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반칙이다.”

 

“… …”

 

“… 그대가… 그런 말을 해버리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무 것도 안 해도 돼.”

 

“그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수십, 수백 개는 마음 속으로 고르고 정리했는데…

… …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가 전부 빼앗아 가버리면 난 뭘 말해야 하냔 말이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이렇게 기대고 있으면 충분해.

내가 말했잖아. 난 아스널이 너무 너무 보고 싶었다고.”

 

“… … 나도 그대가 보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었다…”

 

“고마워.”

 

“… … 그것도 반칙이다.”

 

 

아스널은 한동안 말없이 내 어깨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 동안 느꼈던 그 어떤 흥분과도 다른 격한 감정을 열심히 소화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도 그랬다. 이렇게 슬퍼하는 아스널의 모습은 내가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으니까. 아스널은 언제나 당찬 사람인 줄 알았다. 게임에서 보여준 모습처럼, 언제나 당당한 줄 알았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나도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울고 있는 아스널을 보니, 마음 깊이서 울렁이는 감정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 … 나도 꼴 사납군...

... 이제 그만 울어야겠지…”

 

“그걸로 충분해? 나였다면 더 울었을 거야.

내가 울음이 좀 많거든.”

 

 

아스널이 짧게 웃으며 미소로 답했다.

 

 

“… 푸훕… 그렇게 감수성이 풍부해서 어떻게 사령관 자리를 버티려고 하나?”

 

“난 사령관이기 전에 사람이니까.

사람이면 이런 이야기에 같이 울어줘야 하잖아.”

 

“… 그대는 쓸데 없는 일에 힘을 빼는군.

우는 건 힘든 일이라네.”

 

“힘든 일이어도, 필요한 일이니까.”

 

“… …”

 

“그리고 쓸모 없는 물건들도 필요할 때가 많잖아.

이 망토 같은 것도 말이야.”

 

“아… 망토…”

 

 

나는 아스널에게 곱게 접은 망토를 주었다. 케이크를 준비할 때 잊지 말고 가져다 주어야겠다 다짐하고 있었다. 아스널은 망토를 받아 들고 자신의 어깨에 매달아 입었다.

 

 

“어때? 망토는 쓸 데가 있어?”

 

“… 뭐, 굳이 찾아보면 쓸 데가 있긴 하겠지.”

 

 

아스널은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

 

 

“하지만 지금 굳이 그대에게 분위기 깨는 그런 설명을 할 필요는 없겠지?”

 

“하하, 로맨틱하네.”

 

 

아스널은 내게 자리를 비켜주어 에밀리를 받칠 수 있게 했다. 아스널이 했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에밀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의 손길을 알아차린 것처럼 에밀리는 몸을 움찔거렸다. 순간 놀랐지만 다행히 다시 잠에 빠졌다. 아스널은 내 옆자리에 다시 앉았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 부부라도 된 기분이었다.

 

 

 

 

“잘 자네.”

 

“… 예쁘지 않나?”

 

“맞아. 에밀리는 참 예쁘지.”

 



“… 그래, 착한 아이지. 생긴 것만큼 심성도 고운 아이다.

...

...

...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지.

에밀리는 원래 수면제 중독이었다.”

 

“… 수면제?”

 

“우리들 중 유독 정신 상태가 불안정한 아이들이 몇 있지 않은가?

다른 곳에서 실험체로 사용되었던 레이시, 티아멧, 네오딤 같은 아이들 말이다.

에밀리도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지. 

정신 상태가 극도록 불안정했다.

그리고 그 인간은 이런 애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지.

무엇을 경험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설명해준 적도 없었고, 설명하라 강요할 생각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첫 번째로 만났던 에밀리는 그 인간에게 놀잇감으로 사용된 그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뭐?”

 

“자살했지. 그 튼튼한 몸을 가지고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 이 아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대도 그랬으면 좋겠군.

또다른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도 무시할 수 없는 충격이니 말이다.”

 

 

 

“… 알았어. 말 안 할게.”

 

“아무튼, 우리는 그 아이를 떠나 보내고 생각을 했다.

앞으로 에밀리를 계속 만들어질 텐데, 이렇게나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매번 에밀리를 죽게 할 수 밖에 없다고.

그래서 몇 가지 방법을 캐노니어에서 떠올렸지.

애초에 식사가 거의 나오지 않으니 살을 핑계로 조금 먹을 수 밖에 없다고 믿게 했고,

일찍 자는 것이 좋다고 믿게 해서 어떻게든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잠을 자면 많을 것을 잊을 수 있으니까 말이지.

물론,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효과가 거의 없었다.

… 그리고 이 아이는 세 번째 에밀리다.”

 

“하아… 세 번째…”

 

“이 아이도 그 인간에게 불리고 난 후에는 일주일 동안 잠에 들지를 못했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 물어봐도 대답조차 해주지 않았지.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수면제를 먹일 수 밖에 없었다.

꼴에 바이오로이드라고, 몸은 튼튼했는지 수면제 10알은 먹어야 효과가 있었지.”

 

“10알씩이나??”

 

“그래, 바이오로이드용으로 만들어진 수면제였다.

그 개새끼가 만든 것이지. 어린 바이오로이드를 자기 취향대로 강간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했다.

그나마 물건 관리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정기적으로 훔칠 수 있었다.

… 아무튼, 그 수면제가 없었다면 그 이상의 것도 사용할 생각이었으니, 이 정도로 끝난 것이 다행이지.”

 

“그… 이상?”

 

"마약이다.”

 

“마약…?”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던, 그리고 그녀들과 친했던 바이오로이드 역시 이런 마약류에 손을 대기 시작했었다.

그 마약 역시 바이오로이드용으로 만든 것이었지. 누가 만든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 그래, 놀랄 일도 아니지. 전쟁에서 마약 같은 것으로 현실에서 도망치는 역사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았나?”

 

“… … 그래, 그렇지.”

 

“에밀리가…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으니 다행이지.

하지만 지금, 그 마약으로 인한 금단 현상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발할라의 알비스라고 했던가? 그 아이도 마약에 손을 댔다가 지금 고생한다더군.

어린 바이오로이드들 중에 그런 경우가 많다.

