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 뽀끄루와 봉봉 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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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의 도주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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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유령들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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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 오르카 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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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플레이어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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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주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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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아닌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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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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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탈란테가 하늘을 향해 창을 들어 올렸다. 창끝의 드높은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푸른 번개가 한 마리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땅을 굽어보았다. 천둥을 입에 물고 으르렁거리던 뱀이 대지를 향해 빠르게 떨어졌다.


  공기가 파열하는 소리와 함께 뱀이 아탈란테의 창에 내리꽂혔다. 푸른 번개를 휘감은 창을 들어 올린 아탈란테가 눈앞의 거인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능히 하늘을 쥐는 자. 깊은 바다의 지배자. 희망을 삼키는 자. 


  심해의 공포, 다곤.


  뭐 그런 설정이었던 것 같다. 흐레스벨그가 신나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걔는 모모만 파는 줄 알았는데 이것저것 건드리는 잡식이었다. 주식이 밥이라고 우리가 반찬 없이 밥만 먹고 사는 건 아니라나 뭐라나.


  아무튼 기간테스의, 아니 다곤의 흉부 장갑이 박살 나고 유일한 약점이라는 심장이 드러났다. 티에치엔과 나, 포티아가 가슴만 줄기차게 두들겨 흉부 장갑을 부순 결실이었다.


  아탈란테가 푸른 불꽃이 튀어 오르는 창을 다곤의 심장을 향해 힘껏 던졌다. 


  "내리쳐라! 천신의 창, 아스트라페!"


  번개의 레일건이 빛의 속도로 날아가 심장을 꿰뚫었고, 심해의 공포가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

  "으햐! 이제 좀 살겠네!"


  티에치엔이 바닥에 드러누우며 탄식을 내뱉었다. 다른 사람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 앉았다.


  "고생 많았어, 사령관! 네리네리가 마실 걸 가져올게!"


  그런 우리를 보며 네레이드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티에치엔의 옆에 드러누운 나는 고개를 들 힘도 없어 팔만 들어 까딱까딱 흔들었다.


  알바트로스를 쓰러뜨린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메인의 곁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얼굴이 달린 거미가 쉴 새 없이 튀어나와 우리를 반겨주었던 것은 덤이다. 간신히 메인의 곁에 돌아가고 조금 쉬기 위해 바닥에 드러누운 내게 메인이 다가와 말했다. 곧 하치코와 켈베로스가 돌아올 것이라고.


  그 두 녀석이 돌아온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쉴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다음 목적지인 베니체로 향했다. 또 죽어서 죄송하다는 포티아의 눈물과 함께. 베니체에 도착하자마자 베니체의 왕인 용 앞에 끌려간 우리는 심해의 악몽을 쓰러뜨려 달라는 말과 함께 쉴 틈도 없이 바로 보스전에 돌입했다.


  심장을 부수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는 귀찮은 조건과 심해의 괴물에게 불꽃은 통하지 않는다는, 단순히 나의 착각이겠지만 다분히 포티아를 저격하는 듯한 조건 앞에 우리가 내린 결론은 나와 티에치엔이 흉부 장갑을 깨부수고 수속성 몬스터에게 추가 대미지가 들어가는 번개 속성 공격인 아탈란테의 공격으로 마무리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참고로 속성 어쩌고 하는 설정은 용이 알려줬다. 


  그렇게 보스를 쓰러뜨리고 용의 궁전으로 돌아온 우리는 현재 탈진으로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가상 현실이라 육체의 피로는 없지만 쉬지 않고 지역 세 개를 돌파한 우리의 정신적 피로는 상당했다. 차를 가지고 돌아온 네레이드가 본 것은 한 명도 빠짐없이 바닥을 뒹굴며 곯아떨어진 우리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부스스 눈을 떴다. 서쪽 지평선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처럼 쭉 잘 수 있으면 좋으련만 철야에 익숙해진 몸은 이 정도로는 쉽게 잠들게 허락해주지 않는다. 조용히 방을 빠져나와 적막한 복도를 걷고 있으니 창밖이 소란스럽다. 어둑해지는 골목을 밝히는 샛노란 전등과 시끌벅적한 사람들. 즐거운 노래가 거리를 가득 채우고 가면을 쓴 사람들이 해맑게 웃으며 거리를 누볐다.


  "축제인가?"


  "원래 이 시기에 열리는 축제라고 하오. 마왕의 수하로 열리지 못한 축제가 그대 덕에 열리는 것이지."


