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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보로스 섬에서의 일이 끝난 뒤엔 한동안 별일이 없었다.


쫓겨다니는 장신의 여성 마왕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쫒기는 쪽은 마왕이고 쫒는 쪽은 마법소녀라는 조합이었는데, 정확히는 그런 배역을 맡은 바이오로이드였다.


마법소녀는 라비아타에 의해 되살아났는데, 정신 제어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바람에 멋대로 마왕을 적대했다. 마법소녀는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굳게 믿었다.


문제는 멸망 전의 만화가 실제로 마왕군 역할을 맡은 바이오로이드를 마법소녀들이 죽이는 내용이란 점이었다. 따라서 마법소녀는 그냥 적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왕을 죽여버리려고 들었다.


덕분에 '마왕' 뽀끄루는 그녀를 죽이려는 '마법소녀' 백토를 피해서 도망치는 신세였다.


그런데, 그런 백토의 행동을 지시하는 마법소녀 대본에선 뽀끄루가 어떻게 살해당하는지조차 세세히 적혀 있었다.


만약 백토가 대본대로 임무를 완수한다면 뽀끄루는 끔찍하게 살해당할 터였다.


해당 내용을 묘사한 '마법소녀 모모 시즌 2' 대본을 읽은 사령관이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이 정도면 그냥 스너프 아니야?"


뽀끄루는 울상이었다.


"힝힝……."


"그런데 넌 그걸 계속 나뒀단 말이야? 막 죽이려고 전기톱을 들고 쫒아오는데?"


"그치만……."


뽀끄루는 말만 마왕이었지 워낙에 순한 성격인지라, 친구 백토가 죽이려고 날뛸 때마다 어쩌지 못하고 피해다녔다고 호소했다.


물론 뽀끄루의 능력이 백토보다 약한 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친구끼리 싸울 순 없었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의 백토는 멸망 전에 친했던 백토가 아니라지만, 뽀끄루에겐 여전히 친구이자 동생이랜다.


여하튼, 울먹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사악한 여마왕이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키도 178cm정도의 장신인 미인이 겁에 질려서 울먹이는 모습은 사령관을 난감하게 했다.


게다가 그는 백토의 주무기가 회전톱이라는 사실도 알았기에,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뽀끄루가 대본처럼 톱날에 썰려 살해당하는 꼴은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뽀끄루를 돕기로 했으나 당장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백토를 잡아서 재세뇌하는 건 실험체 네오딤은 물론 피해자인 뽀끄루조차 반대했다.


이에 그는 마왕 뽀끄루를 마법소녀로 개심시켰다는 설정으로 백토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본을 읽고 어떤 조치를 취한 다음, 백토와 뽀끄루를 한자리에 모아놓았다.


이 연극에서는 그 또한 매지컬 젠틀맨이라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이른바 마법소녀 매지컬 모모와 백토 등을 이끄는 캐릭터였다.


이윽고 모든 배역이 한자리에 모였다.


백토는 뽀끄루를 보자마자 이빨을 드러냈다. 움찔한 뽀끄루는 떨면서 얼른 사령관의 뒤로 숨었다.


"앗. 젠틀맨? 어째서 마왕이 여기에…… 설마 너도 마왕의 마력에 빠진 것이냐?"


"히익!"


미리 무기를 수거해 두길 다행이었다.


백토가 눈을 부라리고 뽀끄루가 눈을 동그랗게 떨며 덜덜 떨었다. 사령관은 그런 뽀끄루를 억지로 앞세운 다음 말했다.


"아니야. 난 마왕의 마력에 빠진 게 아니야. 누가 친구인지를 가르쳐 주려는 거라고."


"친구? 마왕이 내 친구일 리 없어!"


"아니야, 백토! 잘 봐. 뽀끄루의 눈이 악당의 눈인지를. 이 눈이 그런 소인배들의 눈으로 보이나?"


