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 뽀끄루와 봉봉 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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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의 도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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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유령들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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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 오르카 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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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플레이어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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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주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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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아닌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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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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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을 떠보니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정말로 기분 좋은, 낮잠을 부르는 바람이었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녹빛의 초원이었다.


  뭐지? 내가 왜 여기 있지?


  조금 멀리 언덕이 보였다. 언덕을 향해 걷자 낡은 신발 너머로 풀 밟는 느낌이 전해졌다.


  낡은 신발.


  그제야 몸을 내려다보았다. 옷이 엉망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낡아빠진, 잡아당기면 당장에라도 구멍이 날 것 같은 옷이었다.


  “오드리가 보면 참이나 좋아하겠군.”


  언덕은 생각보다 가까워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언덕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 멀리 작은 마을이 보였다.


  연기가 올라오는 굴뚝. 말이 끄는 마차. 낡은 거리. 마치 중세 유럽의 작은 시골 마을을 보는 듯하다.


  이게 뭐지? 내가 왜 여기 있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갑자기 머리 위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졌다. 눈을 찡그리며 간신히 하늘을 쳐다보니 빛을 내뿜는 구체가 보였다. 구체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더니 내 눈앞에 멈춰 섰다. 빛이 천천히 가늘어지고 그 속에서 작은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짜잔! 용사님의 파트너 요정 지니야에요! 사령관님은 마왕을 물리치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줄 용사로 선택받았답니다! 그런데 혹시 먹을 거 있나요?"


  빛 속에서 작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고 있는 손바닥만 한 지니야가 나타났다.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인지 의심될 정도로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하면서.


  여기가 어디인지, 지니야는 왜 작아졌는지, 용사는, 마왕은 무엇인지 어느 것 하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단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또 당했다.


  "닥터어어어어어어어어!!!!!"



  *

  분노에 차 닥터의 이름을 부르짖었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달라질 리가 없다. 애초에 닥터가 부른다고 튀어나올 거라면 지니야가 나왔을 리 없다.


  어쩔 수 없이 저 멀리 보이는 작은 마을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옆에서 지니야가 나를 향해 무어라 쫑알쫑알 말을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솔직히 듣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아까부터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단어 하나가 계속해서 내 귀를 헤집었다.


  "아이참! 듣고 계신 거예요, 용사님?"


  "그래, 그거."


  "네?"


  "그 용사라는 게 뭐야?"


  내가 드디어 자기의 말을 들어주었다는 것에 감격했는지 지니야가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꺅꺅거리며 오두방정을 떨던 지니야가 작게 헛기침을 한 후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가슴을 쭉 펴며 자랑스러운 듯 내게 말했다.


  "용사님은 용사님이에요! 무시무시한 마왕을 물리치기 위해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에요! 그리고 저는 용사님의 길잡이로 선택받은 요정 지니야랍니다!"


  "마왕?"


  순간 뽀끄루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 뽀끄루다. 이런 커다란 일의 흑막일 리 없다. 만약 그 녀석이 마왕이라면 아마 바지 마왕 쯤 될 것이다. 이름에 대마왕이 들어가는데도. 왜 이 녀석은 이미지가 이 모양이지?


  "나는 용사로 선택받았다고 했지. 너도 용사의 길잡이로 선택받았다고 했고. 누구의 선택을 받은 거지? 너와 나를 선택한 사람은 동일인물인가?"


  "네, 맞아요! 저와 용사님을 선택하신 분은 이 세계를 수호하는 위대한 여신, 아자젤 님이시랍니다!"


  "아자젤?"


  아자젤. 그녀도 이 일에 연관되어있나. 닥터가 용케도 설득했군.


  "곧 아자젤 님을 모시는 성국에서 사자... 사자? 사자가 올 거예요! 사자와 함께 수도로 가서 성국의 왕을 만나면 된답니다! 그런데 왜 사람이 아니라 사자가 오는 걸까요? 설마 수도까지 사자의 등에 타고 가는 건 아니겠죠?"


  "그 사자가 아닐 텐데."


  지니야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엄청난 현실감이다. 닥터의 가상현실은 몇 번 경험한 적이 있지만, 여태까지의 가상현실이 장난처럼 보일 정도로 엄청난 현실감을 자랑했다. 처음 닥터의 가상 현실을 보았을 때도 리앤의 가상 현실보다 수준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가상 현실은 격이 달랐다. 어찌나 현실 같은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느낌이었다.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던 지니야가 울상을 지으며 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직접 걷지 못할까."


