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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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요안나 아일랜드, 오르카 저항군의 최후방에 배치된 보급기지 겸 요충지로 작지 않은 규모를 지닌 섬의 크기만큼이나, 그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산이 있으며 아래에는 다양한 생산설비들과 항만 설비들이 설치되어 보급기지라는 이름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나가는 이곳.

 

깡! 깡!

 

“노움아! 여기 돌덩이 이거 너무 크다!”

 

“예! 대장님! 잠깐만요!”

 

 넓은 땅의 크기 탓일까, 섬의 40%는 설비들로 개척이 끝났다지만 아직 섬의 중앙에 위치한 산 위에 길을 내는 일부터, 또 병사들의 휴양지로 써야 할 백사장의 리조트 건물까지. 사람의 손이 닿아야 하는 곳은 이 섬에 한둘이 아니었다.

 

“어휴. 땅 고르기 힘드네.”

 

“헤헤. 잠깐만요. 흐-읏!”

 

“오! 오! 들린다! 들린다!”

 

 그렇기에 손이 필요하다. 그러한 이유로 각 전선에서 보내오는 파견 인원들, 그녀들은 생산 인원들과 달리 계급이 있으며, 전투 모듈이 있었다. 따라서 섬의 방위와 손이 필요한 곳에 배치되어야 했으나, 오히려 지휘 체계가 없다는 점에 착안해 아예 이곳으로 휴가를 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이프리트! 여기 이거, 수로 이렇게 깔면 되냐?”

 

“..거기 너무 멀리 가지 않았어? 대장.”

 

“그런가? 그럼 이쯤에서 꺾자.”

 

“하아..”

 

 파견 인원들은 자신들처럼 전선에 나가 싸우지 못하는 생산인원들의 충고를 무시했다. 그리고 그런 풍조를 막아야 할 상관이 없으니 병사들은 암암리에 이곳을 자신들의 휴양지로 써먹고 있으니, 섬의 개발현황에 진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세상에 어느 대장이 야삽 들고 작업을 해?”

 

“여기. 여기 있네.”

 

“..대장. 솔직히 말 해봐. 장성이 아니라 병사지?”

 

“..너무 나에 대해 알려고 하지 마. 알면 다쳐.”

 

“히힛. 뭐래.”

 

 그런 개판 오분전의 장소에, 나는 총책임자로 임명을 ‘당했다’. 원해서 온 게 아니냐고? 보내 달라고 했지. 대장이라는 자리까지 달라고 조른 적 없다. 젠장.

 

캉!

 

“여기도 돌이에요!”

 

푹-!

 

“허억! 허억!”

 

 해가 중천에 다다를 즈음의 시간대, 피부 살갗을 찔러대는 자외선을 막아주는 우거진 녹음의 그늘의 아래서 나는 들고 있던 야삽에 몸을 기댄 채 여기저기 산길을 골고루 펴고 있는 여성들을 향해 목청을 올렸다.

 

“애들아! 조금 쉬었다 하자!”

 

“-야호! 쉬는 시간임다!”

 

“하아아..힘들어. 지하가 아니라 육지라는 건 좋은데 여기보다 공장이 낫겠어.”

 

 내 목소리에 야전삽을 들고 있던 이들도, 곡괭이를 들고 있던 이들도 저마다의 장비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모래 먼지와 함께 흙바닥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국방티를 입은 브라우니들과 위에 헐렁한 멜빵 바지를 걸친 더치걸들, 그리고 그녀들의 곁에서 시원한 아이스팩을 챙겨주는 노움과 레프리콘들.

 그녀들 모두, 내 휘하 소속의 부품 생산인원들이다. 그런 그녀들을 데리고 왜 여기서 삽질이나 하고 있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파견 나온 놈들이 안 하니 우리 애들이랑 놀 겸해서 왔다.

 

“나도 좀 쉴까.”

 

 오리진 더스트의 일시적인 영향으로 체력이 평소보다 오른 탓인지, 나는 그녀들보다 여유로운 얼굴로 숲 쪽을 향해 엉덩이를 앉혔다. 그런 내 옆으로 방금 말을 걸어온 이프리트가 풀썩-!하는 소리를 내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어우. 씨. 어후-!”

 

 내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위를 손사래를 치고 있자니, 요 맹랑한 꼬맹이는 그걸 보고 킥킥 웃고 앉아있다.

 

“히히. 세상에 어느 대장이 야삽을 그렇게 잘 써?”

 

“..너무 알려고 하지 마. 내 정보는 080기관만 알아.”

 

“헤헷. 난 대충 보니까 견적이 팍 나는데.”

 

“이거이거. 안 되겠구만 기래. 동무는 아오지로 보내야 갓서.”

 

“헤헤헷!”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밝아진 이프리트의 모습에 나는 코웃음을 치며 눈앞을 가득 메운 수풀 사이를 응시했다. 목에 걸린 수건을 들어 이마와 뺨에 흥건한 땀을 닦아내며 이 우거진 수풀 사이로도 환하게 빛나는 해수면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이 한층 쾌청해지는 것을 느꼈다.

 음, 숲 냄새가 이렇게나 좋은 거였나. 콧구멍으로 녹음의 향을 만끽하고 있으니, 그 분위기에 산통을 깨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치-익!

 

“...어이. 이프리트.”

 

“후우-왜?”

 

“이 좋은 공기를 왜 일부러 썩히냐?”

 

“쉬는데 담배도 못 펴? 대장?”

 

 능청맞은 웃음을 지으며 제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인 담배를 들었다 놨다하는 소녀를 보고 있으니 왠지 그 양반이 위에 겹쳐 보였다. 그 양반, 내가 여기서 이렇게 야삽질하고 있는 걸 알면 깔깔 웃어댈 테지.

 

“펴라. 펴. 그래. 내가 무슨 장성이냐?”

 

“응응. 암만 봐도 장성은 아니야. 사령관님처럼 상냥함도 없고 위엄도 없고.”

 

“..거기까지 격하할 필요가 있어?”

 

“사실인데. 뭘. 파견 애들 앞에서만 엄중한 척하잖아.”

 

 이프리트의 입에서 파견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나는 급격하게 몰려오는 스트레스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 자식들, 4일이라는 시간 동안 그 녀석들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눈앞이 아찔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프리트는 담배를 입에 물곤 내게 그 녀석들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늘어놓았다.

 

“대장이 검문소를 설치한 덕분에 중간에 삥땅 치는 놈들은 줄었는데 가라치는 건 어떻게 하려고?”

 

“..씨발. 나도 그게 제일 문제다.”

 

“가라도 정도껏 쳐야지. 대장이 이렇게 야삽들고 일하는데 걔들은 어쩔 건데?”

 

“초소만 가면 마치 자기들은 근무 열심히 하고 있었어요. 식으로 쭈뻣쭈뻣 서 있는데 솔직히 현장을 덮쳐야 뭐라고 말이나 하지. 이놈의 뇌파 때문에 뭐 하질 못 해요.”

 

“뇌파가 터지는 걸 이제 아네?”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 너 나 생산시설에 왔던 거 알고 있었지?”

 

“응. 대장이 2분 넘게 빼-꼼히 머리만 내밀고 우리 구경하는 거 다 알고 있었지.”

 

“...허.”

