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소설대회] 밤바다의 산토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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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소설대회] 밤바다의 산토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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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소설대회] 밤바다의 산토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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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소설대회] 밤바다의 산토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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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할 땡보들, 쓰레기 더럽게 많네.”


이프리트-57776이 투덜거렸다. 지금 지게 위에 차곡차곡 쌓여 이프리트의 양 어깨를 짓누르는 것은 실험실에서 나오는 폐기물들로, 닥터의 설명을 절반 이상을 흘려들어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대단히 위험하고 불안정한’ 약품이었다. 하나라도 떨어뜨리면 오르카호를 통째로 세척해야 할 거라나.


그런 위험한 물건을 왜 이프리트가 옮기고 있는가 하면, 꾀병을 부리다가 임펫 원사에게 걸렸기 때문이다. 몸이 아픈 건 허약하기 때문이니 육체노동을 통해 단련하라니, 미친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함내 계단을 한참동안 오르내린 끝에 도착한 폐기물 보관창고. 이프리트는 지게 위의 상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건강하면 건강하다고 부려먹고, 아프다고 하면 아프다고 부려먹고. 한숨과 하품이 뒤섞인 무언가를 내뱉은 이프리트는 우울한 눈으로 자신이 옮긴 박스를 쳐다봤다.


<위험 - 고위험 폐기물>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이프리트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진짜로 아프면 뭐라고 못 하겠지?”


브라우니조차 미쳤다고 할 발상이었지만, 일과와 훈련을 빠질 수 있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이프리트에게는 너무나도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꾀병을 부렸다고 부려먹으면 진짜로 아프면 될 거 아냐.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순식간에 특급전사로 거듭난 이프리트는 단단히 밀봉된 폐기물 상자의 자물쇠를 완력으로 잡아뜯었다. 135cm짜리 꼬맹이에게서 나오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괴력이었지만, 140mm 박격포를 도수운반하는 입장에서는 쉬운 일이었다.


상자 속에는 수십개의 유리병들이 완충제에 둘러싸여 있었다. 대부분이 무색투명한 액체들로 겉보기에는 그다지 유해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유리병 하나가 상자 내부를 신중히 살펴보던 이프리트의 눈길을 끌었다.


“이거라면 전치 3주는 받을 수 있겠는데.”


태어나서 알게 된 지식이라고는 박격포 운용과 더럽고 치사한 군생활 뿐인 이프리트에게 유리병에 쓰여진 복잡한 화학식과 라벨들은 의미 없는 기호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이프리트가 집어든 유리병은 누가 보기에도 굉장히 위험해 보였다.


푸른 형광빛으로 빛나는 액체.


구시대의 가을출타인가 하는 오락에 나오는 방사능 덩어리 음료수와 흡사하게 생긴 외양에 이프리트는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방사능 딱지가 없으니 방사능 오염이 되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먹어서 좋을 리가 없는 것은 분명했다. 그게 바로 이프리트가 원하는 것이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이프리트는 망설임 없이 유리병의 내용물을 들이켰다.


“우웩, 오이냉국 맛이잖아.”


몇 시간 뒤-


“이뱀~ 석식시간입니다~”


브라우니가 문을 열어젖히며 외쳤다. 저 멍청한 것은 간부가 그 모습을 밖에서 봤다간 생활실 안에 짱박힌 인원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리란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프리트는 한숨을 푹 내쉬며 3층침대 구석에서 꾸물꾸물 기어나왔다.


“그래, 가자….”

“정말 맛있는 양파튀김이랑 쏘야볶이지 말입니다~ 어? 식단 안 궁금하심까?”


저 미친 양파성애자. 함내 식수인원의 절대다수를 브라우니가 차지하다보니 식단에 양파가 없는 날이 드물었다. 물론 행정계원들 입장에서도 양파를 먹이는 게 편할 터였다. 농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게 양파니까. 


“몰라, 배고픈데 뭐라도 먹어야지.”

“예씀다~”


춤추듯이 내무실을 나서는 브라우니를 바라보며 이프리트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양파 때문은 아니었다.


“이놈의 몸뚱이는 왜 이리 튼튼한거야.”


유리병 속에 들어있던 수상한 액체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마셨지만 한참이 지나도 이프리트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뭔가 평소보다 몸이 더 찌부드드한 것 같긴 했지만, 약을 먹어서인지 아니면 임펫이 탄약고 정리를 시켜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결국 탄약고를 먼지 한 톨 없이 치운 뒤에야 임펫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하다못해 배탈이라도 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는 달리 이프리트의 몸 상태는 너무나도 멀쩡했다.


