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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의 상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타워 브릿지? 런던 아이? 버킹엄 궁전? 런던은 오래되고 그 이상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런던의 유명한 건축물을 늘어서는 것만으로도 A4용지는 몇장이고 채울 수 있을 것이었다.

 지금 이야기할 것은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탑이었다. 런던 탑이냐고? 안타깝지만 아니었다. 런던 탑은 타워브릿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16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요새였다.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흰색의 런던탑은 지금의 관점에서는 탑이라 부르기 힘든 낮은 성채에 불과했다. 하지만 2100년대에도 남아있는 중세의 성은 그 존재만으로도 눈에 띄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 말하려는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탑에 비하면 인지도는 훨씬 낮을 것이었다. 조지 타워. 사전에도 안나온다고? 어쩔 수 없다. 실제 존재하는 탑의 이름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 탑을 모른다고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조지 타워라는 이름이 붙기 전에는 엘리자베스 타워라는 이름이 붙어진 탑이었고 그 이전에는 세인트 스티븐스 타워, 혹은 단순하게 시계탑이라 불리웠다.

 아직도 모르겠다고? 런던의 명물인 빅 벤을 말하는 것이었다. 갈색과 황토색의 중간의 색깔을 한 고딕양식의 거대한 시계탑이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을 한 빅 벤은 그야말로 런던의 상징이라 할 수 있었다.

 그 탑의 이름이 조지 타워가 된 것은 PECS가 영국을 점령한 다음에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영국의 상징이라 런던의 상징인 빅 벤의 정식 명칭이 연합전쟁 전 영국의 황혼기를 상징하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름을 딴 것이 PECS의 간부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들은 여러 핑계를 대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그의 손자인 윌리엄 5세, 윌리엄 5세의 아들인 조지 7세로 이어지며 왕이 바뀌었는데 새로운 영국의 상징으로 이름을 조지 타워로 바꾸자 한 것이었다.

 그것을 반대할 영국 고위인사는 없었다. PECS가 영국을 존속시켜주는 것에, 작위제와 자신들의 직위를 유지시켜준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전쟁의 패자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그들은 그 주장을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사용할 뿐이었다.

 하지만 누가 그 탑의 이름을 엘리자베스 타워라 불렀는가. 영국인들에게, 전세계 사람들에게 그 시계탑의 이름은 빅 벤이었다.

 빅 벤의 모습은 빅 벤이 처음 지어진 1859년 5월 31일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흔히 미래적인 빅 벤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갖은 LED나 네온사인으로 장식된 빅 벤, 혹은 홀로그램 광고로 도배된 빅 벤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었다. 아니면 아날로그 시계가 디지털 시계로 대체되었거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일어날 뻔했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PECS에게 영국이 넘어간 뒤, 한 광고회사에서 빅 벤을 거대한 광고판으로 만들려 했다. 타임스퀘어와 같이 웨스터민스터 지역을 만들려 했던 것이었다.

 그 계획은 실제로 공사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 취소되고 말았다. 감히 빅 벤에 광고를 하려는 회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 국민들의 여론은 차라리 가이 포크스에 의해 빅 벤이 폭발하는 편이 빅 벤에 광고가 붙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었다.

 광고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영국 국민들 전원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씌우고 싶은 기업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노이즈 마케팅을 의도한다 한들, 회사의 이미지가 노이즈에 먹혀버리는 것을 노이즈 마케팅이라 부를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뭐,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론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영국은 반 기업 테러리스트들이 넘쳐나는 곳이었고 구 정부세력의 지원을 받던 한 테러단체가 그 광고회사에 테러를 가해 회사 직원 전원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빅 벤에 광고를 해야겠는가? 차라리 다른 곳에 광고를 걸고 말지. 그런 생각을 가진 광고회사들이 찾은 것은 런던 아이와 타워 브릿지였다. 빅 벤에서 한참은 떨어진 두 장소에는 화려한 홀로그램 광고가 24시간 내내 빛나고 있었다. 일종의 빅 벤을 지킨 대가일지도 모른다.

