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하신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생크림 추가한 카푸치노, 그리고 카라멜 마끼아또 나왔습니다"

"야 내가 몇번이나 말했잖아 우유 먹는다고 가슴 안 커진다고."

"닥쳐요 내가 먹고 싶어서 마시는거니까."


티격대는 워울프와 나이트앤젤 대신, 발키리는 아우로라에게서 쟁반을 받아 음료를 각자에게 전달해주었다. 발키리는 미리 준비했던 각설탕을 아메리카노에 넣었고, 카라멜 마키아또를 마시던 워울프는 텁텁한듯 입맛을 다시더니 발키리가 가져왔던 각설탕을 몇 개 집어서는 자신의 커피에 집어넣었다. 나이트앤젤을 빨대를 입에 문 채 스마트폰으로 인트라넷을 보고 있었다.


"근데 우리 고양이는 어딨지? 얘는 카톡을 아침에 보냈는데 아직도 안 보네."

"모르셨습니까? 페로양은 어제 당직이어서 오늘은 오침일텐데"

"어제 저녁에 당직실에 있는 페로양 한참이나 놀려 먹었던거 기억 안 나요?"

"아 걔 당직이어서 거기 있던거였어?"

"대단하십니다 아주..."


발키리와 나이트 앤젤, 그리고 워울프라는 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임의 시작은 지난 여름 워울프 산하의 비키니 해적단에서부터였다. 처음엔 단순히 워울프가 막무가내로 이들을 데려간 것에서 시작했지만, 지휘관들 바로 아래에서 수발을 드는 부관이라는 점에서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이들은 여름 이후에도 오르카톡에 단체방을 파 서로 친목을 도모하기로 했던 것이다. (워울프는 부관이 아니었지만 오르카 저항군 결성 때부터 굴렀던 짬 덕분에 나름 부관 비슷한 위치로 호드내에서 인정 받고 있었다) 아 물론 비키니 해적단이라는 명칭은 버렸다.


"하아~ 그나저나 되게 심심하네. 뭐 할거없나?"

"사격장은 어떻습니까?"

"너 사격 개못하잖아"

"100판 중에 99판 지고 이제 한판 이겼잖습니까."

"응 안해~아얏!"


워울프는 정강이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눈물을 찔끔 참으며 테이블 아래를 쳐다보았다. 그 곳엔 발키리가 신은 하이힐이 날을 세운채 까딱거리고 있었다. 워울프가 고개를 들어 발키리를 쳐다보자, 하이힐의 주인은 마치 자신가 안 그랬다는 것처럼 딴청을 피우며 커피를 홀짝였다.


"테니스는 어때?"

"우리 3명 밖에 없으니 한 명 끼워야하잖아요."

"주변에 아무나 끼워주면 되잖아?"

"저번에 베라 끼우고 시작했을때 기억 안 나요? 서브 한 번 못 받았다고 발키리양한테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를 하던지...우리보다 짬 낮은 애들은 뭘하든 불편해 한다고요."

"생각해보니 그랬군요."

"PC방이나 갈까?"

"지금 스틸라인에서 마리대장배 게임 대회를 열고 있어서 만석일겁니다."

"뭐? 게임 대회? 근데 왜 날 안 끼워주는건데!"

"그쪽은 스틸라인이 아니잖아요, 바보."

"좀 넓은 마음으로 다른 부대 참여도 하게 해주면 좋잖아. 하긴 마음이 넓지 않은 우리 천사양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계속 그렇게 나불대다간 쳐맞는 수가 있어요."

"수영장이 열린다고 하던데..."

"그거 청소하느라 다음주부터 열린다더군요."

"노래방이나 갈까."

"오전부터말입니까?"


그리고나서 한참동안 뭘할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셋은 마침내 정말로 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낸 뒤, 한동안 말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워울프가 남아있던 커피를 모조리 원샷하고 잔을 테이블에 쾅하고 내리치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나머지 둘에게 물었다.


"야. 우리 고양이 방 쳐들어갈까?"

"지금 오침 중인데 쳐들어가는건..."

"지금 오침 중일텐데..."


나머지 둘은 페로를 생각해 안된다고 하려했다. 하지만 일단 재밌는 일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여태까지 다른 부대들의 생활관에 들어가는 것은 금기로 취급되었던터라 다른 부대원의 방에 한번도 들어가지 못했던 점이 이 둘에게도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부대원의 출입을 금하는 법은 없었으나 부관급이나 엘리트급, 혹은 짬이 많은 부대원의 경우 자신의 독방에 타인이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금기로 취급되었다. 물론 불법침입은 당연히 범죄라서 시티가드에게 흠씬 두들겨 맞겠지만, 뭐 어떤가.


