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북한, 원산

무주지

일본 자위대 통제구역

성 디도 고아원


 베로니카는 오늘 가르칠 내용을 어젯밤부터 준비했다.


 문장을 읽고, 그 문장이 무엇인지 안서영 자신의 언어로 바꿔서, 요약해서 말해보라고 시킬 요량이었다. 흥부전을 읽으면 흥부가 제비를 구해줘서 대박을 터뜨리고, 놀부는 제비를 못살게 굴었다가 망했다는 식으로. 춘향전을 읽으면 춘향이를 괴롭히던 변사또가 파멸하고 춘향이는 행복하게 될 거라는 식으로. 사람이 글을 배우고 쓰는 이유 중 하나인, 다른 사람이 남긴 글을 읽고 쓰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가르칠 것이 정말로 많았다. 오늘은 정말로, 배우느라 바쁜 날이 될 터였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가르칠 생각이었다. 난해한 수업 내용에 당황한 얼굴, 배우는 기쁨에 웃는 얼굴. 그 웃는 얼굴들 중에는, 베로니카의 것도 있고, 안서영 자매의 것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웃으려면야 웃을 수 있었지만, 웃음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웃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이 상황에 입꼬리가 올라간다면, 자신의 턱에 주먹을 후려쳐 박살을 낼 요량이었다.


 그리고 안서영은? 이제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되었다.


 내일 돌아오겠다던 안서영은 약속을 지켰다. 더 이상 두 발로 걸을 수 없었다. 바람구멍이 난 폐 두짝으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어쨌든 다른 이들의 손에 실려 고아원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끔찍한 이 세상을 볼 필요가 없어서, 끔찍해진 몰골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어 흰 천으로 발을 빼고 전부 가렸다. 흰 천에는 피가 배어나온 자국이 검게 변해서,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디에 총을 맞고 죽었는지를 말해주었다. 머리에 한 발, 양쪽 가슴에 두 발. 훈련받은 킬러의 깔끔한 솜씨였다.


 "어째서 이런 일이... 어째서 이런 일이..."


 피에 굶주린 블랙 리버 병사의 총질에 도륙당한 건 안서영만이 아니었다. 눈 앞의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한 라울 신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다. 신앙이라는 불안정한 폭약이 잔뜩 쌓여있는 베로니카의 마음 속에 불을 당겼다. 라울은 아이들이 있다는 것도 신경쓰지 못한 채 펑펑 울었고, 베로니카는 라울이 우는 소리를 잠자코 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샜다.


 "...서영아. 애비가 못나서 미안하다. 애비가..."


 "어제 못 가게 막기만 했어도..."


 가족 같았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남도 가슴이 찢어지는데, 안서영의 부모는 어떤가. 눈물자국이 번들번들하게 빛나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착잡함이 가득 찼다. 안서영에게 받은 것도, 안서영에게 베푼 것도 없어서 잡을 게 없다는 게 너무 미안했다. 어머니는 어제 못 가게 막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며, 눈을 감으면 시간이 어제로 돌아가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옛날 같았으면 그저 한 명이 죽었다고 생각했으련만, 베로니카는 모든 게 끝난 것 같은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저 한 명일 뿐이다. 그저 한 사람일 뿐이다. 아이들이 차고 넘치는 성 디도 고아원에서, 단 하나일 뿐이고, 이 넓은 북한 땅에서,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북한 사람 하나일 뿐이다. 그저 북한 사람 하나가 죽었구나. 멍청하게 밤에 돌아다니다가 블랙리버 군인들한테 총을 맞아 죽었구나. 그렇게 기억이라도 해주고 알아보기라도 해주면 감사한, 단 하나의 죽음이었을 텐데.


 "안서영 자매..."


 하지만, 그저 한 명일 뿐이기에, 그저 한 사람일 뿐이기에 그 죽음이 더 크게 다가왔다. 아이들이 차고 넘치는 성 디도 고아원에서, 이 넓은 북한 땅에서,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북한 사람일 뿐인데. 그저 한 명의 죽음일 뿐인데, 다른 곳에서 전해들은 수백만의 죽음은 통계일 뿐이고, 그녀가 죽인 수만 명의 사람도 그저 실적일 뿐이었는데, 한 명, 단 한 명의 죽음에 이렇게 흔들리는 건 왜일까.


 안서영의 부모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증언하는 것을 잠자코 들었다. 안서영이 처음 왔을 때는 병사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해야 여자애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미호 대위가 그녀를 보더니 웃으면서 막사로 돌아가면서 모든 게 잘못 돌아갔다고 했다. 갑자기 서관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집합시키고, 갱신도 잘 하지 않던 서관 마을 인원 목록을 쭉 호명하며 인원 검사를 했다. 당연히 안서영이 끼었으니까 마을 인원 목록보다 한 명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번에는 베로니카라는 사례 때문에 그랬던 거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마을 출신 여자애 한명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거라 생각해 오늘 하루 자러 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미호 대위는, 허가받지 않은 인원이 출입할 동안 뭐 했냐며, 부하들을 불러세웠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같은 블랙 리버 소속 부하들도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마을 사람들도, 블랙 리버 군인들도 처음에는 두려워했지만, 나중 가면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너무 황당해서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한참 동안 일장연설을 내뱉은 미호는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안서영을 겨눴다. 그리고 안서영이 두려워할 새도 없이 그녀의 가슴팍에 납탄 두 발을 먹여 바닥에 눕히고, 머리를 쏴서 끝장냈다고 했다. 체류 및 월경을 허가받지 않은 인원의 무단침입에 대한 즉결 처분. 그것이 죄목이었다. 그게 폭탄조끼, 하다못해 권총을 가진 것도 아니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던 무저항에 비무장한 사람을 다짜고짜 쏴죽인 죄목이었다.