 그 빅 벤의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온 목적은 다양했지만 그들이 이 장소에 모이게 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2101년 4월 8일,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덴버러 백작, 휴이 브래드버리의 장례식이 거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영국 최고 부자의 죽음. 그정도 되는 사람의 장례식에 사람들이 몰려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휴이 브래드버리의 죽음을 추모하러 오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목적이 있었다. 가장 많이 보이는 팻말은 ‘내 아이의 아버지는 덴버러 백작이다’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휴이 브래드버리의 아들이니 자신도 유산의 일부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그 팻말을 본단 말인가. 누군가가 팻말을 본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휴이 브래드버리의 상속자는 론 브래드버리였다. 방송에서 공표된 이상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것이 되었다.

 공식적인 휴이 브래드버리의 자손은 론 브래드버리 단 한명이었다. 길거리에 누군지 모를 여자들이 팻말을 든다고 그것을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아니, 재밌게도 그 팻말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미는 사람들도 있었다.

 방송국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자극적인 소식을 전하고 싶어했다. 덴버러 백작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는 그들에게 있어서 좋은 먹잇감이었다. 덴버러 백작의 죽음만큼 매력적인 가쉽 소재도 없었다.

 더욱이 그의 사생아라면. 덴버러 백작은 문란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여성만 모아도 하나의 도시를 만들 수 있을 정도겠지. 아무리 피임을 했다 한들 그정도 숫자나 된다면 질외사정을 해도 아이가 한둘 생긴다 해도 이상할 것이 아니었다.

 “그는 멋진 남자였어요. 젠틀했고 친절했고, 그리고 그쪽이... 아시잖아요?”

 두대의 카메라 앞에서 아기를 안고 인터뷰한 한 여성이 있었다. 푸 말린.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말했다. 왜 그녀의 이름이 곰돌이가 생각나는 이름인가 하면 그녀의 부모가 그 이름에서 따서 자신들의 딸의 이름을 정했기 때문이었다.

 푸 말린은 런던 외곽 북서부의 웸블리에 살고 있었다. 그는 쉐어하우스에서 다른 3개의 가정과 하나의 집을 나눠 살고 있었다. 그녀는 북서부로 더 떨어진 해로우에 있는 골프클럽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다.

 그녀의 억양은 런던의 코크니와 에스추리, 용인 발음이 모두 섞인 어중간하고 어눌한 억양이어서 훨씬 그녀를 더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발음의 어디가 코크니고 어디가 에스추리고 어디가 용인발음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구사하는 영어의 대부분은 그녀가 어디선가 들은 발음의 종합이었으니까.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그녀가 덴버러 백작을 만난 것은 그 골프 클럽에서였다. 그는 골프를 즐기기 위해 다른 귀족들과 함께 골프 클럽을 자주 방문했고 그를 볼 기회도 종종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덴버러 백작과 성관계를 맺은 장소가 화장실이라고 말했다.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던 그녀를 보자마자 자신과 관계를 맺자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말도 안되는 부탁을 잘 포장해서 말했어요. 말보로 공작과 골프 내기를 했는데 딱 한 타수 차이로 졌다고 하더라고요. 그 내기로 건 것은 오래된 스포츠카였다고 하는 거 같았어요. 정확한 차종은 모르겠지만 백만파운드는 하는 차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좋지 않은 기분으로 화장실로 왔는데 제 얼굴을 보고는 그 화가 전부 풀렸다고 말했어요. 제게 성관계를 요구한 것도 그 이유라고 하더라고요.”

 말보로 공작은 몇달이나 그 일을 자랑했다. 애스턴 마틴 One-77. 77대 밖에 생산되지 않은 희소한 올드카였다. 세월의 흐름으로 현존하는 One-77은 단 7대라고 알려졌고 이제는 One-7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자동차 동호회에서는 종종 나오고 하는 차였다. 그런 차를 내기로 땄는데 몇달을 자랑한 것은 고작 몇달 밖에 되지 않냐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 관계로 저는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이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어요. 이름은 피글렛이에요. 어때요, 닮지 않았나요?”

 그녀의 말대로 그 아기는 덴버러 백작은 몰라도 곰돌이 푸에 나온 피글렛은 확실히 닮아 있었다.

 “정 못믿겠다면 이 아이의 유전자검사를 해도 될 거에요. 유전자 검사를 하면 일치율이 무려 90%를 넘을 거에요!’

