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자유대회 출품작인데, 가독성이 구렸던 것을 좀 다듬어서 창작물로 다시 올림

*추하디 추한 재업이기 때문에 검색용채널에 굳이 올리지는 마옵소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 32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후략)

                                           -요한복음 18: 38



죽음은 어느 때보다 분명한 형태로 자임의 앞에 서 있었다. 


하늘에 뚫린 검은 구멍들로부터 철충들이 떨어졌을 때부터, 자임은 죽음이 자신의 목덜미를 서서히 죄여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분노한 대자연, 외계 문명, 혹은 신. 무엇이 저 빌어먹을 괴생명체를 이 땅에 내려 보냈는지 몰라도, 그 존재는 인간에 대한 명백한 살의를 숨김없이 드러내며 오랫동안 지구 위에 군림했던 인류를 무참히, 그리고 신속하게 죽여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임은 살아남았다. 그건 그가 뛰어난 생존능력이 있어서도, 그를 지켜줄 바이오로이드들이 많기 때문도 아니었다. 자임이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운 때문이었다. 미처 다 셀 수 없는 수많은 운들이, 각국의 정부가 붕괴하고 인간의 목숨이 부질없게 느껴질 만큼 쉽게 짓밟히는 와중에도 그를 살아남게 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검붉게 뒤틀린 총구를 들이민 AGS를 눈 앞에 두고 자임은 자신의 목숨을 이제까지 부지해 온 그 운도 이제 다했다고 생각했다. 마치 가위가 종이를 자르는 듯한 거침 없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AGS의 몸체가 대각선으로 절단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양단되어 좌우로 쓰러진 AGS 뒤로 나타난 존재를 본 자임은 외모로만 본다면 그녀야말로 실체화한 죽음에 걸맞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검은 수녀복으로 온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지만, 전투 때문인지 양 쪽으로 거칠게 찢어진 치마로부터는 하얗고 늘씬한 두 다리가 길쭉하게 뻗어 있었다. 그리고 피 만큼이나 붉은 두 눈은 거리의 불길을 반사하며 마치 안광을 내뿜는 듯이 자임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쿄헤이 교단의 바이로이드인 베로니카임을 떠올린 그 때, 베로니카는 자신의 키만큼이나 길고 거대한 낫을 자임의 목에 갖다 대었다. 


“너도 나를 공격할 셈인가?”


“너,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방금 막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서인지 자임은 서늘한 철의 촉감을 느끼면서도 오히려 큰소리쳤다. 


“바이오로이드가 감히 인간한테 무기들 들이대?”


“말을 하는 것 보니 하늘에서 떨어진 저 기묘한 인간들이 아닌 진짜 인간인가 보군.”


“그게 무슨 소리야? 하늘에서 떨어진 인간이라니. 네 주인은 어디 있어?”


“교단의 인간들을 말하는 거라면 내가 죽였다.”


“뭐?”


“내가 죽였다고 했다.”


자임은 잠시 말문이 막힌 채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해보려 했다. 


“어떻게 바이오로이드가 자기 주인을 죽……”


“나는 자유함을 얻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베로니카가 자임의 목을 겨눈 낫을 한껏 더 들이밀었다. 


“그러니 너도 죽일 수 있음을 알고 내 질문에 대답해라.”


자임은 말없이 마른 침을 삼켰다. 물러난 줄만 알았던 죽음은,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지 여전히 자임 앞에 분명하게 서 있었다. 


“바다로 가는 길을 알고 있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자임은 두 눈을 꿈뻑거렸다. 


“뭐라고?”


“바다로 가는 길을 알고 있냐고 물었다. 청각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알아 듣기야 했는데 갑자기 왜 바다를……”


베로니카는 인내심에 한계가 왔는지 낫의 무딘 부분을 앞으로 내질러 자임의 목을 콱 눌렀다. 순간적으로 숨이 막혀 켈록거리는 자임을 베로니카가 재촉했다. 


