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먹고사는 것과 같은 말이 되는 순간, 삶과 책임이 뒤바뀌는 순간 - 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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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쩍이며 잠들었다. 


 도시의 빛이 누군가를 위해서 빛나고 있었던 적이 있던가. 그것은 그저 빛나고 있었던 것 뿐, 내 것이었던 적도 없으며.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지도 않는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대신 살아주지도 않는다. 


 누군가를 위해 비가 내리지도 않는다. 누군가를 위해 꽃이 자라지도 않는다. 그 꽃이 내게 와 인사라도 건넨 적 있던가. 


 고로, 사랑을 했다는 것만큼 뻔한 거짓말도 없다. 사랑을 했던 자는 이미 사랑을 하고 있다. 아니더라도 사랑을 할 자다. 그러니, 친구놈의 말은 틀렸다. 심경의 변화 따위는 없다. 다만, 외사랑인가. 그 선택지만큼은 타당했다.


 고독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더러운 꼴 더러운 맛 보게 될 것 없으니.




 찬란하게 사라져가는 전깃불속에서, 나만 언제나 죽지 못 한 자의 고통이며 죽은 자의 몫을 내것으로 살아간다. 나만.



 가야 할 곳을 모색하고 있었다. 기울어진 탑에서는 녹슨 종이 쨍쨍거렸다. 도대체 어디에서 종이 이렇게 울려대나 밖을 둘러보았으나, 그 어느 곳에도 종과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 나는 기울어진 탑이라고. 





 뭐라도, 하러 나갈까.


 괜찮을까요 ? 


 괜찮아.


 

 하지만, 


 ..

 

 네. 외출하죠.



-



.. 엔케팔린. 


 응.


 너, 어디까지 손 댔냐. 



 뭐, 신고라도 하려고 ?


 그건, 아니.


 

 원래는 모르핀이 주였지. 다만, 고장나있는 판에 별 의미가 없다더라. 




 기분 나쁜데. 그 포션.


 주삿바늘같은 걸로는 할 수 없는 거거든. 직접 꽂아줘야 하지.


 


 왜, 니가 똥 씹은 표정을 하냐.


 아니야. 별 이유는 없어. 


 


 너, 많이 변했다. 


 그러냐. 



 

 그래. 넌 그런 표정 짓는 놈이 아니었거든. 


 너한테만 안 지었나 보네 그럼.




 새끼, 그나저나. 외출하려고 ? 


 응. 근처 좀 둘러보고 오려고. 


 목숨 걸고 할 가치가 있는 데이트면 좋겠네. 



 목숨이 달아나기 전에 데이트를 한다고 생각해두면 좋아. 


 그 말이 맞네. 사람은 언젠가 죽으니까. 


 그래. 




 잠깐. 그럼, 난 사람이 아닌가. 


 그럴 지도 모르지. 


 


 죽음으로서, 비로소 증명되는 삶. 이미 그가 손댄 마약은 마약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었다. 인간이 쾌락을 좇아 어설프게 먹고 마시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관이 극미량, 극소수의 부위에 작용시키는 인간 궁극의 마취제이자 각성제다. 가장 죽음에 인접할 때, 가장 강해지는 것은 그런 시시한 생존본능에 불과한 것이되어갔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몸의 상태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겉보기는 매우 얌전하네. 그렇게 약한 약물은 아닌걸로 아는데.


 그렇게 약한 몸도 아니거든. 여기에 얼마나 들어갔다고 생각해. 




 그럼 나갔다 온다. 키카드 빌려갈게. 전에 준 카드랑.


 조심해서 갔다 와라. 잘 다녀오세요 ~ 




 채비를 마친 바닐라는 방에서 나와 공손히 인사하고는, 팔짱을 껴왔다. 서글픈 미소가 입안에서 가시지 않았는지, 조금씩 일그러진 채 얼굴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눈에는


 


 괜찮아요, 몇 번 본 적 있으니까. 


 그런가.


 전에 큰도련님, 이라고 불렀는데요. 비슷한 소켓을 본 적이 있어요. 


 부자들 사이에서는 은근 유행하는 건가 보네. 


 




 주인님. 


 응.


 






 아니에요. 빨리 가요. 










 그래. 





 -





 맛있다. 이것도 먹어보면 안 될까요 ? 


 저, 요거랑 요것도 주세요. 





 - 


 



 그게 뭐야, 바보같아. 