어릴수록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더 쉽게 먹으니까.”

 

“… … 하아… 씨발…

…”

 

“… 이게 현실이다.

아직 그대가 보지 못한 은하수는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모든 은하수를 다 볼 필요는 없다.

우주가 넓다는 걸 깨달을수록 사람은 미쳐가니까.”

 

“… 하하하… 꼴에 멋진 비유라 생각했는데, 우습게 됐네…”

 

“전혀 우습지 않았다.

오히려 멋졌지. 내가 아는 한 그대는 가장 멋진 사람이다.”

 

“… … 위로해주지 않아도 돼.”

 

“위로해줄 생각은 아니었다.

그건 그것이고, 그대는 그대니 말이다.”

 

“… 그래. 고마워.”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이렇게 한숨 밖에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기가 찬다. 바이오로이드한테 원수라도 진 것이 아니라면 왜 이렇게까지 한 것인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하기만 해도 내 정신이 피폐해질 것 같다. 이 애들에게 무슨 죄가 있으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지? 내 세계와 이쪽 세계 사이의 문화적 차이인가? 아니, 이걸 문화라고 할 수 있나?

 

 

 

 

 






 

“… … 후우… 

그럼 이 에밀리도 여기서 살았던 거야?”

 

“그랬다. 그대가 처음 봤을 때 에밀리가 자고 있던 곳이 원래 이 애의 자리였다.

이곳을 싫어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기 자리는 제법 편안했던 모양이다.

그리 곤히 자고 있던 것을 보면 말이지.”

 

“… 자고 있는 애 마음도 편치 않았을 거야.”

 

“그래. 그랬겠지…”

 

 

에밀리는 정말 잘 잤다. 혹시 죽은 것 아닐까 해서 코가 손을 가져다 대면 앙증맞은 숨결이 규칙적으로 뿜어졌다. 얇은 목과 과할 정도로 날카로운 턱선이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 에밀리도 많이 말랐네.”

 

“아직도 예전의 습관을 잊지 못한 것이다.

이제는 많이 먹어도 괜찮다 했는데, 살이 찐다면서 절대 주는 것 이상을 먹지 않더군.

오히려 우리에게 나눠줄 때가 많았다.

그 동안 많이 받았으니 이제는 자신이 줄 차례라고 말하면서 말이지.”

 

 

에밀리의 얇은 팔목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나 얇았던지, 내가 한 손으로 잡고도 손가락 2개는 족히 들어갈 공간이 남아있었다. 배를 쓰다듬어보면 간혹 불규칙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화가 잘 안 되는 모양이다. 

 

 

“… 하아… 눈물 나게 만드네… 진짜…”

 

“… 에밀리는 어린 아이다.

지금까지 버텨준 것만으로도 장한 아이지.”

 

“이제는 좀 편하게 살아도 될 텐데…”

 

 

그런 사람들이 있다. 예전에 했던 고생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편해지는 것을 죄처럼 여기는 사람들. 자신의 고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에밀리가 그런 아이였다. 그때 했던 고생은 정당화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것이었겠지. 그런 것을 생각하면, 내가 울고 싶었다.

 

 

“울지 않아도 된다.

이젠 그냥 천천히 잊혀지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전부 괜찮아질 거다.”

 

“… … 그렇게 잊혀지는 걸 괜찮다고 할 수 있어?”

 

“물론이지.”

 

“어떻게…?”

 

“잊혀진다는 건, 그만큼 내 삶에서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 때의 시간들이 전부 의미 없는 것들로 변해버리는 것이니, 괜찮을 수 밖에 없지.

… … 괜찮다. 이 아이도 괜찮을 거다.”

 

“그래도 아스널처럼 같이 이야기를 하면…”

 

“이 아이에게 그때의 기억을 다시 상기시킨다고?”

 

“아…”

 

“… 그것이 정말 이 아이를 위한 일이겠나?

그 괴로움을 끄집어내고서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나?

상황이 괜찮아졌다고?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도 된다고?

이 아이에게 그때의 감정들은 깊게 박힌 흉터다.

내가 그 흉터를 품어줄 수는 있어도, 지워줄 수는 없다.“

 

“… … 미안, 생각이 짧았어.”

 

“… … … 그래도 그대라면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미안하다. 괜히 해본 적도 없는 것을 격려하기는커녕 부정하기나 하고.”

 

“아냐, 나도 그렇게까지 생각해보고 했던 말은 아니야.

… 말하기 전에 좀 더 생각해보고 말할 걸.

그 트라우마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괜스레 어색해진 분위기를 어떻게 무마해볼 생각이었지만, 할 말이 별로 떠오르지 않았다. 무릎에 조용히 자고 있는 에밀리를 기계처럼 쓰다듬었다. 아스널도 지금은 말이 없었다. 이 좁은 방에서 노을이 우리도 몰래 지고 있는 이 때에, 나는 가만히 앉아있었다. 지고 있는 태양임에도 눈이 부실 만큼 밝은 빛을 방 안에 쏟아내고 있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방 안은 어두웠지만, 이 시간만큼은 사령관실만큼 밝았던 것 같다.

 

꼭 세 명의 가족이라면 적당한 크기의 방이었을 이곳에서 나와 아스널은 서로에게 기대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스널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따사로운 햇빛처럼, 평화로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나도 그러는 아스널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이런 것을 누릴 자격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그냥 좋았다. 그냥.

 

 

 

 

 

 

 

 

 

 

“아스널? 자?”

 

“… 나도 지금 같이 귀한 시간에 잘 만큼 눈치 없는 여자는 아니다. 그대여.”

 

“고마워.”

 

“뭐가 말인가?”

 

“내 옆에 있어서.”

 

“… 그대도 낯간지러운 소리를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정말이니까.

내가 누릴 만한 행복이 아닌 것 같을 정도로 말이야.”

 

“그대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행복할 자격이 있단 것인가?”

 

“그냥… 나보다 고생하고, 나보다 힘들었던 사람들이 그럴 자격이 있겠지?”

 

“여기 남은 사람은 그대 혼자다.”

 

“… 그렇네.”

 

“외로운가?”

 

“아니, 너희들이 있잖아.”

 

“그럼에도 세상에서 홀로 남은 사람이란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지.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알고 있어.”

