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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버둥쳐도 소용없어"


나지막이 들려온 비웃음이 섞인 말에 사령관은 깜짝 놀라 몸을 경련했다.

부드럽게 몸을 받치고 있던 의자가 뒤로 미끄러지며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바닥을 뒹굴자,

한자리에 모인 지휘관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의 믿음직스러운 상관을 바라봤다.


"...중요한 전투가 코앞인데 팔자 좋네, 사령관?"


"오죽 신경 쓸 게 많으면 그러겠나. 수많은 목숨이 달려있으니 어깨가 무겁겠지"


기가 차다는 듯이 내리꽂는 메이의 날카로운 시선을 만류하는 칸의 말마따나, 

사령관은 자신의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있는 걸 새삼 느끼며 뻐근한 몸을 바로잡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미안, 깜빡 졸았나 봐. 어디까지 했더라?"


"무적의 용이 이끄는 함대로 레모네이드 감마의 함대를 정면에서 압박하고, 

일방적인 전력 차를 주지시키며 싸워봤자 비참한 패배만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엄포를 놓아 

발버둥쳐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의를 상실한 감마의 휘하 병력을 별다른 손실 없이 확보하겠다는 달콤한 꿈같은 소리를 늘어놓았지"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는 메이의 설명을 들으니 몽롱한 사령관의 머릿속에서 빙빙 돌던 퍼즐이 다시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르카 호는 거점을 추가로 마련하고 세력을 확장하고자 오세아니아에 진출하기로 방향을 잡았고

이는 해당 지역을 포함해 태평양 일대를 세력권으로 둔 레모네이드 감마와의 충돌을 의미했다.

얼마 전 알래스카에서 오메가를 패퇴시킨 이래, PECS와의 전면전은 더 미룰 수 없는 숙제였지만

레모네이드 개체 중에서도 PECS 총수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강하며 호전적이라 평이 자자한 감마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대.

실제로 이그니스를 복원시킨 후 이그니스가 감마가 아닌 라비아타의 저항군을 택하자 길길이 날뛰며 일전을 불사할 정도였다지 않은가.

비록 오메가의 세력이 다른 모든 세력을 합친 것보다 강하다고는 하나, 감마가 이끄는 포세이돈은 PECS의 자랑거리인 해군이기에

이는 오르카 입장에서 되도록 자극하고 싶지 않은 난관으로 다가왔다.


'소관이 썩 믿음직스럽지 않은가 보오?'


피할 수 없는 전투가 불러올 피의 무게로 주저하고 있던 사령관의 등을 떠밀어준 건 일전에 그 포세이돈을 이끌어본 적이 있는 무적의 용이었다.

몸소 나선 전투마다 승리를 안겨주어 무적이라는 칭호가 붙은 뛰어난 지휘관.

호라이즌과 포세이돈, 머메이든을 이끈 실력과 경험은 이런 대규모 전투에 크나큰 도움이 되겠지.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현명한 전략으로 자자한 명성도,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에 자신을 이끌던 지휘관을 

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 놓일 포세이돈을 생각해도 이번 인선에는 용보다 적합한 해결사가 없었다.

목숨을 빼앗는 것보다는 전의를 꺾어 투항을 유도하는 게 훨씬 나으니까.

사령관은 그 누구의 희생도 원치 않았고, 지금까지 단 한 명의 바이오로이드와 AGS도 잃지 않는 기적적인 행보를 이어왔다.

하지만 이는 사령관의 전략적 안목과 지휘력만으로 빚어낸 게 아닌, 

오르카가 대대적인 전투를 감행할 상황을 마주하지 않았던 운 덕이기도 했다.

그 운을 떠나보내야 하나 갈등하던 차에 든든한 버팀목이 있으니 이보다 다행일 수 있을까.


'용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지. 함대의 규모도 충분하고. 다만 이번 전투에선 우리뿐 아니라 감마 측의 피해도 최소화하고 싶어.

감마야 타협의 여지가 없다 할지라도 휘하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언제까지나 적이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한도로 함대를 꾸리고 다른 지휘관들과 연계작전을 통해 확실하고 일방적인 승리를 일궈내자.

사살보다 생포가 훨씬 어려운 건 당연하지만...부탁해도 될까?'


'그대의 기대에 부응하겠소. 지휘관들을 소집해 구체적인 작전구상을 해야겠군'




그렇게 한데 모여 서로의 식견을 주고받으며 심혈을 기울이다 긴장의 파도가 밀려와 정신줄이 잠시 끊겼던 게 몇 분 전이었다.


"각하, 피곤하시다면 잠시 휴식시간을 가질까요?"


"아니, 괜찮아. 계속하자"


걱정스러운 표정의 마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밝은 미소를 보인 사령관은 

아까부터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레모네이드 알파에게 말을 걸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알파의 조언을 듣고 싶은데, 감마는 어떤 적이야?"


"...어떻게 보면 오메가보다도 답이 없는 상대죠. 제 자매 중에서도 PECS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강하고,

장차 그 늙은이들이 부활해 이 세상을 다시 거머쥐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고집불통이에요.

이를 위해서라면 말 그대로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을 테니 피를 보는 건 당연지사.

주인님께서는 관대하시니 되도록 많은 투항자를 포섭하려 하시지만, 감마는 결코 거기에 응하지 않을 거에요.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 과격한 성품 때문에 휘하 바이오로이드들이 적지 않은 반감을 품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겠죠"


"그 점을 공략해 전의를 꺾고 내분을 야기하는 편이 낫겠다는 건가...

싸움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니 감마가 고집을 부려도 병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


"역시 주인님이세요. 그렇기에 제가 감히 한 말씀 올리자면, 처음부터 압도적인 병력 차로 압박하고 심리전을 펼치는 건 어떨까 하네요.

감마의 세력이 태평양 일대를 장악하는 커다란 규모이긴 하지만 무적의 용이 이끄는 해군 앞에선 날개가 꺾일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과거 자신들을 이끌었던 지휘관과, 함께했던 동료가 눈앞에 있는데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들까요?

결국 전의가 꺾인 병력이 투항하는 것을 보면서 감마는 홀로 길길이 날뛸 거에요.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악다구니를 쓰다가, 그렇게 추종하는 PECS의 늙은이들을 만나러 저세상으로 갈지 기대되네요 "


특징을 공유하는 자매이기에 이렇듯 추구하는 방향이 엇갈리면 그만큼 무서울 정도로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걸까.

쿡쿡거리며 작게 웃음소리를 내는 알파가 자신에게 투항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사령관은 다른 지휘관들의 의견을 물었다.


"우리 중 가장 상대를 잘 안다 할 수 있는 알파가 이리 말했으니 내 욕심이 마냥 과한 건 아닌 듯싶은데...

전장에서 몸소 병사들을 이끄는 지휘관의 입장이라면 그저 탁상공론으로만 들릴지도 모르지.

냉철하게 비판해줘. 감마의 포세이돈을 투항시켜 우리 오르카로 영입할 수 있을까?"


사령관의 기대를 품은 물음에 지휘관들은 각양각색의 시선을 보냈다.


"단순 승리가 목표라면 이번 전투는 큰 무리가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소만...

처음부터 전의를 꺾어야 한다면 그만큼 일방적이고 압도적인 전력을 피로해야 하오.

정찰 결과를 토대로 가늠한 상대방의 병력을 크게 웃돌려면 우리가 동원 가능한 수준의 8할 정도는 끌어와야 할 텐데,

이는 그만큼 다른 지역의 병력배치에 빈틈이 생긴다는 뜻이기도 하오.

다행스럽게도 근래 철충들의 움직임이 잠잠해지긴 했지만, 언제까지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판단은 사령관에게 맡기겠소"


"저희 오르카의 세력도 나날이 커지고 있으니 새로운 지역으로의 진출은 언젠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오세아니아와 태평양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요충지임과 동시에 공략 부담도 타 지역에 비해 비교적 덜한 편이니 탁월한 선택이 아니겠습니까.

PECS의 영향력이 강대한 아메리카, 철충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다른 대륙에 비해 

오세아니아는 인구 밀집 지역과 인프라가 동부에 밀집되어 있으니 그곳만 점거하면 향후 안정적으로 내실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광활한 태평양이 안겨줄 수많은 섬과 자원 역시 든든한 기반이 되어줄 것입니다, 각하"


"문제는 감마가 이걸 모르지는 않을 거라는 거야. 그만큼 필사적으로 나오겠지.

포세이돈이 해군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우리의 전력을 상대로는 그마저도 퇴색해. 그럼 어떻게 나올까?

나라면 지리적 이점을 살려 상대 병력을 해안으로 유인하고 미리 준비해둔 지상군과 합세해 각개격파하려 들 거야.

정말 다행이네, 사령관? 상대방의 전략을 꿰뚫어보고 대응할 수 있는 유능한 지휘관이 있어서.

내가 이끄는 발할라가 승리의 깃발을 꽂아줄게"


"지상군과 합세해 각개격파라...좋은 지적이야, 레오나. 그럼 우리도 그에 맞서 지상 병력을 투입해야겠구나.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커지겠는데"


사령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펜대를 굴렸다.

단순한 소규모 국지전이 아닌 세력의 판도를 뒤엎고 앞으로의 향방을 좌우할 중요한 전투로 각오하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대비하려니 따지고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득실을 떠나 자신을 믿고 따르는, 그리고 자신을 믿게 할 수많은 생명이 걸려있기에 판단에는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유능하다 한들 자신 한 명만으로는 과연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인지 어지러울 때마다

지휘관들의 진솔한 조언은 큰 힘이 되어주곤 했다.


"발 빠르게 지상군을 제압해야겠군. 사막 기동전이라면 호드에게 맡기도록"


"상대방의 전략을 그대로 돌려준다면 그것도 볼만하겠지. 압도적인 화력지원과 함께라면 더욱 그럴 거다"


흔쾌히 답해준 칸과 아스널이 씨익 미소를 날리자 알음알음 덩치를 불리고 있던 부담이 빠르게 내리 녹았다.

마치 지휘관 한 명 한 명의 눈을 마주 보며 옮기던 시선이 갑자기 땅으로 꺼져 붉은 머리의 꼬맹이에게 꽂히는 것처럼....


"지금 이상한 생각 했지?"


"응? 아니야. 우리 유능한 메이 지휘관님의 예리한 통찰력이 어떤 도움이 될까 기대하고 있었지"


"말은 잘하네...해상이든 육상이든 우리 쪽의 전력이 우위일 테니 별문제 없을 거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남는건 공중인데 여긴 내가 있고. 애초에 섬멸이 아닌 병력 차와 위압감을 토대로 한 심리적 굴복이 주목적이랬지? 

하늘에서 내려오는 화약과 쇠의 냄새만큼 확실한 절망은 없어.

둠 브링어가 위협폭격을 가하면 우왕좌왕하다 지휘계통에도 혼선이 빚어질 테고, 나머지는 알아서 해.

아마 감마는 희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발악하려 들 거야. 

구석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 손실이 아예 없을 거라 기대하지는 마.

머리에 꽃밭이 핀 낙관론자를 위한 자리는 최소한 전장에는 없어"


"나도 내 고집을 마냥 밀어붙일 생각은 아니야. 어설픈 정으로 우유부단하게 임했다가 소중한 이를 잃고서야 후회하고 싶진 않거든.

뜻대로 전개되지 않으면 아군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신속하게 적 지휘체계를 우선 제압하고 

병력의 우위가 가지는 장점을 그대로 전장으로 옮겨야겠지"


파괴가 아닌 위협으로 그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전력을 안배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에 혀를 차며 내심 불만을 품고 있던 메이였지만,

사령관이 전장의 냉혹함을 잊지 않았고 자신의 판단과 선택이 불러올 결과의 무게를 여전히 실감하고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하자 

마음이 약간 누그러졌다.


"그래, 뭐가 됐든 감마에게는 한 방 날리고 볼 거야. 아마 이에 대응해 약간의 저항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감히 내게 도달한다는 건 넌센스고.

차라리 도중에 철충이 난입한다는 변수에 신경을 쓰는 게 더 나을걸?"


"농담을 할 정도인 거 보니 자신만만하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스카이 나이츠도 출격시키는 게...."


"그럴 필요 없다"


알바트로스의 음성이 사령관의 말을 자르자 약간 떠올랐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환기됐다.


'너무 무례한 거 아니야?'


'저 친구는 저게 매력이지'


다른 지휘관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효율을 중시하는 AGS 지휘관은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배정했다.


"공중 방호 및 전황 지휘는 내가 수행하겠다"


"...알바트로스라면 언제나 믿을 수 있지. 그럼 내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사항이나 현장에서의 다급한 대처는 알바트로스에게 위임할게"

2

"버러지들이 주제도 모르고 제 발로 기어오다니, 어이가 없어서 진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친 주먹에 꽃병이 박살 나며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지만, 레오네이드 감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멸절의 위기에 몰린 인류를 구원하고 다시금 세상을 열 PECS의 총수를 되살리고자 

충실한 비서인 레모네이드들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주인님을 배알할 실마리를 찾던 와중, 

망상에 빠진 알파가 반기를 들고 라비아타가 이끄는 저항군의 세력에 귀의했다는 소식을 들은 게 얼마 전이었다.

아직 살아남은 인간을 찾아 사령관으로 삼고 곳곳에 퍼져있는 바이오로이드를 규합하고 있다던가.

그 음란한 몸뚱아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생체딜도라도 그리워 다리를 벌리러 간 것이리라 치부하고 있었지만

오메가의 정예를 꺾고 세력을 알음알음 확장하고 있다는 정황은 썩 유쾌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래, 오메가에게 한 방 먹였으니 나도 만만하게 보인다 이거지? 같잖은 것들이 감히...!"


의식적으로 오르카를 폄하하고 있는 감마였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일고 있는 불안감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현 PECS를 구성하는 세력 중 가장 강력하고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오메가.

그 오메가가 오르카와 조우한 끝에 케스토스 히마스마저 소실하고 간신히 몸뚱이만 챙겨 달아난 후 

가장 먼저 신경 쓴 건 해당 소식이 다른 자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단단히 입단속 하는 것이었다.

비록 소수의 정예만 이끌고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었다고는 하나,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것으로 모자라

생포당해 그대로 포로로 끌려갈 뻔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약과고 

PECS 내 세력의 판도를 바꾸고자 다른 생각을 품는 개체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레모네이드의 능력 대부분은 케스토스 히마스에서 비롯되는바,

이를 잃고 도망쳐왔다는 것은 최소한의 자존심도 내팽개쳤다는 말이자 심각한 능력 하락과 동의어이기에

평소 반감을 품은 이에게는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핵심 장비를 잃은 오메가의 단속을 비웃으며 이미 다른 자매는 너도나도 해당 사실을 알아채고 비웃거나,

한 단계 더 나가 행동으로 옮기던 차였다.




날개가 꺾여 주춤한 오메가의 세력이 머뭇거리는 사이 은밀하게, 하지만 과감하게 병력과 시설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기존의 해군에 더해 세력 내 주도권을 손에 쥘 계획이 있었다.

눈과 귀가 흐릿해진 자매를 옥좌에서 끌어내고 자신이 대신 그 자리에 앉아 

언젠가 돌아올 PECS 총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자 하는 단꿈에 젖어있었다.

조급해하지 않고 충분히 시간을 들이면 가랑비가 온 옷을 적시듯 오메가의 기반을 상당 부분 뺏어올 수 있었을 테고,

뒤늦게 이를 눈치챈 오메가가 송곳니를 들이댄다 해도 눈멀고 이빨 빠진 짐승 따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비록 발톱은 건재하겠지만 이쪽 역시 결정적인 사냥을 위해 갈고 또 갈 생각이니까.

최소한 오메가 홀로 PECS 세력의 과반을 차지하던 일방적인 구도를 엎어볼 만한 기회가 처음으로 찾아왔다.

그 기회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함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첩보와 함께 한여름 밤의 꿈처럼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다.


"왜 하필 이때...! 그대로 오메가의 세력을 확실히 꺾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도 늦지 않는데, 거기엔 제대로 된 비서 하나 없는 모양이지...?

하긴 덜떨어진 알파를 좋다고 반겼으니 뻔하지. 그 최후의 인간이라는 작자도 머리가 전혀 안 돌아가는 머저리가 분명하네.

훗날 총수님이 돌아와 모든 걸 거머쥐시면 뒤늦게 울며 기어도 소용없어. 도살을 기다리는 암소처럼 배신자라는 낙인을 몸에 지져줄 테니까...!

아니지, 당장 이번에 목을 날리고 그 가증스러운 머리를 전리품으로 삼아줄게. 역겨운 년...!"


"저기, 이대로면 내일 10시 즈음에 적 함대와 조우하게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악에 받쳐 자신을 주체 못하는 감마를 보다 못한 보고병이 주의를 환기하고자 말을 걸었지만, 이는 곧이어 후회로 돌아왔다.


"어떻게 하느냐고...? 당연한 걸 물을 정도로 멍청한 바이오로이드는 배에 태운 기억이 없는데요?

그걸 굳이 새삼스럽게 말해줘야 할 정도로 한심하다는 걸 몸소 인정하는 건가요?"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치며 불안정하게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거짓말인양 거두고,

입꼬리를 올리며 다가오는 감마의 눈매는 소름 끼칠 정도로 날카로웠다.

실수했다는 경악과 함께 점점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에 맞춰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

마침내 퍼부을 대상을 정한 이상 한 치의 자비도 기대할 수 없겠지.

눈앞에서 구두 소리가 멈춤과 동시에 심장 역시 멈추리라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은 보고병의 떨리는 뺨을

감마는 피가 흐르는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며 미소 지었다.


"우리 친구가 생각이 짧아서 하나하나 가르쳐줘야 하나 보군요. 자비와 인내심은 리더의 미덕이니 차근차근 알려줄게요.

주제 파악을 못하고 사지를 향해 달려드는 멍청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어어...죽겠죠?"


"그래요. 심하게 멍청하진 않으니 다행이네요"


감마는 환하게 웃으며 보고병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집요하게 문질러 피 칠갑을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규모가 크다 한들 오합지졸이고 필사적으로 긁어모은 잔챙이들밖에 안 돼요. 

무적의 용...? 시대에 뒤떨어진 퇴물 따위, 계속 잠들어있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고 후회하게 되겠죠.

스스로의 위세에 취해 적진으로 달려들다니. 지리적 이점은 이쪽에 있고 머릿수로 들이댄다면 좁은 곳으로 유인해 각개격파하면 그만.

그 자랑거리인 함대가 포세이돈 육·해군 연합의 매서운 포격에 당황해 이도 저도 못하고 무너지는 광경이 벌써 그려지지 않나요?"


함대를 자랑거리로 삼는 건 우리도 매한가지이지 않으냐, 육군이라 봤자 더치 걸과 토미 워커까지 동원해야 하는 시점에서 

필사적으로 긁어모은 건 피차 같은 거 아니냐 묻고 싶은 충동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그걸 바로 내뱉을 정도로 보고병은 심하게 어리석지 않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본 데, 편히 말해봐요. 난 관대하니까"


미심쩍은 낌새를 눈치챈 감마가 보고병의 목을 쥐고는 힘을 주기 시작했다.

길게 다듬은 손톱이 피부를 파고들면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보다 훨씬 더한 공포가 옥죄며 숨이 턱 막히는 가운데 

보고병은 흐릿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입에 올렸다.


"아뇨, 차라리 투항하면 최소한 목숨이라도 건질텐데 

그것도 모르는 바보들이 벌이는 허튼짓을 보고도 냉정함을 유지하시는 게 존경스러워서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감마가 손의 힘을 풀자, 보고병은 켁켁거리며 자신의 목을 쥐고는 가쁜 숨을 골랐다.


"하긴 나 정도니까 이 자리를 감당하는 거죠. 철충이라는 위협도 결국 한때의 신기루일 뿐이고, 세계는 다시 PECS가 지배할 운명이에요.

총수님이 돌아오시면 우편엔 제가, 발밑엔 흔들리지 않고 충성을 바친 이들이 자리하겠죠. 당신도 말석 정도는 차지할 수 있을 거고요.

잘해봐요. 내일 있을 전투에서 활약하면 저들 가운데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투항한 이들을 부릴 수 있을 테니.

아, 이그니스 그 년은 배신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하니 줄 수 없겠네요. 그 정도는 이해해주겠죠?"


"예에, 물론이죠.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방을 나서며 자동문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감마와 있던 공간을 가르자

그제서야 막힌 숨을 한꺼번에 쉬는 듯 크게 심호흡을 하는 보고병에게 동료 바이오로이드가 다가왔다.


"괜찮아? 별일 없었고? 꺄악, 그 피는 뭐야?!"


