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체-854, 프리피야트의 하루

 

 그 땅에는 죽음이 있었다.

 

 두나이 기종은 미신 같은 건 믿지 않게 설계된 바이오로이드였고, 실제로도 미신이라는 것을 믿을 만큼 상상력이 남아도는 개체는 없었다. 적어도 체-854번은 그랬다. 하지만 그 저주받은 땅 위에 사는 자로서, 그 말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을 안다 한들 이 땅을 벗어날 수는 없는 처지지만.

 

 여느 때와 같은 하루. 아침부터 땅을 갈아엎던 그녀는 저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허리를 폈다. 어느새 서쪽으로 향해가는 해를 본 그녀는 말없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기지로 돌아갔다.

 

 기지로 돌아가는 길, 빽빽한 숲 사이를 걸을 때면 왠지 모를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익숙한 삑삑거리는 소리는 이제 정겹기까지 했지만, 어두운 저 너머에 무언가가 있을 것만 기분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몇 킬로미터를 걸어 도착한 기지에서 체-854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샤워였다. 정문 바로 앞에 있는 세척장에 들어가 입고 있던 무거운 옷들을 전부 벗어 던진 후, 비눗물과 스펀지로 전신을 박박 문질렀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서로 씻겨 주며 온몸을 꼼꼼하게 닦아내니 바닥에 흐르는 구정물 위에 벗겨져 떨어진 피부 조각들이 허옇게 떠다녔다. 몸의 물기를 닦아낸 체-854는 출구로 나와, 녹슬고 삐걱대는 사물함을 열어 옷가지를 꺼내 몸 위에 걸쳤다.

 

 뻣뻣하고 거친 천이 몇 번이나 벗겨졌던 불그스레한 피부에 쓸리자, 피가 배어 나왔다. 체-854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옷가지를 마저 걸쳤다. 이미 갈색으로 물든 옷에 새 핏자국이 생겨봤자 별 티도 나지 않을 것이다. 

 

 피부에 생긴 딱지들을 긁어내던 중, 예전에 베-264에게서 들었던 비단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질긴, 최고급 옷감으로 꼽히는 것 중 하나. 만들어진 지 수천 년이 지났지만, 언제나 최고급 천의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분명 뻣뻣하고 무거운 우리들의 옷감과는 비교도 안 될 것이라고 하던가? 독서를 좋아하는 동료가 있으면 이런저런 잡지식을 알 수 있어서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한테 독서를 강요하는 잔소리만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젠 콘크리트 속에 파묻혀 있는 베-264를 떠올린 체-854는 자그마한 한숨을 쉬었다. 과연 언제쯤이면 그녀들이 그런 옷을 입을 날이 올지 생각하면서.

 

 목적 없이 터덜터덜 걷던 중 체-854를 누군가 불러세웠다. 의복조 중 한 명인 체-852는 손이 모자란다며 그녀에게 같은 체 번대로서의 연대감을 주장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체-852가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녀가 800번대나 850번대로서의 연대감까지 들먹이기 전에 체-854는 순순히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일할 때 쓰는 것보단 질이 좀 떨어지는 방진 마스크를 쓴 후 그녀는 자기 앞의 방수포에 납 조각들을 바느질해 붙이기 시작했다. 옆의 체-852가 하는 본격적인 재봉보다는 난도가 낮은 작업이었다. 하지만 바느질이 익숙지 않은 자신에게는 산더미 같은 방수포와 납 조각들을 일일이 바느질하는 것도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귀찮기도 하고.

 

 다행히 바늘 끝을 더럽히지 않고 무사히 작업을 끝낸 그녀의 눈에 불그스레하게 물들어 있는 실타래가 들어왔다. 바늘 끝 ‘만’ 더럽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반사적으로 한숨이 나왔다. 천과 납 조각에 쓸려 벗겨진 채 피투성이가 된 손끝을 본 체-854는 체-852에게 깨끗한 천 조각 몇 개를 부탁해 상처를 싸매고는 체-852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지혈했다. 거친 천 조각이 상처에 맞닿았지만, 고통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호복 제작을 끝낸 체-852는 체-854와 함께 식당으로 걸어갔다. 수많은 동료로 가득 찬 식당에서 둘은 배식 담당에게 죽과 삶은 감자를 받아 서로 마주 보고 앉아 먹기 시작했다. 물과 호밀만 넣고 끓인 죽과 말라비틀어진 감자는 빈말로라도 질이 좋지는 않았지만, 고된 노동으로 주린 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게다가 오늘의 죽은 평소와 달리 기름기와 갈색 조각들이 떠다녔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카-45번이 식량조가 놔둔 덫이 오래간만에 제 역할을 했다고 둘에게 말해 주었다. 예전에 새해 기념으로 반장이 통조림을 배급한 이후로 처음 보는 고기였다.