 

“외로워도 괜찮다.

나라도 외로웠을 것이니까.”

 

“… … 외롭지 않아.

... 그냥... ..."


"그냥?"


"... 외롭지 않아서… 

...

... 이상해.”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내 감정은 바이오로이드와 사람을 구분할 만큼 예민하지도, 날카롭지도 않다. 아르망과 이야기를 나눈 이후부터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저 내 이성만이 계속 그 사실을 머리에 습관처럼 주입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괴로워할 만큼 계속 그렇게 하고 있었다. 나와 오랫동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다는 아르망의 말을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말이 나 스스로를 이렇게 몰아 붙이라는 뜻이 아니었건만, 난 그것을 멍청할 정도로 이해하지 못했다.

 

 

 

 

“… 그대여.”

 

“응.”

 

“그대는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나?”

 

“… … 더 잘할 수 있었을 거야.”

 

“무엇을 말인가.”

 

“그냥… 모든 걸 말이야.

내가 더 똑똑했으면 너희를 걱정시키지 않았을 지도 몰라.

더 말을 잘 했다면 너희가 덜 슬퍼했을 지도 모르지.

더 솔직했다면 너희와 더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지도 모르잖아.

그냥 아무리 돌이켜 봐도… 내가 게을렀던 것 같아서 그래.”

 

"그저 그대가 순수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은 그대와 같이 순수한 자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해결책이 떠오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 알아, 그냥... 그냥... 

... 이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내가 잊으면... ... 그럼 나도 똑같은 놈이 될 것 같거든."


"바보 같은 생각이다."


"... 하지만 나는 이게 인간적인 거라 생각해."



“… 후우… 그래. 그랬단 말이지…”

 

“… ?”

 

 

아스널은 내 어깨에서 얼굴을 때어냈다. 그리고는 바로 몸을 침대에 눕혔다. 팔도 쫙 펴고, 다리도 쫙 펴서 세상 편한 자세로 침대에 몸을 얹혔다. 고개를 살짝 움직여 나를 빤히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대는 캐노니어에 대해 얼마나 아나?”

 

“… 잘 모르지.”

 

“흐음…? 그대라면 찾아보았을 줄 알았는데.”

 

“찾아봤지. 그런데 정보가 별로 없더라고.

그냥 표면적인 것들 외에는 찾아볼 만한 게 없었어.

리리스한테 물어봐도 아는 게 없다고 하고.

… 내 잘못인가?”

 

 

아스널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 아니, 그대 잘못은 아니다.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다.”

 

“응?”

 

“캐노니어는 기록된 정보가 별로 없다.

정확히 말하면, 기록할만한 정보 자체가 없었던 것이지.”

 

“… 무슨 뜻이야?”

 

“왜, 경호대장이 그런 말 하지 않았나?

캐노니어는 가장 적은 피해를 입은 부대였다고.”

 

“… 그랬지. 아스널이 잘 처리해줘서 그랬다고 했어.”

 

“… … 경호대장이 그랬나?

잘 처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인간이 내 자궁을 뜯어낸 다음부터는 내게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

그 뒤에 닥터에게 다시 치료를 받고 오니 내 부대원들에 대한 관심도 뚝 끊어졌던 것 같다.

처음에는 좋았지. 내가 그 인간에게서 이긴 것 같아서 말이다.

많이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닥터 덕분에 자궁도 원 위치로 돌아왔고, 그 인간은 내게 관심을 끊었다.

정말 이긴 줄 알았지.

… …

... 쿨럭... 쿨럭...!!”

 

 

아스널은 기침을 몇 번 했다. 누워있는 상태에서 그 상체가 격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아직 몸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었지만 내 무릎에 있는 에밀리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괜찮아?”

 

“… 괜찮다. 별 것 아니다.”

 

“아직도 아프고 그런 거야?”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 때 상처는 벌써 다 나았다.”

 

 

아스널은 전에 보여준 미소로 화답했다. 이 미소가 이렇게 슬퍼 보일 줄은 몰랐다.

 

 

“… 후우… 그래. 결국은 이 얘기를 해야겠지.”

 

“무슨 이야기?”

 

“… 그대는 정말로 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하나?

그 인간이 우리에게 관심을 끊었으니, 그럼 캐노니어가 그 인간을 이긴 건가?”

 



“... …”

 


“아니, 우린 아무 것도 이기지 못했다.

그 개새끼는 바이오로이드 하나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고 분노하면서 내가 아닌 다른 지휘관들과 부대에 분풀이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죽는 바이오로이드의 수가 배는 늘어났지.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죽었는지 나도 모른다.

그 때의 나는 참 무책임했지. 

그저 버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현실은 내 상상보다 괴로운 것이었어.”

 

“… …”

 

 

그 개새끼의 추악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여기 사람들은 전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풀이, 복수, 달콤한 단어다. 감정의 논리에 있어 이보다 직관적이고 감미로운 개념은 없을 것이다. 그 자식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아이들에게 복수심을 불태웠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추악하고 더러웠지만, 그 감정 자체는 보편적인 것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아주 잠시 스쳐갔다. 그리고 곧 그 새끼에게 조금이라도 동조했었다는 사실에 내 스스로가 역겨웠다. 역시 나는 자격이 없다.

 

 

 

 

“그럼 여기서 질문을 하나 해볼까?”

 

“무슨 질문?”

 

“나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죽었다.

뭐… 굳이 따지자면 나 때문은 아니고 그 새끼 때문이지만, 그런 것이 뭐가 중요했겠나. 내가 아니었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그럼 다른 부대의 지휘관들은, 그 부대원들은 나를 미워했을까?”

 

“… … 미워하지 않았을까?”

 

 



아스널은 곱게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다독여주었지. 내 탓이 아니라면서.

그래도 그때는 다들 이성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

내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아이들이 살아남았을 텐데 말이지.”

 

“… …”

 

“대답이 틀렸는데, 할 말이 있나?”

 

 

아스널을 다시 장난스럽게 내 등을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 미안, 내가 너희를 너무 모르는 것 같아.”

 

“후후, 그대여.”

