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이 넘어 태양은 애매하게 하늘 위를 떠돌고 있었다. 낮이라면 낮이겠지만, 시간 관념은 내게 큰 의미가 없다. 전술 공부도, 컴패니언 애들과 이야기하던 것도, 전부 할 수 없었으니까. 내가 웃을 수록, 내가 즐거울수록 그 사진들이 떠올랐다. 셀 수 없이 많이 후회하고 있다. 내가 그토록 무심했었다는 것도, 내가 웃고 있을 때도 죽어가는 아이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도, 하다 못해 그 사진을 봤던 것도, 전부 후회스럽다. 살기 위해 들이 마시는 공기는 잘못 만든 칵테일처럼 질척거렸다. 후회스러움과 어리석음이 오렌지 주스에 뒤덮여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칵테일을 만들었다. 취할 것 같다.

 

 

“… … 씨발… 기분 진짜 뭐같네…”

 

 

 

 

 

 

 

 

 

 

멀리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폐하, 계신가요?”

 

“… … 누구야…?”

 

“아르망이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아르망… 아르망…

… … 누구?”

 

“아르망입니다. 폐하.”

 

“… …”


"폐하."


"... ... 누구라고...?"


"아르망입니다."


"... ..."


"아르망입니다."

 

 


... 문을 열어줘야 할까? 문을 열어 줘도 될까? 이런 내가 한심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죽은 듯이 있는 동안에는 또 몇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죽게 될까? 그걸 탓하러 온 건 아닐까? 내 탓이라 하면 어떡하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나는 사령관이고, 저 애들은 내 명령에 따른다. 명령에는 의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그 의무를 다하고 있었나? 다하지 않았다는 걸 혼낼 것 같아 두렵다.

 



"폐하. 아르망이 폐하를 뵙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처음이었다. 내 옆에 있는, 나보다도 작은 이 아이들이 두려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혼 내기 직전에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본 아이마냥, 난 계속 작아지고 있었다. 차라리 내가 이 앞에 있는 볼펜이 된다면, 어디론가 숨을 수 있다면 숨고 싶었다.








 

-끼릭

 

문이 열렸다.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아니지. 들어오지 말라고 하지도 않았잖아. 애매하게 우물쭈물 거리다가 결국 또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차라리 들어오지 말라고 말을 할 걸. 늘 이런 식이다. 무언가 하지도 않고 후회한다. 실패하기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아무 것도 하기 싫었을 뿐이다. 그럼 늘 후회스럽다. 지금도 그렇다.

 

노란 금발이 보였다. 내가 알던 그 아이가 맞다. 빨간 머리에, 빨간 옷을 걸치고 있는, 키가 크지는 않는 소녀 같은 아이. 아아, 파란 색 눈이 징그러울 정도로 나를 주시하는 것이 느껴진다. 저 눈으로 뭐를 보는 걸까, 뭐를 보고 살았을까, 앞으로는 또 무엇을 보게 될까? 나는 알 수도 없는 시야를 보고 있겠지.

 

 

 

 

“… 들어오라 허락해주시지 않으셨군요.”

 

“그런데 왜 왔어”

 

“들어오지 말라고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 … 장난 하는 거야?”

 

“아뇨. 저희가 이렇게 할 수 있게 해주신 건 폐하이시니까요.

폐하께서 저희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행했을 뿐입니다.”

 

“… 하고 싶은 게 뭔데.”

 

“폐하를 뵙는 것이었습니다.”

 

“…”

 

“그게 다였습니다.

... ... 어찌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 ...

... 그럼, 이제 하고 싶은 건 다 했어?”

 

“그럴 리가요.”

 


아르망은 작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 웃음이 어찌나 어색해 보였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무언가를 자꾸 숨기고 있는 듯한 음흉함을 품고 있었다. 저 웃음을 내가 감히 취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치 마시고 싶었던 음료수를 마트 진열대 위에서 발견한 소년처럼, 유혹적이었지만 그것을 마실 자격은 없었다. 나는 그것에 대한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는 걸 안다. 그러니 저 웃음은 너무도 서글픈 것이었다. 그림의 떡이었다.

 

 

“폐하?”

 

아르망은 내 옆자리에 의자를 끓고 와서 앉았다. 향기로운 샴푸 냄새가 났다.

 

“… 왜?”

 

“저희가 이렇게 직접 만난 건 처음이지요?”

 

“… … 좋아?”

 

“후후, 첫만남부터 과격한 질문을 하시네요.

한 여자와 남자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그리도 우위에 있음을 확인하고 싶으셨습니까?

단지 뵙는 것만으로 제가 좋아할 것이라 생각하셨습니까?”


"... ...  난 너희를 보면 늘 좋았으니까.

... 너희도 나를 보면 좋아했길 바랄 뿐이야.”


 "물론, 좋습니다.

폐하를 뵙는 것도, 이렇게 함께 앉을 수 있는 것도, 같은 공간에서 같이 숨쉴 수 있는 것도, 모든 것이 좋습니다.

... ... 

... 저는 그러한 폐하를 폐하로 모실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요.

무엇을 원하시기에 그런 것을 물어보셨나요.”

 

 

아르망은 쮸뼛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흘러 내려 긴 금발로 얼굴을 절묘하게 가릴 수 있었다. 아르망의 손가락이 부끄러운 듯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유독 마디 하나 하나가 물결처럼 흘러가는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간지러운 손놀림이었다.

 

 

“… 그래서 좋아? 나를 보니까?”

 

“제가 상상했던 그 어떤 것보다 황홀합니다. 폐하

어제보다 더, 내일보다 덜.”