"...그러고보니 아무리 오침 중이라도 아침엔 일어나는게 도리에 맞는것 같습니다."

"일리가 있네요. 생각해보니 이거 완전 근무태만이네요. 페로양도 이제 짬타이거 됐다고 해가 중천인데 쳐자기나하고...우리가 버릇을 고쳐줘야겠어요."

"오케이 가보자고. 페로라면 뭔가 재밌는 아이디어가 있겠지."


그렇게 셋은 카페테리아를 나와 당당하게 짬타이거의 둥지로 향했다.


***


"오늘 컴패니언 생활관에 리리스씨 없는거...확실하죠?"

"확실합니다. 페로 말고 다른 분들은 근무를 나가셔서 페로양만 자기 방에서 자고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기선제압이다! 하앗! 꼼짝말고 손들엇!"

"아무도 없는데 기선제압을 왜...어라?"


컴패니언의 방을 박차고 들어간 셋은 생활관 안에 있는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는 포이와 눈이 마주쳤다. 포이는 통이 큰 티셔츠를 입고 가슴 아래를 벅벅 긁으면서 TV에서 틀어주는 스카이나이츠 아이돌 무대의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포이는 마치 알고있었다는 양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문을 박차고 들어온 셋을 흥미롭다는듯 보고 있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오늘 컴패니언은 페로 빼고 다 근무 중이라면서요 발키리!"

"그럴리가 없는데..."

"오늘 전투 시뮬레이션이 아침 일찍 끝나서 오늘 포이가 할 일이 일찍 끝나서요...근데 이렇게 막 들어오시면 안되죠. 리리스 언니에게 일..."

"잠깐! 진정해! 우린 컴패니언 생활관에 마음대로 들어오려던게 아니라 페로 방에 마음대로 들어가려했던거라고!"

"죄송한데 전혀 도움이 안되니까 닥치시죠 워울프."

"나이트앤젤 양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항~ 페로 언니 친구시구나~"


포이는 소파에서 일어나서는 쭈욱 기지개를 켰다. 포이의 가슴 때문에 셔츠가 위로 올라가면서 그녀의 거대한 밑가슴이 드러나자 나이트앤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물론 다른 둘도 포이의 가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포이는 말려 올라간 자신의 셔츠를 다시 내리고는 말했다.


"흐음~ 마침 페로 언니가 자기 당직 끝나고 와서 오침이라 피곤하니까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거든요. 하지만..."

"하지만?"


포이는 굳게 닫혀있는 페로의 방문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하지만 포이는 TV를 보는게 질려서요. 포이는 이제 방으로 들어가서 쉬어야할것 같아요."


그러고서 포이는 하품을 쭉 하더니, 자신의 방 문을 열고 그대로 들어가버리는 것이었다.


"...우리 고양이도 참 피곤하겠네."

"그래도 말이 통하시는 분이군요."

"저게요?"

"아니 근데 가슴 진짜 크네. 완전 수박통이야 수박통...저 정도면 세레스티아보다 크겠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모든 컴패니언은 블랙 리리스님의 후계기라고 들었는데, 저 정도까지 차이가 나는건 도대체... "

"돌연변이 같은거 아닐까."

"바이오로이드가 말입니까?"

"그놈의 가슴통 가슴통 진짜!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하지들 그만하시고 들어들가시죠."

"시끄러워 돌연변이."

"죽인다..."


어쨌든 삼인방은 페로의 방문 손잡이를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열고는 불을 켰다. 방은 페로의 취향 답게 고양이 무늬가 들어간 온갖 장식품이 가득했고 벽은 고양이 문양이 새겨진 분홍색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다. 벽에 붙어 있는 침대에서 분홍색 이불을 덮은 페로는 귀마개와 안대를 한 채 조용히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평소 깐깐한 성격을 고스란히 반영한듯 화장대에는 모든 화장품들이 뚜껑이 얌전히 닫힌채 정리 되어 있었고 거울에도 먼지 하나 묻어있지않았다. 방에 들어가도 페로가 깨지 않자 심심해진 워울프와 나이트앤젤은 페로의 방을 제멋대로 뒤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말리려던 발키리도 분위기에 못 이겨 페로의 방 이곳 저것을 기웃거렸다.


"오 대박"

"뭔데요?"


워울프가 페로 침대 밑에서 꺼낸 핑크핑크한 상자 속에는 야한책...이 아닌, 예쁜 공주님들이 나오는 멸망전의 순정만화가 가득했다. 페로가 꼼꼼하게 읽었는지 만화책 페이지마다 손때가 묻어있거나 해진 자국이 있었다. 순정만화 특유의 그림체로 과장되게 그려진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을 보면서 삼인방은 키득거렸다.


