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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카-레드스톤 동맹이 결성된지 약 7일이 지났다. 7일간 레드스톤은 여러모로 바빴다. 난폭한 뉴 고블린들을 격리시키기 위한 장소, 고블린 생산 설비, 그리고 무기공장과 기갑공장 등등 기지를 짓느라 7일을 썼다. 레드스톤의 기지 건설이 완료되자마자 매튜는 코나와 오르카의 대장들을 모두 초대하였다.

"7일 간 저희들의 기지 및 공장이 이어졌고 드디어 지긋지긋한 건설 소음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그 동안 하지 못 했던 동맹 축하 파티가 이제서야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오늘 만큼은 모든 근심, 걱정을 모두 떨쳐버리고 코가 삐뚤어지고 배가 터질 만큼 먹고 마시고 놀아봅시다!!"

매튜가 기획한 파티는 제타가 주도했고, 오르카와 레드스톤 인원이라면 빠지지 않고 모두 참석했다. 그 동안 가해질 수 있는 공격도 뉴 고블린을 보초로 세웠기에 문제 없었다. 연회장의 안에는 밝은 빛을 내는 아름답고 예술적인 디자인의 샹들리에가 빛났고, 그 빛 아래의 테이블에 있는 음식들은 하나하나가 살면서 먹어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미식들로 가득했다. 그저 맛있는 음식 말고도 술과 음료 같은 마실 것들도 있었다. 연회장 안에는 제타와 알파, 매튜와 코나, 뉴 고블린의 다섯 간부, 그리고 오르카의 지휘관과 대장들이 참석해있었고 매튜를 제외하면 다들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제타가 건배 라고 말하자 그와 스콧, 도란스를 제외한 모두 건배라고 외쳤고 와인잔 안의 향 좋은 술을 들이켰다. 항상 메이드복인 라비아타도, 항상 군복인 마리와 용도 이번 파티에는 세심하게 준비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며 이런 드레스를 만드는 역할인 오드리도 드레스를 입었다. 이들 뿐이 아니었다. 이 연회장 안이 아닐 뿐, 바깥에서도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바깥의 파티는 브라우니나 워울프 같은 하급 개체들을 위한 파티였다. 멋드러진 드레스나 턱시도를 입고 있는 지휘관들과는 다르게 그녀들은 평소의 복장 그대로였고, 술 역시 최고급 와인이 준비되어 있는 실내와는 달리 맥주 등의 일상 속의 술이었다. 준비된 음식도 술도 다르지만 지휘관들도 부하들도 이번 만큼은 편하게, 그 어떤 걱정도 하지 않고 즐길 수 있었다.

"....."

모두가 맛있는 음식과 좋은 술을 즐길 수 있었으나 매튜는 그러지 못 했다. 마스크를 벗으면 진통제와 지연제의 공급이 끊기고 미뤄졌던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오기에 벗을 수 없었다. 그도, 뉴 고블린 다섯 간부들도 전부 턱시도 차림이었다. 그도 이번 순간 만큼은 지연제를 하고 있지 않았다. 매튜는 우선 자신의 옆에 꼭 붙어있는 스콧과 도란스를 향해 말했다.

"...여기서까지 내 주위에 있을 필요는 없다."

어서 가서 파티를 즐기라는 명령을 내리며 스콧과 도란스를 때어놓은 매튜는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아 잠깐 눈 좀 감고자 하였다.

"공석인가요?"

붉은 드레스 차림의 라비아타가 와서 같이 앉아도 되겠냐고 묻기 전까지는 말이다. 매튜는 고개를 끄덕였고 라비아타는 그의 옆에 앉았다.

"...다시 보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그를 보며 싱긋 웃으며 그녀가 말하자 매튜는 그녀에게 손을 보였다.

"낯 간지러우니까 그만."

"아...조금 부담이셨나요?"

"...."

조금, 작아진 목소리에 매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내 옆에 있어봤자다. 난 지금 파티를 즐길 순 없다."

"제가 좋아서 있는 건데...안 될까요?"

"...우리 쪽에서 솜씨내서 만든 음식이다. 쉽게 맛볼 수 있는 게 아니지. 지금 많이 먹어두는게 좋을 게다."

아무리 지휘관 개체들이 조금 과묵한 성향이 있다 하더라도 이런 파티에서는 다들 그 동안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던 짐을 모두 내려놓는다. 닭다리를 집어드는 메이와 그걸 보며 한숨을 쉬는 나이트 앤젤, 파티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지만 한껏 들뜬 호라이즌을 흐뭇하게 쳐다보는 용, 여기서까지 칸의 드레스 차림을 찍으려고 하는 탈론페더, 레드후드와 함께 술을 들이키는 마리, 발키리와 함께 자리에 착석해 고기와 술을 즐기고 있는 레오나, 구석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는 에밀리의 곁에 있어주는 비스트헌터와 아스널, 딱 봐도 동생들에게 주기 위해 이 음식들을 싸갈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하는 중이 분명한 리리스....매튜는 그녀들을 보다가 콘스탄챠와 눈이 마주쳤다. 콘스탄챠가 웃으며 손을 흔들자 매튜도 고개를 끄덕였다.

