕끼리만 통하는 용어가 있다고 한다. 유열이라고 했던가. 기존의 뜻보다는 누군가가 고통받는 모습을 즐긴다는 뜻으로 라스트 오리진 채널에서는 통했다. 응? 누가 고통받냐고? 작품에 등장하는 애들 다.

 사령관을 배신한 바이오로이드들이 전부 고통받는 모습을 즐기는 거다.

 

‘후회물을 내가 왜 씨발.’

 

 원작 세계관의 절대적인 규칙, 유일한 인간이라는 틀까지 부수어가며 써 내려가던 후회물 장르에는 여러 클리셰들이 있었다.

 첫째, 라스트 오리진이 아닌 세컨드 오리진. 흔히들 말하는 금태양의 등장. 무슨 수를 써서든 새로운 인간을 발견, 그리고 그 인간은 기존 주인공보다 유능하다는 클리셰.

 둘째, 그 인간의 유능함에 반한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의 반란. 사령관의 무능함에 지친 바이오로이드들이 제 뜻대로 금태양을 사령관으로 추대하고 기존의 사령관을 갈아치운다. 그 결과, 원작의 사령관은 제 안방이던 오르카 1호에서 쫓겨난다.

 셋째, 금태양의 폭주와 바이오로이드의 후회. 그래. 이게 기승전결의 전에 해당한다. 이제는 눈치 볼 것 없어진 좆간이 폭주하기 시작하면서 사령관을 갈아치운 바이오로이드들이 ‘후회’한다. 그리고 사령관이 그걸 심판한다. 이러면 결.

 그리고 이런 서사구조를 지닌 후회물은 독자들에게 크나큰 호응을 얻었다.

 

‘진짜 좆같다. 씨발.’

 

 물론 원작 세계관과 캐릭터 설정까지 마구잡이로 부수어 버리니 싫어하는 인간들도 몇 있었지만, 뭐. 그게 대순가. 어차피 게임이다. 그것도 게임의 2차 창작물인데 쓰는 놈 마음, 보는 놈 마음 아닌가.

 

‘씨발. 흐으윽. 꼴초뱀. 씨발.’

 

 꼴초뱀 그 양반은 아마 안 봤겠지. 이 후회물이란 장르에서 반란을 주도하는 지휘관 중에 꼭 자기 최애캐가 끼어 있었으니까. 현역 시절에도 과몰입하던 양반이 전역 후에도 과몰입을 안 할 리가 없다.

 

 나? 나는 그 양반이랑 다르다. 게임하는 데, 아니. 글 읽는데 왜 그렇게 신경을 쓰냐? 그냥 말초적인 자극을 느끼려는 글에 왜 정신력을 소모해?

 애당초 내 최애들 대부분은 후회물에서 사령관을 끝까지 수호한다는 클리셰를 보유하고 있었다. 과몰입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과몰입 좀 할걸. 씨발...’

 

“왜 계속 말을 하다가 말까? 우리가 그렇게 여유로운 사람들로 보이는 걸까?”

 

“...”

 

 왼편에서 꼴초뱀의 최애캐가 서늘한 목소리와 서슬 퍼런 회색 눈으로 날 노려다 보고 있었다. 그 양반이었으면 좋다고 난리 칠 상황이었지만 내게는 정반대였다.

 

‘저게 어딜 봐서 반란을 일으킬 년이야! 씨발! 대놓고 권총을 들고 있는데!’

 

 북방의 차가운 한기를 풀풀 두른 두 눈이 내 왼뺨 위를 계속해서 찔러 대었다. 수 분째, 그녀는 내 왼 얼굴만 한없이 째려다 보고 있었다.

 그것은 응당 그녀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날 노려다 보는 암사자들의 날카로운 시선.

 불굴의 마리는 방에 들어섰을 때부터 팔짱을 낀 채 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날 노려다 보고 있고.

 멸망의 메이는 내가 알던 멍청한 아다가 아닌 매서운 연보랏빛 눈동자로 날 시종일관 쳐다보고 있었다.

 신속의 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심드렁한 눈으로 내 행동을 쫓고 있었고, 무적의 용 역시 매한가지.

 로열 아스널은 보기에 따라 사람을 비웃는 듯한 눈웃음을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보랏빛 머리칼의 풍만한 가슴골을 여실히 드러낸 여성조차 날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자 내 뇌가 수능시험 때보다 빠르게 구르기 시작했다.

 씨발. 여기서 지금 발랄한 인간은 내 앞에 있는 남자, 사령관 단 한 명이었다.

 

‘무적의 용! 7지 클리어! 레모네이드 알파! 8지 클리어! 배신율! 0%! 그리고 내가 뒤질 확률! 몰라!’

 

“..제 이름은.”

 

“응응!”

 

 몇 번을 읊었는지 모를 똑같은 말을 다시 한번 힘겹게 내뱉었다. 조심해야 한다. 꼴초뱀이 뭐라 했더라? 우리 같은 병사들이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0이라고? 씨발.