 

 이놈이나 그 녀석들이나, 다 날 호구로 보고 있었네. 그런 괘씸한 생각에 담배를 문 이프리트를 노려보고 있자니 이 녀석은 소악마스러운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해명을 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인간의 위치가 어쩌다 여기까지 추락했나,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야삽으로 흙바닥을 툭툭 내리치며 일전의 삽질은 기억의 저편으로 치워두고 오늘 당장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디보자..검문소 확인하고, 비축물자 수량 확인하고. 당장에 오늘 오는 수송함대 애들한테..”

 

“아. 대장. 그런데 그 언니들은 대장이 사령관님한테 부탁한 거야?”

 

“...”

 

 애써 제쳐두려던 녀석들을 이 꼬맹이가 굳이 화두로 내던지자 삽을 쥐던 손에 힘이 쭉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내 행동의 변화를 눈치채었는지 이프리트는 여태까지의 노곤한 목소리 대신 후임을 괴롭히는 선임처럼 목소리 톤을 올려 가며 계속해서 그녀들에 대한 질문을 내게 내던졌다.

 

“그 무서운 언니가 검문소에 서 있는 덕분에 우리 쪽 보급계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킥킥.”

 

“...음.”

 

 이건 그녀의 말이 옳다. 간이로나마 비축창고 앞에 설치한 검문소에는 그녀가 있다. 하루에도 수십 대의 차량이 왔다갔다하는 그 창고 앞에 떡하니 선 채, 들어오는 컨테이너 물자들을 일일이 그녀가 확인해주는 덕분에 내가 처음 왔던 날처럼 중간에 대놓고 빼돌리는 녀석들이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다.

 

“영양 쪽 애들은 언니 한 명 늘었다고 좋아하는 레벨이 아니던데? 어제도 알비스들이 몰래 초콜릿 가공공장에 들어갔다가..”

 

“알아. 들어서.”

 

“헤헤. 덕분에 여기가 살만해졌어. 대장.”

 

“..잘..되긴 했는데..”

 

 처음 보았을 때처럼 죽은 눈이 아닌 생기가 도는 푸른 눈을 빛내는 이프리트의 모습에 내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내 눈은 초점을 잡지 못한 채 사방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대장? 무슨 일이야?”

 

“...아니..그게 말이다.”

 

 어깨에서 일어나는 경련이 쉽사리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분명 하늘에서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는데, 몸에서는 열보다는 한기가 솟아올랐다. 내가 날 보아도 명백히 이상한 행동, 그런 내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는 이프리트에게 나는 아주 담담하게, 천천히 내 상상력을 총 동원한 이야기를 읊어 내리기 시작했다.

 

“이프리트, 이건 전부 내 상상이다. 들어봐라.”

 

“응? 뭔데?”

 

“..만약에 샤워를 하고 있는데 그..수증기가 나가야 하는 환풍구에서 누군가의 콧김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면..어..”

 

“..대장. 그거..”

 

“그..그리고 말인데. 만약..하루 업무를 정리하려고..책상 위에 서류들을 보고 있는데 창밖에서 누군가의 시선이..느껴진다거나..”

 

“대장 방은 4층인데?”

 

“...아침에 일어났더니 침대 간이 테이블이 나도 모르게 펼쳐져 있고 그 앞에 밥이..”

 

“...대장. 그거 불법 침입이야.”

 

“내..방은 전자식이라 카드키 없으면 못 들어와..”

 

“...”

 

 그래. 이건 전부 내 상상이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좁디좁은 환풍구를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며 내 샤워시간마다 물소리마저 씹어 삼키는 ‘하으읏!’하는 괴상한 신음이 천장에서 들린다거나, 책상에 서류를 정리하고 있으니 창문 쪽에서 ‘주인님’이라고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거나, 분명 나만 가지고 있는 내 방 카드키가 무쓸모로 느껴질 정도로 쉽게 문을 소리소문없이 부수고 들어와 내 앞에 누군가가 아침 밥상을 차려놓고 떠난다거나.

 

 하참, 여기 오고 나서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긴 했나 봐. 이런 개꿈도, 망상도 다 하고! 분명 기가 약해져서 그런가 보다. 나는 그렇게 지레짐작 결론을 내리곤 바들바들거리는 뺨 위에 억지로 보조개를 그리며 썩은 사과를 씹어먹은 것 같은 이프리트에게 미소를 보냈다. 웃어. 야. 웃으라고.

 

“...전부 내 이상한 상상이겠지? 이프리트? 하하하하!”

 

“...대장. 우선 그 덜덜 떨리는 삽부터 내려놓고 이야기하자.”

 

“하하하하! 떠..떨긴! 누가! 나 대장이야! 어!”

 

“...”

 

 왜 그렇게 날 안쓰러운 눈으로 보냐. 이프리트. 나 괜찮아. 아직..아직은 괜찮아. 꿈에나 그리던 그녀들이 모두 내 곁으로 모였는데 내가 이렇게 덜덜 떨 리가 없잖아. 안 그래?

 

“그..아르망 언니한테 이야기해봤어?”

 

“...이상하게 넷이 모여서 무언가 이야기하는 장면은 봤는데. 내가 다가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방으로 흩어져.”

 

“죄다..공범 같다고 생각이 드는 건 내 착각일까?”

 

“...아니야. 아르망마저 그럴 리가 없..”

 

 최악의 상황을 무심하게 내뱉는 이프리트에게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그것을 부정하려 들 때쯤, 산길 아래서 부-우웅! 하는 차소리가 들려와 나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기 위해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기대에 부응하듯이 산길 아래턱에서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올라오는 포티아의 웃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새참 왔어요! 모두 드시고 하세요!”

 

“오. 새참이란다. 이프리트.”

 

“..노리는 건 같이 딸려온 막걸리 아니야? 대장?”

 

“야야. 난 저거 먹고 이제 부둣가 가야 해. 얼른 가자. 얼른.”

 

“대장이 부둣가래. 히히힛.”

 

 담배꽁초를 흙바닥 위에 문지르며 성큼성큼 군홧발을 놀리며 내려오는 이프리트, 앉아서 쉬다 밥소리에 후다닥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브라우니들과 더치걸들, 그리고 그런 동료들을 보며 싱긋이 미소짓는 노움과 레프리콘까지.

 

‘이게 제대로 된 군 생활이지. 암암.’

 

 비로소 제 모습을 찾아가는 눈앞의 광경에 나 역시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근데 왜 나 이 세상까지 와서 군생활을 찾고 있냐. 에휴. 내 신세야. 내 팔자야.

 

44)

 

치-익!

 

 뜨거운 불판 위에 고기를 한 점 올리자 잘게 잘린 새빨간 생고기와 뜨겁게 달구어진 철판 사이에서 생고기에 묻은 핏물이 강렬한 기화 반응을 일으키며 후각과 미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새하얀 연기를 뭉게뭉게 피어올렸다.

 

“..꿀꺽.”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탓일까, 아니면 눈앞의 배식대에 대한 기대인 탓일까. 요안나 아일랜드의 취사장 앞, 그곳에는 저마다 식판을 가슴께에 꼭 쥔 여성들이 하나둘 발을 동동 굴리며 닫혀있는 배식 창구가 열리기만을 침만 꿀꺽 삼켜가며 서 있었다.

 

“오..오늘 식단은 뭘까요? 이뱀?”

 

“뭐가 되었든 제발 문 좀 열려라. 제발.”

 

“야. 샌드걸. 애들 몇 시부터 와 있었냐? 내가 20분은 일찍 온 거 같은데.”

