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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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오늘도 매일 같은 하루, 바뀌지 않는 풍경, 바뀌지 않는 환경 속에서 나는 간만에 바뀌어버린 내 입장에 눈살을 찌푸리며 항상 보던 풍경 사이를 눈여겨 보았다.

 

뚜벅-뚜벅

 

“아, 이 새끼. 어디 간 거야?”

 

 한가로운 저녁 일과 시간, 본래라면 침대에 드러누워 휴대폰으로 유튜브나 보면서 게임이나 하고 있을 시간에 나는 시끌벅적한 생활관의 복도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매의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씨이. 오늘은 제대로 써서 내야 하는 날인데. 이 새끼 어디로 간 거야?’

 

 오른손에 들린 수첩을 바라보다 주변을 휙휙 둘러봐도 죄다 똑같은 색의 생활복을 입은 놈들이 보일 뿐, 내가 찾는 녀석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동기 놈이 있는 생활관의 문을 두들겼다.

 

똑-똑-

 

“야. 여기 혹시 내 후임 안 왔냐?”

 

“응? 네 후임을 왜 여기서 찾아?”

 

“아니. 이 새끼가 안 보이잖아. 곧 점호시간인데.”

 

“아! 너 그러고 보니 분대장 달았지? 캬하하하하! 축하한다! 쨔샤!”

 

“...”

 

 동기 녀석의 비웃음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생활관의 중앙 복도를 다시 이리저리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냐고? 바로 이놈의 분대장 딱지와 함께 딸려온 분대장 수첩, 이것 때문이다.

 

“하아..씨. 왜 이런 걸 쓰라 해. 귀찮게..”

 

 나는 내 오른손에 들린 녹색 표지의 작은 수첩을 노려보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분대장 수첩, 하루 일과를 마친 제 분대원들의 당일 특이사항을 기록하는 분대장의 필수 업무 중 하나. 특이사항이라고 해봐야 뭐, 사실 별거 없다. 대충 오늘 뭐 했는지, 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런 걸 써서 행보관이나 당직사관에게 내면 그만인 업무지만..

 

“문제는 그 한 놈이 안 보여요. 진짜.”

 

 내 후임 중 하나가 저녁 일과 시간 중에 쓩-하고 생활관에서 모습을 감췄다는 거다. 평소에도 좀 얼빠진 녀석이기에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이 녀석이 제 군화를 씻는다고 모습을 감춘 후부터 생활관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뚜벅-뚜벅

 

‘그 새끼, 찾기만 해봐라.’

 

 분대장 수첩은 병사에게 만약의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가장 먼저 검사받는 물건 중 하나다. 예를 들어 병사 하나가 탈영을 했다거나, 또는 자살을 기도했다면 이 분대장 수첩에 그 병사의 특이사항이 기입이 되어 있는지 없는지부터 본다. 따라서 평소에도 잘하는 놈들은 대충 써서 내면 그만이지만 좀 유의해야 할 놈이다, 싶으면 생각보다 꼼꼼이 써 두어야 한다.

 

‘괜히 분대장 달아서, 이게 뭐야?’

 

 하기 싫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동기 몇 놈이 행보관이랑 짜고 치고 내 어깨에다 녹색 견장을 박을 줄이야. 행보관은 평소에도 잘하는 놈이니 하고 맡긴 거겠지만 난 이런 거 질색이다.

 

‘하는 보람도 없고, 책임만 잔뜩인 자리에 왜 앉힌데.’

 

뚜벅-뚜벅

 

“...여기 앞부터는 전역대기자 생활관인데.”

 

 한참을 걷고 있으니 전역 대기자들만 보이는 생활관의 코너 앞까지 걸어왔다. 오는 길 내내 화장실부터 세척실까지 싹다 뒤졌는데도 안 보였는데, 설마 여기 있을까 싶었던 나는 곧장 발을 뒤로 돌리려 했으나.

 

“야. 너 뭐 하는 새끼야? 어?”

 

“죄..죄송합니다.”

 

“아니. 댁 선임 불러오라고요. 예? 일병님. 얼른 선임 데리고 오시라고요.”

 

“죄...”

 

“죄송하다는 소리 말고! 새끼야!”

 

‘...이 목소리는..’

 

 코너 너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돌렸던 발을 다시 앞으로 휙 던져 코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코너 너머로 머리를 빼꼼히 내미니 눈앞에 설마설마했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시발. 세상에 어떤 새끼가 군화 빤 물을 사람한테 쳐 뿌리냐?”

 

“...”

 

“일병님? 아가리 없어요? 귀 없어요? 왜 대답을..안 해요? 예?”

 

“...죄송합니다.”

 

‘씨발. 좆됬네.’

 

 눈앞에는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후임 녀석이 양손을 공손히 모은 채 제 군화를 들고 서 있었고 그 앞에는 물벼락을 맞은 듯한 생활복을 입고 서 있는 이 동네 최고의 또라이 병장이 서 있었다. 하필이면 저 양반이야? 가뜩이나 자기 밑에 있는 애들 못살게 굴어서 경고도 여러 차례 받아 모두가 한마음으로 제발 빨리 떠주세요 하고 기도하고 있던 양반인데.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네.’

 

 제대로 물을 털어내지도 못한 군화를 들고 쭈뼛쭈뼛 서 있는 후임 녀석, 그리고 한껏 물에 젖은 듯한 저 양반의 생활복. 나는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선 그들의 갈굼 속으로 발걸음을 놀렸다.

 

“필승.”

 

“어. 필승. 뭐냐?”

 

 갑자기 왜 왔냐는 듯 날 바라보는 병장의 시선에 나는 어쩔 줄 몰라하는 후임을 한 번 노려보곤 최대한 점잖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 녀석, 제 후임입니다. 최병장님.”

 

“아? 니가 선임이었어?”

 

“예. 제가 관리를 똑바로..”

 

“하, 새끼. 야. 너 애들 관리 똑바로 안 해?”

 

“...”

 

 아예 내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시원하게 말을 끊고 들어오는 이 양반의 행태에 머릿속의 정신줄이 놓일 뻔 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이 인간의 갈굼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다.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뜨지 않으면 더 귀찮은 일만 일어날 뿐.

 

“최병장님. 제가 잘 가르치도록 하겠..”

 

“야. 이거 안 보여? 어? 내 생활복이 이 꼴이 나도록 너 뭐 했어?”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빨아서..”

 

“아니. 선생님. 저 이제 곧 전역인데, 이거 빨아서 뭐. 어디 씁니까?”

 

“...”

 

 참자. 참아. 대화해봐야 이 썩을 양반한테는 뭐 말도 안 먹힌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덜덜 떨어대는 후임 놈의 손을 낚아채었다.

 

“야. 병장님에게 똑바로 사과했어?”

 

“..예. 했습니다.”

 

 한 몇십 분은 갈굼을 당했는지 애 꼴이 말이 아니다. 이 양반 입 터는 거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좀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눈썹을 한껏 굳히며 녀석에게 강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어서 다시 사과해.”

 

“..예. 죄송합니다! 앞으로 안 그러겠습니다!”

 

“최병장님. 이제 그만..”

 

 꾸벅 허리를 90도까진 내린 이 녀석의 행동에 나는 이 정도면 되었다는 식으로 어서 자리를 뜨려 들었다. 하지만 내 예상보다 이 양반은 꼬였으면 더 꼬였지 덜 꼬인 양반이 아니었다.

 

“아니. 니들끼리 뭐하냐? 야. 다 됐고, 가서 얼른 내 생활복 빨아와라.”

 

“...”

