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적의 용

 

최근 일이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별의 아이와의 전투 이후로 식구가 몇 배로 뻥튀기되었으니 말이다. 해군 바이오로이드 삼만 사천이라……. 수치만 들었을 때는 감이 안 잡혔는데 업무로 다가오니까 장난이 아니란 게 새삼 느껴졌다.

 

일단 그냥 하루하루 별 일도 없이 지나가기만 해도 기본적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량이 배 이상으로 늘었다. 아무리 자동화가 되어 있고 이것저것 편의가 갖춰져 있다고 해도 몇 만이나 되는 인원이 생활한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일이니까.

 

점심 한 끼씩만 먹어도 몇 만 인분. 그게 하루가 되면 자릿수가 바뀔 지경이니……. 마음 같아선 식사의 질도 어느 정도는 보장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수경 플랜트나 기타 등등 여러 요소가 충족되기 전엔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다. 솔직히 급양 문제는 기회가 된다면 꼭 개선하고 싶지만 제대로 준비를 갖춰서 하고 싶은 게 작은 바람이라면 바람이다.

예전에 이보다도 훨씬 규모가 작을 때 그걸 한 번 바꿔보겠다고 대장급들을 불러 모은 적이 있었다. 결과는 성대하게 실패. 나를 애써 배려해줬던 마리나 어떻게든 내 결정을 좋은 의미로 바꿔주려고 고생했던 메이드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살 진 모르겠지만(아마 엄청 오래 살겠지) 두고두고 흑역사로 기록될 거다, 분명히.

 

불평이 많아서 얘기가 딴 데로 샜는데, 어쨌든 요지는 할 일이 많아졌다는 거다. 쉴 틈마저 사라질 정도로 말이다. 요즘엔 닥터가 계속 이런 식으로 하면 아예 식사에 수면제를 섞어서 강제로라도 쉬게 만들어 준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해대고 있었고, 아르망은 저번처럼 말려도 듣지 않을 거라 이미 체념하고 내가 쓰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관을 해줄 때마다 일부러 수액 병을 들고 온다거나, 내가 어딜 갈 때마다 누구 하나에게 꼭 들것을 들려서 보내는 걸 보면……. 분명 무언의 경고가 틀림없었다.

 

저번 겨울에 내가 쓰러졌을 땐 다들 엄청 불안해했고, 심지어 메이는 울기까지 했다고 들었다. 아니 차라리 화내기라도 하면 그나마 미안함이 좀 덜했을 텐데! 그래서 이번엔 그런 일이 없도록 나도 가급적 컨디션 조절을 했다. 잠도 꼬박꼬박 자고, 밥도 세끼 똑바로 챙겨 먹고. 식사야 뭐 소완이 항상 맛으로든 영양으로든 최상급으로 챙겨주니 그쪽은 걱정할 일이 없었다.

 

문제는 잠인데……., 솔직히 다른 애들과 어울리는 건 그, 휴식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정신적인 휴식은 맞는데……. 내일을 생각 안 하는 책임 없는 쾌락이랄까……. 할 때는 기분 좋은데 하고 나서는 내일이 걱정되는 그런……. 아무튼 잠이 모자라다.

 

그러니까 좀, 다들 나 잘 때는 내버려 달라고…….


***


각하.”

…….”

각하!”

…….”

, 서방님?”

으어으응?”

 

잠이 확 깨네.

 

마지막 꺼가 임팩트가 좀 크긴 했나보다. 나는 발딱 고개를 들고 애써 안 잔 척 했다. 내가 이러면 보통은 넘어가 줄 거다. 보통은…….

 

깜빡 졸았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지?”

아무 얘기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내 앞에 있는 흰 제복의 아리따운 숙녀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그녀는 태블릿을 조작하더니 내 앞으로 슥 내밀었다., 이건…….

 

저번에 저와 서약하실 때 말씀하셨죠? 업무 중에 세 번만 졸면 그날 업무는 모두 물리고 휴식을 취하시겠다고. 아까 하나 봐 드린 걸 넘어간다 치더라도 이번이 다섯 번째입니다. 어서 쉬세요.”