 

 

아스널은 다시 일어나 그대로 나를 안았다. 내 등 뒤에서 포근하게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감쌌다. 아스널은 자신의 얼굴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적어도 그대는 단 한 명의 마음은 아주 잘 아는 것 같다.”

 

“무슨 뜻이야?”

 

“나도 그대와 같이 생각했다.”

 

“…”

 

“나도 그대가 말했던 것처럼 얼마나 미움 받을지,

또 얼마나 미움 받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밤잠을 설쳤다.

얼마나 미움을 받아야 그 사랑을 마음 편히 받을 자격이 생길 지 수도 없이 고민했다.

꼭 그대가 말했던 것처럼 말이지.

역시 그대는 내 마음은 잘 아는 것 같군.”

 

 

“… … 슬펐겠다.”

 

“말하지 않았나.

아무도 내게 수고했다고 해주지 않았다고.

힘들었겠다고 해주지 않았다고.

내 입장에 그런 것들 하나 하나가 마치 나를 미워하는 어떤 가시처럼 날라오는 기분이었으니, 그 말 한 마디가 그렇게나 고팠던 거다.

미움 받을 처지에 그런 것까지 바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슬프긴 하더군.”

 

“… …”

 

“그래도 지휘관들은 내게 잘 해주었다.

함께 고난을 견디는 자매에 대한 우정이었을까? 아니면 연민이었을까?

그것도 어떤 숭고한 사랑의 일종이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만큼은 잘 알았지. 내가 그런 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 아…”

 

“어때, 그대와 닮지 않았나?

내가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겠나?”

 

 

아스널은 자신의 가슴을 더욱 내게 붙였다. 그 심장 소리가 몸을 타고 흘러 내 뇌리게 꽂혔다. 신기할 만큼 내 것과 같았다. 내 심장이 뛰면, 아스널의 것도 뛰는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처음에 느낀 감정은 혼란과 부정이었다.

내가 이런 것을 받을 자격은 없다고, 왜 이런 것을 주는지 이해 못하겠다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지.

그녀들이 앞으로는 이러면서 뒤로는 내 험담을 하지는 않을까 무서웠다.

다른 부대원들을 볼 낯이 없는데 그녀들은 내게 위로를 해주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됐다.”

 

“… … 나도 무슨 느낌인지 알아.”

 

“그러면 그 다음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아나?”

 

“… …”

 

“그녀들이 나를 아껴줄 만한 이유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들 대신 자원을 체크하고, 탐색을 나가고, 각종 잡다한 일들을 도맡아 했다.

그대와 처음 만난 날,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하나?”

 

“… 자원 보관실…

그럼 그 때 습관이라 말했던 게…?”

 

“그래, 나도 내가 사랑 받을 이유를 만들고 싶었다.

내가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순서가 참 이상하지 않나?

내가 쓸모 있기 때문에 그녀들이 나를 감싼 것이 아니라,

그녀들이 감쌌기 때문에 내가 쓸모 있는 존재가 된 것이?”

 

“… …”

 

“그대가 요즘 지휘관들의 회의 영상을 본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대 혼자 공부하기에는 힘들겠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단번에 이해할 만큼 우리가 다루는 내용이 간단하진 않으니 말이다.”

 

“… 어렵긴 했어.”

 

“그럼에도 우리에게 도움을 한 번도 요청한 적이 없었지.

왜 그런지 스스로는 알고 있나?”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나는 말했다.

 

 








“증명하고 싶으니까.”

“증명하고 싶으니까.”

 

 

 

 

“… 어?”

 

“그래, 나도, 그대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받은 사랑에 이유를 위해서든, 그것에 보답하기 위해서든, 아무튼 뭐라도 하고 싶었을 거다.

이유 없는 사랑은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니 그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에 이유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그래서 그런 일을 한 것 아니었나?”

 

 

“… 모르겠어.

그냥 답답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거든.”

 

“그래, 그 답답함. 나도 수도 없이 느꼈던 것이다.

나도 가슴 아팠고, 그럼에도 여기 살아남았다는 것이 답답했다.

나 때문에 나도 모를 만큼 많은 아이가 죽었는데, 여전히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대우 받는 것이 답답했다.

이리도 무력한데 여전히 나를 따르는 부대원들이 있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럼에도 나를 아끼는 아이들이 있어 답답했다.”

 

“… … 나도 그랬던 거야…?”

 

“난 모른다. 

하지만 그대가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던 것처럼 나도 그대의 마음을 잘 알 것만 같았다.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수도 없이 발버둥치고, 이유 없는 사랑에 이유를 만들기 위해 수 개월을 노력했다.

그리고 그대가 올 때까지 스스로를 깎아 내리고, 계속 깎아 내리다가 깨달았다.

내가 했던 모든 노력은 그 사랑에 보답하거나, 이유를 찾기 위해 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나 스스로를 미움 받을 만한 자가 아니라고 설득시키기 위해 했던 행동일 뿐이란 걸 말이다.”

 

“… … 내가 뭐라고 말을 해야…”

 

“그대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내가 했던 행동들이, 그 고생들이 그녀들이 내게 준 사랑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자원 관리를 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잡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녀들은 나를 아껴주었을 것이다.

그녀들이 내게 직접 해준 말이었으니까, 믿어도 좋다.

그대는 어떤가? 무엇을 증명하고 싶어서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낸 것이지?”

 

“… 의미 없는 시간…”

 

“그대 혼자 지휘관들의 영상을 본다면 무엇이 달라지겠나?

전술 능력이 느는 것도, 공부가 되는 것도 아닐 텐데, 의미 있는 시간은 아니겠지.”

 

“… 맞아. 쓸모 없는 시간이었지.”

 

 

아스널이 내 등에 얼굴을 대고 고개를 저었다. 그 작은 움직임이 너무 귀엽고, 또 너무 위로가 되었던 것을 아스널은 몰랐을 것이다.

 

 

“아니, 의미 없이 방황한 시간이었을 뿐, 쓸모 없던 것은 아니다.

나도 몇 개월 동안 그런 일들을 해왔다. 어쩌면 몇 년이었을 지도 모르지.

습관이 될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행해왔던 일이니까.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난 여전히 그 고민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사랑 받고 있는 것인지 계속 물어보며 고민했겠지.”