 

 뒤에서 들려오는 사람 성질을 긁는 목소리에 내 정신줄이 뚝-하고 머릿속에서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혀를 끌끌 차대는 이 말년병장의 행동에 후임의 어깨가 덜덜 떨리는 걸 본 나는 곧장 등을 돌려 어떻게 하면 이 녀석을 더 갈굴지에 대해 고민하는 병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는 나도 모른다.

 

“최병장님. 그쯤 하시죠.”

 

“..어? 이 새끼 봐라?”

 

 이 새끼는 뭐. 댁이랑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더는 이 양반을 상종하기 싫다. 노려보든 말든, 어쩌라는 건가.

 

“요새 선진병영이니, 군내 부조리 철퇴니. 그런 이야기 돌고 있는 거 모르십니까?”

 

“어어? 어?”

 

“제 분대원은 갈궈도 제가 갈굽니다. 병장님께서는 어서 생활복이나 주십시오. 내일까지 돌려다 드리겠습니다.”

 

 우리 애들은 갈궈도 내가 갈군다. 내 당당한 태도에 병장의 얼굴이 일그러지다 못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거 한 대 칠 분위긴데. 때릴 거면 때려라. 댁이랑 나랑 같이 어디 행보관 앞까지 가보자.

 

“이..이 새끼가..꼴에 분대장 달았다고 어?”

 

“분대장을 제외한 다른 일반 병사들이 밑에 애들 갈구면, 요새 큰일 납니다. 거기다 타 소대신데, 목을 그렇게 뻣뻣하게 세울 일도 없잖습니까.”

 

“뭐..뭐?”

 

“분대장의 권한도 없으신데. 그만하시죠?”

 

 그렇게 곧 전역을 앞둔 양반과 눈싸움을 하고 있자니, 내 뒤에 있던 후임 놈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이 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짜샤, 너 때문에 내가 이 양반한테 한 대 얻어맞게 생겼잖아.

 

“새끼가, 위도 없고 아래도 없다 이거지?”

 

“예. 없습니다.”

 

“..야. 야. 이리로 와 봐. 와, 새끼. 이거.”

 

‘올 게 왔구나.’

 

 어디를 맞아야 잘 맞았다고 소문이 날까, 광대뼈나 턱주가리는 좀 위험하겠고. 차라리 코나 한 방 맞고 군 병원에나 다녀올까. 하는 잡생각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이 쓰레기와 나 사이로 스윽 들어와 각자의 어깨 위로 양팔을 올리는 게 아닌가. 이 익숙한 냄새, 담배 냄새다.

 

“우리 귀여운 후임이랑.”

 

툭-

 

“우리 착한 동기가 왜 이렇게 싸울까?”

 

“..꼴초뱀.”

 

“응? 왜 그렇게 얼굴들 굳히고 있어?”

 

 생활복 위로 담배 냄새를 가득 묻힌 이 양반의 등장에 나와 병장의 시선이 사이에 끼인 그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야 뭐, 선임의 얼굴을 보니 그러려니 하는데 병장은 생각이 좀 달랐나 보다.

 

“야. 꼴초야. 너 후임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냐?”

 

“응? 아니 뭐. 지 할 일 잘만 하는 녀석인데 내가 뭐라 할 게 있어?”

 

“이거 안 보여? 선임인지 후임인지 구분도 못 하는데?”

 

“야야. 너무 그렇게 성내지 마라. 우리가 이제 무슨 힘이 있냐? 곧 제대할 녀석들인데.”

 

 여전히 숨을 씩씩거리는 제 동기의 말에도 평소와 같이 능글맞은 태도로 구는 선임의 모습에 나는 기가 차다 못해 피식-하고 코웃음을 내었다. 내가 그러든 말든 꼴초뱀은 화를 식후지 못하는 제 동기에게 평탄한 어조로 계속해서 혀를 놀렸다.

 

“우리 곧 있으면 전역이잖냐. 네가 이쯤 해라.”

 

“전역이고 나발이고, 비켜 봐. 씨발.”

 

“하하. 너 진짜 그러다 일 난다?”

 

“일은 내가 낼 테니까, 비켜 보라고.”

 

 어떻게든 내 얼굴에 주먹 한 방은 날리겠다고 몸을 들이미는 동기의 모습에 꼴초뱀은 능글맞은 웃음 대신 차가운 얼굴로 돌변했다. 이 양반, 얼굴이 뭐 이리 쉽게 바뀌어?

 

“...야. 우리 행보관이랑 중대장. 곧 진급인 거 몰라?”

 

“..뭐?”

 

“곧 행보관은 상사 끝물 달고, 중대장은 이제 위로 올라가려 하는데. 병사들 사이에서 요새 말 많은 군내 부조리나 선임이 후임 폭행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아주 좋아라 하시겠다?”

 

“너 나 협박하냐?”

 

“협박이 아니지. 이건 충고야. 너 가뜩이나 애들 마음의 편지도 많이 받아서 행보관이 주시하고 있는데, 전역 직전에 사고 치면 요새는 영창이 아니라 바로 군기 교육대야.”

 

“...”

 

“군기 교육대, 너도 알지? 거기 가면 바로 빨간줄이다?”

 

“...씨발. 아, 몰라. 그래. 알겠으니까 어깨나 풀어. 새끼야.”

 

“옳지. 옳지. 우리 동기, 같은 날 전역해야지.”

 

 이 양반, 여전히 혀놀림 하나는 기가 막히다. 저 열 뻗친 막장 인간을 잠재우다니. 꼴초뱀의 반협박 반설득에 넘어간 병장 꼰대는 그렇게 다 젖은 생활복을 재빨리 갈아입곤 꼴초뱀에게 건네고 생활관으로 돌아 들어갔다. 그리고 그 젖은 생활복을 받은 꼴초뱀은 멀뚱멀뚱 서 있는 우리들의 앞으로 싱긋이 웃으며 한쪽 팔을 들어 올린 채로 걸어왔다.

 

“요! 기다렸냐? 귀여운 후임들아?”

 

“...기다리긴 누가 누굴 기다립니까? 어서 생활복이나 내놓으십시오.”

 

“아 거, 새끼. 내가 네 얼굴에 멍 하나 생길 뻔했던 걸 빼줬는데 그렇게 야박하게 굴기냐?”

 

“생기긴 뭐가 생깁니까. 어서 내놓으십시오. 이건 이 녀석이 해야할 일입니다”

 

 네네. 알겠습니다. 분대장님. 꼴초뱀에게서 뺏은 생활복을 뒤에 있는 후임에게 건네주니 이 녀석, 그 사이에 맘고생이 심했는지 엉엉 울고 자빠졌다. 그런 녀석의 어깨 위에 또 팔을 걸친 꼴초뱀은 내 어깨에도 나머지 팔을 두르곤 생활관 복도를 걸어나갔다.

 

“얌마. 분대장 달았다고 너무 그걸로 밀어붙이려 하면 안 돼.”

 

“..까짓것 받은 거. 제대로 써먹는 게 낫지 않습니까?”

 

“노노노. 그러면 안 돼. 자고로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뭐가 일어나는 줄 아냐?”

 

“? 뭡니까?”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꼴초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후임도 꼴초뱀의 말에 궁금하기는 한 지, 우는 것을 멈추곤 자기 최선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 우리들의 기대가 퍽 즐거운 것인지 꼴초뱀은 검지들을 까닥이며 답을 내놓았다.

 

“바로 대화지.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지. 서로 쓰는 언어가 다른다고 한들, 어떻게든 서로의 대화를 나누려 들지.”

 

“..너무 당연한 걸 내놓으십니다?”

 

“아니. 여기서 더 나아가면 대화를 통해서 상호 간의 위치를 잡아.”

 

“예?”