"...라비아타."

"네."

매튜는 지금은 저렇게 파티를 즐기고 있는 오르카의 그녀들을 바라보면서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도저히 그만 생각하려고 해봤자 지워지지 않는 생각이.

"...너와 너희들에게 정말 미안하구나."

자신은 지금까지 죽었다고 그녀들에게 인식되었다고 들었다. 매튜는 그녀들이 자신을 죽었다고 생각한 후 어떤 고생을 했는지, 어떤 헤프닝들이 있었는지 몰랐지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고생길을 걷게 했다는 것이 매튜에겐 큰 죄책감으로 남았다. 라비아타는 왜 그가 자신들에게 사과하는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그의 잘못인가. 자신들의 죄였고, 라비아타는 여전히 이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주인님."

라비아타는 매튜의 팔을 잡았다.

"저희들이 했던 만행에도 불구하시고 주인님께선 저희들에게 다시 손을 내밀어주셨어요. 저희 모두 주인님께 속죄해야할 것들이 산더미인데 주인님은 용서하셨어요. 저희들은 주인님이 쥐고 있었던 동앗줄을 잘라버렸는데 주인님은 그런 저희들에게 오히려 동앗줄을 내주신 거에요.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저희들은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까요. 주인님이 그렇게 아프고 외롭고 괴로우셨는데도 저희는 그런 주인님을 돕지도 못 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저희는 주인님이 그 죄책감을 덜으셨으면 해요. 모두가 똑같이 생각할 거에요."

비록 마스크의 위에다지만 마스크가 없었다면 그의 볼이었을 위치에 라비아타가 짧게 입을 맞췄고, 매튜도 그녀에게 키스를 받자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인님."

"음?"

라비아타가 그를 부르자 그도 그녀의 부름에 답해주었다. 라비아타는 그의 두 손을 잡고 일어서서 그를 일으켰다.

"모두들, 주인님을 다시 뵈는 것이 소원이었답니다. 부디 제가 주인님을 귀찮게 하는게 아니라면 저희들이랑...조금씩 대화해주시면 좋겠어요."

이후 라비아타는 콘스탄챠와 함께 다시 파티를 즐기러 갔고, 매튜는 라비아타의 말을 되뇌였다. 모두와 함께 시간을 조금씩 보내면 좋겠다라는 뜻이었다. 귀찮게 하는게 아니라면? 천만에. 하나도 귀찮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그녀의 말대로 한때 자신의 부하였던 그녀들과 오랜만에 함께 시간을 좀 보내볼까, 하고 다짐했다.

세이렌이 두툼한 랍스터 꼬리 속살에 버터소스를 뿌리자 그새를 못 참고 네레이드가 탁 집어들어 크게 베어물었다. 세이렌과 테티스가 그런 네레이드와 투닥거리고 있을 때 운디네는 오리다리 구이를 우아하게, 최대한 주위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딴에는 우아하게 먹는다 생각하면서 먹었고 용은 닭가슴살 샐러드에 와인을 겻들어 함께 먹었다.

"야!! 네레이드!! 당장 그거 안 내놔?!"

"독점하는 건 안 된다구요!"

"이 랍스터는 네리의 것이니까 포기하라ㄱ"

랍스터의 두툼한 꼬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테티스와 세이렌이 네레이드에게 달려들었지만 네레이드 역시 두툼한 랍스터 꼬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기에 둘에게서 벗어났었다. 등에 뭔가 딱딱한 것이 부딪히자 뒤를 보았고 세이렌과 테티스도 네레이드의 등 뒤에 나타난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네레이드는 입에 물고 있는 랍스터 꼬리를 그만 툭 떨어뜨렸다. 물론 그 아까운 것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그가 손으로 잡았지만 말이다. 떠들썩한 자신의 아이들이 조용해지자 용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거기에는 마스크와 턱시도 차림의 그가 랍스터 꼬리를 들고 있는 채로 네레이드, 테티스, 세이렌을 내려다보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이거, 소란스럽게 한 것이 아닌지....미안하오."

부하들의 소란스러움을 사과했지만 매튜는 딱히 그런 거에 신경쓰지 않았다. 새로운 랍스터 꼬리를 가져온 그는 셋이 사이좋게 나눠먹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했고 셋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얌전히 랍스터 꼬리를 먹었다.

"그대를 다시 만난지 7일이 지났는데 이렇게 함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구려."

"여러모로 바빴으니 말이다."

용은 멍하니 그의 마스크를 보았다. 턱시도를 멋드러지게 차려입었는데 그 멋드러짐이 저 금속 마스크 때문에 전부 망가진다. 매튜의 입장에선 이 마스크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하고 있는 것이지만 외관적으로 보면 턱시도와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용은 그의 마스크를 툭 건드려보았다.

"딱딱하군."

"...파티는 잘 즐기고 있나."

"걱정마시오. 훌륭한 파티라오."

매튜는 용의 차림을 흘긋 보았다. 흰색과 은색이 합쳐진 드레스에는 이렇다 할 장식은 없었지만 용의 외관과 몸이 그 드레스의 수수함을 다 가려줄 정도로 어울렸다. 분명 오드리의 솜씨라고 생각한 매튜는 그만 용과 눈이 마주쳤다. 용은 옅게 웃으면서

"내 몸에 흥미가 생겼소?"