아니, 이것만 하고…….”

 

진짜 이것만 하면 된다! 그래야 내일이 편하다고! 난 재빨리 태블릿으로 손을 뻗었지만 아무래도 순발력으론 현역 바이오로이드들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하물며 그게 내 앞에 있는 무적의 용쯤 된다면, 아마 나는 브라우니 정도로 보이지 않을까? 대충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잠깐만 줘 봐!”

안 됩니다.”

 

하지만 용은 별 힘도 안 들이면서 내 손을 피하더니(솔직히 오기로 뺏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태블릿을 치마 뒤편에 슥 하고 밀어 넣었다., 이건 유미가 가끔 보여줬던 드라마에서 여직원들이 하는이 아니고, 과연 거기까지 간다면 끌어안지 않는 이상 빼낼 도리가 없었다.

 

나는 양손을 든 채 엉거주춤 눈앞의 숙녀만 바라봤다. 잠시 우리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진정 제가 서방님 앞에서 무릎 꿇고 눈물이라도 흘려야겠습니까? 절 걱정시키셔야지만 속이 시원하십니까? 아니면 저번처럼 다른 분들까지 대동해 와서 또 억지로 침대에 눕혀 드릴까요?”

.”

 

나왔다. 용의 필살기. 저번에 용이 합류한 직후 조금 현기증 좀 났다고 한바탕 소동을 벌인 뒤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저 말을 들어왔다. 하필 용의 앞에서 쓰러아니 비틀대서, 용이 직접 닥터에게 데려다줬고, 그날부터 간호 겸 관리감독 겸 여러 가지 기타 등등으로 용이 내 부관을 전담하게 됐다. 내가 너도 지휘관 급이니까 엄청 바쁘지 않냐고 가냘픈 저항을 시도해봤지만…….

 

[남에게 신경 쓸 정신이 있다면 먼저 자신부터 챙기는 게 어떻겠소?]

 

, 깔끔하게 무시당하고 얌전히 간호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까워졌던 게 계기가 돼서 서로 얘기도 좀 많이 했고, 부관 업무도 전담하다보니 자연스레 같이 있는 시간도 많아져서……어흠. 뭐 서약까지 했다는 거다. 허리에 손을 얻는 용의 왼손 약지엔 조그마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나랑 단둘이 있을 때만은 꼭 반지를 끼는 그녀였다.

 

지금 몇 시나 됐어?”

새벽 두 시 조금 안 됐습니다. 곧 불침번 교대 시간이니 누구 마주치기 싫으시거든 빨리 일어나십시오.”

뭐 어때서 그래. 마주치면 수고했다고 한 마디 해줄 수도 있지.”

서방님,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사령관은 늘 굳건한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사석에서 아무리 수하들과 친하게 지내셔도 말입니다. 서방님은 여기 모두에게 안식처이자 도피처이고, 절대자면서 곧 신이십니다. 그런 서방님이 업무에 치여 비틀대는 모습을 수하들에게 들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수하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 비밀로 해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명령을 내리신다면야 누구든 입을 닫을 겁니다. 하지만 서방님, 그러실 수 있습니까?”

…….”

 

용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용은 쓴웃음을 짓더니 제복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뺨을 닦아줬다. 단지 그랬을 뿐인데, 단아한 그 모습이 순간 너무 예쁘게 보여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바로 그러한 점이 서방님의 강점이자 약점입니다. 아직 완급이 익숙하지 못하신 것뿐이지요. 제가 천천히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용은 손수건을 소중히 접더니 이번엔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멍하니 끌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서방님이 서방님의 역할에 충실하시듯, 저도 아내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니까요. 그러니 오늘 밤만큼은 제 어리광을 들어주셨음 합니다.”

……. 뭔데?”

마침 조금 전에 오르카가 부상했습니다. 잠깐 갑판 위로 나가는 것 정도는 되겠죠., 밤바람이 시원할 겁니다. 요 며칠 간은 날씨도 좋고……. 간단히 목욕이라도 하시고 잠깐 갑판에서 별이라도 구경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용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아하, 그러니까 데이트 말이지. 과연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거절하기가 힘들어진다. 내가 모두를 위해 애를 쓰듯, 용은 그 이상으로 더 많은 일들을 처리하며 내 부관까지 해주고 있으니까.