잠시 뒤, 병사식당.


“아, 배고파 죽겠네. 왤케 안 와.”
“무슨 일 있으신가요?”


병사식당에서 다른 분대원들이 착석하기를 기다리던 이프리트가 궁시렁거리자 옆에 있던 레프리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이프리트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레프리콘도 입을 다물었다. 저 인간 또 시작이네. 보나마나 뺑끼치다 임펫한테 걸려서 저러는 거겠지….


“맛있게드십쇼!”

“그래, 맛있게 먹어.”


한참 걸려 분대원이 모두 착석하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이프리트 병장님, 오늘따라 식사량이 많으시네요.”

“탄약고 청소하느라 힘 써서 그런가봐.”


맞은편에 앉은 노움이 신기하다는 듯이 이프리트의 식판을 쳐다봤다. 평소 짬밥이라곤 쥐꼬리만큼 먹는둥 마는둥 하던 이프리트의 식판 위에는 빵과 반찬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비단 분대원들 뿐 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도 이프리트의 식판을 보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수저를 놀렸다.


“얘들아, 먼저 가. 나 PX 들렀다 갈게.”

“PX? 그렇게 드시고도 말임까?”

“난 아직 배고파.”


식사가 끝나고 생활관으로 복귀하는 길, 이프리트가 옆길로 빠지며 말했다. 브라우니가 놀라 되물었지만 이미 이프리트는 멀어지는 중이었다.


“레프리콘 일병님, 혹시 이뱀이 성장기가 온 것 아님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브라우니.”


잠시 뒤. 오르카 호 PX.


“어이, 57776!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았냐?”


BX 탁자에서 열심히 냉동을 까먹고 있던 이프리트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동기인 57777번이었다.


“57777 어서 가고.”

“저녁부터 왜그리 죽상이야.”

“니가 말 걸어서.”

“새끼 또 임펫한테 걸려서 뺑이쳤구나?”


킥킥대는 57777은 생기가 넘쳤다. 보아하니 일과시간동안 푹 잔 모양이었다.


“그러게 잘 좀 숨지~”
“약 올리려고 온거면 제발 꺼져줘….”


57776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57777은 57776의 목에 팔을 두르며 옆자리에 앉았다.


“이 언니가 개꿀정보를 알려주려고 왔는데, 그냥 갈까?”

“번호도 늦는 새끼가 지랄이네.”

“싫음 말던가~”


57776은 복잡한 시선으로 57777을 바라봤다. 도대체 이프리트 기종 중에 이딴 새끼가 왜 나온걸까. 브라우니랑 레프리콘 유전자가 섞이기라도 했나? 그런 주제에 농땡이 실력은 가히 함내 1위라고 할 만 했다.


“...뭔데.”

“맨입으로?”

“아니 이 씨발년이 진짜. 꺼져. 안 줄거야.”

“내가 냉동 하나 먹으려고 이러겠냐? 오늘따라 왜 그리 까칠해?”

“그럼 뭐.”

“탈론허브 계정 있지? 한 자리 끼워주면 알려줄게.”


57776은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탈론허브 계정 공유 프로필에는 한 자리가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건 레프리콘 주려고 남겨놓은 건데. 아니, 것보다 내가 계정 만든 건 어떻게 안 거야?


“싸지방을 썼으면 로그아웃을 생활화 해야지, 전.우.님.”


빙글거리는 57777을 노려보던 57776은 결국 유혹에 굴복했다. 미안하다, 레프리콘.


“나랑 근무 바꾸자. 나 오늘 사령탑 견시야.”

“오냐,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거기서 밤새 파도나 쳐맞으라고?”

“악! 이거 놔, 미친년아! 그런 거 아니라고!”


57776이 57777에게 헤드락을 걸자 57777이 탁자에 탭을 쳤다. 57776이 힘을 풀자 잽싸게 머리를 빼낸 57777은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다.


“사령탑 견시 가 본 적이나 있냐?”

“거길 왜 가?”

“그러니까 니가 안 되는거야.”


57777은 누가 들을새라 57776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사령탑 견시실은 잠항시에 물에 잠기는 구조다. 당연히 전자장비는 달 수가 없다. 그 전자장비 중에는 지통실 감시카메라도 포함이다. 거기다 규정상 견시실에 출입하려면 해치를 두들겨서 신호를 보내야 한다. 즉, 창문 잘 닫고 무전기로 정기보고만 잘 하면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꿀근무면 왜 바꿔달라는건데?”

“돈이 없어….”