 

“자. 봐라. 너는 분대장, 나는 말년병장. 그리고 이 녀석은 일병. 우리 사이에는 대놓고 계급이 있지? 이게 사람이 알게 모르게 대화를 통해서 서로 간의 위계를 형성하려 해.”

 

“너무 앞으로 나가는 거 아닙니까? 친구끼리는 그런..”

 

“친하지 않은 친구끼리는 어느 정도 위계가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진짜 평등한 관계를 추구하는 관계면 그게 진짜 친구고. 케케케!”

 

 유쾌하게 인간관계의 관계성을 읊는 꼴초뱀의 모습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세상 사는 거 힘들게 사는 양반이다. 꼴초뱀은 이야기가 덜 끝났는지 아니면 훌쩍대는 후임 놈의 관심을 더 끄려는 것인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대화가 발생, 대화를 통해 인간관계를 형성. 그러고 나면 뭐가 일어나게? 어디, 우리 일병친구 이야기나 들어볼까?”

 

“..어..위계가 발생했으니..정치?”

 

“오! 맞아요! 굿 엔서! 정치! 정치가 발생한다! 이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분대장님의 행동도 정치의 일환에 가깝지? 제 위치를 이용해서 선임을 누르려 했으니까.”

 

“...절 뭐로 만드십니까?”

 

 왜 갑자기 나를 TV 속 정치인으로 둔갑을 시키나. 꼴초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일병 놈도 울음을 그치곤 마치 전래동화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동글동글한 눈동자로 꼴초뱀의 얼굴을 보고 있다. 이런 거 하나는 잘하는 양반이에요. 

 

“야. 이게 정치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 줄 아냐? 어?” 

 

“정치면, 제가 위지. 저 미친개가 윕니까?”

 

 까짓것 분대장도 달았겠다. 이제 행동에는 거침이 없어도 그만 아닌가. 그런 내 생각에 꼴초뱀은 혀를 쯧쯧 차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뜻이야?

 

“쯧쯧쯧. 괜히 TV에 나오는 정치인들이 행동 하나하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아니라는 말씀.”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이게, 정치적인 결과를 내고 싶다면 말이다. 자기 위치도 중요하지만, 이 행동의 배경이라던가, 밑밥이라던가를 까는 것도 중요하거든.”

 

“그..그거 혹시 명분이라고..”

 

“옳지! 이 일병, 똑똑하네! 마! 명분! 정치에는 명분이 중요하다! 이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분대장님의 행동에는 명분이 있긴 했지만 그걸 온전히 못 쓴 케이스지!”

 

“거기에서 뭘 더 합니까?”

 

“자고로 사람을 가지고 놀려고 한다면 말이다. 너처럼 카리스마를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상대가 꼼짝 못 하게 만들 이유를 먼저 들이대야 해. 나처럼. 어?”

 

“뭔 그런..”

 

“정당성이라는 게 말이다. 이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지위도 좋지만, 동시에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에 있어 정당함과 배경이 있어야 해. 네 행동은 정당하기 보다는 감정적으로 나서서 일어날 뻔한 일이고.”

 

“대화하는데 거기까지 생각한답니까? 꼴초뱀은?”

 

 그렇게 이 양반의 헛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느새 우리는 생활관의 코앞까지 도착해 생활관의 문을 열어 재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돌아온 것을 본 분대원들이 침상 위로 머리만 빼꼼 내밀곤 손을 흔들어대었다. 우리 분대, 군기는 존나게 빠졌다. 진짜.

 

“자. 넌 어서 가서 빨고 와라. 건네주는 건..꼴초뱀. 꼴초뱀이 해줍쇼.”

 

“응응. 내일 오전에 받으러 올 테니까 대충 침상 위에 던져놔라.”

 

“예. 오늘 감사했습니다.”

 

 한차례 폭풍우를 이겨낸 후임 녀석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꼴초뱀은 턱수염을 만지는 시늉을 하며 껄껄껄-하고 할아버지 웃음소리와 함께 제 생활관으로 걸음을 돌렸다. 괜히 멀어지는 저 양반의 담배 냄새에 나는 고개만 삐죽이 문밖으로 내밀며 멀어지는 그의 등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꼴초뱀! 또 담배 태우러 갑니까?!”

 

“어! 큰일 하나 해냈는데! 담배 한 대 태워야지!”

 

‘..저 인간 폐암으로 죽는다에 내 인생의 한 표 건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간 후방으로 분대장 교육을 들으러 떠났고, 돌아오고 나서 이 후임의 총에 구레나룻을 긁혔다. 씨발. 역시 분대장 딱지 안다는 게 답이었어!

 

47)

 

짹짹-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한적한 오후의 시간대, 울창한 숲속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곁으로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가져다주는 안락함에 저도 모르게 눈이 감기려는 이 축복받은 땅 위로 새하얀 은발을 햇빛 아래서 반짝이는 여성이 제 무릎 위에 놓인 책을 한 장씩 넘겨 가며 독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흐음. 그렇군요.”

 

사락-

 

“후훗. 이건..”

 

 푸르른 하늘을 천장 삼아, 따사로운 햇볕을 전등 삼아 새하얀 종이 위에 쓰인 검은 글귀들을 호박색 눈동자로 쫓아가며 은발의 여성은 찬찬히 한 단어, 한 줄, 한 장을 찬찬히 책의 내용을 음미했다. 조금 더운 듯싶으면 바닷바람이 그녀의 귓불을 스쳐 지나가 그 열기를 몰아내어 주었고, 조금 추운 듯싶으면 따듯한 햇살이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 주니 은발의 여성에게는 참으로 안락한 시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락-

 

“...심심해서 들고나온 책인데, 생각보다 마음에 드네요.”

 

 읽고 있던 책을 보며 만족스럽게 평을 가하는 그녀의 산뜻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들려오자 은발의 여성은 몇 페이지 남지 않은 책을 살포시 덮으며 고개를 뒤로 돌려 자신을 찾아온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머. 무슨 일이죠? 꼬마 아가씨?”

 

“아..그게. 저..”

 

 사박-사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찾아온 흰 제복에 분홍색 뱃지를 단 남색 머리카락 소녀의 등장에 은발의 여성은 고개를 살짝이 옆으로 뉘며 싱긋이 눈웃음을 지어 보내었다.

 그런 그녀의 호응 탓인지, 한껏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던 소녀는 제 품에 안긴 음료수 캔을 그녀에게 빠르게 내밀었다.

 

“거..검문소의 일 힘드시죠!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어머. 고마워요. 안드바리양.”

 

“아..아니에요. 헤헤..”

 

 은발의 여성, 블랙 리리스는 안드바리가 건네어 준 음료수 캔을 살포시 받아들이며 배시시 웃음을 짓는 안드바리에게 고개를 살짝이 숙였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안드바리는 꾸벅 허리를 숙이곤 다시 자신이 근무하는 비축창고에서 그녀들을 바라보던 보급계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쪼르르 내달려갔다.

 

 소녀의 귀여운 달음박질을 바라보던 블랙 리리스는 눈웃음을 지은 채 제 손에 들린 음료수 캔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흐음. 정말이지. 귀여운 분들이네요.”

 

딸-깍!

 

 안드바리가 건네주고 간 캔 뚜껑 위의 따개를 가볍게 열어젖힌 블랙 리리스는 단숨에 캔의 내용물을 목구멍 너머로 들이켰다.

 

‘레몬향이 강한 음료네요. 나쁘지는 않아요.’

 

 뜨거운 햇볕 탓에 갈증을 느끼던 찰나, 시원한 음료를 한껏 들이켜 말라가던 제 목구멍을 채운 블랙 리리스의 시선이 푸르른 하늘 위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을 향했다.

