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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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버릴 거야 이 해충!! 네가.. 주인님께 네가 감히!!!” 


팔이 꺾이고 바닥에 처박혀 제압당한 리제의 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칸이 사령관의 한쪽 발을 부숴버린 사건으로 오르카는 어수선했다. 수많은 바이오로이들이 입을 모아 사령관에게 위해를 가한 칸의 단죄를 외쳤으며 특히 리제는 무기를 들고 칸을 죽이려 홀로 덤벼들었다가 제압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라비아타의 주관으로 열린 청문회에서 탈론페더가 제출한 두 사람의 대화를 도청한 녹음본으로 인해 여론은 뒤집혔다.


사령관은 오르카 대원들의 철저한 보호 속에서도 그 만용을 잃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를 오르카에서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칸의 폭력은 다소 과하지만 언젠가는 필요했던 조치였다고 지휘관들은 보기 드물게 의견을 통일했다.


여전히 칸을 향하는 노기 서린 눈총은 남아있었지만 라비아타는 칸에게 형식적인 징계만 내렸다.


사령관을 겹겹이 에워싼 보호 속에서, 사령관을 보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인님! 왜 그러세요!?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문 너머로 콘스탄챠가 다급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꺼져 미친년들아! 나한테 다가오지 마!”


자유롭게 걸을 수 없게 된 사령관은 함장실의 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에 들어갔다. 

저 미쳐버린 괴물들을 더 이상 꼴도 보기 싫었다. 저년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


벽에 기대어 무너지듯 주저앉은 사령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돼버린 거지?’


자신은 오르카의 대표로서 언제나 오르카의 대원들을 위해 헌신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 스스로의 신념과 『사명』을 지켜왔다. 


그러나 지금 그런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엄중한 감시와 자유의 박탈, 그리고 신체적 고통이다. 저것들이 자신과의 유대를 원수로 갚았다. 


크나큰 배신감을 느끼며 사령관은 머리를 싸매고 웅크렸다. 바이오로이드들이 대체 자신한테 왜 이러는 것인가? 

살아남아 이런 꼴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그 데이비스 해협 전투에서 명예롭게 전사했어야 했다고 사령관은 생각했다.



똑똑.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 주세요 주인님!”


“사령관님 문 여세요!”


주인님, 사령관님, 사장님, 폐하, 각하, 오빠. 점점 더 강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사령관을 부르는 저마다 다른 호칭. 어느새 복도를 가득 메운 수많은 목소리가 그를 애타게 불렀다. 


“씨발! 전부 꺼지라 했지!!” 


-쾅! 


문을 강하게 때리는 소리와 진동이 문을 타고 전해졌다. 


“문 열어 사령관.”


레오나의 목소리. 욕지거리를 내뱉던 사령관은 그녀의 고압적인 기세에 눌려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콰직! 이내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LRL의 도끼에 의해 도어락이 박살 나고 문이 열렸다. 


“으아아악!”


사령관이 고함을 지르며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며 그녀들을 위협했으나 그것도 잠시, 레오나에게 팔이 잡혀 제압당했다. 


“이 새끼들! 전부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쯧.”


레오나가 혀를 차면서 쓰러진 사령관의 목덜미를 잡고 번쩍 일으켜 세우자 닥터가 왠 바퀴가 달린 의자를 방으로 끌고 들어왔다. 

  

아주 먼 옛날, 오리진더스트와 임플란트 시술이 발달하기 전 다리가 불편한 인간들이 쓰던 기구. 4륜 바퀴에 심플한 모터가 달린 전동 휠체어였다


레오나는 사령관을 질질 끌고 가 그 휠체어에 앉혔다.


“자, 사령관. 이제 됐지?” 


“선물이야 오빠. 앞으론 그게 필요할 테니.”


사령관은 발이 박살 난 자신의 발악을 어린아이의 시시한 투정 정도로 취급하는 레오나에게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닥터가 만들어준 전동 휠체어 의존하는 신세가 된 사령관은 무력했다. 


오르카의 항해와 작전통제, 부대 운용은 모두 라비아타를 필두로 한 지휘관들이 분담했으며 사령관 앞으로는 단 한 장의 결재서류도 올라오지 않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그는 완전히 허수아비 바지사장으로 전락했다.