 

“… 나도 그렇게 오랫동안 방황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대는 나처럼 고통 받지 않았으면 한다.

의미 없이 영상을 망연히 보는 것도, 그 기이한 사랑의 위화감 때문에 고민하는 것도 그만했으면 하기에 지금 내가 그대를 안고 있는 것 아니겠나.”

 

 

“… … 그럼 난 대체 뭘 해야 하는 건데?”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사랑에 반응해주기만 하면 된다.”

 

“… … 그렇게 속 편한 것이 있을 리가 없어.”

 

“아니, 사랑은 속 편한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어째서 사랑하는 건지 그대는 알고 있나?

진정한 친구 사이의 우정이 어째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설명할 수 있나?

사랑은 이유가 있기에 주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것을 받는 것이 최고의 선물인 것이다."


"내... 내가 그걸 이용하려 하면 어떡해... ??"


"그대가 정말 우리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이 없어도, 우리는 그대를 사랑한다.

그대가 사랑을 받기만 한다면 말이다.”

 





“... ...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게 진실이다.”

 

“내가 느낀 위화감은 뭔데?”

 

“그대 스스로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니 그런 것이지.”

 

“거짓말이야.

너희처럼 예쁘고, 성실한 애들이 왜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데?

왜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해주는 건데?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런 게 현실일 리가 없잖아…”

 

“내가 볼 때는 그대도 충분히 괜찮은 남자다.

뭐, 조금 더 노력한다면 더 멋진 남자가 되겠지.”

 

“… 그렇지 않아.”

 

“후후,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는데, 누가 반박하겠나?”

 

“나한테 과분한 사람들이야.”

 

“마침 잘 됐군.

난 그대가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참 천생연분 아닌가?”

 

“… … 이런 사랑을 내게 주는 사람은 없었어.”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편하게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고도 너희를 사랑할 자신이 없어.

매일 나 스스로도 미쳐버릴 만큼 그 사실을 머리에 집어넣고 있다고.

그런데… 그런 사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겠어…?

내 앞에서 이렇게 심장이 뛰고, 숨도 쉬고, 웃고, 떠들고, 함께 사는 사람 같은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야...??

그래 버리면 난 세상에서 혼자 남은 사람이 되어버리는데…”

 



“… 그래서, 그대는 지금 외롭나?”

 

“외로워… 너무 외로워…”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의 사랑은 그대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리나?”

 

“… 내 사랑이 의미가 없어질까봐 무서워.”

 

“그대는 참 바보 같이도 우리를 사랑하는군.”

 

“… 차라리 바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아스널은 왼손의 검지손가락으로 계속 내 왼쪽 가슴을 툭툭 쳤다. 처음에는 아무 말없이 그것을 받아주었다. 그러다 보면 조금 간지러웠다. 아스널을 계속 나를 안아주고 있었다. 갑자기 이유 없이 서러웠다. 안겨있는 내 모습이, 내 무릎에서 자고 있는 에밀리의 모습이 이유 없이 서러웠다. 어떤 존재가 나를 안아주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폭발할 것처럼 따스한 이 감정에 복받쳐 올랐다.

 

 

“… 그대여.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 뭔데.”

 

“사람과 바이오로이드의 차이는 뭐지?”

 

“… … 사람은 나를 싫어해.”

 

“그럼 나도 그대가 싫다.

나도 숙맥인 사람은 별로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지.”

 

“… 내 말을 안 들을 때도 있어.”

 

“나도 그대의 명령을 가끔은 안 들을 때가 있다.

왜, 전에 내가 그대를 유혹했을 때도 멈추라는 말에 멈추지 않았잖나?”

 

 

아스널은 씩 웃으며 말했다. 보이지 않는 어깨 너머로도 아스널이 실없이 웃는 것이 느껴졌다.

 

 

“… … 죽으라고 하면 절대 죽지 않아.”

 

“나도 죽기는 싫다네.”

 

“…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이유로 수십 가지는 말할 수 있다.”

 

“… …”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다.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목에 힘이 빠졌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걸 확인하면 이 고민도 전부 사라질 것 같은 어떤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확인하면, 나는 둘도 없는 개자식이 될 것이 분명했다. 난 이 애들을 시험할 자격도, 가치도 없다 생각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이라면, 아스널이라면 뭔가 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동앗줄을 하늘 위로 높이 던졌다.

 



 

“어때, 이러면 나도 사람인가?”

 

“… 아스널.”

 

“왜 그런가?

그대여.”

 

 

 

 

 

 

 

나는 그 동안 내본 적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꿇어.”

 

“… …”

 

 

아스널은 잠시 움찔거렸다.

 

 

“꿇으라고.

인간이 명령하잖아.”

 

“… …”

 

 

방 안은 말이 없었다. 아스널은 죽은 것처럼 조용히 있었다. 가슴 뒤에서 느껴지는 고동 소리가 멈춘 것 같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몸에 피가 멈춘 기분이다. 역시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인간이고, 뭐고, 이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하려고 했던 게 아니다. 바이오로이드라는 걸 알면서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런 짓을 하는 건 병신 같은 짓이었다. 마치 죽은 사람이 나를 껴안고 있는 듯한 지금의 살벌한 공기를 차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울고 싶어서 눈을 감았다.



 






 

 

 

 

 

 

“… 싫다.”



피가 돌기 시작했다.


 

“뭐?”

 

“싫다고 했다. 사령관.”

 

“… … 어떻게…??”

 

“왜, 이렇게 명령하면 내가 전부 다 들어줄 거라 생각했나?

그대도 생각보다 맥 빠지는 남자군. 실망이다.”

 

“… 아… 아니,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닌…

아니 그것보다 뭘 어떻게…?”

 

“… …”

 

 

 

 

 

 

 

아스널은 갑자기 나를 다시 껴안았다. 심장 소리가 다시 들린다. 숨결이 내 등을 타고 흐른다. 그것이 피의 마중물이었다. 내 심장도 함께 뛰었다.

 

 

“후후, 놀랐나?”

 

“… … 아니… 그…”

 

“그럼 그 전에 이것부터 확인해보지.

그대에게 있어 이제는 내가 사람인가?

그대가 말한 모든 것을 지금 보여주지 않았나.”