그를 살짝 놀리듯 말했고 매튜는 곧바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용은 와인 한 모금을 들이키고 그에게 물었다.

"그대, 혹시 그 마스크를 벗으면 어떻게 되는 거요?"

"이 마스크를 벗으면...지금까지 미룬 고통들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래서 난 이걸 벗으면 안 되지."

"아쉽구려....내 부하 운디네가..."

"와아아앗!!!! 총장님!!!"

용이 운디네를 언급하자 바로 옆에 있던 운디네가 용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네레이드가 운디네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아 용을 막지 못 하게 했다. 용은 그 때를 노려 바로 말했다.

"최근에 한 책을 보았는데 여성이 남성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장면이 있었더군."

"아아앗!! 그걸 말하시면...."

운디네가 빨갛게 홍조를 띈 얼굴로 매튜의 눈치를 살폈다. 매튜는 그런 운디네를 보며 말했다.

"...먹여주고 싶은 건가."

"ㅇ...으응..."

머뭇거리다가 결국엔 긍정하는 운디네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는 마스크의 뒤쪽에 손을 가져갔다.

"...내가 장담하는데, 너희들이 바라는 광경은 아닐 거다."

아프겠지만 아주 조금이라면 어찌어찌 참을 수는 있으니 매튜는 뒤쪽의 스위치를 눌러 마스크를 풀었다. 마스크에 취이익- 하는 소리가 났고 곧 그는 마스크를 아래로 내려 자신의 코와 그 아래의 하악 부분을 보였다. 그의 말대로 그 모습은 결코 좋다고 볼 수 없었다. 하관 부분은 피부가 없는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상태였었고 이빨을 가려주는 입술조차 없었다. 코 역시 코뼈의 두상이 그대로 드러난 상태였다. 아직 고통은 몰려오기 전이었다. 운디네는 바로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자신이 먹고 있던 오리고기를 먹기 좋게 썬 뒤에 그의 입에다 가져다 대며

"아, 아앙~."

그에게 하고 싶었던 먹여주기를 해주었고 매튜는 고통이 몰려오기 전에 그 오리고기를 입 안에 넣었다. 운디네의 표정으로부터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보였고 매튜는 곧바로 마스크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곧 그는 세이렌을 보고 말았다. 세이렌 역시 부럽다듯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매튜가 그런 세이렌과 눈이 마주쳤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끄덕임의 의미를 깨달은 세이렌은 버터소스가 듬뿍 발라진 랍스터 꼬리살을 포크로 떠서 그의 입에 가져다 대었고 그는 오리고기에 이어 랍스터 꼬리까지 맛보았다. 고통이 밀려오기 직전 마스크를 다시 장착하여 간신히 다시 지연제와 진정제의 도움으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그가 숨을 내쉬었다.

용은 그런 모습을 보니 그가 정말로 안타까웠다. 이런 맛있는 만찬을 맛보기 위해서 저렇게까지 해야만 할 정도로 몸이 망가지다니....그를 저렇게 만든 것이 자신들이었으니 이런 생각을 할 자격조차 있는지 그녀는 의심했다.

운디네와 세이렌이 동시에 물었다.

"마, 맛있나요?"

"맛있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매튜는 맛을 못 느낀다. 이 요리들은 확실히 진미들이지만 그는 혈청과 약의 영향으로 이젠 미각이라는 것을 못 느낀다. 하지만 그러던 말던 운디네와 세이렌이 기뻐하는 것을 보기 위해 그는 거짓말을 했다. 세이렌과 운디네의 쑥쓰러운 웃음을 보니 충분히 가치 있는 거짓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네레이드와 테티스가 둘을 놀리듯 약올렸고 그런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을 술 안주 삼아 용은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크, 잘들 논다."

에반스는 호라이즌과 함께 있는 그를 보면서 비꼬듯 말했다. 그를 향해서 하는 말이 아닌 그와 어울리는 그녀들을 보며 하는 말이었다. 다섯 간부들은 서로 모여서 농담이나 따먹으며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물론 말하는 것은 에반스와 디에고, 에이번즈 뿐이었지만 말이다. 금발의 짧은 포니테일을 한 에이번즈가 그녀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얼마 안 있어 대전쟁이 일어날 건데 저렇게 놀기나 하다니...."

"내 말이! 왜 보스는 저런 것들을 용서한 거야? 이해가 안 된다니까."

에반스가 화풀이라도 하듯 술을 원샷에 비우면서 말하였다. 그런 에반스를 보며 도란스가 말했다.

"에반스, 정정바람. 그 분이 저들을 용서하신 것, 감히 우리 따위가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임. 또한, 이해하는 것, 허가되지 않음."

기계처럼, 인공지능처럼 말하는 도란스에 기가 차듯 에반스가 피식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두피가 보일 정도로 짧은 머리를 가진 디에고는 말 없이 술을 마시는 스콧에게 넌지시 물었다.

"사령관 스콧, 너라면....저 분의 의도를 알고 있는가?"

"...무슨 의미지."

