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lastorigin/30168028 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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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게 시작이자 끝이며 빛이자 어둠이다. 그에게 외면받고서 살 수 있을까.]



아침 6시. 코드명 T-8W 발키리. 통상 발키리. 기상.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전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아침은 늘 6시에 시작한다.


바이오로이드도 당연히 피곤하면 늦잠도 자고 게으름도 피운다.


하지만 그녀는 매번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그녀의 타고난 성실함인지 단지 그렇게 기계적으로 설계가 되어있는지는 모른다.





스윽. 스윽.


"........................"


그녀가 매일 아침 하는 일은 그녀의 애병을 닦아주는 것이었다. 샤워는커녕 세수도 하지 않고


눈곱만 겨우 뗀 채로 하는 작업이지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기도 했다.


레오나 대장은 병기를 너무 섬세하게 다루면 유사시에 제 힘을 못 쓸지도 모른다는 주의지만


그래도 사령관 각하를 지켜야 할 때 탄환을 철충에게 꽂아주지 못할지도 모르는것보단 낫다고 믿는다.


사령관은 누구보다도 고귀하고 용감한 전사이지만 함부로 발할라의 인도를 받아서는 안 되니까.


그녀의 애병은 주인의 손길로 인해 매끄럽고 반짝거린다. 스코프조차 탑재되어 있지 않은 인간 역사에서는


비교적 구식 총기였지만, 철충들의 두꺼운 장갑도 언제든 손쉽게 찢어발길 수 있는 녀석이다.


찰칵, 찰칵찰칵. 틱. 틱. 틱. 틱.


작은 부품까지 하나하나 분해 후 조립까지 마치고 방아쇠를 당겨본다. 역시 매끄럽게 작동한다.


얼른 밥을 달라고 보채는 어린 맹수의 울음소리 같다.


".........................."


철컥. 터엉.


그 어린 맹수는 오늘도 철제 우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미안해.





아침 8시.


오늘은 월요일이기 때문에 특별한 일정이 있다.


간단히 세수와 양치, 샤워를 하고 머리를 정리하고 옷을 입는다.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오르카 호 구내식당으로 간다.


반갑게 맞아주는 메이드들에게 목례하고 곧바로 목적지인 게시판으로 향한다.


"......................."


그리고 또 똑같은 일. 이번 주도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없다. 


군인은 질문하지 않는다. 그저 실행할 뿐.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일이 너무 많아서 돌아버릴 것 같다는 하르페이아와 티타니아를 쳐다보면서


발키리는 식사를 한다. 부럽다고 말하면 화내려나.







그녀도 이런 시절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오르카 호 저항군의 일원으로 처음 복원되었을 때는


업무 로테이션은 그저 사치였던 시절이 있었다. 


매일매일이 전장. 눈 뜨면 저격하고 밥 먹고 저격하고 잠 자다가 저격하는 일상이었다.


너무 바빠서 대소변도 그냥 바지에 지려가면서 저격했었다. 


구린내와 지린내를 함께 풍기면서 철충 대장 저격 성공을 보고한 날 사령관은 발키리를 끌어안고 울었다.


미안하다고. 그 날 이후 발키리는 절대로 몸을 씻지 않는 날이 없었다.


백색 재앙이라는 별명으로 철충들에게 불려졌다는 사실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


그때는 이런 고급스러운 식사를 깨끗한 식기에 담아먹는다는 건 상상만 해봤는데.


그런데 왜 이리 목에 걸리는 것만 같은지. 사령관하고 같이 더러운 풀숲 아무데서나 주저앉아서


먹는 분명히 모래와 시멘트를 넣어서 만든 게 분명했을 끔찍한 보존건조식량 맛도 이러진 않았는데.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오르카호의 살림이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다. 발키리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자매들이 하나 둘 합류하거나 제조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6일 출격은 어느 사이에 5일 3일...........2시간.


그리고 지금까지 이르렀다. 그녀가 할 일은 없다. 


차라리 누군가가 구박이라도 하면서 잡일이라도 시켜줬음 하는데.


[발키리 선배님이 이런 일 하시면 안되지 말입니다.]

[어머!! 죄송해요 발키리 님. 저희가 얼른 할게요.]

[발키리 씨가 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발키리. 힘들게 자꾸 일하지 말고 좀 쉬어.]


호의는 불편했다.


언젠가부터 그만두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서로 편치 않으니까.




우물우물. 우물우물.


하루의 대부분은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읽으면서 알비스가 가끔 나눠주는(라기보다는


그냥 안드바리가 쉽게 오지 못한다는 이유로 방에 숨겨두는 것 같지만) 과자와 초콜릿을


먹는 일이다. 이대로 책을 열심히 읽어서 도서관의 모든 책을 다 읽게 되면


그때는 사령관이 나를 다시 써주실까? 모르겠다. 


문득 아랫배를 본다. 기분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근육이 없어진 것 같고 조금 튀어나온 것 같다.


임신은 아니겠지. 한때는 임신 걱정을 할 정도로 사랑도 많이 받았는데.


내일은 운동이라도 해야지. 소용없는 일인 것 같지만 뒤룩뒤룩 살찐 모습은 싫으니까.







밤이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헤드폰을 쓰고 단말기 패널에 시선을 맞춘다.


영상에서 사령관이 아이돌 복장을 한 일곱 바이오로이드들을 정신없이 탐하고 있다.


예전에는 만지는 것도 빠는 것도 넣는것도 다 서툴렀는데. 이제는 너무 잘하네.


여덟개의 교성을 들으면서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을 만진다. 


쉽게 절정에 다다른다. 이불이 적셔졌다.


"............................"


남은 건 허무. 아직도 재생중인 영상은 한 바이오로이드의 머리카락에 듬뿍 사랑을 해준 사령관이 


아마도 신입으로 추정되는 새로운 바이오로이드의 젖가슴을 탐하면서 사랑을 하기 시작한다.


익숙한 신음소리와 새된 비명소리를 눌러 꺼버린다. 패널은 흑색으로 물든다.


눈을 감는다. 




이불은 아직도 적셔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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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더 매운맛 엔딩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이벤트 당첨될까봐 뺐습니다.


받아라 죄책감 프레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