 

“음. 잘 모르겠네요. 당신이 담배 태우러 간 탓에 저도 늦게 먹게 생겼잖습니까? 워울프.”

 

“씨이. 근처 초소 애들 다 온 거 아냐? 이 정도면?”

 

 이전까지 배식이 마음에 드니 안 드니 하던 그녀들은, 이제는 언제 식사시간이 될지 안 될지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매번 마음에 들지 않던 요안나 아일랜드 밥맛이, 근 이틀간 몰라보게 바뀌게 된 것이다.

 

드-르륵!

 

“..와..왔다!”

 

“밥..밥 시간임다!”

 

“여러분! 정량만 받아가세요!”

 

 배식 창구가 열리는 순간,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성들은 재빨리 걸음을 놀려 배식창구를 열어 재낀 포티아의 앞에서 멈추곤 제 식판을 그녀 앞에 쭉 내밀었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포티아와 아우로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까다로운 새 쉐프가 일일이 확인한 쌀밥과 반찬들을 그녀들 식판 위에 정확한 한 국자, 한 주걱씩 올려주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제 식판 위에 올라온 반찬량을 본 브라우니가 주책맞은 입을 열었다.

 

“에엑?! 이걸 먹고 어떻게 삼까! 조금만 더..”

 

콰-악!

 

“....”

 

 브라우니가 채 말을 끊기도 전, 배식 창구의 가림막 너머에 있던 한 은발의 여성이 손에 들고 있던 중식도 한 자루를 도마 위에 툭-내던졌다. 분명 강하게 내려친 것 같지도 않은데, 중식도가 박힌 도마가 그 끝날에 쩍-하는 소리와 함께 양옆으로 갈라지자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이들의 눈이 껌벅였다.

 

“...흐음. 아우로라양. 이 도마, 오래되었사옵니다. 이런 물건은 재깍재깍 버리십시오. 도마에 베인 재료 냄새가 다음 요리에 차질을 주니.”

 

“아..아하하하. 응! 주방장님!”

 

 주방 안에 새로이 자리잡은 주방장의 서늘한 목소리에 방금까지 입을 놀리려던 병사 일동이, 그 한기에 딱딱하게 굳어가자 아우로라는 해맑은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마 하나쯤 어떠하리, 바로 산에 있는 엘븐들에게 부탁하면 바로 튀어나오는 물건. 하지만 이 파견 병사들의 얼굴은 쉽게 볼 것이 아니었다.

 

또-각

 

“...그리고 혹 제가 잘못 들었기를 바라옵건데, 제 주군의 명령을 무시할 심산인 불한당이..”

 

또-각

 

“...이 식당에 발을 들여놨다고 생각하기 싫사옵니다.”

 

 도마를 갈라버린 중식도의 날을 매만지며 천천히 배식창구로 걸어오는 요안나 아일랜드의 새로운 주방장, 소완의 섬뜩한 옥빛 눈동자에 그 자리의 일동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설..설마요! 우리 후임이 말을 잘못해서..”

 

“마..맞슴다! 너무 많이 주셔서! 그랬슴다!”

 

“애..애들 교육 똑바로 시킬 테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아..”

 

 입을 놀리던 브라우니의 뒤통수를 부여잡은 채 굳은 얼굴로 하하-호호 하고 웃는 레프리콘과 이프리트의 모습에 소완은 무감각한, 마치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눈으로 그녀들을 흘겨보았다.

 

“제 주군의 팻말, 똑똑히 기억해주시길 바라나이다.”

 

“응응! 라붕이 대장님의 명령이라면 따라야지!”

 

“네..네! 정량 배식! 추가 요구 없음!”

 

“..뒤에 분들도, 아시겠나이까?”

 

“예! 알고 있습니다!”

 

 소완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일동이 힘차게 대답을 해오자 그제야 소완은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이 올리며 배식을 하려던 아우로라와 포티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 이분들의 정량만큼 만들었사오니, 만일 줄어들면 그대들의 탓이옵니다.”

 

“응! 주방장님! 걱정하지 마! 정확하게!”

 

“배분할게요!”

 

“...좋나이다. 믿어보겠사옵니다. 배식이 끝나면 저희도 쉬지요.”

 

“헤헤헤! 오늘도 새 레시피를 알려주는 거야?”

 

“저 혼자 일하기에는 벅차서 그렇사옵니다. 저는 이만 뒷정리를 하겠으니 뒤를 부탁하옵니다.”

 

또각-또각-

 

“헤헤. 주방장님이 무섭긴 해도, 어딘가 따뜻한 구석이 있으시다니까?”

 

“맞아요. 저도 처음에는 참 무서웠는데, 헤헤.”

 

 얼음 폭풍처럼 매섭게 몰아치던 그녀는 어디 가고, 마치 무뚝뚝한 상관처럼 구는 그녀의 모습에 아우로라와 포티아는 서로를 바라보곤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이틀 전 갑작스레 취사장에 들어선 소완, 그녀의 등장은 전투 모듈을 탑재한 파견 인원들조차 얼어붙게 만드는 포스가 있어 매번 깽판을 만들던 파견 인원들은 그녀의 날이 선 중식도 앞에선 입을 꾹 다물게 만들었다. 거기에 듣도 보도 못한 요리실력으로 이제는 그녀들의 혀까지 사로잡아 매번 치우기 벅찰 정도로 쌓이던 잔반이라는 것이 없다 못해 국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대장님이 오시고 나서부터 좋은 일만 일어나네.”

 

“그러게요. 너무 꿈만 같아요. 아, 여러분! 배식 다시 할게요! 정량만 받아가세요!”

 

“..예.”

 

 힘찬 목소리로 말하는 포티아와 달리 식판을 들고 서 있던 이들의 얼굴은 거무죽죽하다 못해 침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을 주방 인원 중, 그 누구도 안쓰럽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해맑은 미소로 그녀들의 불행에 축복을 내리는 듯 그녀들의 식판에 정성스레 한 국자, 한 주걱씩 주방장의 요리를 올려주었다.

 

드-르륵!

 

“...하아. 이젠 이 밥 아니면 저 돌아가서 밥 못 먹슴다.”

 

 제 앞에 놓인 식판 위의 음식들을 보며 방금 혀를 잘못 놀린 브라우니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목 안쪽에서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선임 이프리트와 레프리콘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뱀. 이게 그 소완의 요리인가요? 이런 걸..본대 애들은..”

 

“말도 마. 본대 애들도 기겁하는 요리야. 그 동네는 정량이 아니라 자율인데도 눈 돌아가던데.”

 

“..맙소사. 그러면 저 팻말, 이제는 저희한테..”

 

“족쇄야. 족쇄. 인간님의 경고니 우리는 함부로 무시도 못하고.”

 

 이프리트는 배식 창구 천장 아래에 떡하니 달린 새하얀 팻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대충 휘갈긴 유성펜으로 또박또박 보이는 글자들. <정량 배식. 추가 배식 엄금. 라붕이 대장>.

 며칠 전, 뜬금없이 생긴 저 경고문의 효력은 그녀들에게 막강했다. 아무리 가라치다 잡히는 걸 라붕이 대장의 뇌파를 통해서 피해 다닌다지만, 저렇게 대놓고 걸어놔 버리면 무시했다가는 인간 명령 불복종에 상관 명령 불복종이라는 두 개의 명령 불복종이 그녀들의 뇌 내에서 크래쉬가 일어나 반항하지도 못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붕이 작전관은 딱 두 곳에만 팻말을 설치했는데..그 중의 한 곳이 이 천국이 된 취사장이었다는 게 그녀들에겐 불행으로 작용했다.