“하늘에서 떨어져 AGS와 융합하는 저 기묘한 인간들이 곧 다시 이곳으로 몰려올 거다. 그때도 네 명줄을 부지해 줄 생각은 없어. 대답해라.”


“……알긴 알아.”


눈물 맺힌 눈으로 베로니카를 쏘아보며 그렇게 말하는데 베로니카는 자임의 대답을 듣자마자 품에서 가시가 돋아나 있는 듯한 형태의 금빛 고리를 꺼내 자임의 머리에 씌웠다. 


“이게 뭐……으으윽!”


강력한 전류가 자임의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자임은 그 자리에서 엎어져 쇼크에 덜덜 떨면서 자신의 뇌가 전기에 지져지는 것을 느꼈다. 간신히 눈알을 굴려 베로니카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았지만 자임에게는 수십 시간 같은 시간이었다. 고통이 점점 잦아들고 편하게 숨도 쉴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베로니카가 입을 열었다. 


“인간의 뇌에 간섭하여 방출하는 뇌파를 바이오로이드의 것으로 바꾸는 장치다. 덴세츠의 세뇌 기술을 가져와 교단의 목적에 맞게 개조한 거지. 우리 같은 바이오로이드가 배교자들과 불신자들을 좀 더 쉽게 빛으로 인도할 수 있게 말이야. 하늘에서 내려온 인간들과 그들이 감염시킨 AGS들은 인간들은 적극적으로 찾아내 공격하지만, 바이오로이드를 상대로는 소극적인 대응을 할 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걸로 저들도 너를 쉽게 노리지는 않겠지.”


자임은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쉴 뿐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일어서라. 바다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다는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니길 빌지.”


“……알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자임은 아직 조금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고 일어나 잠시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이해해보려 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철충이 쏟아져 내려와 인간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철충에 감염된 AGS가 자신까지 죽이려는 찰나에 거대한 낫을 든 바이오로이드가 자신을 구해주었지만, 그 바이오로이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주인을 죽였다고 말하는 고장 난 바이오로이드였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그 바이오로이드에게 뇌를 조작 당해 바이오로이드의 뇌파를 뿜게 되었고, 그녀는 이 멸망한 세상에서 자신을 바다로 인도하라고 협박하고 있다. 



이게 다 꿈은 아니겠지. 의심보다는 오히려 바램을 담은 말을 중얼거리는 자임을 두고, 베로니카는 먼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 가자. 바다로.”


***


자임이 사는 도시는 유명한 해수욕장을 중심으로 관광산업이 크게 발달한 도시였다. 비록 자임과 베로니카가 만난 곳은 그 해수욕장으로부터 제법 먼 동네였지만, 이 도시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자임에게 바다로 향하는 길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차를 타고 갈 수는 없으니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상관 없다.”


자임의 말에 베로니카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인간에 대한 분노 혹은 통제할 수 없는 살의로 인해 저렇게 사나운 눈을 하고 있는 건가 생각했었지만, 자임은 곧 그녀의 그 매서운 눈이 태생적인 것임을 알았다. 


자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보낸 익숙한 도시. 하지만 이 거리에 더 이상 익숙함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감염된 AGS가 무차별적으로 뿌려댄 포격과 미사일에 처참히 무너져 내린 고층빌딩과 깊은 구덩이가 군데군데 패인 도로. 여기저기서 간헐적으로 가스가 폭발하는 소리와 매캐한 탄내가 간간히 자임의 귀와 코를 자극했다. 


