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메이, 아르망, 레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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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익스프레스 76


"어디 노동조합에서 단체로 투표라도 왔나보죠?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지, 민망해라"


예선결과를 본 그녀는 어차피 본선에서 끝날거라 생각한 듯 투표결과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함내에 있는 선원들과 외근 중인 정찰조들, 그리고 요안나 아일랜드에 필요한 물자들을 배송해주고 있던 그녀였다.


하지만, 바쁜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도 그녀의 순위는 계속해서 차곡차곡 오르고 있었고,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그녀는 결승투표까지 오르게

된 뒤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었다.


"어쩌지? 이러다 진짜 우승하는거 아냐? 근데, 내가 우승해도 괜찮은거야?"


결승까지 간 것만해도 기쁘긴 했지만, 막상 결승까지 오르게 되니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이 정도까지 온 것도 기적이란 것과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시리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해보기도 하는 등 약간 들뜬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적같은 순간에도 불행은 찾아오는 법이었다. 미스오르카 결승 전날 밤, 야간조를 위해 배송을 나갔던 그녀는 엔진불량으로 외딴 섬에 불시착하게 된다.


"이런 병신, 엔진 점검 받는 날이었는데"


미스오르카에 정신이 팔려 엔진점검을 깜빡했던 그녀는 애꿎은 비행장비를 발로 차며 분풀이를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발생한건 결국 분에도

맞지 않는 미스 오르카를 기대하며, 본업에 집중하지 못했던 자신의 실책이란걸 알고 있었기에 발길질을 멈추고 비행장비 옆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꿈 정도는 꿔도 괜찮잖아........."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수만은 없던 그녀는 비행장비에 부착된 gps를 확인했다.

다행스럽게도 정상작동을 알리는 초록 불빛을 번쩍이고 있었고, 24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탐색조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 혹시나 하는 상황에 준비해 온 비상식량이나 먹으며 버티면 되는 상황에, 뜻 밖의 일이 발생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섬 전체를 낮으로 착각하게 할 정도의 강한 조명과 함께 수십대의 드론, 그리고 해설전담인 스프리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2회 미스오르카 시상식은 우승자를 위해 특별히 현장에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시상은 사령관님께서 직접 진행하실 예정이니 우승자는

거기서 얌전히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시상식이 이 곳에서? 큰일이었다. 이런 꾀죄죄한 모습으로 미스 오르카라니, 모두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익스프레스는 불안해하며,

드론들을 등진 채 뒷걸음질 쳤지만, 


"어이쿠, 미스 오르카님께서 어딜 급하게 가시나~"


단단하면서도 말캉한 근육질의 벽은 다름아닌 사령관이었다. 


"사...사령관님???? 잠깐만요, 저 준비가 하나도 안되있어서.....이대로 나가면 모두한테 미움받는다구요"


"왜 그렇게 생각하니?"


"그게.....미스 오르카는 아름답고 지적이고 교양 넘치는 모습이어야하잖아요....저랑은 다르게"


"다들 그렇게 생각해???"


잔뜩 기 죽은 그녀의 목소리와 다르게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사령관이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 드론들이 동시에 화면을 송출하였다.


그녀가 물품을 나눠줄때마다 알게 모르게 찍힌 활동사진들이 펼쳐지고, 사진들은 한 곳에 엮여 그녀의 미소짓는 얼굴 형태로 이루어져 밤하늘에

수놓아졌다.


"땀 흘리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요, 미스 오르카 76님!!"


드론들 너머로 전송되는 목소리였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이 목소리는 진심이 담긴 것이란 것을.


"들었지?알았으면 엉덩이 털고 일어나야지, 드레스도 가져왔어"


노란색과 흰색의 배합으로 제작된 드레스를 사령관에게 건내받은 뒤, 풀 숲으로 황급히 들어간 그녀는 환복을 마친 후,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뭐에요, 환기는 하나도 안되고, 땀냄새도 쉽게 스며들고.....모래도 묻어서 등도 따갑고, 구두는 이게 또 뭐람.......

진짜, 내 생각은 하나도 안해주고"


불편한 듯 툴툴 거리며, 드레스를 질질 끌고 나타난 그녀는 꾀죄죄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2.코코


"오래....기다리셨어요, 사령관님"


이름없는 묘비 앞에, 성인이 된 코코가 서있다. 바이오로이드는 인간과 다르게 노화가 늦게 나타났고, 이 말은 즉, 어린 바이오로이드의 성장은

한 세기를 넘어갈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단 뜻이었다.