  어두운 복도의 그림자 사이로 푸른 머리칼의 여성이 걸어 나왔다. 화사한, 어딘가 동양풍의 느낌이 묻어나는 드레스를 걸친 용이 살포시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휴식은 충분히 취하셨소? 조금 더 눈을 붙여도 되는데 빨리 일어나셨구려."


  "아쉽게도 이런 정신적 피로에 익숙한 몸이라서 말이야. 저절로 눈이 떠져 버리거든. 세이렌이랑 다른 애들은?"


  "축제를 즐기러 갔소. 이런 분위기를 즐기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아이들에게 가혹한 것이니."


  "너도 같이 나가지 그랬어? 그 녀석들도 너와 함께 축제를 즐기고 싶었을 텐데."


  "한 명은 남아 그대를 지켜야 하지 않겠소? 주군을 두고 경거망동할 수는 없는 법이지."


  흐음. 창밖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분위기가 거리 가득 메아리쳤다. 원래 정보 수집은 내일부터 하려고 했지만 이런 분위기를 놓칠 수는 없지. 창가를 등지고 웃으며 용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조금 나와 어울려주지 않겠어? 경거망동하고 싶은 나는 아래의 축제가 몹시 궁금한데."


  나의 말에 용이 살짝 웃으며 나의 손을 맞잡았다.


  "그대가 가고 싶은 그곳까지 기쁜 마음으로 그대를 따르리다."



  *

  노점에서 싸구려 가면을 사 용에게 건넸다. 가면을 걸치고 화려한 조명과 풍등, 불꽃놀이와 달빛이 하늘을 수놓았다.


  거리를 떠돌며 수많은 사람을 보았다. 엘프, 드워프, 수인.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웃음으로 축제를 즐겼다. 사람의 물결에 용이 잠시 뒤처져 나와 떨어졌다. 사람들을 헤치고 점점 멀어져가는 용을 찾아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멀어지지 않도록 그녀를 당겨 품에 안고 붙잡은 손을 들어 그녀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떨어지면 안 되잖아?"


  가면과 조명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조금 붉어진 얼굴로 용이 나를 바라보았다. 맞잡은 손을 풀고 팔짱을 끼며 내 팔을 끌어안은 용이 살포시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떨어지면 안 되니. 맞소?"


  그래. 떨어지면 안 되니까. 나도 용을 향해 웃어 보였다.


  모퉁이를 돌아 광장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분수와 부드러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분수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저 멀리 인파 사이로 운디네와 네레이드와 즐거운 듯 손에 먹을 것을 한가득 들고 있었다. 네레이드가 간신히 인파를 헤치고 나타난 테티스와 세이렌을 이끌고 나와 용 곁을 지나갔다.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도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웃으며 멀어져가는 그들을 보며 용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광장의 분수 앞에 도착한 우리는 인파에 섞여 춤을 추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가면을 걸친 사람들이 웃으며 가벼운 왈츠에 맞춰 춤을 추었다. 노래가 끝나고 춤을 추던 사람들이 분수를 떠나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춤을 추기 위해 분수로 몰려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우리의 등을 떠밀어 앞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분수로 향하는 인파에 밀려 움직이던 우리는 어느새 춤을 추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우리도 춤을 춰야 할 것 같은데."


  팔짱을 풀어 용의 손을 잡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내 품에 안긴 용이 답지 않게 당황하며 말했다.


  "나... 나는 무인이오. 이런 무도회의 춤과 예법에는 밝지 못하오."


  "걱정 마. 내가 있으니까."


  용의 손을 끌어서 내 어깨 위로 올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노래가 시작되었다. 


  "다른 건 보지 마. 나만 보면 돼. 발걸음은 내 발에 맞춰서 가볍게. 나머지는 내가 끌고 갈 거야."


  노래에 맞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용도 다급하게 내게 맞춰 발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쭈뼛거리며 간신히 내 발에 맞춰 움직이던 용도 금세 익숙해졌는지 무리 없이 따라오게 되었다.


  춤을 처음 추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아한 자태에 사람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용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베니체의 만백성을 굽어살피는 왕께서 이런 곳에서 춤을 추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거려나?"


  "너무 놀리지 마시오.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니."


  노래가 멈추고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른 사람들에 맞춰 드레스 자락을 들며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은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분수를 빠져나가는 인파에 섞여 우리도 분수를 떠났다. 어느 식당에 들어서자 식당 주인은 우리를 야경이 잘 보이는 2층 발코니의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어때, 춤을 춰본 경험은?"


  "그대 앞이 아니라면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소."


  점원 한 명이 주문을 받으러 나오기에 간단한 음식과 와인을 주문했다. 테이블이 세팅되는 사이 용이 내게 물었다.