스콧이 그에게 눈길도 안 주고 묻자 디에고도 역시 그에게 눈길 역시 주지 않고 그 의미를 말했다.

"각하께서 이들을 아무런 의도없이 받아주시진 않으셨을 터. 분명 무슨 의도가 있겠지. 어쩌면, 정말로 과거의 부하들이던 그녀들이 그리웠을 수도 있고. 하지만 곧 대전쟁이 닥쳐 올 이 때에...저 분은 너그럽게 저들을 용서해주셨다."

"나 역시 각하의 의도는 알지 못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겠군. 그저 고기방패를 위해서, 오르카와 접촉한 것이 아님을."

"아아...뭔가가 더 있다는 거구만."

에이번즈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를 끝냈다.

한편, 파티의 한 자리에는 알파와 제타가 함께 건배하고 원샷하고, 다시 잔을 채우고 건배하고 원샷하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둘에겐 이 파티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빌어먹을 자매들로부터 승리하고, 과거의 망령인 그들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에 대한 승리. 아예, 잔을 저리 치워버리고는 병 째로 마시기 시작한 둘은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그 좆같은 년들이....이제는 너희들 거야. 안 기뻐?"

"안 기쁠 리가. 오히려 너무 좋은 걸."

"하하핫...너가 그걸 봤어야 했는데...극저온 상태에서 미라로 보관되어 있는 늙은이들의 마지막 모습...."

"어땠는데?"

이제껏 참아왔던 화가 전부 풀어지듯 그녀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술을 물처럼 들이키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근처엔 술병이 여러 개였다. 눈쌀이 찌푸려질 정도로 둘은 과음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들의 행동에태클을 걸지 않았다. 알파는 눈동자를 슬쩍 옆으로 굴렸다. 호라이즌의 아이들을 앞에 두고 용과 어꺠를 함께하여 걷고 있는 매튜. 알파는 그런 매튜를 보니 그의 과거가 떠올랐다.

"...매튜가, 그러니까 '진짜 매튜' 가 펙스를 찍어누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그랬지. 기대했었어."

"너도 알지? 진짜 매튜가 박사님을 좋아했다는 거."

알파가 웃으며 말하자 제타도 웃었다.

"누가 몰라? 사랑 앞에서 나이는 숫자라고 했었잖아. 초콜릿, 와인, 최고급 레스토랑, 드레스, 반지....보르비예프 박사도 내심 싫어하는 눈치는 아닌 거 같았고."

"진짜 매튜가 처형당했을 때 박사님이 얼마나 상심이 컸는지....난 다 봤거든. 펙스를 무너뜨릴 희망이 사라져서 울었던 건 아니셨어. 박사님도 진짜 매튜를 좋아하긴 하셨나봐."

"그 분의 사랑은 정열적이었으니까. 내가 잘 알지."

제타가 진짜 매튜를 떠올리며 병을 들이켰다. 그저 짝사랑으로, 외사랑으로만 끝낸 자신의 이 연심. 박사에게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정말로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와 박사가 이어지길 기원했었다. 알파는 다시 과거를 떠올렸다.

"그 때도 기억해? 디에고가 펙스 회장 둘을 척살한 거."

"아아, 기억하지. 그 때 눈물 콧물 다 짜며 도망치는 늙은이들이 참 볼만 했는데 말이야."

"박사님도 그 광경을 보셨지. 만족하신 거 같았어."

"그리고 너도."

"너도."

알파는 살짝 아쉬움이 있었다. 아예 거기서 펙스의 회장들을 전부 처죽였다면 보르비예프 박사가 죽기 전에 한을 다 풀고 죽었을텐데. 하지만 이제서라도 그 분의 복수가 이뤄지니 알파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안나 보르비예프를 사랑했던 남자의 친구가 그녀와 그의 복수를 행한 것이다. 보르비예프 박사 역시 이 복수에 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자신이 그 분의 복수를 이뤄주고 싶었지만....알파는 계속 생각하면 살아나는 아쉬움을 술로 막아보았다. 제타는 갑자기 그녀에게 말했다.

"알파, 너가 레모네이드 최초 기종이었지. 박사의 곁을 보좌했던 최초의 비서 레모네이드."

"갑자기 왜?"

"부탁할 게 있어서 그래."

"의뢰라니?"

제타가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매튜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눈으로 그를 쭉 쳐다보았다. 다행히 그는 저 멀리 있는 상태라 제타의 시선을 파악하지 못 한 상태였다,

"...잘 모르겠지만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저 남자가 이제와서 오르카와 손을 잡은 거. 같이 철충과 별의 아이를 무찌르자고 했지만 그건 그저 명분이야. 난 저 남자가 너희 오르카와 손을 잡은 '다른 이유' 가 있을 거라고 봐."

"다른 이유...."