 

“설마 여기 짬밥이 이렇게 맛있어질 줄이야..”

 

“..본대에 있는 소완 모델보다 더 요리를 잘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니까요. 후우.”

 

“저희가 적당히 깽판을 쳤어야 했슴다. 생각해보면 전의 음식들도 딱히 나쁘지 않았슴다.”

 

“...뭘 지금 와서 후회해? 다 같이 남겨놓고 영양 생산시설에서 나오는 초코바가 먹어댔으면서.”

 

 이프리트의 지적에 레프리콘은 고개를 주억대며 숟가락을 들어 언뜻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미역국을 한 숟갈,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찾아오는-

 

“-으으으! 이게 진짜 그냥 미역국이라니..”

 

“상뱀, 이거..나물 맞슴까? 양념이 베인 게 아주 고기 같슴다..”

 

“쌀밥도 봐라. 윤기가 좔좔 흐르잖아. 후우.”

 

 이런 밥을 원껏 먹지도 못 하다니. 이프리트는 힘없이 숟가락을 들어 제 앞에 놓인, 딱 정량만큼 놓인 쌀밥을 한 숟갈 들어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입안을 가득 메우는 쌀밥의 식감에 아까까지의 불만이 싹 눈 녹듯 씻어내리는 것 같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으니, 그녀의 옆 의자가 드르륵-하는 거친 마찰음과 함께 뒤로 이동했다.

 

“야. 너희들. 뭐하냐?”

 

“...시끄러워. 지금 밥맛을 즐기는 중이니까 방해하지 마.”

 

“...후우. 정말이지. 여기 밥이 이렇게 맛있어질 줄이야.”

 

 아까 자신이 하던 소리를 똑같이 해대는 워울프의 목소리에 이프리트는 눈썹을 살짝이 열곤 침울해하는 워울프를 내려다보았다. 침울한 레벨은 자신보다 더 한지, 워울프는 눈썹을 반쯤 감은 채 식판 위에 올려진 제 점심밥 위에 턱을 올리고 있었다.

 

“아예 식판에 코 박지 그래? 목 떨어지겠어.”

 

“..너희들. 오르카 라이브 채널 봤냐?”

 

“밥 먹는 데 그게 중요해?”

 

“어서 새로운 우리 대장님 사진이나 한번 봐라.”

 

 갑작스러운 워울프의 말에 막내 브라우니가 제 단말기를 꺼내 들곤 오르카 라이브 채널로 황급히 접속했다. 그녀들이 이렇게 채널을 확인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이곳의 총책임자, 라붕이 대장의 이동 경로를 이곳을 통해 그녀들이 공유하기 때문이었다.

 뇌파를 통해 그의 위치를 읽을 수도 있지만, 여차하는 순간에는 그것마저 힘들다. 그 때문에 라붕이 대장의 사진을 찍는다는 명목으로 파견 인원들은 그의 위치를 서로 간에 공유하고 있었다.

 어차피 장성급 인물들은 이곳의 존재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기에 병사들 간의 정보통으로 유통하기 딱 좋은 공간임이 그녀들에겐 틀림없었다.

 

“라붕이 대장님이 어디로 갔는데 그래?”

 

“..사진보면 기겁할걸?”

 

“응? 왜?”

 

“이..이뱀! 이것 좀 보십쇼!”

 

“뭔데? 대체?”

 

 브라우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프리트의 토끼 눈이 맞은편의 막내들에게로 돌아섰다. 무엇을 그리도 놀라운 걸 봤는지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단말기를 그녀의 코앞으로 쭉 내밀었다.

 

“? 이거..”

 

 막내의 단말기를 째려보던 이프리트의 두 눈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커지기 시작해 그녀는 브라우니 손에 들려있던 단말기를 낚아채곤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덜덜 떨어대었다. 

 

“..저거 혹시 여기 대장니..님? 맞지?”

 

“...내 말이.”

 

 오르카 라이브 채널에 올라온 단 한 장의 사진, 그 사진에는 부품 생산인원들과 흙바닥에서 새참을 먹..아니. 막걸리를 목구멍에 들이붓는 라붕이 대장의 모습이 들어있었다. 그것을 본 이프리트는 토끼귀가 달린 제 후드를 훌러덩 벗으며 기가 막힌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었다.

 

“아니. 이 세상에 어느 장성이 부하들이랑 삽질하고 밥을 먹어?”

 

“..말도 마라. 그거 때문에 지금 채널 난리니까.”

 

“가라고 뭐고 간에, 이제 뭐 할 수도 없네..”

 

“...후방이 편해서 좋았는데. 새로운 대장님 덕분에 좋은 날 다 끝났다. 에휴.”

 

 워울프의 말마따나 오르카 라이브 채널은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사령관이라는 유능하고 지적인 인물상만 봐왔던 그녀들에게 라붕이 대장의 존재는 예측 불능, 만에 하나 입소문으로 도는 멸망 전 인류처럼 포악한 인물이 아니면 어떡하냐는 이야기가 돌았으나 이 사진 단 한 장으로 그의 이미지는 오르카 저항군 내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병사와 장성의 참된 모습입니다. T-8W.

 

-전역하고 싶다. 나도 저기 끼이고 싶다. M-5.

 

-술 먹는 모습을 보니 제법 한따까리 할 거 같은데? T-75.

 

“...인망 제대로 잡았네. 여기 대장님.”

 

“이제 가라를 치니 마니 그런 이야기도 없어. 다들 그냥 축제 분위기야.”

 

“이뱀. 저희도 이제 정상적으로 파견 임무에 집중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후임 레프리콘의 물음에 이프리트는 손에서 단말기를 내려놓은 채 후-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말단 병사 입에서 정상적으로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여기 분위기는 이제 180도 바뀐 셈이 되었다는 걸 이 소녀는 깨달은 것이다.

 

“..하긴 이제 삥땅도 못 치지..”

 

“이야기 못 들었냐? 그 동부의 앨리스를 박살 낸 은발의 귀신이 검문소에 있다잖냐.”

 

“..그렇게 무섭대?”

 

“난 몰라. 그런데 수송팀 애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생글생글 웃고만 있는데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친대. 마치 연결체 앞에 서 있는 거 같다고 그러더라.”

 

“여..연결체..”

 

 이프리트는 딱 한 번, 연결체와 조우했던 적이 있었다. 새하얀 몸체와 외팔을 가득 채운 거대한 입자포, 그것이 빛을 발하면 그 직선상의 모든 것이 불타올랐다. 간신히 사령관의 원격 지휘로 처리하긴 했으나 그 뼈를 사무치는 공포는 아직 그녀의 몸에 남아 있었다.

 

“..앞으로 난 수송 업무 안 할래. 그냥 초소 업무나 맡을..”

 

“이뱀. 요새 영양 생산시설에 새로 들어온 그 리제 모델은 더 하다함다. 어제만 해도 초코바 몇 개 서리하려던 알비스들이 머리 위의 토끼 귀를 반쯤 잘려서 돌아왔다 함다.”

 

“...와씨. 무슨 괴물들이 소리소문없..”

 

샤-각!

 

쿵!

 

“...”