  "아무것도 못 먹어서 힘들다구요 용사님. 먹을 것 좀 주시면 안 될까요?"


  "곧 마을에 도착하니 조금만 참아. 빵이라도 있겠지."


  "와아!"


  그렇게 터덜터덜 걷다 보니 어느새 마을에 도착했다. 그렇게 큰 마을도 아니다. 경비도 없이 작은 목책만이 서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저 멀리 탁한 녹빛 머리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소녀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오라버니!"


  "메리?"


  깡총깡총 뛰어 내 앞으로 달려온 메리가 나를 보며 활짝 웃더니 갑자기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감자?"


  "봄 감자가 맛있는 법이에요, 오라버니! 오라버니 집에는 이런 거 없죠?"


  대뜸 감자를 내밀며 말하는 메리가 귀엽지만, 그 전에 대사가 어처구니가 없어 무심코 딴지를 걸고 말았다.


  "너 컨셉 잘못 잡은 거 아니냐?"


  "으음... 그런가요? 용사를 짝사랑하는 여자아이라고 하면 츤데레라고 세이렌이 그랬는데요."


  "아니, 용사를 짝사랑하는 소녀는 결혼을 약속하고 떠나간 용사를 기다리는 소꿉친구 캐릭터지."


  "그치만 소꿉친구 캐릭터는 양보 못 한다고 그랬는걸요."


  "누가?"


  "리앤 언니가요."


  이상한 곳에서 양보 못 하는 녀석이다.


  "용사님! 저 감자 먹어도 돼요?"


  "어, 그래. 감자나 먹어라."


  머리 위에서 배고프다고 보채는 지니야에게 감자를 들려줬다. 지니야가 자기 머리만 한 감자를 희희낙락 받아들어 크게 베어 물었다. 지니야의 말을 들은 메리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용사라고요? 오라버니! 오라버니께서 용사로 선택받으셨군요!"


  "어이. 방금 니 입으로 용사를 짝사랑하는 소녀 어쩌고 하지 않았었냐?"


  "에이. 좋은 게 좋은 거죠. 잠시만요..."


  그렇게 말하며 웃은 메리가 슬쩍 뒤를 돌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아! 오라버니께서 용사라니... 오라버니가 마왕을 물리치고 돌아오실 때까지 매일 밤 기도하며 오라버니를 기다릴게요!"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메리가 뺨을 타고 흐르는 한줄기 눈물을 닦아냈다. 덴세츠 녀석들에게 연기 교육이라도 받고 온 것인지 비극의 히로인이 따로 없었다.


  손 뒤에 숨긴 인공눈물만 없었더라면.


  "어이. 인공눈물 다 보인다."


  "어머. 들켰나요?"


  손에 숨긴 인공눈물을 휙 던져버린 메리가 혀를 내밀며 웃었다. 그때 등 뒤에서 커다란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를 바라보자 저 멀리 휘황찬란한 마차 한 대와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갑옷의 무리가 보였다.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달려와 도열하며 길을 만들었고, 그 길을 따라 마차가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브라우니일 것이라는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었다. 아무래도 인공지능 프로그램, 게임이니 NPC라고 해야 하나? ...설마 모델링이 고블린은 아니겠지?


  천천히 속도를 줄이던 마차가 이윽고 내 앞에 멈춰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화려한 금발을 자랑하는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나타났다.


  "...샬럿?"


  "흠흠. 이런 시골에서도 저를 아는 사람이 있는 거군요. 조금은 부끄럽네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조금 부끄럽다는 듯이 작게 헛기침한 샬럿이 나를 보며 웃었다.


  "반갑습니다. 아르망 추기경 직속 성기사단 단장 샬럿이라고 합니다. 이 마을에서 용사가 나타날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용사 경을 모시러 왔습니다만..."


  샬럿이 흘깃 내 머리 위에 앉아있는 지니야를 바라보았다.


  "운이 좋군요. 이렇게 빨리 용사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용사 경. 부디 저희를 따라와 주실 수 있으실까요? 한시가 급한 일이라서 말이죠."