"생각해봐. 우리는 모든 것이 오르카보다 뛰어나잖아. 병력, 장비, 기갑, 보급, 영토....전부 너희들 이상이야. 마음만 먹으면 우리 레드스톤만으로도 철충을 상대할 수 있다고. 오르카와 손을 잡는 건 고양이 손을 잡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다른 오르카 소속 바이오로이드가 들었더라면 바로 싸움이 났을 법한 말이었지만 알파는 제타의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알파는 완전히 오르카 소속이었지만 한떄 펙스 소속이었던 그녀는 오르카의 불리한 점들을 전부 알고 있었다. 제타의 말대로 레드스톤의 입장에서 오르카는 있으나 마나한 세력이었다. 즉, 제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르카와 손을 잡은 이유가 따로 있는 게 분명하다 생각했고 알파도 거기에 동의했다. 그저 그가 그녀들을 그리워 했기 때문에 라는 이유는 말이 되지 않았다.

"나도, 그 뛰어난 레브도 저 남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 하고 있어. 그리고, 알지? 저번에..."

"살짝 눈을 찡그렸었지. 불쾌함 때문에 찡그린 건 아니었고..."

"숨겨진 이유가 있어. 나랑 같이 그걸 찾아줘."

둘은 술병을 다시 들고 쨍, 하며 건배했다. 그 건배는 제타의 요청을 알파가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매튜는 다시 호라이즌의 아이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세이렌에게 저기로, 운디네에게 저기로, 네레이드에게 저기로, 테티스에게 저기로 여기 저기 끌려다녔다. 끌려다니면서 매튜와 뉴 고블린 사령관 스콧의 눈이 마주 쳤다. 둘은 서로를 1초 간 응시하였고 둘 다 동시에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스콧은 방금 자신의 형제들에게 그의 의도를 모른다 말하였다.

그건 거짓말이다.


☆ ☆ ☆ ☆


파티가 끝났다. 파티 내내 매튜는 호라이즌의 아이들에게 끌려다니느라 바빴다. 항상 군기가 바싹 차려있는 세이렌과 허세 섞인 태도를 보이는 운디네도 자신의 신체나이답게 그와 함께 있을 때 무척 소란스러워졌었다. 용 역시 자신의 부하들이 그와 함께 하고 나서 한층 더 행복해보이는 것에 만족했다. 어떻게 보면 귀찮을 수 있었다. 한 개의 몸으로 4명의 소녀들에게 맞춰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도 귀찮지 않았다. 편안했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 했던 내면의 따스함을 다시금 느꼈다. 다른 인물들과도 시간을 가지고 싶었으나 호라이즌의 소녀들은 파티 내내 그를 독점했다.

다 지어진 탑 위에서 그는 오르카의 주둔지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옆엔 제타가 있었다.

"어제는 좀 바빴네."

"그랬지."

뭔가 힘이 없는 것 같은 그의 목소리에 제타는 너무나도 쉽게 그의 욕심을 알아차렸다.

"오르카로 가고 싶어?"

그는 침묵으로 답했지만 그 침묵은 입을 열고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알렸다. 어울리진 않지만 대답을 억지로 안 하는 모습은 마치 낯가림이 심한 어린아이가 우물쭈물 대답을 망설이는 모양세와 비슷했다. 제타는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날 봐봐. 정면으로."

자신에게 몸을 돌리라고 말하였고, 그는 군말없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높히 들어 그와 눈을 마주 했고 팔은 들어 그의 마스크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당신은 당신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걸 해냈어. 나와 알파의 복수를 이뤄주고, 그의 복수도, 심지어 코나의 복수마저. 그저 우리들만의 이득이 아니야. 오르카 호도 인류 수복의 장벽이 하나 없어짐과 동시에 아군으로 들어오는 이득을 얻었지. 당신의 행동, 그 하나만으로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낳은 거야. 조금은 욕심부려도 돼."

"...난 모르겠다. 이렇게 변해버린 나를 그녀들이..."

"관계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지 않아? 그러고 싶잖아. 게다가...바꿀거면 이번이 마지막이야. 앞으로 철충 본대와 전면전을 벌이는 데엔 시간이 있어. 그 시간이 당신과 오르카가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지."

제타는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에게 알린 것이다. 그 정도 욕심은 괜찮다고. 풀 죽은 아이를 달래는 부모처럼 그녀는 그를 위로해주었다. 동시에 그가 오르카 호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다. 그가 오르카의 인원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가 없는 그 때를 틈타 그의 꿍꿍이를 알아내야만 한다. 그가 떠나기를 바라는 것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제타는 인자한 어머니의 미소를 유지하였다. 그가 알아차리지 못 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그럼, 그러겠다."

매튜는 오르카 호와 당분간 함께 보내기로 하였다. 제타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지만 표정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저 그의 뒤를 캐려고만 이러는 게 아니었다. 그가 레브와 함께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마음 편히 있었던 적이 없었다. 끔찍한 과거가 드러나지고, 그 때보다 더 한 고통을 받고, 자기 자신조차 부정하고 싶은 기억을 각성하고, 다시 한번 사신을 만나고, 가장 아픈 때를 되풀이했다. 그리고 지금은....몸과 정신이 전부 망가지고, 복수의 공허를 알아버렸다. 앞으로 철충 본대와의 전쟁이 있을 예정일텐데 그는 무기력했다. 제타는 술에 취해있었지만 호라이즌과 함께 한 그를 보았었다.