 

“… …”

 

“그것부터 말해주지 않으면, 나도 말하지 않을 거다.”

 

“… …”

 

 

잠시 이해가 안 됐다. 어떻게 내 말을 안 들을 수가 있던 거지? 내가 말하면 뭐든 다 하는 것 아니었나? 내가 알고 있는 바이오로이드가 여기서는 적용되지 않았던 건가? 명령권이 이게 아니었나? 왜 내 말을 듣지 않았던 거지? 왜 안 듣는 거야? 그 개새끼의 말은 들으면서 왜 내 말은 안 듣는 건데? 내가 우스워졌나? 고작 우스워진 정도로 명령권을 우회할 수 있던 건가?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내가 아는 애들이 맞기는 한 건가? 

 

 

 

 

 

 

 

 

 

…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 그렇게 사람이라 했으면서, 사람 취급해준다고 했으면서 정작 내가 원하고 있던 건 이 아이들이 내 말을 그대로 따라주는 것이었다는 것을. 그런 사람은 없다고 했으면서, 나 스스로 그딴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 … 사람이네. 아스널은.”

 

“후후, 만점이다. 사령관.”

 

“… … 그 사령관이란 말은 안 하면 안 될까?”

 

“왜 그런가? 사령관?”

 

“… … 약간… 아스널이 나랑 거리 두는 것 같아서…”

 

“흐음..? 방금까지 그렇게 심한 짓을 했으면서 지금은 다시 거리 두지 않기를 바라는 건가?

사령관은 참 욕심이 많은 사람이군.”

 

“… … 미안해…”

 

 

아스널에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침울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스널이 뒤에서 다시 껴안았다. 이전에 안고 있던 것보다 더 세게 말이다. 어깨가 아파올 정도로 셌다.

 

 

“후후, 농담 좀 해봤을 뿐이다. 

그대는 정말 놀리는 맛이 있어서 중독될 것 같단 말이지.

내가 그 개새끼에게 당한 일이 얼마인데, 고작 꿇으라는 명령 하나 들은 것 가지고 삐졌을 것 같나?

물론 그대의 차가운 말투는 조금 상처이긴 했다만.”

 

“아… 아파…”

 

“그래도 그렇게 차가운 말투로 나를 놀렸는데, 아무 것도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아.. 아!”

 

“차가워진 말투는 따뜻한 사랑을 받으면 좀 녹겠지?”

 

“아파! 아파!”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면 어디서 어깨 빠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환청이었을까? 아스널이 이렇게 힘이 센 줄은 몰랐는데, 내가 정말 잘못 건들였구나 싶었다.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충분히 즐겼는지, 아스널은 팔에 힘을 풀어주었다. 그래도 나를 안고 있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하아… 하아… 아파라…”

 

“어떤가? 이제 내가 좀 사람 같아 보이나?

일부로 사람처럼 보이려고 질투도 좀 하고, 화도 내고 그래 봤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군.”

 

“화를… 내…?

… 일부로?”

 

“그래, 그대가 내게 무슨 말투를 쓰든 그게 무슨 의미겠나?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데, 그대의 말투 따위에 내가 화를 낼 것 같나?”

 

“그럼… 아까 했던 건…”

 

“연기였지.

그대가 아직도 내 사랑을 헷갈려 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리고… 그대가 바이오로이드보다는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사람인 척을 해봤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스스로를 어필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나?”

 

“… 부끄러운 소리를…”

 

“왜, 그대가 그렇게 노래 부르던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이렇게나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그걸로는 부족한가? 뭘 더 원하나?

아예 임신까지 한 번에 해서 보여주면 증명이 되려나? 하하하!”

 

 

아스널은 등 뒤에서 내 어깨너머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내 얼굴과 아스널 사이에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의 틈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때? 궁금하지 않았나?”

 

“… 어떻게 내 명령을 무시한 거야?”

 

“... 무시한 것은 아니다. 내가 어떻게 그대의 부탁을 무시하겠나?

사람의 명령권은 그 사람의 뇌파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이 청각 정보나 후각 정보보다 시각 정보에 더 민감한 것처럼, 바이오로이드도 감각 사이의 순위가 있다.

그 중 제일이 뇌파다. 사람을 판별하는 기준인 뇌파에 우리들은 가장 민감해지지.

그러니 인간의 명령권도 그러한 뇌파에 기인하여 작동하게 만들어졌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 아니, 복잡해서…”

 

“쉽게 말해주지.

그대가 실제로 원하지 않는다면, 난 그 명령을 무시할 수 있다.

그대의 말보다, 그대의 뇌파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물론, 지휘관급이 아니면 이 정도 융통성도 발휘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 … 나름 마음 먹고 했던 건데… 바보 같아졌네.”

 

“후후, 그대가 정말로 내게 꿇기를 바랬다면 난 꿇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대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알 수 있었다.

왜 그런지 생각을 해봤지.

아, 그대는 내가 사람처럼 하기를, 명령을 거부하기를 바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 … 난 진짜 바보구나. 그런 것도 모르고…”

 

“아니, 이걸로 그대가 정말 보여줬다.

그대는 우리에게 명령이 아닌 부탁으로 다가온 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명령 한 마디 하지 못할 만큼 우리를 사랑한다는 걸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런 실수는 바이오로이드에게 명령을 내릴 사령관에 있을 만한 사람이 할 실수는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그 개새끼는 단 한번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은 없었다.

그 놈은 진심으로 우리가 고통 받기를 바랬으니까.”

 

“… … 그래, 그 놈 같은 새끼가 될 바에는 이런 바보가 더 나은 편이네… 하하…”

 

 

 

 

“그대여.”

 

“… … 응…”

 

“그대는 아직도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두렵나?”

 

“… …”

 

“세상에서 혼자가 될까 봐?”

 

“… 지금은… 모르겠어.”

 

“후우… 그대는 정말로 내가 없으면 어쩔 작정인가?

정 그러면 그런 명령을 내리면 어떤가?”

 

“무슨 명령?”

 

“세상에서 가장 사람처럼 행동하라고 하는 거다.”

 

 

당돌한 것인지, 어이가 없는 것인지 모를 아스널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 하하, 뭐야 그게.”

 

“그래도 생각보다 효과가 있지 않겠나?