 

‘철충한테 총 맞아 죽으나 여기서 바이오로이드들한테 총 맞아 죽으나! 0%는 0%네.’

 

 신중해야 한다. 말 한마디, 이름 석 자라도 잘못 뱉는 순간 심문에 들어갈 것이다. 북한 괴뢰 놈들이 남한에 넘어와서 어떻게 되던가. 몇 날 며칠을 고생하지 않던가. 심문이라 쓰고 고문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야 할 수도 있다.

 

‘내 정체를 있는 그대로 말해봐야 누가 믿어! 사실 전 이 세계를 플레이하던 다른 지구 사람이에요~아주 잘도 믿어주겠다.’

 

 이 세계의 인류는 이미 수십 년도 더 전에 한 번 멸망했다. 몰살당한 인류 중, 저 사령관이라는 놈만 살아남은 세계에 뜬금없이 성인 하나가 툭 튀어나온 것이다. 의심스럽겠지. 나라도 뭐지 이 새낀 하겠다.

 되도록 그녀들과 이 남성에게 날 감추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그것부터 확인하게 만들어야 할 시간을 벌어 두어야 내가 살아남을 확률이 올라간다.

 

‘..이름. 이 녀석들이 내 정체를 유추하지 못하게 만들 이름이..’

 

 다행히도 나는 후회물 클리셰 밖의 인물이다. 군사적으로 유능하지도 않고, 꼴초뱀처럼 능글맞은 성격도, 걸쭉한 입담도 없어서 바이오로이드들을 꼬실 여력도 없다. 태닝? 염색? 그런 걸 할 시간에 맥주나 마시련다.

 

‘금태양? 아냐. 왠지 이 가명을 썼다가는 저 암사자한테 총 맞아 죽을 것 같아.’

 

 펙스 애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먹었다고 했나, 그럼 영미권 이름은 아웃. 아예 유럽 쪽 이름을 들까. 근데 유럽 애들 이름을 어떻게 썼더라? 차라리 한국 이름을 댈까? 아냐. 김지석의 삼안이 한국기업이니 되려 멸망 전 인류라고 의심받을 수도 있어. 일본 역시 덴세츠 쪽이라고..씨발. 대체 어디 이름을 대야 하지?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하지?

 

 빠르게 굴러가는 머릿속에서 아무 이름이나 계속해서 되새기기를 몇 분째, 도무지 이 상황을 타개할 이름이 떠오르지 않자 나는 될 대로 되라라는 식으로 두 눈을 질끈 감고는 머릿속에 떠오른 명칭 중 하나, 죽었다 깨어나도 그녀들이 유추해내지 못할 명칭 하나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제 이름은-!”

 

“응!”

 

“-라붕이라고 합니다!”

 

“...응?”

 

 씨발.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죽일 거면 죽여!

 

13)

 

“...응?”

 

 작전 회의실에 들어온 지 십여 분, 사령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곤 제 눈앞에서 열중 쉬엇 자세로 고개를 푹 숙인 남성을 바라보았다.

 

“라..라붕이?”

 

“-예! 그렇습니다! 제 이름은 라붕이! 라붕이입니다!”

 

“...”

 

 드디어 듣나 했다. 제 형제가 되어 줄지도, 제 친구가 되어 줄지도 모르는 이 남성의 이름을 기나긴 침묵 끝에 드디어 듣나 했다.

 영미권 이름처럼 영어일까, 아니면 겉모습처럼 동아시아권 이름일까. 한껏 기대하고 있던 그의 이름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라붕이? 세상에 그런 이름이 어디 있어?”

 

 멸망의 메이 역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사령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다른 지휘관들 역시 매한가지였는지 모두가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보게. 이방인. 정녕 그게 그대의 이름이오?”

 

“-예! 제가 기억하는 제 이름입니다!”

 

“...허어.”

 

 멸망 전 개체인 무적의 용마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명칭이었는지 그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철혈의 레오나나 불굴의 마리는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렸고 신속의 칸과 로열 아스널은 아무렴 어때라는 느낌으로 어깨를 으쓱대었다.

 그리고 사령관은 후자 그룹에 속했다.

 

“...응! 다시 한번 우리 함에 온 걸 환영해! 라붕..씨라고 불러도 될까?”

 

 살짝 뒷말을 흐리며 머쓱한 웃음을 짓는 사령관의 물음에 자신을 라붕이라 밝힌 남성은 신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상관없습니다! 무어라 부르시든 상관없습니다!”

 

‘..우와. 목청이 진짜 굵다.’

 

 눈앞의 남성의 거친 성인 음성에 사령관은 제 울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자기 자신도 남성이고, 이런 청소년의 신체부터 중년의 신체까지. 다양한 신체로 갈아탈 수 있는 남자였으나 살면서 저 남성처럼 큰 목소리로 박력 넘치게 말해본 적이 없었다.