 "군인들도, 군인들도 이해를 못 했어요. 군인들도 이해를 못 해서 깜짝 놀랐어요. 군인들도... 자기들도 저렇게 막 쏴죽일까, 벌벌 떨면서 물러났다고..."


 "어떻게 그런 미친 사람이 군인을 합니까? 어떻게 우리식으로 따지면 상위까지 합니까? 어떻게,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죽여놓고 웃을 수가..."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었는데도, 굳이 목과 가슴을 만져보면서 안서영의 죽음을 확실하게 확인한 미호는, 고개를 쳐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단다. 그리고는 이게 전쟁이라면서, 이 즐거움을 모르면 군인 하면 안 된다면서 웃었다고 했다. 안서영의 부모는 너무 황당한 상황에 입을 떡 벌린 채 가만히 있었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보다도, 같은 편이어야 할 병사들이 더 두려워하는 눈치였다고.


 한참을 웃던 미호는 충격적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안서영의 부모를 가리키고 말했단다. 시체 당장 치우라고. 내가 그 정도 눈치는 있는 바이오로이드니까, 저 시체 성 디도 고아원으로 반송하라고. 그때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서, 안서영의 어머니는 그 말을, 또박또박 말했다. 그 말만큼은, 자기 멋대로 요약한 게 아니라, 철저하게 그 말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성 디도 고아원에 가서, 거기 있는 신부랑 수녀한테 묻어달라 그래. 어차피 너네 같은 거지 동네보다 고아원이 장례식 하기에는 낫잖아. 어차피 몇 년 뒤면 다 똑같이 뒤질 애들인데...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이 악마같은 자가...!"


 베로니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베로니카의 눈동자가, 양 주먹이 떨렸다. 그녀가 살면서 이렇게 마음이 뜨거운 적이 있었을까, 이렇게 큰 분노에 속박당한 적이 있었을까. 마음 속에서 신앙이라는 폭약과 분노라는 불이 만나 거대한 폭발을 만들고, 그 진동에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폭발로 창조한 일렁이는 화염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구체적인 형상이 되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미호를 찾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 년을 찾으러 마을로 내려가서, 베로니카를 막아서는 병사들을 싹 다 죽이고 싶었다. 그것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아주 고통스럽게. 샷건을 연사해 방탄복이 가리지 못하는 팔을 잘라버리고, 양 무릎을 쏴서 병신을 만들고 눈을 파내버릴 것이다. 베로니카가 무서워서 감히 나서지 못하는, 현명한 겁쟁이들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꺾고, 필요하면 자르는 방식으로 고문해서 미호의 위치를 불게 만들 생각이었다. 미호 대위는... 만나면 일단 얼굴가죽을 찢어발기고, 턱을 뜯어버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아주 고통스럽게 죽일 생각이었다.


 이건 망상 따위가 아니었다. 실제로 가능한 일이었다. 미군 특수부대도 준비만 충분하면 죽일 수 있고, 정규군도 대대까지는 상대할 수 있으니까. 힘없는 민간인한테 시비나 걸고 다니는 비실이들은 몇명이 몰려와도 다 죽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러고 싶었다. 할 수 있었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렇기에, 분노를 삭이려고 입술을 분노 대신 깨물었다. 꽉 깨문 입술이 짓눌려 피가 났다. 입 안에 피비린내가 나면 머리에 피가 훅 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아드레날린을 잔뜩 실은 피가 새어나오면서, 머리에 들어찬 김도 함께 빠지는 느낌. 그제서야 진정한 베로니카는, 라울 신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라울 신부님. 정말로 비통한 마음은 잘 압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목 놓아 울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빛께서 명하시고 코헤이의 공의로 해석한 뜻에 따라, 안서영 자매를 빛의 심판대로 보내는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베로니카 수녀님... 그래야지요. 그래야 하는 거지요..."


 한참 울고 있던 라울이, 베로니카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라울은 퉁퉁 부은 눈으로 베로니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안서영의 부모를 꼭 안았다. 라울의 포옹에, "내 딸이 별 것도 아닌 이유로 죽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멍하니 있던 두 사람이, 현실감각을 되찾고 울음을 터뜨렸다. 베로니카는  부모를 안은 라울 신부의 뒷모습, 펑펑 우는 자식 잃은 두 사람을 보며, 안서영의 죽음을 실감했다.


 "서영아, 서영아!"


 "이제 좀 좋은 것 먹고 살겠구나 싶었는데, 이제 배 좀 안 곯겠구나 했는데!"


 북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그저 정부란 게 없을 뿐, 세계 평균보다 아주 많이 가난하게 살아갈 뿐,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처럼 사람이다. 그들은 싸구려 만화책과 영화에 나오는 일회용 악당들이 아니었다. 옛날 사람들이 믿었던 것처럼, 썩은 고기와 음식물 찌꺼기에서 자연발생하는 구더기와 초파리도 아니었다. 그들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성으로는 알았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사람들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감정으로도 완전하게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


 짧지만 굴곡 많은 삶을 산 보상일까, 안서영의 장례는 순탄하게 이어졌다. 머리가 굵은 몇몇 아이들이, 벽 너머에서, 문 틈으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안서영의 죽음을 알았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 글은 못 배워도 전쟁은 확실히 배운, 북한식 기초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안서영에게 무슨 일이 닥친 건지 똑바로 알고, 침묵을 지켰다. 큰 누나, 큰 언니가 죽었다는 사실에,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한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 것을 시작으로, 울음이 파도처럼 굽이치며 아이들 사이로 퍼졌다. 사람이 죽는 건 이랬다.