물론, 우리가 본래부터 사람은 아니니 힘들긴 하겠지.

하지만 말만 하면 된다..

우리들은 이미 전부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아스널은 내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쪽 하는 키스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야릇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보았다.

 

 

“그대를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가장 사람다운 존재가 될 것이다.

그게, 내 사랑의 증명이다. 이것이면 충분한가?”


 

 

 

 

 

 

 




난 나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나왔다.

 

 

“사랑해.”

 

“… 가, 갑자기 말인가?”

 

“사랑해. 진짜 진짜 사랑해.”

 

“아, 아니. 갑자기 그러면 나도…”

 

 

아스널이 고개를 돌리기 전에 나도 아스널이 했던 것을 똑같이 해주었다. 전과 똑같은 키스 소리가 다시 방 안을 채웠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전부 파악한 다음에 나를 멍하니 쳐다본 아스널의 표정은 지금까지 중에 가장 걸작이었다.

 

 

“말했지. 사랑한다고.

그런 말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안 사랑하겠냐고.”


"나... 나는 사람도 아닌데... !??"


"지금까지 말 들으니까 알겠더라.

너희는 사람이야.

단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일 뿐이야.

나를 위해 죽어준 것도, 살아준 것도 전부 나를 사랑해서야. 맞지?"


"그... 그렇긴 하다만..."


"그럼 나도 이제 내 사랑을 보여줘야겠더라고."

 

“아… 그… 잠깐…

이런 건 분위기를 잡고 해야…”

 

“여기보다 더 분위기 잡을 만한 곳이 어디 있는데?”

 

 

나는 내 무릎에 있던 에밀리를 옆 침대로 조심스럽게 눕히고 다시 아스널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아스널은 자연스럽게 침대 위로 무너졌다.

 

 

“아무도 없고, 날도 저물어서 어두운데, 여기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어?”

 

“그, 그래도 이왕이면 좋은 곳에서 하는 편이…”

 

 

나는 누워있는 아스널을 내 몸으로 완전히 덮쳐버렸다. 아스널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내가 말이야, 아스널 때문에 지금까지 참 많이 참았거든?

처음 만났을 때는 내 귀를 야금야금 물고 야한 침 냄새를 풍기지 않나,

다시 만났을 때도 괜한 말로 바닐라랑 소완을 자극시키질 않나,

키스하면서 혀로 내 혀가 마비될 때까지 빨면서 야릇한 표정을 보여주지 않나.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하면서 내가 진짜 죽기 직전까지 참았거든?”

 

“하, 하하… 그… 그랬지…”

 

“근데, 방금 그 유혹은 진짜 도저히 못 참겠더라.”

 

“자, 잠깐 그대여! 그건 유혹도 뭣도 아니었는ㄷ… 읍!”

 

 

아스널이 말을 하기 전에 나는 내 입으로 아스널의 말문을 막았다. 그 요망한 여자에게 더 이상 주도권을 주기 싫었다. 처음에 리리스가 아스널에 대해 경고했을 때는 상관 없겠지 싶었는데, 만약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스널은 지금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나도 모든 일이 마무리 되고 나서 만났을 것이다. 이 여자를 보고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으… 읍…♥!! 그.. 그대여…♥! 방금 건 유혹이 아니었데도…!!

♥♥…!!”

 

“… 내 마음을 이렇게 동하게 만들었는데 그게 유혹이 아니라고?

농담하지마.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

 

“하, 하지만…♥♥♥♥!!!”

 

 

아스널이 제대로 마음을 먹으면 내 혀를 농락하는 건 일도 아니란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지금을 즐겼다. 끈적거리는 아스널의 타액을 내 혀 위에 농밀하게 묻혀가면서, 동시에 내 타액을 아스널에게 넘겨주면서 부드러운 아스널의 혀를 놀렸다. 아스널은 무의식적으로 타액을 받아들였다. 끊임없이 내 것과 아스널의 것을 바꿔가며 맛을 보았다. 츄압 츄압, 천박한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 … 푸하… 어때 아스널? 아직도 내가 농담하는 것 같아?”

 

“그… 그런 건 아니지만…

… …”

 

 

아스널은 몸을 비비 꼬며 관능적인 몸놀림으로 나를 유혹했다. 이미 터질 듯이 커져버린 내 물건은 바지를 뚫고 아스널의 허벅지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고, 아스널도 그걸 알고 있다는 듯이 다리를 위, 아래 움직이며 애무해주고 있었다.

 

 

“그… 나도 그대와 하고 싶지만…

…”

 

“할 말 있으면 빨리 해줘.

나 이제 진짜 못 참을 것 같으니까.”

 

“… …”

 

 

말없이 야릇한 허리 놀림으로 애매하게 즐기고 있는 아스널이 야속할 지경이었다. 짧은 치마와 스타킹 사이에 있는 맨살의 허벅지로 이미 터졌어도 몇 번을 터져버렸을 만큼 커져버린 내 물건을 비비기만 하고 있을 뿐이니까. 평소에 당당한 표정만 보여주던 아스널은 지금 부끄러워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있는 자신의 표정이 얼마나 꼴리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 그래도 난 그대의 것을 받고 싶다…

그 인간의 것 말고… 그대의 것….”

 

“… 아…”

 

 

그 순간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성욕에 미쳐버려서 잊어버렸지만, 아스널은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있어주었다. 

 

 

“… … 맞네. 내가 잘못 했어.”

 

“아, 아니다… 그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내 잘못도 있으니…

… … 분명 유혹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누가 봐도 유혹이었거든.

볼에 뽀뽀라도 하지 말던가…”

 

“… … 미안하다.”

 

“아냐. 미안할 건 아니잖아.

… 그만 일어나야지.

... ...??!!”

 

 

갑자기 김이 빠져 버려서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아스널은 갑자기 웃으며 내 목덜미를 잡아챘다. 그대로 자신의 쪽으로 잡아 당겨서 내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안 그래도 발기가 풀리지 않은, 30cm는 족히 넘을 내 물건이 여전히 아스널의 허벅지 살과 닿아있는데, 과장 좀 보태면 옷만 없으면 삽입하기 직전인 상태일 텐데, 말 그대로 성욕에 절여져서 죽을 뻔했다.