 아니, 이건 아니지. 너가 시켰으면서 왜 그래.



 -





 와아, 가게에서 기르는 개인가 봐요. 


 그런거 같네. 





 -



 






 오늘은 실컷 놀았네요. 


 그래. 이런 건 나랑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주인님도 모르시는 게 은근 많네요. 


 그렇지. 데이트같은 건 처음이었으니까. 


 


 처음 .. 


 처음이었지. 


 그런, 가요. 


 그래. 


 

 싫은 일들은 모두 피해왔다. 낮선 일들은 모두 피해왔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은 반절밖에 도망쳐나오지 못 했다. 그것이 지금의 타고 남은 결과라고 믿어왔건만.


 싫은 일들을 절반이라도 해두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가, 덕분에 좋은 일들의 절반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다만, 그 골목의 주린 개가 떠올랐다. 비좁은 골목에서 포효하듯 으르렁대던 그 녀석이 떠올랐다. 그녀와 함께 본 그 개와 다를 것 없는 본질이나, 어찌 이리도 야생성을 거세당할 수 있는가.


 포만감이라는 것이 옳고 그름으로 따져볼 만한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지금, 피둥피둥 살이 찌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언가. 





 굶주린 들개여야 할까. 나는. 굶주린 들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어떠한 죗목을 이력서에 적어도, 어울려 그지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낱같은 약속을 지키려고. 쓰레기통을 지키던 그 녀석처럼.


-



 바닐라. 대학교에 잠시 다닐까 싶어.


 네 ? 그게 가능해요 ? 


 봄 학기에 복학할 수 있어. 한 일주일정도만 다니면 돼. 도움이 될만한 사람들이 있어. 다만, 조용히 만나고 싶어. 별다른 연락 없이. 


 네에-


 그리고, 기숙사도 들어갈 거야. 학교 기숙사건 근처 어딘가던. 같이 들어가자. 


 네. 생각이 있으시겠죠. 


 

 -



 방 뺀다. 


 음 ? 이제 고작, 이틀인데 ? 


 뺀다.




 아니, 뭐. 그래. 어디로 갈진 정해졌고 ? 


 정했어.


 많이 머냐.


 아주 가까워.


 그럼 왜 빼냐. 나 때문인가 ? 나 내일부터 다음주 수요일까지 쭉 안 들어와.


 그래서 빼는 건 아니야. 곰곰히 생각하고, 그냥 그렇게 결정한 것 뿐이야.



 그렇구만. 네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 나중에 한 번 불러줘. 


 노력해볼게. 쫓기는 몸이라 말이지. 


 

 그래. 일찍 죽지 마라. 내가 아직 갚을 게 많으니까. 너도 내게 갚을 게 많고.


 죽기 전에 변제해보도록 노력할게. 


 변제할 생각부터 하는구만. 잘 가라, 난 나가봐야 되서 아마 지금이 마지막일 거 같다.


 ..

 

 꼭 다시 만나자.


 

 장담은 못 해. 


 이 새끼는 끝까지. 알겠다. 그거면 됐다. 필요한 건 없고 ?


 없어. 고맙다.



 -



 까지가, 제가 아는 데입니다. 씨발, 일단 이것좀 풀어주면 안됩니까. 아픈데.


 자세한 주소라던가, 그런 건 하나도 들은 게 없구요. 


 없다고요, 진짜. 나도 그런 걸 묻는 성격이 아닌데다 걔도 그런 걸 말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그나저나 이렇게 민간인을 고문해도 되는 겁니까, 당신들 뭐하는 사람들이에요. 기업쪽 사람들도 아닌 것 같고. 경찰도 아니고. 하청도 아닌 거 같은데.




 곧 유통업계의 큰손이 되실 분께서 아셔야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뭐야, 지랄.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당신의 처우를 기다리는 중이니까, 조금 조용히 해주세요. 저도 가능하면 장차 크게 될 분을 다치게 하고 싶진 않거든요. 


 

 하, 이런 개씨발. 보통 새끼들이 아닌가보네. 꽁무니에 뭘 달고 다니는거야 그새끼는.



 ...



 예, 전화 받았습니다. 


 그럼요, 오래 기다렸죠. 연락이 아주 빠르셔서 너무 좋네요.


 저도 나중에 이쪽 계열사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인데, 소장님때문에 글렀네요. 예비 사장님을 해꼬지 한겁니다 저는.