사령관이 저 하늘의 별이 되기 전,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미스 오르카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는 말을 반복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던 그녀는

성인이 된 지금, 화려한 드레스와 티아라를 걸친 채 오랜 시간이 지나 묘비조차 제대로 남지않은 사령관의 묘비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사령관님께서 돌아가시고, 한참뒤에야 이 곳에 서게 되었네요. 어때요, 잘 어울리죠? 이 정도면 지금 나가도 미스오르카 우승은 쉽게 할거라 생각하는데, 직접 못봐서 아쉬우실거에요"


이 순간이 오기만을 그토록 기다렸건만, 이제는 아름답다고 말해줄 사령관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슬픈 사실은 

사령관을 잊어버린 이 세상에서 언제까지 살아야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10년이 지나고,100년이 지나고, 천년이 지나, 이제는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의 구별이 모호해진 세상에서  철충에 맞서 싸워준

최후의 인간에 대한 기록은 자연스럽게 지워져버리고 만 것이다.


사령관도, 철충과 싸웠던 오르카호의 기록도 흔적없이 사라진 지금, 코코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묘비뿐인 공터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돌아오지 않을 그를 그리워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3.시라유리


결승전 직전, 투표결과에 의의를 제기한 이들에 의해 시라유리는 청문회에 오르게 되었다. 

물증은 없었지만, 심증은 있다. 평소에도 많은 이들에게 빈축을 사고 있던 그녀였기에 어쩌면 지금에 와서야 소동이 벌어진게

이상하다 느껴질 정도이긴 했지만, 그녀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사라유리가 손을 썼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았다.


"사령관님께서도 제가 뒷공작을 펼쳤다고 생각하시는건가요?"


마지막 변론에서 그녀는 결백을 증명할만한 증거를 내세운게 아닌, 사령관의 생각을 물었다. 


"미안, 충분히 생길만한 소란이었다고 봐"


"하아.........감이 좋으시네요. 맞아요, 제가 그랬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늦게 들켜버렸네요? 이 정도로 멍청이들만 모여있으니

함내가 이 모양이지....."


시라유리는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후보를 사퇴했다.


하지만, 사건은 예상밖으로 흘러가게 되었는데, 그녀의 사퇴소식과 함께 수많은 이들의 탄원서가 사령관 앞으로 배달되어 온 것이다.

마냥 뒷공작만 펼치는줄 알았던 그녀에게 이 정도로 따르는 이들이 많았나 싶을 정도의 탄원서를 본 사령관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그녀를 불러들였다.


"무슨 일이신가요? 이제 그 일은 끝난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말이지, 끝낼래도 끝낼수가 없게 되버려서"


사령관은 바닥에 쌓아놓은 탄원서를 책상에 올린 뒤, 그녀에게 천천히 살펴볼 것을 요청했다.


"이런거 읽는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그녀는 탄원서들을 하나씩 읽어가기 시작했고, 수많은 탄원서들 중 1/3을 읽을 즈음 훌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코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혹시 ??"


"흡....쓰읍.....이 개새끼들이 여기에 후추가루를 뿌려놨네, 내가 그리도 싫나"


이미 탄원서를 전부 읽어본 사령관은 후추가루 따윈 없단걸 잘 알고 있었다.  탄원서의 대부분은 브라우니들에게서 온 것이었으며,

항상 멍청이 취급 당하며 사건,사고가 일어날때마다 자신들을 탓하던 이들에게 복수해주었던 경험들을 적어놓은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탄원서가 아닌 은혜갚기였던 것이었다.


"지금 와서 미안하다고 하면, 내가 너무 개새낀가?"


"......말하지 마요, 상관이란 사람이 저한테 잘못했다고 비는 꼴 보고 싶지않으니까. 그냥, 조용히 나갈거고, 전 뻔뻔하게 내일 있을 무대에

오를거에요. 그러니까 더는....말하지 마세요"


조용히 인사를 마친 뒤, 사라유리는 사령관실을 빠져나갔고, 다음날, 본래 예정대로 시라유리는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를 향한 모욕과 함께, 응원의 말들이 뒤섞여 대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 혼돈 속에서 마침내 꽃은 그 잎을 만개할 수 있었다.


"저를 좋아해주시는 분, 그리고 싫어하시는 분들 모두 감사드려요. 미스오르카도 별거 없네요~"


화려한 드레스로 한껏 치장한 그녀는 그렇게 어둠속으로 조용히 사라지며, 제2회 미스오르카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