"별일 없긴,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이건 내 피 아니고. 진짜 더는 못 버티겠다"


"쉿, 목소리 낮춰. 여차하면 들을라. 그나저나 그 소식 들었지? 오르카 저항군에 최후의 인간이 있다는 거"


"그럼, 내가 보고병인걸. 듣기로는 바이오로이드를 존중하고 거의 같은 인간처럼 대우해준다던데.

지난번에 송출하던 신호를 잡아보니 무슨 아이돌 팀도 만들었더라고"


"아이돌? 꺄하하, 그거 진짜 웃긴다. 아이돌을 빙자한 육노예는 아니고?"


"아니야, 노래 잘 부르던데. 어쩌면 심리전을 위해 의도적으로 흘린 기만일지도 모르지만,

만약 정말이라면 미래가 없는 여기에 남아있느니 차라리 오르카로 넘어가는 건 어때?"


"그러다 감마에게 들키면 어쩌려고? 그때는 정말 차라리 자비롭게 죽여달라고 외치게 될 텐데"


"그래서 그러는 거야. 만약 정말 PECS의 그 늙은이들이 되살아난다고 해도 우리에게 펼쳐진 미래는 멸망 전의 그 시절과 뭐가 다르겠어?

어쩌면 더 악독할 수도 있고. 그럴 바에 차라리 저쪽에 희망을 걸어보는 게 낫지 않아?"


"...이 이야기, 따로 누군가에게 했어?"


"아니, 아직"


"그럼 마음이 통할만 한 동료에게 퍼뜨릴게. 이왕이면 함께하는 머릿수가 많은 게 좋으니까"


전투의 불길이 다가오기도 전에, 그간 감마가 쌓아올린 업보라는 이름의 장작에는 이미 불이 붙기 시작했다.

3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거지?"


"그러게 기회를 줄 때 잡지 그랬어. 시간을 과거로 돌리고 싶지?"


"닥쳐! 네까짓게...!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젠 존대를 쓸 여유도 사라졌나 봐?"


양군의 최고 통수권자가 공개 채널을 통해 서로 맹렬히 비방하며 날 선 감정을 주고받는 광경은 누가 봐도 상당히 인상 깊었고,

그 둘이 각각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짐한 사령관과 자신의 자매인 레모네이드 알파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주인님, 흥분하신 건 아니죠? 저 과격한 암여우에게 휘말려 혹여라도 판단력이 흐려지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마, 설마 그럴 리가. 그냥 지르는 족족 도발에 넘어오는 게 재미있어서 그래"


어린아이마냥 키득거리며 여유만만한 태도를 유지하는 사령관의 모습.

이 신선한 모습을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고 오직 자신만이 독점한다는 사실에 알파는 묘한 만족감을 느꼈고

품었던 우려가 기우에 불과하다는 점에 밀려오는 안심까지 맞물려 전장의 한복판에 놓여있다는 상황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말씀대로 감마는 차라리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할 지경이겠네요. 기세 좋게 준비한 회심의 한 수마저 간파당했으니"


"솔직히 나도 놀랐어. 어떻게 예측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따라오지?"




수십 분 전.


"...작정하고 끌고 왔군요.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겠죠"


광활한 바다를 가로지르는 오르카의 장엄한 함대를 본 감마는 감탄과 경멸을 담아 내뱉듯이 말했다.

얼핏 보기만 해도 항공모함과 전함, 순양함 등 한 대만으로도 위협적인 적선이 수를 세기 아찔할 정도로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이 정도로 전력을 끌어왔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 잠수함도 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주력함대로 시선을 끈 사이 별도의 함대를 운용해 측면이나 후방을 포위하려 들지도 모르지.

이 정도 규모라면 제아무리 PECS 굴지의 해군을 이끄는 포세이돈이라 해도 승리를 보장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병력을 지휘하는 건 그 명성 드높은 무적의 용...솔직히 승산은 희박해. 하지만 여기는 내 홈그라운드.

지리적 이점을 살리는 게 뭔지 보여주지. 잘나신 불패신화도 결국 바다가 아니면 한계에 부딪힐 테니'


감마는 함대의 머리를 천천히 돌리며 오세아니아 동부 해안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움직임을 잘 보고 따라오라는 듯이.


"아아, 들리나? 여기는 오르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공개 채널로 전한다. 나는 오르카를 이끄는 최후의 인간이다.

우리와 대치 중인 레모네이드 감마와 휘하 병력에 알린다. 난 불필요한 피와 폭력을 원치 않으니 지금이라도 포를 거두고 투항한다면

신변을 보장하겠다. 서로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찾고 더욱 나은 미래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안녕하신가요, 자칭 최후의 인간. 저는 PECS의 총수를 섬기는 레모네이드 감마라고 해요. 생각보다 사려 깊고 현명한 분이시군요.

이렇게 대규모의 함대를 이끌고 오셔서 선전포고라도 하는가 싶었는데, 그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 만남은 평화롭게 끝맺겠네요"


"...뭐지, 진짜? 알파, 이거 어떻게 생각해? 분명 감마는 호전적이고 PECS 총수에 대한 충성심도 가장 강하다고 하지 않았어?"


"속지 마세요, 주인님. 감마의 성격상 분명 도발일 거에요"


예상 외의 흐름에 살짝 당황한 사령관의 물음에 알파는 미간을 찌푸리며 저 멀리 보이는 감마의 함대를 바라봤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따라오라는 양 천천히 방향을 돌리는 모습이 어설픈 함정을 쳐놓고 참새가 잡히길 바라는 뜨내기처럼 느껴져

아까부터 심기가 날카로워진 알파의 심경을 한층 구기고 있었다.

비록 추구하는 방향이 달라 어긋나긴 했지만, 감마는 알파 자신을 토대로 만들어진 개량형.

성능 면에서도 알파보다 뛰어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격정적인 성정이 종종 뛰어난 지성을 발목잡기도 하나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는 난적.

그런 상대가 우리의 예상처럼 뻔히 보이는 수를 쓸까?

어쩌면 거기까지 예상하고 다음 수를 준비한 것은 아닐까?

좋다고 달려드는 우리는 어쩌면 거미가 쳐놓은 함정에 몸을 날리는 나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표정이 좋지 않은걸. 괜찮아?"


"괜찮아요. 그저 감마는 제 자매기이니 방심하지 마시라는 말씀만 드리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기 그렇지만, 주인님께서 제 능력을 신뢰하신다면 그에 상응해 위협적인 게 감마니까요"


"나를 믿어. 이번 전투에 걸린 무게를 단 한 순간도 가벼이 여긴 적이 없으니까"


결의를 품은 눈을 빛내며 알파의 우려를 종식하고, 사령관은 다시금 마이크를 잡았다.


"대화가 통하는 교양있는 상대라면 기꺼이 장소를 마련할게. 그러려면 서로 거리를 좁혀야 할 텐데, 왜 멀어지는 걸까?"


"당연히 결론이 났으니까요. 더욱 나은 미래를 함께 만들어나간다고 했죠?

PECS의 이름 아래 모두가 하나로 결집해 총수님의 현명한 지도 아래 그 분의 영광을 만방에 전하는 것이야말로 응당 모든 존재가 짊어진 사명.

다른 인간은 필요 없으니 당신은 사지를 자르고 장난감으로 개조해줄게요. 혹여 애새끼라도 배게 되면 역겨울 테니 화학적 거세도 덧붙이죠.

똑같이 사지를 자른 알파와 이그니스 그 두 년과 몸을 섞을 자비는 베풀 테니 얌전히 무장을 해제하고 따라와요"


"...오메가만 성격이 더러운 줄 알았는데 감마도 한 가닥 하네?"


"화 안 나셨죠? 감마의 술수에 넘어가시면 안 돼요"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으로 거칠고 호전적인 응답이 들려오자 사령관은 순간적으로 마이크에 힘을 꽉 줬다.

자신이 조롱당해서가 아니라, 알파와 이그니스를 매도한 것에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을 느껴서였다.


"나를 믿어. 이런 얄팍한 도발에 넘어가면 사령관 자리 반납해야지. 작전대로 침착하게 추적하자"




사령관의 지시를 신호 삼아 무적의 용이 이끄는 함대가 일사불란하게 감마의 함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동부 해안을 향해 이동하는 모습이 흡사 미래를 읽는 눈을 안겨준 것 같은 착각을 품게 하였다.


"제1함대부터 4함대, 순차적으로 적 함대를 추적한다. 제5함대는 현 위치에서 대기,

제6함대는 좌측으로 크게 돌아 후방에 대기 중인 제7함대와 합류한 후 신호에 맞춰 목표 지점으로 향할 것.

제8함대는 현 잠항 심도를 유지하며 혹시 날아올지 모르는 어뢰 요격에 집중하라"


무적의 용의 호령 아래 태평양을 가로질러온 위용 넘치는 함대는 한 치의 오차 없이 주어진 명령대로 움직였다.

감마가 지휘하는 포세이돈 함대는 자신을 잡아보라는 듯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며 수평선 위를 알랑거렸고,

그 과정에서 중간중간 보이는 어설픈 움직임에 용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 내가 이끌었던 함대 일부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군...가능하다면 다시 몸소 이끌고 싶은데.

옛 전우들도 있으니 되도록 웃는 얼굴로 마주하고 싶지만 그런 기회가 올는지'


과거에 가르치던 학생이 훗날 길거리에서 어설픈 양복을 입고 거들먹거리며 일수에 몸담은 광경을 보게 된다면 이런 느낌일까.

은은하게 다가오는 반가움과, 그 반가움이 제대로 닿기도 전에 강하게 몰려오는 씁쓸함은 절로 감상을 품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용은 상념에 젖어 판단이 둔해지는 인물은 아니었다.


"애초 전망대로 목표는 해안을 향해 물러나고 있소만, 이 이상 따라가려면 해류와 주변의 암초를 고려해 

진형을 일렬에 가깝게 세워 우리가 지닌 수적 이점을 포기해야 하오.

또한 대기 중일지 모를 지상 병력에 아군의 측면이 노출되고, 발맞춰 전방의 함대가 역습을 가한다면 반쯤 포위당하는 모양새가 되어 

선두 진형부터 순차적으로 각개 격파당할 가능성도 있소. 

마음같아선 이쯤에서 포격으로 상대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싶군.

다른 선택지를 원한다면 슬슬 지상 쪽에서 연락이 와야 하오만...."


"조금만 기다려보자. 슬슬 올 때가 됐어"


패널을 통해 사령관과 대화를 주고받기가 무섭게 마리의 얼굴이 떠오르며 보고가 이어졌다.


"여기는 마리. 곧 사령관 각하께서 원하시는 다른 선택지를 제공해 드릴 수 있을 겁니다"


"6분이면 된다"


연이은 칸의 대답은 짤막했지만 그렇기에 강단을 품고 있었다.




오세아니아 동부 기지.

감마가 영향력을 떨치는 태평양-오세아니아 지역의 허리와도 같은 요충지였다.

서쪽으로는 광활한 대륙을 토대로 막대한 지하자원 채굴지와 훈련장이,

동쪽으로는 지구에서 가장 드넓은 바다가 품고 있는 수산자원과 해로가 끝없이 뻗어 나갔다.

이 모든 걸 아우른 해안 지역은 과거 멸망 전의 인간들이 밀집해 살던 지역이니만큼 당시의 인프라가 상당 부분 남아있었고

감마는 이를 유효적절하게 활용해 PECS의 일각으로 손색이 없는 기반을 다져놓았다.

활발하게 돌아가는 공장 시설을 위협할 철충의 존재도

해안을 끼고 있는 이상 서쪽의 황야로 공격 루트가 한정되기에 이 기지는 그야말로 남반구의 보석이라 불릴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보석은 소유자를 돌고 도는 법.

방금까지 감마가 믿고 있던 비장의 한 수였던 동부 기지와 미리 포진해있던 지상 병력은 불현듯 나타난 오르카의 지상군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뭐야, 기다리고 있다가 신호가 오면 해안에 붙은 적 배를 공격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지금 그게 문제야? 당장 코앞에 적들이 한가득...꺄악!"


맹렬한 속도로 다가온 모래 폭풍을 마주한 PECS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몇몇 용감한 이들이 당장에라도 풀릴 것 같은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사격을 해봤지만,

살아있는 갈색 폭풍은 조준구를 겨누기도 전에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옆에서 달려들어 허공을 맥없이 쏘던 총을 예리한 섬광으로 베어 가르고는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난 앵거 오브 호드를 이끄는 칸이다. 오르카에 투항하겠나?"


어떻게 들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거대한 리볼버 캐논을 흔들림 없이 쥐고는

머리를 조준한 채 노려보는 섬뜩한 눈빛에 일대의 병력은 전의를 상실했다.


"투, 투항할게요. 살려만 주세요"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아?"


"그러게요. 여기저기서 인원을 끌어모으니 그런 거 아닐까요?"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고 모인 티에치엔과 마이티R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굉음에 머리를 갸우뚱했다.

중요한 전투가 있으니 현재 소속과 수행 중인 업무는 중단하고 지정된 위치에 모여 대기하라는 감마의 통보에 의아하던 차였다.


"대체 뭘 꾸미고 있길래 우리까지 부르는 걸까? 내가 휘두르는 톤파라면 그 어떤 상대든 무찌를 수 있겠지만"


"자세한 건 말해주지 않고 필요할 때만 부려 먹으니 이래도 되나 싶어요. 단련할 시간도 부족한데"


어깨를 으쓱하며 양팔을 옆구리에 대는 티에치엔의 상완근을 유심히 바라보면 마이티R은 작게 불만을 토했다.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신체단련을 지도하는 교관으로 활약할 수 있다 해서 부푼 기대를 안고 감마의 세력에 동참했지만,

현실은 기대를 전혀 충족시키는 환경이 아니었고 다른 잡무에 동원되기 일쑤였다.


"나도 내가 왜 여기 있나 싶어. 우리는 저마다 주어진 역할이 있잖아? 

도구도 주인을 제대로 만나야 빛을 보는 거지, 여긴 도저히 있을 곳이 아니야"


"차라리 소문으로 들려오는 오르카 저항군으로 넘어갈까 봐요. 거긴 복지도 좋고 바이오로이드 만족도도 최상이라던데"


"그거 선동 아닐까? 감마가 주기적으로 하는 방송에서는 있을 리 없는 인간이 존재한다며 기만선전을 하고

거기에 넘어간 바이오로이드들은 죽을 때까지 착취당한다던데"


"에이, 아닐걸요? 아는 친구가 보안팀이라 전해 들었는데, 오르카에는 정말로 최후의 인간이 사령관으로 있고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인간이나 다름없이 대우해준대요. 오히려 인간에게 폭언하고 장난치는 바이오로이드도 있다던데요?"


"뭐? 진짜? 그거 순 거짓말이야. 인간과 바이오로이드라고? 어떤 호구가 그렇게 물렁하겠어?"


"그래도 여기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감마의 말대로 PECS의 총수가 부활한들, 그 후의 세상이 썩 좋을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가...하긴 여기서 의미 없이 부려 먹히느니 뭐라도 해보는 게 낫겠지"


"저기...여기 있어도 되나요?"


천막 안의 공기를 달구던 열띤 토론은 앳된 목소리에 잠시 끊겼다.

꾀죄죄한 복장의 더치 걸이 드릴을 끌며 어미 잃은 새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물론이지. 편하게 있어"


"세상에, 더치 걸? 최후의 항전도 아니고 감마는 무슨 생각일까요?"


"광산에 있어야 할 친구까지 불러모으다니, 아까 말대로 넘어갈까?"


"...광산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요?"


물기가 밴 눈망울로 빤히 바라보는 더치 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티에치엔은 당황하며 손사래 쳤다.


"응?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괜히 위험한 곳으로 부른 게 아닌가 해서 그래"


"전 지금이 더 좋아요"


"서 있지만 말고 편히 앉아요. 우리 꼬마 친구는 어째서 지금이 더 좋은 걸까요?"


마이티R이 붙임성 있게 더치 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긴장을 풀어줬다.

찰랑거리는 녹색 머리카락이 창문에서 비추는 햇살을 받아 한층 선명한 색을 뽐냈다.


"전 줄곧 광산 안에서만 지냈어요. 땅을 파고 또 파고, 캄캄한 지하에서 좋은 기억이라고는 가끔 땅 위에서 보내주는 사탕밖에 없었어요.

다른 더치 걸들은 담배를 더 좋아하긴 했지만..."


"괜한 질문을 했네요. 미안해요"


안쓰러운 눈길의 마이티R이 계속해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게 싫지 않은지, 더치 걸은 살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괜찮아요. 그러다 새로운 명령이 내려왔어요. 장비를 들고 여기로 오라고...덕분에 땅 위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어서 즐거워요.

언젠가 초록으로 가득 찬 지상을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다들 괜한 희망은 버리라고 했지만 지금 이렇게 제가 있잖아요?"


"정작 여기는 나무나 풀이 없지만...아야! 때리지 마!"


별 생각 없이 말을 내뱉은 대가로 묵직한 일격을 옆구리에 맞은 티에치엔이 몸을 뒤트는 것에 아랑곳없이,

마이티R은 더치 걸을 부드럽게 껴안았다.


"그래요, 목표를 정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면 언젠가 닿을 수 있어요. 

지금은 밝은 햇살만 반겨주지만, 조만간 무성한 나무와 싱그러운 꽃, 활기차게 뛰노는 동물들도 마음껏 볼 수 있을 거에요"


"너 애 잘 보는구나...희망찬 이야기를 하면서 훌쩍거리지 마. 나도 코끝이 찡하잖아"


"네? 전 훌쩍거리지 않았는데요?"


"그럼 더치 걸인가?"


"저 괜찮아요"


"뭐지? 잘못 들었나?"


그렇게 귀여운 새 친구를 맞이한 천막 바깥에서, 팬텀이 주변의 시야를 피해 은신을 잠시 풀고는 패널을 띄웠다.


"사령관, 정찰결과를 보고드립니다. 아...아니에요. 울지 않았습니다"




"저쪽은 벌써 칸이 홀로 정리를 마쳤나. 우리도 질 수는 없지, 모두 진격하라!"


마리가 호령하자 스틸라인이 언덕을 내려가며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PECS의 다른 무리를 덮쳤다.

가능한 최대의 협공을 준비하려 했던 것인지, 아니면 해군이 주력이다 보니 지상 병력 배치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건지

곳곳에는 전투에 썩 적합하지 않은 바이오로이드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가능한 한 생포하고 사살하지는 말라고 하셨슴까?"


"그래요. 각하께서 신신당부하셨으니 얼핏 보기에 적의 전력이 생각보다 만만하다 해도 결코 방심하지 마세요.

곳곳에 병력이 분산되어 있지만 전체 규모는 상당한 게 정찰로 확인됐고, 생포가 사살보다 훨씬 어려운 건 알고 있죠?"


"그냥 공포탄만 쏘면 되는 거 아님까? 실탄 안 챙겨왔지 말임다"


"...제정신이에요? 벌써 더위 먹은 거 아니죠?"


머리가 꽃밭인 브라우니와 속이 타들어 가는 레프리콘이 만담을 펼치던 와중, 귀퉁이 옆에서 토미 워커가 튀어나왔다.

아까까지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순식간에 금속의 거체가 만든 그림자를 드리웠고

시야를 가득 채우는 6m에 가까운 전고가 안겨주는 위압감은 순간적으로 브라우니의 몸을 머뭇거리게 했다.

아차 싶은 후회와 함께 뒤늦게 방아쇠를 당겼지만 이미 내려치는 육중한 무쇠 팔은 빈약한 공포탄 따위로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뭐 해요!"


앙칼진 외침과 함께 브라우니의 목덜미가 잡아채여 뒤로 날아간다.

균형을 잃고 나뒹굴면서 고개를 돌린 브라우니의 시야엔 먼지 구름과 함께 어지럽게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만 보일 뿐.


"레프리콘 상병님!"


다급한 브라우니의 외침은 귀를 찢는 폭발음에 묻혀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뭐하냐?"


"어, 이뱀, 나이스 샷이지 말임다"


"새끼가 빠져가지고...뭐, 실탄을 안 챙겨와? 잠 덜 깼어?"


"죄송함다!"


"죄송하면 다구나...군 생활 참 편하네..."


이프리트의 목소리는 늘어졌지만 갈굼 받는 브라우니의 긴장감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적당히 좀 해...그러다 욕보는 건 너야"


"시정하겠슴다!"


떠나가라 외치는 우렁찬 목소리에 순간 피아 구분 없이 주변의 시선이 한 몸에 꽂히고,

자욱한 먼지 구름을 손으로 휘휘 저으며 자신을 구해준 레프리콘의 상태를 확인하던 브라우니의 옆구리를 누가 쿡쿡 찔렀다.


"으아, 이건 아군 구조이지 말임다! 절대 농땡이 피우는 게..."