 "이 세상 떠난 자매, 받아주옵소서. 이제 빛을 섬기려 새 날을 맞으니. 내 주여. 당신 종을 축복해 주시고. 먼 길 떠나간 자매. 받아주옵소서..."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잠시 찬송 부르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시면, 영광 중에 나아가리, 열린 천국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고인을 추모하는 개신교의 찬송가, 천주교의 위령성가가 함께 울려퍼졌다. 기독교 계열 종교에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면 참으로 기괴한 광경이었겠지만, 다들 그런 부분은 잘 몰랐고, 알더라도 이 상황에서 굳이 딴지를 걸 정도로 멍청하고 눈치 없는 이들은 아니었다. 


 장례 예식 중간에 잠깐 쉬는 시간을 가졌다. 안서영의 부모는 온 몸의 수분을 눈물로 뽑아낼 기세로 울다가 지쳐서, 슬퍼하는 것도, 우는 것도 다 체력이 필요한 일임을 절감했다. 라울 신부는 항상 아끼고 보살폈던 아이가 자신의 부주의로 죽었다는 게, 베로니카는 그녀가 가르치던 애제자요, 그녀를 잘 믿고 따르던 코헤이의 어린 양이 허무하게 죽었다는 게, 솔직히 말하자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


 "..."


 사람이 죽는 일은 정말로 끔찍하고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이 젠장맞은 위장은 눈치란 게 없어서, 안서영이 죽었건 누가 죽었건 알 바 아니니, 집어치우고 오늘 밥이 뭔지나 얘기해보라고 고집을 피웠다. 라울과 베로니카는 이 상황에 뭔가 먹는 행위를 할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이들과 부모는 먹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과 부모에게 밥을 잔뜩 퍼주고, 그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라울 신부와 베로니카는 바깥으로 나와 안서영을 넣어둔 관을 내려다보았다. 관을 짤 변변한 나무도 구할 수 없어,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판자와 슬레이트로 대신한 초라한 관. 죽음조차도 가난했다.


 "...코헤이 교단 복지부의 규정에 따르면... 신도가 사망했을 때 사망 사실을 알리면, 복지부에서 소정의 장례비와 장례용구를 지원해주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지요?"


 "저, 베로니카 수녀님, 다른 외국 사람들은 받을 수 있습니다. 원한다면 시신을 고국으로 돌려보낼 때 그 비용을... 코헤이에 공헌한 기여에 따라서 일부 또는 전액을 지원하지요. 북한 사람은 안 준다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베로니카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침묵.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옛날에, 베로니카와 라울 신부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불편한 침묵은 아니었다. 베로니카는 할 말이 없다는 이유로 침묵하고, 라울 신부는 책 잡힐까 두려워 침묵하는 그 침묵이 아닌, 진짜로 둘 다 할 말이 없어서, 이 상황이 너무 비통해서 유지하는 침묵이었다. 그 침묵 사이에, 베로니카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털어놓았다.


 "라울 신부님. 마음 같아서는 서관 마을을 통치하는 미호 대위라는 자를 죽이고 싶습니다."


 "...이해합니다."


 "...말리지는 않으시는군요."


 "그런 짓은 생각으로만 하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을 것이라 믿으니까요. 저는 베로니카 수녀님이 현명하신 걸 잘 압니다.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베로니카는 분노를 속으로 삼키고, 라울의 말에 따라, 베로니카가 품은 생각을 생각으로 끝내고, 내뱉은 말을 말로 끝내기로 했다. 라울이 무슨 뜻으로 저 말을 했는지는 잘 알았다.


 베로니카가 당장 복수를 하는 것이야 정말로 수월할 것이다. 그냥 큰 기관총 하나, 탄통 셋, 수류탄 여섯 개 정도 들고 당당히 걸어들어가면, 옛날 터미네이터 영화처럼 보이는 족족 다 죽이고, 미호는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다. 머릿속에서 절대 질 수 없는 수십가지 시나리오가 재생되었다. 유일한 결함이라면, 어떤 방법을 쓰건 미호가 필요최저한의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 베로니카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도록 복수하는 건 불가능했다.


 잠입해서 미호 대위만 죽인다면, 병사들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베로니카를 지목할 것이다. 병사들까지 다 죽인다면? 그러면 일이 너무 커져서, 블랙리버가 주민들을 상대로 고문까지 불사하며 사건의 전말을 조사할 것이고, 모든 증거와 증언은 베로니카와 성 디도 고아원을 향할 테니까. 그 다음에는? 통제를 잃은 코헤이 교단의 요원이 블랙 리버 군인들을 참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질테고... 블랙 리버 군대가 베로니카의 신병만 확보하려 하면 다행이지, 고아원에 아이들이 있건 말건 폭탄을 투하해서 날려버린다면... 


 무력감이 느껴졌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끝일까.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무고한 영혼이, 그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고, 아무 이유나 갖다붙여 사람을 죽이는 괴물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잘 사는 게 옳은 일일까. 이게 빛이 원하는 일일까. 베로니카는 PDA를 꺼내들었다.