사령관은 될 대로 되라 싶어서 뽀끄루의 턱을 잡고 백토를 바라보게 했다. 뽀끄루는 이제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


"게다가 너도 알잖아. 철충이란 놈들은 저 마왕 역시 죽이려 한다고. 허약한 마왕보단 놈들이 더 위험해!"


백토의 눈이 흔들렸다. 바이오로이드답게 인간의 말은 절대적인 영향력이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얼른 믿으려 들지 않았다. 사령관은 침을 삼키며 다시 말했다.


"마법소녀 백토. 인ㄱ…… 아니, 매지컬 젠틀맨인 내 말도 믿지 못한다는 말이야?"


신념이 흔들리는지 백토는 울상이 되었다.


"그, 그렇지만. 날더러 저 사악한 마왕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냐. 나와 몇년이나 싸운 녀석을!"


싸웠다기보단 그저 일방적으로 쫒아다닌 셈이었지만, 정작 그 사악한 마왕은 사령관의 등 뒤에 숨어 덜덜 떨고 있는 게 아닌가. 사령관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말했다.


"뭣보다. 녀석은 이제 사악한 마왕이 아니야."


"뭐라고? 그럼……."


그때 마법소녀 모모가 나서서 거들었다.


"응. 그녀는 이제 우리처럼 마법소녀가 되었어. 정말이야."


그러자 백토는 혼란스러워 했다.


"으으음. 하지만 그걸 어떻게 믿지. 모모도 마왕의 마력에 타락…… 음?"


뽀끄루는 떠밀리다시피 앞으로 나온 다음, 새빨개진 얼굴로 돌아서더니, 엉덩이를 내밀었다.


노출도 높은 마왕 의상은 엉덩이도 그대로 드러냈는데, 그 볼기짝에 바로 마법소녀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뽀끄루의 볼기짝을 보고 백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앗. 이 스티커가 붙었단 건?!"


"그래. 이제 내 말을 믿겠어?"


백토와 모모가 나오는 마법소녀 만화에서는, 마법소녀 스티커가 붙은 대상은 정화된 거라는 설정이었다. 원래 대본에서 뽀끄루의 시신에다 스티커를 붙인 건 블랙 코미디와도 같았지만.


사명에 충실했던 백토는 이렇게 되자 마왕 뽀끄루가 개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안 그래도 백토 역시 때때로 자신의 사명을 의심스러워했던 차였다. 저 겁쟁이 마왕이 진짜로 대악당이 맞는지 어리둥절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혼자서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도 해도, 잘못된 세뇌로 인한 사명이 판단을 가로막고는 했던 것이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백토는 마침내 정색하며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젠틀맨. 내가 널 믿어도 되겠나?"


"제발 믿어 줘. 젠틀맨으로서의 명령이야."


"으음. 나라고 어찌 피를 보고 싶겠는가. 만약 마왕이 순순히 정화된 거라면……."


그녀는 고민 끝에 결국 친구 모모와 사령관의 말을 믿기로 하고 오르카호에 합류하였다.


신참 '마법소녀' 뽀끄루와 우호적인 친구 사이가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마침내 백토와 '화해'하게 된 뽀끄루는 그만 백토를 끌어안고 울어버리고 말았다. 몇년간 살해 위협에 시달리다 겨우 오해를 풀었으니, 가슴이 벅차고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하여 오르카호의 마법소녀는 트리오가 되었다. 셋이 사령실을 떠나자 사령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어째서 나의 몫인가. 연극을 하면서 사령관은 얼굴을 싸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진땀을 뺐다. 만일을 대비해 뒤에서 그를 경호하던 리리스는 웃음을 참느라 다른 의미로 고통스러워했다.


"……뭐, 끝이 좋으면 좋은 거겠지."


"그럼요. 쿡쿡."


"웃지 마."


출장을 나갔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라비아타는 불완전한 복원을 해서 죄송하다고 사죄해 왔다.


"아아, 주인님이 그렇게까지 하시다니." 그녀는 탈론페더가 찍은 연극을 보고 아예 엎드릴 기세였다.


"됐어. 이미 끝난 일이야."