 

솔직히 용이 부관을 안 해줬다면 아마 난 지쳐서 축 늘어진 해파리처럼 골골거렸을 것이다. 콘스탄챠나 아르망도 부관 업무를 잘 해주지만 그건 문자 그대로 보조를 잘 해주는 거고, 아무래도 용이 해주는 것처럼 해주진 못한다. 보는 시각이 다를 테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렇게 열심히 도와주는 우리 부인이 어리광을 부리는데, 내가 보답을 안 해주면 안 되겠지. 난 업무 내용은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용의 손을 꼭 잡으며 빙그레 웃어줬다.

 

정말 못 당하겠단 말이야. 방금 전까진 불침번 교대니 뭐니 하면서 들키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말했으면서.”

씻는 시간에 갑판으로 나가는 경로까지 모두 계산해놨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용 역시 가볍게 내 미소에 답하며 말했다. “대신 씻는 시간이 좀 촉박합니다. 하지만……. 제가 서방님을 씻겨 드리면 전혀 문제없을 겁니다.”

.”

 

난 따로 씻는 줄 알았는데? 내가 당황하기도 전에 용은 내 팔에 매달리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슬쩍 보니까 귀까지 빨개져 있다. 그런 주제에 날 끄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척척척 나를 끌고 함장실을 나왔다.

 

, 가시죠. 지금쯤이면 입욕제가 알맞게 녹아 있을 겁니다.”

이미 다 계획하고 온 거였구나.”

당연합니다. 저는 당신의 부관이고, 아내이기도 하니까요. 아내로서, 서방님의 건강을 챙기는 건 당연한 의무입니다…….”

 

마지막엔 목소리가 거의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가늘었지만 그래도 자기 할 말은 마지막까지 다 했다. 정말 단둘이 있을 땐 태도가 너무 사근사근해서 이럴 때마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게다가 머리카락에서 좋은 향기까지 나니 뭔가 속에서 불끈불끈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우리 아내 분은 너무 귀엽단 말이야. 무적의 용이 아니라 귀여운 용이라고 부르고 싶다. 씻으면서 한번 해봐야겠다. 벌써부터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괜찮다.

 

내 앞에서는, 지휘관의 모습 말고도 다른 모습들도 많이 보여줬음 한다. 다른 애들에게도 이 귀여운 숙녀의 모습을 자랑하고 싶지만, 일단 오늘 밤은 참기로 하자.

 

이런 사랑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아직까지는 나만의 자랑스러운 특권이니 말이다.


***

 

후우…….”

 

과연 용이 말한 대로, 갑판 위에선 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고 있었다. 나는 용의 무릎을 전부 차지한다는 굉장한 사치를 부리며 축 늘어졌다. 뭐가 그리 재밌기라도 한 모양인지 용은 내 머리카락이며 볼을 연신 만지고 있었다.

 

좀 피로가 풀리십니까?”

으응……. 진짜 좌아악 늘어지는 느낌이네……. 이대로 잠들어버릴 것 같아.”

잠깐 주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제가 깨워드리죠.”

거짓말……. 아침 될 때까지 안 깨울 거면서…….”

제가 서방님께 어떻게 감히 그럴까요.”

 

짐짓 놀라는 말투 속에서 악동처럼 장난스러운 웃음이 새어나오는 듯했다. 하긴 이런 실랑이도 매번 있었지 아마. 늘 뻔한 결말이었다. 난 침대 속에서 용의 품에 안겨 아침을 맞이할 테고 내가 왜 안 깨웠냐는 책망에 용은 늘 그렇듯 적당히 맞춰 주며 넘어갈 터였다.

 

, 뻔히 알고서도 속아 넘어가면서 그걸 즐기는 나도 어지간히 용에게 빠져 있다는 뜻이겠지만.

 

서방님, 주무시기 전에 잠깐만 하늘을 봐 주시겠습니까?”