 "라울 신부님. 아이들이 식사를 하는 시간 동안, 총무수녀님께 연락하겠습니다."


 "총무수녀님이라면..."


 "특무수녀회를 지휘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힘을 쓰신다면, 적어도 항의는 가능할 겁니다. 그 블랙리버의 인형을..."


 "베로니카 수녀님. 취지는 이해합니다만, 잘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코헤이의 뜻을 따르는 영혼이,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개처럼 죽었습니다. 신앙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냥... 그런 것 아닌가 싶습니다."


 "라울 신부님?"


 라울은 베로니카의 눈치를 보다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꺼냈다. 어쩌면 선을 넘을 수도 있는, 베로니카의 분노를 부를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말을 한번 꺼내고 나니 그 자신도 멈출 수가 없었다. 될 대로 대라! 안서영이 죽었다. 나도 죽어야 한다면 죽겠다, 그런 생각이었다. 북한 지역의 현실을 넘어서서, 아예 코헤이가 온 더러운 진의까지 꿰뚫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발언이었건만, 멈출 수 없었다.


 "제 이름은 라울 알폰스 카누반투,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서, 미합중국의 시민권을 받은 미국인입니다. 아버지가 콩고 출신이지만 이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가 살던 동네는 가난하고 범죄가 넘치는 곳이었지만, 새로 생긴 코헤이 센터 덕분에 교육을 받으면서 마약과 범죄를 청산했습니다. 제가 코헤이에게 대접받은 대로 남들에게도 대접하겠노라 마음먹고, 모두가 피한다는 북한에 왔죠.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게 뭔지 압니까? 저는 미국 흑인입니다. 한국어로는 깜둥이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니거라고도 부르는 미국인이자, 코헤이의 신부입니다.  네, 저는 미국인이다 이겁니다. 그리고 베로니카 수녀님은 말할 것도 없지요. 베로니카 수녀님은 코헤이의 검 아닙니까? 누구든지 베로니카 수녀님을 건든다면... 정말로 정당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정말로 끔찍한 고통을 맛보겠지요."


 "..."


 "이곳에서 북쪽으로 몇백km를 가면 중국과 러시아가 나옵니다. 예. 짱깨랑 타타르들이죠. 짱깨들 중에 대만에 사는 족속들은 특별히 섬짱깨라고 구분해 부릅니다. 남쪽으로 몇백km를 가면? 조센징이랑 쪽바리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뭔지 아십니까? 저 아이들을 포함한 이 지역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울의 말은 사실이었다. 강박증과 편집증이 의심될 정도로 국민들을 억압하고 감시하지만, 어쨌든 "짱깨"들을 굽어살피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도 정부는 정부다. 타타르라 불린 러시아인들에게도 어쨌든 정부란 게 있다. 조센징, 쪽바리라 불린 이들에게는, 연합 전쟁에 패배해 그 위세가 약해졌어도, 어쨌든 국민들에게 나눠준 한 표 때문에라도 눈치를 보는 정부란 게 있었다. 그리고 라울 신부, 자기를 깜둥이...라고 부른 사람에게는 미 합중국 정부가 있다. 아무리 기업과의 전쟁 때문에 약해졌다고 하지만, 그가 가진 미국 국적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미합중국 국군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한지 한번 더 돌이켜보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심은."


 "북한인들은 짱깨도 타타르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조센징이냐 쪽바리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하다못해 저 같은 깜둥이조차 아니죠! 칭챙총이면 미국인이라는 거니까 상황이 낫지요... 저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북한인입니다."


 "..."


 북한인. 그 무엇도 아닌, 그냥 북한인. 베로니카는 라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코헤이를 제외하면, 어쩌면 코헤이까지 포함해서, 그 누구도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북한 사람들이 죽건, 강간당하건, 강도를 당하건, 총에 맞아 불구가 되건. 라울에게는 냉소가 느껴졌다. 라울은 씩씩대면서, 그동안 차분하게, 조심하게 말했던 울분을 쏟아냈다.


 "그동안 지원을 탄원하는 서류를 몇 번이나 썼는지 모릅니다.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자선에 힘쓰라는 구절을 몇 번이고 첨부해서 함께 보냈습니다. 그런데 지원은? 한 번도 오지 않았습니다! 굶어죽는 걸 겨우 면할 만큼만 내려왔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을 정도로 지원해달라고 말한 적 없습니다. 광야에 내렸던 만나와 메추라기를 바란 적이 없습니다. 빛의 군대를 보내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아이들이 굶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였을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


 무표정을 유지하던 베로니카는, 라울을 내려다보았다. 라울은 지금 코헤이 교단의 방침에 대놓고 불만을 터뜨렸다. 분명한 불경죄였고, 당장 즉결처분해도 설명만 잘 하면 넘어갈 수 있는 대죄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그러지 않았다. 그를 책망하지도 않았고, 표정을 굳히지도 않았다. 대신, 총무수녀의 연락처를 선택하고, 전화를 걸었다.


"베로니카 자매. 무슨 일이죠? 잘 지내고 있나요?" 


"...죄송합니다만, 잘... 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총무수녀님."


 "무슨 일이죠?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게 분명하군요. 말하세요."


 베로니카는 서관 마을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이야기했다. 코헤이의 어린 양이 잠깐 부모님과 함께 마을로 내려갔는데, 블랙 리버의 지휘관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납득할 수 없는 죄목을 만들어서 사살했다는 이야기였다. 총무수녀는 네, 네, 하고 베로니카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흠... 그렇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하면 될까요?"