 

 브라우니의 말에 한마디 한탄을 늘어놓으려던 이프리트는 갑작스레 주방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재빨리 자기 입술에 달린 지퍼를 꾹 잠그었다. 생각해보니 여기도 신원 불명의 괴물이 하나 있지 않던가. 설마 우리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닌지, 이프리트는 식은땀을 뻘뻘 흘려가며 눈동자만 굴린 채 배식 창구 너머로 살짝이 보이는 은발의 여성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샤-칵!

 

콰-앙!

 

 생고기를 도륙하는 소리였구나, 그런데 보통 저런 뼈 붙은 고기가 저렇게 쉽게 댕겅댕겅-베이던가? 예상보다 더 소름 끼치는 광경에 이프리트가 재빨리 숟가락을 들어 올리려 하자 이제는 아예 식탁 위에 턱을 올린 채 가만히 있던 워울프의 입이 열리며 한탄이 터져 나왔다.

 

“..좋은 날 다 갔~다!”

 

“..그러게. 새로운 인간님, 대체 뭐했던 인간일까?”

 

“아마 전에 장교님이 아니셨겠슴까? 그러니 이렇게 빨리 여기에 녹아든 거 일수도 있슴다!”

 

“아니에요. 브라우니. 그 추측은 잘못되었어요. 멸망 전 인간님들 중 장교분들은 오히려..”

 

‘애들도 이제 다 풀렸네. 에휴.’

 

 눈앞에서 새로운 인간의 정체에 대해 담화를 나누는 제 후임들의 모습에 이프리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이라는 장성이 자기들의 실태를 알고 끽해봐야 말이나 경고나 주겠거니 했더니 여태껏 그녀들이 무시해왔던 후방 생산직 녀석들이랑 같이 일하고 밥 먹고 앉아있다. 이 때문에 더 이상 생산직들을 무시하기도 어렵다. 그녀들의 뒤에는 본대 애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거기에 사령관 빼고는 말도 못 걸 직위를 가진 양반이 있다.

 그런데 그를 무시하고 그녀들을 건드린다? 저 인간의 성향이 어떨지는 몰라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전역한 이프리트만큼은 아니어도 오랜 군 생활을 해왔던 이 이프리트는 그것을 빠르게 눈치채었다.

 

‘..거기에 오늘부터 보급납품하는 양도 늘었고.’

 

딸-그락

 

“-크으. 이게 밥이다! 진짜!”

 

 동부 전선의 유명한 폭격 에이스, 세라피아스 앨리스를 단 말 몇 마디로 쓰러뜨린 블랙 리리스 개체가 검문소를 지키고 앉아있다. 저런 고급 모델이 왜 검문소 일이나 하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에 수송팀 애들은 물자를 더 빼돌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 거기에 오늘부터 비축용 물자까지 대장의 권한으로 더 빼내어 보급하고 있으니 상부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슬금슬금 빼먹던 물자들에 더 이상 손도 못 댄다.

 

“...가라치는 것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내 군 생활 경험이 말해주는데, 앞으로 가라도 못 칠 수 있어.”

 

“왜? 가라치는 것 정도는 적극적으로 안 잡잖아. 라붕이 대장은.”

 

“...몰라. 그냥 감이 그래.”

 

“하아아아..우리들의 안식처가아아..”

 

“얼른 밥이나 먹어. 국 다 식는다야.”

 

 워울프의 앓는 소리에 이프리트는 대충대충 답해주고는 제 식기를 들어 식기 반납함에 가져가 들었다. 항상 온갖 음식물 찌꺼기로 더럽기 그지없던 잔반통 위를 보니 아예 새로이 씻어다 가져다 둔 것처럼 깔끔한 스테인리스 겉면을 반짝여대고 있었다.

 

‘...하긴. 이 밥을 누가 버려.’

 

 이제는 이전과 완전히 변한 취사장의 모습에 이프리트는 그저 눈살만 찌푸릴 뿐, 별달리 할 말도 없다는 듯 제 식판을 눈높이에 맞추어 슥 올려둔 채 재빠르게 취사장 밖으로 걸어나갔다.

 

‘...가라고 뭐고 간에 나도 전역하고 여기 오고 싶다...다리 한번 제 손으로 분질러 볼까?’

 

 어떻게 하면 사진 속 이프리트처럼 저렇게 속 편하게 웃을 날이 올까, 이프리트는 자신의 앞날 계획을 상상하며 제 후임들을 내버려 둔 채 엘븐들이 있는 숲속 산장에서 한숨 잘 요량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것이 어떤 앞날의 참사를 일으킬지,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45)

 

뿌-우우!

 

 요안나 아일랜드의 항만 시설은 이 섬이 개척될 때, 제일 먼저 설치된 시설이다. 각종 창고와 크레인, 그리고 다량의 방파제가 둑 아래에 가득히 메운 이곳에 오늘도 어김없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녀들은 호라이즌의 수송함대 대원들이었다.

 

“필-승!”

 

“오우. 필승!”

 

“헤헷! 대장님! 안녕! 필-승!”

 

“그래. 그래. 필승.”

 

 라붕이 작전관은 제 앞에서 딱딱하게 경례를 올리는 금발의 소녀와 그런 그녀와 대비되는 한층 활발한 주홍빛 머리카락의 소녀의 경례에 대충 손가락 경례를 올려주며 그녀들을 반겨주었다.

 

기-이잉! 철컥!

 

쿵!

 

 그런 그녀들의 뒤에는 거대한 수송함이 한 척 부둣가에 머리를 댄 채 멈춰서 있었고, 그 전함의 위로 이곳에서 생산된 대량의 수송물자들을 실은 컨테이너들이 느릿느릿하게 크레인에 실려 수송함 위로 빼곡하게 쌓이기 시작했다.

 

쿵!

 

“자. 이게 오늘 하루 수송해야 하는 물자들 품목이다.”

 

 눈앞에서 착실히 진행되는 선적 작업에 라붕이 작전관은 경례를 내린 소녀들에게 겨드랑이에 끼어두었던 서류뭉치를 건네어 자신의 하루 업무의 제일 중요한 업무를 그녀들에게서 검수받고자 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서류뭉치를 받아든 세이렌 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내민 서류를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며 검수에 들어갔다.

 

“예! 대장님. 우선 물품 확인부터 할게요!”

 

“헤헤. 우리 함장님 어깨에 힘들어 간 거 보여? 라붕이 대장님? 조만간 상의 사이즈를 늘리려나 봐!”

 

“네리! 그렇게 말하지 마요!”

 

‘음음. 치유 받는 기분이란 게 이런 건가.’

 

 제 앞에서 투닥거리는 두 세일러복 소녀들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은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조금 서로 어색한 감이 있었지만, 네레이드 특유의 친화력 덕분인지, 4일간 서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으니 라붕이 작전관은 눈앞에서 아웅다웅해대는 소녀들이 제 조카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그녀들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던 그의 머리 위로 슈-웅! 하는 부스터 엔진음이 들려오자 라붕이 작전관의 고개가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반기는 것은 태양을 등지고 선 샛노란 금발의 세일러 소녀였다.

 

“봉쥬-르! 라붕이 대장! 후훗!”

 

“오-! 운디네. 오늘도 프랑스 소녀 컨셉이냐? 거기 경례 어떻게 하는데?”

 

“에...엣? 경..경례?”