 

그러면서 용은 내 양 뺨을 살그머니 잡았다. 기분 좋은 감촉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을 뜨니 하늘은 별의 바다였다.

 

아스라이 파도치는 소리와 얕게 들려오는 바람 소리, 저 먼 하늘 위에는 보석처럼 찬란한 별빛. 그리고 두 뺨에 느껴지는 용의 부드러운 손길과 온기. 여름밤의 환상에 나는 넋을 잃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볼 뿐이었다.

 

어떠십니까?”

정말 예쁘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용은 내게 이 하늘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게 자랑스럽기라도 한 듯 기분 좋게 웃었다. 평소와는 다른, 하늘하늘한 잠옷 위로 얇은 가디건을 걸친 그녀의 모습은 청초하고 단아했다. 하얀 가디건 위로 가지런히 묶여 늘어진 머리카락은 밤을 펼쳐 놓은 것만 같았다. 마치 밤하늘의 별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예뻐, .”

 

그래서 이번에도 솔직히 말했다.

 

저 말고 하늘을 더 봐주셨으면 합니다만…….”

하늘도 네 머리카락처럼 아름다워.”

 

세상에, 이건 하르페이아 따라 봤던 200년 전 영화에서도 할까말까한 대사다. 분명 질책당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용은 잔잔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오늘따라 낯간지러운 말씀을 많이 하시는군요.” 용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 모습이 마음에 드셔서 다행입니다. 제 몸도그리고 제 마음도 전부 당신의 것이니까요.”

난 그냥 네가 좋은 거야. 굳이 이런 자리에서까지 차림새 같은 거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그러니까 더 예쁘게 보이고 싶은 거랍니다. 지휘하실 때의 그 총명함을 여심에 1할이라도 신경 써주신다면 다들 고생은 안 할 텐데…….”

나도 어지간하면 부탁 같은 건 다 들어주고 싶긴 하지만 가끔은 부담이 너무 심하단 말야……. 그런 거 다 들어줬다간 오르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난장판이 될 걸. 일은 일대로 안 되고.”

 

용의 핀잔 아닌 핀잔에 자연스레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저번에 의도치 않게 스틸라인(아무래도 얘네가 제일 많으니까) 애들의 대화를 엿듣는 모양새가 됐었는데, 세상에 나 같은 게 뭐라고 나 한번 보겠다고 별별 암거래까지 횡행하는 걸 보고 한동안 혼이 나간 적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펜리르 같은 애들은 유혹이고 뭐고 한 네 단계쯤 건너뛰고 다 벗고 함장실에 뛰어 들어오질 않나, 소완은 내 식사에 최음제를 타려다 실패하질 않나, 레오나는 발키리가 나랑 먼저 잤다고 으르렁대다가 저번에 결국 둘이 같이…….

 

아니 뭐 여하튼 그렇게 애들 사이에 껴서 피곤할 거면 차라리 일로 피곤한 게 훨씬 낫다. 적어도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하면 줄기는 하니까. 그런데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의, 특히나 지휘관급처럼 자존심 강한 애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건 해결 방법도 없고 피만 마르는 거 같다.

 

누구나 서방님의 총애를 받고 싶어 하니까요.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호감을 가지도록 만들어졌으니까요.”

그건 좀…….”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분명히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서방님.” 용이 내 입술에 재빨리 검지를 대며 말했다. “그러한 생각이 저희들의 유전자 정보에 박혀 있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만, 저나 다른 분들이 서방님을 생각하는 감정은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입니다.”

 

용은 내 머리를 다시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서방님의 전투 감각이나 전장 파악이 누구보다 훌륭하신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서방님은 뛰어난 지휘관은 아니십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요. 전장에서 지휘관은 적을 쳐부수는 일뿐만 아니라때로는 움직이지 못하는 아군을 쏴 죽여야 하는 결단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분명히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부하를 사지로 몰아넣어야 할 때도 있고요. 하지만 서방님은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래, 난 욕심쟁이지. 목표도 달성하고, 아무도 안 죽게 할 거야.”