"와 우리 고양이 취향이 이랬는지 몰랐는걸? 사령관님한테도 갖다드려야하나."

"베라나 님프가 읽으면 좋아하겠군요. 아니...저도 계속 보니까 괜찮은것 같기도..."


그렇게 셋은 자고 있는 페로의 방 안에서 뒤굴거리면서 만화책을 탐독했다. 워울프는 낄낄대면서 오글거리는 대사를 우스꽝스럽게 읊으면서 나머지 둘을 빵터지게 만들었고, 왜 '공주님 안기 자세' 같은게 만화책 속에서 자주 나오는지 궁금해하면서 스마트폰으로 관련 검색어를 찾아보기도 하면서 오전을 태웠다. 그 와중에도 페로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정오가 다가오자 세 명은 조금 허기를 느꼈다.


"배고프네...혹시 페로양이 뭐 숨겨둔건 없을까요?"

"글쎄? 어디보자..."


워울프는 페로의 방 안에 놓여진 조그마한 냉장고 문을 열어 안을 살펴보았다. 냉장고 안의 물건들도 그녀의 성격을 반영한 듯 반찬통과 음료수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참치캔이랑...김치랑..."

"여기 컵라면도 조금 있습니다. 마침 나무젓가락도 있네요."

"좋아. 어차피 나가기도 귀찮으니 오늘 점심은 여기서 때울까."


그리고 세명은 페로가 순정만화를 숨겨둔 상자 위에 컵라면을 두고 커피포트에 끓인 물을 부은 다음 기다렸다. 


"아니 근데 이 와중에도 잘도 자네. 어제 무슨 일 있었나?"

"영상 못 봤어요? 했잖아요 어제."

"그, 그랬군요..."


얼굴이 벌개지면서 배시시 웃는 발키리를 워울프는 짖궃은 표정을 지으면서 팔꿈치로 툭툭 건드렸다. 나이트앤젤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벌개졌지만, 발키리와는 다르게 웃지 못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발키리는 열 번도 넘게 해봤으면서 늘 이런 이야기를 할때마다 얼굴이 빨개지네. 솔직히 이 방에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많이 하지 않았어? 시기도 나랑 대략 비슷한 때에 했던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른 분들하고 맨정신으로 대놓고 이야기하기는 좀..."

"복에 겨운줄 아시죠. 누구는 아다대장 때문에 하고 싶어도 눈치 보여서 못하는데."

"천사양도 이상해. 그냥 술 한 병 같이 마신 다음에 시원하게 한번 해버리고 혼나면 되잖아?"

"하아...전 그 쪽과 달리 모든걸 내려놓지 못하는 처지라서요."

"한 번 해보면 진짜 모든걸 내려놓고서라도 또 하고 싶어질걸?"

"그리고...이쪽을 보면 상사보다 먼저하는게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닌것 같아서요."

"어흠, 흠. 그건 그런가."

"라, 라면 다 익은 것 같으니 드시죠."


갑자기 자신을 두고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참지 못한 발키리가 내뱉은 말에 셋은 라면 뚜껑을 열고 라면을 흡입했다. 시큼한 김치와 참치캔을 반찬으로 곁들여 먹으면서 나는 소리와 냄새가 방안에 가득 찼고, 그 때문인지 페로는 참지 못하고 천천히 잠에서 깼다. 처음에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페로는 멍한 얼굴로 자신의 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왜 톡방 멤버 세 명이 내 방에 와있지? 그리고 왜 내 만화책들을 보면서 내가 숨겨둔 컵라면들을 먹고 있지? 왜 내가 아껴둔 고양이용 참치캔을 먹고 있지? 꿈인가? 그렇게 생각하다가 코에 스치는 강렬한 김치 냄새와 매콤한 컵라면 냄새를 맡고 상황을 파악한 페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하시는겁니까아앗!!!"

"에헤이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지금 소리 안나게 생겼습니까! 남의 방에 와서 이게 뭐하시는겁니까! 그것도 자고 있는 와중에!"

"오침 중인 사람을 깨울순 없잖아요."

"천사양의 말이 맞아. 오침 중인 사람은 깨우지 않는게 원칙이라고."

"그리고 저희가 밖에서 컵라면을 먹었으면 컴패니언 생활관에 컵라면 냄새가 진동을 했을겁니다. 어쩔 수 없이 컵라면을 확보한 이 곳에서 먹는게 최선..."

"다들 나가아아앗!!!"


2화 https://arca.live/b/lastorigin/28915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