 모양새도 형태도 불규칙한 구름이 틀림없었는데, 어느새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 속의 구름은 점차 한 남성의 얼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정말 주인님이 코앞에 계신 데, 저는 여기서 뭘 하는 걸까요. 하아.”

 

 아까까지의 여유로움 대신 한껏 불평이 드러난 얼굴로 푸르른 하늘을 응시하는 블랙 리리스, 그녀는 지금 제 주인의 곁에 있지 못한 자신의 상황이 너무나 애처로웠다. 무려 몇 날 며칠을 기다려온 주인과의 첫 만남이자 재회가 아니었는가.

 

“어머, 주인님!...리리스는 착하게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냐.

 

 자신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와의 대화, 언제나 같은 대사를 내뱉을 뿐인데, 자신의 주인은 언제나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제 말에 일일이 대답해주었다.

 그것이 얼마나 기쁘고 슬프던가. 제 본심을 그저 그에게 표출하고 싶은데, 준비된 말 이외에는 다른 말을 내뱉지 못하던 쇠사슬에 묶여있던 그 시절, 그때를 떠올리면 블랙 리리스는 아직도 가슴의 한쪽이 시큰거렸다.

 

“..주인님. 하아. 주인님..”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그저 무엇인지도 모를 가림막 너머로 다가왔던 그의 손길에 환희에 춤을 추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그의 채취도, 목소리도, 얼굴도, 숨결도 그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심한 제 주인은 자신의 환희도 모른 채 자신을 이 황량한 흙바닥 위에 배치하였으니 그녀의 상실감은 배로 다가왔다.

 

“주인님. 리리스는 너무 슬퍼요. 주인님이 계신 곳에서 함께 하지 못 한다니..”

 

 마치 비극의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구름 위에 그려진 제 서방의 얼굴을 바라보는 블랙 리리스의 눈물이 글썽이는 호박색 눈동자가, 일순간 좌우로 갈라져 내렸다.

 

“아아. 주인님. 어째서 이런 방치 플레이를..리리스는 너무 슬퍼요.”

 

 문제는 이런 비극에 가까운 상황마저 그녀에게는 진정한 주인님이 내려주는 하나의 시련..이 아닌 플레이로 받아들여졌다, 블랙 리리스는 제 주인님의 곁에 다가가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에 불만족과 희열감을 동시에 느끼며 다시 검문소 앞에 놓인 의자 위에 앉으려 허리를 내리려 들었다.

 

 그러나 그때, 쭉 펼쳐진 흙길 위의 언덕 너머로 방문을 알리는 차의 엔진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오자 책을 들어올리려던 그녀의 손길을 우뚝 멈추었다.

 

부-우웅!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요?”

 

 앉히려던 엉덩이를 다시 일으키고선 블랙 리리스는 제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다가오는 트럭을 반길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그녀의 코앞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멈추어서는 트럭의 좌우로 문이 벌컥 열리며 그 문 너머로 연갈색의 군복을 입은 두 병사가 급한 걸음으로 그녀의 앞으로 뛰어내렸다.

 

“피..필승!”

 

“필-승!”

 

“어머. 필승이랍니다?”

 

 뻣뻣하게 굳은 몸 동작과 식은땀을 줄줄 흘려대는 두 스틸라인의 병사,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의 경례에 블랙 리리스 역시 가벼운 경례를 올리며 그녀들의 얼굴을 훑어내렸다. 그런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것인지,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은 더욱더 식은땀을 뺨 위로 흘러내리며 여전히 굳은 목소리로 자신들의 방문 목적을 밝혔다.

 

“영양 생산시설의 잉여 생산물들을 가져왔슴다!”

 

“검문을 부탁드립니다!”

 

“후훗. 네. 알겠어요.”

 

 분명 산뜻하기 그지없는 회답이건만, 또 하늘도 이리 쨍쨍하기 그지없건만, 어째서 그녀의 주변으로는 차가운 냉기가 휘몰아치는지.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은 말로만 들었던 연결체에 가까운 그녀의 분위기에 목구멍을 움츠렸다.

 

끼-익

 

 어느새 트럭에 실린 컨테이너의 문을 연 블랙 리리스의 부릅뜬 두 호박색 눈이 햇빛이 들지 않는 컨테이너의 내부를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박스들 위의 봉합 테이프에 뜯었던 흔적이 있는지, 또 어디가 뭉그러졌거나 끄트머리가 튀어나왔던 흔적이 있는지, 꼼꼼한 조사를 마친 그녀의 눈매가 처음과 같이 생글생글 눈웃음으로 돌아섰다.

 

“어머. 오늘도 멀쩡하네요?”

 

또-각 또-각

 

“예...예! 그렇슴다!”

 

“후훗. 너무 그렇게 움츠러드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말이죠? 제 주인님의 스트레스를 올리는 행위만 하지 않는다면..”

 

 어느새 자신의 곁으로 온 블랙 리리스의 입술에 화들짝 놀란 브라우니는 뒤에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히-익!하고 눈물을 글썽일 수밖에 없었다.

 

“...저는 아-주 착한 리리스랍니다?”

 

“..히끅.”

 

“안드바리양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어서 가보세요.”

 

“ㅇ..예! 감사합니다! 브라우니! 얼른 올라타요!”

 

“...피..필승.”

 

“후훗. 필승.”

 

 비틀거리는 브라우니를 태운 트럭이 블랙 리리스라는 검문소를 지나 비축창고로 들어서자 그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블랙 리리스는 갑자기 풍겨오는 비릿한 내음에 코를 킁킁거렸다.

 

“..어머. 조금..소변을 지렸나 보네. 흐흥. 너무 겁을 줬나?”

 

 냄새의 정체와 출처를 동시에 파악해낸 블랙 리리스는 한 손으로는 코를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 비릿한 향을 앞에서 치우려는 것처럼 손사래를 쳐대었다. 그렇게 무섭게 굴지는 않았는데, 겨우 이 정도의 살기에 덜덜 떨다니.

 

‘이곳 오르카 저항군의 수준을 알겠네요. 정말이지. 제 주인님께 어울리지 않는 분들이군요.’

 

 요안나 아일랜드, 꿈에도 그리던 제 주인이 최고위 인물로 자리 잡은 이 땅은 블랙 리리스에게 썩 그리 만족스러운 공간은 아니었다. 생산 인원들이야 주인의 수하들이니 그렇다 치지만, 파견 인원들의 실태와 그 때문에 고생하는 제 주인의 사연을 들은 이후부터 이 땅은 그를 고생시키기 위한 자리이고 저 파견 인원들은 블랙 리리스에게 걸림돌보다 더한 무언가였다.

 

“..정말. 제 주인님과 저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하는 땅인데. 어째서 저런 쓰레기들이 많은 건지.”

 

“...뭐라는 거야. 이 해충이.”

 

 분명 주변에 아무도 없을 터인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블랙 리리스의 고개가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햇빛을 등진 한 요정이 홍채가 옅은 보랏빛 눈동자를 그림자 아래서 빛내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도 블랙 리리스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머? 스토커.”

 

“누가 누구보고 스토커래. 햇츙.”

 

“그러는 너야말로 이곳 어디에 해충이 있다는 거야?”

 

“너말고 따로 있어? 해충? 히히히.”

 

슈-륵!

 

 마치 오래 사귄 친구 사이와 같이 서로를 익숙하게 비하하던 그녀들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간이 검문소 옆에 놓인 의자로 걸음을 옮겼다. 블랙 리리스는 의자 위에 올려두었던 책을 다시 펼쳐 제 무릎 위에 얹었고, 리제는 눈썹을 반쯤 가라앉힌 채 그녀의 행동을 주시했다.