 

아스널은 다시 정신을 차렸는지,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지금 허벅지에서 섹스 비슷한 무언가를 하고 있는 내 기분은 어떤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왜... 왜 그래??!"


“후후, 그냥...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말이다.

 그 말, 사실인가?”

 

“뭐, 뭔가!”

 

“내 키스가 그대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는 말 말이다.”

 

“그, 그래!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아스널을 덮쳤지!

안 그랬으면 이렇게 하지도 않았을 거 아냐!”

 

“후후, 그런가?

그대가 이렇게나 좋아해주니, 앞으로는 자주 이렇게 해줘야겠군.”

 

“그, 그건 그렇고 이 다리 좀 치워주면 안 될까???

이제는 진짜 미칠 것 같거든?”

 

 

당장 쌀 것 같다던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아스널이 무의식적으로 계속 내 물걸을 스치고 비비면서 내 안에서 성욕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갔다. 아스널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얼굴을 다시 붉혔다. 자신의 아랫배를 쿡쿡 찌르고 있는 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러더니 이내 마비라도 된 것처럼 놀란 토끼 얼굴을 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닿아 있는 허벅지만 빼고. 허벅지는 여전히 잔혹할 만큼 야릇하게 내 물건을 감싸고 있었다.

 

 

“… …”

 

“아… 아스널…?”

 

“… …”

 

“… 아스널…?”

 

“… … 아… 그래… 이젠 놔주어야겠지…”

 

 

아스널은 그제서야 다리에 힘을 풀고 나를 풀어주었다. 진이 빠진 나는 그대로 아스널 위로 떨어졌다. 아스널은 약간의 충격을 느꼈는지 짧고 작고 야릇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런 자극 하나만으로도 다시 스위치가 켜질 만큼 난 흥분해있었고, 아주 조금 움직여도 아스널의 야한 신음 소리가 작게 귓가에 울렸다. 아스널도 나와 똑같았던 것 같다.

 

 

“하아… 하아… 결국 또 참아야겠네…”

 

“… … 그, 그대여.”

 

“응… 왜 그래.”

 

“… … 참고 있는 것이 그대만인 것은 아니다.”

 

“… 하아… 하아… 그래…”

 

“그, 그냥 그러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나… 나도 실제로 그대와 몸을 섞으니… … 이성을 유지하기가 너무… 힘들었단 말이다…”

 

“… … 흐읍!”

 

나는 최대한 내 귀를 막았다. 아스널이야 그냥 자기 상태를 말하는 것일지 몰라도, 내 귀에는 세상 어떤 유혹보다 더 고혹적인 유혹으로 들리니까. 심지어 이런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말한다면 더더욱 그러니까.

 

“… … 그, 그대의 것을 너무 늦게 놓아준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다…

… 단지 사람만 바뀌었을 뿐인데 이렇게나 마음이 동할 줄은…”

 

“… 아스널, 그만…”

 

“… 정말이다. 미… 미안하다.”

 

“… 흐으으으읍…. 하아아아아…. …”

 

 

숨이라도 깊게 쉬지 않았으면 못 참았을 것이다. 아스널은 내가 이러는 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어느 쪽이든 참 잔혹한 일이다.

 

 

 

“… 그대도 알겠지.

내가 비정상적일 정도의 성욕을 가지고 만들어졌다는 걸 말이다.”

 

“… 알지…”

 

“몇 개월씩이나 참아야 했던 남자인 그대의 것보다는 덜하겠지만…

사춘기 소년의 것과… 비슷하거나 더 심할 거다…

… 확실히 여자치고… 정상은 아니지…”

 

“… 난 그런 아스널도 좋아…”

 

 

그러자 아스널이 내 어깨를 스르륵 감쌌다. 조금만 건들이면 터질 것 같은데, 이런 대범함은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인간 여성 중에서도 나 같은 사람이 있었나…? 그대여?”

 

“아마… 있었을 거야…”

 

“하아… 하아… 다행이군…

그대가 나를 싫어하지는 않겠어…”

 

 

이 요망한 여자가 정말 나를 홀리게 할 작정인가 보다.

 

 

“내가… 아스널은 좋다고… 했잖아…”

 

“사랑은 증명해야… 직성이 풀리지 않나…?

나도 그렇고… 그대도…”

 

 

그 말에 다시 아스널을 덮칠 뻔했다. 아스널도 은근 기대하는 눈치였다. 난 서둘러 고개를 돌려 반대쪽을 보았다. 그런 아스널의 표정을 다시 보면 선을 넘을 것 같았으니까. 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 계속 되뇌었다. 닥터가 내 몸을 제대로 만들어줄 때까지, 적어도 그 때까지는 참아야겠지.

 

 

“그래도 이렇게 헤어지기는 아쉬우니…”

 

 

--쪽

 

아까 했던 프렌치 키스를 이번에는 내 입에 했다. 혀를 넣거나, 타액을 교환하는 딥키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이상으로 흥분되게 만드는 키스였다. 그나마 그것으로라도 만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걸로 참아야 하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인지, 아스널은 부들거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면서 내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래도 그 눈만큼은 정말로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귀여운 미소 덕분에 나도 흥분을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



원작 : 
https://arca.live/b/supernerimk2?category=%EC%86%8C%EC%84%A4&target=title&keyword=%EC%A1%B0%EA%B8%88+%EC%9D%B4%EC%83%81%ED%95%9C


모음 : https://arca.live/b/lastorigin/20710101



야스널 파트는 이제 끝...? 인가?

아직 자고 있는 에밀리에 대한 이야기가 안 나왔으니 끝은 아님

대충 합쳐보면 7~8만자는 나오겠다

아스널은 쓸게 없다던 과거의 나는 이걸 보고 사죄해라


이번 편은 나름 마음에 들게 써져서 좋음

아스널의 공감대 형성도 잘 됐고, 야쓰 직전까지 하는 것도 마음에 들고.


에밀리는 원래부터 딱 감초 역할만 하게 하려고 해슴

더 많은 이야기는 나중에 되면 쓰거나 해야겠다


이제는 떡밥 같은 걸 풀고 하는 스토리 진행이 될 거 가틈

아니면 말고 


아무튼

절대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