 

 여유롭게 하늘에서 부둣가로 내려오던 운디네에게 라붕이 작전관은 가벼운 농을 건네었다. 다만 그녀의 경우에는 조금 심각하게 받았는지 운디네는 턱을 짚고는 ‘카피? 카피 뎃? 이렇게 하던가? 근데 그거 공군인데..아닌가. 나 공군이었나?’라는 식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해 라붕이 작전관의 얼굴 위로 장난스러운 미소가 일어났다.

 

“-하일! 히틀러!”

 

“에..에엣?! 하..하일! 히틀러!”

 

 라붕이 작전관이 갑자기 오른팔을 위로 치켜세우자 잡생각으로 가득하던 운디네는 저도 모르게 그 자세를 따라하고 말았다. 그 모습에 운디네와 네레이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운디네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고 라붕이 작전관의 얼굴에는 장난기를 넘어선 사악한 웃음이 떠올랐다.

 

“..운디네. 이게 뭐 하는 건지 알고 있어?”

 

“응? 프..프랑스 경례 아니야? 잘 알거든?”

 

“풉!”

 

 자신의 엉성한 대답에 세이렌이 입을 가리고 끅끅-웃어대기 시작하자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운디네는 얼굴을 새파랗게 질려가며 방금 라붕이 작전관을 따라 들어 올렸던 오른팔로 그의 어깨 위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퍽! 퍽!

 

“대장-! 소녀에게 무슨 행동을 시킨 거야?!”

 

“어어? 나 대장이다? 어어? 야! 잠깐! 진짜 아프다! 야! 뼈! 뼈!”

 

“농-! 대장은 더 맞아야 해!”

 

 그렇게 한 인간이 자존심을 긁힌 소녀의 분노 어린 주먹을 받아내는 사이, 웃음을 참아가며 그가 내민 서류를 읽어내리던 세이렌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사이에 운디네의 분노가 담긴 펀치를 맞고 엎어져 있는 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대장님? 살아계신 가요?”

 

“어어..살아는 있다.”

 

“그러면 혹시, 오늘 이 물량. 어디 잘못된 거 아닌가요? 평소랑 다른데..”

 

벌-떡!

 

 세이렌의 물음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콘크리트 바닥에서 일어나 아직도 씩씩거리며 자길 노려보는 운디네의 눈을 피해 세이렌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니야. 그 물량은 진짜야. 평소보다 자원을 1천씩 더 넣었어.”

 

“그..근데 이거 기입된 있는 양을 보면 모든 전방지역에도..”

 

“응. 평소 총 자원 4500씩이지? 이제부터는 거기에 1천씩 더 넣었어.”

 

“그래도 되나요? 사령관님이 발주하시는 양이..”

 

“여기 총책임자는 나잖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만큼 넣어도 문제 될 건 없어.”

 

 항상 넉넉하게 넘치는 잉여 물자들, 그리고 그 탓에 발생하는 병사들의 보급 탈취 사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라붕이 작전관은 한 가지 꼼수를 생각해내었다. 

 그것은 바로 추가물자 지원을 통한 비축 재고 감소. 평소에는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매번 각 자원을 총 1500씩 배분해 4개의 지역으로 수송해야 했으나, 이제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총책임자로서 자신이 부임했기에 이러한 추가물자 지원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어졌다.

 그런 점을 노려 라붕이 작전관은 평소보다 많은 물자를 이 선박에 재적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세이렌. 앞으로 조금씩 물자를 더 넣을 거니까, 조금 더 바빠질 거다.”

 

“으음. 전 괜찮아요. 이렇게 물자가 늘어나면 전선에도 도움이 될 거니까요!”

 

“아암. 아암. 그럼요. 그럼요.”

 

 호기로운 얼굴로 양팔에 힘을 주는 소녀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가라치는 건 못 막아도 삥땅은 막을 수 있다. 블랙 리리스가 매일 검문소에서 컨테이너 화물을 확인하고, 비축창고에 재고가 없으니 여기 파견 나온 놈들도 눈치를 볼 터.

 라붕이 작전관이 그렇게 제 계획이 어느 정도 진전을 보인다고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 그의 머리카락을 쭉-하고 위에서 잡아당겼다. 

 

쭈-욱!

 

“-응?!”

 

“히힛! 방심은 금물이지. 라붕이 대장.”

 

“테티스! 그거 놔! 대장님한테 무슨 무례야?!”

 

“히히힛!”

 

 어느새 그의 머리 위까지 날아온 테티스의 거친 장난에 세이렌과 운디네는 얼굴을 굳혔고 네레이드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라붕이 작전관의 정수리 위를 붙잡은 테티스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제 머리카락을 붙잡힌 라붕이 작전관은 그녀의 작은 손등을 툭툭 내리치며 당황스러움을 물린 채 담담하게 제 머리를 잡은 소녀에게 말을 건넸다.

 

“여. 테티스. 심심하냐?”

 

“심심하긴! 이렇게 재밌는 장난감이 있는데!”

 

“..하하. 오? 그래?”

 

“응! 너무 재밌어!”

 

 손을 놓아주긴 했지만 그녀의 장난 탓에 가운데 머리카락만 삐죽이 솟아오른 그의 모습에 테티스는 입가를 가린 채 푸푸풋-!하고 뺨을 씰룩대는 라붕이 작전관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행태에 라붕이 작전관은 움찔거리던 뺨을 억지로 멈추곤 그녀에게 이리 와보라는 식으로 손짓을 날렸다.

 

“응? 뭐야? 한 대 때리려고? 안 가!”

 

“안 때려. 안 때려.”

 

“진짜?”

 

“진짜. 맹세코. 때리지도 않을 거고, 욕하지도 않을게. 그냥 딱 이 세 마디만 듣고 가라.”

 

“뭔데? 뭔데? 뭐라고 하려고?”

 

 라붕이 작전관이 때리지도, 욕하지도 않는다는 말에 이 금발 소녀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 차올랐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자기 장난에 복수하겠다는 건가, 그런 의문에 큰 호기심을 느낀 그녀가 등에 달린 모터를 빙글빙글 돌려 그의 입가에 자그마한 귓불을 가져다 대자 라붕이 작전관은 평탄한 어조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잘 들어. 테티스.”

 

“응응!”

 

“네 위.”

 

“? 내 위?”

 

 머리 위를 보라는 건가? 테티스는 그의 말을 그렇게 해석하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제 머리 위에 있는 것은 푸르른 하늘과 환한 태양, 그리고 흰색의 구름뿐. 하지만 라붕이 작전관의 이어지는 말에 그녀는 그 말의 의미를 곧장 깨달았다.

 

“내 아래. 다 집합.”

 

“...?”

 

“네 위, 내 아래. 다 집합시키라고.”

 

“-히이에에에엑!”

 

 세상에서 이보다 무서운 말이 있을까. 테티스는 이전까지의 소악마스러운 미소를 거두곤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시퍼렇게 변한 얼굴로 라붕이 작전관을 바라보았다.

 

“...지..진짜?”

 

“응? 못 들었어? 자 다시 이야기해줄게.”

 

 테티스의 확인을 요구하는 물음에 라붕이 작전관은 여전히 평탄한 어조와 여유로운 얼굴로 오른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테티스를 비롯한 소녀들의 시선도 그 검지를 따라 움직였다.

 

“테티스. 네 위.”

 

스윽-

 

“내 아래.”

 

 그의 검지가 이번에는 부둣가의 콘크리트를 향하자 테티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두 눈에 눈물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은 쐐기를 박아넣었다.

 

“다 집합.”