 

“뭐 하는 거야? 햇츙.”

 

“..보면 몰라? 독서 중이잖아.”

 

“뭐 읽는데?”

 

“그냥. 중앙 건물 지하에 도서 보관함이 있길래 읽는 중이었지.”

 

 블랙 리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책을 들어 겉표지에 박힌 제목을 맞은편의 리제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리제는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다 이내 눈썹을 한껏 찌푸렸다.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가는 조숙한 몸가짐>? 이런 걸 왜 읽는 거야? 햇츙.”

 

“너 같은 무대포야 모르겠지. 우리 주인님에게 어울리는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수적인 이야기라고.”

 

“히히히! 그런다고 주인님이 널 바라봐 주실 것 같아?”

 

“흥! 남이사, 뭘 하든.”

 

 자신을 향해 입을 가리고 비웃음을 날리는 리제의 행동에도 블랙 리리스는 가볍게 그것을 무시하곤 다시 읽고 있던 책의 페이지 위에 적힌 글귀들을 찬찬히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 행동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블랙 리리스의 행동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리제는 가볍게 발을 공중에 둥둥 띄우고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해충. 여기 일은 할 만해?”

 

“..그러는 너야말로 왜 영양 생산시설로 안 가고 여기에 있어?”

 

“그건 네 알 바가 아니야. 해충.”

 

“..어디 내가 짚어볼까? 너, 새로 생긴 자매들이 거북해서 그러는 거지?”

 

 장난기가 가득 담긴 블랙 리리스의 눈웃음에 리제의 얼굴이 뾰로통하게 바뀌었다. 핵심을 찌른 탓인지, 리제는 등에 달린 기동장치를 퍼덕일 뿐,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제 악우의 그러한 모습에 블랙 리리스는 읽던 책에서 눈을 떼고는 그녀의 요구대로 대화를 이어갔다.

 

“네 그 히스테릭한 언니 개체도 없잖아. 그럼 여기서 네가 맏언니인데, 조금 더 노력해야지 않겠어?”

 

“..언니라고 불릴 만큼 걔들한테 정이 들지도 않았어. 걔들도 마찬가지고.”

 

“어머. 나는 내 동생들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너는 배부른 소리나 하고 있구나?”

 

“그건..네가 동생들이랑 친하니까 그런 거지. 해충.”

 

“후훗. 언니가 할 게 뭐 별거 있니. 그냥 동생들이 바라는 거 조금 들어주고, 살갑게 굴어주면 끝이지. 네겐 너무 어려운 이야기려나?”

 

“...몰라. 주인님의 곁이 아닌 게 더 싫어. 이제야 주인님을 만났는데, 맨날 하는 일이라곤 그 밀밭에서 드리아드 대신에 해충을 잡아주고 아쿠아의 홍차 생산시설에 기웃거리는 해충을 잡는 게 다 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스토커. 그 요리사도 마찬가지고.”

 

 리제의 볼멘소리에 블랙 리리스는 여전히 싱긋이 웃음을 지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나긋나긋한 어투가 영 별로였던 리제는 핵심을 찌르는 대목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너, 그 여자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

 

“...그 여자가 아르망 추기경이라면, 응. 이해했어.”

 

“히히히! 너도 성격 많이 죽었네? 해충?”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잖아. 안 그래?”

 

“몰라. 그런 말. 나는 지금 당장 주인님의 곁으로 가서 그 근처에 있는 모든 해충을 썰어 버리고 싶을 뿐이야. 아아. 주인님. 내가 사랑하는 주인님.”

 

“...스토커. 잊지 마. 우리는 이곳에서 불한당에 지나지 않아.”

 

 점차 제 속에 감추어두었던 광기를 드러내는 리제의 모습에 블랙 리리스는 눈웃음을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의 손에 들린 거대한 가위를 주시했다.

 여차하면 그녀를 제압할 생각까지 가지고 있던 블랙 리리스에게 리제는 옅은 보랏빛 홍채를 들이대며 속사포와 같은 말투로 그녀의 속내를 들추어내려 들었다.

 

“어째서? 왜? 우리가 주인님을 따르는 게 뭐가 틀려? 응? 해충. 네가 네 입으로 이야기해 봐. 우리 주인님이 왜 여기서 돌부리야?”

 

“...아르망 추기경의 이야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구나. 스토커. 너라면 그럴 줄 알았지만.”

 

“너도 지금 당장 주인님의 곁으로 가서 안기고 싶을 거 아니야? 그렇게 주인님을 찾아 헤매었는데 왜 넌 여기서 평온한 척이나 하고 있어? 해충. 진심을 꺼내 봐.”

 

“...야. 스토커. 나라고 괜히 참는 줄 알아?”

 

 아까까지의 평온한 어조 대신, 날카롭게 벼려낸 칼날과 같은 목소리로 돌변한 블랙 리리스의 언동에 리제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히히히! 그래! 그 얼굴이야. 해충. 너와 내가 뭐가 달라? 너도 주인님의 얼굴에 얼른 달려들고 싶지? 근데 왜 참아? 드디어 눈앞에 주인님이 나타났는데, 왜 이렇게 한가롭게 책이나 읽으면서 이상한 업무나 하고 있어? 응? 대답해 봐.”

 

 점차 광기를 표면상으로 꺼내는 리제의 모습에 블랙 리리스는 눈 아래를 꿈틀거렸다. 지금 저 소녀의 손에 들린 가위는 아마 이곳에서 가장 강한 무기류에 속할 터, 다른 무엇도 아닌 그녀의 전용 장비이니 그녀 손에 들려있는 이상 제 기능을 온전히 발휘할 것이다.

 

‘...하아. 주인님. 이 착한 리리스가 주인님을 대신해서 이 스토커를 말릴게요.’

 

 그런 그녀의 폭주를 막을 사람은 그나마 친분이 있는 이 블랙 리리스 뿐, 그 사실에 블랙 리리스는 날카로운 눈을 거두고 그녀가 아르망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리제에게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 주인님은 오르카 1호의 함장이자, 저항군 총사령관인 이 세계의 유일한 남자가 아니야.”

 

“..그 멀대 같은 인간을 이야기하는 거야?”

 

“그래. 지금 이 세상은 주인님과 우리가 있던 오르카 1호의 세계가 아닌, 다른 곳이니.”

 

“그럼 그 인간을 죽이면 우리 주인님이 유일한 인간이라는 소리잖아. 히히히! 아아. 주인님. 주인님에게 선물할 것이 생겼어요. 히히히!”

 

“..그 인간을 죽이면, 그 휘하에 있는 오르카 저항군은 어떻게 하려고?”

 

“...”

 

 블랙 리리스의 단출한 질문에 가위 날을 만지던 리제의 손끝이 멈추어섰다. 오르카 저항군, 블랙 리버의 6대 지휘관부터 펙스의 레모네이드 알파의 군대. 그리고 라비아타를 중심으로 형성된 메이드 군단. 그 머릿수는 족히 수백을 넘어 천에 달할 레벨이니, 아무리 시저스 리제라 하더라도 쉽게 볼 상대들이 아니었다.

 현실을 직시한 듯한 리제의 모습에 블랙 리리스는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곤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르망 추기경의 말로는 우리 주인님은 지금 심판대에 오른 상태야. 스토커.”

 

“..왜? 왜 우리 주인님이 그 녀석들에 의해 심판대에 올라? 응? 그 녀석들이 무슨 연유로?”

 

“..만약 우리 주인님이 우리가 있던 오르카 1호로 오시고, 거기에 새로운 인간이 등장한다면 넌 어떻게 하겠어?”