 "..."


 PDA를 잡은 베로니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붉은 눈을 치뜬  베로니카는, 자신이 분명 잘못 생각했을 것이라고, 오늘 특별히 예민해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자신을 속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전달했다.


 "블랙리버에, 코헤이 교단의 신도를 아무런 이유 없이 사살한 건에 대해, 정식으로 항의를..."


 "베로니카 자매. 그러니까... 지금 고작 고아 하나가, 처신 잘못해서 총에 맞아 죽은 것 가지고... 나한테 블랙 리버랑 쓸데 없는 외교 마찰을 일으키라는 이야기입니까? 안 그래도 그 쪽에서 지금 공격할 구실을 찾고 있는데?"


 "총무수녀님?"


 고작 고아 하나. 그 말에 베로니카가 눈을 크게 떴다.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큰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고작 고아 하나? 사람이 죽었는데, 코헤이 교단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코헤이 교단의 교리를 믿고 따르던 사람이 죽었는데, 고작 고아 하나라고?


"방금... 고작... 아이... 하나라고..."


 "아무래도... 그곳에서의 생활이 베로니카 자매를 너무... 감성적으로 만든 모양입니다. 베로니카 자매. 제가 베로니카 자매를 특별히 아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베로니카 자매가 베로니카 자매이기 때문이 아니라, 베로니카 자매가 코헤이의 진정한 뜻을 따를 수 있는 인재였기에 아꼈을 뿐입니다.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그런 사사로운 감성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인다니, 정말로 실망스럽군요."


 "......."


 "코헤이의 뜻을 관철함에 있어, 철저한 교리 준수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빛의 뜻을 이 세상에 관철하는 도구임을 명백히 인지해야지요. 베로니카 자매. 성 디도 고아원에서의 생활이 2주 남은 건 알고 있지만, 1주일로 단축하겠습니다. 다음 주에 사람들이 베로니카 자매를 데리러 갈 테니..."


 마음 속에서 무언가 무너졌다. 코헤이는 완벽한 조직이다. 완벽하지 않다면, 적어도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어떤 조직보다도 완벽에 가장 가까운 조직이다. 총무수녀님은 코헤이가 선을 지킬 수 있게 선을 넘는다. 양지의 빛을 위해, 음지의 어둠을 파헤치는, 근본은 전적으로 선한 코헤이의 종복이다. 그 모든 것들이. 그 모든 믿음이 무너졌다.


 "...네... 알겠...습니다..."


 "이만 끊겠습니다. 그리고, 원래 이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베로니카 자매한테는 꼭 해야겠군요. 다음부터는, 이런 사소한 일로 저를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꽈드드득, 전화가 끊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베로니카의 손이 PDA를 잡고 초인적인 괴력으로 으스러뜨렸다. 액정이 바닥에 떨어지고, 부품이 그 뒤를 따랐다. 코헤이 교단에 대한 믿음과, 총무수녀의 본성에 대한 믿음이 철저히 무너진 그 자리에는, 배신감과 분노가 들어와 빈자리를 한 칸도 남기지 않고 꽉꽉 채웠다. 


 "총무수녀... 이 코헤이의 뜻을 팔아먹은 거짓 예언자가...!"


 베로니카는 벌벌 떨리는 붉은 눈동자로, 지난 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성 디도 고아원에 오기 전에 코헤이의 이름으로, 총무수녀의 명령으로 수행한 모든 일들을.


 자선 사업가가 코헤이의 뜻을 어긴 아동 성범죄자니 당장 죽이라고 해서 죽였다. 하지만 그 자선 사업가가 아동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있었을까. 정말로 아동 성범죄자였다면, 그 증거를 까발려서 그 사람을 사회적으로 죽여버렸으면 될 일이다.


 코헤이를 믿고 있던 대통령이, 사실은 이단과 내통한 스파이니까 죽이라고 해서 죽였다. 하지만 그 대통령이 왜 죽어야 했을까. 스파이라는 증거를 베로니카 그녀가 보았는가? 심지어 그 대통령은, 베로니카를 만났을 때, 배신자라면 으레 보이는 긴장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총무수녀는 코헤이의 뜻 따위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건 코헤이 교단을 지배한다 여기는 모든 이들이 그랬을 것이다. 모두가, 모두가 그랬다. 라울처럼 빛의 뜻을 전파하려는 자들은, 전부 중간에 그만두거나, 죽었거나, 아니면 이곳에서 과로사로 죽을 때까지, 아니면 이름없는 산야에서 총에 맞을 때까지 자신을 불태우다가 잿더미가 되어 이름 한 자 남지 않고 사라졌을 것이다. 


 "...모든 게... 모든 게... 정말로... 모든 걸 다시 보고 있습니다. 모든 걸..."


 코헤이 교단 지도자들의 회담 장소를 경호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엔젤, 아자젤, 사라카엘까지 참여한 정말로 중요한 회담이었다. 그 때, 그녀는 영광스럽게도 장막 안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자동소총을 들고 동그랗게 빙 둘러친 장막의 바깥쪽을 거닐면서, 회담 장소 쪽을 슬쩍슬쩍 보았다. 회담 지도자들은 처음에는 진지한 이야기로 시작하더니, 나중 가면은, 자신의 옆에 앉은 천사들에게 손을 뻗었다. 천으로 가린 아자젤의 가랑이로 손을 넣고, 사라카엘의 골반과 허벅지를 쓰다듬던 그 손길.