 그 증거로 불굴의 마리를 보라. 방금까지 경계심이 한가득했던 그녀의 눈이 지금은 한껏 풀려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녀의 입꼬리마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음! 목청이 좋군. 라붕이. 그대도 사내라는 건가!”

 

“..과찬이십니다!”

 

“음! 음!”

 

 우렁찬 그의 기합이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는지 불굴의 마리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광경에 사령관은 입을 헤-벌린 채 남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불굴의 마리를 이렇게 단기간에 호의적으로 돌리다니..’

 

 과거 자신이 브라우니들의 급식을 개선해보겠다고 철없이 나설 때, 불굴의 마리는 무덤덤하게 자신의 명령을 이행했었다. 문제는 그 이후. 턱없이 모자란 식재료와 설비의 미흡함이라는 난관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사령관의 계획은 자연스럽게 실패로 끝마쳤었다.

 그때 그녀가 자신에게 무어라 했던가.

 

‘면목 없습니다. 각하.’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녀의 무뚝뚝하고 심드렁한 퇴장 인사.

 겨우 디저트나 만들 수 있었던 설비 탓에 지휘관들에게 얼마나 쪽을 팔았던가. 사령관은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눈앞의 남성이 왜 저러는지 십분 이해했다.

 

‘그때 아무 생각 없이 지휘관 전체 소집했다가 되게 긴장했었지. 흑..’

 

 이 남자 역시 제 입장 탓에 병상에서 몸을 뉘기도 전에 이곳으로 와야만 했다. 사령관이 말릴 새도 없었다. 하지만 사령관과 이 라붕이라는 남자의 행동은 사뭇 달랐다.

 그는 작전 회의실로 들어서자마자 회의실 원형 테이블 중앙 공간으로 걸음을 곧장 옮긴 후 누가 무어라하지 않았음에도 곧바로 열중 쉬엇 자세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널따란 등을 보는 순간, 사령관은 직감했다. 

 

‘응응. 형이다! 이건 형의 느낌이야!’

 

 각진 어깨와 곧추세운 허리. 그리고 꼬리뼈 위에 얹은 양 손목. 거기에 공격의 의사가 전혀 없다는 식으로 턱을 쇄골 위까지 내린 그의 모습에 불굴의 마리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여대었었다.

 

‘마리는 마음에 들어 한 것 같고! 다른 애들은 모르겠지만 우선 군인의 포스야!’

 

 열병식 때 브라우니들 앞에 세우면 완벽할 것 같은 그의 모양새에 사령관은 헤실거리는 눈썹을 굳이 그녀들에게 감추지 않았다. 아직 정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닥터에게도 친절하게 대했다고 하니 바이오로이드들을 무작정 싫어하는 인물은 아닌 게 확실했다.

 그 증거로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들에게 계속해서 존댓말을 쓰고 있지 않은가.

 

‘잘만 하면 내 전투업무에 대해서 조언도 받을 수 있을 것 같고, 아니면 야전 지휘관으로 임명해도 될 것 같고..헤헤헤..’

 

 사령관이 잠든 시간에도 사건은 꾸준히 발생한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잠은 자야 했다. 그렇기에 발생하는 공백에 사령관은 언제나 민감했다.

 그렇기에 그 빈자리를 이 남자가 메꾸어 준다면 그보다 안심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는 잠정 결론을 내었다. 하지만 그가 이 함에 머무르게 하려면 한 가지 난관이 남아있었다.

 

‘우..우선 여기에 머무르게 해야겠어. 함에 적응할 기간을 준다고 하고, 지휘관들에게는 그의 정체를 조사해야 한다는 명목을 들이밀면 가능할 거야.’

 

“저기 라붕..씨. 헤헤.”

 

“예! 사령관님!”

 

 아직 어색한 그의 이름을 사령관이 어눌하게 부르니 라붕이는 다시 한번 굵직한 음성으로 그의 부름에 크게 대답했다. 그의 박력 탓일까, 사령관은 제 어깨에 다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곤 그처럼 큰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우선! 라붕씨의 현재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려고 하는데! 어때?!”

 

“사령관님의 크나큰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음! 음!”

 

 두 남자의 힘찬 목소리에 불굴의 마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철혈의 레오나와 멸망의 메이는 이게 대체 무슨 대화냐 싶은 시선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고 신속의 칸과 로열 아스널, 무적의 용은 푸훗-하고 웃음소리를 내었다.

 사령관은 한층 풀려가는 회의실 내 분위기에 힘입어 계속해서 그와의 대화에 임했다.

 

“우선 여기는 닥터가 이야기 한 대로 오르카 1호 잠수함이라고 해.”

 

“네!”

 

“그리고 나는 앞서 이야기했던 대로 이 함의 함장이자, 저항군의 사령관이고.”

 

“네!”

 

‘후우. 이제야 제대로 된 자기소개를 했네.’