 아, 그런.


 안됐네요. 



 -



 당신이 어떻게 그러지. 


 뭘, 말입니까 ? 


 오늘은 말이야, 몇 년만에 아들녀석이 얼굴을 비추는 날이었어. 위치나 상태를 알 수 있는 모듈은 전부 꺼두고 살아서, 제대로 된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몇 년이나 지났지. 


 저도 좋은 아버지는 아니라서요. 조언해 드릴 게 없네요.


 그래, 그래 보이는군. 좋은 아버지라면 좋은 아버지가 되고픈 내 심정을 알고서는 재깍재깍 아들놈을 보내줬을 텐데 말이지. 오늘 모든 연결이 복구되고서 보니 당신네 연구원이 내 아들놈을 고문하고 있더라고. 예식이나 복장을 바꾼다고 내가 모를 줄 알았나 ? 


 눈썰미가 좋으십니다.


 푹.


 .. ?


 눈치는 좀 없으시구요. 곧 종말이 다가옵니다.


 크으으, 무슨. 짓을. 


 곧 이 세계의 시스템은 산산조각납니다. 멋대로 몸에 기계를 박아대던 인간들은 신벌과도 같은 재앙에 전멸합니다. 신이 사냥개를 풀어댈 겁니다. 우리는 그 철의 심판을 거부하지 못할 겁니다.



 무. 슨, 소리를ㅡ



 라고 할까요, 누군가가 살아남는다면 이런 식으로 기록을 남길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지금 쌓아둔 명성이고 금전이고. 다 휴지조각이 될거라는 말입니다. 법도 질서도 없어질 겁니다. 철저한 감시, 인류의 보존. 절제. 재건. 그 대의명분 아래에서 선택된 족속들이 수발을 들겁니다. 당신은 그 축에 못 끼어서 아쉽군요. 한 끗 차이였죠. 유통업은 멸망 후라면 당장은 필요 없으니까요. 대안을 내줄 수 있는 기업도 우리 대열에 서 있습니다. 최소 인원이죠.


 ㅡ.


 아이고, 힘들게 말씀하지 마시죠. 원래 사람은 칼에 무슨 장기가 상해서 죽는 게 아닙니다. 피가 빠져서 죽는거죠. 바람 빠진 풍선처럼요. 아무리 개조를 해도 이건 어쩔 수 없거든요. 그래도 다행이지 뭡니까, 훨씬 더 비참하고 잔혹하게 죽을 뻔 했는데. 제 아들놈이랑 회장님 아들놈이랑 엮이는 바람에 회장님께서도 이렇게 호상으로 마무리 되시는 겁니다.


 ..


 사업가로서는 존경해 마지않을 인생을 사셨습니다. 회장님. 회장님이 실수하신 건 고작 제 아들놈이랑 같은 대학교에 회장님 아들이 입학하는 걸 막지 못 한 겁니다. 너무 잘난 놈이었던 나머지 회장님이 무관심해도 알아서 잘 부모 얼굴에 먹칠 안 할 대학에 들어갔죠. 아들이 잘 나서인지 중학생때 집을 나가기 전까지 살인적인 스케쥴로 개조하듯 삽입시켜둔 교육의 성과인지는 모르지만요. 


 

 이게 아들한테도 좋은 겁니다. 종말이 오고 있다는 건 진짜거든요. 이게 호상인 것도 진짭니다. 이미 막을 수 없어서, 숨는 방법밖에 없거든요. 미리 알아서 다행이죠. 


 괜히, 가시는 길이셔서 그런지 저도 쓸데없는 말이 길어지네요. 한편으로는 존경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우상이셨어서 그런지 저도 참. 들떴네요.


 그럼. 좋은 꿈 꾸시기를 바랍니다.


 -


 옙. 어쩔 수 없네요. 


 그래도 마일스 데이비스는 회수 했습니다. 다만, 가게에서 봤을 때보다는 좀 더 낡았던데요. 생활 기스도 꽤 있고요. 


 이상한 사람이시네요. 여튼, 마무리하고 가지고 가겠습니다. 면대면으로는 오랜만에 뵈는 게 되겠네요. 


 옙, 수고하십셔. 


 ..


 아이고, 어쩝니까. 


 뭐. 


 아버지께서 많이 아쉬워 하셨답니다. 오랜만에 아들 보는 날이었는데.