  "의외군. 그대가 거리에 나온 것은 틀림없이 정보를 캐러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맞아. 그런데 너랑 이렇게 돌아다니니 아무래도 좋아졌어."


  내가 몹쓸 여자로군. 용이 웃었다.


  "무슨 정보를 찾고 싶었던 것이오? 역시 닥터에 관한 것인가?"


  "아니. NPC가 닥터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리 없지. 개인적으로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비스티아에서 만났던 비늘이 돋아난 거대한 괴물. 울음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미어지게 했던, 왠지 모르게 기억에 남는 괴물. 


  비스티아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전부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괴물이 자리 잡은 초원은 베니체와 가깝다. 어쩌면 베니체에서 그 괴물의 정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어 정보를 캐보려고 했는데...


  "어째서 정보를 모으지 않는 것이오?"


  "이런 분위기에서는 아무래도 힘들겠지. 비늘이 돋아난 도마뱀 같은 회색 괴물의 정보를 모은다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앗! 손님, 그 괴물을 보셨나요?!"


  용과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머리 위에서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니 와인을 서빙하던 엘프 점원이었다.


  "괴물에 대해 아는 게 있소?"


  용의 물음에 엘프 점원이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그 괴물은 망향자라고 해요."


  "망향자?"


  "고향을 잃은 자라는 뜻이에요. 고향이 아닌 곳에서 죽은 사람이 고향을 그리는 강한 원념을 바탕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자들을 말해요. 그리고 그 대가로 자기 고향에 관한 기억을 잃어버리고 말죠."


  돌아가야 할 곳을 사무치게 그리워하여 고향을 잃어버린 모순의 괴물.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처음 나타난 건 100년 정도 전이었어요. 이 근처에서 전쟁이 있었거든요. 센, 비스티아, 프로메시아 가릴 것 없이 군인부터 민간인까지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그러고 보니 샬럿이 말했지. 전란에 휩싸였다고 말할 것은 손에 꼽지만, 자잘한 다툼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괴물은 전쟁이 끝나고 어느 날 전쟁터 한가운데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해요. 전쟁터 주변을 돌아다니며 한없이 울부짖고는 했었죠."


  "마치 본 것처럼 말하는군."


  "봤어요. 엘프는 오래 사는 종족이니까요. 불타버린 전쟁터에서 울부짖으며 이 주변을 돌아다니던 모습을 지켜봤었죠. 괴물은 30년 가까이 이 근처를 돌아다녔어요. 울부짖고, 울부짖고, 또 울부짖었죠."


  가슴이 미어지는 울부짖음을.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그 울음소리마저 무뎌질 즈음, 괴물은 갑자기 사라졌다.


  "망향자가 죽는 방법은 단 하나에요. 고향을 떠올리고 돌아가는 것. 가슴 깊이 새겨진 고향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면 고향이 다시 떠오른다더군요. 30년 가까이 울부짖다 사라졌을 때 드디어 고향을 떠올려 사라졌나 싶었는데 비스티아에 있었나요..."


  여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다니, 바보 같은 사람.


  그렇게 말한 점원이 다른 사람의 주문을 받으러 사라졌다. 무언가를 더 묻고 싶었지만 금세 인파 속으로 사라져 그만두었다.


  "좋은 정보를 얻었소?"


  "그럼. 정보를 얻으려고 했는데 목격자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거든."


  밝은 내 목소리와 다르게 용의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무언가 신경 쓰이는 듯, 무언가 마음 아픈 듯.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와인 잔을 가볍게 부딪친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저... 망향자라는 말이 거슬린 것뿐이오.


  "그대도, 나도, 어느 의미로는 고향을 잃어버린 자들이니."



  *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센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갑자기 웬 마차냐고 묻는다면 용의 세심한 배려 덕분이라고 하겠다.


  “한시름 놓였네요. 센까지 또 걸어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베니체와 센은 교류가 많은 나라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마차로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육로가 잘 뚫려있다고 해.”


  베니체에서 시작해 몇 번의 야영 끝에 우리는 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독특한 나라였다. 먼 옛날 아시아권의 건축 형태가 기묘하게 섞여 있었다.


  센의 수도 근처에서 내린 우리는 수도 중심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수도라고 해도 드높은 건물이 있는 것은 아니고 높아야 3층 건물의, 다른 나라의 한적한 도시 수준의 수도였다.


  이 도시의 특별한 점은 완만한 언덕을 반쯤 깎아 만든 도시라는 것이겠지. 아마 저 멀리 보이는 도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그나마 비교적 화려한 건물이 아마 이 나라의 높으신 분이 기거하고 있는 곳일 터.