 

 일전의 어색한 자기소개는 이제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졌을까, 사령관은 짧은 한숨을 그 몰래 내쉬며 그의 눈치를 살피려 들었다. 하지만 어지간히 고개를 푹 숙인 탓에 보이는 것은 그의 콧등뿐.

 

‘우..우선 계속 이야기해야지.’

 

“바깥에는 라붕씨를 공격했던 철충이라는 적들이 넘쳐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헤헤. 아..아니야. 구해준 건 우리 부대의 슬레이프니르 전대장인데. 난 한 게 없어.”

 

“그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좋..좋아! 착한 사람! 착한 사람이야!’

 

 바이오로이드에게도 존대를 쓰는 그의 모습에 사령관은 남아있던 옅은 의심을 거두어내었다. 역시 제대로 되먹은 인간이라고, 그는 그렇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럼 이제 친해질 방도만 찾으면!’

 

“그..우선 라붕씨의 안전은 앞으로 우리가 책임질 테니, 너무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정말 크나큰 호의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도대체 감사라는 단어를 오늘 몇 번이나 들은 걸까. 사령관은 제 입술이 달싹대는 것을 꾹 억눌렀다.

 

‘이..이 사람이랑 친해져야 하는데. 이러면 결국 상사랑 부하 관계밖에 더 안 되겠어! 무슨 수를 써야 하는데.’

 

 사령관이 원하는 라붕이와의 관계는 이렇게 딱딱한 관계가 아니었다. 영화 ‘친구’에 나오는 것처럼 동고동락할 수 있는 관계, 그리고 ‘의형제’처럼 사상과 신분을 넘은 우정의 관계를 그는 원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욕망이 현 상황과 부딪혀 사령관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큰 폭탄을 내던지고 말았다.

 

“-우선 라붕씨를 저희 함의 부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싶은데, 어때?”

 

“-예?”

 

사령관의 해맑은 폭탄을 직격으로 맞은 라붕이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단순히 사령관의 착각일까.

 

“각하!”

 

 사령관의 물음에 불굴의 마리가 그를 향해 고함을 내쳤다.

 

“사령관!”

 

 철혈의 레오나 역시 라붕이에게서 눈을 떼곤 사령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군!”

 

 무적의 용은 아예 책상 위를 쾅 내리치며 그의 의견에 반대를 표했다.

 

“사령관님!”

 

 사령관의 곁에서 말없이 가만히 있던 레모네이드 알파마저 그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응? 다들 왜 그래?”

 

“...”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내던진 폭탄으로 인해 잠잠하던 작전 회의실이 불 폭풍에 휩싸였다.

 

14)

 

 지금 이 미친놈이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냐. 나는 여지껏 유지해오던 부동자세를 풀곤 고개를 들어 저 또라이와 눈을 맞추었다.

 여전히 초롱초롱하고 해맑은 눈동자, 그러나 저놈의 저 말끔한 입술 밖으로 터져 나온 말 한마디 탓에 내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한 방울이 아니라 이제는 폭포수가 흘러내리듯 줄줄 흘러내렸다.

 

“각하! 그건 너무 섣부른!”

 

“마리. 우선 그의 의견부터 더 듣고..”

 

“사령관! 당신이 지금 무슨 소릴 한 줄은 알아?!”

 

“레오나. 침착해. 말이..”

 

“주군! 어째서 그렇게 성급하게 구시오! 좀 더 차근차근..”

 

“용. 그만. 내 의견을 무를 생각은 없어.”

 

“...”

 

 자기를 걱정하는 제 주변의 모든 지휘관의 반박 의사를 재빠르게 끊어내는 저 미친놈을 보고 있자니 이제는 내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저 새끼.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거 씨발. 후회물에서 본 루트인 거 같은데?’

 

 분명 후회물의 클리셰 중의 하나, 금태양이 오르카 1호의 군권을 잡고는 내부를 침식해나간다. 그리고 기존의 사령관은 퇴출당한다. 그거, 지금 딱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아니야?

 

‘저, 저. 미친놈이 자기 알아서 후회물을 진행 시키네?!’

 

 저렇게 어벙하게 구니 창작물에서 맨날 까이지! 왜 가만히 꼬리를 말고 있는 날 금태양으로 만들려고 들어?

 

‘..안돼. 절대 안 돼. 금태양 같은 짓을 하려다간 분명 총 맞아 죽어.’

 

 후회물에서는 금태양은 사령관을 능가하는 지휘를 선보인다. 우선 그 대전제가 깔려있어야 후회물이 진행이 된다. 그럼 전의 사령관은 어떻냐고? 아, 후회물의 기존 사령관은 멍청하게 나와야 퍼즐이 맞지.

 

‘씨발. 근데 8지까지 민 이 새낀 절대 어벙한 놈이 아니야.’

 

 애당초 기존 설정에 따르면 내 눈앞에 있는 이 청소년은 겉모습과 달리 천부적인 지휘능력을 선보이는 천재 중의 천재. 아니, 세계관의 주인공이니 온갖 치트키를 다 들고 있는 놈이다.