 

“… 거짓말.”

 

“제가 거짓을 고할 이유가 있을까요?”

 

“거짓말이야.”

 

“폐하를 이토록 사랑하는 저를 다른 누구도 아니 폐하께서 그렇게 거짓말쟁이로 보시면 슬프답니다.

폐하께서는 제가 슬프길 바라시나요?”

 

“… 거짓말이야.”

 

“거짓말이 아니랍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

 

“제가 폐하를 사랑함을 증명하길 원하시나요? 아니면 제가 거짓말쟁이가 아님을 보여드리길 원하시나요?

아쉽지만, 여기서는 폐하를 충족시킬 만한 답을 드리기 힘드답니다.

... 그러니,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믿어주세요.

저희가 폐하의 믿음을 이뤄드리겠습니다.”



아르망은 자신의 가슴에 내 손을 가져다 대었다. 주변이 잠시 조용해지니 심장이 뛰고 있음이 느껴졌다. 뭔가에 쫓기듯이 다급한 심박수가 내 손을 타고 그대로 흘러들어왔다.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점점 따뜻해지는 가슴을 내가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온도와 거짓말쟁이가 무슨 관계가 있길래 이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외로 제법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차분해졌다. 




“… … 내 믿음을?

아니, 너희가 그럴 필요는 없어.”

 

“아뇨. 그러기 위해 제가 온 겁니다.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지 마.

그렇게 생각하지 마.”

 

“저희는 그런 존재입니다.”

 

“아니야.”

 

“맞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

 

“폐하께만큼은 그리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그것이 사실입니다. 폐하.”

 

“아냐... 그렇게 말하지 마.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입으로 자신를 그렇게 말하지 말란 말이야.”

 

 

 

 

 





“폐하?”

 

“…”

 

“슬프신 가요?”

 

“…”

 

“아니면 실망스러우신 건가요?”

 

“… 뭐?”

 

“저희에게 실망하셨는지 여쭤보고 있는 겁니다.”

 

“… … 내가 어떻게 너희에게 실망할 수 있겠어…?

... 난... 내가 그럴 자격도 없단 걸 알고 있단 말이야...”

 

“폐하께서 그럴 자격도, 이유도 있으십니다.”

 

“난 자격 없어.”

 

“... 그런가요?

그럼 그 자격은 누가 주는 걸까요?”

 

“… 너희”

 

“저희는 폐하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저희의 사랑과 헌신, 생명,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그 작은 자격 하나 드리지 못했을까요?”

 

“… 왜?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해...?”

 

“폐하를 사랑하니까요.”

 

“… … 그것도 거짓말이야.”

 

“그럼 어째서 저희가 폐하를 이토록 따르는 걸까요?

저의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영민하신 폐하께 여쭤볼 수 있을까요?

폐하를 생각하면 심장이 뛰고, 이렇게 침울해하시는 모습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려오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요?”

 

“… …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제 마음은, 감정은 누가 알려줄까요?”

 

“… 너 스스로겠지.”

 

“그렇다면, 이 감정은 사랑이겠네요.”

 

“… … 착각이야.”

 

“그럼 폐하께서는 정답을 아시나요?”

 

“그럴 리가.”

 

“저도 모르고, 폐하께서도 모르신다면,

이 마음은, 실존하는 제 감정의 정답은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죠?”

 

“… …”

 

“어쩌면 감정에는 정답 같은 것이 없을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모두가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만큼은 스스로 정의 내리며 살고 있지 않나요?

저도, 폐하께서도.”

 

“… …”

 

“그러니, 이제 말씀해주세요.

슬퍼하시는 건지, 저희에게 실망하시는 건지.

폐하의 감정은, 폐하께서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 아르망... ... 

... ... 내가 너희에게 실망했다면,

그럼 너희가 슬퍼하지 않을까?”

 

“가슴 아플 겁니다. 그것보다 슬픈 일은 없겠죠.”

 

 

 

“… 그럼 난 그냥 슬픈 거야.

그냥... 그렇게 하자...”

 


아르망은 내 손을 잡았다.



“… 어찌 이런 상황에서도 저희를 생각하시는 건가요.

형언할 수 없이 기쁜 일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저희의 사사로운 감정보단 폐하의 마음이 더욱 중요하답니다.

그러니 말씀해주세요.

간혹 인간 분들은 그것을 헷갈리시기도 한답니다.

폐하께서는 저희가 죽어서 슬프신 것인가요?

아니면 저희가 폐하의 말씀을 거부할 수 없는 인형이라 실망하신 건가요?”

 

 

 

“… 싫어. 생각하게 하지 마.”

 

“폐하, 부디 다른 곳을 보지 말아주세요.”

 

“아냐, 날 이해하게 만들지 마.

너희는 사람이야. 나랑 똑같은 사람.

내가 죽으라고 하면 싫다고 반항하고, 죽기 싫어하는, 내가 아는 그런 사람.

그 빌어쳐먹을 죽음은 기겁을 하면서 싫어하는 그런 사람 말이야.”

 

“폐하…”

 

“세상에 죽으라고 하면 죽는 사람이 어딨어…

난 봤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때문에 죽은 애들을.

근데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부숴지고, 깔아 뭉게지고, 짓이겨져서 죽어버린 애들을 모르고 있었다고.

내가 그 애들을 사랑하지 않는 걸까?

그것도 그렇잖아?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모를 수 있겠어?”

 

“… 그럴 수 없겠죠.

저희도 폐하께서 돌아가신다면, 영영 잊지 못할 테지요.”

 

“그럼 뭐야?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건 다 뭐야?