 참고로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 일치율은 98%에 달한다고 한다.

 “이 아이가 바로 덴버러 백작님의 아들인 피글렛이에요. 아니, 방송에서는 아이의 이름이 론이라 말했으니 이제는 론이라 불러야겠네요. 아가야, 이제 너를 론이라 불러야겠어. 론 브래드버리야!”

 그녀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현장의 리포터들도, 스튜디오의 아나운서, 뉴스룸의 기자들까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는 진실과 거짓이 섞여있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자신도 그 거짓이 진실이라 믿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면 그녀에게는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실상은 이렇다. 그녀는 덴버러 백작과 성관계를 맺었다. 그는 말보로 공작의 꼬임에 넘어가 그와 애스턴 마틴을 건 내기 골프를 했고 한 타수 차이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의 재산에 비하면 큰 돈이 아닌 차였지만 그는 희귀한 차를 잃었다는 것에 화를 냈고 그 화풀이 대상을 찾고 싶었던 것이었다.

 화장실을 간 그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그 젊은 여성은 빈말로도 아름답다고 할 수 없었다. 자신을 골프 클럽까지 따라온 컴패니언의 바이오로이드와 비교하면 이것을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외모였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 외모를 보지 않았다. 그저 구멍에 박으며 화풀이를 할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푸 말린은 자신을 유혹했다고 받아들였지만 덴버러 백작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강간에 불과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푸 말린의 가슴주머니에 푼돈을 꽂아준 것은 그에 대한 입막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성관계는 임신으로 이어지는 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임신으로 이어지지 않는 성관계가 더욱 많았다. 덴버러 백작과 푸 말린의 성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덴버러 백작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지만 덴버러 백작의 정자는 푸 말린의 난자와 만나지 못했다. 그녀의 난자와 만난 것은 이주일 정도 뒤에 술집에서 만난 한 남자의 정자였다. 술에 거하게 취한 푸 말린은 그런 남자와 만났고 술집 뒤 골목에서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성관계는 덴버러 백작과 가진 것 뿐이었고 그로 인해 그녀는 거한 착각을 한 것이었다. 그녀의 소원대로 피글렛과 덴버러 백작의 유전자 일치 검사를 한다면 그녀가 바란 수치인 90%보다 높은 99%가 넘는 수치가 나올 테지만 그 아래에는 친자라 할 수 없음이라는 결과만이 나올 것이었다. 애초에 검사를 할 일도 없겠지만.

 그녀와 같이 덴버러 백작과 관계를 맺고 아이를 가졌다는 사람의 주장은 다양했다. 자신이 하인으로 일하던 중 강간을 당했다는 사람도 있었고 덴버러 백작보다 나이가 많아보이는 사람을 데려와 덴버러 백작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놀랍게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들 중 진짜 덴버러 백작의 아들은 없었다. 그의 유일한 아들이자 상속자는 자신이 덴버러 백작의 아들이자 차기 덴버러 백작이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른채 잉글랜드 서부의 숲에 있었으니까.

 “아 저기 덴버러 백작님 지나가신다! 론, 론! 저기 봐! 네 아버지가 저기 지나가고 있어!”

 웨스터민스터교를 건너 빅벤의 앞을 지나가는 리무진을 향해 푸 말린은 피글렛의 손을 잡고 같이 흔들었다. 그녀는 그 리무진의 안에 덴버러 백작의 시신과 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리무진의 번호판은 차의 색과 같은 검은 색이었고 흰 색으로 BR이라 시작하는 번호가 쓰여있었다. 그 번호판은 그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어느 회사에 소속되었냐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바로 블랙리버였다.

 그 리무진의 안에는 블랙리버의 영국 지사, UK 블랙리버의 사장, 찰스턴 햄하우스가 타고 있었다. 온몸으로 자신을 중년이라 홍보하는 그는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 답게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각종 명품으로 도배된 그의 복장이었지만 전혀 그 티는 나지 않았다.

 그는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UK 블랙리버의 사장이었다. 영국에서만 조단위의 매출을 올리는 거대기업체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블랙리버의 전체로 따지면 지사장에 불과한 그였지만 영국에만 있는다면 어깨에 힘을 주고 살 수 있는 그였다.