 

 그릇 바닥까지 긁어먹을 기세로 죽을 먹는 체-852와 달리, 체-854는 아끼는 알루미늄 숟가락을 꺼냈다. 자신의 제작되기도 전의 시절-2095년-이 새겨진 그 낡은 숟가락은 그녀의 책벌레 친구, 베-264가 생전에 물려준 것이었다.

 

 체-854는 품에서 작은 쌈지를 꺼내 안에 든 귀중한 암염 가루를 조금 집어 죽 위에 뿌리고는 숟가락으로 한번 휘저었다. 그러고 조심스레 한 숟가락을 떠서 입안에 넣자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일을 마치고 먹는 따뜻한 죽 한 그릇의 대가는 목숨 약간.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처음에는 점잖게 먹는다고 먹었지만, 어느새 앞의 체-852처럼 죽을 퍼먹고 있던 체-854는 숟가락이 그릇만 긁게 되자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죽과 같이 받아왔던 감자를 먹고, 남은 껍질로 그릇을 한번 닦은 후 입에 넣고 삼킨 체-854는 마지막으로 숟가락을 핥는 것으로 저녁 식사를 끝냈다.

 

 식당을 나와 체-852와 헤어진 체-854의 옷 사이로 서늘한 밤공기가 파고들었다. 어차피 더 이상 밖에서 볼일도 없었기에, 체-854는 서둘러 자신의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로 들어가던 그녀는 잊지 않고 1층 구석에 가득 쌓여있던 장작 묶음 두 개를 들고 4층으로 올라갔다.

 

 여기저기 금 간 계단을 올라 녹슨 쇠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는 우선 방 한가운데에 있는 난로에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고 발갛게 타고 있었기에 몇 번 불어준 뒤, 마른 이끼를 그 위에 약간 올려놓고 불이 옮겨붙길 기다렸다 장작을 쌓아 올렸다. 한동안 빈방이었던 탓에 남아 있던 묵은 냉기가 한결 가셨다.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난로 위에다 주전자를 올려놓은 체-854는 수납장 위에 놓인 깡통 안에서 ‘커피’ 가루를 약간 덜어 양철 컵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끓기 시작한 물을 컵 안에 붓자, 나쁘지 않은 향기가 방 안을 맴돌았다. 알루미늄 숟가락으로 조금 저은 후, 한 모금 홀짝였다. 쌉싸래한 뜨거운 커피가 뱃속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몸의 긴장이 풀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가 마시는 ‘커피’는 커피가 아니었다. 깡통에 있던 가루는 민들레 뿌리를 말려서 볶은 것이니, 엄밀히 말하자면 ‘차’에 속하는 것이었다. 물론, 진짜 커피를 마셔 본 바이오로이드가 손에 꼽을 정도인 이곳에서는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멍청이는 없었지만.

 

 밤 10시가 되자 천장에 매달려 있던 전등이 꺼졌다. 전기를 얻을 수단이라고는 너덜너덜한 인력 발전기, 삐걱대는 풍력발전기, 물때가 뒤덮인 수차, 그리고 보급 부족으로 평소에는 거의 돌리지 않는 연료 발전기밖에 없는 이곳에서 전기 부족은 일상이나 다름없다. 덕분에 밤마다 중요 시설을 제외하고는 전기가 끊겼고, 당연하게도 바이오로이드의 주거시설은 중요 시설이 아니었다.

 

 난로에 장작 몇 개를 더 집어넣은 체-854는 낡고 곰팡내 나는 담요를 덮고 침대 매트리스에 누웠다. 누우면서 등의 감촉으로 매트리스 속을 갈 때가 된 것 같다고 판단한 그녀는 내일 체-852에게 부탁해서 밀짚을 좀 얻어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격통이 체-854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급히 방 밖으로 나간 그녀는 층마다 하나뿐인 공용 화장실로 달려갔다. 잠시 후, 뒤를 닦은 이끼에 피가 묻어나온 걸 보고 체-854는 망연자실한 채 변기에 앉아 있었다.

 

 시선을 돌리자 표피가 벗겨진 채 검붉게 변색된 양팔이 보였다.

 

 죽기 전, 온몸의 피부가 벗겨진 채 전신으로 체액을 흘리며 의식을 잃고 누워 있던 베-264의 모습이 그녀의 머릿속에 나타나더니 이내 요즘 들어 기침이 잦아지고 가끔 피를 토하던 체-852가 떠올랐다.