무기력했던 매튜가 그녀들과 함께 하니 나름 즐거워했었다. 제타는 이제 그가 친구들의 복수를 끝마치고, 자신과 코나의 복수도 끝냈으니 더는 복수에 그가 망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젠 그가 전쟁을 끝내고 해독제를 먹어 몸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랬다. 제타는 매튜가 요양하기를 바랬다.

지금까지 찬바람에 너무 노출되지 않았는가.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리지 않았는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지 않는가.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지 않은가. 오래 전부터 그래왔듯이 그는 쉴 자격이 있었다.

"열심히 했잖아. 지금까지 쉬지 않고 열심히 했잖아. 모두가 인정할 거야. 쉬어도 된다고."

둘의 모습을 저 뒤에서 스콧이 모습을 가린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 스콧은 제타가 그를 위로하는 모습을 무표정으로 지켜보다가 말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어디론가로 향했다. 그가 향한 곳은 코헤이 교단의 기도실이었다. 그는 맨 앞 좌석에 앉아 코헤이 교단의 심볼이자 그들의 우상을 올려다 보았다. 스콧은 형제들에게 그의 의도를 모른다 말하였다.

그건 거짓말이다.

침묵은, 어쩔 땐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매튜는 자신의 진짜 의도를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조금의 힌트도,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콧은 그의 침묵으로부터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이미 알고서 앉았는지 아님 모르고 앉았는지 모르겠지만 멀찍히 떨어져있지만 같은 좌석에는 다소곳이 앉은 채 살짝 숙인 채로 눈을 감고 있으며 흑색과 백색의 수녀복을 입은 수녀가 있었다.

"....뉴 고블린 형제님들의 총대장이시군요."

수녀, 베로니카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눈을 뜨지도 않았지만 그를 알아차렸다. 스콧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코헤이 교단의 우상을 향해 다가갔다. 베로니카가 물었다.

"무엇을 고하러 오셨나요?"

"고하러?"

뒤를 돌아보며 베로니카의 말에 전면으로 부정하는 스콧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의 눈엔 커다란 코헤이의 우상이 들어왔다.

"이것이 너희들의 우상인가."

"빛의 상징입니다."

"...빛의 상징."

중얼거리며 그가 그 '상징' 이라는 것을 손으로 스윽 만져보았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음이 손가락으로부터 느껴지자 스콧은 자신이 기억하는 코헤이 교단의 신앙과 경전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모든 것은 빛의 뜻이다, 라고 너희들이 말하였지. 너희가 아니라면 너희의 신앙이나 경전이 말하였을 것이다."

"...."

"아브라함 계통 종교의 이단종파이자 빛이라는 존재를 신을 대신해서 섬기며 종말론적 교리를 설파하는 사이비 종교집단. 그게 코헤이 교단이지. 철충의 습격은 그저 철충이라는 이상한 존재들이 나타나 인류를 멸망시켰을 뿐이지만 너희들은 그것을 철의 심판, 철의 징벌이라고 하며 빛의 뜻이라고 말하였지. 멸망 이전이나 이후나 너희는 믿지 못할 거짓말쟁이에 빛이라는 추상적인 존재를 방패로 앞세워 악행과 기행을 합리화 한다."

"...빛을 모독하시는 건가요."

조용히 분노하는 그녀가 눈을 떠 붉은 눈동자를 보였다. 그녀는 바로 옆에 둔 자신의 성물을 들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그저 위협만 가하는 것이었다. 이 곳은 주둔지에 세워진 기도실, 즉 교회이다. 교회 내부에서의 피를 흩뿌리는 전투는 교리 상 아주 엄히 금지되는 것이다. 스콧도 그 사실을 알기에 베로니카의 위협이 그닥 위협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불쾌했나보군. 하지만 그게 사실이지. 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보면 너희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정말로 인류는 그 동안 저지른 만행이 업보가 되어 돌아온 걸 수도 있고, 너희들의 교리대로 빛을 대표하는 너희들이 정말로 구세주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미 구원은 얻었습니다."

그 때, 뒤에서 흰 날개를 펄럭이며 교단의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눈을 감은 채로 나타났다. 모자이크에서 비추는 빛을 통해서, 천사처럼. 스콧은 이렇게나 정교하리만치 천사처럼 생긴 그녀를 보니 약간의 메스꺼움과 불쾌함이 느껴졌다. 천사라고 불리는 것들보다 훨씬 더 천사같은 그녀의 모습은 분명 신성할 것인데 스콧의 눈에는 인간의 창조물이 인간의 구원을 약속하는 천사가 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구원은 아직 오지 않았을 뿐. 아담과 이브를, 빛께서 다시 보내주신 겁니다."

"낙원의 두 남녀...정말로 소름돋을 만큼 너희들의 교리가 진실이 되고 있군."

"그대의 다소 도발스러운 발언은 빛께서 용서해드립니다."

"넌 빛의 대리자, 천사이군. 그렇다면 천사여, 넌 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리라 믿겠다. 내가 여기로 와 너희들의 신경을 긁는 거에는 다름 아닌 이유가 있다."

"모두가 길을 잃은 어린 양입니다. 제가 불쾌한 것은 그저 개인적인 사정일 뿐, 빛의 대의 앞에선 그대를 거부할 이유가 없지요."