 

“...잘못했어! 진짜 잘못했어! 라붕이 대장님! 더는 장난 안 칠게! 응?! 진짜! 맹세할게!”

 

“푸훗! 함장 세이렌 중령! 집합했습니다!”

 

“후훗! 봉쥬르-! 운디네 대위! 대장의 명을 받아 집합했습니다!”

 

“응?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리네리! 집합!”

 

 하늘을 나는 것도 포기한 테티스가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라붕이 작전관의 바짓자락을 붙잡는 모습에 소녀들은 그의 장난에 소스를 곁들여주겠다는 듯 재깍 각자의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구호를 외쳤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 역시 호쾌한 웃음소리를 내려던 순간-

 

-음. 소관도 대장의 아랫니니 무적의 용 중장. 대장의 명을 받아 집합했소이다.

 

“-푸훕!”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목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내렸다. 세이렌과 운디네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의 감각을, 네레이드는 갑작스러운 자기 대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두리번거렸고, 테티스는 아예 사색으로 변해 라붕이 작전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채 꽁꽁 얼어버렸다.

 

 라붕이 작전관? 그냥 말 그대로 미소를 머금은 상태에서 석상이 되었다.

 

-흠. 소관의 유머는 별로였소? 라붕이 대장.

 

“...피..필-승!”

 

 어디선가 들려오는 성숙한 여성의 물음에 라붕이 작전관은 꽁꽁 언 상태에서 재빨리 어디 있는지 모를 그녀를 향해 경례를 올렸다. 그 모습에 그 자리에서 장난을 치던 소녀들 역시 맞은편의 라붕이 작전관처럼 아무 곳이나 대고 경례를 남발했다.

 

“필승!”

 

“피..필승!”

 

“응? 필승!”

 

“..히끅..피..필승!”

 

‘시발. 개 좆됬다. 씨발. 어떡하지? 제 부하들한테 장난쳤다고 지랄하면 어떡하지? 씨발. 테티스으으으!’

 

 라붕이 작전관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소녀의 정수리를 노려보다 재빨리 눈을 굴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으려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위풍당당한 자태는 수송함의 갑판에도, 이 부둣가에도 보이지 않자 그의 머릿속은 더욱더 혼란에 물들었다.

 

-흠. 소관은 그대의 아래 직급이오. 너무 그리 딱딱하게 굴지 마시오.

 

“아..아닙니다! 참모총장님! 제가 어찌..”

 

-지금 내 모습을 그곳에서 찾고 있다면, 그건 틀렸소. 이건 단지 통신일 뿐이라오. 후훗.

 

“..예?”

 

 예상치 못한 그녀의 해답에 라붕이 작전관은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세이렌의 치맛자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조금 그녀의 새하얀 피부로 눈이 돌아가려 했으나 그는 아우로라 때와 같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최대한 목소리의 진원지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이 맞다는 듯 세이렌은 황급히 제 단말기를 꺼내었고, 그 단말기의 화면 안에는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는 짙푸른 머릿결의 여성이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랜만이라기엔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구려. 라붕이 대장.

 

“..아닙니다! 무적의 용 중장님.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경례는 여전하오. 우리 애들과도 잘 어울려주는 모습이 참 보기 좋소.

 

“그녀들이 제게 어울려주는 것일 뿐입니다!”

 

‘후우. 문책할 분위기는 아니구만.’

 

 라붕이 작전관은 싱긋이 눈웃음을 짓는 화면 속 무적의 용 모습에 덜컹거리던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시 만날 땐 바뀌어 있을 거라더니, 전과 다름없는 광경에 라붕이 작전관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려 하니, 아직도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채 꽁꽁 얼어 붙어있는 테티스의 정수리가 다시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는 모양새가 안 산다 싶었던 라붕이 작전관은 재빨리 제 오른발로 테티스의 옆구리를 툭툭 차며 그녀의 귀에다 입을 대었다.

 

툭-툭-

 

“..야! 테티스! 정신 차려! 임마!”

 

“...히엑. 흐끅. 흐아앙.”

 

“울..울지 마. 임마!”

 

 이제는 누가 위쪽이지? 또 한 명의 소녀를 울린 라붕이 작전관의 얼굴이 점차 거무죽죽하게 변해가자 무적의 용은 여전히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들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렸다.

 

-이전에 보았을 땐 우리 바이오로이드들을 꽤 두려워하는 모양으로 보였소만 이제는 그 인식이 틀렸다고 생각되오.

 

“...마..맞습니다. 중장님. 중장님의 대원들 덕에 기피 현상이 줄었습니다.”

 

“응? 대장님은 여태껏 우릴 무서워한 적이 없는데?”

 

‘네레이드으으으으으! 분위기! 분위기 좀 읽어주라! 제발!’

 

 언제나 쾌활하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세일러 소녀의 말에 그의 식은땀이 이마에서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네레이드, 무서운 아이. 라붕이 작전관이 그렇게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무적의 용은 제 통신의 목적을 담담하게 읊조렸다.

 

-이렇게 불시에 그대에게 접촉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그대의 육체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오.

 

“..제 몸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오늘 분의 오리진 더스트는 어찌, 잘 맞았소?

 

“예! 중장님. 덕분에 힘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라붕이 작전관은 오늘 아침, 아르망에 의해 새로이 맞은 주삿바늘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으나 맞아보니 하루 3시간을 중노동을 해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체력과 근력이 넘쳐나는 것을 느끼자 별로 나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개 사기템이네. 이거.’

 

-후훗. 목소리에서부터 느껴지오. 흠. 그렇다면 말이오. 그대 혹, 신체를 바꾸겠다는 생각은 없소? 휩노스 병 때문에 그러하오.

 

“...음..그것이..”

 

 휩노스 병. 이 세계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게임 설정을 다 뚫고 들어온 라붕이 작전관조차 그 정체를 모르는 미확인 적 개체인 별의 아이가 내뿜는 FAN파로 인한 불치병.

 이렇게 무적의 용이 그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찾아온 것에는 그 휩노스 병을 피할 방도에 대해 그의 의중을 물어보려 한 것이었다.

 

“...아직 그..제 몸을 새로 바꾼다는 것에..는 거부감이 듭니다. 중장님.”

 

 중국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두 갈래로 나뉜다고 하였다. 사람의 정신적인 혼은 하늘로 올라가 영생을 누린다고 하며 이승에 남은 육신은 백이라 하여 하늘로 올라간 혼과 달리 지하 세계에 남아 또 삶을 누린다고 했다.

 그만큼 사람에게 있어 제 육신이라는 것은 또 하나의 자신. 그렇기 때문에 쉽사리 포기하기 어려운 것, 라붕이 작전관은 자신이 여태껏 함께해온 이 육체에 정이란 것이 있으면 있지, 없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음. 그렇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소만 다만 이것은 알아두시오. 라붕이 대장.

 

“...예. 중장님.”

 

-늦든 빠르든 그대가 이렇게 제 역할을 해내기 위해선 생체 재건이 필수적인 요소요. 부디 이것이 내 고집처럼 들리지 않았으면 하오.

 

“물론입니다. 무적의 용 중장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육체를 바꾸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건 나일까? 아니면..’

 

 화면 속 무적의 용에게 고개를 숙인 라붕이 작전관은 심란한 제 마음을 최대한 숨긴 채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의 심해와 같은 짙푸른 눈동자와 눈을 맞추었다. 한껏 엄숙해진 분위기에 세일러 소녀들이 저마다의 식은땀을 훔칠 때, 무적의 용 중장은 처음 등장할 때와 같이 한껏 밝은 목소리로 다시 이 분위기를 타파했다.

