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전 쓸모없어진 AL 레이스 본편


 "이상으로 피고인 소위 XXX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그는 헌병들에게 붙들려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날 울고 있던 AL 레이스를 데리고 부대를 도망쳐 나왔을 때,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것이라고 각오하지 않았던가. 


'그때가 지금일 뿐이다. 레이스에게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전시에 탈영은 중죄다. 레이스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역시 목숨을 부지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허나 일단 레이스는 추격대가 노리기 전 도망쳤기에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는 수갑에 묶인 팔을 잡힌 채 그대로 모랫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안대로 눈이 가려지자, 바닷가의 소금내음이 진해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나?"

"......없다."


'레이스가 최대한 오래 살아남길. 그리고 그 시간동안 좋은 추억을, 기쁜 추억을 최대한 많이 쌓기를.'


간결한 대답이 끝나자 철컥, 하고 뒷통수를 겨눈 소총이 장전되었다. 몇 초의 정적이 이어지고 총이 불을 뿜었다. 


타앙-!


해변에 울려퍼지는 총성과 함께, 그는 의식을 잃었다.


*


 "허억!"


사령관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와 함께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뒷통수를 타고 퍼지기 시작했다. 뒷통수가 깨져 피가 철철 흐르는 것과 같은 느낌에 사령관은 급히 머리를 더듬거렸다. 까칠까칠한 머리카락이 만져졌을 뿐, 피가 묻어나오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하지만 머리의 통증은 아직 가시지 않아, 사령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은가, 사령관?"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레이스가 깨어나 걱정스러운 듯 그의 팔을 잡았다. 방끔 꿨던 꿈 탓인지, 팔이 붙들려 사형장으로 끌려갔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감촉을 느끼는 것이 너무 두려워, 사령관은 레이스의 팔을 세게 쳐냈다.  


"미안해, 레이스......"


살짝 붉어진 레이스의 손이 눈에 들어오자, 사령관은 시선을 돌리고 레이스에게 사과했다. 


"물과 두통약을 가져오겠다."

"고마워."


그녀는 사정을 대략 알고 있었다. 오르카호에서 사령관이 된 소대장과 재회했을 때, 비밀의 방에서 자신을 보낸 후 일어난 일을 듣게 되었다. 아무리 사형 집행이 거짓이었다고 해도, 죽음과 직면했던 고통은 오랫동안 사령관을 괴롭히고 있었다. 


레이스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컵에 따르고 창문을 열었다. 새벽의 선선한 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얼굴을 간질였다. 


그가 죽을 뻔한 계기이기도 했던 멸망전쟁은 오래 전에 진작 끝났고, 철충과의 싸움 또한 끝나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다. 그런데도 사령관은 아직 그때의 아픔을 마음에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레이스는 어떤 결심을 하고 물컵과 두통약 한 알을 쟁반 위에 올렸다.


"사령관, 물과 두통약을 가져왔다."

"야밤에 미안해."


사령관은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두통약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레이스가 컵을 들어 물을 마시고 있었다. 


"레이스, 도대체 뭘...... 우읍!"


차가운 물을 입에 머금자마자, 레이스가 그에게 입술을 맞춰 왔다. 


꿀꺽.


그와 함께 레이스 입 안의 온기로 약간 미지근해진 물이 사령관의 입을 통해 목으로 넘어갔다. 지끈지끈한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과 그녀의 체온이 그것을 가려 주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놀라, 사령관의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슬픔과 고통은 나눌 수 있다고 들었다. 그것을 완전히 없애 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같이 짊어질 수는 있을 것이다."

"레이스......"


사령관과 레이스가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방금 머금었던 물 때문에 약간 촉촉해진 그녀의 혀는 오늘따라 질척이며 그에게 감겨왔다. 


평소 할 때는 키스를 짧게 끝내고 레이스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는 사령관이었지만, 오늘따라 입맞춤이 길었다. 


키스를 하면 할 수록, 레이스의 향기가 후각과 미각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인류 재건을 위해 여러 바이오로이드들과 관계를 맺어왔던 그였지만, 이렇게나 누군가의 향기에 집중해 본 적은 거의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때.......'