"철의 심판 혹은 철의 징벌이 정말로 빛의 뜻인가."

이미 베로니카에게 했던 말이었지만 수녀에 불과한 그녀보다 천사인 그녀가 더 자세할 것이라고 생각한 스콧이 물었다. 물론 답은 똑같겠지만.

"그렇습니다. 타락한 인간, 타락한 인간의 창조물인 우리에게 내려진 심판. 그러나 구원은 약속되었고 모든 것이 극복될 것입니다."

"그것도 경전에 쓰여져 있나?"

"전 빛의 대리자. 즉, 빛의 말을 듣습니다. 빛께서 약속하신 맹약이지요."

확실히, 수녀보다 천사가 조금 더 자세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이건 자세함이 아니었다. 스콧의 귀엔 그저 그럴 듯 하게 둘러대는 변명에 불과했으니까. 스콧은 칼집에서 나이프 한 자루를 꺼냈다.

"...우린 무기다. 이 나이프처럼. 여기서 말하는 '우리' 란, 뉴 고블린과 너희들을 뜻한다. 너희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느냐는 관계없이 그저 인간을 닮게 만들어진 모조품이다. 인간이 만든 인간. 인류 문명의 고도로 발달한 생체공학 기술력의 정점은 새로운 인종을 만들어내었지. 1세대는 백인, 흑인, 황인으로 인종을 나눴으나 2세대에 들어선 그러한 인종은 의미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인류가 만든 새로운 인류로서 인종이 나눠졌기 때문이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난 너희들이 말하는 빛의 맹약, 구원을 믿지 않는다. 나는 물론 나의 형제들 역시 그리할 것이고, 그 분도 그럴 것이다. 너희들이 말하는 철의 징벌은 우리들에겐 그저 인류의 패배일 뿐이고 너희들이 말하는 구원은 빛이 내리는 것이겠지만 우리의 '구원' 이란 총구에서 나오는 승리의 종착점이다. 바라보는 방향이 다름에도 모두 같은 걸 보고 있다. 나는 그 분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도구로서 모든 것을 차갑게 바라보고자 한다. 그러려고 노력한다. 하지만....그 분께서 너희들에게 내리신 이상하리만치 관대한....과분한 용서. 펙스를 짓밟아 복수를 마치셨음에도 너희들은 짓밟지 않고 곁에 두시는 모순점. 고블린도 뉴 고블린도 그 분에겐 적을 향해 쏴갈기는 총알에 불과하지만, 너희 바이오로이드는 세상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가치있는 것처럼 여기시더군."

"...대우의 불합리함을 느끼시는 건가요?"

"불합리? 천만에. 무기란, 불합리함을 느끼지 못 한다. 무기는 쓰고 쓰고 쓰이다가 닳아 없어지거나 부러지지. 그러면 버려진다. 바이오로이드는 무기이다. 너희와 우리의 차이점은....인간 같은가 아닌가의 차이지. 7일 간 난 너희들을 지켜봤다. 관찰을 목적으로. 내세를 믿는 것처럼 보이더군. 인간처럼. 그래, 인간처럼. 너희 바이오로이드는 그야말로 인간이다. 죽음을 두려워했던 인류는 이야기 속으로나마 불로불사를 그리며 공포를 잊으러 하였지. 인간과 비슷하도록 만들어진 너희들이 내세를 믿고, 거기서 편히 쉬는 것을 희망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

그는 나이프를 계속 쳐다보며 그녀들에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강화합금으로 만들어진 나이프. 스콧에겐 이 나이프를 들고 있는 일 자체가 기묘한 일이었다. 무기가 무기를 들고 있다니. 이런 코미디가 따로 있을까.

"...궁금하다. 납득이 필요하다. 불합리함은 느끼지 않지만 난 납득하고 싶다. 같은 바이오로이드인데도 어찌 이리 다른 것인가, 어찌하여 그 분은 배신자에 불과한 너희에게 이토록 관대한 것인가....이 난재를 납득하고 싶다."

"...죄송합니다."

천사, 아자젤은 갑작스레 그에게 다가가 그의 주위에 날개를 감싸주었다. 강화합금 나이프가 자신의 복부를 찌를 것이라는 의심을 단 1도 하지 않은 채. 스콧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피와 희열에 중독된 짐승 무리의 우두머리라 생각하였지만,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길을 잃은 어린 양이었군요. 빛의 대리자를 칭하면서도 그걸 보지 못 하였습니다. 신의 대행자인 저 만큼은 당신의 길을 밝혀주어야만 하였는데 그러지 못 하였습니다."

"밝혀줄 필요도 이유도 없다. 내 길은 또렷하다. 그 분의 무기로서 쓰이고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진다. 그것이 나의 길. 내가 탄생한 이유고, 그 분께서 날 창조한 이유시다."