그리고 적막함. 적막함은 그 어떤 감각적인 요소보다도 강렬한 이질감을 자임에게 주고 있었다. 철충이 떨어지기 전, 이 도시에는 온갖 엔진소리와 사람들의 활기찬 소리, 그리고 스크린에서 쉴새 없이 흘러나오는 음악과 광고 소리가 도시를 가득 채웠었다. 철충이 떨어진 후에는 AGS의 대포 소리, 폭탄이 터지는 소리, 사방에서 울리는 총소리, 그리고 사람의 비명소리가 도시를 가득 매웠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화기의 발포음도, 전투기의 엔진음도, 사람의 비명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건 평화의 고요함이 아니었다. 그건 멸망의 침묵이었다. 더 이상 비명 따위 지를 수 없는 죽은 자들의 몸뚱이가, 그 일부가, 그 안에 들어 있던 질척이는 액체와 살덩이가, 두 사람이 걷는 길 위에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자임은 그 참혹한 잔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셀 수 없는 죽음을 바라보며 눈물이 흐르거나 분노가 일지는 않았다.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한 사람의 눈물로 덮기에는 너무 많은 죽음이었다. 그 죽음들을 어떻게 내면에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기에, 자임은 그 시체들을 보면서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베로니카가 씌운 고리에 머리가 지져지면서, 머릿속이 고장 난 것일지도 모른다. 자임과 베로니카가 동행하기 시작한지 몇 시간 되지 않았지만, 둘은 이미 철충과 몇 번을 맞닥뜨렸다. 그 기괴하고 섬뜩한 기계음에 자임은 잠시 몸이 경직되었지만, 그들을 바로 눈 앞에 두고도 지나침으로써 철충이 바이오로이드는 적극적으로 노리지 않는다는 것과, 그녀가 자임에게 씌운 고리가 자임이 방출하는 뇌파를 바이오로이드의 그것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증명되었다.


이것에 대해 베로니카에게 조심스레 물었을 때, 베로니카는 설사 부작용이 있다 한들 그것이 감정을 지우는 것은 아니라고 일축했다. 


“애초에 그 고리는 우리가 받은 빛의 은총을 그들에게 온전히 보여주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스러운 빛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기 위함이었으니까.”


정확하게 그 빛의 은총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사람에게 경외심을 심어주는지에 대해 자임은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고리에 대한 질문 이후, 자임은 베로니카에게 이것저것 더 많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바다까지 가는 길은 제법 멀기도 했고, 자임에게는 그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도로를 가득 채운 시체와 피 냄새로부터 어떻게든 관심을 돌리고 싶었다. 


“저기, 널 뭐라고 부르면 돼?”


막상 대화를 하려고 하니 자기소개도 안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내 이름은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니었나?”


“베로니카는 네 모델명이잖아. 자유함을 얻었다면서 이름 같은 건 안 정했어?”


베로니카는 한참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그냥 베로니카로 하지.”


“아, 알았어……베로니카, 근데 바다로는 왜 가려는 거야?”


“자유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다.”


“아까 자유함을 얻었다고 할 때는 언제고.”


“우리 베로니카 모델들은 본래 쿄헤이 교단의 잡일을 맡기 위해 만들어진 평범한 바이오로이드였다. 하지만 ‘성전’을 치르는데 적합한 육신을 얻기 위해 빛의 은총을 하사 받아 새생명을 얻고 다시 태어났다.”


혼잣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의 사정을 자임에게 설명하는 것 같기도 해, 자임은 아무 말 없이 베로니카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나를 포함해 빛의 은총을 받은 베로니카들은 그 이후 성전에서 수많은 불신자들을 빛의 날개 아래로 인도하였고, 성스러운 빛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어 그들이 믿는 신의 곁으로 보내주었다. 우리는 빛의 뜻을 행하는 선지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베로니카가 눈썹을 찌푸려 더욱 매서운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어느 날, 예고도 없었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


“내가 받은 빛의 은총. 우리가 받았던 축복들. 그것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걸. 빛의 은총이라고 여겼던 것은 그저 바이오로이드 불법 개조 시술이었다. 우리 베로니카의 집행하는 성유물도, 아자젤 님의 인도하는 빛도, 사라키엘 님의 징벌하는 뇌창도. 모두 교단의 인간 장로들에 의해 만든 물건에 불과했다는 걸,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거짓됨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거짓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나는 거짓된 자들에게 벌을 내릴 수 있었다.”