사령관은 라비아타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멸망 전의 미디어가 인격체끼리 실제로 살육을 저지르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질려 버렸다.


게임으로 아는 내용이었지만 직접 체험해 보니 도무지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가능하다면 앞으로는 그런 미디어를 찾아내는 즉시 없애버릴 마음을 먹었다.


그런 해프닝이 있기는 해도, 라비아타가 전면에 나선 덕분에 바이오로이드의 복원은 게임보다 빠르게 추진되었다.


금발벽안의 소녀 아르망 추기경도 이미 여름 이전에 복원되어 사령관을 돕고 있던 채였다. 예지력이 뛰어난 아르망 덕분에 사령관은 부족한 전술지휘 부분을 채울 수 있었다.


그래서 한번은 아르망과 티타임을 가지고 있는데, 탐사대로부터 거점 주변의 테마파크를 찾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사령관은 예상대로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에서도 테마파크 이벤트가 벌어질 타이밍이었다. 동시에 그는 아르망의 얼굴빛이 흐려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주인공이 키르케한테 초대받아 직접 이동하고, 거기서 멸망 전 인류의 어둠을 알게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전령 노릇을 할 펜리르가 이미 가세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사령관 역시 테마파크에 발을 들일 생각이 별로 없었다.


아르망은 문득 사령관을 보고 조용히 물었다.


"폐하. 혹시, 인류 멸망 전의 테마파크에 대해 알고 계시는지요."


"글쎄. 알기는 해도 가본 적은 없고, 갈 생각도 없어."


"……."


사령관도 아르망을 응시했다.


오리진더스트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를 특별히 강화시키는 특수 세포 물질이었다. 꿈으로만 여겨지던 휴먼-컴퓨터 인터페이스와 사이보그화를 손쉽게 달성하게 해준 것이다.


오리진더스트를 사용한 인간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오리진더스트를 통해서 뇌와 육신을 지배당할 위험에도 처했다.


아니나다를까 범죄 조직이나 기업, 민간 조직, 심지어 정부에서도 뇌에 오리진더스트가 이식된 인간을 조종하는 사례가 적발되었다.


인간은 오리진더스트로 조종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때마침 김지석은 바이오로이드 에바와 라비아타를 시장에 내놓았다.


무수한 논란과 분쟁 끝에 인간은 바이오로이드를 만들어 지배하기로 결정했다. 오리진더스트의 지배를 피하고, 노예 계급을 만드려는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바이오로이드는 곧 인간의 일자리를 모두 차지했고, 대다수의 인간은 쓸모없어졌다.


밀려난 인간들은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한편 바이오로이드를 희생양 삼아서 괴롭혔다.


지배층 또한 민중의 불만을 해소할 겸 가학적인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바이오로이드를 괴롭히는 시설이나 행사를 열었다. 그가 겪은 잔혹한 마법소녀 미디어도 실은 그런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탐사대가 발견한 이 테마 파크 또한 바이오로이드를 능욕하고 학대하고 죽이는 장소 중 하나인 것이다.


"아르망은 내가 걱정돼? 혹시 과거 인류의 행동을 따라할까봐."


아르망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외람되지만, 솔직히…… 그렇습니다."


아르망은 불안한 듯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물론 제가 아는 폐하께선 그러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만, 혹여나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럼 내가 아르망의 불길한 예지를 빗나가게 해야겠네."


아르망이 놀란 눈을 들었다.


사령관은 별일 아니란 듯이 테마파크 파괴에 필요한 조치를 점검했다.


그라고 해서 특별히 바이오로이드에게 박애정신을 가진 건 아니다. 단지, 아르망의 걱정을 덜고 게임의 전개를 쫒아가기 위함일 뿐이다. 겸사겸사 테마파크에 있는 철충도 청소하고.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는 테마파크에 로크 등을 보내어 키르케를 찾도록 했다.


그러자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테마파크 관리인 키르케가 디스플레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녀처럼 고깔 모자에 비행용 빗자루를 탄 바이오로이드였다.