 '이런 건, 정결함과는...'


 '아자젤. 이건 시험입니다. 이런 것도 불사할 정도로, 코헤이의 뜻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도 천사라면 당연히 버텨내야 할 시험. 누군가는 다른 이들이 선을 넘지 않게 하도록, 그 선을 넘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건 부정한...'


 '사라카엘. 부정한 게 무엇인지 모르면서, 어떻게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할 생각인지요?'


 '부정한 게 무엇인지, 정결한 게 무엇인지 분별할 눈을 감사히...'


 그런 이야기였다. 육신의 정욕은 빛의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섹스는 어디까지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빛의 뜻을 위한 수단일 뿐이고, 욕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코헤이의 교리가 어떻건, 그들은 상관하지 않고 천사들의 몸을 탐했다. 천사들이 지도자들 앞에 쪼그려 앉아, 그들의 가랑이에 얼굴을 파묻고 '빛' 을 위해 봉사했다. 나중 가면은, 회담장은 육욕 가득한 난교의 장이 되었다.


 그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곳을 잠시 쳐다보았지만, 혹시라도 천장에서 침입자가 쳐들어왔을까, 그것 때문에 보았을 뿐. 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지도자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가보다. 더 이상 알지 말자.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렇게 여긴다고 여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분노가 치솟았다. 결국 이 모든 게 가짜였구나. 라울과 그녀 같은 일부를 빼면, 그 누구도 코헤이의 뜻을 따르지 않았구나. 베로니카 그 자신도, 무슨 심경의 변화로 코헤이의 진정한 뜻을 따르게 되었을 뿐이지, 그 전에는 그런 것을 보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 죽이라면 죽이고, 까라면 까는 뼈와 살로 이루어진 기계에 불과했다. 


 "그동안 저는 미몽에 빠져 있었습니다. 라울 신부님."


 "...베로니카 수녀님?"


 미몽. 그 이야기에 라울이 고개를 들고 베로니카를 바라보았다. 안서영이 허무하게 죽었고, 하지만 부모와 라울, 베로니카 빼면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사실 고아원 아이들 전체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현실에 슬퍼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미옹이라는 뜬금없는 이야기에, 슬픔이 달아나고 당황스러움이 찾아왔다.


 "...제가 코헤이의 공의를, 빛의 뜻을 올바르게 따르고 있었다는 미몽에 빠져 있었습니다."


 베로니카,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녀는 모든 판단을 상부에 일임했다. 그저 코헤이의 뜻으로 그런 일을 시켰으니 생각이 있겠지, 다 계획이 있어서 그랬겠지, 그녀가 모르는 뜻이 있어서 그랬겠지.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녀의 머리로 판단해야 했고, 그녀의 마음으로 윤리를 재단해야 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그러지 않았다. 나태한 생각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는가.


 "베로니카 수녀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베로니카는 특유의 무표정을 풀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사람이 죽은 상황에서, 그것도 죽어도 싼 사람이 아니라, 아끼는 안서영 자매가 죽은 상황에서 웃는 게 기괴했지만, 라울 신부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럼... 베로니카 수녀님. 계속할까요?"


 그렇게 이틀간의 짧은 장례가 이어졌다. 이틀째가 되니, 라울 신부와 베로니카 수녀도 슬퍼하는 일, 추모하는 일에도 에너지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서영을 추모하기 위해, 남은 이들을 위해 슬픔을 맛보며 밥알을 씹었다. 아이들이 슬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안서영의 부모가 자식을 떠나보낸 슬픔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지 않도록, 밥을 많이 지어서 먹였다. 


 "서영이가... 살아서 이렇게 실컷 먹어본 적이 있습니까?"


 "...많이는 없었지요."


 "애는 좋은 거 먹어보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부모가 이런 걸... 이건 원래, 우리가 아니라 서영이가 먹었어야 할 밥 아닙니까? 그런데 서영이는 못 먹고, 우리만..."


 "어머님. 제 몸을 간수하는 것도 중요한 겁니다. 줄초상이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지요?"


 "신부님 말이 맞아요. 정말로... 슬프지만, 서영이가 우리 보고 오래오래 살라고 했잖아요. 서영이의 뜻을 무시하지 맙시다."


 안서영의 어머니는, 서영이도 못 먹은 밥을, 원래는 서영이가 먹었어야 할 밥을 자기가 어떻게 먹냐며 먹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라울 신부의 설득에, 그리고 줄초상 나는 꼴을 보기 싫은 아버지의 탄원에 겨우 숟가락을 들었다. 이게 장례다. 친애하던 누군가의 죽음은 재앙이다. 그건 어떻게 포장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오지 않았으면 했지만 와버린 재앙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이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슬픔을 함께 나눠서 이겨내는 의식.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베로니카도 그 슬픔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장례식의 마지막, 땅을 깊게, 성인 어른의 목까지 빠질 정도로 팠다. 넷은 안서영의 관을 구덩이로 내렸다. 그리고 흙을 한 줌, 한 줌 뿌리고 나서 흙을 되메웠다. 파낸 흙을 되메우며, 안서영을 기억하던 이들이 한 마디씩 남겼다.


 "서영아. 미안하다. 내가... 더 잘 해야 했는데. 뭘 하더라도... 더 잘 해야 했는데."


 "다음 생에는... 다른 건 몰라도 밥 많이 챙겨주고, 등 따순 집에서 태어나라. 우리 집은... 다시는 오지 마라."