 엄청난 액수의 연봉을 받았고 소유하고 있는 블랙리버의 주식의 양도 주주회의에서 한마디를 할 수 있을 정도기도 했다. 그의 집은 템즈강을 가로지르는 런던브릿지와 타워브릿지의 사이에서 양쪽의 다리와 맞은편의 런던 시청사, 옆에는 런던탑이 있는 런던에서 비싸기로는 손에 꼽을 수 있는 맨션에서 살고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그가 꺼려질 사람은 몇 없었고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미국의 블랙리버 본사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중 하나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벨아이아. 블랙리버 본사의 이사진 중 하나였다. 저 젊은 여자가 자신의 상사격인 존재라니. 찰스턴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생각하는 듯 했지만 찰스턴에게 그녀는 다리를 잘 벌릴줄만 아는 무능력한 여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영국땅을 밞기도 전에 자신에게 2기의 T-20S 노움을 달라고 했다. 돈도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큰 부착은 아니었다. 스틸라인의 T 시리즈는 값싼 전투용 바이오로이드였고 대량생산이 전제된 기종이었다. 그런 노움을 2기를 내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벨아이아의 태도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직접 찾아오지 않았다.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메일로 일방적인 통보를 했을 뿐이었다. 새벽에 그런 메일을 보내놓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그가 얼마나 고생을 해야 했는가.

 심지어 그에 대한 감사는 커녕 그녀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날 오후 다시 메일을 보내 수령한 두기의 노움은 폐기가 되었으니 새로운 노움을 4기 보내주고 주소를 보낼테니 그 뒤처리를 하라는 메일을 보냈을 뿐이었다.

 본사놈들은 다 그렇지. 라는 말로 넘기기에는 그녀의 말은 너무나 일방적이었고 상대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영국에 와서 하고다니는 일의 뒷처리는 모두 자신들의 몫이었다. 알고보니 그것은 블랙리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덴버러 백작의 죽음으로 자신이 그 부를 상속받기 위한 행동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찰스턴은 블랙리버 본사에 말해 벨아이아가 한 일은 블랙리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달을 위한 것 뿐이었다면 불만을 제기했다.

 그 답변이 어떠했는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벨아이아 이사는 블랙리버를 위해 일하고 있으니 그녀의 지시에 잘 따르라.’라고. 찰스턴은 더 이상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가 항의를 했다면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 오른 다른 누군가였을 테고 어디선가는 자신의 장례식을 하고 있었을 테니까.

  결정적으로 그가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은 그 벨아이아가 자신의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례식에 가기 위해 그녀는 검은 옷을 입고 머리에는 검은 베일을 썼지만 그녀의 옷 여기저기에는 그녀의 흰 살이 드러나 전체 면적에서는 검은 옷보다 흰 살이 더 많았다. 더욱이 그녀는 슬쩍 다리를 꼬고 앉아 맞은편에 앉은 찰스턴에게 자신이 입은 흰색의 속옷을 드러내고 있었다.

 평범한 남자라면 그녀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찰스턴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다리를 벌리는데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벨아이아는 호감을 가져 유혹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자신의 목적을 계산해 상대를 유혹해 그것을 빌미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사람이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속옷을 보여줌으로 그녀는 찰스턴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수족처럼 부릴 셈이겠지. 찰스턴은 그렇게 놀아날 생각이 없었다. 벨아이아의 지시를 따를지언정 그녀의 모든 것을 이뤄줄 호구가 될 생각은 없었다.

 “햄하우스 사장, 왜 담배를 계속해서 피우는 건지 알아?”

 벨아이아가 담배연기를 뱉으며 묻자 찰스턴은 코를 찡그렸다.

 “힘든 일이라도 있는 건가요, 벨아이아 이사님.”

 “훗, 힘든 일이라. 그런게 아냐. 담배에 든 니코틴에 중독된 거 뿐이야. 그것도 모르고 영국 지사의 사장에 오른 건가?”

 찰스턴은 간신히 표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벨아이아는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농담이야. 햄하우스의 사장의 조상은 독일계라도 되나? 함하임 같은 이름으로 말야. 왜 농담을 했는데 안웃는 거야.”

