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 띠- 띠-

알람벨이 시끄럽게 울려 잠을 깨운다.


“으응.. 시끄러.. 오늘 사령관이 일 시킨다했단말야..”


웅얼거리면서 베게에 얼굴을 파묻다가 눈을 번뜩 뜬다.


“맞다! 지금 몇시야!”


헐레벌떡 몸을 일으키고 시계를 쳐다봤다.

금간 시계가 띠-띠- 하면서 울렸다.


“이게.. 왜 금이 가있지..?”


주변을 둘러보니 익숙한 방에 하얀 햇살이 들어온다.

커튼을 걷어보니 조각난 창문 한참 아래에 파도가 솨아- 하며 깨부서져가고 있다.

등대, 이 곳은 등대다.


“아하하.. 꿈이었구나..”


손으로 치마를 꽉 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다 헤진 치마가 구깃구깃 주름져버렸다.


“아냐! 예지몽이겠지!"


그래, 하찮은 꿈일리가 없어.

이렇게 생생한 꿈이 어딨어? 분명 오늘 밤 나를 찾으러 올거야!


기름칠을 안한지 오래된 문을 열자 끼이익 거리는 소음이 귀에 울린다.

긴 꿈이었다. 일지 적으러 내려가는 길이 아득할만큼.

그래도 행복한 미래를 보았다. 햇빛 하나 없이도, 등대지기가 없어도 눈부신 미래.

착한 인간님과 시끌벅쩍한 바이오로이드들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 것만 같다.


“오늘..밤은..”


때 탄 달력 밑으로, 벽을 타고 바닥에 닿을만큼 내려간 체크표시가 나를 비웃는다.

붉은색 브이표시가 꼭 날 보고 웃는 입 같이..


쿵!

비상용 도끼로 벽을 내리쳤다.

먼지와 함께 시멘트 파편이 여기저기 튀었다.

한참, 한참동안 벽을 내려치다보니 정신이 번뜩 들었다.


“허억..헉.. 아냐.. 아냐.. 그럴리가 없어..”


도끼를 바닥에 떨어트린다.

오늘 인간님이 나를 찾으러 올텐데,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드릴 순 없다.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쳐다본다.

푸석푸석하게 자라 아무렇게나 풀어진 파란 머리카락, 초점을 잃고 죽어가는 눈, 여기저기 찢어진 의상..


안된다. LRL은 지친 바다사람들을 이끌어줄 수 있도록 항상 밝아야한다. 이런 모습이면.. 사령관이 날 찾아도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안대를 쓴다.

항상 밝게, 웃는 얼굴로.

딱 반나절만..


“후후..드디어 왔는가? 짐은 유구의 세월을 기다렸도다!”


웃기 너무 어려워서 책에서 본 오글거리는 말들을 내뱉고 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거라면 누군가 날 찾았을 때 웃을 수 있다.

내 진짜 모습을 숨기고, 가면을 쓴 것처럼 연기할 수 있다.

의미 없는 웃음이라도 만족스럽다.


“짐은 할 일이 많도다.”


비틀비틀 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오니 부서진 벽이 눈에 띈다.

누군가 날 찾아도 안으로는 들여보내지 말아야겠네.


방금 해가 떴는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져간다.

터벅터벅 계단을 밝고 올라가 등대 꼭대기에 올라간다.

밤 하늘을 올려봤는데, 다행스럽게 별도 달도 하나 없이 검은 파도만 어렴풋이 부서진다.


“작렬하라! 사안이여!”


하하, 회사에서 이걸 봤다면 분명 날 폐기했을겠지?


안대를 걷자 눈에서 강한 빛이 뿜어져나온다.


옛날 인간들은 별을 보고 길을 찾아갔다는데, 나도 누군가에게 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달도 별도 안뜬 밤이니까 이 어둔 밤 속에서 내가 가장 밝은 별일 것이다.


그러니까 제발, 날 찾아줘.

난 더이상 웃을 수가 없어.


“이것도, 진조의 시련인가..”


현실은, 차가운 바닷바람보다 시리다.

너무 오랜시간 혼자 보내다보니 웃는 방법도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꿈에서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는데, 왜 못 웃는거야.


그렇다면 잠을 자면 웃을 수 있을까?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난 할 수 있다. 난 꼭 웃고 말거야.


파도가 거세게 부서진다.

바람이..세서..그런가보다..


* * * * * * * * * * * * * * * * * * * * * * * *


“콘스탄챠, 이건..”


“…….”


앞에 놓여진 처참한 모습에 콘스탄챠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희가.. 늦었네요 주인님. 죄송합니다.”


소녀의 눈은 아직도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콘스탄챠가 손바닥으로 눈을 쓸어내리며 눈을 감겨준다.

그제서야 한 낮의 별빛이 져물었다.


“복원 할 수 있겠어?”