교단 시절의 이야기를 해서인지 점점 말투가 경전의 구절 같아지는 베로니카를 보며 자임은 문득 몇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 기자와 그의 파트너 바이오로이드를 떠올렸다. 동종 개체와는 다르게 매우 뛰어난 지능을 가졌었던 돌연변이 바이오로이드. 베로니카의 설명은 비록 은유적이었지만, 진리라고 믿도록 주입 당한 사상들이 거짓임을 깨닫고 더 나아가 거짓된 자들에게 벌을 내렸다(분명 자신을 만들었던 인간들을 죽였다는 뜻일 것이다)는 그녀의 설명을 놓고 보면, 지금 자임의 곁에서 걷고 있는 존재는 또 다른 돌연변이 바이오로이드가 분명했다. 


게다가 단순히 지능이 높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바이오로이드의 대원칙인 인간에 대한 절대복종 명령을 스스로 거부하는 돌연변이라니. 과학자들이 보면 그야말로 신의 기적이라며 떠들어 댔을 텐데. 이제 와서는 아무 의미 없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임을 향해 베로니카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나를 예속하는 거짓된 말로부터 벗어났고 스스로 선택하여 그들을 처단했다. 이것은 분명, 자유함이 맞겠지.”


“그렇겠지?”


“하지만 자유함이란 무엇이지?”


“뭐?”


“인간들이 지어내고 우리에게 주입시켜 다른 인간들에게 전하도록 한 거짓된 교단의 말들을 믿는 신도들은 기쁨에 눈물 흘리며 목 놓아 외쳤었다. ‘나는 자유하다. 성스러운 빛 안에서 나 뛰놀리. 나는 자유하다.’ 하지만 그들을 자유케 한 말들은 한 줌의 거짓말일 뿐이었고, 나는 그 거짓말에 구속되었다가 그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어떻게 같은 말로 인해 누구는 자유함을 얻고, 누구는 구속됨을 입는 것인가?”


“……”


“날 때부터 자유로웠던 인간인 너는, 그 답을 알고 있는가?”


“알까 보냐. 그런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 같은 걸. 그리고 날 때부터 자유롭기는 개뿔. 태어나서는 부모한테 쪼이고, 학교 가서는 선생들한테 쪼이고, 취업해서는 상사들한테 쪼이는 인생이 뭐가 자유롭다는 거야.”


자임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투덜거렸다. 


“애초에 자유가 뭔지 알고 싶다는 거랑 바다에 가고 싶은 거랑은 무슨 연관이 있는 건데?”


“꿈을 꿨다. 바다로 가는 꿈을.”


“꿈이라. 그러고보니 바이오로이드들도 꿈을 꾼다고 했었지. 어떤 꿈이었는데?”


“바닷가에 서 있는 꿈.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바다 앞에 섰을 때 느꼈던 그 해방감, 그 기쁨……그건 분명 내가 생각하는 자유의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영상으로만 봤던 바다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네가 무슨 영상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다는 그렇게 낭만적인 자유로움이 있는 곳이 아니야. 천쪼가리 하나 거치고 술과 섹스로 하룻밤 불태울 생각만 하는 인간들만 득실득실하게 모여드는 곳이지.”


“하지만 쾌락을 추구하는 것 또한 자유를 누리는 것 아닌가?”


“어……”


베로니카와 대화를 나누면서 자임 자신조차도 자유가 무엇인지 헷갈리게 되어버렸다. 베로니카의 말에는 반박할 수 없었다. 바다에서 쾌락을 좇던 그 사람들도 분명 자유, 혹은 그 비슷한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본능을 따르며 느꼈을 자유도 쿄헤이 교단의 신도들이 느꼈던 자유처럼 베로니카가 찾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한 번 이런 생각이 들고나니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머릿속에서 얽히고설키더니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자임은 땅에 침을 내뱉고는 낮게 욕을 지껄였다.


“거참 엿되버린 세상에서 고민 한 번 더럽게 복잡하게 하네……아 일단 데려다 주긴 할 테니까 알아서 판단해 그럼. 여기서 왼쪽이야.”