 이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 이놈이 빡대가리라고? 그럴 리는 죽어도 없다. 그러면 왜 이 새끼가 날 여기다 끌고 와서 서두도 없이 내게 부 지휘관 권한을 주겠다고 하는 건가?

 

‘...죽일 심산이야. 이 새끼. 내 행동을 감시하면서 가지고 놀다가 수틀리면 내 모가지를 비틀 심산이라고!’

 

 자고로 자신의 숙적은 더욱더 자기 곁에 두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그 녀석의 행동 하나하나에 목줄을 채워 아예 딴짓을 못 하도록 족쇄를 채워 두라는 거다.

 이 새끼, 처음에는 좀 멍청한 듯 굴더니. 그게 전부 이걸 위한 연기였다는 거야? 자기 나와바리에서 가만히 날 가지고 놀겠다고?

 

‘내가..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씨발!’

 

 허리 뒤로 숨긴 양손에 식은땀이 가득 베여 나오자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이 그 위를 스쳐 지나갔다. 찝찝하다. 지금 상황처럼 찝찝한 감각이 온몸을 뒤덮자 나는 최대한 빨리 저놈의 족쇄를 피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여..여기 있으면 안 돼. 아니, 저놈의 시야 안에 있으면 안 돼.’

 

 자고로 병사는 장교와 자주 봐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옷깃 한번 제대로 못 세웠다가 장교에게 걸리면 그날 하루 내내 중대장에게 욕이란 욕은 종류별로 쳐 먹고 휴가건 외박이건 다 짤린다.

 그런데 이런 아포칼립스 세계관에는 휴가라는 게 대체 있기는 한가? 이프리트는 맨날 전역 노래만 부르던데?

 

‘씨발..저 새끼 눈이 안 닿는 곳. 오르카 1호처럼 철충 걱정이 없는, 안전한 곳!’

 

 큰 대륙은 안 된다. 펙스의 레모네이드들이 내 존재를 아는 순간 곧장 그 지역을 초토화시킬 거다. 그리고 그 미친 오메가 앞으로 끌려갔다가는 난 몸만 쏙 뺏긴 채 늙은이들의 부활을 도울 촉매재가 될 것이다. 그것만큼은 싫다.

 그렇다면 섬, 섬 중에서도 오르카 1호의 세력권이 미치는 곳. 하지만 이 미친놈이 못 오는 그런 곳으로 가야 한다. 철충도, 펙스도 침범하기 힘든 곳으로. 

 

‘..후방! 후방으로 가야 해!’

 

 그것도 최후방, 자고로 장교들에게는 진급이 늦어지는 감옥과도 같은 배치지만 병사들에게는 한없이 여유로운 후방으로 가야 한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고 있으니 문득 내 머릿속에 파박! 하고 위의 조건에 다 부합하는 한 군데가 떠올랐다.

 

‘그래! 요..요안나 아일랜드. 분명 그런 곳이 있다고 했어!’

 

 라오챈에서 알바트로스 최강밈과 더불어 항상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장소. 오르카 1호의 최후방 지역.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한 곳. 요안나 아일랜드. 거기라면!

 

“각하! 아직 신분이 불분명한 이에게 너무 높은 자리를 주었다가는..”

 

“마리. 내 결심은 확고해. 그는 앞으로 내 곁에서..”

 

“사령과안니임!”

 

“-으헉!”

 

 열심히 반대 의견을 성토하는 불굴의 마리와 대치 중이던 사령관을 향해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곤 이전보다 더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애초부터 내 의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놈은 내가 갑자기 자길 부르자 깜짝 놀라고 있었다. 저 가증스러운 놈. 언제까지 어리숙한 가면을 쓰고 앉아 있을 거냐.

 

“-왜..왜 그래?”

 

“..무례한 남자네. 죽고 싶어?”

 

철컥!

 

 왼편에서 장교놈들이 들고 다니던 권총의 방아쇠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섰다가는 지금처럼 경고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진짜로 저 총에서 총성이 나오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그리고 꼴초뱀, 당신의 취향이라는 갭 모에라는 거. 나는 평생 이해 못 하겠다.

 

“-사령관님! 사령관님이 제게 주시려는 그 자리는!”

 

“어..응! 부 지휘관 말이지? 너무 걱정하지 마. 우선 알렉스트라랑..”

 

“제게! 너무 버겁습니다!”

 

“...응?”

 

 어딜 지금 내 자리를 굳히려 드느냐. 나는 죽어도 이 함에 남지 않겠다. 니 나와바리에서 나갈 거라고!

 

“저는! 후방에서! 사령관님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어? 후..후방?”

 

“예! 저는! 후방에서! 그것도 섬에서! 섬에서! 지내고 싶습니다!”

 

“...어어어?! 서..서어엄!?”

 

 제발! 제발! 저를 요안나 아일랜드로 보내주세요! 제발! 사령관! 이 개새끼야! 하렘같은 건 꿈도 안 꿀게요! 제발요!