 

“..죽일 거야. 우리 주인님의 해가 될 거대한 해충이니까. 내 손으로 두동강을..”

 

“그래. 네 입으로 잘 이야기했네. 스토커.”

 

사락-

 

 제 말이 곧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돌아오자 리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내렸다. 그런 그녀의 행색의 변화에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던 블랙 리리스는 가만히 읽던 글귀에 다시 눈을 돌렸다.

 

“잘 알겠지? 우리 주인님은 이곳에서 시험을 치르고 계신 거야. 그 간악한 오르카 녀석들로부터 말이야.”

 

“..그래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먼저 아르망 추기경의 계획은 주인님에게 걸린 이 무거운 짐을 내리는 것부터라고 했어.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넌 네 할 일이나 잘해. 스토커.”

 

“...칫.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주인님께 못 다가갈 이유가 어디 있어? 해충.”

 

“네 왼손 검지나 한번 볼래?”

 

“햇츙?”

 

 블랙 리리스의 말에 리제의 눈이 제 왼손 검지로 돌아섰다. 흰색의 공예용 장갑 위에는 있어야 할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그 탓인지 리제의 얼굴이 한층 더 뾰로통해져 이제는 그녀의 입술이 볼록 앞으로 튀어나오기까지 했다.

 

“..주인님이 내게 주신 반지, 없어.”

 

“그래.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요리사도 없고. 아르망 추기경도 없어. 반지가 없는 우리가 주인님께 오르카 1호의 리리스니, 리제니 해봐야 주인님께서도 쉽사리 믿지 않으실걸? 알잖아. 우리 주인님이 되게 신중한 인간님이라는 걸.”

 

“..왜야? 주인님이 내게 주신 이 가위와 같은 소중한 물건인데, 왜 없어?”

 

“...주인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건 변함이 없어. 스토커. 너무..”

 

“사랑하시면서, 왜 우리를 피해? 우리가 두려워지신 거 아니야? 넌 안 두려워? 해충?”

 

“...하아. 정말.”

 

 급기야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상실했다는 슬픔과 자괴감에 빠져드는 리제의 목소리에서 울먹임이 스며 나오자 블랙 리리스는 콧구멍으로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이 시시각각 감정이 폭발했다가 또 주눅이 드는 애증이 넘치는 친구 탓에 독서에 열중하기 힘들었던 탓이었다.

 

“..아르망 추기경이 그랬잖아. 반지는 통행료라고. 그리고 주인님이 왜 우릴 미워하셔? 그 생산 인원들을 지키는 중요한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는데.”

 

“..너무 비싸. 주인님을 만나서 반지를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왜 뺏어가? 넌 아무렇지도 않아? 해충?”

 

“...동감이야. 하지만 스토커, 네가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는 거 같은데.”

 

“? 뭔데?”

 

 뒷말을 흐리는 블랙 리리스의 말에 리제는 그제야 왼손 검지에서 눈을 떼고는 시선을 돌려 블랙 리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어디에 숨겨 놓은 지도 모를 수건을 꺼내어 얼굴의 반을 덮은 채 황홀경에 빠진 해충이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하아아..우리 주인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나는 반지쯤은 수백 개라도 내놓을 수 있어. 너도 안 그래? 우리가 진짜 블랙 리리스와 시저스 리제라는 사실을 깨달은, 주인님이 우리에게 다시 반지를 안 주시겠어?”

 

“...야. 해충. 그 수건..”

 

“어제 꺼야. 하아..주인님이 착한 리리스를 위해서 세탁 바구니에 남겨두신, 진득한..”

 

“햇츙!”

 

슈-칵!

 

“-뭐야! 너! 갑자기!”

 

“해앳츄우우우!”

 

 갑작스레 자신의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수건을 노리고 쌍칼을 휘두르는 리제의 행동에 블랙 리리스는 재빨리 의자 위를 박차고 날아올라 가벼운 몸놀림으로 그녀의 공격을 이리저리 회피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들의 곁을 부-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지나가는 트럭의 운전석과 조수석에 있던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스토커와 해충의 싸움을 관전했다.

 

“...레후 상뱀. 저거..상뱀은 피할 수 있슴까?”

 

“..저건 우리 이뱀도 못 해요. 얼른 이곳을 빠져나갈 궁리만 하죠.”

 

 엑셀에 올려둔 오른발에 힘을 꽉 준 레프리콘은 재빨리 챙! 카앙! 햇츙! 하는 굉음이 울려 퍼지는 비축창고의 검문소를 지나쳐 재빨리 다음 목적지인 부품 생산설비로 트럭을 몰았다.

 

‘세상에. 저런 괴물들이..’

 

 앞으로는 더욱더 가라를 쳐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던 그녀가 잠깐 점심시간 이후 모습을 감춘 제 선임의 충고를 되새기던 중, 그녀 곁에 앉아있던 그녀의 후임이 그녀의 전투복 윗단을 쭉쭉-잡아당겼다.

 

“? 뭔가요. 브라우니.”

 

“그..상뱀. 제가 부끄러워서 지금껏 말 못 한 것이 있는데 말임다.”

 

 어딘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 허리를 꼬아대며 얼굴을 붉히는 제 후임의 행태에 레프리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브라우니는 부끄러움을 참아내며 그녀에게 여태껏 숨겨왔던 작은 비밀을 꺼내었다.

 

“그..블랙 리리스님이 제 귓가에 속삭일 때, 살짝 지렸슴다.”

 

“...예? 지금..”

 

“그..너무 쫄아서 그랬슴다.”

 

“...허이구!”

 

 아주 그냥 별의별 소리를 다 듣는다. 레프리콘은 왼손은 운전대에 올린 채 오른손으로만 제 이마 위를 탁-내리쳤다. 그러자 브라우니의 얼굴이 시뻘겋다 못해 펑 터지려는 폭탄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던 레프리콘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긴 저라도 지렸겠죠. 저런 살기에..’

 

 동부의 핵심전력이라는 앨리스마저 단숨에 격추한 살기인데, 제 후임이라고 별다를 것이 있겠는가. 레프리콘은 울먹거리는 후임의 등을 토닥이며 앞으로 갈 공장에 무엇이 있는지를 떠올렸다.

 

“우선 부품 생산공장에 남는 의복이 있을 거예요. 브라우니. 그러니까 거기 분들에게 부탁해서 한 벌 받아보죠. 갈아입는 건..여기서 갈아입고 가면 아무도 눈치를 못 챌 거예요.”

 

“..네. 상뱀. 고맙슴다.”

 

“..후우. 얼른 가지요.”

 

부-우우웅!

 

 더욱더 빨리 생산공장으로 향해야 할 이유가 생긴 레프리콘은 거친 흙길 위를 질주하며 창문 너머로 푸르른 바다를 응시했다. 이제 막 수송함대가 떠나기 시작한 것인지, 요안나 아일랜드의 절경 속에 회색빛의 수송선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아도 물자를 한참 가득 실은 수송함대의 갑판의 모양새에 레프리콘은 속으로 이곳이 드디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새로운 인간님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이제 우리에게 무서울 것이 없겠네요. 이것만큼은 좋은 일이에요.’

 

부-우우웅!

 

 가라치는 것이야 어떠하리, 삥땅 좀 못 친다고 해서 어떠하리. 이제는 저렇게 많은 물자가 전방으로 수송되기만 한다면 전방의 상황도 나아질 터. 레프리콘은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며 트럭의 엔진 구동음에 몸을 실었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그 문제는 제 후임에 관련된 문제였기에 그녀는 아직도 몸을 움츠리고 있는 후임에게 담담하게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했다.

