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팔을 지켜보았다. 기사가 자신의 어깨에서 떼어낸 그것은 주인과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멸망 전에도 뇌파 감응 의수는 흔치 않았다. 발달한 생명공학은 대다수의 사람이 손실된 신체를 대체하기보다는 새로 만드는 길을 선택하게 했다. 의수는 가난한 절단도착증 환자나 퇴역 군인의 불명예스러운 낙인이었다.
‘무슨 상황인지 대충 짐작은 가는군.’
전쟁에서 신체 곳곳을 잃은 군인은 퇴역할 수 밖에 없었다. 전역금으로 나온 것이라고는 자그마한 집과 의수, 그리고 간신히 생명을 이어갈 수준의 연금. 가족은 원래 없었거나, 잃었거나 둘 중 하나. 실의에 빠진 그의 앞에 우연히 나타난 것은 기사도 문학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심심풀이로 읽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몰입한다.
강인한 기사가 방랑하다가, 괴물 또는 사악한 귀족을 물리치고 레이디를 구한다. 기사도 문학의 정형화된 패턴은 이입하기도 쉽다. 기사는 자신을, 괴물과 사악한 귀족은 전쟁에. 간단한 명제다.
‘스스로를 잃은 채 자신을 기사라 믿으며 떠돌아다니는 부랑자는 기업에 납치되어 실험체로 써먹기 쉬웠겠지. 납치되어 겪은 고문 수준의 실험은 자신이 고난에 빠진 기사라는 암시를 더욱 강화시켰을 거고. 실험이 끝나고, 표본용으로 냉동되었던 그는 우연히 시설에서 깨어나 지금에 이르렀을 거다.’
마리는 자신의 추론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기사의 행동과 멸망 전의 사회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분석하여 내린 결론이니 그렇게 믿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마리는 자칭 기사가 딱했다. 정신이 이상해진 후에도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꽤 선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흔치 않은 인간이, 흔한 삶을 살아 미쳐버렸다. 그녀는 결심했다.
“기사님, 거두절미하고 말씀 드리죠. 저희와 합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네?”
“몇 분 동안이지만 대화를 나누어보니 당신은 방랑기사에 가깝더군요. 오르카호에 오십시오. 충분한 물자, 튼튼한 요새와 넓은 봉토까지. 한도 내에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지원해드리겠습니다.”
“... 잠깐 로시난테와 이야기해도 괜찮겠습니까?”
기사는 양해를 구한 다음 로시난테를 끌고 마리로부터 조금 떨어졌다. 처음에는 상황 설명을 하는 듯하더니 점점 언성이 높아진다. 마리와 슬레이프니르는 그 광경을 흥미롭다는 듯이 지켜보았다. 기사가 로시난테를 몇 대 쥐어박으려는 무렵, 갑자기 리앤이 멀리서 소리친다.
“...큐...너에요!”
“뭐? 잘 안 들려!”
“익..큐...셔..너!!”
대지가 진동한다. 하늘이 울긋불긋하게 물들고, 곧 거대한 바람이 불어닥친다. 리앤이 달리기 시작한다. 몇 번이고 넘어지면서 계속 무언가를 외치지만 바람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마리의 코에 수없이 맡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냄새가 스친다.
“익스큐셔너에요!!”
선혈의 하늘에 거대한 공동이 생긴다. 테두리에 불길한 번개가 일기 시작하더니, 이내 한 점으로 모여 바닥에 꽂힌다. 번개를 타고 나타난 것은 거대한 대검을 양팔에 달고 있는 철충의 처형인. 멸망 전쟁 말미에 나타나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꺾어버린 인류의 재앙이었다.
“저번에 처리했을텐데!”
“어차피 기계니까 되는대로 만들 수 있겠죠!”
“아.”
익스큐셔너가 천천히 팔을 든다. 휘둘러진 검이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다프네는 편안한 죽음을 맞길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등에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에 눈을 떠보자, 기사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레이디?”
“아으으...”
“크게 다치신 곳은 없어보이는군요. 편안하게 앉아 계십시오. 저 녀석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말려야한다. 아무리 단련이 잘 되어있다고 한들 상식적으로 인간이 단신으로 연결체를 상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때마침 워프 게이트가 닫히며 태양이 기사에게 빛을 비추자 그에게 거절할 수 없는 위엄을 선사했다. 참 극적인 순간이었다.
완전히 경도된 마리는 기사를 보내줄 수 밖에 없었다. 곧바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지 깨달은 그녀는 늦게나마 그를 막아보려 했으나 이미 때는 지났다. 익스큐셔너가 다시 팔을 휘두르자 금속과 금속을 부딛히는 소리가 들린다. 마리가 보기에, 그들의 첫인사는 상당히 과격했다.
익스큐셔너가 물러나 자세를 잡는다. 검과 같은 팔을 높게 들어 내려칠 준비를 한다. 베어 넘기는 것이 목적이 아닌, 찍어 떨어트리기 위한 자세. 처형인의 자세다. 얼핏 보면 팔을 높이 들고 있어 동체를 훤히 드러내는 약점투성인 자세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무적이라 여겨지는 방어력과 속도, 그리고 크기와 무게를 온전히 살린 이상적인 전술이다.
“처형인에게도 긍지는 있는가. 좋다. 이쪽도 괴수 퇴치가 아닌 결투로서 상대해주마.”
약점을 드러낸 익스큐셔너와 대비되게, 기사는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빼 들고 가만히 서있다.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한다.
길고 긴 대치 끝에, 먼저 움직인 것은 익스큐셔너였다. 그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단 일격으로 저것을 도륙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리고 그가 반응하지 못할 순간이 필요했다.
기괴한 팔이 빠르게 기사의 검에 내려 꽂힌다. 막으면 부러지고, 피하면 휩쓸린다. 흘려낸 후 솟구치는 지반을 발판삼아 뛰어오르자 6연격이 들어간다. 착지한 후 생기는 잠깐의 빈틈을 처형인은 놓치지 않았고, 이번엔 베어냈다.
흙먼지 속에서 호흡을 고른 기사는 다시 한번 뛰어올랐다. 그 후론 지리한 공방의 연속이었다. 올라타면 떨쳐내고. 찍으면 피한다. 싸움이 길어진 만큼 결착의 순간은 짧았다.
기사가 최선의 수보다 딱 한 호흡 더 쉬자 익스큐셔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던 두 개의 블레이드를 이용한 5방위 공격. 결착은 났다.
“상정한 것보다 더 강하더군. 이만 끝내지.”
빈틈을 놓치지 않은 것은 기사였다. 한 호흡이 더 길었던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땅을 파기 위함이었다. 지반에 대한 공격이 여러 번 행해졌기에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구멍을 파서 공격을 피하고 뒤를 잡을 수 있었다.
기사의 마지막 일격은 투박했다. 횡으로 한 번, 종으로 한 번, 대각선으로 2번 베어낸 후 교점을 찌른다. 그가 물러나는 동시에 처형인은 맥없이 쓰러졌다.
잡아야 한다. 단신으로 상처하나 입지 않고 익스큐셔너를 처리할 수 있는 자라면 도대체 전장에서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마리가 기사를 붙잡으려는 순간, 기사는 검을 챙겨 뒤로 물러섰다.
“정말 함께하고 싶지만, 저에게는 이런 적수가 많아서 말입니다. 제가 어딜 가던지 따라오니 참 골칫거리지요. 아무튼, 짧은 만남이었지만 반가웠습니다. 그대들의 앞길에 명예가 있기를.”
기사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서 로시난테에 올라탔다.
변경점: 전투씬이 보강되었습니다. 마리의 독백이 추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