 좋은 교육은커녕 밥 한 끼 맛있게 못하는 모자란 부모였는데, 미안한 부모였는데도 부모라고 따라주었던 딸. 고맙고 미안한 무거운 마음을 삽에 담아 한 줌. 


 "정녕 이것이 빛의 뜻이라면... 빛이 내리는 천년 왕국에서라도...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미안하다."


 신앙과 열정으로 극복하기에 너무 높은 현실의 벽. 너무 바쁘다고 포기해야 했던 가르침. 너무 부족하다고 마음껏 떠주지 못한 밥. 너무 여유가 없다고 한번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아이. 그런데도  신부님이라 부르며, 무엇이든 배우고자 하고, 무엇이든 돕고자 했던, 지키지 못한 아이를 영원히 떠나보내며 한 줌.


 "안서영 자매. 정말로 많은 걸 준비했습니다. 글을 읽는 법도, 글을 쓰는 법도... 하지만 그 때, 안서영 자매한테 필요했던 건 그게 아니라... 제가 가장 잘 하는 그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는 부디 편하시기를."


 코헤이의 사도네 뭐네 해도, 결국 공장에서 찍혀나왔을 뿐인 바이오로이드. 그런 베로니카가 피워낸 계몽의 새싹이요, 애제자요, 몇 안 되는 업무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이어진 인간관계요, 그리고... 베로니카가 잘 알았고, 더 잘 알고자 했던 한 명의 사람. 그 한 사람을 끝까지 기억할 것이라 굳게 맹세하며 한 줌.


  비석을 깎을 재간도 없고, 그렇다고 사올 여유도 없어서, 나무 막대기를 교차해 십자가를 만들어 꽂고, 안서영을 묻은 자리 위에 조약돌을 코헤이의 표식처럼 배열했다. 그렇게 안서영을 묻었다. 안서영이 죽었음을, 다시는 이 세상에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그렇게 확언했다. 고아원 옆에 만든 단촐한 무덤 앞에서, 네 명은 한참 동안 서 있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다가, 안서영의 부모가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밥을 먹여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코헤이 교단이 운영하는 고아원이면 안전하고, 밥도 잘 먹여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장례까지 도와주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을 줘서 고맙습니다."


 "...희망이라 하심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것도 피워보지 못한 청춘이 죽었는데 희망 이야기를 하기에, 안서영의 부모를 돌아보았다. 다들 눈물에 일그러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라울 신부님은 힘든 곳이 봉사 점수를 채우기 좋으니까 진급하려고 왔고, 베로니카 수녀님도 그냥 오라고 해서 왔다고, 시간만 채우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우리도 사람이라는 거. 그게... 당연한 건데, 여기 살다 보면 자꾸 잊습니다. 그런데... 두 분 덕분에 다시 깨달았습니다."


 "...그런가요."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적으로 둘이 그들을 신경 쓴다고 무언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라울은 유배지나 다름없는 곳을 제 발로 걸어들어간 광인이고, 베로니카는 대가리에 총알 박힌 기계일 뿐이다. 그들은 세상을 바꿀 힘도, 하다못해 코헤이를 바꿀 힘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있다는 것만으로, 그들을 사람 취급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기뻐했다.


 장례식이 끝나자, 베로니카는 이곳에 풀어놓은 짐들을 정리했다. 먼저 쪽방에 간소하게 풀어놓은 개인 짐을 전부 꾸렸다. 그리고 지하실로 내려가서 무기들을 챙겼다. 기관총, 권총, 대검, 유탄발사기, 줄줄이 세워놓은 살벌한 무기들이, 신기하게도 베로니카가 가져온 가방에 다 들어갔다. 라울이 무기를 챙기는 뒷모습을 보고 물었다.


 "벌써 챙기시는 겁니까? 조정된 일정으로도, 귀환까지 며칠은 남았다고 들었는데..."


 "벌써는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베로니카는 무기를 잔뜩 담은 가방을 들쳐맸다. 드는 걸 도와주겠다는 라울의 손길도 사양했다. 베로니카는 무기를 잔뜩 담은 가방을 고아원 입구로 옮겼다. 라울은 어차피 베로니카가 알아서 하겠지만, 괜히 마음에도 없는 걱정을 했다.


 "그런데 수녀님. 이런 데에 무기를 내버려두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곧 치울 테니 괜찮습니다. 그리고, 라울 신부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예?"


 "남들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걸 신부님보다, 아니, 신부님 절반만큼이라도 잘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걸 갑자기..."


 "그리고 죄송합니다."


 베로니카가 얼굴을 싹 바꾸고, 라울의 목에 손을 날렸다. 



라울의 세상이 깜깜한 암실로 떨어졌다.



"신부님! 일어나세요! 저녁 시간이에요!"


 "...허억!"


 고아원 아이가 부르는 말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라울 신부는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확인했다. 베로니카가 자신의 목에, 정말 빠른 속도로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여기는... 고아원 입구가 아니라, 그의 침실 겸 사무실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라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부님. 괜찮으세요?"


 "괜찮단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니?"


 라울은 목을 만져보았다. 베로니카의 손날에 잘리는 일은 없었고, 다른 신체 부위도 모두 멀쩡했다. 라울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자, 아이들이 큰 목소리로 대답을 내놓았다.


 "베로니카 수녀님이 라울 신부님을 업고 들어오셨어요. 라울 신부님이 쓰러졌다고 했어요. 저녁이면 깨어날 테니까 그때까지는 쉬게 두라고 하셨어요."


