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카 호를 해일처럼 덮친 나이트메어의 악몽 사건이 마무리되어 안정기에 접어든 이후.


아르망의 꾐에 넘어가 며칠간 강제로 휴식을 취한 사령관은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것이란 우려와는 달리 알파와 아르망이 힘을 써준 덕분에 

그의 결재가 필요한 최종확인서 외에는 그리 서류 양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에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사령관은 점심과 저녁 식사마저 거르면서 일에 집중했다.


그 결과 어제까지 밀린 업무와 오늘 할당된 업무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사령관이 의자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자 오랫동안 한 자세로 앉아 있어 굳은 뼈들이 마찰음을 내어 그의 귀를 강타했다.


그때 사령관의 뇌리에 다른 이들과 했던 약속이 스쳐 지나갔다.


마침 일도 다 끝났겠다, 사령관은 이번 일과 관련된 모든 이들을 사령관실로 호출해 그 당시에 자신이 했던 일과 경험한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이야기하기로 했다.


일과를 마무리 지을 시간이라 그런지 호출을 받은 대부분의 이들이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모였다.


인원수에 맞춰 준비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자신을 멀뚱히 응시하고 있는 이들에게 

쓴웃음을 지은 사령관이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완과 아우로라한테 부탁한 다과가 타이밍 좋게 도착했다.


디저트를 손수 갖다준 아우로라한테 감사 인사를 전하자 그녀는 보기 좋은 미소를 짓더니 '맛있게 드세요' 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이가 있었기 때문에 사령관은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겸 먼저 온 이들한테 양해를 구했다.



"닥터와 아르망도 있어야 하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어차피 다음날이 휴일이라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 먼저 모인 6인방이 알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서로 과자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이, 초췌한 얼굴의 아르망과 다크써클이 짙게 깔린 닥터가 같이 들어왔다.


아르망은 쉬는 날 없이 연속으로 당직근무를 했다 쳐도 닥터는 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흐물거리는 둘은 사령관한테 조용히 다가와 인사한 후 비어있는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댔다.


닥터가 신음을 흘리며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아으, 바보 오빠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다,닥터?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걸지 마, 바보 오빠…!"



갑자기 닥터가 바닥에 누워 몸을 데굴데굴 구르며 괴상한 소리를 내는 모습에 방에 모인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닥터가 저러는 건 또 처음이라 같이 온 아르망한테 아는 게 있냐는 뜻의 시선을 보냈다.


사령관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아르망이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닥터의 모습에 사령관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닥터가 벌인 기행은 그녀가 갑자기 잠듦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바닥에 누워 자는 닥터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사령관이 닥터를 조심히 들어 그가 애용하는 소파 위에 눕혀줬다.


그러곤 닥터가 앉을 나무 의자에 사령관이 착석했다.


어떤 장치를 해놨는지는 몰라도 사령관의 체구에 맞춰 변하는 의자의 모습에 

사령관은 기꺼이 이런 나무 의자를 만들어 준 세레스티아한테 속으로 감사했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인원은 다 모였으니 사령관이 본론으로 넘어갔다.



"다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대충 짐작하고 들 있지?"



사령관의 질문에 모인 이들이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두말할 것도 없이 그가 겪은 이야기가 시작됐다.


먼저 사태가 마무리되기 전 일주일 동안 닥터와 자신이 몰래 해온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


6인방이 작전 수행하기 전부터 시작해온 사령관의 꿈 탐방.


레오나와 발키리와 잠자리를 가진 그날 아침에 휴가를 낸 진짜 이유.


그런데 휴가 파트를 말한 순간 아르망이 책상을 쾅 치며 일어났다.


난데없는 소음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말을 꺼냈다.



"폐하. 지금 그게 사실인가요?"


"아르망, 일단 진정하는ㄱ…"


"사.실.인.가.요?"