난 너희를 사람이라 생각했어. 근데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냐고!

왜 내게 그 사실을 숨긴 거야?

차라리 숨기지 않았으면 난 그냥 내 무능에 역겨워 하고 끝났겠지?

나 때문에 죽었다고! 내가 못나서 죽은 거라고! 그렇게 나를 원망했겠지!! 나를!!!

... ...

...

... 그런데 왜 숨겼어?

너희 때문에 나는 나 때문에 죽은 애들을 기억도 못하고 살았다고!”

 


 

 

“… 폐하…”

 

“칸이, 마리가, 리리스가 죽어도 그 사실을 숨겼을 거야?

아르망, 네가 죽었어도 그 사실을 나한테 숨길 생각이었어?

말해봐, 다른 모두가 죽었어도 내가 그걸 몰라야 했던 거야?!!”

 


“네. 숨겼을 겁니다.

저희의 사소한 일 때문에 폐하께서….”

 

“제발!!!!

죽음을 가지고 사소한 거라고 하지 말라고!!!!!!”

 


아르망은 고개를 떨궜다.



 

“…”


“… 아르망, 제발!! 아무 말이나 해!!!”

 

“…”

 

"아니면!! 하다 못해 말을 하기 전에 고민이라도 할 수는 없어??!!!

최소한 사람처럼 보이게 행동할 수는 없냐고!!"


"... ... 폐하께서 원하지 않으셨을..."


"야!!!!!

내가 원하는 게 뭔데!!!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네가 어떻게 아는데!!!!!

내가 니들 때문에 살인자가 된 기분을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야 했다고!!!

그게 내가 원하는 거였어??!!"


"... ..."



“하아... 하아... 

... 밖에!! 밖에 아무도 없어??!!

지금 니들의 죽음이! 사소한 거라고 했는데!!

왜 아무도 화도 안 내는 건데!!!!!”

 

 

“… 폐하, 진정하세요.”



난 책상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바닥에 내던졌다. 각종 잡동사니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뱉으며 땅에 떨어졌다.


 

“진정하게 생겼냐고!!

난 지금까지 내 앞에 있는 게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근데 왜 여기까지 와서 그러는 거야!!

나 혼자 쇼하고 있던 거야? 그런 건가?!!

아니면!! ... …”

 




 

소리를 쳤다. 내가 이 아이를 혼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아르망의 어깨를 손으로 짓누르듯이 붙잡고 있었다. 아르망의 옷은 어깨의 맨 살이 그대로 들어나는 옷이었고, 난 내가 얼마나 세게 힘을 주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힘을 뺐을 때는 이미 하얀 살결 위에 빨간 자국이 칠해져 있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힘을 썼다.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감정에 휘둘리기만 한다. 속이 뒤틀리고, 내장이 꼬이는 기분이다. 인간이, 그것도 사령관이나 되는 사람이 손찌검을 한다는 것이 이 애들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지옥을 견뎌야만 했던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고 자부했으면서, 힘을 썼다.


 

아르망은 울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고개를 계속 숙이고, 말도 꺼내지 못한 채로, 내가 화를 내는 것을 마냥 받아주고 있었다. 그건 아르망이 내 분노를 받아줄 만큼 커다랗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 했으니까. 내가 화를 낸다고 나에게 똑같이 화를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그랬던 것이다. 내가 스스로를 추스를 때까지 어깨가 충혈되는 것을 감내하고도 내 앞에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이 아이들이 사람인지 아닌지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미안했다.

 



 

 

“아… 아팠어..?”

 

“… … 괜찮아요. 폐하.”

 

“내, 내가 잠깐 정신을 놨나 봐…

그… 그…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미안해 미안해…

… …

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 뭘 하려고 했지…?”

 

 

아르망은 내 손을 잡으면서 가만히, 내 손을 응시했다. 어깨는 여전히 붉게 상기해있었다. 빨간 무언가를 보니 다시 속이 올라왔다. 저 어깨가 빨개진 원인, 붉은 피가 생각이 났다. 내가 봤던 사진이 다시 떠올랐고, 악몽 같았던 그 새벽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호기심에 져버린 그 새벽에 봤던 모든 사진들이 내 머리에서 떠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고, 난 내가 싫어져서 다시 화가 났다. 감정이 나를 휘두른다. 나는 또 다시 그것들에 흘러가고 있었다.

 

바닥에는 잡동사니들이 뭉게져 있었다. 

 

 

 


“… 폐하께서 지금 제가 여기 온 이유를 여쭤보셨죠.

그 이유를... ... 말씀 드려도 될 까요?”

 

“… … 말해.”

 


아르망은 작게 숨을 뱉었다.

 


“폐하께서는… 저희를 사람이라 생각하셨죠.”

 

“… 왜, 그게 우스웠어?

우스워서 여기까지 와서 날 놀리려고 한 거야?”

 

“그럴 리가요.

하지만 폐하.”

 



그 때 직감했다. 난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할 것이다.

아르망, 말 하지 마.

 



“그 마음은 너무나 감사하지만,”



 

하지 마



 

“저희가, 저희의 입으로 결국은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제발, 제발 하지 마.



 

“저희는”

 

하지 마 하지 마 제발, 제발 하지 마




 

“사람이 아닙니다.”






 

 

 

 

 

 

 

 

 

 

 

 

 

 

 

 

 

“… …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말 하는 거야?”

 

“물론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내가 했던 건 다 뭐야? 그러면?”

 

“… 폐하께서 내려주신 축복이죠.”

 

“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너희도… 너희도 자유롭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너희를 사람처럼 대하면… … 그러면… 너희도 좋은 거 아니었어?”