“머리부터 떨어졌으면.. 일부 회로가 손상되어 이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기억은 손상되었으면 좋겠는데.”


“…….”


남자는 소녀의 잔해물을 소중히 감싸들었다.

소녀는 깊은 잠을 자고 있다.


“제가 들게요, 주인님.”


“아냐, 내가 들게. 돌아가자.”


* * * * * * * * * * * * * * * * * * * * * * * *


띠- 띠- 띠-

알람벨이 시끄럽게 울려 잠을 깨운다.


“으응.. 시끄러..”


웅얼거리며 베게에 얼굴을 파묻는다가 눈을 번뜩 뜬다.

귀에서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메아리친다.


나.. 살아있는건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보니 인간이 헐레벌떡 뛰어온다.


“LRL! 일어났구나!”


“어..? 뭐, 뭐야..?”


인간은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손을 잡는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이상한 인간이다. ‘나’는 다시 만들면 되는데.

꿈에서나 나올 법한 친절한 인간..

어쩌면 이번에도 꿈일지도 모른다. 깨어나면 지독히도 아픈 꿈..

그래도, 꿈이라도, 인간 앞이라면..


“후후.. 인간, 이몸과 함께하길 원하나? 그에 걸맞는 자격은 갖춘거겠지?”


인간은 잠깐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보다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온기다.


“당연하지. 잘 왔어, 오르카호에.”


*


“흠.. 그 애가 웃었다고?”


“응, 말투도 이상했어.”


닥터가 팔짱을 끼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패널을 킨다.


“자, 이것 봐봐 오빠. 오빠가 데려온 LRL의 내부인데 여기, 여기가 감정모듈이 있는 곳이야. 근데 보시다시피 감정모듈이 완전 녹았어. 가끔 큰 충격을 받은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생기는 현상이라 어쩔 수 없이 복원하지 못하고 제거했단말이야. 그런데 활짝 웃었다면.. 음.. 오빠가 잘 못 본 듯? ㅎㅎ”


“뭐?”


짖궂게 웃는 닥터가 다리를 꼬고 턱을 괴며 다시 말을 이어간다.


“농담이야 오빠. LRL의 말투가 특이하다 했지? 내 생각엔 ‘스마일마스크 증후군’인 것 같아.”


“뭐?”


“음.. 인간님들이 쓰던 용어인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마음 속으로는 울고 있는데 웃는 모습을 연기하는거지.

우리 LRL은 특이한 말투를 쓰면서 '밝은 LRL'을 연기하는게 아닐까 싶어. 뭐, 자세한건 한번 더 LRL의 머리를 열어서 조사해보는게 확실하겠지만..”


“그건 절대 안돼 닥터.”


“치.. 나도 그럴 생각까지는 없거든?”


“어쨌든 알겠어. 고마워 닥터, 고생했네.”


“그러면 오빠..흐흐”


닥터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천천히 넥타이를 푼다.


“나도 언니들처럼 상 줄거야?”


“당연하지. 항상 고생하는 닥터에겐 특별히 지금 당장..”


닥터의 하얗고 작은 얼굴을 손으로 살포시 집고 반대쪽 손으로 앵두같이 빨간 입술을 만지며..


“어? 뭐야 오빠?”


“닥터한테 주는 상. 호호, 난 가볼게~ 수고해~”


“이씨.. 오빠 진짜 치사해!! 두고봐!!”


닥터가 입에 넣어준 사탕을 아그작 씹는다.

유난히 사탕 부서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온다.


* * * * * * * * * * * * * * * * * * * * * * * *


“LRL!”


멍하니 복도를 걷자 누군가 와락 안았다.

어.. 그러니까..


“하치코..?”


하치코는 나를 꼬옥 안고 핥다가 나랑 눈을 마주치고 급하게 손을 뗐다.


“어.. 미안.. 하치코는 그냥 반가워서 그랬어.. 싫었다면 미안해..”


밝게 흔들리던 꼬리가 추욱 쳐졌다.

어.. 그러니까, 웃어줘야겠지..?


“크크, 짐은 만인을 이끄는 자인데 하치코를 싫어할리가 없잖은가.”


“진짜!? LRL이 다시 웃었어! 방금 너무 무서운 표정하고 있길래 하치코 깜짝 놀랐어!”


“짐의 연기의 깜짝 속았나보군~?”


하치코를 꼬옥 안고 한쪽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사고 쳤는지 머리를 땅에 박고있는 브라우니, 주정부리고 있는 워울프, 책을 거꾸로 집고 읽는척 하고 있는 토모랑 드라코. 


저건 뭐지? 로열아스널과 숨바꼭질 하고 있는 사령관?


이 소란스러운 꿈이 만약 꿈이 아니라면, 이 긴 꿈에서 깨지 않는다면..

어쩌면 진심으로.. 마음 놓고 웃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