 “하,하,하. 참으로도 재밌으십니다, 벨아이아 이사님.”

 찰스턴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벨아이아는 자신을 힘으로 누르려 하고 있었다. 자신이 영국에 재류하는 기간 동안에 지사에서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할 속셈인 것이겠지. 벨아이아와 자신의 사이에 아무 티도 내지 않고 앉아있는 팬텀처럼 말이었다.

 광학미채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그것이었지만 찰스턴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리무진의 바닥은 패브릭 재질이었고 약간의 쿠션이 있었다. 팬텀과 같은 바이오로이드가 몸무게가 가볍다 한들 바닥에 자국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그것의 실체는 볼 수 없었지만 그것의 존재만은 간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그가 무슨 수를 쓰려 한다면 그 수를 쓰기도 전에 팬텀은 그의 목을 자를 것이었다. 물론 찰스턴은 벨아이아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벨아이아가 앉은 좌석의 아래에는 소형 폭탄이 존재했다. 만일 그녀가 찰스턴을 죽이려 한다면 그 폭탄이 폭발할 것이었고 벨아이아는 죽지는 않더라도 평생을 병원의 침대 위에서 보내야 할 것이었다.

 블랙리버의 고위 간부의 만남이란 이런 식이었다. 오른손으로는 악수를 하고 왼손으로는 서로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것이 서로의 만남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평화는 총으로만 이뤄낼 수 있다. 그것이 블랙리버의 기반이 된 사상이었으니까.

 “그래서 이사님께서는 언제까지 영국에 계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지내는 곳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다른 좋은 장소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오래 계신다면 호텔같은 곳보다는 저택을 빌리는 것이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찰스턴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아니면 벨아이아의 마음에 들어 미국으로 갈 생각일지도 몰랐다.

 “오래 있을 생각은 없어. 덴버러 백작위를 받게 된다면 바로 미국으로 돌아갈 거니까. 이런 변방의 나라에 있어서 좋을 건 없지. 그래봐야 바이오로이드 하나와 아기 하나 찾는 거야. 블랙리버의 정보력이라면 금방 찾아내겠지.”

 “덴버러 백작위 말이신가요. 블랙리버에게 도움도 안되는 일에 너무 열중하신다면 이사회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텐데요.”

 그는 그 질문을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불만이었다. 어째서 덴버러 백작위를 노리는 자사의 이사를 도와야 하는 것인가. 그것을 왜 상층부에서는 묵인하는 것인가. 아니, 오히려 찰스턴으로 하여금 그녀를 돕게 만들었다.

 “덴버러 백작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큰 돈을 삼안산업에 바치고 있는지 아나? 연간 수천만 파운드에 가까운 돈이야. 내 아버지와 오라비란 작자들은 자신들의 돈을 삼안산업에 퍼붓고 있어. 삼안산업의 런던지부가 왜 생겼는지 아나? 내 아버지가 사는 바이오로이드의 액수가 왠만한 나라 전체의 매출보다 더 나왔기 때문이야.”

 덴버러 백작가의 부를 강조할 필요는 더이상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삼안산업의 상품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만일 내가 그들의 부를 이어받는다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삼안산업이 영국에서 얻는 매출의 상당수가 블랙리버로 옮겨질 거야. 이사회에서 얼마나 삼안산업을 경계하는지 굳이 언급해야 할까? 그정도 자리에 올랐으면 알 거야. 아니, 찰스턴 사장, 당신도 반길 소식이지. 삼안산업의 매출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게 될 거니까. 그 매출은 이제 당신의 것이야. 본사에 좋은 인상을 줄 기회가 되겠지.”

 “하지만 이 땅은 PECS의 영토입니다. 오메가 산업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블랙리버가 미국에 기반한 대기업이라 한들 이곳에서는 지사를 운영할 뿐이에요. 큰 일을 벌이면 오메가 산업에서 개입할 거고 동맹을 위해 우리는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오메가 산업? 결국 돈이야기잖아. 모든 것은 덴버러 백작위를 물려받는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야. 이 나라를 전쟁으로 얻어낸 것은 우리 회사의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이루어낸게 아니었어? PECS는 전쟁의 마지막에 협상으로 이 나라를 얻어낸 것에 불과하잖아. 저들도 우리 블랙리버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이 나라의 군대를 구성하는 주력 바이오로이드가 뭐지? 여전히 T-2 브라우니야. 이것은 어느 나라도 벗어날 수 없는 사실이지.”