  아무튼 완만한 경사라고 해도 사람을 조금 짜증 나게 만드는 이 도시를 오르는 도중 우리의 시선을 돌린 것은 내 머리 위에서 편하게 앉아가는 주제에 심심하고 피곤하다며 징징거리는 지니야였다.


  “아앗! 사령관님! 저기 엄청나게 큰 벚나무가 있어요!”


  지니야의 말에 도시 옆 커다란 언덕을 바라보았다. 과연 언덕 위로 엄청나게 큰 벚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가히 고목이라고 부를만한 크기였다. 내 머리에 매달린 지니야가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투정 부렸다.


  “사령관님! 저희 벚꽃 구경하러 가요! 저런 건 구경하지 않으면 실례라구요!”


  “웬일로 네가 먹을 거 외에도 관심을 보이는구나, 지니야.”


  “그치만 저렇게 커~다란 나무는 처음 보는걸요! 한눈에 봐도 봐달라고 눈을 잡아끌고 있지 않나요? 가자구요 사령관님!”


  그렇게 말한 지니야가 내 머리카락을 벚나무 쪽으로 잡아당겼다. 나는 옛날 프랑스 영화에 나오는 요리사가 아니다. 머리카락 잡아당긴다고 조종당할쏘냐.


  “후. 그래서, 너희는 어때? 가 볼래?”


  나의 물음에 파티원들이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나 말고 모두 저 나무를 신경 쓰고 있었던 건가.


  그렇게 급하게 발걸음을 돌려 커다란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언덕을 향해 걸으며 생각한 것은 언덕이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나무가 정말로 엄청나게 큰지 상당히 많이 걸었는데도 도착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지난 후였다.


  “후... 간신히 도착했군.”


  그리 멀어 보이지 않으니 한번 가 볼까 하는 나의 가벼운 마음과 달리 우리가 나무에 도착한 것은 장장 30분을 걸은 후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도 큰 나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실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무는 정말 엄청나게 거대했다. 성인 남자 대여섯 명은 데리고 와야 감쌀 수 있을 정도로. 흐드러지게 피어오른 벚꽃이 부드러운 봄바람을 맞아 잘게 흩어져 흩날렸다.


  모두가 벚나무에 집중하고 있을 때 무언가 다른 것을 보고 만 사람이 있었으니, 홍련이었다.


  “이건 뭘까요?”


  홍련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돌려 그녀가 발견한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나무 그림자 사이에 해가 지는 방향을 애달픈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소녀의 석상이었다. 가슴께를 묶는 매듭 한쪽이 짧은 옷을 입은 소녀.


  “굉장히 잘 만들어진 석상이네요.”


  나와 홍련이 석상을 살폈다. 석상은 굉장히 잘 만들어져 색만 있다면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의 섬세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피부결, 머릿결, 옷의 주름, 속눈썹 하나까지. 이 정도의 기술을 가진 석공이 이런 걸작을 언덕 위에 덩그러니 놓아두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 차라리 사람이 돌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현실성 있을 정도로.


  “조각상이 디테일이 굉장한데. 옷고름 매듭도 엄청 세세하잖아.”


  “헤에. 이게 옷고름이군요. 그런데 옷고름 한쪽이 지나치게 짧지 않나요? 매듭 묶기 힘들 것 같아요.”


  포티아가 나의 말에 관심을 보이며 소녀의 가슴께를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는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곳에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주인님.”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니 익숙한 듯, 허나 조금은 다른 옷을 입은 검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너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금란.”


  떨어지는 벚꽃잎 사이로 단아한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왔다. 그 모습만으로도 너무나 아름다워 무심코 숨을 삼킬 지경이었다.


  금란이 천천히 눈을 떴다. 부드러운 황금빛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내게 다가온 금란이 맨손으로 내 손을 붙잡아 그녀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손바닥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뺨의 촉감이 느껴졌다. 금란이 조용히, 허나 눈물 젖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가상 현실이라는 것은 경이롭기 그지없지요. 소첩이 이리 편안히도 주인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왔으니까요.”


  엄지로 그녀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민감한 오감으로 정상적인 생활조차 불가능한 그녀에게 있어 이 가상 현실에서의 변화는 얼마나 놀랄만한 일일까. 아마 세상이 변한 정도의 충격이겠지. 눈물을 닦고 한걸음 물러난 금란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조금 더 이 기쁨을 음미하고 싶지만, 주인님께는 시간이 없겠지요.”


  금란이 살짝 비켜서 저 멀리 커다란 성을 내게 보이며 말했다.


  “무녀께서, 히루메가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