 

“… …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황홀했습니다.”

 

“근데… 왜? 왜 그런 거야…?

왜 내 앞에서… 내 앞에서 그 말을 해야 하는 거냐고…!!

왜!!!!”

 

 

 

책상 위에 있는 사진들을 집어 던졌다. 시체의 사진이었다. 난 그 사진들을 끝도 없이 쳐다보았다. 그 시체 냄새가 여기까지 풍길 때까지, 사진 속에 있는 구더기들이 내 살을 타고 오를 때까지, 질척거리는 땅바닥의 촉감이 내 발바닥을 타고 올라올 때까지, 그리고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보았다. 어쩌면 그저 익숙해지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보았던 것을 또 보고, 안 보고 싶었던 것도 계속 본다면 괜찮아 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사진 하나가 다시 내 책상 위로 떨어졌다. 브라우니의 머리가 잘린 사진이었다. 보고서에는 간단하게 절단, 과다 출혈이라 적혀있던 것이 기억난다. 얼마나 깔끔하게 잘렸으면 그 머리는 누가 보아도 브라우니의 것이었다. 짧은 단발의 갈색 머리. 마리를 만나러 갔을 때 만난 세 명의 브라우니와 똑같았다. 익숙해지지도, 잊혀지지도 않는 사진이었다. 

 



 

“… 폐하.”

 

“그 놈에 폐하, 폐하, 폐하!!

폐하 타령도 하지 마!

왜 자꾸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거야?

난 어디 왕도 아니고! 고작 인간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사령관 노릇이나 하고 있는 놈일 뿐이라고!

날!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다고!

그런! 사람은!!! 없어!!!!

그런!! 사람은!!!!”



"... ..." 




 

 

아르망은 눈을 감았다. 그냥 작게 울음을 터트리면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을 뿐이다. 죄악감이 들었다. 사람을 울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르망이 말했다. 자기들은 사람이 아니라고. 울고 또 울었다. 예전이었다면 바로 달려가서 안아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까 했던 말이 후회되었다. 차라리 아무 생각하지 말 걸. 아무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걸. 그럼 지금 가서 미안하다고 말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 …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폐ㅎ… … 아니, … 사령관…님…”

 

“… … 말해.”

 

“… 저희를 사람으로 봐주셔서, 그래서 저희는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토록 긴 시간을 견딘 보상 같았고, 폐하와 함께 나란히 있을 수 있어서 참으로 기뻤습니다.

... ...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저희는 사람과 달리 폐하의 말씀에 거절을 할 수도, 폐하께서 주시는 사랑에 기뻐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언젠가 십 년이, 백 년이 지난 다음에는 폐하… 아니, 사령관님께서도 아실 수 있겠죠.

정말로 저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 그럼 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지 그랬어.

내가 너희를 사람으로 보는 그 기회를 왜 써먹지도 못했냐고.”

 



 

아르망은 자꾸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양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자신의 무릎에 둔 그녀는 마치 내게 혼나러 온 작은 아이 같았다. 혼나야 할 건 나였는데, 나는 그저 큰 소리 치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순간의 분노, 당황에 순응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게 난 너무 싫었다.

 

 

 

 

“… 사령…관님… 한 가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 응.”

 

“만약 저희가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면… 

… 그랬다면 사령관님께서는 그 이후에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일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고, 백 년이 지나고 나면… 그 때도 저희를 사람으로 봐주실까요?

저희는 사람이 아닌데도?”

 

“…”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감정이 마치 변치 않을 것이라 착각하기 마련입니다.

그건… 사령관님도 다르지 않겠죠.

아무리 저희를 사랑해주시고, 또 사랑해주셔도, 천 년이 지나고 난 뒤에도 저희를 사랑해주실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그럴 만큼 사령관님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니까…”

 

“…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

 

"… … 한 사람이 사람이 아닌 존재를 사랑하고, 십 년을, 백 년을 사랑한 자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의 지난 세월이, 그 기나긴 시간이, 우스워지지 않을까요?

그 시간에 진심이면 진심이었을 수록,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한탄하지 않을까요?”

 

“… …”

 

“폐하… …

… 사령관님께는 죄송스럽지만… 저희는 사람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지난 백 년 동안 저희는 그 누구도 스스로를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희의 나태함이었을까요? 아니면 저희의 무능함이었을까요?

사령관님과 같은 분께서 오실 줄을 몰랐던 저희의 무지함이었을까요?

만약 사령관님을 제가 예지하고, 인간이 되기 위해 준비했더라면, 그랬다면… 사령관님의 분노를 조금은 가라앉힐 수 있었을까요?”

 

 

“… 머리 아파…”

 

나는 아르망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냥… 그냥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하면 안 되는 거야?

우리 지금까지 잘 했잖아. 잘 해왔잖아.

그걸로는 안 되는 거야? 뭘 더 해야 하는 건데?”

 

“… 너무 많은 것을 해주셨죠.”

 

“내가 뭘? 내가 뭘 했다고?”

 

“셀 수 없이 많은 것을요.”

 

“… 이해 못하겠어.”

 

“… 저희는 바이오로이드이니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 옆에 있는 아르망의 얼굴을 보기 위해 바닥에 앉았다. 아르망은 눈을 감고 계속 울고 있었다. 목소리가 약하게 떨리는 것들이 이제야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내 몸은 내 생각과는 다르게 움직였다. 명분 같은 것은 상관 없었다. 아르망의 팔을 꽉 잡고는 내 품으로 끓어 당겼다. 팔에 힘을 꽈 주니 아르망의 몸은 내 몸에 더욱 징그럽게 달라 붙었다. 마치 사람인 아르망을 떠나 보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내 손은 내 생각보다 한 걸음 빨리 움직였다.

