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할아버지와 통화를 했는데, 갑자기 예전에 뵙고 오며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서 괴담챈에 썼던 글을 여기 다시 써봐.



우리 할아버지는 평생을 대구에서 사신 경상도 토박이셔. 말할 때 경북 사투리가 찐하게 묻어나는 건 기본이고, 성격도 80이 넘으신 지금도 털털한 상남자시지. 원체 겁도 없으신 분이신데, 이상하게도 밤에는 집앞 슈퍼 나가는 거나 쓰레기 버리는 것도 안하시려고 하셔. 나야 뭐 요새 범죄가 극심하니 안 나가시는구나? 싶었는데 할아버지께서 어제 술 드시다가 나한테 밤에 함부로 쏘다니지 말라고 하시길래 이유를 여쭤보니 이 썰을 푸셨어.


할아버지가 19살이던 1958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창 전후 복구기에 있던 시기는 일손이 많이 필요했지. 집안이 어려웠던 할아버지께서도 중학교까지만 마치시고 생계전선에 뛰어드셨어. 


그런데 이 일도 쉽지는 않더래. 지금 인력사무소에서 차 타고 와서 4명! 외치면 우르르 가서 타는 게 더 쉬울 정도로, 그 때는 일손이 필요한 곳도 많지만 전후 남는 일손도 많아서 이 일도 경쟁이 쎘대.


그러다가 운 좋으면 대구에서 하고, 일이 좀 안 풀리면 옆에 있는 구미, 김천, 더 멀리는 상주, 안동까지 가서 일했다는데 그 때는 차비도 없어서 그냥 걷는게 일이라고 하셨더라.


그 날은 일이 안 풀려서 구미까지 가셨대. 자재 나르고, 같이 일한 사람들이랑 한 잔 한 뒤에 대구까지 걸으셨대.

주변인들이 밤도 깊었고 하루 자고 새벽에 일어나 걸으라고 해도 괜찮다면서 그냥 가셨다는대, 할아버지께서는 그걸 물리친게 후회하신다고 하더라.


전후 경북 도로 상태가 어땠겠어? 비포장도로지. 흙이며 돌이며 울퉁불퉁하고, 길도 평지도 아니고 들쑥날쑥하니 지금이랑은 한참 달라. 


구미에서 대구까지 차로 20여분이면 족히 가고도 남을 거리니까 사람이 걸으면 몇시간 정도 되는 거리인데도 할아버지는 그냥 깡으로 가셨대.


그렇게 1시간인가 2시간인가 걸었을까, 할아버지는 이상하게 길이 안 보이는게 뭔가 묘했다고 하시더라. 손전등도 가로등도 없는 칠흑길을 오로지 시력에 의존해서 가는 중이었지만, 분명 왔던 길이랑 지금 가는 길이랑 느낌이 너무 달랐대. 촉이 달랐다고 하시더라.


산에서 짐승소리도 나고 하니까, 덜컥 겁이 나셔서 오늘은 어디서 자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셨지만 구미에서 대구 가는 길, 그것도 들길에 여관이 있겠어?


근데 있었대. 할아버지는 이게 웬 횡재냐 싶어서 1층에 들어가 주인장 있십니꺼? 하고 물은 뒤 인기척이 있자 돈을 내고 열쇠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 바닥에 이불을 깔고 주무셨대.


그렇게 곤히 자다보니 뭔가 춥더라고 하시더라. 이불을 끌어덮어도 으슬으슬 시려서 눈을 떠보니,

할아버지는 진흙탕에서 자고 있었다고 하시더라.


당황해서 일어나보니, 평지에 있는 진흙탕에 자기가 자고 있었고 다섯 걸음 아래에 돈이 떨어져 있었대.

하늘은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할아버지는 기분이 묘해서 급히 돈을 챙기고 발걸음을 재촉하셨대. 그리고 1시간 정도 걸어서 대구 어귀에 도착하시자 거기 목욕탕에서 씻고 아침 8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하셨대.


돌아가니 증조할머니가 외박을 하고 왔냐면서 혼을 내시다가, 할아버지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토째비에 홀린 거라며 혀를 차셨대.


토째비는 도깨비의 경상도 사투리인데, 할아버지가 홀려서 진흙탕에서 잔 거지.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그냥 술 드시고 길에서 주무신 이야기 아니냐고 하니까, 자기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평지에서 계단을 올라간 느낌이랑 이불을 덮은 느낌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 생생하다고 하시더라.


어쨌든 한 순간의 해프닝으로 넘어갈 뻔했으나, 할아버지는 쉰을 넘기셔서 다시 토째비에 홀린 적이 있다고 하시더라.


내가 그 이야기도 여쭤보니까 다음에 이야기하자면서 상을 치우셨는데,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가 쉰이면 적어도 1989~1992년 정도인데 그 때도 토째비가 있었다는게 더 신기하네.


지금도 토째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