그나마 24시간 내내 이어지던 사령관에 대한 철통 감시가 완화되어 혼자만의 시간이 생긴 건 위안이 되었다.

식사 시간과 수면시간만 지킨다면 바이오로이드들은 사령관의 일과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령관을 감시하는 시선이 간간히 느껴지긴 했지만, 적어도 이전처럼 노골적으로 그를 스토킹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령관이 지나가면 자리를 피해 주는 인원들도 있었다.

휠체어 없이 돌아다니지 못하는 신세가 됐으니 그 이상의 감시는 불필요하다고 여긴 건지, 이번 사건이 그녀들이 생각하기에도 지나쳤다 생각해 미안함의 표시로 한발 물러 서준 건지는 알 수 없다. 


사령관에겐 다행일지 불행일지, 한동안 적이 출몰하지 않아 전투가 없었기에 그의 지휘가 필요한 순간은 전혀 없었다.

오랜 평화가 지속되자 용은 최소한의 호위함만 남긴 채 함대를 이끌고 철수, 본래의 임무로 복귀했다.


그럼에도 사령관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지휘관급 부하(‘이제 이것들을 부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령관은 생각했다.)들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스스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은 사령관을 불안감과 깊은 자괴감의 늪에 잠기게 했다.



“...그래서 방공포 실사격 훈련은 다음 주로 앞당겼고 나머지는 원래 예정대로, 이상. 질문 있어?” 


함장실의 책상에 거만하게 걸터앉은 레오나가 오전 회의 내용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사령관이 없는 자리에서 진행된, 더 이상 그가 간섭할 수 없는 회의의 내용을 사령관은 그저 레오나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을 뿐이었다.


“아, 그리고 에이다가 당신 안부를 묻던데 전할 말 있어?”


“에이다와 통신하게 해줘.”


“안 되는 거 알지?” 


지휘관들은 에이다에게는 사령관이 요양 중이라고 둘러대고 사령관과 에이다의 통신을 막고 있었다. 에이다가 오르카의 내부상황을 안다면 어떻게든 사령관을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야속하게도 에이다는 아직도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아 맞다. 에이다가 그러는데 북쪽에서 펙스가 군대를 소집하고 있대. 규모가 크진 않아서 당장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경계는 해야겠지만.”   


“뭐라고!? 맙소사... 또 오메가가 움직이는 건가?” 


에이다가 관측한 바에 따르면, 지난번 철충을 유인해 오르카를 공격하려다 실패했던 오메가의 작전에서 오메가도 수많은 병력을 희생시켰다. 그녀 입장에서 도박을 걸었다가 어마어마한 판돈을 잃은 것이다. 

사령관은 아마 그 일로 인해 펙스 내에서 오메가의 입지도 다소 약해졌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오메가와 대면한 시간은 짧았지만, 사령관이 파악한 그녀는 그런 손해를 보고도 냉정히 있을 성격이 못 된다. 역시 지난번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태세를 재정비하며 눈에 불을 키고 오르카를 다시 찾아내려 하는 것이다. 







레오나의 속삭임에 사령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것도 고민할 필요 없어 어려운 건 내가 생각해줄 테니.

두려워할 필요 없어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당신은 그냥 나한테 의지하기만 하면 돼” 





‘바보 같은 소리!’


그러나 레오나가 함장실을 떠난 후 사령관은 홀로 마음을 다잡았다. 언제까지고 그녀들에게 모든 걸 맡겨둘 생각은 없다.


그에게는 숭고한 『사명』이 있다.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고 오메가의 펙스 회장 부활 계획을 저지하여 바이오로이드들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영토를 건설한다는 꿈이 있다. 


그리고 언젠가, 적당한 때가 되면 자신은 전투에서 명예롭게 전사하여 사라짐으로써 구 인류의 죄를 청산하고 바이오로이드들은 온전히 자유의 몸이된다.   


그것이 인류를 증오하게 된 그가 마지막 인간인 스스로에게 내리는 심판이자 스스로에게 부여한 존재 이유, 명예로운 『사명』이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부하들이 자신의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을 속박하려 들고 있다. 그는 이렇게 안락하고 굴욕적으로 보호받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 


현재 다시금 오르카를 노리고 있는 오메가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도 사령관은 지휘권을 되찾아야 한다.