 

 손을 씻고 방에 들어가 누운 체-854는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흐느꼈다.

 

 기지 외곽에는 자매들의 무덤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어둠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콘크리트 바닥 위에 셀 수 없이 늘어선 나무 십자가는 미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임박한 그녀의 현실을 체-854에게 상기시켰다.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아......”

 

 울다 지쳐 잠들기 전, 이곳에서만큼은 이룰 수 없는 소원을 한 바이오로이드가 빌었다.

 

 

 -쾅

 

 

 새벽녘의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체-854는 잠에서 깨어났다. 잘 때 자세가 이상했는지, 어깨와 허리가 뻐근했다.

 

 -쾅

 

 아직 몽롱한 그녀의 정신을 연달아 들리는 폭발음이 억지로 각성시켰다. 창가로 달려가 창밖을 내다보자 남동쪽 저 멀리에서 불길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상황을 깨달은 체-854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저 방향, 그리고 거리. 욱신거리는 자신의 뺨과 손바닥이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걸 알려줬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가볍고 허탈하게, 그리고는 옆방에서도 들릴 정도로, 마지막에는 배를 잡고 눈물까지 흘리며 미친 듯이 웃었다. 웃음소리는 그녀가 장비보관소로 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장비보관소로 걸어가던 도중 기지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와 함께 대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든 바이오로이드는 장비를 완전히 착용한 채 중앙 광장에서 대기하라는 내용이 기지 전체로 울리자 아직 잠에 취해있던 바이오로이드들도 다들 잠에서 깨어나서 기지 내 곳곳에 있는 장비 저장고로 이리저리 달려갔다.

 

 자기 장비가 보관된 저장고에 도착한 체-854는 락커에서 자신의 방호복과 방독면을 꺼내 입었다, 방수포에 납 조각을 꿰매었을 뿐인 방호복과 깡통에 헝겊과 활성탄을 채워 넣은 게 전부인 필터가 달린 방독면. 너무 믿음직스러워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광장으로 나간 체-854는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로 가득 찬 광장을 보곤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과연 이들 중 얼마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라는 말을 그녀는 속으로 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으로 한 바이오로이드가 걸어 나왔다. 반장직을 맡은 그녀는 담담하게 지휘관 대리로서 상황을 설명했다. 대부분은 그 내용에 절망했다. 몇몇은 현실 앞에 좌절해 울거나 화를 내기도 했다. 극소수는 체-854가 그랬듯, 미친 듯이 웃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그들의 용도에 맞게 소비될 운명이었다.

 

===============

 

 체-854는 다른 자매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호스를 붙들고 있었다.

 

 기지의 연료 발전기를 전력으로 가동해 쏘아내고 있는 물줄기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불이 난 건물에 쏟아부으며 화마를 진정시키려 하고 있었지만, 지금도 맹렬히 타오르는 새빨간 불꽃은 진화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몇몇 바이오로이드들은 바이오로이드 특유의 신체 능력으로 흙과 모래를 삽으로 퍼서 수십 미터 넘게 떨어진 화재 현장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지만 유의미한 성과는 없었다.

 

 그러던 도중, 몇몇 바이오로이드들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그녀들이 맡고 있던 호스가 제멋대로 날뛰자 다급히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호스를 붙잡고 다시 물줄기를 똑바로 쏘아냈다.

 

 마치 살아있는 대사(大蛇)마냥 꿈틀거리는 호스를 붙잡고 있던 체-854는 시야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두통이나 입안의 납 맛은 무시하고 서 있던 그녀였지만 이번 건 견디지 못하고 조금 휘청거렸다. 

 

 옆에서 삽을 들고 있던 바이오로이드가 삽을 내던지고 달려와 그녀 대신 호스를 붙잡았고, 그걸 본 옆에서 상황을 감독하던 반장이 그녀에게 후방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그녀는 힘없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 어느새 체-854의 전신은 땀에 젖고 온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 외에도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탈진하거나 쓰러질 때까지 화마와 싸웠지만, 불길은 여전했다.

 

 말없이 이를 악물고 있던 반장은 옆에 있던 부반장에게 잠시 지휘를 맡긴 채 갑자기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십여 분 뒤. 체-854는 다시 호스를 붙들고 있었다. 

 

 그 십여 분 사이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쓰러졌고, 조금이라도 힘이 남은 바이오로이드 전부는 글자 그대로 생명을 태우며 악착같이 화마와 싸웠다. 체-854도 그중 하나였다.