 

15)

 

“그럼 먼저 숙소로 안내해줄게.”

 

“...사령관님도 같이..가십니까?”

 

“응! 가는 길에 함 구경도 시켜줄 겸!”

 

“...감스아..합니..다아.”

 

“뭘! 이 정도로! 그리고 우리 사이에는 말 놓아도 되는데! 어때?”

 

“...아직..그럴 생각까진..없..습니다.”

 

“편해지면 가볍게 놓아줘! 남자끼리잖아!”

 

“..예...이입..”

 

기-이잉!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작전 회의실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방금까지 원형 테이블 중앙에 서 있던 남성은 사령관의 손에 이끌려 마지 못 해하는 얼굴로 제 임시숙소로 떠났다.

 그러나 이 작전 지휘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그녀들에게는 본론이었다.

 

“...하아. 각하께서..너무 흥분하셨군.”

 

 좀 전까지 사령관과 설전을 벌이던 불굴의 마리는 테이블 위에 기대어 제 이마를 쥐어 잡았다. 그리고 그것은 철혈의 레오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령관이..이렇게 성급하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사령관이 저렇게 흥분하는 걸 본 것도 오랜만이군.”

 

“흥! 딱 예전 그 모습이네.”

 

 멸망의 메이의 입에서 예전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 자리에 있던 3명의 지휘관의 머릿속에 오르카 1호, 요리대회라는 문구가 동시에 떠올랐다.

 

“...그때처럼 정말, 철부지 같네.”

 

“음. 그때의 각하께서는 아직 성장하는 중이셨으니.”

 

“지금과 비교하면 한참 미숙했지.”

 

 불굴의 마리와 철혈의 레오나, 신속의 칸. 이렇게 세 명은 그때 자신들을 불러내어 병영 개선을 외치던 사령관의 모습을 떠올리곤 큭큭하고 낮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사령관은 그때와 다른, 그녀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성장을 보였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완벽해진 줄 알았던 사령관이 또다시 그때처럼 구니 이제는 귀여-

 

“그대들, 지금 웃을 때가 아닌 거 같다만.”

 

“..음. 그렇군.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지.”

 

 로열 아스널의 담담한 태클에 각 부대 지휘관들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사령관이 자릴 비운 사이, 한시바삐 이 폭풍을 잠재울 만한 대안을 내놓는 것. 그것이 그녀들이 아직 이 자리에 남아있는 이유였다.

 

삑-!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확인한 무적의 용이 원형 테이블 위를 가볍게 누르자 작은 비프음과 함께 아까까지 남성이 서 있던 테이블의 정중앙에 홀로그램 스크린이 떠올랐다.

 그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자신을 라붕이라고 밝힌 남성의 신체 검사표가 떠 있었다.

 

“우선 그 남자의 신체 정보요. 보다시피 극히 일반인에 가까운 골격과 근육량을 가지고 있소.”

 

“..음. 중장님. 제 사견을 내어도 되겠습니까?”

 

“좋소. 마리 소장.”

 

 오르카 1호에 뒤늦게 합류했지만 대규모 함대와 멸망 전의 전적으로 무적의 용의 직급은 중장. 그에 비해 불굴의 마리는 소장 계급이었다.

 

“닥터의 랩실 영상을 다시 한번 보길 권합니다.”

 

“..음. 확인 절차로군.”

 

삑-!

 

 불굴의 마리의 요청에 무적의 용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테이블 위 패널을 조작했다. 그러자 신체 검사표 위로 한 CCTV 영상이 올라왔다. 

 

-필! 승!

 

 영상 속의 남성은 침상 위에 상반신만 일으킨 채 랩실로 들어서는 사령관을 향해 각진 경례를 올렸다. 그리고 그걸 본 불굴의 마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다시 보아도 완벽하군요.”

 

“저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또 보는 거야?”

 

 그런 그녀의 모습이 거슬린 것인지, 멸망의 메이는 언제나처럼 틱틱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철혈의 레오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콧김을 내쉬었다.

 

“먼저 저 남자가 평범한 일반인은 아니라는 거지.”

 

“저거 하나로 그걸 유추할 수 있어?”

 

“메이 소장,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오.”

 

 무적의 용은 그렇게 말하고는 가만히 턱을 짚은 채 말을 이어갔다.

 

“제일 먼저 이 회의실로 들어섰을 때의 그 남성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소?”

 

“..바로 우리 앞에 와서 열중 쉬엇했지.”

 

“그렇소. 마치 자기 자리가 어디 있는지 아는 것마냥 굴었소.”

 

“그게 왜?”

 

“..적어도 제 분수는 아는 남자라는 거지. 사령관이 제 소개를 하자마자 곧바로 경례를 올린 것도 그 일환이라는 거야.”

 

 철혈의 레오나의 마무리에 멸망의 메이를 제외한 다른 지휘관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멸망의 메이는 시큰둥한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경례 하나 가지고..흥!”