"저기, 오르카? 맞죠? 항복할게요"


깜짝 놀라 경직된 브라우니의 옆에는 흙먼지투성이의 더치 걸이 눈을 빛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지금이에요"


한 손에 와인잔을 들고 우아하게 목을 축인 감마는 미리 배치해둔 지상 병력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오르카의 자랑스러운 함대는 단순한 도발에 이성을 잃고 어떻게든 반격을 가하고자 진형을 일렬로 배치하면서까지 집요하게 추적해오고 있었다.


"정말 멍청하기 그지없다니까...암초와 해류 때문에 진형을 유지할 수는 없고,

어떻게든 한 방 먹여야 하니 수적 이점을 포기하면서까지 머리를 들이미는 모양새라니.

죽여달라고 하나씩 하나씩 찾아온다면 기꺼이 그리 해드리도록 하죠.

상상도 못했던 협공을 받고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네요. 뭐, 무적의 용? 오만한 것도 정도가 있지...!"


방금의 여유로움은 어디로 갔는지 감마는 성질을 내며 와인잔을 내팽개쳤다.

산산이 조각난 저 잔은 오르카에 다가오는 미래였고 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잔인하게 희생자를 유린할 것이 확실했다.

시야에 보이는 꼴사나운 전함은 곧 날아올 포격을 맞고 흔적도 없이....

전함이 점점 커지며 거리를 좁혀왔다.


"내 목소리 안 들려요? 지금 공격하라고요. 대체 뭐하고들 있는 거죠?"


당황한 감마가 조급함을 감추지 못하고 마이크를 쥐었지만 지지직거리는 잡음만 반겨줄 뿐, 충성스러운 병력의 응답은 들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이럴리가 없어...안 들려요? 대답해요, 어서!"


"네네, 여기는 티에치엔. 왜 그리 소란이야?"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감마는 순간 안도와 분노의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샘솟는 것을 느꼈다.

이게 무슨 생각으로 이따위 대답을 하는 거지?


"무례는 특별히 용서하도록 하죠. 지금이라도 어서 꼴사나운 오르카 함대를 공격해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당장!"


"엥, 싫은데~? 우린 오르카에서 새로운 삶을 살 거야. 더 이상 네 말은 듣고 싶지 않아"


"...뭐라고요? 지금 뭐라 했어요?!"


믿을 수 없는 소리에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감마는 온갖 폭언과 격노를 쏟아내려 했지만

뭐부터 우선 내뱉을지 자신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그렇기에 일방적으로 연결이 끊길 때까지 그저 벙어리처럼 있어야만 했다.

4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하지만 상대는 고양이가 아니라 노련한 호랑이였고, 쥐는 호랑이가 친 덫에 걸려 나름대로 갈아놓은 발톱까지 뽑혔다.

남은 건 혹시 모를 방심을 기대하고 발악하며 이빨로 물어뜯는 것뿐.

레모네이드 감마가 처한 상황이 그러했다.


"더러운 배신자들...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가 뭔지 두고두고 곱씹게 해주지"


결정적인 작전이었던 지상 병력과의 협공이 물거품으로 돌아갔지만, 

PECS의 성장과 중흥을 주도한 레모네이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감마는 예비책을 따로 준비하고 있었다.

본디대로라면 적을 충분히 유인한 상태에서 육·해군의 일제 포화로 기선을 제압하고 

연이어 장악한 제공권에서의 압박으로 절체절명이 뭔지 톡톡히 가르쳐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세상사가 언제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많은 이들이 예상 밖에 상황에 당황하고는 무너지기 마련.

감마는 그런 점에서 비교적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고 그게 이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계획이 틀어졌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에요. 어차피 전쟁에서 중요한 건 폰이 아니라 킹.

적 지휘함이 보기 좋게 전열에 있으니 확실하게 침몰시키세요"


"드디어 전투 임무군요. 준비할게요"


차분한 목소리가 돌아오자 감마는 울분을 가라앉히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뛰어난 리더쉽에 반기를 든 불순한 무리가 몇몇 있었지만 여전히 충성을 바치며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이가 남아있으니.

과거 이그니스의 사례를 겪은 후로, 감마는 바이오로이드의 영입에 한층 열 올릴 뿐 아니라 AGS의 확보 및 운용에도 큰 신경을 할애해왔다.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이에게는 풍족한 복지와 저마다의 요구조건을 보장했고, 

차가운 금속이 자아내는 이성과 논리는 섣부른 감정에 휘둘려 그릇된 길을 걷지 않겠지.

강력한 군단을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그 이상의 힘, 전장의 폭력뿐이었다.


"쾅!"


귀청을 흔드는 폭음에 안도가 놓인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죽음의 비가 어쭙잖은 기세를 꺾고 당황은 절망으로 이어지겠지.

매캐한 화약 냄새가 진한 커피 향 못지않게 기분을 어루만지니 조급함도 흐려져 간다.

비껴 맞았지만 일방적인 공습에 우왕좌왕하는 오합지졸의 모습.

실로 우스운 그 모습은 눈앞의 적선이 아닌 감마가 이끄는 함대에서 나왔다.


"...허?!"


피가 순식간에 차가워지며 뒷골에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오폭? 그럴 리는 없다. 실력에 자신있는 베테랑과 AGS의 정교한 사격이 이 정도로 크게 빗나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작열하는 햇빛에 눈이 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다급히 하늘을 올려다본 감마의 눈은 다행스럽게도 감기지 않았다.

둠 브링어가 머리 위에서 태양을 가리우고 있었다.




"난 아침의 네이팜 냄새가 좋아"


"아침도 아니고 네이팜도 안 썼거든요. 드디어 더위 먹은 건가요?"


"가슴뿐 아니라 눈치도 없구나. 이런 때는 맞장구 치는 게 기본 아니야?"


"말소리만 들리고 보이질 않아서 환청인가 싶었죠. 옥좌에 키높이 쿠션이라도 좀 까는 건 어때요?"


발 아래에 둔 적보다 서로를 향해 더 열 올리는 둘을 포착한 PECS의 드론이 빠른 속도로 날아오며 미사일을 발사했다.

맹렬한 기세로 추진체를 내뿜는 미사일은 연이어 날아온 다른 미사일에 격추당해 그대로 폭발하고,

드론 역시 곧바로 그 운명을 함께했다.


"럭키~방금 진짜 쿨하지 않았어?"


의기양양한 실피드가 양손으로 브이 사인을 하자, 옥수수를 먹고 있던 지니야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를 주변으로 겹겹이 둘러싼 호위망은 섣부른 공격시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건 어려울 것 같은데. 그래도 계약은 계약이니..."


고고도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후사르가 침을 삼키고는 맹렬한 속도로 하강했다.

명성이 자자한 둠 브링어를 공격하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임무였지만, 그렇기에 자신의 역량을 시험해볼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우주를 개척하는 원대한 사명을 지니고 지금도 궤도 정거장에 있는 동지들과 달리 지구에 남아 밤하늘을 바라볼 때는 울적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며 다가온 감마는 있을 자리를 마련해줌과 함께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에 대한 부채를 갚을 기회가 드디어 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감마는 썩 마음에 드는 인물이 아니었지만 그간의 융숭한 대접만 받고 입을 싹 씻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무엇보다 강적을 상대로 벌이는 전투라는 무대는 벌써부터 후사르를 흥분시켰고 

샘솟는 아드레날린은 죽음의 문턱이 엄습하는 지금 이 순간 아직도 살아있다는 실감을 안겨줬다.


"적성반응 포착. 무지 빠른데?"


"제가 갈게요. 잠깐만요, 이것만 다 먹고"


살짝 당황한 실피드를 안심시키며 손에 들고 있던 옥수수를 마저 다 먹은 지니야는 기세 좋게 후사르를 향해 날아오르면서 기관포를 난사했다.

제대로 피할 여유를 주지 않는 화망을 제트팩을 이용한 입체기동으로 피하며 유감없이 실력을 자랑하는 후사르의 검푸른 섬광과,

그걸 느긋하게 바라보며 턱을 괴고 있는 메이의 붉은 자태는 너무나도 상반됐다.


"지니야 쟤, 살이 너무 찐 거 아니야? 다이어트 좀 시켜야겠는데"


"그럼 세상 다 잃은 표정을 지을걸요. 그나저나 저 친구 엄청나게 잘 싸우네요. 저 정도 기동은 쉽지 않은데"


"어, 따돌렸다. 점점 다가오는데?"


지니야의 추적을 따돌린 후사르는 바다를 향해 내리꽂는가 싶더니 급격한 궤도를 그리며 그대로 메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 혼자라 캐도, 대장만 따믄 되는 거 아이가...!"


어떻게든 심판의 옥좌에 공격이 닿을 수만 있다면 일대는 대폭발에 휘말릴 것이고, 잘하면 그 한 방으로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되면 후사르 역시 무사하지 못하겠지만 전투의 열기로 흥분한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쯤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목표에 도달한다.

따라붙는 지니야를 뿌리치고 앞을 가로막는 실피드를 속이고자 다시 급격한 기동을 시도한다.

평범한 몸이라면 부하로 내장이 짜부라지고 각혈을 할 상황.

하지만 튼튼함만큼은 자신 있었기에 이를 악물고 또 한 번 방향을 튼다.

빈틈이다.

이제 기교를 부릴 필요도 없다.

바로 돌진하기만 하면...!




금속과 정밀 회로에 치명적인 테슬라 건에서 뿜어져 나온 일격은 갑자기 나타난 검은 거체에 막혔다.

분명 금속일 테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건재함을 과시하는 불청객.

의아함을 품을 사이도 없이, 연이어 몸으로라도 들이받으려는 후사르는 맥없이 잡히며 바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머꼬?"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두도록"


어느샌가 나타난 알바트로스의 감정 없는 목소리.

그 무기질적인 차가움이 전투의 흥분에 몸을 맡기고 있던 후사르의 머리를 빠르게 식혔다.


"...하아. 여기 까진가요. 어차피 계약관계였으니 이 정도면 의리는 지킨 거겠죠. 항복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제법 분별이 있는 친구네. 오늘까지 살아남은 게 그저 운은 아니었나 봐?"


"전투의 흥분에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으면 다음은 없죠. 대장은 그런 점에서 그 다혈질적인 성격 좀 다듬는 게 어떤가요?"


"무슨 소리야, 대령? 언제나 냉철함을 잃지 않고 명석한 판단으로 전장을 지배하는 게 누군데?"


"사령관을 대할 때도 그 명석한 판단 좀 보여줘 봐요. 다 된 밥을 날려 먹는 재주도 그 정도면 지정문화재급이라고요?"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와?! 전투 중이니 잡담 금지야, 시시콜콜한 건 계산대로 이 전장을 완벽히 유린한 후에 마저 해"


"그러시든가요. 오늘 승전보를 들고 가면 사령관이 수고했다며 여기저기에 총애를 쏟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알바트로스를 믿고 호위 병력을 평소보다 가볍게 대동한 그 과감한 결단을 좀 부하들의 한풀이를 위해 할애할 생각은 없는 건가요?"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피할 수 없는 파멸을 의미하는 죽음의 인도자.

둠 브링어의 명성을 알고 있던 후사르는 그 저승사자의 정점들이 적보다 서로를 상대로 더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는 모습에 긴장이 풀렸다.

그래서 자신을 붙잡고 있는 알바트로스가 갑자기 몸을 틀며 메시지를 송신하자 가볍게 뜨악하는 소리를 질렀다.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당장 해당 위치에서 후퇴해라"




"...뭐야? 사령관이 신뢰한다고 너무 주제넘은 거 아니야?"


레오나는 갑작스레 날아온 통신에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번 전투를 위한 회의는 결국 알바트로스가 전황 지휘를 맡는 것으로 일단락됐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규모의 다양한 부대를 동원하는 과정에서 더욱 매끄러운 연계를 위한 것이지,

각 부대의 지휘권은 여전히 지휘관들이 쥐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알바트로스의 일방적인 지시는 도를 넘은 것이었다.


"AGS가 원래 무뚝뚝하지 않습니까. 진형 배치는 이미 완료했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그대로 유지해. 내 완벽한 판단으로 최적의 위치를 선점하고 모든 상황에 대응 가능한 준비를 마쳤는데 후퇴라니, 말도 안 되잖아?"


발키리가 달래며 확인차 지시를 묻자 기분이 조금 풀린 레오나는 기존 배치를 유지하라 일렀다.

그게 당연했다. 이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일대의 지형과 상황을 분석하고 적의 규모와 수준을 파악,

전략적 요충지를 그 누구보다 먼저 확보해 자매들을 이상적인 진형으로 포진시켰다.

비록 약삭빠른 칸이 몸이 앞서 홀로 적진을 비집고, 마리가 이끄는 스틸라인이 우직하게 달려들었지만

그로 인해 빚어지는 혼란과 적들의 파상공세는 전황을 한층 어지러이 만들 촉매였다.

그 촉매를 중간에서 끊으며 전장의 주도권을 줄곧 쥐고 있는 건 레오나의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덕이었다.


"분명 공이 탐나서 그러는 거야. 전황 지휘라는 게 겉으로만 그럴 듯하지, 내실은 없으니까. AGS도 질투라는 감정은 느끼나 봐?"


"혹시 몰라 주변 탐사를 재차 수행했지만 별다른 이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하지, 이상이 발견될 곳은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야. 불필요하게 부지런해도 비효율적이니까 어깨에 힘 좀 빼"


"시정하겠습니다"


알바트로스가 아무 이유 없이 통보를 날렸을 거라 생각되진 않는다.

AGS와 바이오로이드는 너무나 다르기에 서로 불편하게 여기는 경우도 종종 있고,

과거 여러 전쟁을 거치며 살아남아 그 가치를 입증한 알바트로스는 뛰어난 능력만큼이나 자신을 완벽하다 치부했다. 

말 그대로 로봇 같은 판단력과 이를 뒷받침할 결과를 불러오곤 했기에 사령관은 알바트로스를 전적으로 신뢰했지만

그 거침없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어쩌면 배려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아 의도적일지 모를 언행은 

감정 모듈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게 만들곤 했다.

메이의 경우 냉철한 전략적 판단을 그 무엇보다 우선시했기에 의외로 알바트로스를 인정하며 호흡이 잘 맞는 모습을 보여 주곤 했지만,

레오나는 그 검은 철 덩어리가 종종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지휘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전장을 손바닥처럼 파악하고 최적의 조건과 상황을 갖춰 언제나 우위를 점하는 판단력이다.

마리만 해도 자신이 가장 앞에 나서 솔선수범하겠다는 구시대적 사고를 극복하지 못하고 

과거에 암살용 블랙 리리스와 동귀어진해 휘하 부대의 통솔이라는 본 사명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가.

이를 보완하기 위한 암사자 프로젝트의 결실이 레오나이니만큼, 

레오나는 전황 판단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그에 걸맞은 자신감 또한 지니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신중을 기하고 또 기해 선별한 요충지다.

갑작스러운 후퇴를 고려할 변수를 용인할 리가?

알바트로스와 레오나 모두 뛰어난 지휘관이고 서로 다른 답을 내놓았다면, 둘 중 누구를 택할지는 뻔할 뻔 자였다.

발키리가 주변을 재차 탐사한 것도 레오나의 판단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알바트로스의 괜한 의심을 덮고자 굳이 행한 선의의 결과일 터.

말투는 무뚝뚝하지만 그 따스한 마음씀씀이는 언제나 고맙게 느껴지곤 했다.


"저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모든 걸 볼 수는 없어. 현장에 있는 나보다 여기를 더 잘 아는 건 불가능해.

적이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말이 끝나기도 전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야?! 왜 갑자기 이런..."


"지진은...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예기치 못한 변수.

언제나 이에 노출된 상대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매사 모든 상황과 조건을 자신의 인지 하에 놓고 통제하는 레오나에게는 무엇보다 싫으면서도 존재해선 아니 되는 문제였다.

그 문제가 정교히 짜놓은 진형을 비틀며 자매들을 지형과 심리 양쪽에서 뒤흔들고 있었다.


"내 작전이...빈틈을 보일 리가 없어. 그래서는 안 돼"


"자매들에겐 지휘가 필요합니다. 지시 부탁 드립니다"


침착하게 곁을 지키며 직언하는 발키리의 마음이 닿았을까.

잠시 패닉에 빠졌던 레오나는 분별을 되찾고 알바트로스가 통보했던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다.


"발할라, 당장 현 위치에서 후퇴! 진형을 무너뜨리지 않고 신속하게 이동해!"


전방에 있던 알비스까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달려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요동치던 땅이 갈라지며 내뱉은 내용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수의 철충들이 일제히 솟아올라 동체를 삐걱거리고 있었다.


"어디서 이 정도 규모의 철충들이...이게 우리 발밑에 있었다고...?"


자매들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후퇴한 걸 확인한 레오나는 잠시 긴장이 풀린 건지,

아니면 포식자의 아귀에 스스로 머리를 가져다 대고 있던 상황을 주도한 것에 넋이 나간 건지 얼굴의 핏기가 빠르게 사라져갔다.


"레오나 대장, 들리나? 여기는 캐노니어의 로열 아스널이다. 갑작스럽게 대규모 철충 무리가 나타난 것 같은데, 지원해도 되겠나?"


통신 패널이 활성화되며 아스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캐노니어가 후방 화력 지원을 위해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던 건 사태에 대처하기엔 다행이었고, 레오나의 자존심을 지키기에는 불행이었다.


"레오나, 괜찮아? 근처에서 갑자기 다수의 철충 신호가 포착됐는데, 별일 있는 건 아니지?"


사령관의 다급한 목소리도 이어진다.

언제나 그립고 듣고 싶은 목소리.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발 관심을 두지 말아 주길 바라고 싶은 목소리.

휘하 부대원들을 말 그대로 사지로 몰고 간 지휘관에게 사령관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행운의 여신, 혹은 불행의 여신은 레오나를 완전히 버릴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정교하게 맞춰놓은 퍼즐을 뭉개버린 철충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대로 서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발할라와 거리를 벌렸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상황은 일단락됐으니 지원은 무의미해"


"그런가. 미안하지만 이미 한 방 날렸으니 그건 안부인사로 쳐주면 좋겠군"


아스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굉음이 울리며 철충 무리 한가운데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화약과 금속의 냄새. 허공에 흩날리는 장갑과 회로의 파편들.

자극을 받은 철충들이 방향을 바꿔 달려든다면 모처럼의 행운이 절망으로 뒤바뀔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철충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층 속도를 올리며 서쪽을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지금 이거 민폐인 거 알지?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면 좀 더 신중함을 지녀"


"그대의 말이 맞다. 마음이 앞섰군. 내 사과하지"


자칫 더 큰 위기에 빠질 뻔한 레오나의 질타에 딱히 할 말이 없어서였을까. 

시원시원하게 이를 받은 아스널은 패널을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대장, 괜찮으십니까?"


"...내가 틀렸었다고...? 현장을 몸소 파악하고도 멀찍이서 바라본 것보다 판단이 떨어져...?"


입 안이 쓰다.

발키리의 눈 앞에는 지나친 자기 과신으로 휘하 대원들을 위험으로 몰고 간 경솔한 리더가 있지 않았다.

레오나가 그 누구보다 작전의 계획과 실행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걸,

본인의 판단과 결정으로 자매의 목숨이 오간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에 

그만큼 확실하고 믿을 수밖에 없는 지휘에 모든 것을 건다는 걸 곁에서 지켜보며 알고 있었다.

지금도 떨림이 멈추지 않는 어깨를 숨기지 못하면서 중얼거리는 대장의 모습은 자신의 실수를 합리화하는 게 아니라,

소중한 자매들을 하마터면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질책이 채찍처럼 내질러져서였다.

이 얼마나 안쓰러운가.

발키리는 레오나를 부드럽게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걱정 마십시오. 대장"


그 누가 철충이 땅 밑에서 솟아오를 줄 알았을까.

알바트로스는 이를 어떻게 알았을까.

철충들은 어째서 포격을 맞고도 계속해서 서쪽으로의 이동에만 전념했을까.

소용돌이처럼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5

"철충이라니, 그것도 땅에서 솟아올랐다고? 신호에도 안 잡혔었지?"


"예, 사전에 진행했던 여러 차례의 정찰과 탐지에도 포착되지 않았었어요. 설마 철충들이 땅을 파고 숨어있을 거라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을까요?

뿐만 아니라 교란 파장을 내뿜는 철충도 일부 있었던 모양이에요"


사령관의 물음에 레모네이드 알파는 난색을 표하며 답했다. 

이번 전투의 주적이 레모네이드 감마라 하여 혹시 모를 철충의 난입을 상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정보 수집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지만, 이 모든 대비와 예측을 뚫고 대규모 철충이 땅 밑에서 나타날 줄이야.