 

-아, 그리고 혹 내 주군이 고심 끝에 보낸 인원들은 그곳에 잘 도착했소?

 

“...아. 리제양과 리리스양, 그리고 소완양이라면..”

 

-맞소. 그녀들은 꽤 화려하게 등장한 인물들이었으니 그대에게 큰 선물이 될 거라 내 주군은 생각했소. 어떻소? 그녀들은 잘 지내오?

 

‘...살려주세요. 용 누나.’

 

“예! 물론입니다. 사령관님의 하해와 같은 마음씨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덕분에 부족한 인력이 메꿔졌습니다.”

 

-음. 좋은 일이오. 앞으로 그대에게 걸린 기대가 크오. 내 이런 말을 하긴 무엇하지만, 내 주군을 대신해 그대에게 부탁하오. 그대와 같은 남자가 내 주군의 형제, 또는 친구가 되어주길 바란다오. 이는 내 주군과 같은 심정일 것이오. 후훗.

 

“...친구와 비슷한 관계부터 우선 해보겠습니다. 중장님.”

 

-음. 다음에 오리진 더스트를 보낼 땐 이 아이들을 통해 고급으로 보내겠소. 다시 만날 날이 기대되오. 부디 그때까지 건강하길 빌겠소.

 

“예! 수고하십시오! 필-승!”

 

-후훗. 그땐 내가 먼저 경례해야겠소. 필승!

 

삑-!

 

“...후우! 후우! 후우!”

 

 단말기 화면에서 경례를 올리는 무적의 용의 모습이 사라지자 라붕이 작전관은 지금까지 참아온 큰 숨을 내몰아 쉬기 시작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그의 앞의 소녀들 역시 줄줄 흘러내리던 식은땀을 팔뚝으로 훔치며 헉헉거리는 라붕이 작전관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 어땠냐? 괜찮았어?”

 

“응응! 퍼펙트! 완벽했어! 라붕이 대장!”

 

“저..정말 잘 하셨어요! 하아..하아..”

 

“? 응! 대장! 뭔지 몰라도 잘 했어!”

 

“...흐끅! 흐끅!”

 

 엄지를 척 올리는 운디네와 세이렌, 그리고 여전히 발랄한 네레이드. 그리고 여전히 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는 딸꾹질을 해대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테티스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라붕이 작전관은 이제는 익숙하게 테티스의 눈물샘 위를 문질렀다.

 

‘여기 와서 대체 몇 명이나 울렸냐. 나란 놈.’

 

“..괜찮다. 괜찮아. 폭풍은 지나갔어요.”

 

“히끅! 히끅!”

 

“응응. 내가 잘못했다고. 아, 그러니까 누가 장난치래?!”

 

“히끅! 흐끅!”

 

 안드바리나 아쿠아와 달리 여전히 딸꾹질을 해대며 자신을 향해 무언의..아니. 딸꾹질로 항의해대는 테티스의 작은 주먹을 맞아대던 라붕이 작전관은 힘 풀린 눈으로 수송함대의 함장을 바라보곤 축 늘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이렌. 물자 중에 내가 일부러 너희 애들 나눠 먹으라고 따로 표시해둔 거 있거든? 그 안에 초콜릿이랑 너희들 카레에 넣어 먹으라고 감자랑 배양육, 잔뜩 넣어뒀다. 꺼내 먹어.”

 

“..헤헷. 네. 대장님. 감사히 받을게요.”

 

“오! 그라시에! 대장!”

 

“와! 오늘은 포식이다!”

 

“히끅! 히끅!”

 

 항상 휴가도 파견도 없이 매일 바다 위에서 고생하는 호라이즌 수송함대 소녀들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작은 선물뿐. 라붕이 작전관은 그런 그녀들을 위해 컨테이너 하나에 빼곡하게 그녀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담아두었다. 그런 그의 배려에 그제야 테티스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놓고 선박에 오르려는 제 자매들의 뒤를 따랐다.

 

“다음에 또 와라! 테티스! 넌 그만 울고!”

 

“-히끄윽!”

 

 라붕이 작전관은 선박에 올라타는 그녀들을 배웅하곤 저 멀리 떠나가는 그녀들의 함선을 바라본 채 쉴 틈도 없이 다음에 자기가 할 일들을 떠올렸다. 작지 않은 섬의 규모, 그리고 후방에 놀러 들어온 불한당들에게서 제 부하들을 지켜내기 위해선 그의 몸은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후우. 이제 부품 쪽 가볼까. 애들은 오늘 쉬라고 해뒀는데. 뭐, 내일 보낼 물자 정도는 남겨뒀으니까. 괜찮겠지.’

 

 라붕이 작전관이 다음 행선지를 정하려 할 때, 홀로 부둣가에 서 있는 그의 뒤로 또각-대는 걸음 소리와 함께 이제는 익숙한 소녀의 목소리가 그의 주의를 돌렸다.

 

“폐하. 일은 잘 끝나셨사옵니까?”

 

“음. 아르망. 그래. 잘 끝..났나?”

 

“..중장님의 등장은 제 예측에도 없던 일이니, 비축물자의 보급이 허가된 것만으로도 성공입니다.”

 

“...하아아...진짜 십 년 감수했다.”

 

“...”

 

 갑작스러운 폭풍을 견뎌낸 라붕이 작전관이 힘이 축 풀린 어깨를 아래로 늘어뜨리며 지프차가 대기하고 있는 도로 위로 걸음을 천천히 옮기기 시작하자 그런 그를 바라보던 아르망의 감겨있던 눈썹이, 아주 살짝이 떠올라 그사이에 숨어있던 날카로운 그녀의 푸른 눈이 멀어져가는 호라이즌 함대의 수송선으로 향했다.

 

“...폐하를 해하려는 무리로부터..”

 

촤-르르륵!

 

“..폐하를 지켜내는 것, 그것이 저와 그녀들이 해야 할 일이겠지요.”

 

“? 아르망? 뭐라 했니?”

 

 제 등 뒤를 따라올 줄 알았던 부관이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서 멈춰 선 채 책을 펼치자 라붕이 작전관 역시 옮기던 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그리고 그의 부름에 아르망은 다시 한번 눈을 지그시 감고는 아까까지의 날카로운 눈빛 대신, 산뜻한 미소와 함께 보조개를 피우며 그를 향해 해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폐하. 이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으음. 부품 쪽을 한번 가볼까? 괜히 오늘 공사시켜서 애들이 고생하고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후훗. 알겠습니다. 곧바로 모시겠습니다.”

 

“응. 근데 나 운전할 줄 아는데..”

 

“제 예측보다 더 커브를 잘 도시면 그때 잡으시는 게..”

 

“...나 평생 운전대 못 잡냐?!”

 

 그렇게 시끌벅적한 둘의 대화가 멀어지는 부둣가의 위에는 철썩대는 파도와 내리쬐는 햇볕을 제외한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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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에에에엑!! 어제 반 이상 썼는데!! 다 날라갔어!! 거기에 한 플룻 더 해 썼어..그래도 1일 1문학은 지켰다..


다음 편부터 시동 걸 거야..그리고 이틀간 문학은 없다. 이틀 뒤에 계절학기 시험이거든. 미뤄뒀던 수업 들어야 해. 3일 뒤에 보자.

바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