  그렇게 말한 샬럿이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압박했다. 반론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답지 않게 단호한 태도였다. 역시 덴세츠 사 배우. 평소의 나사 빠진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때, 누군가가 내 등을 밀었다. 뒤를 돌아보니 고개를 숙이고 나를 밀어내는 메리의 모습이 보였다.


  "오라버니를 기다릴게요. 오라버니께서 마왕을 물리치고 여기에 돌아올 그 날을 기다릴게요. 그때까지 저, 오라버니를 잊지 않을 테니까..."


  메리가 고개를 들어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라버니도... 저를 잊으시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기 잘하네. 연습 많이 했나 봐?"


  나의 말에 메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

  그렇게 나와 샬럿은 메리를 뒤로하고 호화로운 마차에 올라탔다. 멍하니 마차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나는 내 옆에 앉은 샬럿을 보며 말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옆자리가 아니라 서로 마주 보며 앉는 거 아닌가?"


  "흠흠. 기사이다 보니 말을 자주 타는 터라 마차에는 익숙지 않아서 말이죠. 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의 의자에 앉으면 느껴지는 미묘한 감각을 싫어한답니다. 게다가..."


  샬럿이 나를 보며 살짝 웃었다.


  "폐... 용사 경의 옆에 앉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라서요. 죄송하지만 좁더라도 조금 참아주세요."


  그렇게 말한 샬럿이 조용히 나의 어깨에 기대었다.


  이 녀석, 이런 때를 틈타 사심을 채우다니.


  "그래서, 이건 무슨 장난이지? 분명 나는 일을 마치고 자러 갔던 것 같은데. 이 말도 안 되는 꼴은 뭐야?"


  "음? 죄송하지만 용사님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용사님께서 용사로 선택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절대 장난이 아니에요. 용사님께서는 여신님의 선택을 받아 용사로 선택받은 것이랍니다. 아르망 추기경님의 예언이니 절대 틀릴 리 없죠. 농담을 하는 것이라면... 죄송해요. 저는 농담에는 밝지 못해서."


  샬럿이 나의 질문에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레 말을 돌렸다. 말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사정을 설명해줄 법한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연극 무대에 오른 덴세츠 배우의 자존심인 걸까. 메리라면 술술 말했을 테니 그 녀석에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일부러 그녀에게 쓸데없는 것을 묻지 못하게 서둘러 나타난 것인가.


  샬럿이 사건의 경위를 설명해 줄 생각이 없다고 해서 그저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다. 하다못해 이 촌극의 설정이라도 알아내야 한다.


  "용사로 선택받았다는 것은 마왕이라는 존재도 있는 것인가? 방금 봐서 어느 정도 알겠지만 나는 시골 사람이라 세상사에 약해서 말이야. 조금 설명해주지 않겠나?"


  나의 말에 샬럿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오셨군요, 폐하. 샬럿이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잠시 눈을 굴리며 고민하던 샬럿이 활짝 웃으며 나를 보았다. 이 정도라면 말해도 상관없겠죠.


  "음. 도착하면 추기경께서 설명해 주시겠지만, 미리 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용사님은 시골 사람이라 세상사에 어둡다고 하셨죠? 일단 기본적인 것부터 설명해볼까요.”


  의자 아래를 뒤적거린 샬럿이 커다란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내 들어 펼쳤다.


  "지도?"


  "용사님께 드릴게요. 앞으로의 여행에 필요할 테니까요."


  샬럿이 건네는 지도를 받아들자 순간 눈앞에 홀로그램이 튀어나왔다. 놀라는 기색을 숨기며 눈으로 홀로그램의 글씨를 쫓았다.


  [SYSTEM MESSAGE: 맵 시스템 오픈. 베사메시아 대륙 맵이 갱신되었습니다.]


  오호. 아무래도 지도는 단순한 아이템이 아니라 별도의 시스템 취급인 듯하다. 허나 지금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베사메시아라는 이 대륙의 전체 지도뿐, 세세한 곳의 지리는 알 수 없다. 아이템을 더 획득해야 하는 건가?


  "이 세계에 여러 종족이 있다는 것 정도는 용사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죠. 인족, 드워프, 수인, 엘프. 이 네 종족이 [인족]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보통은 저마다의 종족끼리 어울려 저마다의 공동체를 이룩하며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죠. 여러 종족이 어울려 사는 성국과 데가트가 특이한 편이라고 할까요.