사령관은 에이다와 요안나의 도움을 받기 위해 일단 오르카를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세레스티아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르카는 부대정비를 위해 간만에 괌으로 돌아와 정박했지만 역시 사령관에게 육지의 공기를 마시고 땅을 밟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사령관은 그저 대원들이 요정 마을과 배를 오가는 것을 먼발치에 지켜만 보고 있어야 했다. 


정오에 사령관은 식당에 고즈넉이 앉아 소완이 아우로라와 포티아를 부리며 분주히 일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부두의 하역장에서 오르카의 1종 창고까지 이어진 컨베이어벨트가 쉴 틈 없이 돌아간다. 


오르카는 요정 마을에 잔류한 주민들에게 각종 기계장비들을 지원해주고, 대신 요정 마을 주민들은 섬에서 생산된 각종 식자재를 공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트러블이 생겼다. 오르카로 식량을 옮기는 과정에 누군가 자꾸 중간에서 식량을 조금씩 훔치는 바람에 원래 받기로 한 것보다 적은 양이 들어온 것이다. 


오르카에서 자체적으로 조사를 해봤지만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고, 그 상황이 계속되자 요정 마을의 대표와 소완, 안드바리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나 라비아타와 요정 마을의 전 대표였던 세레스티아가 뜯어말리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결국 사령관의 명령으로 육지의 하역장에서 오르카 창문을 넘어 1종 창고까지 바로 이어지는 기나긴 컨베이어벨트가 임시로 설치되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사령관이 의견을 내고 레오나가 그것을 허가하는 형태였다. 


식량을 지상에서 요정 마을 대표와 안드바리의 검수를 거치는 즉시 미로같은 오르카의 통로를 거치지 않고 1종창고로 직통으로 올려보낸다는 심플한 아이디어 덕분에 식량 도둑은 자취를 감추었다.


“주인의 지혜에는 항상 탄복할 따름입니다.”


“그러게? 이렇게 단순한 아이디어가 효과를 보다니. 가끔은 나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거 같아.”


소완이 사령관에게 아부를 하자 사령관 옆자리에 앉은 레오나가 맞장구를 쳤다.


“레오나, 네가 칭찬해봤자 비꼬는걸로 밖엔 안 보인다.” 


“아니? 난 진심인걸? ...근데 결국 도둑은 누구였을까? 결국 그걸 못 잡았단 말이지~”   


“그나저나 안드바리는 더운데 고생하는구먼. 점심 다 되기 까진 좀 남은 거 같으니 난 밑에 안드바리나 도와주고 와야겠어.” 


“네. 때가 되면 소첩이 부르러 갈 터이니 다녀오십시오. 주인.”


그렇게 말하며 사령관은 휠체어를 조작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좋아! 자연스러웠다! 

이대로 자연스럽게 오르카 밖으로, 지상으로 내려가 탈출하면 된다. 




“...”


“...사령관. 뒤질래?” 


곧바로 레오나에게 목덜미를 잡혀 다시 끌려왔다. 





 ❒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사령관은 느려터진 전동 휠체어를 타고 오르카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인적이 드문 곳을 돌아다니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그는 조금이나마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루는 휠체어를 타고 유유히 수복실 근처를 지날 때였다. 



-짝! 


사람의 피부를 가격하는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 수복실을 들여다봤다.


“레오나 대장님! 제발…” 


-짜악! 


레오나가 어째서인지 피투성이가 된 리제의 멱살을 잡고 사정없이 따귀를 때리고 있었다. 리제는 이미 반쯤 의식을 잃은듯 했다.


옆에서 다프네가 레오나를 말리며 애원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요즘 그이가 겨우 얌전히 있는데!” 


-짝!


“감히 내 명령 씹고 이 꼴로 기어 들어와!? 그이 관심 끌어보려는 수작인 걸 내가 모를 거 같아!?” 


“넌!”


-짜악!


 “치료받을 자격도 없어! 그냥 죽어!” 


“레오나! 그만!” 


“사령관!?”


사령관의 외침에 레오나가 화들짝 놀라며 리제를 때리던 손을 멈췄다. 