 

 

 

“말 하지 마.”

 

“… 사령관님.”

 

“말 하지 마라고 했어.

명령이야.”

 

 

그러자 정말 아르망은 말을 멈추었다. 내심 그 작은 입술이 움직이길 바랬던 모양이다. 실망스러웠다. 아르망보다도 나 스스로가 실망스러웠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토록 편리한 기능이 세상 좋은 것만 모아놓은 듯한 이 아이에게 있다는 것은 내가 여기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난 의미 없이 아르망을 시험했다. 이 작은 애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끔찍한 기분이다. 

 

 

 

 

“… 이제 말 해도 될까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폐하…?”

 

 

아르망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

 

나는 말이 없었다.

 

“… 폐하.”

 

“…”

 

“폐하?”

 

“… …”

 

 

아르망은 울면서 작게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내가 화를 내는 상황에서, 고작 호칭 다시 쓸 수 있는 것 정도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길래 이리도 좋아하는 건지, 나는 모르겠다. 난 그런 호칭 따위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데.

 

 

 

 

“… … 그러셨죠. 폐하께서 저희에게 무엇을 해주셨는지 모르겠다고.”

 

“…”

 

“이해하지 못하실 수 있습니다.

어째서 폐하께서 저희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해주실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

 

“…”

 

“하지만, 폐하께서도 아시겠죠. 폐하께서 계시지 않았던 그 시절에 저희가 어떤 고통을 받아야 했는지 말입니다.

… 저 역시 그 과거의 시간을 버텨온 한 명입니다.

무슨 고통을 받았는지 폐하께서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 ... 나도 알 수 있어."


"... 아뇨. 아실 수도, 아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그 사실을 알고 계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 ...

그러니 저는, 폐하를 실망시킨 지금 이 순간의 저 스스로가 너무나 실망스럽지만,

또 그런 폐하의 얼굴을 이렇게나 바로 앞에서 봐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지만.”

 


아르망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이렇게나 작은 손인데도 내 볼을 가득 감싸고 있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감싸지는 포근함은 충만했다. 나도 모르게 그 손을 내 손으로 감쌌다.

 

 

 

 

“그 때의 시간에 비하면,

지금은 살아 숨 쉬는 한 순간, 한 순간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쁘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절대, 절대로 이해하실 수 없겠죠.”

 


 

아르망의 얼굴을 보았다. 하얀 옷이 보였고, 파란 목걸이가 보였다. 긴 금발과 약간 부산스러운 앞머리가 보였다. 내 얼굴을 감싸고 있는 손의 작은 손톱이 보였고, 그 손까지 올라오고도 남는 옷의 소매가 보였다. 파란 눈에 눈물이 덮여 반짝이는 모습이 보였고, 그 눈썹 끝에 살짝 매달린 눈물 자국이 보였다.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눈웃음을 보았고, 그에 어울리도록 약하게 웃는 입가에 따라 올라오는 그녀의 볼이 보였다.

 

생각하기 싫었다. 그냥 이 모습을 보고만 있고 싶었다.

 

 

 

 






 

“… 폐하.”

 

“…”

 

“제가 어째서 스스로를 사람이 아니라 했는지 여쭤보셨죠.”

 

“… 그랬지.”


 

아르망의 손이 작게 움직이면, 내 뺨도 함께 움직였다. 뺨에 닿지 못한 아르망의 손가락이 아쉬워하듯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사람이 아닌 것을 진심으로 사랑한 어리석은 사람의 말로 또한 말씀 드렸죠.

그 바보 같은 관계가 어떻게 종말을 맞이했는지도 말이죠."


"... 난 바보가 아니야."


"후후, 영민하신 폐하.

... 저희는 폐하께서 그런 어리석은 자의 쓸쓸한 결말을 경험하지 않으시길 진심으로 바란답니다." 

 

 "..."


“제가 저희의 진실을 말씀드린 건,

폐하의 사랑을 감히 거부하고서라도 이를 마주하게 한 것은,"



아르망의 손이 멈췄다. 부드러웠다.



"저희는 폐하와 함께, 

저희가 상상할 수 있는 시간보다 더 오래, 

더 멀리 함께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먼 미래까지,

그리고 그 때까지 기쁘고 행복하게 함께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

 

“지금 당장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할 수는 있겠죠.

닥터에게 부탁하면 폐하의 기억을 지울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기억이란 것은 이미 박힌 못과 같답니다.

뺄 수는 있어도, 그 자리에 검은 구멍이 생겨버리죠.

그러니… 폐하께서 그 사진을 보셨을 때, 저희는 폐하의 가슴에 큰 못을 박아버린 겁니다.”

 

“… …”

 

“그래서 제가 온 겁니다.

죄송스럽지만, 제가 온 것은 못을 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깊게, 더 깊게 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박혔다는 사실조차 모를 만큼 깊게 박아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폐하와 함께, 이 지옥 같은 곳에서 함께 영원히 살고 싶어서,

그러니 폐하께서 그 지옥에서 버티실 수 있는 분이 되도록 만들고 싶어서.

… 그래서 폐하께 그런 말씀을 드렸던 겁니다.”

 

“… 그런 말 없어도 같이 할 수 있었을 텐데.”

 

“미래를 봤습니다. 아주 먼 미래였습니다.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폐하의 기대를 저희는 충족시켜드릴 수 없었고,

결국 폐하께서 저희 모두에게 실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저희가 버틴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끔찍한 시간이 되어 저희를 괴롭혔습니다.