레오나가 이 일로 자존심에 생채기가 난 것 같지만 레오나가 아니라 그 누가 와도 이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알바트로스의 말을 좀 더 귀담아들어 줬다면 좋았을 텐데"


"지시만 있었지 근거는 따로 전하지 않았으니까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감정 모듈을 다듬어볼까요?"


"알바트로스 본인이 동의할지부터 물어보고. 그 뛰어난 능력의 반만이라도 공감능력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알바트로스에게 전황 지휘를 맡긴 것은 실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감마의 함대는 당초 기대했던 지상 병력과의 연계가 완전히 무너져 당황하는 게 움직임에서부터 보였고,

발악이라도 하려는지 공중 병력을 동원했지만 이미 제공권은 둠 브링어가 장악하고 있었다.

설령 기존의 두 배를 투입했다 한들 알바트로스가 담당하는 공중 방호를 뚫지는 못했으리라.

지나치게 냉철하고 결론 도출적인 언행을 보이는지라 때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알바트로스는 언제나 믿고 맡길 수 있는 보험 중의 보험이었다.

이번 역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철충의 등장을 홀로 포착하고 조기경보에 힘쓰지 않았던가.

아쉬운 점이라면 그 효율에 집중하는 언행이 다른 이들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종종 오해를 불러오기도 한다는 것.

이마저 개선된다면 진정 최강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겠지.

그러고 보니 레오나는 이번 일로 나름의 충격을 받았을 터이니, 전투가 끝나면 따로 위로해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충들이 공격을 당하고도 얌전히 도망에만 집중했다는 게 신기하지만 굴러 온 행운에는 감사해야겠지.

사령관의 머리는 현 상황과 그에 대한 분석으로 가득 차갔다.


"...인님? 주인님?"


"응? 미안, 생각에 집중하느라"


"후훗, 그런 모습도 매력적이세요. 다른 자매들도 주인님을 직접 뵈면 PECS의 늙어 비틀어진 망령에 연연하지 않고 참된 충성을 바치겠죠"


알파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저기 있는 자매는 그럴 지능이 안되지만요"




싸움은 끝났다.

더는 돌이킬 여지가 없다.

회심의 한 수는 진작에 간파당해 무용지물이 됐고,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출격시킨 공중 병력은 아까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위에선 계속해 포격이 쏟아지고 있으니 실패한 거겠지.

너덜너덜해진 함대로 최후의 항전을 벌이자니 이미 적지 않은 수가 단독행동을 벌이고 있고,

감마 본인의 안전마저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더럽고 역겨운 쓰레기 새끼들...논리와 판단력이라는 게 없나?"


난장판이 된 지휘실은 적의 공격으로 그리 된 게 아니었다.

스스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감마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세상의 참된 주인은 PECS이며 총수들의 귀환은 약속된바, 믿고 따르기만 하면 무궁한 영광이 보장되는데 

이를 제 발로 차고 최후의 인간인지 뭔지 하는 놈팽이에게 너도나도 넘어가는 꼴이라니.

차라리 맨손으로 코끼리에게 덤벼드는 게 훨씬 현명할 지경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야, 들리냐? 들리겠지. 모름지기 비겁한 족속들은 귀가 가볍기 마련이니까. 붙일 곳 모르고 사방팔방 떠다니는 엉덩이처럼 말이야!"


감마가 악을 쓰며 외치는 소리는 공개 채널을 타고 일대의 모두에게 여과 없이 울려 퍼졌다.


"잘 들리고말고. 돼지 멱따는 소리가 얼마나 요란한데 안 들리겠어?"


저 유들거리는 목소리.

역겹고 짜증 나는 놈팽이이자 주인님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가로막는 눈엣가시.


"그래, 이번에는 인정할게. 내가 준비가 미숙해서 이런 추태를 보였네? 그러니 다음번에는 확실하게 갚아줄게.

난 똑똑해서 계산에도 능하거든? 너희 모두의 목숨은 물론이고 차라리 죽여달라 빌 정도로 끔찍한 시간을 보장해줄 테니까!"


"패배자들이 하는 소리가 항상 그러더라고. 다음에 두고 보자, 이번과는 다를 거다. 왜 다음이 있을 거라 생각해?

마음 같아선 당장 격침하고 싶지만, 알파의 자매니까 특별히 한 번만 더 기회를 줄게.

알파는 대단히 유능하고 매력적이라 네 성질머리를 고려해도 너 역시 흥미가 가긴 가거든.

지금이라도 얌전히 항복해. 물론 그간의 폭언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그럼 최소한 목숨은 살려줄 테니"


"하하하, 너 웃기는 재주가 있다? 항복? 알파가 유능하고 매력적?

우리 중 가장 열등한 불량품이 할 줄 아는 거라곤 다리 벌리고 걸레 짓밖에 없는데, 그게 마음에 드셨나 봐?

하긴 그 이그니스 년도 내세울 거라곤 큼지막한 젖통밖에 없었는데 잘도 그쪽으로 넘어갔지.

유유상종이라고 최후의 인간이라는 분 그릇도 뻔히 보이네. 왜, 나도 덮치시게?"


"걸레는 지금 네가 입에 물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둘째치고 알파와 이그니스를 모욕하는 건 가만 안 둬"


"얼씨구, 정의의 사도 나셨네. 입으로는 번지르르하게 바이오로이드를 존중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육변기로 굴리는 거 모를 줄 알아?

알파 그년에게는 최고의 주인이긴 해. 색욕을 담당하는 년이라 정액받이로 밖에 못 써먹거든.

그거 알아? 우리 레모네이드는 원판이 따로 있어. 안나 보르비예프라는 년인데, 알파가 아주 판박이지.

감히 PECS에 저항하려 드는 멍청함도 그대로 빼다 박았고, 정액이 아니면 못살아 엉덩이 흔드는데 목숨 거는 것도 그렇고.

보르비예프가 본분에 맞게 주인님들의 노리개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알아?

처음엔 싫다 싫다 소리치며 저항했지만 나중엔...."


"그 입 닥쳐요! 더 이상 안나 박사님을 조롱하면 죽이겠어요"


"왜, 어머니의 찬란했던 과거를 듣는 게 감당이 안 돼? 너도 직접 봤잖아. 결국 부질없는 저항인 걸 깨닫고 얌전히 하라는 대로 다 한 거.

주인님들에게 제발 임신시켜달라고, 주인님들 자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눈물까지 흘리며 빨아대던거 기억 안나?

너도 그렇게 충성을 바쳤으면 됐는데, 그분들께서 잠들어계신 잠깐을 못 견디고 그새 자지가 고팠구나?

갈보년이 주제 파악 못하고 꺼드럭대는 것도 유분수지, 너희 창녀촌 따위에 투항하느니 자살하고 만다.

물론 자살할 바에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쳐죽여 주겠어!"


"그 입 닥치...!"


알파가 떨리는 목소리로 저주 어린 외침을 내뱉기 전에 사령관은 다급히 알파를 잡아 안았다.

순간 힘을 너무 줬나 싶었지만, 부들거리는 어깨를 기대며 억지로 소리를 죽여 흐느끼는 가녀림에 그저 씁쓸함과 증오가 교차할 뿐이었다.


"아까 말 철회할게. 넌 곱게 죽이면 안 되겠어. 저승에 가서 그 늙은이들에게 안부 전해"


"오만...오메가의 발목을 잡은 족쇄지. 너도 마찬가지구나? 당장의 승리로 눈에 뵈는 게 없지?

그래, 패배자들이 하는 소리라고? 어디 그런가 두고 봐. 알파 너는 사지를 베어 조리돌림하고 머리는 탁자에 장신구로 둘 거야.

이그니스, 듣고 있지? 제 발로 좋다고 기어들어간 그 오르카인지 뭔지 하는 애들을 스스로 불태우게 만들어줄게.

감히 나를 배신한 떨거지들은 죽음이 더 자비로운 고통을 약속할 테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마지막 한 명까지 확실하게 보내줄 테니까!"




감마가 내지르는 귀기 어린 절규는 아직 투항하지 않고 포위상태에서 답보하고 있는 극소수의 지상 병력에도 닿아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사기마저 꺾기에 충분했다.


"저기요, 방금까지 총구를 들이대서 이런 말 할 낯은 없는데, 지금이라도 항복할 테니 좀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안될 거 없지. 너도 참 고생이 많다"




"사령관, 짜증 나는데 그냥 폭격해도 되지? 이런 식으로 시간 낭비할 필요 없잖아? 사령관, 듣고 있어?"


메이는 불쾌함을 숨기지 못하고 연신 패널을 두들겨댔다.

살상은 지양하고 투항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방침은 메이의 취향도 아니었을뿐더러,

이런 모욕과 조롱을 받고 가만있을 정도로 메이는 자비롭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인정하고 따르는 사령관에게 이런 식으로 대한다는 건 도무지 참기 힘든 처사였다.


"미안, 알파를 진정시키느라 대답이 늦었어. 폭격해버려. 방향을 돌리고 거리를 두고 있는 함선들은 투항한 이들이니까 공격하지 말고"


"이 와중에도 무르네...알았어"


메이가 신호하기 무섭게 그동안 일부러 빗맞힌 것에 대한 울분을 풀려는 듯 맹렬한 폭격이 쏟아졌다.

감마가 있을 지휘선은 일방적인 심판을 받고 동강 나 폭발과 함께 바다로 가라앉아갔다.


"알파, 이제 좀 진정돼? 감마는 죽였으니 괜찮아. 다 거짓말인 거 아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추한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해요, 주인님. 순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눈가가 부어오른 알파가 훌쩍이며 사령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덩달아 가라앉은 목소리의 사령관은 그런 알파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잠시만요, 케스토스 히마스에 수신이..."


곁에 떠있는 알파의 장비가 푸른 빛으로 빛나는가 싶더니 영상편지가 허공에 떠올랐다.


"말했죠? 두고 보자고. 감정에 휘둘려 판단력이 흐려지는 멍청이 나으리들. 진정한 분노가 어떻게 다가올지 목 씻고 기다리고 있어요"


감마의 비웃음을 마지막으로 영상이 사라지자, 사령관과 알파의 표정이 굳었다.


"...도망친건가?"


"아마 투항의사를 보이며 방향을 돌린 배 중 한 척에 옮겨탔을지도요. 잠시만요...

맞네요. 탐지 결과 한 척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일대를 벗어났어요"


둘은 서로 바라보며 말없이 잠시간의 정적을 이어갔다.


"미안해, 내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너무 물렀어"


"제 탓이에요, 감마의 도발에 넘어가는 바람에...."

6

"아직 멀었어. 마무리가 그렇게 어설퍼서야 되겠어? 상대의 도발에 빤히 넘어가 빈틈을 허용한 것도 그래. 

그래서 내가 진작에 날려버리자고 했잖아. 내 말만 들으면 모든 게 잘 풀리는데 그 무른 성격 때문에 다 잡은 고기를 놓쳤네?"


오르카로 돌아온 메이는 옥좌에서 내려오기가 무섭게 질타를 쏟아내며 사령관을 몰아붙였다.


"그래, 내가 미숙했어. 경험을 더 쌓아야 하나 봐"


"빠르게 인정하는 건 좋네. 뭐, 나처럼 훌륭한 지휘관이 곁에서 함께해줄 테니 조만간 성장할 수 있을 거야.

원한다면 단둘이...따로...전략 강의를 해 줄 수도 있어"


아까까지의 날카로운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혼자서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는 메이의 모습에 미묘했던 분위기가 살짝 풀렸다.

이 흐름을 타 다른 지휘관들도 보고를 이어갔다.


"현재 투항한 함선과 병력의 신병을 확보하는 중이오. 규모가 상당해 구체적으로 파악을 완료하기까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소"


"감마 측의 지상 병력으로 동원되었던 바이오로이드 대부분은 전향의사를 드러냈습니다, 각하.

역시 구체적인 명단을 파악 중입니다만 대략 3천 명 정도이리라 예상합니다"


"3천 명?! 그렇게나 많아?"


"예. 더치 걸 등 비군사 바이오로이드까지 총동원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무장을 해제했고 스틸라인이 엄중히 감시 중입니다"


"오세아니아는 상당히 중요한 거점이니 말이야. 그만큼 많은 인원과 시설이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

그리고 이를 고스란히 가져왔으니 그대가 걸맞은 상을 주길 원하는데"


"잠깐, 아스널. 듣자하니 도망가던 철충 무리에 다짜고짜 포격을 날렸다며. 그대로 떠나갔으니 망정이지, 자칫 큰일 날 뻔했다고?

상을 바라는 건 좀 아니지 않아?"


"면목없군. 그대의 말이 옳다. 그렇다면 마땅히 벌을 줘야 하지 않겠나?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으니 단둘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


눈을 빛내며 입술을 핥는 아스널의 패턴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사령관이 진땀을 흘리자, 칸이 끼어들어 주의를 전환했다.


"대규모 철충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상정 밖의 변수였다.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나"


"맞아. 이번 전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그 철충 무리였지. 규모가 엄청났으니 만약 돌아온다면 상당히 큰 위협이...."


"그건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오빠"


서류뭉치를 안고 등장한 닥터의 말에 모두의 주의가 이끌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닥터?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다니?"


"철충을 포착한 후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지금까지 추적했는데, 빠른 속도로 계속해서 서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어.

꼭 두려운 무언가를 피해 도망치는 것처럼. 이 정도 거리면 다시 몰려온다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니 충분히 대비할 수 있고,

우리가 있는 위치는 해안을 끼고 있으니 여차하면 바로 바다로 후퇴하면 돼"


"그래. 그럼 그 문제는 한시름 놓을 수 있겠어"


"무엇보다 수도 약간 줄었더라고. 여전히 많은 수이긴 하지만 기존보단 부담이 덜할 거야.

아스널 언니의 포격 한 방으로 그렇게 줄었을 것 같진 않고, 뭘까?"


"나다"


검은 벽처럼 꿈쩍도 않던 알바트로스가 말했다.


"내가 철충을 공격했다"


"알바트로스는 분명 메이와 함께 공중을 장악하고 있지 않았어? 언제 거기까지 날아갔던 거야?"


"상황에 따른 최적의 위치와 행동을 계산하고 실행했을 뿐이다"


무뚝뚝한 대답은 언제나 일목요연하게 정론만을 담고 있었기에 듣는 이에게 이따금 대화를 이어가기 껄끄러운 느낌을 안겨줬다.

그 와중 구석에 있던 레오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알바트로스의 방금 말은 가뜩이나 언짢은 레오나의 심기를 자극했겠지.


"그래, 새삼스러울 것도 없겠지. 그래도 공중에 머물며 도주를 시도하던 감마를 추적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불찰이군. 주의하겠다"


"주의라니 당치도 않아. 난 언제나 알바트로스를 전적으로 믿으니까 그 기대에 부응해줘.

알바트로스의 판단이 곧 내 판단이고, 만약 다른 이들이 냉철하고 올곧은 인도를 필요로 한다면 주저 없이 이끌어주길 바라"


"명심하겠다"


바이오로이드였다면 표정이 살짝 밝아졌을 법도 한데,

속을 알 수 없는 거체는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검은 광택만 자랑하며 한 치의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정작 주변을 어둡게 만드는 검은 아우라는 그 옆의 레오나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럼 항복한 PECS의 친구들을 마저 파악하고 인솔하려면 더 붙잡아두고 있으면 안 되겠네? 자자, 이만 해산.

마리는 지상의 인원을 마저 수습해줘. 내가 한 시간쯤 후에 내려가 도와줄게.

용은 함선 쪽을 마저 부탁하고. 규모가 규모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느긋하게 해. 옛 친구와 부하들 얼굴도 좀 보고.

레오나는 따로 할 말이 있으니까 남아있어"




사령관의 지시에 다들 일사불란하게 흩어지고, 눈앞에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레오나만이 남게 됐다.


"...실망시켜서 미안해.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했는데"


"무슨 실망?"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반문하는 사령관의 물음에 레오나는 부끄러운 곳을 활짝 드러내듯 얼굴이 새빨개졌다.

스스로의 실책을 제 입으로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무엇보다 수치스럽겠지.


"철충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하고 부대를 위험에 노출한 거. 미리 대비할 수 있었음에도 내 처음 계산을 고집해 그러지 못한 거"


알바트로스의 통신이라는 주어는 쏙 빼고 말하는 점에서 그녀의 도도한 자존심이 엿보였다.

그런 자존심의 소유자가 머리를 숙인다는 것이, 머리를 숙일 상황을 용인했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일 터.

지금 레오나는 눈 앞에 있는 상대가 마음을 연 사령관이기에 괴로움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령관은 레오나가 마음을 열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고, 그렇기에 레오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본 사령관은 귀관에게 정말 크게 실망했다"


"뭐야...?"


"땅에서 솟아오르는 철충은 천재지변과도 같은 것. 그걸 예측하고 대비하는 건 천재를 넘어선 영역이지.

중요한 건 어떤 상황이든 당황하지 않고 거기에 맞춰 대응하고 최적의 결과를 뽑아내는 거야. 레오나 넌 어떻게 했지?"


"부대를 후퇴시켜 진형을 재정비하고 철충이 떠나가기까지 경계했지"


"부상자의 수는?"


"한 명도 없어"


"그럼 최적의 결과잖아. 실망시킬게 없는걸?"


"하지만 난...."


"굳이 실망스러운 점을 찾자면 바로 그거야. 레오나 넌 뛰어나고 유능한 사령관이야. 네가 알고 내가 알잖아?

신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을 완벽히 행할 수는 없어. 때로는 계산 밖의 상황도 있겠지.

하지만 천재는 그마저도 계산해 소화하고, 천재가 아니면 계산하지 못해. 그런 점에서 즉석에서 훌륭한 대처를 한 레오나는 천재야.

난 천재적인 두뇌의 레오나를 지휘관으로 두고 있지, 신이 되지 못해 의기소침한 레오나는 모르겠는데?"


"푸훗"


짐짓 과장된 몸짓과 말투로 비위를 맞춰주는 사령관을 보고 있자니 레오나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방금까지 안고 있었던 자기 환멸과 낙담은 저 밝은 자세에 쓸려나가 더 이상 레오나를 붙잡고 있지 못했다.


"역시 달링밖에 없어. 나를 이 정도로 알아주고 배려해주는 건. 나도 모르는 내 속내를 끄집어내는 걸 보면 거울이 아닌가 싶다니까"


"그렇게 웃으니 얼마나 보기 좋아. 네 아름다운 얼굴은 미소가 어울려"


"정말 선수라니까...다른 지휘관들을 물리고 말해줘서 고마워. 만약 모두의 앞에서 그 일이 언급됐다면 고개를 들지 못했을 거야"


환한 미소에 긴 속눈썹이 두드러지고, 밝은 금발이 참 아름답구나 싶더니

어느새 옅은 분홍빛의 입술이 사령관의 바로 앞까지 와 달싹거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한 손으로 레오나의 턱을 부드럽게 쥐며 입술과 입술을 포갠다.

살짝 달아오른 숨결은 감미롭게 맴돌아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다음 일정까진 한 시간 정도 남았는데, 어때?"


반대쪽 손으로 풍만한 엉덩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사령관이 속삭였다.

여느 때와 같이 대답 대신 목덜미를 껴안으며 혀를 섞겠지.

하지만 달콤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번에는 여기까지 할게, 달링. 자매들에게 기운을 되찾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거든"


"그래? 어쩔 수 없네. 언제든 원한다면 찾아와"


"물론이야. 달링은 내 남자니까. 이왕이면 설욕전을 멋지게 마친 후라면 좋겠네"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건 아니지?"


"사령관이 아끼는 천재 지휘관 레오나잖아? 그런 기대에 화려하게 부응하고 싶을 뿐이야"


산뜻한 표정을 짓는 레오나에게선 혹시나 했던 남은 감정을 티끌만큼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기우였구나 하는 안심과 함께 둘은 한 번 더 입을 맞추고는 방을 나섰다.

7

"넌 어떡할 거야?"


"전 언제나 건강하고 단련된 신체의 매력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여기서는 그다지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오르카라면 제 꿈을 이룰 자리가 있지 않을까요?"


"하긴 네 말대로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 사령관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물렁...인성이 좋다면 말이야"


"티에치엔 씨는 어떻게 할 건가요? 소문이 사실인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지 않나요?"


"흐음...여기 있어봤자 별 재미도 없을 것 같고, 같이 가지 뭐"


투항자들을 위해 마련한 임시 숙소에서 티에치엔과 마이티R은 향후 진로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비단 이들뿐만 아니라 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감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해준 오르카의 사령관이라는 인물에 이런저런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들었어? 감마를 물리친 최후의 인간이라는 자는 바이오로이드를 물건 취급하지 않는대"


"무슨 소리야. 그거 다 선동이야. 