 

“브라우니. 나중에 차 세워줄 테니까 제가 컨테이너를 옮길 때, 생산 인원분들에게 가서 잘 부탁해봐요.”

 

“..상뱀은 같이 안 가십니까?”

 

“이뱀이 자리를 비운 마당에 누가 검사해요? 가뜩이나 그분들의 눈초리가 심한데. 혼자 가 봐요.”

 

“..옙.”

 

 제 선임의 말에 브라우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임의 그런 모습에 레프리콘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후임의 뒤를 따라갔어야 했다.

 

48)

 

“..음?”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온몸을 휘감는 한기에 라붕이 작전관은 문서를 읽어내리던 중 고개를 들어 산 아래턱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뭔가가 한기가 느껴지는 게..

 

“...과민반응인가? 요새 잠을 잘못 자서 그런가?”

 

“폐하. 숙면은 불로장생의 첫걸음입니다. 부디 잠자리가 불편하시다면 개선하는 쪽을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아르망, 말 나온 김에 묻는 건데. 너랑 리리스 애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거냐?”

 

“...”

 

 라붕이 작전관의 째릿한 눈빛과 함께 날아온 회심의 질문에 아르망은 살포시 눈을 감은 채 커브를 돌리며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저렇게 눈을 감고 운전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라붕이 작전관은 더 추궁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제 생각을 그저 읊었다.

 

“요새 말이다. 내가 샤워하는 시간대에, 누가 계속 이상한 신음을 내거든.”

 

“...”

 

“그리고 업무 정산하고 있으면 뒤에서 누가 ‘주인님’하고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

 

“아침에는 누가 내 방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내 앞에 아침 밥상을 차려놓고 가는데, 아니. 맛은 좋아. 덕분에 아침마다 힘이 불끈 솟아오르니까.”

 

“...”

 

“...왜 말을 안 하니?”

 

끼-익!

 

“어라?!”

 

 라붕이 작전관의 이어지는 물음에도 아르망은 그저 시선을 앞으로 둔 채 부품 생산설비 공장이 들어선 공장지대 앞에서 지프차를 멈추었다. 갑작스러운 제동 탓에 라붕이 작전관의 몸이 앞으로 쏠리려 하자 아르망은 재빨리 오른팔로 그의 가슴을 지탱하고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를 향해 보조개를 피워올렸다.

 

“폐하? 소녀들의 사랑을 너무 그리 파고드시면 안 되옵니다.”

 

“...응. 그래. 맞지.”

 

‘그래. 누가 누굴 뭐라 하냐. 내 최애캐들이 나 좋다고 하는 건데.’

 

 아르망의 산뜻한 지적에 라붕이 작전관은 읽고 있던 문서들을 얼굴 위에 덮으며 흐-어어어하는 신음과 함께 이 모든 일의 주범들을 하나둘 머릿속에 그려내었다.

 

‘리리스. 진짜 오르카 1호에서 봤을 때는 눈물이 났는데. 실제로 보니 더 좋기는 하지만..’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담긴 그녀의 모습에 라붕이 작전관은 도리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충 친한 척을 해야 할지, 아니면 그녀에게 좀 더 살갑게 대해야 할지. 분명 설정대로라면 자신을 좋아하기는 할 터인데, 이것이 그에게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리제야, 내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고.’

 

 처음 등장했을 당시, 그 음흉한 탈론페더의 목을 겨누던 그녀의 날카로운 가윗날을 떠올리자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거 하나 캐자고 온종일 게임을 켜두었었는데. 이제는 물거품이 된 그만의 업적이었다.

 

‘소완은..음. 조금 소름이 끼치기는 했지만, 아우로라들이나 포티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은 애는 확실하네.’

 

 소완이 별다른 지시도 없이 주방에 들어서자 그때 당시에는 조금 설정대로 가면 아우로라들이나 포티아들이 고생할 거라 생각을 했었는데 생각보다 소완에 대한 평가는 매우 후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이 읽었던 라스트 오리진의 스토리의 모습에 가까워 잠깐의 향수에 빠졌었던 그였다.

 

‘...맘 같아서는 당장에 다가가고 싶지만..’

 

똑-똑-똑-

 

 라붕이 작전관은 심란한 마음에 검지를 접으며 조수석 옆에 있는 유리창을 두드렸다.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그녀들인데, 이제는 무섭다기보다는 가까이 범접할 수 없는 그녀들의 미모와 아우라에 그는 내심 큰 갈등을 겪고 있었다.

 

‘만약 애들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저 설정에 따라서 좋아하는 거라면 어떡하지?’

 

 얀데레, 한 이성을 너무나 사랑하는 나머지 정신병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모에 요소. 라붕이 작전관은 그것을 꽤 좋아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그녀들의 맹목적인 사랑을 과연 자신은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나.

 

‘제2의 인간이라 그녀들에게 해줄 것도 없고, 시키는 일이라곤 검문소에 생산설비 보호, 거기에 주방장.’

 

“..하아. 내가 생각해도 난 진짜 무능하다.”

 

 라붕이 작전관은 그녀들이 좋다. 처음 만났을 때의 임펙트가 너무 큰 탓에 잠깐 그녀들에게 쫄기는 했으나, 동시에 찾아오는 환희. 하지만 그렇기에 돌아보게 되는 제 모습에 그는 머리를 쥐어 싸맸다.

 

‘내가 뭘 해주기도 어렵고, 어떻게..응? 근데 잠깐만.’

 

 그 순간, 라붕이 작전관은 제 주변 상황에 대해서도 무언가 께름칙함을 느끼곤 반사적으로 목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아르망 역시, 푸른빛의 눈동자를 빛내며 입을 열 준비를 갖추었다.

 

‘...애초에 내가 찾던 여성들은 그녀들이 아니긴 하지만. 아니, 잠깐. 이렇게 내가 서약한 애들이 동시에 다 모일 수 있나?’

 

“...분명 소완이 나한테 했던 말이..”

 

“폐하.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녀들은 폐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것이옵니다.”

 

“응? 아아. 그래. 응.”

 

 무언가 짚일 듯 말 듯 한 단서를 찾아가던 그의 상념 위로 아르망의 격려가 덧씌워지자 라붕이 작전관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아르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본 목적을 위해 움직이려 조수석의 문을 열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선 내 할 일부터 하고 그녀들에 대한 생각을..응? 저건..’

 

 그렇게 공장 설비들을 둘러보던 라붕이 작전관의 눈에 이곳에 지금 있으면 안 될 무언가가 눈에 들어와 그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키며 아르망을 돌아보았다.

 

“오늘 부품 애들은 쉬라고 해뒀는데, 트럭이 와 있네?”

 

“아마 어제 남아있던 잉여 생산물을 가지러 왔을 겁니다.”

 

“흐응..하긴. 여기서 생산하는 양이 얼만데.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뚜벅-뚜벅-

 

 수송 인원들을 늘릴까, 라붕이 작전관은 트럭 위에 실리는 컨테이너를 바라보다 이내 공장 건물 사잇길로 걸음을 옮겼다. 하여튼 여기 애들의 상태나 확인하고 그가 자리를 뜨려던 찰나, 그의 귀에 무언가 큰 목소리로 외쳐대는 두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제 사정상 한 벌만 가져가겠다는 건데 왜 이러심까!”

 

“안 돼! 맨날 그렇게 말하고는 너희들 돌아갈 때 가져갔잖아! 안 돼!”

 

“아..그..그것도 맞긴 함다만! 이건 좀 사정이 다름다! 이 손 좀 놔주십쇼!”

 

“싫어! 우리 대장한테 허락받고 가져가!”

 

‘뭐야. 이 목소리는.’