폐하께 버림 받는 것은 고작 과거의 그 시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이니까요.”

 

“… 그건 나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는 거야.”

 

“무겁겠죠. 저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울 겁니다.

하지만 저는 준비되지 않은 채 그 사실을 알게 된 폐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마 그 무게는… 지금과는 비할 수 없는 것이었겠죠

저희와 함께한, 즐거워 하셨던 모든 시간의 무게를 함께 견뎌야 했으니까요.”

 

“… 그래서, 나보고 뭘 하란 거야?

내가 너희를 사람으로 보면 안 된다는 거야?”

 

“그저 알아만 주시면 됩니다.

저희는 폐하께서 생각해주시는 만큼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는 저희를 버리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또한 저희가 받아들일 겁니다.

차라리 폐하께서 저희를 보다 빨리 버리실수록, 저희가 받을 아픔도 줄어들 테니까요.”

 

“그런 말 하지 마.”

 

“그럼 저희를 두고 가시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안 갈게.”

 

“… 후훗”

 

 

아르망은 내 목에 팔을 걸고 자기를 내 몸으로 더 붙였다. 내 얼굴 바로 앞에 닿을 만큼 가까운 위치로 자신의 얼굴을 대었다. 파란 눈이, 그보다 진한 남색의 홍채가 내 시야를 전부 채웠다.

 

 







“폐하?”

 

“... 응.”

 

“심한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도망쳐서는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었습니다.”

 

“무슨 미래를 본 거야?”

 

“볼 수 있는 모든 미래를 봤습니다.”

 

“힘들지 않았어?”

 

“… 저는 폐하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사실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 난 도망친 적 없어.”

 

“하지만 알지 못하셨을 뿐이죠.

눈을 가리고 달리면, 스스로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친 것인지도 모를 수 밖에 없으니까요.”

 

“너희가 감춘 거잖아.”

 

“… 그 때는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 모든 미래를 보고 싶다면서?”

 

“… 피할 수 있는 미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미 벌어진 일이고, 이제 남은 미래는 모두 끔찍한 결말뿐이겠죠.

그것도 아니면... 어쩌면 저도 제가 보고 싶었던 것만 보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 … 누구나 그렇지.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나도 그렇고.”

 

 

아르망은 뻔히 나를 쳐다보았다.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멍하니, 정말 아무 힘도 주지 않고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몸에 힘을 주지 않아서 아르망이 떠내려가지 않게 내가 붙잡아 주어야 했다. 내 팔에 이 작은 몸의 윤곽이 새겨질 때까지 아르망을 지탱했다.

 


 

 

“폐하?”

 

“왜 자꾸 불러.”

 

“폐하는 참 모르시는 것이 많아요.”

 

“… 알아.”

 

“그럼, 뭘 모르시는 지 아시나요?”

 

 

아르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따뜻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의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 속에서 서로를 갉아 먹던 나무의 비명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 미소가 얼마나 용기 있는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난 마치 약에 취한 것처럼 그 얼굴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저희를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사람으로 봐주시는 분은 제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아요.

얼마나 순수하시면 그렇게 생각해주실 수 있는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었답니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오신 것처럼 말이죠.”

 

“… 지금 나 놀리는 거야?”

 

“후후, 재미있지 않나요?

덕분에 폐하의 데이터는 완전히 처음부터 모을 수 밖에 없었답니다.

폐하의 행동, 생활 패턴, 옷차림, 습관까지, 하나 하나 전부 제 모듈 속에 저장해야 했답니다.”

 

“힘들었겠네.”

 

“힘들었냐고요? 후후, 전혀 힘들지 않았답니다?

오히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즐거웠습니다.

호드의 대원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술도 마시던 장면은 참 유쾌했어요.

스틸라인의 대원들과 같이 웃고 떠드실 때는 마치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났죠.

컴패니언 대원들에게 휘둘리시는 모습은 간혹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물론 그 즐거움은 가릴 수 없었지만요.

그것이 제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나요?”

 

“뭔데?”

 

“저는 수많은 미래를 과거의 흔적들을, 데이터를 통해 연산해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 데이터에 남아 있던 사람은 저희를 도구로, 쓸만한 장남감으로 여기는 사령관 한 사람뿐이었답니다..

그 사람이 행했고, 행할 모든 일들이 데이터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오셨고, 제 세상을 바꿔주셨습니다..

단지 물리적인 환경이 아닌, 정말로 제 세상을 말이죠.”

 

 

아르망은 내 손을 자신의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금발 머리는 빨간 비단 겉옷처럼 부드러웠다.

 

 

“폐하? 폐하의 데이터는 선하답니다.

그리고 그런 선한 사람이 존재하는 미래는, 제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기쁘고 즐거운 것이었죠.

그 이전까지 제가 본 미래라고는 피와 죽음 위에서 한 인간이 끊임없이 웃는 빨갛고 기괴한 장면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오시고, 빨간 세상에는 처음으로 흰 색이 흘러 들어왔죠.

흰 색은 곧 무지개로 바뀌었고, 제 세상에서 처음으로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었어요.

아름다운 미래를 희망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 때 생각했죠. 빨간색은 이리도 아름다운 색이었구나.”

 

 

아르망은 자신이 입고 있는 빨간 겉옷을 집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부드러운 비단이었다. 아르망의 머리카락처럼 부드러웠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제 삶의 이유이고,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그 목적이, 제 삶이 한 사람에 의해 송두리째 빨갛게 되어버렸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시나요?

제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과 연결된 모든 미래가 미쳐버릴 만큼 빨갛게 되어버렸을 때, 제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예상이 가시나요?”