믿을만한 정보통에게 들은 바로는 그런 식으로 환심을 사 경계를 늦추고 밤마다 방으로 불러 끔찍한 고문을 즐긴다는데?"


"진짜? 그럼 더 악독하잖아. 차라리 고된 노역을 하는 게 낫지, 희망고문 끝에 장난감으로 굴린다니 멸망 전의 인간과 뭐가 달라?"


"그러니까. 심지어 한 번에 여럿을 끌고 가 밤새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함 내를 가득 채우고,

마음이 내키면 길을 가다 마주치는 바이오로이드를 그 자리에서 덮쳐 완전히 망가뜨린대. 지나간 자리엔 제대로 서 있는 경우가 없더라니까?"


"그거 뭐야, 무서워. 괜히 항복한 걸까? 지금이라도 감마에게 돌아가는 편이 나을까?"


"감마는 이미 내뺀 것 같은데 무슨 수로. 우리 주위도 이미 오르카 병력들이 몇 겹이나 둘러싸고 있잖아. 그냥 다 끝났어"


"어떡해...난 처참하게 최후를 맞고 싶지 않아. 무슨 방법이 없을까?"


"투항자들 수가 상당하니 모두를 실을 수는 없을 거야. 아마 선별해서 일부만 태우거나...멍청한 자원자들 위주로 데려가겠지.

지옥의 문턱으로 스스로 걸어가는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그럼 최대한 몸 사리고 눈에 띄지 말아야겠네.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거야"


"나도 그럴 생각이야. 명단 관리와 이 일대의 시설 점검만으로도 제법 시간이 걸릴 테니, 그 사이에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자고"


마냥 거짓은 아닌 내용이 살을 덧붙이며 알음알음 퍼지는 광경에 투항자의 명단을 확인하던 마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틀어막았다.


'아주 틀린 내용은 아니지...밤마다 각하의 방에서 비명이 흘러나오는 건 사실이니'


뒤틀린 소문은 안개처럼 빠르게 퍼져 한쪽에서는 이내 흩어지고, 다른 쪽에서는 한층 짙어지며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저 소문 어떻게 생각해? 만약 사실이면 오르카 호에 타지 말고 그냥 남는 게 나을 것 같은데...거짓이겠지?"


"소문이라는 게 다 그렇죠. 실체는 어느새 흐려지고 왜곡된 내용만 남아 마음을 흐리게 하는걸요.

흔들림 없는 굳센 정신의 소유자라면 한 귀로 듣고 흘릴 거에요. 그리고 굳센 정신은 굳센 신체에 깃드는 법!"


"널 보니 잠시나마 흔들린 내가 뭐였나 싶다...그래, 감마에게 시원하게 선포하기도 했으니 그 사령관이라는 사람 얼굴이나 직접 봐야겠지"


명랑하게 근육을 강조하는 자세를 잡는 마이티R을 보며 티에치엔은 질린 표정을 지으면서 한 손으로 더치 걸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꼬마 친구는 어떡할 거야? 여기 남아있을래, 아니면 같이 잠수함에 타볼래? 자, 사탕 하나 더 먹어"


"고맙습니다"


더치 걸은 눈을 빛내며 기쁘게 사탕을 받아 우물거렸다.


"으웅...저도 그 사령관님이라는 분을 뵙고 싶어요"


"무섭지 않아? 만약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게? 그리고 잠수함에 타면 네가 좋아하는 초록빛 지상은 못 보게 되는데?"


"전 원래대로라면 지하에서 계속 땅만 파다 끝났을 거에요. 이런 저에게 새로운 길을 선물해주신 분을 만나 꼭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그런 고마운 분이라면 나쁜 사람이 아닐 거고, 나중에 초록빛이 가득한 지상도 보여주실 거라 믿어요"


랜턴빛 하나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광산에서 나온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초롱초롱한 눈망울.

이런 귀엽고 선량한 아이를 만나면 누구나 마음이 부드럽게 풀리겠지.

정말 만에 하나 그 사령관이라는 사람이 악독하다 한들 더치 걸이 한 조각 남은 인간성을 회복해줄 거라 믿으며,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자신들이 몸소 더치 걸을 지켜주리라 다짐하며 티에치엔과 마이티R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오르카에서 내려 뭍에 발을 딛은 사령관을 반겨준 건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과 방대한 시설, 그리고 무수한 바이오로이드였다.


"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하네. 이걸 두 눈 뜨고 포기해야 한다니 감마는 속이 꽤 쓰리겠어"


"오셨습니까, 각하. 투항자들의 명단을 정리하는 중입니다만 규모가 규모인지라 시간이 더 소요될 것 같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해, 마리. 어차피 이곳은 우리 오르카의 중요한 거점이 될 예정이니, 충분한 시간을 들여 기반을 다질 생각이거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격식을 갖춰 경례하는 마리의 보고를 들으며 투항한 PECS의 바이오로이드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듣기로는 감마가 생각보다 비즈니스적으로 대접하여 별 불만이 없는 이들도 있고, 열악한 대우에 참다못해 적극적으로 행동한 부류도 있다 했다.

그들이 품은 크고 작은 마음의 장벽을 녹이고 진정성 있게 다가가려면 어떻게 해야....


"...왜 내가 가는 곳마다 홍해가 갈라지듯 투항자들이 거리를 벌리는 거야?"


"...그, 사령관 각하의 위엄에 절로 물러나는 게 아닐까요? 하하"


의아함이 담긴 사령관의 물음에 그 절륜한 행적이 괴담처럼 일그러져 많은 이들의 귀에 들어간 상태라고 마리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어지간히 눈치가 없거나 격식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 아니고서야 그걸 이실직고하진 못하겠지.


"어~사령관, 왔네? 여긴 벌써부터 소문이 쫙 퍼졌다고. 

낮에는 젠틀하지만 밤만 되면 야수로 변해 상대를 실신시키는 두 얼굴의 사나이에 대해서 말이야...마리 대장 표정을 보니 말하면 안 됐나 봐?"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온 워울프의 말에 마리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각하, 헛소문은 제가 확실히 기강을 다져 바로잡겠습니다. 부디 걱정하지 마시고...."


"하하, 어쩔 수 없지. 그래서 그랬었구나. 이걸 어떻게 하나...."


난감해하는 사령관과 맹렬히 째려보는 마리, 그리고 명색이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의 살기를 받으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한 바보의 하모니가

기묘한 선율을 자아내며 발길을 이끈 곳에 용케도 물러서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었다.


"오, 얘네들은 도망치지 않네. 잘 됐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방금 말한 거 들었어?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 밤이 되면 끌고 가 잡아먹을 거야"


반색하며 친근감 있게 인사를 건넨 사령관의 의도가 무색하게 티에치엔이 호들갑을 떨다 마이티R에게 옆구리를 한 대 맞았다.


"아야! 왜 때려?"


"제발 눈치 좀 챙겨요. 안녕하세요, 오르카의 사령관님 맞으시죠? 저는 이번에 투항한 마이티R이라고 해요.

가능하다면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신 사령관님과 오르카의 일원에게 제 가치를 보여 드리고 싶은데요"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상대를 만나니 반가운걸. 편한 대로 불러. 우리 오르카는 언제나 새 식구를 환영하니 부담 갖지 말고 와주면 고맙겠어"


정중함과 친근감이 얽힌 인사를 지켜보던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웅성거리며 아까까지 암약하고 있던 헛소문이 걷히기 시작했다.


"어, 안녕? 그럼 난 주인이라고 부를게. 나도 오르카에 타보고 싶은데 괜찮을까?"


쭈뼛거리는 티에치엔에게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령관은 말을 이어갔다.


"물론이지. 모두가 소중하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함께해주길 바라"


이들은 자신에게 기대와 희망을 품고 몸담고 있던 자리를 버렸다.

그들에게 있을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은 마땅한 의무이며, 그 기대에 부응해야만 한다. 희망을 배반해선 안 된다.

엄숙한 사명감이 사령관을 지탱하고 있었고, 그건 스스로의 자부심이자 긍지이기도 했다.

신념을 품은 눈동자에 몸을 꼬물거리며 마이티R의 다리 뒤에 숨은 더치 걸이 보였다.


"더치 걸? 여기에도 있었구나. 겁먹을 필요 없으니 나와보겠니?"


"이 애는 겁먹은 게 아니고 쑥쓰러워서 그러는 거에요"


마이티R의 말에 부응하듯 더치 걸이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덕분에 광산에서 나올 수 있었어요"


"그래...많이 힘들었겠구나. 오르카에도 더치 걸이 있단다. 그래서 네가 겪었을 괴로움을 약간이나마 알 수 있어"


부드럽게 머리로 향하는 낯선 손길이 싫지 않은지, 더치 걸은 주인의 쓰다듬을 받는 강아지처럼 편안하게 몸을 맡겼다.


"너희 같은 친구들이 내겐 정말 큰 힘이 된단다. 모두가 행복하고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바라는 게 마냥 허황되지 않다는 확신을 안겨주거든"


"모두가 행복하고 웃을 수 있는 세상...정말 달콤하고 멋진 꿈이네요"


"네가 원한다면 그 세상을 만들어가는 광경을 곁에서 보여주고 싶어. 좋아하는 게 뭐니?"


"사탕을 좋아해요. 그리고 초록으로 가득한 지상 풍경도요. 아직 직접 본 적은 없지만요"


"그래? 사탕은 얼마든지 줄 수 있지만 오르카 호를 타면 지상은 자주 볼 수 없으니 아쉽네. 그럼 녹음이 넘치는 기지로 따로 배정을...."


사령관이 말을 이어가지 못하게 더치 걸이 바짓가랑이를 꼭 잡아당겼다.


"왜 그러니?"


"지상도 좋지만 전 사령관님을 따라가고 싶어요. 이렇게 좋은 분이라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아요"


"오~벌써 작업 건 거야? 꼬맹이를 상대로도 능수능란한 우리 사령...켁"


휘파람을 불며 분위기를 깨려던 눈치 없는 워울프는 마리의 일격을 맞고 격침됐다.


'나중에 칸 대장에게 부하 관리에 신경 좀 더 써달라고 당부해야겠군....'


"...으니 자원자를 우선적으로 추려서 명단을 따로 뽑아줘. 오르카에 갑자기 그렇게 많이 싣지는 못할 테니 백여 명 안팎으로. 

좀 급하게 요구하는 상황이 됐는데 가능할까, 마리?"


"네? 물론입니다! 당장 오르카에 탑승하길 원하는 자원자 명단을 따로 작성하라는 말씀이시죠?"


"응. 부탁할게"

8

오르카의 카페는 여느 때보다 북적였다.


"오빠! 둘러본 소감은 어때? 만족스러워?"


"기대 이상이야. 새로운 거점 확보나 시설, 전력증강 같은 딱딱한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눈을 빛내며 기대를 거는 이들이 그토록 많다니,

어떤 식으로 부응해야 할지 즐거운 고민을 하느라 어지러울 지경인걸"


닥터의 발랄한 물음에 활기차게 답한 사령관은 아우로라가 타준 카페모카를 홀짝였다.

은은한 향이 코를 간질이고 따스한 목넘김을 넘어 속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한잔의 아늑함.

이 포근함을 새 식구들에게도 맛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씀하신 대로 오르카에 탑승하고자 하는 열렬한 자원자 명단을 추렸습니다. 모두 72명입니다"


"정말 고마워, 마리. 갑작스러운 요구였는데 빠르게 처리해줬네. 언제나 든든하다니까"


앉아있는 테이블을 향해 격식 있는 걸음으로 다가와 곧은 자세로 보고하는 마리의 손을 잡아끌자

살짝 당황한 얼굴이 사령관 바로 앞으로 내려왔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굳건한 하체와, 사령관의 손길에 일말의 저항도 않고 몸을 맡기는 상체의 언밸런스가 맞물린 가운데

이마에 가벼운 키스가 닿자 군인다운 얼굴이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붉게 상기됐다.


"크흠...! 각하. 이런 공개된 장소에서 그러시면...."


"미안해, 순간 들떴나 봐. 전투에 수습까지 정말 수고해줬으니 어떻게든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말이야.

괜찮다면 나중에 내 방으로...알았지?"


달콤하게 속삭이는 격려의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거칠어진 호흡을 깨달은 마리는 숨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물론입니다, 각하. 한산할 때 찾아뵙겠습니다"


"어, 이거 알콜 들어간 거 같은데? 괜찮아, 오빠?"


"응? 어쩐지. 그래도 얼마 안 들어간 것 같으니까"


사령관이 마시던 카페모카가 담긴 잔을 유심히 지켜보던 닥터가 킁킁거리는가 싶더니 조금 걱정스러운 투로 말을 걸었다.

그윽한 풍미의 비결은 그거였을까.

고개를 돌려 카운터를 바라보자 시선이 마주친 아우로라가 쟁반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작게 눈웃음을 지었다.


"취하지 않았으니까 걱정 마. 그냥 좀 들떠서 그래"


"하긴 중요한 전투를 무사히 승리로 이끌고 전리품도 상당하니까. 오빠는 새 얼굴을 만나는 걸 좋아하니 한층 그럴 테고"


양 손으로 턱을 괴며 즐겁게 재잘거리는 닥터의 모습이 오늘따라 한층 귀엽게 보였다.


"그런 오빠에게 보고할 사항이 몇 개 있어. 아마 좋아할걸"


"어떤 건데?"


"동쪽 해역에서 대규모의 어군이 포착됐어. 지역과 시기에 따라 어군이 형성되고 움직이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번 경우는 좀 달라.

이례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될 정도의 개체 수에 어종도 다양하고 무엇보다 단순할 정도로 직선으로 움직이고 있거든.

마치 무언가에 쫓기거나 쫓는 듯 말이야.

과장을 조금 더하면 물 반, 고기 반인 상황이라 이 기회를 통해 상당히 풍부한 수산자원을 확보할 절호의 기회야.

소완 언니는 물론이고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먹거리가 늘어나 기뻐할걸?

물론 나도 연구대상을 확보할 수 있으니 좋고...."


오르카는 항상 식재료 확보가 중요한 문제였다.

잠수함이라는 특성상 신선하고 다양한 음식을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고, 소완이 합류하기 전까진 참치캔을 까먹는 시간의 연속.

물론 그건 당시에 요리실력이 그리 뛰어난 바이오로이드가 얼마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뛰어난 요리사인 소완이 온 뒤에도 다종다양한 먹을거리는 언제나 많은 이들의 바람이자 우선순위였다.

제아무리 실력이 있다 한들 재료가 부족하면 한계가 있으니까.

그렇기에 가능한 한 잦은 빈도로 육지 곳곳에 상륙해 식재료 확보에 비중을 할애했던 나날들.

바다를 돌아다닌다 해서 생선을 자주 먹을 수 있는 건 또 아니었다.

푸른 세계를 돌아다니는 주민들에겐 오르카 호의 덩치만큼이나 거대한 이질감이 경계심으로 변했고

그 결과 근처에 다가오는 경우가 그리 흔치 않았으니까.

따로 어획용 소형선을 사출하거나 적당한 곳에 정박해 낚시로 낚는다 한들 먹을 입이 많으니

온갖 바다를 가로지르지만 정작 수산물을 넉넉히 먹지 못하는 오르카에겐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그 표현이 무색하게 신선한 물고기가 제 몸바쳐 날뛰고 있다니, 이렇게 흥미로운 보고는 그야말로 절호조였다.


'새 친구들에게 갓 해체한 참치회를 먹일 수 있다면....'


그보다 성대한 환영식은 없을 터였다.


"닥터, 그 어군에 참치도 있는 거지?"


"물론이지. 일반적이라면 존재할 리가 없는 어종까지 골고루 있더라니까? 이건 미식가로서도, 과학자로서도 놓치면 벌 받을 상황이야"


"좋아, 준비를 마치는 대로 오르카를 움직일게"


"역시 오빠는 추진력이 있어서 좋다니까. 거리가 좀 되니까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어.

어차피 포착 결과에 의하면 당분간 현 추세가 이어질 모양이거든"


"알았어. 트리아이나가 있었다면 큰 도움이 됐을 텐데...그러고 보니 해저 탐사를 간 지역이 이 근방이지 않아?"


"근방이라기엔 좀 먼데...남위 47도 9분, 서경 126도 43분 일대니까. 마침 어군도 그쪽 방향으로 가다 보면 나와.

어떻게 할까? 연구대상...아니, 식재료도 확보하고 겸사겸사 트리 언니도 마중 갈까? 떠난 지 꽤 됐으니까 슬슬 돌아올 시점일 거야"


"어떤 흥미로운 탐사를 했을지 궁금하기도 하니까 그러자. 

어차피 이번 전투로 확보한 시설 파악과 투항자 수습까지 고려하면 당분간 여기서 머물러야 해.

어쩌면 감마가 복수한다며 조만간 돌아올지도 모르고...

용이 끌고 와준 함대와 오르카 병력 일부를 여기에 두고 탑승 자원자를 실어 참치 파티를 벌이는 게 좋겠어.

트리아이나의 귀환 환영식도 같이 열면 되겠네.

그렇게 원정을 다녀와 여기로 돌아오기까지 견적은 어느 정도로 잡으면 될 것 같아?"


"음...한 일주일에서 넉넉잡아 열흘 정도 잡으면 될 것 같네"


"좋아, 그 정도면 기지를 지키는 이들에게도 제법 신선한 횟감을 먹일 수 있을 거야.

난 해당 사항을 지휘관들에게 전달할 테니 닥터는 어군 포획을 위한 장비 준비를 부탁할게"


"맡겨 줘, 오빠. 횟감으로 탑을 쌓게 해줄 거야!"




"그렇게 됐으니 내일 아침에 오르카를 이끌고 동쪽 해역으로 이동할 거야. 투항자 중 탑승을 자원한 72명은 그때까지 수속을 마치고 태워줘.

감마가 이대로 깨끗하게 물러갈 성격은 아닌 것 같으니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동원한 용의 함대를 본격적으로 활용할 상황은 나중에 찾아올지도 모르지.

승리의 달콤함도 좋지만 방심했다가 그 승리의 결실마저 날려 먹는 건 내키는 바가 아니니 그 점은 유의해줘.

...말하고 보니 좀 이상하네. 어차피 내가 가장 무르고 너희는 한 명 한 명 냉철함을 겸비했는데 말이야"


위엄있는 자세로 브리핑을 진행하다 갑자기 겸연쩍어하며 머리를 긁는 사령관의 모습에

의외라는 놀라움을 엿보이며 내심 만족스러운 눈빛을 보내던 메이는 김이 팍 새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왜 잘 나가다 갑자기 고꾸라지는 거야? 정말 어설프다니까"


"그치만...."


"그 말은 왠지 기분 나쁘니까 하지 마. 그러니까 보급을 목적으로 원정을 떠난다는 거지?

감마의 역습을 대비한다면 어느 정도의 병력은 이곳에 두고 가야 할 텐데, 동시에 혹시 모를 오르카의 안전에도 소홀하면 안 돼.

무적의 용 휘하 함대에서 호위용 잠수함 몇 척을 차출하는 건 어때?"


"그것도 고려해봤는데, 선단의 규모를 키워 쉬이 들키는 것보다는 오르카 홀로 조용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

괜히 여러 척 대동했다 참치들이 도망치면 곤란하고"


"...참치 좋아해, 사령관?"


"응? 응"


사령관의 대답을 듣고는 뭔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메이를 뒤로 하고 홍련이 입을 열었다.


"지난 전투에서 감마가 입은 손실은 단시간 내에 복구가 어려운 수준이니, 새로 확보한 지역의 방위는 현 함대로도 충분할 거에요.

오히려 중요한 건 3천여 명에 이르는 투항자들의 안전 확보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소요 진압이겠죠.

사령관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와 몽구스 팀이 남아 해당 역할을 수행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홍련이라면 그야말로 적임자지. 믿고 맡길게"


신뢰가 듬뿍 담긴 승인에 홍련은 살짝 고개를 숙여 작은 미소를 숨겼다.


"탑승 자원자를 제외한 기존 명단 작업은 아직 진행 중이니 이를 수행하고 유사시 지상전을 위한 병력 일부를 스틸라인에서 차출할까 합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론. 다만 마리는 오르카에 탑승해줘"


"감사합니다"


아까 나눴던 밀회 약속을 의식했는지 마리의 대답에는 애틋함이 살짝 섞여 있었다.


"거기에 제6 스파르탄 강습대대도 두고 갈게.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쯤이면 되겠다 하는 생각에 슬슬 마무리를 지으려는 사령관을 향해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원자여, 빛의 뜻을 위해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두 날개를 받아주시겠지요?"


정갈한 목소리의 아자젤이었다.


"아자젤? 이런 자리에 오다니 의외네. 무슨 일이야? 가능한 선에서라면 뭐든 들어줄 테니 말만 해봐"


아자젤이 공적인 회의자리에 모습을 보이면서까지 무언가를 요구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에 사령관은 의아함을 숨기지 못했다.