 

“메이 소장의 둠 브링어는 우리 앵거 오브 호드처럼 제식에서는 가벼운 편이기에 이해가 가질 않겠군.”

 

 신속의 칸은 멸망의 메이의 찡그린 얼굴을 한번 보곤 곧장 무적의 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가 평범한 일반인이라는 가설, 재고가 필요해 보입니다만.”

 

“음. 확실히 저 제식동작은 일반인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같아선 저희 브라우니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이니.”

 

“어디 특수부대 출신이라던가, 그런 거 아냐? 이름도 특이하고. 마치 코드네임 같잖아.”

 

“하하! 내가 보기에는 특수부대 출신은 아닌 거 같네만!”

 

“호오. 로열 아스널 준장. 그 이유가 무엇이오?”

 

 관중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로열 아스널은 팔짱을 끼곤 왼 검지를 세워 보였다.

 

“제식동작은 훌륭하지만 닥터 중위가 보내준 신체 정보에 적힌 근육량은 한없이 일반인에 가깝고, 그리고 몸에 외관상 격한 훈련을 받은 흔적이 없으니 특수부대라는 건 너무 나간 거 아닌가?”

 

“하지만 지능적인 첩보요원일수도 있잖아.”

 

“첩보요원일수록 격투기를 단련해야지. 하다못해 기초체력이나 유연성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없군. 근육 유연성까지 기준치 미달이군.”

 

“..대체 정체가 뭐야? 그 남자.”

 

 머리가 아픈지 철혈의 레오나는 제 미간에 잡힌 주름을 쭉쭉 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물음에 로열 아스널은 어깨를 으쓱였다.

 

“혹 병사라고 생각이 들지 않나? 일반 사병이라면 제식 정도는 배울 테니.”

 

“..지금 멸망 이후 세계에서 일반 병사 하나가 어떻게든 철충들을 피해 여태껏 생존해있다가 죽기 직전에 전대장에게 발견되어 우리 함까지 왔다는 거야? 현실성이 있는 소리를 해.”

 

“아니면 말고. 하하하!”

 

 로열 아스널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철혈의 레오나와 멸망의 메이가 눈썹을 찌푸렸으나 다른 이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저 싱긋이 웃을 뿐이었다.

 

“우선 이 남자는 정말 일반인의 육체요. 보면 알겠지만 주군처럼 철충에 감염된 흔적도 없고, 고블린처럼 오리진 더스트가 흐른 흔적도 없소.”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래?”

 

“음. 그것까지는 소인도 모르겠소. 다만 제 이름을 라붕이라고 밝혔으니 그것부터 해석해보는 게 좋지 않겠소. 알파.”

 

“네. 중장님. 먼저 라붕이라는 명칭을 쓰는 국가는 검색되지 않습니다. 그런 호칭조차 검색되지 않고요. 멸망 전 인류가 사용했던 비밀 암호 코드까지 내려가 보았으나 비슷한 코드명조차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회의 시간 내내 케스토스 히마스로 라붕이의 정체를 유추하던 레모네이드 알파는 자신의 검색 결과를 무덤덤하게 읊어 내렸다. 그런 그녀의 말에 평정을 유지하던 무적의 용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오메가가 꾸민 계략이 아니라는 것, 확실하오? 혹 인간 남성의 육체 양산에 성공한 걸 수도 있잖소.”

 

“그건 불가능합니다. 중장님. 먼저 인간 남성의 육체를 배양한다고 하더라도 핵심이 되는 살아있는 인간의 정자와 휩노스 병을 피할 방도가 그녀들에겐 없습니다.”

 

“하긴. 김지석이라는 인간의 유적에 있던 생체 재건 장비는 우리가 아예 뜯어왔으니.”

 

“생전 삼안의 김지석은 음흉한 인물이었다고 하니, 다른 생체 재건 시설은 없을 겁니다. 자기만 살아남기 위해 준비한 물건이었겠죠.”

 

“...그럼 정말로 저 남자가 하늘에서 툭 떨어지기라도 했다는 거야?”

 

“하하하! 정말 구미가 당기는 남자가 아닌가!”

 

“...”

 

 저마다의 말을 내뱉던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눈썹 아래 그림자를 드리우며 홀로그램 위의 남성 신체표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정체도, 이름에서 유추해낼 수 있는 정보도.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를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한다 말인가?

 

“우선 이 남성..라붕이라는 이 남성을 처분하는 건 미루는 게 어떻소?”

 

“...불굴의 마리 소장. 중장님의 의견에 찬동합니다.”

 

“로열 아스널 준장! 찬성하지!”

 

“신속의 칸. 찬성.”

 

“..철혈의 레오나. 중립.”

 

“흥! 멸망의 메이. 중립이야.”

 

 “음. 찬성 4표에 중립이 2표. 그럼 먼저 이 남성을 우리 저항군에 남겨두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겠소. 하지만 정체나 성향을 유추할 때까지는 경계팀을 구성해 감시하는 쪽으로 진행하겠소.”