57777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호드 부대원에게서 포커로 사령관 동침권을 따려고 월급을 걸었는데 홀랑 까먹었다는 모양이었다. 그럼 돈을 달라고 하지 무슨 탈론허브야.


“돈은 없어도 그건 못 끊는다구.”

“하여간 또라이새끼….”


참으로 하찮은 계약이 성립하자 자리에서 일어나던 57777은 냉동 하나를 냉큼 집어먹고 말을 바꿀새라 바람같이 PX 밖으로 사라졌다. 근무표는 자신이 바꿔놓겠다는 말과 함께.


과연 잘 한 짓인지 고민하던 이프리트는 될 대로 되라는 결론을 내리고 남은 냉동을 입 속에 털어넣었다. 그런데 왜 이리 몸이 쑤시지? 약효가 이제야 드는건가? 근무 뛰고 비번일 때 아프면 골치아픈데….



사령관은 침대에서 눈을 번쩍 떴다. 담배. 담배가 필요하다. 아주 큰 담배가. 스스로 작성한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지난 한 달 동안 흡연 횟수보다 성교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한 달 대부분 동안 잠항 중이었기에 담배를 자제하는 분위기였다고는 해도, 공기정화시설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사령관인 자신만 담배를 피지 못 하는 것은 다소 억울한 면이 있었다.


사실 문제는 공기가 아니라 메이드들의 잔소리였다. 인류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사령관님의 건강이 어쩌고 저쩌고…. 담배가 몸에 좋은 물건은 아니라지만, 오리진더스트로 강화된 육체에 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배틀메이드와 컴패니언은 사령관이 담배를 피려고 하면 집요하게 반대했다. 사령관의 생각으로는 이 오르카 호의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의 성욕을 처리해 주는 것이 몸에 더 무리가 가는 일이었지만 - 가끔 시찰 나가면 해당 파견대 인원까지 -  이런 사령관의 의견은 은근슬쩍 무시당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드디어 철충의 공중세력권 밖으로 나왔으니 한동한 잠항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담배를 피다가 긴급잠항으로 헐레벌떡 불을 끄고 뛰어들어와야 할 일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하늘이 도우셨는지 오늘은 동침자도 없고, 경호는 하치코였다. 하치코에게는 미트파이를 주고 집무실에 앉히며 ‘조용히 쉬고 싶으니 찾는 사람이 있으면 비밀의 방에 있다고 전하라’고 일러둔 참이었다. 아마 지금쯤 집무실 의자에 앉아서 행복하게 미트파이를 먹고 있을 터였다.


자정을 넘긴 시간, 사령관은 슬그머니 침실을 빠져나왔다. 손에 든 특제 시가의 향을 한 번 음미한 뒤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령관. 목적지는 사령탑. 사령탑 꼭대기의 견시실은 잠항하면 물에 잠기는 곳이라 탈론페더의 촘촘한 카메라망에서 빠져 있는 곳이었다. 온갖 곳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 탈론허브에 올라간 영상 때문에 페로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견시탑을 알게 된 이래로 탈론허브 때문에 흡연이 발각당한 적은 없었다. 견시 중이던 인원은 다들 참치캔 하나 쥐어주면 10분정도는 자리를 비켜주는 편이었다.


아니면 한 번 해 주거나.


잠시 뒤, 견시실 해치 앞.


팬텀에게서 배운 기술로 감시카메라를 이리저리 피해 사령탑에 도착한 사령관은 신호용 망치로 해치를 두드렸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늘 견시는 배짱도 좋네. 푹 자고 있나봐. 사령관은 뻑뻑한 해치 손잡이를 돌려 열었다.


사령관은 야간용 붉은 조명 아래 견시석에 앉은 뒷모습만 보고도 이해가 갔다. 분홍색 머리에 토끼귀가 달린 후드, 이프리트 기종이었다. 이런 망망대해에서 견시가 할 일도 없겠다, 아주 숙면을 취하는 중이겠지.


더군다나 이 이프리트는 헤드셋을 끼고 있었다. 이프리트들이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니 놀라울 일은 없었지만, 대체 간부에게 걸리면 어쩔 생각이었는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 친구 숨소리가 좀 가쁜데….


“이프리트?”

“꺅! 아니, 스, 승리! 이프리트-57776!”


사령관이 어깨를 툭툭 치자 이프리트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소녀틱한 반응이로군. 사령관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견시 이프리트는 허둥대다 손에 들고 있던 것과 헤드셋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

“....”


둘은 침묵했다.

철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태블릿과 헤드셋에서는 사령관의 정사 영상이 적나라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파도가 높나봐? 물이 좀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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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빌드업이 길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