며칠 전처럼 또다시 스위치가 들어간 듯한 아르망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사령관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확답을 얻은 아르망이 고개를 푹 숙였고 이내 '하'소리와 함께 그녀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에 힘줄이 돋아 있었고 평소에 쓰고 다니는 비레타마저 떨어졌음에도 아르망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활화산이 떠오르는 광경에 사령관은 아르망한테 진정하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이내 다시 고개를 든 아르망은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쓰곤 웃는 낯짝으로 닥터를 노려보았다.


닥터에게 다가간 아르망이 그 작은 체구에서 나올 수 없는 괴력을 이용해 누워 있는 그녀를 짐짝처럼 어깨에 들쳐 맸다.


사령관에게 먼저 실례하겠다고 인사를 한 아르망은 그가 말릴 틈도 없이 닥터와 함께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태풍처럼 지나간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방에 남아있는 이들 모두가 아르망의 손에 끌려나간 닥터가 무사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


-



아르망이 닥터와 함께 자리를 비운 뒤에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휴가 이후부터 리리스의 사건이 끝난 다음 날 새벽까지 잠을 잔 적이 없다는 얘기에 모두가 걱정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사령관은 '꿈을 꾼 것이 잠을 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해 안심시켰지만,

꿈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이라면 의지대로 움직이는 자각몽은 잠자리에 든 것과 별개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당연히 바이오로이드인 그녀들은 꿈에 대해 지식이 그리 해박하지 않았기에 사령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강한 신뢰를 내비치는 그녀들의 모습에 사령관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이것마저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가시방석을 깔고 앉은 거나 다름없는 휴가를 또 받을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레오나는 지휘관으로서 의견 발의를 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하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사령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오나한테 질문했다.



"레오나, 궁금한 게 있는데."


"어떤 것이 궁금해? 달ㄹ…사령관."



자연스럽게 사령관을 달링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려다가 주위에 보는 이가 많은 것을 의식한 레오나가 급히 말을 바꿨다.


하지만 눈치 빠른 몇몇은 레오나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대강 눈치챘다.


그중 한 명인 발키리가 반달 모양으로 눈을 뜬 채 약간의 질투심을 담아 레오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달링이라…대장의 부러운 점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그러면 네가 지휘관 하던가."



찌릿.


레오나와 발키리의 시선이 교차하는 곳에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사령관만의 착각일까?


시간이 지나도 둘이 만들어낸 과열된 분위기가 가라앉을 기세가 보이지 않자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리리스가 헛기침 소리를 내어 주위를 환기했다.


싸움에 끼어든 불청객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에 리리스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둘을 비꼬았다 



"거기 두 분. 주인님 앞이에요. 소속 부대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만두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



리리스의 말에 하등 틀린 게 없음을 아는지 시선을 마주쳤던 레오나와 발키리가 동시에 사령관을 한번 쓱 보았다.


이내 '흥!' 소리와 함께 둘은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의자를 홱 돌려 앉았다.


친자매 같은 모습에 사령관이 '하하'하고 작게 웃었다.


그때 지금까지 가만히 사령관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리앤이 질문거리가 생겼는지 손을 번쩍 들었다.



"사령관.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질문해도 돼?"


"물론."



리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사령관은 속으로 살짝 긴장했다.


토모에서 파생된 개체임에도 불구하고 오르카 호에서 몇 안 되는, 

참모진에 속해있지 않을 뿐이지 참모진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두뇌파 바이오로이드로 소문이 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여준 일화로, 바이오로이드 사이에서 재미로 진행하는 설문조사 중에 '체스대회가 열린다면 우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에서 리앤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세 번째로 높은 득표율을 보여준 전적이 있다.(2위는 용이었고 1위는 아르망이었다.)



"사령관 책상 위에 있는 흰색 약통은 어디서 받아온 거야?"


"…!"



아니나 다를까 리앤의 질문을 들은 순간 눈을 크게 뜬 사령관이 헙하고 입을 다물었다.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않고 꿈속 여기저기 다녔을 때 다프네한테 양해를 구해 각성제 몇 알을 통에 넣어 가져온 적이 있기 때문이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책상 위를 바라봤지만 리앤이 말하는 약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순간 사령관은 리앤이 쳐놓은 함정에 빠졌음을 직감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유미나 티아멧 그리고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하고 있는 레오나와 발키리를 제외한 

리리스와 리앤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사령관을 게슴츠레 눈을 떠 바라보았다.