 

 공장의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두 여성의 아옹다옹거리는 목소리에 라붕이 작전관의 눈살이 좁혀들어갔다. 어디선가 보았던 장면, 비슷한 상황. 라붕이 작전관은 느긋한 걸음 대신 빠른 걸음으로, 평온했던 얼굴 대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재빨리 공장의 코너를 빙글 돌아섰다.

 그리고 코너를 돌아선 그의 날카로운 눈에 들어온 것은.

 

“...뭐 하는 거야? 너희들.”

 

“앗! 대장!”

 

“-히익!”

 

 비닐랩에 포장된 스틸라인 제식 전투복을 양쪽에서 쥔 채 대치하고 선 브라우니와 더치걸이었다. 신경전 탓에 라붕이 작전관의 뇌파를 느낄 틈도 없었는지, 브라우니는 그의 등장에 얼굴을 시퍼렇게 질렸고, 브라우니에게서 전투복을 지키려던 더치걸의 지친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대장! 그..그게!”

 

 하지만 라붕이 작전관의 등장에 일순간 더치걸의 손에 힘이 빠진 탓인지, 힘의 방향이 팽팽하던 찰나에 브라우니의 팔 힘으로 가운데에 있던 전투복이 위로 올라가자 중심을 잃은 더치걸의 몸이 옆으로 기우뚱대었다.

 

“어?”

 

“더치걸!”

 

쿵!

 

 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라붕이 작전관의 눈매가 도드라졌다. 브라우니는 제 손에 들린 전투복을 보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더치걸은 옆으로 넘어져 어깨를 부여잡으니 라붕이 작전관은 손에 들린 문서를 바닥에 내팽개친 채 한달음에 넘어진 더치걸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그게 말임다. 대장님.”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더치걸을 넘어뜨린 브라우니가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해보고자 입을 열려 하자 라붕이 작전관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그녀의 변명을 끊어내었다.

 

“...브라우니. 어느 전선이냐?”

 

“에? 예?”

 

“어느 전선이냐고 물었다.”

 

“부..북부 전선임다.”

 

“북부..그래. 알겠다. 돌아가 봐라.”

 

“...아. 예! 알겠슴다! 더치걸씨! 죄송함다!”

 

 어딘가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후다닥-트럭 방향으로 내달리는 브라우니의 등을 주시하던 라붕이 작전관의 귀에 넘어진 더치걸의 신음이 들려왔다.

 

“아야야...”

 

“..더치걸. 괜찮니?”

 

“응. 이 정도로 너무 기겁하지 마. 대장. 내가 더 낯간지러워. 헤헤.”

 

“...튼튼하니, 다음 작업 때도 데려가야겠는걸?”

 

“으응. 그건 별론데..”

 

 아까까지의 낮게 깔린 목소리 대신 한층 풀어진 목소리로 자신을 대하는 그의 모습에 더치걸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제 어깨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어내며 무릎을 짚고 일어서려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라붕이 작전관은 그녀의 손을 낚아채곤 자신의 안쪽으로 팔을 당겨 들었다.

 

“읏-차!”

 

“뭐야! 헤헤!”

 

“이러면 더 쉽게 일어나지. 안 그래?”

 

 라붕이 작전관의 손힘이 이끌려 작은 체구를 일으켜 세운 더치걸은 그의 목소리에 한층 더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라붕이 작전관은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측은함이 한가득 담긴 눈으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방금 같은 일. 예전에도 있었냐?”

 

“...으응. 자주는 없었어. 이렇게 대놓고 가져가려는 애들은..”

 

“...그래? 자주는 없었다라. 그러면 종종 있었다는 이야기네.”

 

 더치걸의 대답 속에서 자신의 신경을 긁기 충분한 진실이 들추어지니 라붕이 작전관은 턱을 매만지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쾌청한 날씨, 제 기분대로 차라리 어둑어둑했다면 모를까. 하늘은 너무나 맑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스트레스에 혼자서 중얼거리며 입꼬리를 귀 끝까지 끌어올렸다.

 

“...삥땅을 못 치게 했더니, 강탈을 해간다라..크..크크크...”

 

“..대장? 얼굴이 무서워.”

 

“크크크..크크크크! 이 자식들이..아주 그냥 우릴 물로 보지? 응?”

 

 하늘로 높게 고개를 들어 올린 채 마치 리제와 같이 광기가 한가득 어린 미소를 짓는 라붕이 작전관의 모습에 더치걸은 왜인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하지만 아르망은 도리어 푸른 눈을 빛내며 싱긋이 미소를 지은 채 광소를 연신 내뱉는 그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폐하? 제게 명하실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르망. 내가 지금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예측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폐하. 집합 시간은 오후 9시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아. 그 시간 안에 이 섬의 모든 요안나 아일랜드 소속들을 중앙 회당에 집결시키도록 해.”

 

“..대장?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영문 모를 대화를 나누는 둘의 모습에 더치걸은 여전히 보조개를 한껏 끌어올린 라붕이 작전관과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짓는 아르망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 다 어딘가 미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녀의 착각은 아닐 터.

 두 사람 다 이상해. 더치걸이 그렇게 생각하며 아르망의 미소를 주시할 때,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의 머리 위로 드리우며 남성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더치걸. 난 말이다.”

 

“응?”

 

턱-!

 

 갑자기 제 양어깨에 손을 올리는 라붕이 작전관의 행동에 더치걸은 아르망에게서 눈을 떼고는 자신보다 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방금까지와 달리 한층 침착해 보였다.

 

“삥땅을 치든, 가라를 치든. 사실 별로 손댈 생각이 없었다.”

 

“...응. 그렇게 보이긴 했어.”

 

 라붕이 작전관은 여태껏 직접적으로 파견 인원들을 나무란 적이 없었다. 대신 간접적으로나마 그녀들의 행동에 제약을 건 채로 둘 뿐. 그것만으로도 더치걸은 괜찮았다. 이제는 자신들을 지켜줄 인간이 눈앞에 있으니까.

 

 그런데 4일 내내 동네 오빠처럼 굴던 이 대장의 얼굴이 오늘따라 왜 이리도 심각한 것인가. 더치걸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라붕이 작전관의 닫혀 있던 입술 사이로 짐짓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근데 말이다. 난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서?”

 

“...내 부하들을 물로 보는걸 참을 만큼, 속이 넓은 인간은 아니거든.”

 

“?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대장.”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너에게는 득이 될 뿐. 실은 없다는 소리야. 더치걸. 크크크!”

 

“..무서운 얼굴이네. 대장.”

 

 제 어깨를 붙잡은 채 또 한 번 미친 듯이 웃어대는 라붕이 작전관의 모습에 더치걸은 싱긋이 미소를 지었고, 아르망은 그런 그의 뒷모습에 황홀하다는 얼굴로 그것을 바라만 보았다.

 그렇게, 가라를 친 이프리트와 소변을 지린 브라우니의 환상적인 콜라보로 오르카 저항군의 새로운 막이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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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피곤한데 이럴 때만 글이 써져. 나도 점점 미쳐가는 거지.

너희 근데 이 문학 왜 이렇게 좋아하냐. 살다살다 문학으로 추천 70넘기는 건 처음이네. 그것도 장문 장편인데. 쓰는데 존나 부담스럽잖아.

거기다 뒷내용 암시를 대부분 해버리니까 내 상상력이 살살 파먹히는 기분이다. 집단지성 앞에서 한낱 개인의 무력함을 뼈져리게 느낀다. 진짜. 너희들이 이겼단다. 내 상상력이 졌어.


그리고 라붕이 군대썰은 실화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친구놈 군대썰에 현재 군대 덧씌운 게 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