"저희 모두 내세를, 천국을 믿습니다. 실로 불경하고 위선적인 말일 수도 있으나 그들에게 천국과 낙원을 약속하는 저조차 정말로 그러한 곳이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빛이 너무 밝아 제가 보지 못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저도, 수녀 베로니카도 그러한 장소가 있는지 모릅니다. 허나, 저희는 인간을 닮았습니다. 인류를 닮았으니 우린 너무 나약한 존재, 한낯 미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의지할 것을, 힘의 근원을 찾고 싶어합니다. 저희들의 경우엔 그것이 빛이며, 눈밭의 자매들은 그것이 발할라이고, 철의 전선군은 그것이 의무이죠. 당신들, 뉴 고블린들의 의지할 것은 무엇인가요?"

"...없다. 허나, 굳이 꼽자면...죽음. 죽음이다."

"죽음..."

"그렇다, 죽음. 우리 뉴 고블린은 모든 것이 끝나면 필히 폐기될 존재들. 얼마나 공적을 세웠든, 얼마나 유능하든 폐기된다. 평화로운 세상 속에 피맛을 본 늑대들은 필요없다."

"당신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군요. 하지만 그 조차도 확실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스콧은 아자젤에게 완전히 꿰뚫어보였다는 것에 살짝 당황했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들이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에 힘을 얻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 만큼은, 자신을 제외한 네 명의 형제 만큼은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저는 빛의 대행자, 빛의 대리자. 빛이 보이지 않더라도 모두에게 빛을 말해야 하는 존재. 당신의 '납득' 을 위해서 말해보자면....희망을 심어주는 존재."

"빛에 의지하는 희망은 거짓일 뿐이다."

"거짓이더라도 모두에게 희망을 약속하는 것이 제가 해야할 일입니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빛은 실존합니다. 저희들이 세상의 색깔을 보고, 세상의 공기를 마시고, 세상이 선사하는 맛난 것을 맛보고, 짧은 어둠을 보내고 다시 내일을 보는 것이 빛이 내리신 기적입니다. 빛께선 무자비하시지만 또 자비로우십니다. 인류에게 멸망이라는 철의 징벌을, 그 인류를 보좌하고 모셔야하는 저희들이 그들을 지키지 못 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분께선 반드시 구원과 용서를 약속하시죠. 저희에게 아담을, 그리고 이브를 보내주셨고 철의 악마를 막아낼 수 있는 무적의 군세를 내리셨습니다.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저희는 죄에 대한 징벌을 모두 받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빛이 밝게 보입니다. 안구가 녹아내릴 정도로....이젠 정말로, 구원만이 남았습니다."

스콧은 나이프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날개를 손등으로 스윽 밀어 아자젤이 날개를 치우도록 하였다. 스콧은 코헤이 교단의 심볼이 그려진 커다란 모자이크에서 내리쬐지는 빛이 자신에게 닿자 눈을 찡그렸다. 그는 그러면서도 말했다.

"...난 신앙에 근거한 그러한 발언을, 솔직히 이해하지 못 한다. 그러나, 조금의 납득은 얻은 것 같다. 너희와 우리의 차이를, 그리고 왜 그 분이 너희들을 관대히 용서하시는지."

"감사합니다. 형제님."

"...나에게 이런 선물을 주다니, 고맙군. 자매."

스콧은 조금 어색하게 입으로 웃음을 지어보며 고마움을 표했다. 아자젤과 베로니카, 그리고 제3자가 보기에도 그것은 가짜 웃음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스콧은 뒤를 돌아 기도실을 나가려고 하였다. 그가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던 때에, 그가 문 열기를 멈추었다.

"보답으로, 나도 몇 가지 충고이자 조언을 좀 해주지."

"무엇이죠?"

"그 분께서 너희들과 당분간 함께 하실 거다."

"그런가요."

아자젤의 반응은 평범했고 베로니카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빛의 구원을 부정하는 그와 코헤이 교단은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들은 그의 축출에 중립 입장을 고수했다.

"너희들은 철충을 철의 징벌이자, 악마라고 하였지. 고블린이라는 어원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는가? 자세한 유래는 없으나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더군. 그 뜻은 '도둑', '믿지 못할 사람' 이라고 했다. 고블린을 묘사한 여러 작품은 대개 고블린이 아주 사악한 종족으로 나온다. 마치 악마처럼.

또한, 너희는 침묵을 주의하라."

"침묵을..."

"침묵 속엔 직접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나 역시 그 침묵 속에서 어떤 것을 보았다. 여기까지만 말하겠다."

그는 그렇게 기도실의 문을 덜컥 열고 나갔다. 문이 저절로 닫혔고 아자젤과 베로니카만이 기도실 안에 남았다.

스콧은 교회에서 나와 야외복도를 걸었고, 그 길 중간에 매튜와 마주쳤다. 매튜와 스콧은 서로를 4초 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고 동시에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둘은 서로 교차하며 지나갔다. 매튜는 왼쪽 야외복도로 향했고 스콧은 레드스톤 전초기지로 향했다. 둘은 침묵을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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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완결임. 내가 저번에 말한 급전개가 다음화부터야. 철충이랑 별의 아이랑 본격적으로 싸우는 거 쓰면 너무 길어지니까 양해 부탁.

그런데 이번화랑 다음화의 시간 차이가 엄청 벌어진 상태일 거야. 그래서 그 중간에 매튜가 오르카 호로 요양하러 갔을 때 있었던 일을 외전격으로 쓸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