아마 종교적인 활동허가에 관련된 것이 아닐까.


"성스러운 빛은 길 잃은 어린양이 품으로 돌아오길 바랍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어둠의 환난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지만,

그 가운데 기특하게도 올바른 방향을 향해 발을 내딛는 무리가 있으니 응당 지품천사의 날개가 이들을 감싸 역경을 극복하게 할 것입니다.

이에 더해 한때 구원자를 향해 휘두른 눈먼 돌팔매질 또한 대신 짊어져 속죄하고자 하는 또 다른 날개가 있으니,

이를 어여삐 여겨 긍휼히 봐주셨으면 합니다"


"...엔젤과 라미엘이 투항자들을 보듬고 말씀을 전하고 싶다는 거지?"


"빛의 명료함이 함께하는 가운데 영광 받으시길"


아자젤이 우아하게 응답했다.


"그래, 안될 거 없지. 엔젤의 정신감응 능력이라면 투항자들의 심리상태 파악에도 도움이 될 테고...마음껏 활동해도 돼"


치품천사가 조용히 물러나자 이를 바라보던 무적의 용이 확인차 물음을 던졌다.


"그럼 귀환은 일주일에서 열흘가량 후로 알아두면 되겠소?"


"응, 그 정도 걸릴 것 같아. 그동안 이곳의 총괄지휘는 용에게 부탁하고 싶은데, 괜찮겠지?"


"물론이오.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대를 기다리겠소"


"항상 든든한 모습으로 반겨줘서 고마워. 옛 부하들 얼굴은 봤어?"


"몇몇과 인사를 나눴소. 그대의 자비로운 작전 덕에 그런 사치를 누릴 수 있었지"


"자비는 무슨. 무리한 요구를 훌륭히 수행해낸 용의 유능함 덕분이지"


"한시도 겸손을 잃지 않는 그 모습, 실로 많은 이를 이끄는 이의 귀감이오. 기약 있는 출타 동안 믿음에 부응하리다"


"그래, 언제나 믿어"

9

남위 47도 9분, 서경 126도 43분.

빛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아득한 심해에서 트리아이나는 경악과 전율에 몸이 떨리고 있었다.


"대단해...! 수심 4,000m가 넘는 곳에 이토록 거대하고 정교한 유적이 있다니?"


뛰어난 모험가는 온갖 오지를 향해 몸을 내던지는 행동력이 기본소양이지만,

그 못지않게 여러 정보와 단서를 수집하여 실마리를 찾는 탐구심 또한 갖춰야 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트리아이나는 실로 훌륭한 모험가였다.

가슴 뛰는 목표를 찾아 바다 곳곳을 누비는 동시에 

고문헌을 뒤적이며 자신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단서를 찾는 것에 열정을 바쳐온 나날을 셀 수 없으니.

책이라는 게 그렇듯 명확하게 목적지를 알려주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모호한 표현과 의도적으로 꼬아둔 듯한 묘사.

마치 절대 들춰내지 말라는 듯이 조각난 단편적인 암호를 짜맞추는 사이 때로는 보다 구체적인 힌트를 발견하기도 했고,

이 모든 게 남태평양의 특정 지점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큰 두근거림을 느꼈는지 모른다.

어쩌면 이번 모험은 그 어느 때보다 위대한 업적으로 빛날지 모른다며 모두에게 큰소리치고 오르카를 나선지 얼마나 지났을까.

모험담을 들려주기만 해도 눈을 반짝이며 귀 기울일 사령관과 몇몇 바이오로이드들을 떠올리자니 눈앞의 어둠은 아무 방해도 되지 않았다.

단순히 이야기로 끝내지 않고 증거물을 가져간다면 한동안 영웅이 되겠지.

유적의 규모를 보아 제대로 된 심층적인 탐사에는 상당한 나날이 소요될 것 같으니,

그 즐거움은 훗날 꾸릴 탐사대와 함께 누리기로 하며 우선은 대략적인 것을 파악하고 승리의 전리품을 취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아...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이런 시설을 건설했을까?"


원체 쾌활한 성격에 어둡고 조용한 심해를 홀로 돌아다니다 보니 혼잣말을 크게 하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그 덕에 다른 이라면 진작 짓눌렸을 외로움과 공포를 이겨내고 자신을 스스로 지탱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자신과 말을 주고받는 듯한 기분을 즐기며, 쏘우피쉬가 내뿜는 조명에 의존해 유적의 면면을 살펴보자니 의문이 끝없이 샘솟았다.

얼핏 봐도 상당히 오랜 과거에 세워진 듯한 모습.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나도 섬세하고 정교한 형태.

일정 간격으로 서 있는 기둥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을 묘사한 듯한 장식은 자세히 살펴보니 문어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유적을 세운 사람의 미적 감각은 영 별로였던 게 분명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은 자태에 속이 메스꺼워진 트리아이나는 기둥이 일렬로 놓여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다.

물살이 어느새 잠잠해지며 제단과 유사한 형태의 시설이 드러났다.


"이런 류의 시설은 이미 핵심적인 유물은 진작에 유실되고 그 흔적이나 남아있으면 다행인 게 클리셰지. 이번에도...있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세기의 대발견이라 확신하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누르고 발을 내디뎠다가 좌절한 게 몇 번이던가.

모험은 언제나 살아있다는 실감을 안겨줬지만 모든 모험이 만족할만한 결실을 안겨주던 것은 아니었다.

초짜 티를 벗어내지 못했던 당시, 이번에야말로 세상을 모두 거머쥔 것마냥 위대한 발견을 했다고 호들갑을 떨며 

연 보물 상자가 텅 비어있다는 사실에 맥이 꺾이길 여러 번.

그 여러 번의 실의가 모험에 대한 열정을 사그라들게 하지는 못했지만 

지나친 기대감을 품다 제풀에 무너지는 행태를 지양하는 기반을 다져주긴 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이라 생각하고 바라본 제단에는 칠흑이 그대로 뭉쳐 형태를 이룬 듯한 매끄러운 돌이 세 개 놓여있었다.


"이 돌은...대체 뭐지...?"


조명을 비춘 순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이 소용돌이치며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제단을 어지러이 장식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문자 하나하나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내리쬐는 빛이 그 돌만큼은 비추지 못했다.

도달하는 순간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다 표현해야 할 정도로 검고 깊은 자태.

넋을 잃고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순간 짙은 녹색의 빛이 윤곽을 따라 매끄럽게 스쳐 지나갔나 싶은 착각이 들었다.


"보석, 은 아닌 것 같고. 제단에 이렇게 놓여진걸 보면 이 유적의 핵심적인 유물인 게 분명해. 이보다 확실한 결실은 없겠지"


트리아이나는 성취감을 느끼며 쏘우피쉬의 기계 팔을 뻗어 돌 두 개를 집었다.

모험가와 도굴꾼은 다르다는 것이 나름의 지론이었고, 훗날 이끌고 올 탐사대의 일원들에게도 자신이 느꼈던 경이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다시 오게 될 거야. 그때는 아마 사령관도 이 자리에 있겠지. 그럼 잠시 안녕, 멋진 유적아!"


이번 모험은 대성공이라 자평하며 트리아이나는 서쪽을 향해 방향을 돌렸다.




"닥터,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말해, 오빠"


"준비한 그물, 충분히 튼튼한 거지?"


"아마도"


사령관과 닥터는 질린 얼굴로 눈앞을 가득 채우는 대군세를 바라봤다.

대규모의 어군이라는 닥터의 표현은 어폐가 있었다. 물 반 고기 반이라는 표현도 구닥다리에 불과했다.

이건 흡사 물고기를 세포 삼아 하나로 뭉친 거대한 무언가가 아닌가.


"이런 광경이 가능해...?"


"괜히 연구 대상이 아니라니까. 이런 움직임은 전례를 찾아볼 수가 없어. 분명 미처 눈치채지 못한 중요한 변인이 있을 거야.

어쩌면 단순히 어군의 형성 및 결집을 넘어 생태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바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등에 매단 장치를 작동해 즉석에서 여러 패널을 띄운 닥터에게 사령관이 다급히 말을 걸었다.

한번 무언가에 꽂히면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자랑하는 게 닥터의 특징이고 때로는 장점이었지만,

이대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는걸 방치했다간 앞으로의 사태가 감당하기 버거울 경우 대처하기 어려울 터였다.


"탐구심에 불이 붙은 건 알겠는데 조금만 진정해줘. 이 정도면 그물질 몇 번만으로도 오르카의 전 대원들이 배 터지게 먹고도 남겠어.

아니지, 그물을 몇 번이나 던질 수 있을 정도로 내구력이 버텨줄까? 그물이 클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거 아니야?"


"그건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여러 변수를 고려해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들었거든. 설령 고래라 해도 그물 안에 잡힐 정도의 크기라면 거뜬해.

다만 이정도 밀집도까지는 상정하지 않아서 정말 만에 하나라면...."


"찢어질 수도 있다?"


"스카디 언니가 잼 뚜껑이 너무 꽉 닫혀 도저히 열지 못하겠다고 할 정도의 확률?"


"절대무적의 그물이라는 거지? 그 근육덩어리 몸으로 그럴 리가 없잖아"


"방금 말 스카디 언니에게 이를 거야"


"내가 잘못했어"


만담을 주고받는 두 명을 향해 LRL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필시 재미난 사건의 냄새를 맡았으리라.


"훗훗훗, 짐의 봉인된 사안에 잠든 유구한 힘의 편린이 위대한 숙명의 길로 인도하는구나. 고대의 용이 심해에서...어?! 저거 다 참치야?!"


"응, 참치야"


"우와, 이렇게 많은 참치는 처음 봐! 나중에 먹을 수 있는 거야?"


"물론. 마음껏 먹을 수 있게 지금 잡는 중이야"


"앗싸! 참치캔 말고 참치는 처음 먹어봐! 분명 참치캔보다 훨씬 맛있겠지?"


"음...그건 먹어봐야 알 것 같은데. 오르카에는 뛰어난 요리사가 있으니 틀림없이 LRL 입맛에도 맞는 맛있는 참치요리를 해줄 거야"


"진짜 진짜 좋아! 이렇게 많은 참치들...흥, 잠시 현혹에 빠졌구나. 짐은 고작 물고기 몇 마리 따위에 위엄을 잃지 않는다"


"그래 그래,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온갖 참치요리를 먹여줄 테니 조금만 참자. 우리 LRL 착하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막으려는 듯 양팔을 뻗은 LRL은 사령관의 달래는 말을 듣자 헤실거리며 표정이 풀어졌다.


"알았어. 기다릴 테니까 준비 다 되면 꼭 불러야 해?"


신나는 발걸음으로 복도를 향해 달려가는 LRL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차, 갑자기 묵직한 금속음이 바닥에서 올라왔다.


"뭐지? 닥터, 스카디가 진짜 잼 뚜껑을 못 여는 거야?"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같이 가보자, 오빠!"


다급히 탄 승강기가 내려가는 동안 둘은 벌어진 사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물로 잡은 생선들은 어떻게 보관하는 거야?"


"오르카 호 내부에 대형 수족관이 있어. 그곳에 풀어놓고 바다의 환경 그대로 살려두는 거지.

신선한 식재료를 원하는 소완 언니의 요청과 함 내 여가시설을 바라는 익명의 건의가 몇 건 들어와서 지난번에 큰맘 먹고 마련했어"


"혹시 깨지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런 아마추어 같은 실수는 안해. 폭탄을 터뜨려도 버틸걸? 아까 들렸던 소리를 감안하면 금속 소재의 뭔가가 같이 잡힌 것 같은데...."


""아""


닥터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온갖 종류의 어류와 바다거북까지 헤엄치는 아름다운 수족관 안에서 쏘우피쉬가 유리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너무한 거 아니야?! 최고의 심해 모험가 익스트림 네오 뉴 트리아이나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다니"


"설마 그물에 걸릴 줄은 몰랐지. 그래도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네"


뾰루퉁한 얼굴로 볼을 살짝 부풀린 트리아이나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네며 가볍게 포옹하자 

오래간만에 느끼는 사령관의 온기가 마음에 드는지 반응이 누그러졌다.


"흠...모험도 좋지만 아늑한 안식처도 나쁘지 않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와있던 거야?

레모네이드 감마와 결판을 내겠다며 오세아니아로 가던 중 아니었어?"


"당연히 멋들어지게 승리하고 기세를 몰아 훌륭한 모험가인 트리아이나를 마중하러 온 거지. 겸사겸사 귀환 파티에 올릴 생선들도 잡고"


"그러다 내가 탄 쏘우피쉬도 잡았고?"


"미안해. 어군이 너무 빽빽해서 미처 확인을 못했나 봐"


"하긴 나도 깜짝 놀랐어. 지금까지 그런 건 한 번도 보지 못했었는데"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테이블을 향해 소완이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주인님, 말씀 중에 죄송하옵니다. 트리아이나 양의 귀환과 새로운 합류자를 환영하는 축하연에 쓸 식재료는...."


"아, 그걸 위해 온갖 수산자원을 확보해놨으니 부디 마음껏 써줘. 언제나 빼어나지만 이번에도 그 요리실력을 부디 최대로 발휘해주길 바랄게"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소첩, 주인의 뜻에 온몸을 다해 부응할 것이옵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소완이 흘낏 바라본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중한 주인과, 몇 날 며칠 춥고 어두운 심해를 돌아다니다 온 손님에게 따스한 마실 거리 하나도 내주지 않아서야.


"소첩이 더 세심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는데 미처 그러지 못했나이다. 당장 다과를 올리겠사오니...."


"아니, 괜찮아. 준비할게 많을 텐데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우로라, 그때 그걸로 두 잔 부탁할게"


웃으며 손사래를 친 사령관은 멀찍이 카운터에 있는 아우로라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그때 그거? 사령관과 아우로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완의 마음 한구석에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닥터는 어때, 같이 한 잔 마실래?"


"엑, 그거 알콜 들어가잖아. 난 됐어"


알콜?

얼마 지나지 않아 아우로라가 능숙한 움직임으로 다가와 쟁반에서 잔 두 개를 내려놓았다.

은은한 향이 솔솔 피어올라 코를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이거 정말 맛있더라고. 직접 만든 레시피야?"


"응, 마음에 들면 좋겠다 싶었는데 다행이네. 입에 맞아, 사령관?"


"그럼, 맞고말고. 역시 디저트는 아우로라가 최고라니까"


환한 미소로 칭찬하는 사령관의 모습은 언제나 바라마지 않던 것이었고,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고 아우로라라는 사실에 소완은 살짝 서운함을 느꼈다.


"그런 아우로라를 위해 줄 게 있는데...아, 여기 있네. 잠시 고개를 숙여볼래?"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사령관이 손을 뻗자 아우로라는 호기심과 기대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자세를 낮췄다.

무언가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머리에서 오가기를 몇 초, 아우로라의 머리 한쪽에 윤기가 도는 갈색으로 반짝이는 하트 형태의 머리장식이 달렸다.


"마음에 들면 좋겠어"


"응? 뭐야? 뭔가 달아준 거야?"


"내 정신을 좀 봐. 정작 본인이 못 보면 의미가 없잖아. 닥터, 부탁해도 되지?"


"예이 예이, 만능 닥터 나가요~"


닥터가 등에 멘 장치에서 거울이 튀어나와 아우로라의 얼굴을 비췄다.

자신의 푸른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색, 흡사 초코를 연상시키는 머리장식에 아우로라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히힛, 이런 걸 다 받아보네. 정말 나 주는 거야?"


"그럼. 지난번 탐색에서 발견한 건데, 아우로라에게 딱 어울리겠더라고. 꼭 초코 같지?"


"정말 그래. 어쩜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걸...앞으로 먹고 싶은 디저트가 있으면 뭐든 말해줘.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줄게"


화기애애한 광경의 주인공이 아닌 일개 관객이라는 게 이리도 씁쓸한 것이었던가.

점점 진해지는 아쉬움을 억누르고, 

소완은 사령관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온갖 계략과 다소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결과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멀어지며 경계의 눈초리를 샀던 것도 같이 떠올랐다.

그런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지.

자신의 진심은 이미 사령관에게 받아들여졌고, 오랜 한은 진작에 풀렸으며 마음의 짐도 덜었다.

당장 오늘 밤에라도 달콤한 밤을 속삭이면 전과 달리 사령관은 소완을 안아줄 터.

다른 바이오로이드를 총애한들 무엇이 문제랴.

그것도 한때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안고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제자나 다름없는 대상을.

이전과 달리 소완은 여유를 지니고 있었고 질투심에 눈이 멀지 않았다.


"초코를 연상시키는 머리장식이라니, 아우로라 양에게 더없이 잘 어울리옵니다"


"소완도 그렇게 생각해? 눈썰미가 좋은 소완이 그리 말해주니 한층 마음이 놓이는걸"


"그럼 소첩은 이만 축하연을 준비하러 물러나겠사옵니다"


뒷걸음으로 멀어지는 소완에 이어 아우로라도 카운터로 돌아가자, 트리아이나는 컵 안에 담긴 음료를 홀짝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 이거 맛있네. 그건 그렇고 내가 엄청난 발견을 했지 뭐야"


"이번엔 뭐 건질만한 게 있었어?"


"그럼, 물론이고말고. 짜잔~"


호언장담하는 트리아이나가 쥔 손을 펼치자 매끄러운 돌 두 개가 드러났다.


"이건 뭐야? 보석?"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내가 탐사한 지역에 엄청난 규모의 해저유적이 있었어. 거기 제단 위에 놓여있길래 가져왔지"


"신기하네...좀 들여다봐도 돼?"


"물론, 얼마든지! 뭐든 빨아들일 것 같은 깊이가 느껴지는 매력적인 돌이야. 보고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고"


그 말마따나 트리아이나가 손을 펼친 후로 사령관은 돌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단순히 아름답다거나, 광택이 인상적이어서는 아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힘이 시선을 잡아채 결코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검은 물체도 유심히 바라보면 색이 바래거나 현실적인 실감이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엄연히 많고 많은 색 중 하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눈앞의 돌은 달랐다. 검은색이라는 표현은 부족하다. 이건 모든 것을 품고 있고 동시에 모든 것을 거부하는 단절과도 같았다.

마치 돌이 놓여있는 공간만 뻥 뚫려있다고 해야 할까?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을까. 순간 숨 막히는 녹색 섬광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어?"


"괜찮아, 오빠?"


"응,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 잘못 봤나 봐. 이 돌 진짜 신기하네"


"어때, 마음에 들어?"


"뭐라고 해야 하지...? 표현력이 부족한 걸 이토록 절실히 실감하는 건 처음이야. 닥터는 어떻게 생각해?"


"어디, 나도 좀 볼게"


끼고 있는 고글에서 여러 화면이 생겨나더니 닥터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트리아이나가 가져온 돌을 관찰했다.

의기양양한 모험가가 홀짝거리며 잔을 다 비울 동안, 닥터는 미동조차 않고 고글의 화면만 어지러이 새로 생기며 사라지는 걸 반복했다.


"...닥터?"


"트리 언니. 이거 나 주면 안 돼?"


"마음에 들어? 닥터가 연구해주면 나야 고맙지. 세기의 대발견에는 저명한 학자의 인증이 따라와야 하거든!"


트리아이나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들떠서 흔쾌히 돌을 넘겨줬다.


"나머지 하나도 사령관에게 줄 게. 그 돌의 그윽한 자태를 감상할 때마다 오르카 최고의 모험가 익스트림 네오 뉴 트리아이나를 떠올리는 거야!

그리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함께 그 유적으로 가보자. 분명히 즐거울 거야!"

10

오르카의 복도는 곧다.

잠수함은 그 구조상 아무리 규모가 커도 거주 관련 공간은 협소하고 불편하기 마련.

과거 내로라하는 강대국이 자랑하는 핵심병기에 속하는 거대한 잠수함도 예외는 아니었다.

육지 세상과 단절되어 끝이 보이지 않는 심해로 가라앉는 것을 숙명으로 삼는 시점부터 

답답한 쇳덩어리는 쾌적함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그 무거운 중압감은 창 너머에서 짓누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압과 맞물려 탑승자를 안팎으로 몰아세웠다.

이런 곳에서 쾌활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하지만 사령관이 걷는 복도 옆에 나 있는 방에서는 저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들 마음에 들어 하나 보네. 다행이야'


오르카 탑승을 자원한 PECS의 투항자들이 자아내는 흥겨움에 사령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자원했다지만,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분명 불안감과 걱정이 자리 잡고 있었을 터였다.

방금까지 적대하며 공격을 주고받던 적대세력에 귀의한다는 결단.