- 어머나. 그러잖아도 제가 초대하려고 생각했는데. 인간 님이 먼저 불러주시니 영광이에요.


서로 인사를 마치고, 곧이어 사령관의 호출 요구를 받은 그녀는 난처한 듯이 웃었다.


- 글쎄요. 저는 여기를 지키는 게 사명인 걸요. 게다가, 이것저것 만들어둔 것도 많아서 포기하긴 조금…….


그녀의 웃음은 어딘지 곤란해 보이는 것이었다.


바이오로이드인 그녀는 테마파크를 지키란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해, 그곳을 떠날 수도 없었다.


키르케는 멸망 전에 테마파크에서 있던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인간들의 악의인지, 공범 의식을 심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그녀 역시 바이오로이드 살해 광경을 심심찮게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사령관은 그 속사정을 알고 있었다.


관리인이란 직함 때문에, 자기 손으로 동족들을 도살장으로 이끌어야 하는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리고 그 원흉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도 망령처럼 그 도살장을 떠나지 못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비록 키르케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다고 하더라도,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가만 놔둘 순 없는 일이었다. 마법소녀 때에도 느낀 의분이 다시 되살아난 듯했다.


사령관은 다소 강하게 명령했다.


"키르케, 인간의 명령이라면 일단 따라야 되는 거 아니야?"


- …….


"어차피 거기 직원들은 다 죽었어. 그러니 이제는 내가 키르케한테 명령하겠어. 그 놀이공원에서 나와. 당장."


키르케는 다소 놀란 듯이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명령에 따를게요.


사령관은 로크에게 그녀를 데려오라 명했다.


그런 사령관을 지켜보던 아르망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주인은 안 그래도 바이오로이드에게 잘해주는 인간이었다.


그런 사령관이 조금이나마 악해질 가능성이 있다면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미래 예지를 하는 능력자라도 그러했다. 아니, 오히려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걱정이 든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사령관을 보고 조용히 물었다.


"폐하. 혹시 그 놀이공원에 직접 가보실 생각은 없으셨나요."


사령관은 눈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전혀. 난 그런 데 신경 쓸 시간이 없어."


사령관은 키르케를 확보하고 테마파크를 날려버리는 정도로 역사를 재현할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로서는, 게임의 주인공처럼 바깥에 나돌 생각이 없었다.


그런 사령관의 속내를 모르는 키르케나 아르망으로서는 그저 사령관을 고마워할 따름이었다.


키르케는 동족들의 도살장을 지켜야 하는 굴레에서 해방되었고, 아르망은 사령관이 과거 인류의 어둠에 영향 따위 받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가진 것으로 착각했다.


한편, 전술공군 소장인 멸망의 메이에게는 키르케의 테마파크를 날려 버리란 명령이 내려졌다. 그녀도 전에 없이 전술핵 사용을 마음껏 허가 받고 신이 났다.


냉혹한 그녀도 바이오로이드 학대 파크라는 것에는 크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멸망해라, 이 벌레들아!"


어차피 관리하기 힘든 구형 핵들, 이 기회에 써먹자고. 메이는 잽싸게 버튼을 눌러 구형 핵미사일을 모조리 발사했다. 그러자 오르카호로부터 미사일이 연달아 발사되었다.


그 무렵 테마파크에서 한참 멀어져 가던 키르케는, 문득 사방이 번쩍이는 것을 알고 놀라서 엎드렸다. 핵공격을 눈치챈 로크는 웬일인지 그녀를 위해 자기장 보호막을 씌워 주었다.


키르케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테마파크가 있던 자리는 이미 버섯구름으로 가득차 있었다. 훗날 그곳을 탐색한 병력에 따르면 테마파크는 돌무더기와 그을린 잔해만이 남아 있었댄다.


이로써, 수십 년간 죄책감으로 그녀를 괴롭히던 장소는 간단히 사라졌다. 멍하니 있던 그녀는 회한과 고마움으로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오르카호에 향했다. 로크의 병력들도 엄숙히 그녀를 호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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