 

처음 콘스탄챠와 그리폰이 날 발견했을 때가 떠올랐다. 아무 것도 모를 때, 그녀들은 날 구출해줬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부족한 날 믿고 따라와 주고 있다. 이들 모두, 그리고 여기 있는 무적의 용도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 내 가족이자, 내가 지켜야 하는 이들이자, 내 생명의 은인들이다.

 

난 이들을 잃는 게 너무나도 두렵다.

 

, 그게 서방님이 이전의 인간 분들과는 다른 점입니다. 인간 분들은 저희들에게 죽는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부서진다라고들 하죠. 아무리 물건이 소중하다 해도 물건은 물건일 뿐, 동등한 인격체 따위는 될 수 없다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전 너무나도 많이 봐 왔습니다. 하지만 서방님은 저희를 아껴 주십니다. 쓸모 있는 물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서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제가 처음 서방님을 뵈었을 때 어떤 생각을 가졌는 줄 아십니까?”

…….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을 거 같은데…….”


무적의 용은 멸망 이전의 인간들을 알고 있으니까. 아마 나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문자 그대로 인류 최후의 인간일 뿐이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저희들에게 필요한 건 인간이라는 희망이지, 지휘나 업무를 할 인원이 부족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어디 가장 안전한 밀실에서 인생을 만끽하고 계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매일 밤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을 끼고 놀면서요.”

아니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내가 끼고 논다기보단 끼워진다는……. 아니, 그래. 계속해 봐.”

함 내에 예쁘게 차려 입은 더치걸도도 보이길래 그 말로만 듣던 테마파크 C구역 손님이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나 진짜 인식이 안 좋았었구나…….”

그리고 덴세츠 사나 코헤이 교단 쪽의 바이오로이드들도 보여서 사상 쪽으로도 이상한 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고요.”

나 진짜 인식이 안 좋았었구나!”

 

가슴이 막 후벼 파지는 것 같이 아파왔다. 하긴 용은 멸망 이전부터 살아 있었으니까 더치걸을 보면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덴세츠 사니 코헤이 교단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멸망 전에 있던 사이비들이라 하니 그것도 이해는 가고. 물론 우리 애들이 사상적으로 이상하다거나 그런 건 전혀 없다. 가끔아니 좀 자주 폐하니 구원자니 반려니 하면서 반쯤 빨개벗고 쳐들어오는 게 문제긴 하지만.

 

제발 아르망이 그런 건 안 배웠으면 좋겠다. 애들 정서 교육이 너무 안 좋은 거 같아.

 

하지만 지내보면서 점차 느끼게 됐습니다. 이들이 단순한 명령이나 의무 따위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서방님께서 이들을 진정으로 소중히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도 역시 느끼게 됐습니다. 인류 부흥이다 뭐다, 솔직히 아미나라는 분께서 제게 남긴 마지막 사명인 줄로만 알았습니다만…….”

 

용은 허리를 굽히더니,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줬다.

 

그 때문에 서방님을 만났다면 그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저 역시,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서방님께선 제 삶의 지표를 바꿔주신 분이시니까요.”

하하, 너무 거창한 거 아냐? 내가 배우는 입장인걸.”

그런 사소한 것 따위가 아닙니다. 예전의 저였다면 이런 밤하늘을 보고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 겁니다. 그게 군사학적으로 어떻게 유용할지에 대해서만 생각을 했겠죠. 하지만……. , 서방님. 제 손끝 쪽으로 있는 별을 봐주십시오.”

 

그녀의 손끝에 걸린 하늘엔 여전히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용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저기가 알타이르(견우성), 그리고 저기가 베가(직녀성). 그 위로 있는 게 백조자리입니다. 백조 머리 쪽에 빛나는 별이 데네브, 그리고 이 셋을 이은 게 여름의 대삼각형입니다. 별자리들의 지표라 할 수 있죠.”

 

바람결처럼 속삭이는 목소리. 미풍에 검은 머리카락이 밤물결처럼 일렁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를 바라봤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장군이나 지휘관의 강인한 눈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하게 이 시간을 즐기는 사람의 눈이었다.