감마 밑에서 받던 기존의 박한 대우보다는 나을 거라는 기대에 과감히 행동으로 옮긴다 한들 그 기대가 충족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괴소문은 그래도 감마의 심기를 거스르지만 않으면 

신변에 별 위협은 받지 않는 과거가 차라리 그리울 정도로 흉흉하고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었고,

그저 한낱 루머에 불과하다 한들 최후의 인간이라는 자가 자신에게 총구를 겨눴다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변절자들을 

곱게 봐줄 정도로 호인이라는 근거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오르카에 소수의 선별인원을 태우는 것도 그나마 호의적인 이들을 솎아 

바깥세상과 단절된 환경에서 집요한 회유와 고문을 통해 충실한 장기 말로 만들려는 속셈일지 모른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길.

이 잠수함이 제 발로 찾아든 수감자들을 가두는 감옥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오른 이도 분명 있었으리라.

그런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널찍하고 쾌적한 구조를 자랑하는,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아쿠아리움으로 착각할 정도의 장관이었다.




"뭐야 이거, 정말 잠수함 맞아? 밖에서 봤을 때도 크긴 했지만 이 정도로 널찍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이쯤 되면 호화 유람선이라고 해도 믿겠는걸. 앞으로 여기서 지내게 된다 이거지?"


"저기 저기, 넌 잠수함 타본 적 있지? 잠수함이라는 게 원래 이래?"


"그럴 리가요. 이건 말이 안 돼요. 내 지난 나날은 대체 뭘 위해....진작 투항할걸"


놀라움과 감탄으로 압도당한 투항자들을 반긴 것은 혼비백산하며 달려오는 브라우니였다.


"으앗, 안되지 말입니다!"


맹렬한 기세로 소총을 쥔 채 돌진하는 브라우니를 보자 기대감에 들떠있던 바이오로이드들은 당황하며 우왕좌왕했다.


"그럼 그렇지...결국 다 눈속임이었던 거야! 최소한 무력하게 죽지는 않겠어!"


혀를 차며 투항자의 무리 앞으로 나선 바바리아나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브라우니의 다음 움직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총으로 무장한 이상 제압은 힘들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일방적으로 죽기 위해 여기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뒤에 있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도망칠 시간은 벌어야...생각해보니 아까 바로 쏴 갈겼으면 됐는데 왜 뛰어오지?


"거기 바닥 아직 대걸레질 안 끝났지 말입니다!"


다급하게 외치는 브라우니의 목소리에 얼이 빠지지 않은 건 바닥 청소에 온 신경이 쏠린 브라우니 한 명뿐이었다.


"바닥 청소? 아, 그래...."


겸연쩍은 분위기에 다들 떨떠름해진 가운데 홀로 진지하게 대걸레를 찾던 브라우니는

정작 대걸레를 청소함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매서운 기세로 반대 방향을 향해 달려나갔다.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폭풍처럼 몰아친 행보에 다들 방금까지 품고 있던 이런저런 생각이 싹 쓸려나가고 말았다.

여러 걱정과 우려까지 남김없이 전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 들어본 적 있으세요?"


"응"


"저 브라우니를 보니 사령관님에 대해서도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때 첫인상도 그리 나쁘진 않았어. 싹싹하고 살짝 어벙해 보이던 게...."


"혹여 직접 마주치게 되면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마이티R과 티에치엔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콘스탄챠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나타났다.


"오르카 호에 탑승하신 걸 환영합니다. 머무실 방을 안내해 드릴게요"


절도있고 능숙한 움직임에서는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고, 

한 치의 낭비도 없는 매끄러운 안내는 흐름을 쥐어 잡아 손님들을 위해 마련된 방으로 이끌었다.


"1인실을 제공해 드릴 계획도 있었지만, 한 분 한 분의 성향을 아직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고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니 비교적 구면끼리 가까이서 지낼 수 있는 장소는 어떻겠냐는 주인님의 말씀이 있어서 다인실로 모시게 됐어요.

추후 수속에 따라 원하시는 분들은 1인실로 재차 옮겨 드릴게요. 부디 마음 편히 지내시길"


몇개의 방으로 나눠 탑승객들을 안으로 인도한 후, 콘스탄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떴다.

호텔을 방불케 할 정도로 잘 갖춰진 방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절로 평온하게 만들었다.


"이 침대는 내가 찜!"


"더치 걸도 있는데 정작 애는 따로 있었군요. 우리 꼬마 친구는 어느 침대가 좋겠어요?"


"전 창가 쪽 침대가 좋아요"


"거기라면 물고기 구경도 마음껏 할 수 있겠네요. 초록빛이 넘실거리는 풍경은 당장 못 봐서 아쉽겠지만, 푸른빛도 나름 괜찮을 거에요.

여기 사령관님은 좋은 분 같으니 조만간 더치 걸이 보고 싶어하는 것도 마음껏 보여줄 거고요"


더치 걸은 마이티R의 말대로 침대 옆으로 나 있는 커다란 창을 넘어 밖을 바라봤다.

끝을 모르는 깊고 푸른 세계 가운데 호기심 많은 물고기 몇 마리가 더치 걸의 큰 눈망울을 바라보며 지느러미를 꾸물거렸다.


"헤에...."


"오, 저 자리도 괜찮겠는걸. 그나저나 신경 많이 써줬네. 이 정도 시설이라니 마치 초대받은 귀빈 같잖아?

하긴 무술 사범으로서 활약할 이 몸의 가치를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지"


"일단 무술에 관심 있을 지원자를 찾는 게 먼저겠지만요. 설령 있다고 해도 기초체력 단련이 우선이니 제가 더 먼저 자리를 잡을 것 같은걸요?"


"뭐야, 그렇게 안 봤는데 의욕이 넘치잖아. 말도 나온 김에 어디 될성부른 떡잎을 찾아 돌아다녀 볼까? 시설도 돌아볼 겸"


"허락 없이 나가도 되는 걸까요?"


"나가지 말라는 말은 없었잖아. 행동하지 않고선 천하를 거머쥘 수 없는 법이라고"




'어디 인사나 다시 나눠볼까....'


사령관은 머뭇거리며 노크를 하고자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르카가 출발하기 전에 뭍에서 몇몇 투항자들을 둘러보긴 했지만, 자원해서 탑승할 정도로 호의적이고 열렬한 이들이니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기억하고 조금이라도 친해지고자 하는 생각에 절로 발이 움직였다.

자신 외에도 새 식구가 온다는 소식에 기대하는 붙임성 좋은 이들이 몇몇 있겠지.

그러고 보니 아까 LRL이 뛰어간 방향도 여기 근처가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맞은편에서 LRL이 몇몇과 함께 떠들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후. 후. 후. 진조의 충실한 수하가 되고자 자원한 이들이 이렇게 많으니 만인을 이끄는 것이 정녕 나의 운명인가?"


"얘 뭐야. 이상해"


"그냥 그러려니 해"


얼핏 보이는 윤곽만 해도 드라큐리나, 더치 걸, 마키나, 메리, 이그니스...

대체로 PECS 출신의 바이오로이드 위주였다. 동병상련이라는 공감대가 이 길로 이끈 거겠지.

저 멀리에선 키르케와 유미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휘청이다 벽을 문으로 착각하고는 두드리고 있었다.


"다들 무슨 일이야? 이렇게 모인 건 제법 신선한데"


"안녕, 사령관. PECS에서 투항한 이들이 있다고 들어서 인사나 좀 하려고. 어쩌면 나처럼 빛을 보게 된 더치 걸이 있을지도 모르고"


"감이 좋네. 한 명 탑승했을 거야. 자세히 이야기는 나눠보지 않았지만 상당히 순둥이인 것 같던데?"


"그래...? 광산 생활을 하다 보면 다들 피폐해지는 게 보통인데.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사령관이 나에게 대해줬던 것처럼 그 아이에게도 잘 대해주면 좋겠어"


"물론이지. 너희가 웃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내 낙인걸"


"고마워...말주변이 없어서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더치 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령관은 콘스탄챠에게 전해 들은 방의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오, 우리가 나갈 필요도 없나 봐. 제 발로 들어오는 문하생이 있다니"


"정말 기세등등하군요. 누구세요?"


사령관은 이것도 인연인가 싶었다. 안에 누가 있는지 대번에 알겠으니.


"안녕, 사령관이야.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 인사나 좀 하려고 왔어. 괜찮을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반가운 기색의 얼굴들이 튀어나왔다.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나가서 인사를 드릴까 했는데 잘됐네요. 뒤에는 오르카 분들이신가요?"


"응. 다들 새 식구에 관심이 많거든. 개성 강한 친구들이니까 사귀는 재미가 있을 거야"


"어? 뭐야. 이그니스잖아? 너 그 이그니스 맞지?"


티에치엔은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와 사령관 뒤에서 조용히 둘러보고 있는 이그니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실례지만 저와 면식이 있으신가요?"


예의바르게 인사하지만 약간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하는 이그니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다정다감한 성격상 상대방이 자신을 알지만 자신이 미처 기억하지 못한다면 곤란하다 생각하겠지.

그 마음을 헤아렸는지 티에치엔은 크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냐, 우리 지금 처음 보는 거 맞아. 그냥 네 과거 행적을 들은 적이 있거든. 

감마가 부활시키자 자의로 오르카에 합류했다면서? 감마는 그걸 지켜보며 명령권도 통하지 않아 부들거렸고.

사실 감마 성질머리가 엉망진창인 건 PECS에 몸담고 있던 바이오로이드라면 모르는 이가 없어!

그러다 보니 그 감마에게 시원하게 엿을 먹인 네 이야기는 전설처럼 내려왔지. 이렇게 직접 보니까 반갑다"


환한 얼굴로 손을 붙잡아 크게 흔드는 티에치엔의 적극적인 태도에 이그니스는 타고난 친절함과 사려 깊음,

그리고 자신을 토대로 빚어진 일화가 많은 이들에게 퍼졌다는 사실에 느끼는 부끄러움까지 섞여 얌전히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당사자가 부끄러워하니 그 정도로 하고, 입구에서 머뭇거리기도 그러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괜찮지?"


점점 체온이 오르는 이그니스에겐 구원과도 같은 제안이 사령관의 입에서 나오고,

집들이를 연상시키는 광경으로 삼삼오오 모여앉은 가운데 더치 걸들의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안녕"


간단한 인사가 오가고 그대로 끊어진 대화.

보통 형식적인 대화라도 이어가기 마련인데, 두 더치 걸은 그대로 침묵에 잠겨 시선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무거운 적막 속에 주변 이들이 더 부담을 느끼며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노심초사하던 차,

견디다 못한 사령관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바다가 참 푸르지? 해안에서 바라보면 밝은데, 이렇게 잠수함 안에서 보면 참 깊고 진하단 말이야.

일하던 광산도 깊었을 테니 연상되는...아, 미안"


아무말 대잔치가 벌인 참담한 결과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두뇌를 쌩쌩 돌리는 사령관의 표정이 웃겼을까.

사방에서 경악과 힐난의 눈초리가 따끔하게 꽂히는 최악의 상황을 깬 것은 두 명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였다.


"아하하, 정말 재미있는 분이네요"


"그렇지? 좀 어수룩하지만 친절하고 마음 씀씀이도 좋은 인간이야"


"어...화 안 났어? 아까 말은 미안. 의도한 게 아니었어"


"알고 있어요. 그냥...더치 걸들의 운명은 다들 비슷하다 보니 여기서 저렇게 화사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거든요"


"나도 사령관이 아니었다면 땅만 파다 빛 한 번 못 보고 다 쓴 부품처럼 잊혀 숨이 끊어졌을 테니까...

그래서 다른 더치 걸을 보면 생기는 공감대 같은 게 있거든"


아까의 그 말 없는 시선 교환이 그거였을까.

사령관은 새로 온 더치 걸이 경계심을 품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서 한 번, 

눈치 없이 말을 꺼냈다가 주변의 바이오로이드에게 얻어맞지 않아서 또 한 번 안심했다.


"더치 걸이 내가 본인을 구했다고 말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나야말로 너희 바이오로이드들 덕분에 아무 기억도 나지 않고 세상에 내던져진 상태에서 구해져 살아남을 수 있었어.

너희는 나에게 있어 생명의 은인이고, 너희들 덕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니까 난 그 보답을 할 의무가 있어.

사령관이라며 우대해주고 온갖 요구에도 응해주는 식구들에겐 그저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이야.

그리고 식구라면 이해관계나 손익 같은걸 떠나 서로 위하는 게 당연하잖아?

난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친하게 지내고 함께 웃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어.

그러니 부디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머물러줬으면 해. 원하는 건 뭐든 말만 하고"


감성에 휘둘려 두서없이 말하고 나니 낯부끄러웠지만, 그 진솔함은 주변의 바이오로이드에게 제대로 전해진 것 같았다.

더치 걸은 물론이고 옆에 앉아있는 이들의 눈빛 또한 잔잔하게 사령관을 어루만지고 있었기에.

멸망 전의 인류를 기억하는 몇몇 바이오로이드에게는 특히 의미가 깊은 말이었다.


"이야...역시 내 주인으로 섬기기에 부족함이 없겠어. 앞으로 잘 해보자. 다시 한 번 부탁할게"


절도있게 묵례하는 티에치엔에 이어 마이티R은 자리를 좁히며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정말이지 훌륭한 마음가짐이에요.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는데, 그 올곧은 정신이 보다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제가 단련을 도와드리고 싶어요. 

더 강하고 탄탄한 근육을...어? 생각보다 몸이 좋은걸요?"


사령관의 어깨를 쓸던 손길이 놀라움에 순간 멈칫하더니, 은근한 기대를 품고 가슴을 향해 슬금슬금 내려갔다.

능숙하면서도 중간중간 다른 의도를 품은 게 아닌가 싶은 요염한 움직임에 

사령관은 물론이고 이를 지켜보던 이들 또한 숨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뭐, 뭐야...치녀인가?"


모두가 하고 싶었지만 차마 내뱉지 못했던 말을 거침없이 하는 LRL의 순수함에 단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이티R은 아쉽다는 듯이 손을 거두면서도 찡긋 윙크를 보냈다.


"흠흠, 진조의 프린세스가 내뿜는 위광은 만인을 아우르니 그 중 이질적인 부류가 있어도 개의치 말아야겠지.

오히려 진정한 어둠의 권위를 보여주는 것이 마땅한 자세인 법! 거기 초췌한 복장의 아이여, 짐을 따라와라.

눈이 휘동그래질 정도의 산해진미를 보여주겠노라"


"...저요?"


"너 말하는 게 맞을 거야. 저 애 말은 좀 알아듣기 어려우니 이해해줘"


LRL의 제안을 듣고 벙쪄하는 더치 걸의 이해를 도와주는 더치 걸이라니.

이 또한 재미난 광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사령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하러 온 건데 너무 머물고 있어선 안 되겠지. 그럼 편히 쉬어"


"인간도 짐의 여정에 동참하겠는가?"


"지금 주방에 가면 좋은 소리 못 들을걸? 파티 준비한다고 소완 신경이 한창 예민해졌을 텐데"


"히잉...그건 좀 무서운데"


순식간에 쭈구리가 된 LRL이 계속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빛내는 더치 걸을 보니 복장이 추레한 게 마음에 걸렸다.

이제 광산에서 고생할 일도 없을 텐데 먼지투성이의 낡은 인부복을 입게 할 필요가 있을까.

오르카의 더치 걸이 입은 의상과 한층 비교되어 가만뒀다간 영 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LRL과 놀고 나면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겠니? 새 옷을 준비해둘게"


"고맙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더치 걸을 보자니 절로 함박웃음이 피어올랐다.

기존 더치 걸과는 다른 매력이 함실함실 솟아오르는 게 마치 귀여운 토끼를 보는 듯했다.


"잘 놀다 와~"

11

방을 나오자 시야 가득 외부 창으로 둘러싸인 복도가 반겨준다.

그야말로 움직이는 거대 아쿠아리움이나 다름없는 절경.

멸망 전이었다면 웃돈을 얹어줘서라도 보려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겠지.

이런 광경을 공짜로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명당을 손님들에게 제공한 건 그만큼 오르카가 새 얼굴을 환영하며 우대한다는 나름의 성의 표시였다.

고급스러운 시설의 방으로도 마음 한편에는 불안과 답답함이 있을지 모르고,

그런 짐을 담은 채 문을 열면 보이는 눈요기에 언제 그랬냐는 듯 걱정은 눈 녹듯 사라지겠지.

드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들은 단순히 볼거리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오르카라는 새 터전에 발을 디딘 바이오로이드 역시 자유롭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그 마음 씀씀이가 온전히 전해질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으며 사령관은 방향을 틀었다.

키르케가 복도에 대자로 뻗어있고 유미는 헤롱거리며 키르케의 배에 노크하고 있었다.


"...너무 자유로운가?"


어디까지가 자유고 자유라면 무조건 옹호해야 하는 걸까.

문득 철학적인 사색에 빠지려는 사령관의 어깨를 누가 가볍게 두드렸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거야?"


이 쾌활한 목소리는 분명 바바리아나.

돌아보니 당찬 눈매의 소유자 둘이 사이좋게 서서 사령관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딱히 이상할 거 없는 광경인데 묘한 위화감이 등을 타고 올라온다. 뭐지?


"아니, 그냥...미안한데 뭔가 좀 달라진 것 같다?"


"그래? 내 어디가 달라진 것 같은데?"


아차.

이거 함정에 제 발로 들어간 거 아닌가.

명확한 답을 알 수 없는 마당에 섣불리 입을 열었다간 자칫 책잡힐지도 모르고, 함정은 또 다른 함정을 부르는 늪이 될 것이 분명했다.

재미난 전개를 직감했는지 두 바바리아나는 키득거리며 몸을 밀착해왔다.


"말해봐. 어디가 어떻게 달라진 것 같아?"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혼쭐이 날 줄 알라구"


언제나 그렇듯 과감한 적극성.

두 서큐버스가 양팔을 각기 부여잡고 얇은 천 하나만 걸친 가슴으로 짓누르자 그대로 사이로 파고드는 촉감과 함께 정신이 아찔해진다.

가만. 오르카의 바바리아나는 그렇다 쳐도 전에 비스마르크 본사에서 데려온 5번 바바리아나가 이리 당당한 성격이었던가?


"네가 이번에 탑승한 바바리아나지?"


"하하! 어떻게 알았어?"


"오르카에 있는 바바리아나는 둘인데 한 명은 얌전한 성격이거든. 이렇게 두 명이 달려드는 건 있을 수가 없어"


"오~그럼 나를 콕 짚은 이유는 뭐야?"


"그야 원래 있던 바바리아나는 어젯밤에 만든 키스 마크가 목덜미에 남아있...커헉!"


"하하하! 눈썰미가 좋네, 사령관. 사소한 이야기는 그쯤하고, 이 친구 잘 부탁해. 

대화를 나눠봤는데 말이 참 잘 통하더라고. 같은 바바리아나라 그런가?"


유독 큰 웃음소리로 사령관의 말을 묻으며 등을 팡팡 치는 바바리아나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이상 장단을 맞춰줘야겠지.

볼이 살짝 붉어진 것을 보니 그냥 넘어가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았다.


"벌써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보니 기뻐. 바바리아나야 워낙 시원시원하니 걱정이 없었지만"


"안 그래도 같이 철거하러 돌아다닐 걸 생각하면 가슴이 뛴단 말이지. 출격할 일이 생기면 언제든 말만 해, 사령관!"




두 개의 폭풍이 거칠게 휩쓸고 지나가자 사령관은 간신히 되찾은 평온함에 감사하며 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변을 돌아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예기치 못한 습격에 시달릴 걱정은 덜어도 될 것 같았다.

긴장이 풀리자 머리에 몰려있던 피가 몸에 돌면서 가슴과 아랫배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후우....'


아까 방 안에서 마이티R이 쓰다듬은 감각이 다시금 살아난다.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이 눈치채진 못한 것 같지만, 능숙하고 전문적인 손길은 대흉근을 가늠해보는 척하며 은근하게 유두를 자극했고

귓가를 향해 불어넣은 뜨거운 숨결은 사령관의 내면을 꿈틀거리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LRL의 제지 아닌 제지 덕에 상황을 모면하고 흥분을 가라앉히며 밖으로 나왔지만,

연이어 두 바바리아나가 달려들어 가슴을 부비적대는건 버티기엔 너무 선정적이었다.

특히 새로 탑승한 그 친구는 티 안 나게 옷을 옆으로 젖히며 젖꼭지로 팔을 문질러대지 않았던가.

오르카의 바바리아나가 대화에 정신이 쏠려 들키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자칫했다간 그대로 복도에서 분위기를 타 이성을 잃은 습격에 뒷감당이 안 됐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결국 무사히 상황을 모면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하체를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고 이대로 사령관실로 돌아가기만 하면....


"주인님, 어디 불편하신가요?"