아무리 이빨 빠진 허수아비라 해도 사령관에게 아직 이 정도 힘은 남아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다프네 상황을 설명해.”


“아, 네. 오늘 리제 언니가 다른 분들과 함께 다른 섬으로 탐사를 나갔는데…” 


다프네가 훌쩍거리며 이야기했다.

오늘 탐사대를 내보냈었던가. 사령관은 듣지도 못했었다.


“리제 언니가 요즘 주인님이 기운이 없어 보여서 주인님께 드릴 희귀한 꽃을 꺾는다고... 레오나 대장님의 명령을 어기고 위험구역에 들어갔다가 적과 마주치는 바람에 중상을 입었어요. 


근데 레오나 대장님이 언니를 치료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다프네. 어서 리제를 치료해라. 나를 위해 그 정도 『명령』은 들어줄 수 있지?” 


“네!” 


다프네가 서둘러 리제를 부축해 입원실로 데리고 들어가는 모슬을 사령관은 한숨을 쉬며 지켜봤다.


“주인님…” 


리제가 사령관을 부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 것 같다. 

사령관은 한 소리할 작정으로 레오나를 쏘아봤다가 레오나의 눈빛에 그만 굳어버렸다. 레오나는 사령관을 제지하진 않았지만 말없이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령관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


불침번 근무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원이 곤히 잠든 새벽. 


멀리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언제나처럼 밤샘작업을 하던 닥터는 문득 작은 패널을 들여다보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요새 좀 얌전히 지낸다 싶더니 결국 이 모양인가…” 


닥터는 궁시렁 거리면서 호출기로 컴패니언 자매들을 깨웠다. 


“컴패니언 언니들? E동 11번 복도로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곧 오빠가 갈거니까 좀 잡아줘.”


위치추적기가 설치된 휠체어를 나타내는 불빛이 함장실을 나와 구불구불한 오르카의 통로를 이동하고 있다. 

한때 오르카 부대 운용을 총괄했던 그라면 불침번에게 들키지 않고 이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스트레스 받을까 봐 감시를 많이 풀어줬더니 사령관이 탈출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요새 그가 휠체어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싶었는데 탈출 루트를 물색하고 있었던건가. 


생각 없이 감시를 완화한 것이 아니었다.

닥터는 이를 이미 예상하고 휠체어에 위치 추적기를 심어놨었다. 아니, 휠체어 자체가 위치 추적기라고 봐도 된다.


설사 사령관이 위치 추적기의 존재를 눈치챈다 해도 제거는 불가능하다. 위치 추적기를 떼어내 교란하는 트릭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잠시 후, 리리스의 연락에 닥터는 경악했다. 


사령관은 없고 휠체어만 홀로 굴러간다고 리리스가 보고했다.

옆에서 귀신이라며 무서워하는 하치코의 울음소리도 들려온다. 


“아뿔싸!” 


    




“하하하하하! 요놈들아 이건 몰랐지롱~” 


사령관은 힘겹게 걸음을 내딛으며 조소했다. 그는 조잡하지만 튼튼하게 만든 목발을 짚고서 느리지만 쉬지 않고 전진했다. 발이 성치 않지만 『사명』을 향한 그의 정신력으로 그는 걸을 수 있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탈출 루트를 물색하기 위해 돌아다녔던 것이 아니었다. 탈출 루트는 이미 따로 정해놨다. 


휠체어에 위치 추적기를 심어놨다는 건 진작 눈치챘다. 닥터와 라비아타는 그 위치 추적기를 믿고 마음을 놓고 있는 걸 테지. 


최근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닌 이유는 휠체어가 혼자서 움직일 수 있도록 상대 좌표를 입력시키는 과정이었다. 


절대 좌표를 자동으로 기억해서 따라가는 자동운행 기능 따위는 탑재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전진해서 어디로 방향을 돌리고 얼마나 다시 전진하는지를 전부 기억해 조작계에 일일이 입력해두는 방식으로 휠체어가 혼자서 정해놓은 길을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이 휠체어는 미끼. 

바이오로이드들이 홀로 움직이는 유령 휠체어를 뒤쫓는 동안 사령관 자신은 따로 움직인다.  