 

저기 흐르는 별무리가 은하수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헤라클레스가 헤라의 젖을 너무 세게 빠는 바람에 흐른 젖이 저 은하수가 되었다고 하죠. 그래서 영어로는 은하수를 밀키 웨이, 즉 젖의 길이라고도 부릅니다.”

엄청 자세히 아네. 난 지금까지 그냥 별들이 예쁘다고만 생각했어.”

기술이 발달했다곤 하지만 별자리를 관측하는 능력은 항해의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요. 단순히 주입된 지식에 불과했던 이 기억이, 이제 서방님 덕에 제 눈에도 저 별들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저 별들에 얽힌 이야기들도 단순히 기록 정도로밖에 치부하지 않았습니다만, 이제는 제게 하나하나의 추억입니다. 후후, 방금 말한 헤라의 젖도 조금 전 욕실처럼…….”

아아아아니 그건 분위기 때문에 그랬던 거고. , 싫었어?”

아뇨, 그렇게 느긋하게 이어져 있을 수 있어서 굉장히 좋았습니다.”

 

뭐랄까 그게……. 뭐 씻겨 준다는 건 그런 의미긴 하지, . 이제 안 건데 용은 격렬한 쪽보다는 그렇게 느긋하게 오랫동안 하는 걸 더 선호하는 듯하다.

 

아니 나는 왜 이럴 때도 이딴 걸 생각하고 있는 거야.

 

실은 제가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게 하나 더 있는데, 서방님께서 같이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 지금?”

. 아니 지금 아니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용이 부드럽게 말했지만 난 조금 긴장했다. 이렇게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지금 아니면 어렵다라는 말의 무게는 꽤 무겁다. 하지만 용은 그런 내 심각한 표정에 미안한 듯 일어서며 내 손을 잡아끌더니, 자신의 허리에 둘렀다.

 

?”

왈츠라는 겁니다. 밤하늘 아래에서, 이렇게 서방님과 꼭 이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난 춤의 자도 몰랐지만 막상 하는 건 용의 가는 허리에 손 두른 채 빙빙 도는 것뿐이라 어려울 건 없었다. 음악이 없었지만,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 곳에서 느리게 도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좀 추워졌지만 괜찮았다. 그럴수록 용을 더 꼭 끌어안으면 됐으니까.

 

가슴이 밀착되어 있는 탓에 그녀의 고동이 아주 잘 느껴졌다. 얼굴을 사르르 붉힌 채 작은북 치듯 두근거리는 용의 모습은 내 빈약한 어휘력이 미안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

 

그래서, 나도 모르게 가만히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녀를 안기 전 전희로서가 아닌 그저 사랑스러울 뿐인 입맞춤. 단지 입을 맞추는 것뿐인데도 입술을 타고 느긋한 안락함이 등골이 찌르르 울리는 듯했다. 한 자리에서 느리게 돌며, 우리는 그렇게 몇 번이나 새 모이를 쪼듯 입을 맞췄다.

 

오늘 멋진 선물을 줘서 고마워.”

아까도 말씀드렸듯, 서방님을 챙기는 건 아내로서 당연한 의무니까요. 하지만 실은 제 사심도 많이 섞여 있었답니다.”

이런 사심이라면 얼마든지 섞여도 좋을 것 같아.”

기꺼이 참고하겠습니다. 아쉽지만……. 이제 그만 내려가시죠. 이제 슬슬 잠항해야 할 때이니.”

 

용이 손을 끄니까 그제야 늦은 졸음이 밀려왔다. 이거 오랜만에 늘어지게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좋은 기분이 들었다. 한쪽 팔에 매달리는 사랑스런 아내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오르카의 안으로 들어갔다.

 

갑판에서 그녀가 보여준, 짧고도 달콤한 시간. 이제 계단을 다 내려가면 다시 이들을 이끄는 자리에 서야겠지. 하지만 괜찮다. 용과……. 그리고 날 믿어주는 모두가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이 평화로운 밤이 조금 더 지속되길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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걍 올려봤어유

무용이 이뻐요 많이 이뻐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