사령관은 레이스와의 첫경험을 떠올렸다. 비에 젖은 옷 때문에 몸은 축축했고 푹신한 침대가 아닌 딱딱한 동굴 바닥에서 그녀와 몸을 섞었지만 레이스의 향기는 따뜻하게, 그리고 달콤하게 그를 감싸 주었다. 


그녀와의 의미깊은 첫경험이라 미화가 들어갔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 느낀 모든 것은 사령관의 뇌리에 하나하나 깊숙히 박혀 있었다. 


헐떡이는 숨. 그를 끌어안은 레이스의 떨리는 팔. 다정한 행위에 익숙지 않은 듯한 엷은 신음. 그의 손길에 서서히 젖어들어가는 아랫도리......


동굴 밖에는 추격대가 눈에 불을 켜고 둘을 잡으려 했고, 도주로도 확보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발각되면 죽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꽤 시간이 지난 지금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 상황에서 섹스를 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사령관과 레이스는 도망치거나 추격대를 공격할 준비를 하는 대신 서로를 열렬히 탐했다. 


'이 손이 문제였던 걸까.'


사령관은 레이스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핥으며,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그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손을 잡은 순간 꼭 그녀와 관계를 맺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것 같았다. 


"간지럽다...... 내 손에 뭐라도 발라놓은 건가?"


레이스의 굳은 얼굴이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레이스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지와 중지 사이의 얇은 살을 부지런히 핥았다.


"그래. 정말 네 손에 뭐라도 잔뜩 발라놓은 것 같아."


쪼옥, 쪽.


사령관이 레이스의 손가락을 빠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이 손가락 하나하나로 상처가 난 자신의 손등을 감싸 주었었지. 사령관은 그때를 회상하며 그녀의 반대쪽 손으로 혀를 옮겼다.


자신과 그녀가 도망친 장소가 진작에 까발려져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했다. 곧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원통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자해하듯이 손을 동굴 바닥에 내리쳤다. 


'진정해라, 소대장.'


그때 상처가 잔뜩 난 손을 잡아준 존재가 레이스였다. 피와 돌 부스러기로 더러워진 손을, 따뜻하게 감싸준 손. 낮게 울리는 목소리. 사령관은 입 안에서 그녀의 손가락을 빼내고 읊조렸다.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너를 탐하고 싶었던 거였어."

"......그런가."

"레이스."


머리에 소총이 겨눠지기 전 맡았던 짠 냄새가 동굴 밖의 비 냄새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사령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만큼은 소대장이라고 불러줄 수 있을까?"


사령관의 질문에, 레이스는 말없이 그를 자신의 무릎 위에 눕혔다. 민소매 상의에 겨우 가려진 밑가슴이 그의 시야를 메웠다. 


"알겠다, 소대장. 나도...... 오늘만큼은 방랑하던 시절의 레이스로 돌아가도 되겠는가?"

"물론이지."


그가 그리 대답하자 레이스는 사령관의 타액이 묻어 미끌거리는 손가락으로 상의를 슬쩍 걷어 보였다. 그녀는 둥그렇게 모양이 잡힌 자신의 젖가슴을 사령관의 입에 물려 주었다.


그가 레이스에게 안겨 젖을 빠는 것이, 마치 수유 플레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추격대를 피해 도망다니던 반 년 동안, 레이스는 여러 지식을 익혔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상식부터, 철충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아남는 기술, 그리고 어머니가 해야 할 일까지.  


세상이 평화로워진지 1년이 넘었지만, 아직 사령관과 레이스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 이런 행동은 그녀의 은근한 기대를 담고 있었다. 물론 그에게 젖을 물린다고 해서 아기가 생길 리는 없었지만 미리 예습해 볼 수는 있지 않은가. 


"사랑한다, 소대장."


좁은 동굴에서 그를 받아들였을 때 그가 그랬던 처럼, 레이스는 사령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다. 그때 자신은 한 번도 당당하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못했다.


한낱 성처리용 바이오로이드 따위가 군의 간부였던 그를 사랑하기에는 너무나도 분에 넘쳤던 것이라고 생각해, 그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이왕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행동하는 것, 레이스는 마음껏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로 했다. 그때의 감정에 몸을 맡겨,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레이스는 입고 있던 반바지를 벗고 튼튼한 하체를 드러냈다. 그에 따라 사령관도 뭔가에 홀린 듯이 훌렁훌렁 옷을 벗어던졌다. 