 

 무적의 용이 제 의견들을 규합하자 다른 지휘관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인간이 하나 늘어났다 한들 그녀들의 눈과 귀를 피해가진 못할 터. 그녀들의 정보원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었다.

 

“080기관에 연락해두겠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처우인데..”

 

“..우리 바보 사령관이 정말로 그를 부 지휘관에 임명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야 해.”

 

“음. 정말이지, 각하께서도 그렇게 성급하게 구실 필요까지야..”

 

 일전에 사령관이 내던진 폭탄이 다시 한번 도마 위에 오르자 지휘관들의 이마에는 아예 주름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바보, 계급에 대해 모르는 건 그렇다 쳐도 자리에 대해서 모르는 건 너무 한 거 아냐?”

 

“..계급이 높아도 자리가 시원치 않으면 괜찮다. 하지만 부 지휘관이라는 자리는..”

 

“하하하! 사령관도 너무 흥분했군. 어지간히 우리가 그를 해칠 거라 생각한 모양이야.”

 

“주군께 심려를 끼친 우리의 탓도 있지만 이건..”

 

 부 지휘관, 말이 좋아 ‘부’지. 사실상 사령관이 죽거나 다친다면 그가 모든 오르카 1호의 군권을 쥐게 만들 요지가 생기는 매우 위험한 자리.

 아마 사령관으로서는 당장에 지휘관들이 그에게 함부로 수를 쓰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내던진 폭탄이었을 터지만.

 

“라붕이라는 남성이 그걸 거절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어.”

 

 철혈의 레오나의 말에 모두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서 선뜻 내어주려는 자리의 가치를 알고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제 분수를 정확히 알고 있군요. 라붕이.”

 

“음. 나쁘지 않소. 확실히.”

 

“...후방으로 지원나가고 싶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신속의 칸의 물음에 철혈의 레오나는 고개를 좌우로 굴리며 제 생각을 내뱉었다.

 

“아마 본능적으로 회피한 게 아닐까 싶긴 한데. 솔직히 장담은 못 하겠어. 전직 군인이라면 냉큼 받아먹었을 자리인데. 정말 뭐지?”

 

“받아먹다 못해 곧장 사령관을 해칠 의도로 움직이려 했겠지. 그만 없으면 이 함뿐만 아니라 타 지역의 부대들까지 전부 자기 것일 테니.”

 

“오메가가 만든 클론이라면 분명 냉큼 받아먹었겠죠. 굳이 돌아서 갈 필요는 없었을 테니.”

 

“..흠.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그의 바램대로 후방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어떻소?”

 

 무적의 용이 마지막 주제를 내뱉자 철혈의 레오나가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서 주제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읊었다.

 

“후방도 후방인데. 과연 저 바보로 돌변한 사령관이 그 남잘 놓아줄까?”

 

“흥! 바보. 바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저 난리야.”

 

“너무 그러지 말게!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성이라서 풀 수 없는 문제도 있는 법.”

 

“음. 각하의 고뇌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저는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본인도 강력히 원한 것이니 각하께서도 강하게 밀어붙이지는 못할 겁니다.”

 

“사령관과 저 남자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서로 알아가는데 거리를 좀 두어야 할 것 같군. 내가 보기엔 사령관이 너무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걸로 보인다만.”

 

“나도 그 말에 동의하오. 신속의 칸 소장. 그러면 가장 문제는 어디로 보내는 것이냔데..”

 

 무적의 용이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그를 배치해둘 장소를 머릿속에서 물색하는 사이, 가만히 서 있던 레모네이드 알파가 그녀의 고뇌를 삽시간에 해결해주기 위해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중장님. 제게 딱 괜찮은 장소가 있는데. 들어보시겠어요?”

 

“음? 어디오? 말해보시구려.”

 

“저희의 세력이 가장 깊이 닿아있는 곳이자 세력 확장이 어렵고, 또 군사적으로도 힘을 쓰기 어려운 장소. 어떤가요? 감이 오시나요?”

 

“..정말 그런 곳이 있어?”

 

“물론이죠. 철혈의 레오나 소장님. 심지어 오늘 당장 지휘 개체 부족으로 인한 탄원서까지 올라온 곳인걸요? 명분도 확실하답니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알파가 쉽사리 지명을 말하지 않자 멸망의 메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성을 내었다. 그녀의 모습이 귀여웠던 것인지 알파는 샐쭉히 눈웃음을 지으며 제 입술 위로 검지를 올리며 그 장소를 밝혔다.

 

“..후훗. 심지어 근래 생산된 아르망 개체까지 있는 곳. 다름 아닌, 저희 세력의 최후방 기지. 요안나 아일랜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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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즐겁게 요안나 아일랜드로 튀는 라붕이와 그걸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사령관, 그리고 삼얀과 아르망.

어우 드디어 프롤로그가 끝이 보이네.


사령관이 너무 폐급인가? 아무렴 어때. 아싸 설정인데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