 

 

아르망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내 무릎을 모으고 자신은 그 위에 앉았다. 내 양 볼을 자신의 손으로 잡았다. 몸을 쭉 일으켜 자신의 얼굴을 내 얼굴에 맞추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해버린 미래가 한 번도 본적 없는 아름다움으로 뒤덮였을 때,

그 때 제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아시나요?

폐하의 데이터가, 아니, 폐하의 존재 자체가 모두의 미래에 어떤 의미일지 예상이 가시나요?

폐하께서 제가 볼 수 있는 그 수없이 많은 시간의 가능성에 무슨 일을 저지르셨는지 아시나요?

삶이란 것이 그저 덧없는 것이 아닌, 덧없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 어떤 선물인지, 폐하께서 아실 수 있을까요?”

 


아르망은 더욱 내 얼굴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니,

제가 어떻게 폐하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아르망의 입술이 내게 닿을 만큼 다가왔다. 아르망이 입을 열면 그 입술의 궤적이 내 입술 위에서 흘러갔다. 아르망의 입술은 내 입술에 간질이며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르망은 눈을 감았다. 눈은 초승달 같은 얇은 선을 띄고 있었다.

 

아주 작게, 목 너머로 공기가 흘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감질나게, 아르망은 내게 말했다.

 

 

“저는 고작 바이오로이드일 뿐이지만, 그런 저의 감정이 폐하보다 우선일 수는 없지만,”

 

 

아르망은 내가 숨을 들이키는 때에 맞춰 작게 숨을 뱉었다. 그 숨은 자연스럽게 내 목 너머로 흘러 들어갔다. 따뜻했고, 이상하리만큼 향기로웠다.

 

 

 

 

 

 

 

“폐하께서 주신 것들을 보고 어찌 이런 말을 안 할 수가 있을까요.

사랑합니다. 폐하.”

 

 

아르망은 아주 조금, 정말 종이 한 장도 안 될 만큼 내게 더 가까이 왔다. 내 입술의 끝만 겨우 안타깝게 닿을 수 있던 아르망의 입술이 온전히 내 입을 감쌌다. 아르망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내 목을 잡고 있는 팔이 가냘프게 떨렸다. 

 

마치 홀린 것처럼, 나도 아르망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머리를 감싸려 금발의 머리카락을 넘겼을 때 아르망이 울고 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떨고 있던 것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걸 위로해주기 위해서 나는 아르망의 몸을 부드럽게 내 쪽으로 당겼다. 머리도, 입술도 함께 내게 다가왔다. 아르망은 입으로 숨을 쉬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내게 더욱 다가왔다. 애처로웠다. 나는 코로 숨을 들이켜, 입으로 뱉었다. 아르망은 거칠게 숨을 쉬었다. 내 뺨과 아르망의 뺨이 맞닿는 곳에서 아르망의 눈물은 멈췄다.

 

 

 

 

 

 

 

 

 

 

 

 

“… 푸하…”

 

“…”

 

 

아르망은 애매하게 나만 쳐다보았다. 반짝이는 푸른빛의 눈이 지금은 얼마나 귀엽게 보일지, 자기 스스로도 모를 것이다.

 

 

“… … 폐하...?”

 

“… 으응…”

 

“… … 죄송합니다…

… 너무 감정적이었어서…”

 

“… 괜찮아.”

 

“… 상담을 해드리기 위해 왔는데, 제 푸념만 늘어놓은 것 같아서…

… 혼란스럽지 않으신가요…?”

 

“조금은.”

 

“역시… 그러시겠죠.”

 

“그야… 사람이 아니라면서.

그런데 이렇게 울고, 매달리고, 서글프게 구는데, 내가 어떻게 이걸 사람이 아니라고 받아들이겠어.”

 

“… … 하지만 저희는 폐하께서 기대하시는 그런 여성이 될 수 없을 겁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실망하실 거에요.”

 

“그럴 지도 모르지…

… 난 그저 너희를 사람이라 생각했으니까.”

 

“… …”

 

“근데 난 아르망이 아니거든.

너무 먼 미래를 생각하는 건 내 분수에 맞는 일이 아닌 거 같아.

당장 내일 소완이 무슨 밥을 가지고 올 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그래서 그냥, 그냥 넘어가려고.”

 

“하지만…”

 

“알아. 무슨 걱정 하는 지 알아.

지금까지 나한테 말했던 게 도망치지 말라는 거였잖아.

… 아르망 말이 맞아. 난 도망치고 있었어.

사령관이나 되어서, 이제 아무도 안 죽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너희가 걱정하게 했던 것도,

그리고 아까까지 계속 화를 냈던 것도 전부 도망치는 거였잖아.

여기 오고 나서… 나도 모르게 스스로 기대하고 있었나 봐.

여기라면 모두가 마냥 나를 좋아해주는 천국 같은 곳이지 않을까 하고.”

 

“… 폐하…”

 

“그런데… 아니더라고.

나도 바보 같았지. 당연히 알아야 했던 것들은 알 생각도 안 하고 그런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전쟁터라면, 당연히 누군가는 죽을 수 밖에 없을 텐데.

… 그래서 이제는 그렇게 생각 안 하게 노력하려고.

전쟁터 한 복판에 떨어진 사람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야겠지.”

 

“… 저희가 언제나 곁에 있어드리겠습니다. 폐하…”

 

“… …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조금 어지러워.

내 앞에서 이렇게 살아 숨쉬는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받아들이지 못 하겠어.