 "수녀님은 지금 어디 계시니?"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 고맙다. 얘들아."


 라울 신부는 일단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했다. 아이들에게 밥을 떠 주고, 모자라면 더 먹으라며 주걱과 밥통을 내버려두고 베로니카를 찾았다. 하지만 없었다. 베로니카는 어디에도 없었다. 쪽방은 마치 그녀가 여기에 애시당초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깨끗했다. 무기들을 잔뜩 늘여놓았던 지하실에도, 쇠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전부 긁어갔다. 창고에도, 성당 종탑에도, 바깥에도, 어디에도 없었다.


 "베로니카 수녀님? 수녀님?"


 어디 있냐고 물어도 대답 없는 메아리만 울렸다. 목숨을 걸고 서관 마을 어귀로 가서 마을을 살펴보았다. 병사들이 멀쩡히 그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베로니카가 저곳으로 대놓고 들어갔을 리는 없어보였다. 마치 베로니카라는 존재가, 그를 침대에 업어두고 나서 완벽하게 증발한 것만 같았다. 


 "...베로니카 수녀님."


 그녀가 좀 익숙해졌다 싶더니, 또다시 그녀가, 라울에게 어려운 처신을 강요했다. 알리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것 같고, 알리고 나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하지만 어쩌랴. 원칙대로 해야지. 라울은 상부에 연락했다. 그가 아는 '상부'라봐야, 베로니카가 직통으로 닿는 그것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그래도 라울이 보고할 충격적인 소식이라면, 분명 빠르게 일처리를 할 게 분명했으니.


 "네. 김철수 아동복지과장님."


 '나 지금 바쁘니까... 아 씨발. 지금 그거 때문에 피버타임 놓쳤다고요. 어쨌든 됐고... 뭔 일인지 말해봐요. 아주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물어본 거면 콱...'


 "성 디도 고아원에 파견 오신 베로니카 수녀님이 사라졌습니다."


 "어?"



 그렇게, 라울은 베로니카와 작별했다.



 인간도 아니고, 바이오로이드가 도망쳤다. 인간에 복종하는, 일을 못 해서 주저앉는 한은 있어도 절대 도망가지 않는 바이오로이드가. 그것도 베로니카가. 설계된 본능과 광신으로 두 번 충성하는 베로니카가.


 "기절했다고요? 기절했다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아이들이 말했다고요? 그 아이가 누굽니까? 그 아이의 말을 무슨 근거로 믿었습니까?"


그 소식에 처음에는 수사관들이 찾아와서 물었다. 마치 취조하는 것처럼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쩌다가, 이탈자를 허용했는가? 그대는 대답할 의무가 있다."


수사관들이 별 소득 없이 돌아가자, 사라카엘이 날아와서 성 디도의 담장에 앉아서 라울을 호출했다. 라울은 무릎을 꿇고, 벌벌 떨면서 그녀가 묻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총무수녀님. 수색 완료했습니다. 테러 및 기습 위험은 전혀 없습니다."


 "...라울 신부라고 하셨지요?"


  나중 가니 반갑지만 반갑지 않은 얼굴, 수많은 베로니카들이 찾아와 성 디도 고아원의 안전을 점검했다. 그리고 베로니카가 말했던 총무수녀가 굳은 표정으로 이곳을 찾아왔다. 평소에는 본 적 없었던 수많은 높으신 분들도 초라한 고아원을 찾아와서 한 마디씩 얹고 갔다.


 정말로 크게 시달렸지만, 생각해보면 완벽한 불행은 아니었다. 복지부 이사까지 찾아와서 성 디도 고아원을 급하게 개축했다. 추레한 아이들 꼬라지를 높으신 분들이 보면 어쩔 거냐며, 저렇게 거지꼴로 입은 모습 보면 무슨 일 나겠냐며 옷도 새로 입히고, 침대도 하나씩 새로 놓았다. 주교님 밥 드시고 간다는 소식에, 너무 급했던 나머지 조리원들을 아예 고아원에 전근시킨 다음, 식재료들을 잔뜩 보내고 라울을 주방에서 쫓아냈다. 


 "그래... 뭐 그렇다고... 고생이 많아요. 그런데... 여기는 실정이 어떤가?"


 어차피 물어볼 만한 것들은 수사관들이, 사라카엘이, 총무수녀가 물었기에 할 말이 없던 높으신 분들은, 허심탄회하게 실정이나 들어보자며, 원하는 게 있냐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그리고 라울은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이곳의 현실을 이야기했다.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복지부 과장이 절망한 표정으로 주저앉고, 높으신 분들이 조금 불편한 표정으로 "하는 건 좋지만 잘 해야지..."하면서 이사에게 주의를 주었고, 고아원이 특별 감사 대상이 되어서 수많은 감시와 지원을 동시에 받게 되었다는 것 빼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렇게 일어난 작은 변화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해서, 코헤이가, 세속의 권세도, 신의 권능도 버린 땅에서 홀로 견디고 있는, 이 고아원을 굽어 살피게 되었으니까.


 리울은 베로니카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말고, 알았던 내용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라는 명령을 들었다. 그렇기에 베로니카에 대해서는 영원히 침묵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그녀를 계속 생각했다. 그녀가 잘 도망쳤기를, 그녀가 진정한 구원을 얻었기를. 


 그녀가... 조금이라도 편해졌기를.


다다음편에 완결될 예정입니다.

이제 와서 그만두기에는 참 먼 길을 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