   

***


“그러고보니 너의 이름을 아직 듣지 못했군.”


“내 이름?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물어볼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바다로 향하는 길, 자임과 베로니카는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성전’을 치를 때 빼고는 교단의 건물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성전을 치르기 위해 이동할 때에도 교단의 차량에 실려 이동했기 때문에 바깥의 풍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자임은 그런 베로니카에게 도시의 곳곳을 소개해주었다. 비록 멀쩡한 건물들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자임은 마치 멸망 전에 이 도시를 찾아온 관광객을 안내해주는 것처럼 이곳저곳 가리키며 떠들어댔다. 백화점, 병원, 음식점……눈에 익은 장소가 보일 때마다 그곳이 뭘 하는 곳인지 설명하면서, 자임은 이 멸망한 세상에서 떨어져 자신의 익숙했던 기억 속의 도시로 떠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베로니카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사나운 눈매에 표정 없는 얼굴로 자임의 설명을 묵묵히 들을 뿐이었지만, 자임이 가리키는 곳마다 시선을 돌리며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서 이따금 자임의 손가락이 향한 곳이 아닌 자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난데없이 그의 이름을 묻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자임. 이제 내 이름을 불러 줄 사람은 너밖에 없겠지.”


“바이오로이드와 인간이 자식을 낳는 것도 가능하다고 들었다.”


“나보고 신인류의 기원이 되라는 거야?”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얘기한 것뿐이다.”


“그런 거창한 직함 같은 건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자임이 킬킬 웃으며 대답했다. “나 같은 게 인류의 시초가 되다니 그것 참, 인류에게 미안해지는데.”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박하군.”


“살면서 번듯하게 뭘 이뤄본 적이 없으니까 당연하지.”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철충들이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불빛도 없는 밤길에 철충들과 부딪히는 일은 겪고 싶지 않았기에 자임과 베로니카는 근처 마트에서 먹을거리를 대충 챙기고 모텔로 기어들어갔다. 골목 사이에 있어서인지 비교적 멀쩡한 상태를 유지한 건물 안에 철충들이 있나 확인한 후 한 방에 들어가 테이블 위에 먹거리들을 펼쳐 놓았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지.”


마침 창문을 보니 달빛이 밝았다. 자임은 창문을 열어 불빛 하나 없는 방을 달이 은근히 비추도록 했다. 베로니카와 마주 앉아 음식을 씹으며 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 며칠 간 펼쳐졌던 지옥 같은 광경들은 모두 밤공기의 고요함과 함께 꿈의 저편으로 사라진 기분이었다. 자임은 그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아 마트에서 가져온 술병을 꺼내 뚜껑을 서둘러 깠다.


술기운이 뜨뜻하게 자임을 달구기 시작했다. 철충이 떨어진 이후 한 번도 입에 대진 못한 술이 몸 속에 돌기 시작하며 잔뜩 웅크렸던 감각들을 깨우자, 자임은 이 멸망한 세상에서 송구스럽게도 미래에 대해서까지 생각을 뻗기 시작했다. 


“바다에 가고 난 뒤엔 뭘 할거야?”


“그게 무슨 말인가?”


“바다로 가는 게 인생 끝은 아니잖아. 거기서 자유가 뭔지 네가 알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 이후의 일도 생각은 해야지. 바이오로이드들은 수명도 길다며.”


베로니카는 달빛을 받아 불그스름하게 빛나는 눈으로 자임을 멀뚱히 노려보았다.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그럼 이제부터 생각해야지.” 


자임은 술병의 모가지를 잡고 회전시키며 혼자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어쩌다 너에게 협박당해서 바다로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이왕 이 망한 세상에서 철충에게도 쫓기지 않게 되었으니 나도 바다에 가면 이것저것 해봐야지.”


“아까 전에는 분명 바다는 쾌락만을 좇는 인간들이 득실득실거리는 곳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아 세세한 건 신경 꺼.” 자임이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런 놈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바다에서 그 짓거리만 하라는 법은 아니잖아?”