탈출 루트는 지상과 1종 창고를 연결하는 컨베이어 벨트. 


그동안 요정 마을에서 공급되는 식량을 빼돌려 숨긴 범인은 사령관이었다.


한때 오르카 전체를 관리했던 자로서 물자 유통 루트와 미로 같은 오르카의 구조를 모두 꿰고 있는 사령관은 손쉽게 바이오로이드들의 눈을 속여 식량을 조금씩 훔칠 수 있었다. 


보급에 차질을 생기게 함으로써 갈등을 만들고, 자신은 그 해결책으로서 이 무식하게 긴 컨베이어 벨트의 설치를 제안한다. 


레오나가 자신의 제안을 허가해줄지가 도박이었지만, 다행히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고 계획대로 되었다. 


닥터와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빈 휠체어에 신경 쓰는 동안 사령관은 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내려가 지상으로 탈출한다는 계획이다. 


“걸렸구나! 이것이 내 『도주경로』다!!! 네 년들은 이 사령관과의 지혜 대결에서 진 거야!”


통쾌하게 웃으며 내려온 사령관은 마침내 땅을 밟았다. 


너무 오랫동안 배에 갇혀있던 사령관은 육지 멀미를 느낄 것만 같았다.   


자유! 육지의 포근함과 시원한 바깥공기에 코끝이 찡해온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무릎을 꿇고 땅에 입 맞추던 사령관은 다시 목발에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요정 마을 잔류인원들이 배에 오르거나 닥터가 요정 마을로 내려간 적은 없다. 즉, 요정 마을 주민들은 닥터의 모듈 조정을 받지 않았으며 그녀들에겐 여전히 사령관의 명령이 유효하다.


그녀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기고 에이다와 요안나에게 연락하여 그녀들과 합류할 것이다. 어쩌면 보트를 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요안나가 이끄는 개척단은 비록 지금은 2선급으로 물러나거나 비전투요원으로 전환된 인원들이 다수지만, 그녀들은 대부분 한때는 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함께 싸운 적 있는 초창기 멤버들이다. 충분히 사령관을 보호할 수 있다. 


또한 에이다에게도 요청하여 AGS 부대를 지원 받을 생각이다.


그렇게 에이다와 요안나의 도움으로 사령관의 자신의 안전과 자유가 확보된 다음, 오르카의 대원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하고 설득할 것이다. 

일이 잘 풀려 사령관의 권한을 되찾는다면 그는 다시 한번 오르카를 호령하며 오르카 대원들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사명』을 위해 한 몸 바쳐 싸울 수 있게 된다. 



사령관은 목발을 짚고 요정 마을을 향해 아프지만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레… 레오나!? 네가 어떻게!?” 


“유후~♪”


어디선가 나타난 레오나와 발할라 대원들의 인영에 사령관은 그만 정신을 잃을 뻔했다. 

“있잖아 사령관~ 나 처음부터 사령관이 무슨 생각인지 눈치채고 있었다?”


레오나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당신 얼마 전에 풀 죽어서 지내는 모습 참 보기 안쓰러웠거든?” 


발할라 대원들이 달려와 사령관을 포위했다.


최근에 탈출계획 세운다고 의욕 불태우는 당신 모습 참 귀여웠어. 내가 눈치채고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레오나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돼… 난 대체…” 


망연자실한 사령관이 풀썩 주저앉자 레오나가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자, 장난은 그만하면 됐지? 늦었으니까 이만 자러 들어가자? 응?” 


“너희들은 미쳤어! 이 또라이들! 나… 난 그냥 떠나고 싶을 뿐이야! 날 놔줘!!!” 


사령관이 욕을 하며 레오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자 레오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짝!


레오나가 사령관의 따귀를 때렸다.


“...좋아 실컷 소리 질러봐!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고작일 테니. 하지만 충고하는데, 그 이상 나를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발키리와 베라가 사령관에게 다가갔다.

사령관은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언제까지 갇혀 살아야 하는 거지?! 나는! 나느으은!” 


“내게 다가오지 말란 말이다아아아아앗!!!”


사령관의 절규가 열대의 밤공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사령관의 첫번째 오르카 탈출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해충들이 주인님께 무슨 짓을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