 

 그때, 사라졌던 대장이 돌아왔다. 돌아온 그녀는 양팔로 커다란 금속 통 몇 개를 들고 있었고, 원통 표면에 적힌 ‘액체 질소’라는 글자가 체-854의 눈에 들어왔다. 통들을 순식간에 화재 중심부로 던져 넣은 대장은 마지막으로 수류탄 하나를 같이 던져 넣었다. 몇 초 뒤, 폭발음과 함께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불길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바이오로이드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배양조 밖으로 나오던 힘까지 짜내며 진화 작업을 속행했다.

 

 몇 시간 뒤, 하늘 높이 태양이 떠올라 그 빛을 뿌렸다. 햇빛 아래 바이오로이드들은 투박한 방호복 차림으로 검댕과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방독면 아래로는 모두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들 앞에 있던 불길은 이제 완전히 진화되어 그저 가느다란 연기만을 하늘 높이 올려보내고 있었다. 체-854도 다른 자매들과 함께 미소를 지었지만, 그 이상으로 위험한 게 아직 남아 있다는 생각에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얼마 뒤, 대장의 명에 따라 그나마 멀쩡한 몇몇 바이오로이드가 화재가 일어났던 건물 내부로 들어가 그 원인과 피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들 중에는 체-854도 있었다.

 

 어두운 건물 내부로 들어가자 희미한 손전등 불빛이 비치는 것들이 보이는 전부였다. 감지기에서 들리는 삑삑거리는 소리는 계속 시끄러워지다 어느새 최대치가 된 지 오래였기에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어두운 복도를 걷던 중, 체-854의 눈에 우그러지고 그을린 금속 조각들이 들어왔다. 형편없이 망가지긴 했지만 그녀는 그게 멸망 전쟁 당시 이곳에 오폭되었던 수많은 폭탄들 중 하나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60t 정도 나가는 인류 최강의 벙커버스터들 중 하나였던 그것은 멸망 전쟁 당시 이곳에 떨어진 폭탄들 중 하나였다. 

 

 다행히 그중 일부는 불발해 시설의 완전 파괴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시설은 순식간에 회생 불능 상태로 되었고, 그로 인해 기지의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죽었다.

 

 유난히 불발탄들이 많이 떨어진 이 구획은 피해가 비교적 작았지만 그래도 희생된 바이오로이드는 적지 않았다. 시설의 특성상 불발탄들의 제거가 너무나도 어려웠기에 몇몇을 희생시켜가며 기폭장치들만 제거한 것들이 적지 않게 이 시설에 굴러다니고 있었고, 무슨 불운인지 오늘 새벽에 하나가 폭발하며 그대로 전부 유폭된 걸로 추정되었다.

 

 아까부터 심해져만 가는 뒷목의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체-854는 무심코 어느 부분에 손전등을 비췄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 시설의 설계도를 수십 번도 더 넘게 본 그녀는 현재 자신의 위치와 눈에 들어온 흑연 조각들과 우그러진 파이프가 의미하는 걸 정확하게 알아챘고, 즉시 다른 자매들을 이끌고 있던 곳을 이탈했다. 

 

 온 힘을 다해 정신없이 달리던 그녀의 머릿속에는 너무 늦어버린 게 아닐까, 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렇게 공포에 사로잡힌 체-854는 시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그래서 발밑으로 굴러든 둥근 쇠공을 알아채지 못했다.

 

 폭발과 함께 수십 개의 쇠구슬이 그녀의 몸을 찢어 놓았다.

 

 수십 년 전에 투하되었던 확산탄의 자탄은 확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고, 체-854는 내장과 살점과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뒤따라오던 자매들이 그녀에게 달려왔지만 그들은 이미 체-854가 끝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점점 흐려져 가는 시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체-854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아무도 듣지 못했던 그녀의 유언은 이랬다.

 

 -추한 모습으로 죽지 않아 다행이야.

 

 그렇게 한 바이오로이드는 자신의 소원을 이뤘다.

 

=====================

 

 2174년, 우크라이나 프리피야트의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원자력 발전소-일명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불발탄 폭발과 그로 인한 화재로 인해 원자로 3호기가 파괴되면서 7등급 원자력 사고가 발생했다.



-----------------------------------------------


 긴 글 읽어줘서 고마워. 지난번에 창작 바이오로이드 올렸다가 평이 나쁘지 않아서 글 썼던 거 올리게 되었어.

https://arca.live/b/lastorigin/32251520?category=%EC%B0%BD%EC%9E%91%EB%AC%BC&target=title&keyword=%EC%B0%BD%EC%9E%91&p=1

 위는 지난번에 올렸던 창작 바이오로이드 설정이야. (혐주의)

 그림도, 글도 많이 부족하지만 여기까지 봐줘서 다시 한 번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