 극단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란 무엇인가. 돈이라고? 답은 군사력이었다. 돈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지만 고대나 지금이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란 군사력이었다. 다만 그 군대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도 제조사가 있었지만 전투용 바이오로이드 제조에서 블랙리버를 이길 회사는 없었다. 삼안산업마저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블랙리버에게서 바이오로이드를 사는 실정이었으니까.

 지금은 평화의 시대였다. 블랙리버는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던 아니던 돈을 위해 바이오로이드를 팔았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난다면 블랙리버가 자신의 상대에게 바이오로이드를 팔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전쟁으로 상대는 바이오로이드를 소모하게 될 것이고 계속해서 바이오로이드를 생산한 블랙리버는 결국 승리할 것이었다. 실제 역사가 그렇게 흘러갈 지는 미지수지만 최소한 블랙리버의 상층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어떤 나라도 우리 블랙리버에 거스를 수 없어. 회사들 역시 마찬가지고. 우리에게는 그럴 힘과 돈이 있어.”

 벨아이아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며 말했다. 그리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 아이의 아버지는 덴버러 백작이다.’ 그런 팻말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푸 말린이라는 여자가 들고 있는 팻말이었다.

 사실 이 대화는 두 사람이 탄 리무진이 웨스터민스터교를 건너기 전의 이야기였다. 빅 벤이 멀리서 보이는 랜드마크에 불과한 장소에서 이어진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마치 바로 이어지는 것 처럼 묘사를 했지만 빅벤 앞에서 이 이야기가 이루어졌다면 두 사람은 장례식이 이뤄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앞에 도착해 한참을 차에서 내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이야기는 약간의 시간을 넘어 푸 말린이 인터뷰를 하던 빅벤의 앞을 지나가는 리무진의 안에서 이어지게 된다.

 “참 오라버니의 여성편력은 무시할 게 못되는 모양이야. 저 많은 사람들이 전부 내 조카를 낳았다면 저 사람들이 받을 돈은 1페니도 못되겠지.”

 설마 1페니 밖에 안되겠는가. 덴버러 백작의 재산은 전 영국인이 똑같이 나눠가져도 자신들의 전재산의 배가 될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반을 넘었다.

 “그랬다면 런던에서 뉴올리언스 참극이 두번은 넘게 일어나게 되겠죠.”

 뉴올리언스 참극. 폭주한 T-1 고블린이 시위대에게 발포해 학살이 일어난 사건이자 남성형 바이오로이드를 만들지 않게 된 사건이자 블랙리버의 치부이기도 했다.

 “햄하우스 사장. 그 말을 한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굳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벨아이아는 찰스턴의 약점을 잡았다는 듯 웃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

 찰스턴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다음이었다. 블랙리버 상층부에는 당시의 사건을 불편하게 여길 사람들로 한가득이었다. 그 사건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농담으로 하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왜 얼굴을 굳혀. 웃어.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도착했잖아. 대중들 앞에서 웃는 것이 유명인이 해야 할 자세 아니겠어? 당신이나 나나 덴버러 백작의 죽음을 반기는 사람 아니겠어? 저 바깥의 대중들도 내 오라비의 죽음에 추모를 하지 않아.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과 추모하는 척 자신의 체면을 차리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장례식에서 울고짜고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어. 아니면 내 인공눈물 빌려줄까? 이거 하나면 하루종일 눈물이 끊이지 않을 거야.”

 벨아이아는 찰스턴에게 작은 플라스틱 병을 내밀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그저 멈춰선 차의 문을 열고 내릴 뿐이었다. 벨아이아는 피식 웃은뒤 얼굴을 바꾸었다. 자신의 오라버니가 죽어 슬픈 표정을 취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벨아이아에게 동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의 표정을 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너무 울어 더이상 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의 표정이었다.

 리무진에서 내린 두 사람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걸어갔다. 죽은 덴버러 백작을 추모하기 위해서, 아니 그의 죽음을 이용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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