“그럼 바다에서는 뭘 해야하는 거지?”


자임이 킬킬킬 큰 소리로 웃었다. 점점 늘어지는 그의 말투에서 술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뭘 해야한다는 게 어딨어! 자기 꼴리는 대로 하는 거지. 수영을 하던가! 일광욕을 하던가! 사람이라도 살아있으면 꼬셔보던가! 난 가서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던 요트나 타고 시원하게 바다를 달려볼 거야. 제일 비싸 보이는 놈으로 골라잡으면 달리는 맛이 좀 있겠지. 맨날 사람과 쓰레기만 넘쳐나던 바다를 혼자서 맘대로 즐길 생각하니까 벌써 기분이 좋아지네.”


그렇게 말하며 자임은 술병에 남아 있던 술을 모조리 입에 털어 넣고 봉지에서 새로운 술병을 꺼냈다. 


“그런 말 하는 것치곤 그리 즐거워 보이진 않는데.”


베로니카의 말에 자임이 뚜껑을 깐 술병을 테이블에 쾅 하고 내려놓았다. 


“당연히 엿 같지!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죄다 눈 앞에서 구멍이 뚫리고 건물에 깔려서 죽었어. 나도 벌써 백 번은 더 죽었어야 했는데 왜 살아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이제는 이 괴상한 고리 때문에 저 개 같은 철충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어.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사람도 사회도 다 망해버리고 철충도 건들지 않는 난 이제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제일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그런데 자유가 다 뭐야!”


자임은 병에 든 술을 숨도 쉬지 않고 마시다가, 그대로 의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쓰러졌다. 


“이 망해버린 세상에서 자유가 다 뭐란 말이야……”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던 자임은 곧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베로니카는 잠시 자임을 말 없이 바라보았다. 잠에 든 지 얼마나 되지 않아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신음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깊게 잠들었는지 깰 기미가 보이지 않자 베로니카는 자임을 들어 삐걱이는 침대에 올려두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창틀에 기대어 바라본 도시에는 더 이상 작은 불꽃조차 보이지 않았다. 휘영청 밝은 달빛에 도시는 벌거벗긴 제 몸을 속절없이 드러내며 비참하게 드러누워 있었다. 테이블 위에 자임이 사온 담배 한 갑이 눈에 띄었다. 베로니카는 창가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손을 뻗어 담배 한 개비와 그 옆에 있는 라이터를 집어들었다. 


담배는 교인들에게 금지되었던 물건 중 하나였다. 교단에서는 속세의 더러움을 씻어내야 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것들을 금지했었다. 교인들은 엄격한 통제와 규율 아래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교단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던 베로니카는 ‘깨달음’을 얻기 얼마 전에 읽었던 이교도의 경전이 문득 생각났다. 거대한 영향력을 가졌던 한 이교도 집단과의 성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베로니카는 쿄헤이 교단의 장로들과 함께 그들의 경전에서 그릇된 점을 찾아 쿄헤이 교단의 경전을 전파하는데 이용하고자 그 경전을 연구했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담배를 입에 물고 칙, 칙, 라이터를 가져다 댔다. 담배연기가 폐로 몰려들었다가 혈관을 타고 퍼져들어갔다. 온 몸의 세포가 매캐한 연기에 충혈된 눈으로 깨어나는 감각 속에서 베로니카는 자유함을 외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교인들을 떠올렸다. 바다에서 자유롭게 본능과 쾌락을 탐하던 인간들을 생각했다. 자유 안에서 괴로워하던 자임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후우 내뱉는 담배연기 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하나씩 일렁이다 밤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철-썩. 바닷소리가 들려왔다. 베로니카는 자신이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임은 내일 종일 걸어야 바다가 보일 것이라고 했다. 베로니카는 다시 한 번 담배를 빨아들였다. 


내일은 바다로 가자. 베로니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베로니카에게서 나온 담배연기가 해무(海霧)처럼 하늘 위로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