  평화로웠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자잘한 다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란에 휩싸였다고 표현할 정도의 전쟁은 긴 역사 중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해요. 허나 그런 평화도 어느 날 나타난 마왕에 의해 짓밟혔어요."


  마왕. 드디어 듣고 싶었던 단어가 튀어나왔다.


  "혼돈의 권속을 이끌고 나타난 마왕은 날개 수인들의 거주지인 천공성을 점령했습니다. 오만한 마왕은 대륙을 내려다보며 세계 곳곳에 혼돈의 권속을 보냈죠. 지금 지상의 많은 나라가 마왕의 부하에게 고통받고 있어요”


  여신 아자젤을 믿는 대륙 최대의 국가, 성국 프로메시아.


  여러 소수민족과 떠돌이들이 모여 사는 사막의 나라, 데가트.


  흙의 민족, 드워프들의 땅, 브라시타.


  수인이 살아가는 야생의 숲, 비스티아.


  드넓은 바다에 위치한 해상의 왕국, 베니체.


  배타적이고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극동의 왕국, 센.


  숲과 함께 살아가는 자, 엘프의 나라, 이그드라실.


  북방의 대산맥, 그 산맥 아래 생명의 땅, 예쳬프.


  추락하지 않는 자들의 땅, 천공의 성, 라퓨타.


  “대륙에는 이렇게 총 9개의 왕국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성국 프로메시아는 여신님의 힘으로 보호받고 있지만 다른 나라들은 그렇지 못해요. 그래서 마왕의 부하들이 나라를 엉망으로 만드는 중이랍니다.”


  나라 이름 짜는데 고생 좀 했겠군.


  “어느 날 아르망 추기경께서 아자젤 여신님의 신탁을 받으셨어요. 자신의 힘이 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왕을 물리칠 빛을 내려줄 것이라는 신탁이었죠. 그것이 바로 용사님이시랍니다.”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낸 샬럿이 나를 보더니 불만인 듯 볼을 부풀렸다. 아무래도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다는 것을 들킨 모양이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대사를 외우는 것은 배우의 기본이랍니다. 설마 평소에 바보 같다고 대사도 외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그래서 그 마왕은 지금 뭐 하고 있는데?”


  정곡을 찔려 말을 돌리자 샬럿이 불만스럽다는 듯 나를 보더니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천공성 가장 높은 곳에 있다고 해요. 소문인지라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아, 저기 성이 보이네요.”


  샬럿의 말에 마차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성. 지평선처럼 멀리 보이는데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한 성이었다.


  “아직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성 아닌가요? 아자젤 여신의 신도 중에서는 저 성을 보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예요.”


  “그래. 아름다운 성이네.”


  중세 시대의 왕이 살 것 같은 화려한 성. 정말로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아름다운 성이다.


  “지나치게 아름다운데.”


  “뭐라고 하셨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지나치게 아름답다.


  완벽하게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닥터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를 겪어왔다. 여태까지 시달려온 세월이 얼마인데.


  그래서 그녀의 기호나 성향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닥터의 기호는 기믹 투성이, 성향은 극한의 실용성 추구다.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아이다. 화려한 장식 하나보다 쓸모없더라도 장치 하나 더 넣는 게 닥터라는 아이다.


  그러니 닥터가 만드는 성은 저렇게 화려하게 나올 수가 없다. 성이 가진 본 목적인 침략에 대비해 국민을 지키기 위한 튼튼 그 자체의 요새나 저게 성인가 싶은 괴상한 물건이 튀어나와야 한다.


  까놓고 말해 닥터는 저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을 만들 수 없다.


  어떻게 된 일일까. 눈살을 찌푸리고 상황을 파악하고 있자니 느닷없이 마차가 멈춰 섰다. 아직 성까지 거리는 한참 남았다.


  “잠깐 내리시죠.”


  “뭐야. 아직 성까지는 한참 남았잖아?”


  손목을 잡고 끌어내리는 샬럿에게 투덜거리며 마차 밖으로 나오니 수많은 사람이 보였다. 대부분은 병사들이었지만 병사들 사이에서 내 눈을 잡아끄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보련? 오드리?”


  “손... 용사님! 오늘 용사님을 꾸며드리게 된 보련이라고 해요~.”