사령관은 멋쩍었는지 큼큼 소리를 내곤 화제를 돌리려 했으나 그런 행동은 리앤과 리리스의 의심을 부추길 뿐이었다.


리앤이 실눈을 뜬 채로 사령관을 바라보며 슬쩍 운을 띄웠다.



"그 약. 각성제 맞지?"


"에이, 각성제는 무슨. 단순한 비타민이야."



오직 정황만으로 정답에 근접한 리앤의 감에 사령관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녀의 답을 얼버무렸다.


그런 사령관의 답을 예상했는지 리앤은 아무 말 없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내 무언가를 찾는 듯 뒤적거리던 손이 주먹 쥔 상태로 주머니에서 빠져나왔다.


이내 사령관 앞에 도달한 리앤이 팔을 앞으로 내밀어 사령관에게만 보라는 듯이 손을 펼쳤다.


그녀의 손에 놓인 하얀색 알약을 본 순간 사령관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리앤이 들고 있는 저것은 분명 다프네한테 받은 각성제이기 때문이다.



'아니 씨 저게 왜…'


"사령관. 이래도 발뺌할 거야?"



증거 없이 정황만으로 추리한 줄 알았더니 이미 증거가 확보된 상태였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판단한 사령관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인정하자 리앤이 갑자기 싱글벙글 웃더니 

그의 얼굴 옆에 다가가 귓속말로 사실을 얘기했다.



"사실 이거 비타민이야, 왓슨."


"…뭐?"



리앤의 연기에 속은 사령관이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반문했다.


사령관의 불신 어린 눈빛에 리앤이 숨겨놨던 하얀 통을 꺼내 사령관에게 보여주었다.


그녀가 보여준 통에는 '바이오로이드용 비타민C'라고 쓰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완전히 리앤에게 휘둘린 사령관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어 관자놀이를 마사지했다.



"더 놀리고 싶지만, 경호 대장의 시선이 곱지 않으니 여기까지 할게"


"후…너도 참."



리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느낌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들키지 않았을 사실이라 그녀한테 뭐라 하기도 그랬다.


리앤이 득의양양한 기세로 자기 자리에 돌아가 앉았고 사령관은 다른 이들한테도 궁금한 게 있냐고 넌지시 물어봤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리리스와 리앤을 제외한 넷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레오나와 발키리는 그렇다 치고 조금 전까지 자고 있던 티아멧과 유미는 언제 일어난 거지?


아무튼 그녀들이 의사를 존중하는 사령관은 차례대로 그녀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모두가 오르카 호의 모두가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악몽을 꾸었던 이들에 대한 후속 조치가 잘 이루어졌는지 상담으로 확인하는 것.


일단 오늘은 시간이 늦어 한두 명만 상담하든가 모두 방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상황.


…어떻게 할까?



1- 레오나와 발키리를 남긴다.( https://arca.live/b/lastorigin/31220474 )

2- 티아멧을 남긴다. ( https://arca.live/b/lastorigin/31515172 )

3- 유미, 리앤을 남긴다. ( https://arca.live/b/lastorigin/32079882 )

4- 리리스를 남긴다. ( https://arca.live/b/lastorigin/32476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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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급적이면 써진 번호순서대로 연재, 업로드 할 건데 큰 틀은 잡고 쓸 거라 좀 시간이 걸리니 양해 부탁드림.

다음 화가 연재되면 마지막에 쓰인 목록에 링크를 걸 예정.

2021-08-03 23:41 수정-1번 분기점 링크 추가

2021-08-07 15:40 수정-2번 분기점 링크 추가

2021-08-16 11:39 수정-기존에 있던 3,4번 분기점 통합하고 순서정렬, 3번 분기점 링크 추가

2021-08-22 09:42 수정-4번 분기점 링크 추가

2021-08-27 14:39 수정-5번 분기점 삭제. 리리스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