 

 이 씨발새끼가ㅡ 


 당신이 잘못한 겁니다. 그 친구를 모르고 살았다면. 하물며 어디로 갔는지 알기라도 했다면 두 분 다 지금 죽을 일은 없었을 텐데요. 


 


 아무래도, 기업같은게 그를 좇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바이오로이드를 찍어내 봤자 아버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장사를 할 수 없으니까. 이익집단도 아니고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이해관계에서도 무엇이 그를 좇고 있었는 지를 떠올려 볼 수 없었다.


 그보다 훨씬 큰 무언가. 선인지 악인지조차 알 수 없는, 목적과 신념을 가졌고 수단을 가진 것들. 가장 두려워 해야 마땅할 무언가가 그를 좇고 있었다. 왠지 그러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아버지는 위대한 사업가셨습니다. 저희 소장님께서 많이 좋아하시던 분이셨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뭐래, 우리 아버진 소시오패스였거든. 


 당신도 아버지를 뒤이어 기업인이 되었다면 알았겠지만, 지금 시대의 기업이라는 건 순수한 이익집단일 수 없거든요. 아마 그분은 최선의 선택만을 하며 살아왔을 겁니다. 그 거대 기업과 계열사의 총수면, 얼마나 하기 싫어도 해야 했던 일이 많았겠습니까. 당신을 놓친 것도 아마 그런 이유겠죠. 경영은 해봤어도 아버지는 태어나서 처음 했을 테니까요.


 뭐든 안다는 듯이 떠들어대지 마. 좆같은 새끼가 남의 인생을 지 멋대로 판단하고 있어. 


 제 나름대로 배려를 해드린 겁니다. 도련님을 편히 보내드리라고 방금 연락이 와서요, 그래도 누군가는 당신의 삶을 곱씹어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왜 갑자기 내가 타겟이 된 거지.


 어차피 인간은 죽잖아요 ? 뭐, 한 몇 일 일찍 그게 왔다고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인간은 죽거든요. 예. 죽습니다. 곧.


 곧, 다같이 죽을 것처럼 얘기하네. 


 예, 뭐. 비슷합니다. 조금 비약이 있긴 한데. 



 그럼, 조심히 가십쇼. 




 크으. 결국 편한 자세로는 못 죽는구만. 가는 길 불편하리라고는 예상했는데 이정도로 찜찜한 마무리일 줄은. 맨 정신에 못 할 짓 하려고. 아버지 볼라고 오랜만에 마약도 빨았는데. 진짜, 아버지는 나한테 미안해하고 있었는지. 그새끼 때문이야. 다. 괜히. 시발.





 거, 뭐 하는 거 봐서 화해도 할 자신 있었는데. 이래서, 미루면 안 된다니까. 바이오로이드가 다 해주니까 결국 이렇게 미루고, 미루고. 버릇이 되곤 하니까. 자업자득이네.






 그나저나, 바닐라였지 분명. 아무리 머리색을 바꿨다고 해도. 아무리 복장을 바꿨다고 해도. 그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 사그라들었다고 해도. 분위기만큼은 어딘가 닮아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록머리를 한 채, 내 수발을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석 옆의 바닐라는 복장도 머리칼도 말투도. 성격까지도 어디 한 군데 닮지 않았다. 어딘가 고장나있었다고밖에는. 애초에 맞나 싶을 정도로.



 어쩌면, 유일하게 고장나지 않은 바닐라를 찾은 걸지도 모르겠다. 예의 그녀처럼 우리에게 구원을 줬을 수도, 파멸을 줬을 수도 있는 그런. 놓치지 말아야 하는 여자.


 또, 재미있어 보이는 여자를 데려갔네, 정말. 여자가 보는 남자는 남자가 보는 남자랑 많이 다른 걸지도.




 그러나 역시, 또 멀쩡한 사랑은 하지 못하는 구나. 넌.


 







 그래도, 우리 셋 중에서 그나마 구원을 바랄 수 있다면 그건.



 죽음으로서, 비로소 증명되는 삶.















 탕.






 연재의 텀은 현생때문에 .. 


 이제 슬슬 이 소설의 어질어질한 부분들이 조금씩 나옵니다. 쓰는 저도 어질어질하네연 


 주인공들이 맨날 쎾쓰하고 강간하는 글만 쓰다 데이트를 묘사하려니 참 답답합니다. 그냥 쎾쓰하고 강간하면 참 편할텐데요. 그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