  “어-머나. 좀 더 아름다워질 필요가 있겠군요. 제가~ 아름다움을 더해드리죠.”


  어처구니없다는 듯 샬럿을 돌아보자 샬럿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설마 정말로 그런 차림새로 추기경 예하를 만나려고 하신 건 아니시죠, 용사님?”


  정말 쓸데없는 일이다.



  *

  그렇게 보련과 오드리에게 한참을 드잡이질 당하고 나서야 다시 성으로 향할 수 있었다.


  마차가 시내를 지나자 수많은 인파가 우리를 반겼다. 마차 안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았지만 아는 얼굴이 나오지는 않았다. 전부 NPC인듯하다.


  NPC를 만들 수 있다. 그것도 전뇌 작업으로 만든 AI와 상당히 비슷한 수준의 행동이 가능한 NPC를. 그렇다는 건 굳이 이 게임에 바이오로이드를 참여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바이오로이드를 참여시켜 봐야 정보가 새어나갈 위험만 늘어나는 것일 테니. 보련과 오드리와 대화하며 슬쩍 떠보았지만 그녀들도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별 다른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도 어떤 정보가 나갈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바이오로이드를 참여시키는 것은 위험요소밖에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도 바이오로이드를 참여시켰다. 그렇다면 이 가상 현실에 무언가 큰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즐기기 위한 것. 내게 큰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다른 참여자에게 정보를 주지는 않지만 딱 거기까지. 딱히 행동을 강제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니 다들 여기가 가상 현실이라는 것을 거리낌없이 말하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이 가상 현실이 그저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닥터는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일을 가장 좋아하는, 오타쿠 끼가 다분한 닥터는 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마차가 거대한 성 앞에 멈춰 서고 살렷과 나는 마차를 나와 성 앞에 섰다.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보고 이 성은 절대로 닥터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드높은 계단을 오르자 성 아랫마을에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계단을 따라 병사들이 도열해 있고 커다란 나팔 소리가 우리를 반겼다.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서늘한 공기가 몸을 휘감았다. 드넓은 성 내를 샬럿을 따라 걷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려한 옥좌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옥좌 위, 갑옷을 입은 구릿빛 피부의 여인이 보였다. 요안나. 근엄한 표정으로, 정확히는 근엄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는 요안나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요안나 옆에는 붉은 옷의 소녀, 아르망이 보였다. 샬럿이 무릎을 꿇고 요안나를 향해 말했다.


  “추기경 직속 성기사단 홀리 퀘이사 단장 샬럿이 요안나 폐하를 뵙습니다.”


  “음. 용사 경을 무사히 모시고 돌아왔군. 수고했네. 이만 고개를 들어도 좋네.”


  그렇게 말한 요안나가 나를 보았다.


  “그대가 용사로군. 그대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네. 짐은 프레스터 요안나. 성국 프로메시아를 이끄는 자일세.”


  요안나가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요안나까지 나오다니 오르카 호를 총동원했구만. 그런 주제에 닥터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미안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네. 그대는 바로 마왕을 물리치러 떠나주었으면 좋겠군. 허나 강대한 마왕을 홀로 물리치라고 하는 것은 너무한 일이지. 그러니...”


  크흠. 요안나가 나를 보더니 헛기침을 하였다.


  “짐이 직접 가고 싶지만 짐이 없으면 이 나라가 돌아가지 않게 되어버리니 말이야. 그래서 그대를 도와줄 사람을 모았지. 들어오도록 하라.”


  요안나의 말에 등 뒤의 문이 열렸다. 뒤를 돌아보자 열린 문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탈란테


  팬텀


  티에치엔


  홍련


  마리아


  포티아


  생각지도 못한 조합에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무슨 조합이지? 애들이 무슨 연관성이 있나? 그때 머리에 불꽃이 튀었다. 나를 도와줄 사람, 용사를 도와줄 사람들.


  전사


  도적


  무투가


  궁수


  사제


  마법사


  이거 용사 파티다.


  뻣뻣한 목을 억지로 돌려 요안나를 돌아보았다. 한껏 당황한 나를 보며 요안나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와 용사를 도울 전사들이여! 그대들이야말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선택받은 빛이다!”


  요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뻗으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대들의 여정에 빛이 있기를! 그대들의 사명을 다 해 세상에 혼돈을 가져온 마왕 닥터를 물리치도록 하라!”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