순간 둘의 자세가 역전되었다. 레이스를 덮친 사령관은 자연스럽게 우뚝 선 자지를 푹 젖어들어간 그녀의 다리 사이에 밀어넣었다. 그와 함께 눈이 마주쳤다.


"아읏. 사랑......한다, 소대장."

"나도......."


화술에 능하지 않은 AL 레이스 기체의 특성상, 그녀는 올곧게 '사랑한다'라는 말을 그에게 전했다. 그런 레이스의 금빛 눈 안에 비친 자신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열 달 후. 


분만실 문 앞에서, 사령관은 조마조마하게 닥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그 행위의 결과로 둘 사이의 아이가 생긴 것은 좋았지만 레이스가 이렇게나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보니 후회가 되기도 했다.


100년 전 레이스와 도망친 책임은 사령관 혼자서 오롯이 졌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날의 결과물은 아이의 부모인 레이스와 사령관이 함께 책임지는 것이 옳았다. 


"축하해, 오빠! 건강한 공주님이야."


닥터가 그동안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분만실 문을 열었다. 그 말에 사령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1년동안 죽 아들만 태어나다 처음으로 딸이 생겨서일까. 물론 그 이유도 큰 지분을 차지할 것이었지만, 분명히 다른 감정이 앞서고 있었다.


"흐윽......."

"오빠, 괜찮아? 설마 첫 딸이라서 우는 건 아니지?"


당황한 닥터가 어쩔줄 몰라하며 사령관에게 물었다. 사령관은 그런 그녀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눈물을 닦아냈다.


"괜찮아. 들어가서 아이를 봐도 될까?"

"물론이지! 엄마 아빠 닮아서 애가 아주 미인상이야."


닥터가 빙그레 웃으며 사령관을 문 안으로 안내했다. 서투른 손길로나마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던 레이스가 엷게 미소지었다. 


"건강한 딸이다, 사령관."


그녀가 조심스럽게 아이를 보여주었다. 레이스를 꼭 닮은 은색 배냇머리가 눈에 띄여, 아기는 머리에 숨구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고생했어."


사령관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대신 손가락으로 볼을 꾹 눌렀다. 부드러운 볼살이 사령관의 손가락에 머물렀다 사라졌다. 


"흠흠. 미안한데. 오빠, 아이 이름은 어떻게 할 거야?"


그동안 아이 이름을 사령관이 지어와서, 닥터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그동안 남자애 이름은 많이 지어서 익숙했지만, 여자아이 이름은 처음이라 사령관이 고민하는 시간이 조금 길었다.


"음, '나오미'는 어때?"

"나오미?"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에, 레이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령관은 그런 레이스의 손을 살포시 잡고 입을 열었다.


"히브리어로 '기쁨'이라는 뜻이래. 그때 머리에 총을 맞기 전, 네가 나 없이도 기쁜 추억을 쌓길 바랬어."


그 말에 레이스가 답지 않게 볼을 부풀렸다. 죽을 때조차 자신의 기쁨을 빌어준 것이 내심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엥? 왜 그래?"

"글쎄. 레이스 언니는 그런 오빠가 답답해 보였나봐. 솔직히 죽을 때면 자길 원망할 수도 있었을 텐데."

"혼자 도망치게 해 놓고는 원망할 정도로 속이 좁지는 않거든?"


사령관이 그렇게 말하며 레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닥터는 둘 사이에 흐르는 분홍빛 기류를 알아채고 슬쩍 자리를 피했다.


"그럼 방해꾼은 이만 가 볼게. 둘이 알콩달콩한 시간 보내!"


닥터가 나가자 레이스는 아이의 볼에 머리를 대고 나오미, 하고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 이름을 부른 레이스는 만족한 듯 중얼거렸다.


"엄마 이름이 망령인 것에 비하면 큰 발전이다."

"그래도 괜찮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인걸. 그렇지, 우리 딸?"


아직 의사를 표현할 능력이 없는 나오미였지만, 팔불출인 아빠와 엄마는 자기들끼리 키들키들 웃으며 애정을 나누고 있었다.


- - - - -


둘이 행복해하는 걸 보여주려고 쓴 후일담이라서 야스 묘사는 줄이고 감정 표현은 늘려 봤다.

읽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