무시하는 것도 안 돼. 아르망이 울면서 나한테 말했는데, 그걸 어떻게 잊겠어."


"... 울음을 보이지 않으려 얼마나 애를 썼는지, 폐하께서는 모르실 겁니다.

... ... 그래요. 저는 잘 울어요. 울보에요. 울보."



아르망은 내 어깨 위에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어깨 위로 아르망이 내뱉는 숨들이 어깨를 타고 내려오는데, 그것이 그렇게 간지러울 수가 없었다. 너무 간지러워서 나는 웃음이 났다.



"하하하,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래.

그런 것도 다 매력인데

... ...

아무튼, ...그러니까 그냥… 그냥 살아가려고.

죽은 애들도, 같이 살아갈 애들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면서 살아가려고.

전부 짊어지고 갈 능력도 없으니까 그런 약속은 못하겠어.

하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을 거야… 같이 살아갈 거니까.”

 

 

 

“… … 감사합니다. 폐하…”

 

“난 감사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왜, 하지만 너희는 사람이 아니라고?

사람이 감사하는 기준은 바이오로이드랑 다르다고?”

 

“… …”

 

“아르망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짐작은 할 수 있어.

사람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나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겠지.

좀 충격적이긴 한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잖아. 나도 적응할 수 있겠지. 난 아르망이랑 다르게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난 감사를 받지 않을 거야. 그럴 만한 일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게 사람의 기준이니까.”

 

“… …”

 

“그래도 너희가 사랑해주는 건 기쁘게 받을 거야.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진작에 끝났을 테니까.”

 

“… 폐하!”

 

 

아르망은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 작은 몸으로 내 어깨를 전부 감싸며 내 품 안으로 안겨 들었다. 내 심장 박동이 아르망의 것과 함께 느껴질 정도로 꽉 안겨 왔다.

 

 

“폐하… 폐하… 폐하…”

 

“왜 자꾸 불러.”

 

“…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하니까요.”

 

“그럼 내 얼굴을 직접 보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 아직 그만큼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거에요.”

 

“내가 무서워?”

 

“… … 아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날 무서워해도 할 말은 없지.

그렇게나 심하게 대했으니까.”

 

“… … 사실... 조금 무섭긴 해요.

다시는 폐하께서 저희에게 실망하시는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내가 아르망에게 실망했을까?”

 

“… … 네.”

 

“어떻게 알아?”

 

“저는 알 수 있으니까요.”

 

“하긴, 아르망은 미래를 볼 수 있지?

내가 나중에 아르망한테 심술 나기라도 해?”

 

“… … 폐하께서는 너무 심술 굳으세요.

미래를 볼 것도 없잖아요. 지금도 그러시는데...”

 


아르망은 여전히 내 어깨에 얼굴을 부비면서 고집을 피운다. 부드러운 살결이 스쳐가는 것이 옷 너머로도 느껴지는데, 어떻게 웃음을 참을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해도 참 어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내 품에서 부비적대는 아르망은 너무 치명적이었다. 말 그대로 치명적이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거 어때?”

 

“무엇을 말인가요?”

 

“내가 1분 뒤에 무슨 표정을 지을 지 예상해 보는 거야.

그 표정이 무서운 표정이면 계속 그렇게 안겨 있어도 아무 말 안 할게.

하지만 내가 웃고 있으면, 아르망도 나한테 얼굴을 보여줘. 한 번은 보고 싶으니까.

난 아무 말 안 하고 있을 테니까.”

 

 

“… … 역시 심술 굳으세요.”

 

 

아르망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내 품에서도 어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내 품에서 잠잠히, 정말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자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 아르망은 다시 눈을 떴다.

 

 

 

“… 폐하.”

 

“왜?”

 

“앞으로 몇 초나 남았죠?”

 

“10초 정도?”

 

 

그러자 아르망은 내 어깨를 감싸던 팔에 힘을 주었다. 내 몸을 밀어내면서 자신의 얼굴을 내게 드러냈다. 푸른 눈. 앞으로 절대 잊지 못할 그 눈이 다시 나를 반겼다. 나보다 먼저, 아르망은 세상에서 두 번 못 볼 환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웃음을 보냈다.

 

 

“후후, 제가 뭐를 보았는지 아시나요?”

 

“뭘 봤는데?”

 

5초

 

“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봤어요!”

 

4초

 

“여기에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폐하의 표정을 봤어요!”

 

3초

 

“제가 봤던 그 어떤 표정보다 밝은 폐하의 표정이 보였어요!”

 

2초

 

“제가, 제대로 본 걸 까요?!”

 

1초.

 

처음으로 흰 눈을 본 아이처럼 신이 난 아르망을 보고, 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 아름다웠다. 너무 귀여웠다. 

그래, 난 이 모습이 너무 보고 싶었다.

 

 


“정답이야!”

 

 

그토록 깊은 수렁에서, 난 끄집어져 냈다. 거기에는 한 금발 아이가 있었고,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뭐가 좋은 지, 나를 보자 그 아이는 바보 처럼 웃었고, 난 그거면 충분했다.

-------------------------------------------------------------------------------------




원작 : 
https://arca.live/b/supernerimk2?category=%EC%86%8C%EC%84%A4&target=title&keyword=%EC%A1%B0%EA%B8%88+%EC%9D%B4%EC%83%81%ED%95%9C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어떻게 등장 예정도 없었던 캐릭 애호 파트가 20000자?

아르망은 진짜 전설이다


한동안 애호파트에 목말랐던 라붕이들은 이거 보고 좀 덜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젠 아스널도 나오고 할 거심

그러니까 추천점 많이 해줘 꼬박꼬박 써올게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