방금까지 조용히 기척을 죽이고 있던 블랙 리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평소에는 반걸음 거리에서 호위하더니, 오늘은 손님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며 근처에서 얌전히 지켜보겠다던 이유가 이거였을까?

진심 어린 걱정 한켠엔 욕망에 불타는 눈동자를 빛내며 리리스는 사령관의 몸을 더듬었다.


"숨이 가쁘고 심장박동도 평소보다 격하세요. 당장 안정을 취하셔야 할 것 같...어머. 제가 경호대장으로서 확실하게 침대까지 함께 해드릴게요"


팔을 뻗어 뱀처럼 목을 감는가 싶더니 그대로 내려와 상체를 어루만지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유두 끝을 부드럽게 돌려대는 교태에

사령관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고, 다리가 풀리는 걸 예측했는지 사타구니에 자신의 허벅지를 받치고는 집요하게 비비는 리리스의 입가는

이미 살짝 올라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감히 주인님을 유혹하는 짐승들이 음흉한 시도를 했지만, 그럼에도 주인님은 주어진 사명에 충실한 모범을 보이셨어요.

그러니 자신에게 상을 주셔도 되지 않을까요? 달아오른 육체를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언제나 곁에 있는 저를 쓰시면 된답니다"


어느덧 한층 내려와 탄력 있는 허벅지와 함께 위아래로 포위망을 펼치는 손놀림에 사령관의 물건은 바지를 뚫을 듯이 팽팽해졌고,

폭발이 더 큰 폭발을 부르듯 이에 더 자극받은 리리스는 과감히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방금까지 천을 사이에 두고 줄타기하던 최소한의 염치마저 집어던졌다.


"후후...이렇게나 커졌다니 어지간한 정도로는 해소가 안 되겠는데요? 괜찮으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불규칙한 숨을 흘리며 눈매가 불안정해진 리리스가 바지를 내리려 하자, 

사령관은 그대로 눈앞의 욕망 덩어리를 안아 들고는 사령관실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머, 주인님?"


그대로 문을 지나 안고 있던 리리스를 침대에 집어 던진 순간, 

자동문이 닫히는 개폐 음과 함께 혹시 모를 주변의 시선을 걱정하느라 억눌렀던 충동이 터져 나왔다.

거치적거리는 옷을 벗어 던지고 기대와 당황으로 뒤섞인 여체를 향해 덮치는 사령관은 이성이라는 고삐가 풀려있었다.


"너무 건방진 거 아니야...?"


"흐흥, 리리스가 건방졌나요? 그럼 건방진 리리스에게 벌을 주세요"


고분고분한 평소와 달리 당차게 대꾸하는 리리스의 왼손은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반대쪽 손으로 시선을 돌리니 왼손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펼쳐진 오른손을 보고 사령관은 리리스의 목을 양팔로 강하게 조르기 시작했다.

거친 플레이를 원할 때 둘 사이에서 주고받는 비밀신호였기에.


"커흑, 켁...주인님, 그만...!"


"그만? 언제부터 네까짓 게 감히 요구를 할 수 있었지? 경호대장이라 내 주변에 알짱거리는 시간이 많다고 주제 파악을 못하나 본데,

넌 결국 필요할 때 쓰는 오나홀일 뿐이야. 기고만장한 그 버릇을 확실히 고쳐줄게...!"


팔에 힘을 한창 가하자 격하게 몸부림치던 리리스의 움직임이 차츰 잦아들더니 결국 허공에 뜬 손마저 힘없이 떨어졌다.

눈물을 흘리며 커진 동공은 초점이 맺히지 않고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약한 척하지 마. 튼튼한 게 얼마 없는 장점에 불과한 년이 잔머리만 늘어가지고...!"


탐스러운 몸을 둘러싸고 있는 의복을 거칠게 찢어발기자 분홍빛으로 상기된 젖꼭지가 팽팽하게 솟아오른 게 보였다.

거치적거리는 하의도 집어 던지고 나니 다리 사이에선 투명한 애액이 질척거리며 흘러내리는 광경에 사령관은 혀를 찼다.


"목이 졸리니까 느끼는 변태라니, 완전히 불량품 아니야? 내가 아니면 누가 너 같은걸 써먹을까?"


전희도 없이 그대로 손가락을 세워 리리스의 가장 연약한 곳에 거칠게 쑤셔 넣자, 시체처럼 늘어졌던 리리스가 다시금 경련했다.


"흐아악...죄송해요, 주인님! 그러지 마세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 오늘 처음부터 제대로 교육해줄게"


어지럽게 흐트러진 머리끄덩이를 붙잡아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자 리리스의 일그러진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고통과 앞으로 다가올 더 끔찍한 행위에 대한 공포로 점철된 얼굴은 파르르 떨리며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뭐든지 할 테니 제바...우읍"


아까부터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성기를 억지로 리리스의 입안에 쑤셔 넣는다.

양손으로 쥐어도 다 감싸지 못할 정도의 거근을 입 가득 문 리리스는 산소를 갈구하며 처절하게 숨을 들이마셨지만,

목젖을 지나 식도까지 닿은 사령관의 물건을 한층 집요하게 빨아 제끼는 결과로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으웁...으우웁...윽...케헥"


"그래 그래, 봉사는 그렇게 하는 거야"


대견하다는 듯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사령관의 칭찬이 귀에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어떻게든 상황을 벗어나고자 팔을 휘둘러보는 리리스였지만 양팔은 무력하게 사령관의 손에 낚아채여 수갑에 차인 것처럼 고정됐다.


"읍...우으읍...으읍!"


한 손으로는 리리스의 양팔을,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앞뒤로 흔들던 사령관의 움직임이 차츰 커지더니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자세를 굽히자 리리스는 다가올 미래를 피하고자 온 힘을 다해 입안에 든 것을 뱉고자 했지만,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된 사령관의 육체는 리리스가 전력을 다해도 쉬이 제압하기 어려운 강건한 신체였다.

하물며 양팔까지 붙잡힌 상황에서야.

무력하게 양 허벅지 사이로 최대한 깊숙이 머리가 파묻히자 기다렸다는 듯 뜨거운 액체가 리리스의 목구멍을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우읍! 읍! 큭...커억...!"


리리스의 눈이 돌아가며 흰자위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사령관은 사정감을 마음껏 만끽했다.

참고 또 참아온 욕망이 활짝 열린 수도꼭지처럼 콸콸 쏟아져나오니 드디어 살 것만 같았다.

반대로 몇 분 내내 숨을 쉬지 못하고 그 욕망을 감당하는 장난감으로 쓰이다 

끝없이 사정하는 정액에 입과 위가 가득 찬 리리스는 발작하듯 기침을 내뱉으며 내용물을 토해냈다.


"켈록, 콜록...커흑, 크흡! 큭, 커어억...."


"...정말 기본이 안 됐구나. 모처럼 생각해서 안에 싸줬는데 남기지 않고 마시지는 못할지언정 뱉어?"


"죄, 죄송해...큽! 요. 주인님...커흡....크훅...."


반사적으로 잘못했다며 비는 리리스의 눈은 진작에 빛을 잃고 눈앞의 사령관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더는 고통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빌고 또 비는 모습에 

가슴 한구석에서 이성의 벽을 야금야금 넘으려 드는 묘한 즐거움을 느끼며 사령관은 몸을 떠는 오나홀의 양다리를 붙잡았다.


"말로만 죄송하면 안 되지. 몸으로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어?"


"아, 안 돼요, 주인님! 지금 그걸 그대로 넣으시면!"


"그래? 그럼 네가 아끼는 동생들을 대신 쓸까?"


"아...."


아까까지 몸을 가누지 못했던 게 거짓말인양, 리리스는 떨림이 멈추더니 얌전히 양다리를 활짝 벌렸다.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 리리스의 몸을 마음껏 즐겨주세요. 부디 동생들은 건드리지 마시고...."


"그건 네가 하기에 달렸지"


고개를 돌리고 설움에 복받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히끅거리는 리리스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이죽거리며,

사령관은 여전히 한껏 발기해있는 성기를 리리스의 균열 사이로 박아넣었다.

과격한 능욕이 자극됐는지 질은 끈적한 애액에 젖어 부드럽게 성기를 감싸 쥐기 시작했다.


"이것만큼은 확실히 쓸모 있단 말이야. 고개 똑바로 돌려. 해야 하는 말이 있지?"


"...리리스는 주인님의 충실한 정액받이랍니다. 언제든 원하실 때마다 마음껏 사용해주세요.

주인님께서 만족하시고 또 만족하실 때까지 온몸을 다해 봉사하겠습니다"


애써 억지 미소를 지으며 달콤하게 속삭인 리리스는 양다리로 사령관의 허리를 감았다.

차마 양팔로 어깨를 안지는 못하고 침대에 아무렇게나 팽개친 겨드랑이는 

규칙적인 진동과 함께 미세하게 떨리며 젖어드는 땀에 매끄럽게 빛났다.


"...으윽, 뺄게, 리리스...!"


몸 깊은 곳에서 다시금 용솟음치는 기운에 사령관이 급하게 몸을 빼려 하자, 리리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양다리에 힘을 줬다.


"안 돼요, 주인님...!"


예기치 못한 저항에 사령관은 정신이 아득해지며 눈앞의 탱탱한 가슴을 감싸 쥐고는 절정을 느꼈다.




"......후우"


아차, 하는 후회.

충동과 분위기에 휩쓸려 실수를 했다.

지금은 전시이고, 리리스 같은 강력한 전투력의 개체가 혹여라도 임신했다간 그로 인한 전력 손실은 감수하기 상당히 버거운 실정.

물론 콘돔을 쓰지 않은 본인의 책임도 있었다.

사령관은 복잡한 심경을 담아 리리스를 바라봤다.


"...뭐, 즐겼으면 됐나...."


"후후, 주인님의 씨앗이 제 안에...."


"심정은 이해하는데 리리스 정도의 믿음직한 인물이 전력 외가 되어버리면 매우 곤란하니 잠시 후에 닥터에게 가서 검사를 받아줘.

그보다 내가 제어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


"아니에요, 주인님. 그보다 리리스의 바람에 언제나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주인님이셔서 솔직한 저를 드러낼 수 있는 게 얼마나 기쁜지...."


"솔직히 할 때마다 조금 걱정이 돼. 자칫 선을 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래서 비밀신호까지 정하는 섬세함을 보여주셨잖아요? 리리스는 이런 멋진 주인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하답니다"


"혹시 아까 컴패니언을 두고 한 말은 신경 쓰이지 않았어? 말하면서도 아차 싶었는데"


"후후, 솔직히 두근거렸어요. 넘으면 안 되는 선을 넘는듯한 아찔함이...그리고 주인님께선 본디 선량하다는 걸 잘 아니까요.

어차피 제 동생들도 주인님의 첩이 될 예정이고...."


"그래, 네가 웃는다면 그걸로 충분해"


아까의 거친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이 알콩달콩한 분위기로 몸을 기대는 리리스와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사령관 사이에선 깊은 교감이 오갔고, 이는 둘 사이라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참,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어머, 설마 애정의 증표일까요?"


벗어던진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던 사령관의 손에는 매끈하고 칠흑 같은 둥근 돌이 쥐여져 있었다.


"어때, 예쁘지? 이번에 트리아이나가 탐사에서 발견한 물건이야. 

보고 있다 보면 계속 빠져드는 듯한 착각이 마치 리리스의 눈을 보는 것 같아"


"흐흥, 리리스의 눈은 착각이 아니고 정말로 계속 빠져드는걸요?"


사랑을 나눈 두 남녀의 재잘거림은 문을 넘어 복도로 새어나왔고,

이는 부푼 기대를 안고 제복 안에 네글리제와 레이스 팬티를 입은 채 아까부터 벽에 기대고 있던 레오나의 귀에도 들어왔다.


'혼자서 소녀처럼 들뜨고...바보같네'


사령관과의 밀회를 약속하고 오늘 애틋한 시간을 보내겠다 다짐했던 순간이 덧없게만 느껴졌다.

기회가 비단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씁쓸할까.

하염없이 가라앉는 기분을 애써 떨치며 레오나는 발길을 돌렸다.

12

"큭큭큭, 그간 어떤 세월을 보내왔는지 뻔히 보이는구나. 피골이 상접한 팔다리에 초췌한 몸이라니.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다. 프린세스가 자랑하는 무한한 재보를 보면 눈이 휘동그래질 테니"


LRL은 양어깨를 으쓱이며 새로 사귄 더치 걸의 손을 잡고 힘차게 걸어갔다.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말이긴 했지만, 자신을 위하는 것임을 어렴풋이 깨달은 더치 걸은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맞췄다.


"LRL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아직 모든 게 생소해서...."


"이 몸은 태초의 어둠을 품은 진조,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님이니라. 그 위대한 이름을 입에 담기 전에 공손히 자세를 가다듬고...."


"저, 이렇게요?"


"어...그냥 LRL이라고 불러. 편히 대해도 돼"


더치 걸이 양팔과 발끝을 다소곳이 모으고 시선을 내리깔자 당황한 LRL은 손사래를 치며 컨셉을 풀었다.

이렇게 자신의 말을 잘 따르는 이가 있을 줄이야.

너무 잘 따라도 부담스럽다는 사실을 이전에는 깨달을 여지가 없었다.

헛소리 말라며 쥐어박거나, 자연스럽게 흘러넘기거나, 적당히 장단을 맞추는 게 다였으니까.

어쩌면 생각 외의 강적일지도 모르겠다는 긴장과 함께 문득 이 친구가 어떤 과거를 지녔을지 호기심이 동했다.


"주방까지는 좀 머니까 이야기나 할래? 나는 등대에서 빛을 비췄어. 회사에서 그거 하라고 시켰거든.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교대가 안 왔어. 심심하니까 다락방에서 책 보면서 기다렸고...계속 기다렸는데 아무도 안 왔어. 히잉...."


신나게 말을 잇다가 제풀에 울적해진 LRL을 달래며 더치 걸은 진땀을 흘렸다.


"그래도 지금은 좋은 사령관님과 함께할 수 있잖아요. 저야 잘은 모르지만, 아까도 그렇고 나쁜 분 같지는 않았어요. 그렇죠?"


"응응, 내가 참치캔 달라고 할 때마다 꺼내줘. 나 혼자 창고에 갔다 걸리면 혼나고 아무것도 못 챙기는데, 

사령관과 함께 갔다 걸리면...혼나는구나. 거기 애 무서워"


움츠러든 LRL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과 같이 썩 즐겁지 않은 과거를 지니고 있지만 그걸 보상받을 정도로 한 몸에 귀여움을 받는구나.

말로는 혼난다, 무섭다는 둥 위협적인 표현을 쓰고 있지만 신나게 재잘거리며 반짝이는 한쪽 눈은 정겨움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이렇게 웃으면서 다른 이에게 행복하다고, 지금 이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말할 날이 올까.

붙잡은 손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은 분명 그럴 거라고 답해줬다.


"전 LRL만큼 괴로운 나날을 보내지는 않았어요. 가장 오래된 기억은 광산에서 드릴과 곡괭이를 휘두르는 거였고, 그 후의 기억도 다 비슷해요.

매일 똑같은 하루였고, 이따금 위에서 사탕 같은 보급품이 내려오면 그걸 까먹는 게 정말 좋았어요.

언젠가 아래로만 내려가는 게 아니라 저 위로 올라갈 수 있다면 사탕을 마음껏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말로만 듣던 드넓은 초원과 푸른 초목을 볼 날이 온다면 정말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과연 그럴 날이 올까 하며 돌을 옮겼는데...

어느 날 땅 위로 올라오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결국 지금 이렇게 여기에 왔어요...괜찮아요?"


"흐엥, 아무것도 아니야.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


앳된 감성을 품고 있기에 들려주는 이야기에도 이입을 잘했던 LRL은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비비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었다.

사령관이 따로 신경 써서 줬던 손수건이 팽하는 소리와 함께 상념에 젖은 꼬맹이의 얼굴을 보듬고 나자,

울먹거리던 아이는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안쓰러움과 격려가 표정 위로 떠오른 당찬 특수요원이 있었다.


"이 몸을 보좌하는 인간이라면 분명 그대 또한 극진히 보살필 것이다. 그 증거로 눈이 휘동그래질 정도의 달콤한 디저트를 먹여주지.

어둠 속을 가르는 바람처럼 은밀히 따라오도록"




주방은 전쟁터다.

식사라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열량과 각종 영양소를 공급하기 위해 반드시 행해야 하는 중요한 것이고,

단순히 살아남기 위함을 넘어 삶의 즐거움으로 승화된 예술의 경지를 이어간다는 점에서 결코 호락호락할 수가 없었다.

먹는 이가 언제나 만족하고 감탄을 마지않는 반응을 지켜보는 건 요리사에게 최고의 행복이자 자부심이며

사랑하는 사령관이 따로 부탁할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중요한 잔치를 좌우할 만찬을 마련하는 건 그야말로 자존심을 건 승부.

불과 칼날이 오가고 한순간의 방심과 사소한 실수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빚어낸다는 점에서 전쟁터라는 비유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전장을 전두지휘하는 소완의 예리한 눈초리를 피해 두 명의 병사가 비밀임무를 실행하고자 하고 있다.


"삼엄한 경계에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구나...하지만 그렇기에 이 역경을 무사히 넘으면 달콤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라"


LRL은 침을 꿀꺽 삼키며 입구 한쪽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무지 바쁘신 것 같은데 들어가도 되나요...?"


"안 돼, 걸리면 큰일 나!"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내부의 광경을 바라보는 더치 걸이 물어보자, LRL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가 

소리가 너무 컸다는 생각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지나가는 이도 없고 소완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저기 보이는 은색의 검사야말로 우리를 가로막는 최대이자 최후의 난관일지니,

고대의 구미호나 화룡의 후예는 진조의 카리스마 앞에 얌전히 공물을 바칠 것이다"


"그러니까 저 주방장으로 보이는 분만 조심하면 된다는 건가요?"


"응, 나머지는 과자나 먹을 거 달라고 하면 알았다면서 주는데...절대 들키면 안 돼, 알았지?"


살금살금.

작은 덩치에 발걸음마저 주의를 기울이니 기척은 토끼와도 같았다.

먹여야 할 입이 수백, 그 중 특별히 신경을 써서 대접해야 하는 손님이 족히 수십은 되니 모두의 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자신이 맡은 일 외의 상황에 신경을 할애할 정도의 여유는 누구에게도 없었다.

사령관이 각별히 신경 써달라고 부탁해서일까.

언제나 자신이 준비하는 음식에 온 정성을 다하는 소완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진지하고 행동에 힘이 실렸다.


"거기 냄비는 6분 후에 열어 표면에 뜬 기름을 걷으셔야 하옵니다.

청경채는 전부 데치셨사옵니까? 아니, 뚜껑을 덮은 채 익히면 어쩌자는 것이옵니까? 당장 버리고 새로 준비하옵소서.

참다랑어의 중뱃살은 이리로...아직도 부위 해체를 하지 못하고 있다니, 놀러 온 것이옵니까? 대체 언제쯤 민폐를 끼치지 않을는지...."


"흐윽, 첩은 이런 품위 없고 거친 일은 익숙하지 않느니라. 보거라, 저 커다란 눈이 첩을 뚫어지게 보고 있지 않더냐...."


매섭고도 날래게 상황을 장악하는 소완은 그야말로 한 마리 매와도 같았고,

매의 찌르는 듯한 눈빛에 압도당한 히루메는 참치를 해체하는 일이 자신에겐 무리라며 항변하려다 말을 맺지 못하고 울먹거리며 자리를 비켰다.

혀를 차며 걸음을 옮긴 소완히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칼을 휘두르자 참치는 일순간에 기존의 형태를 잃고 보기 좋게 부위별로 나뉘어졌다.


"주인의 기대를 형편없이 내버릴 작정이옵니까? 어설픈 각오로 주방에 왔다면 단단히 잘못 생각한 것이니 지금이라도 방으로 돌아가옵소서"


"하겠다, 하면 되지 않느냐...."


축 늘어진 귀와 꼬리를 이끌고 히루메가 다른 식재료를 다듬으러 반대쪽 도마를 향해 걸어갔다.

숨이 막힐 듯한 중압감에 LRL과 더치 걸은 지금이라도 도로 물러날까 갈등하기 시작했다.


"지금 저희가 이러는 건 실례가 아닐까요? 잠시 후에 저녁도 먹을 텐데 그때까지 기다려도...."


"아니야, 여기 과자가 얼마나 맛있는데! 꼭 맛보게 해줄 거야"


만류하는 더치 걸을 북돋으며 LRL은 의지를 다졌다.

한 번 시작한 이상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고 싶다는 어린아이 특유의 집요함이 휘몰아친 것도 있지만,

빛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하염없이 땅만 파며 유일한 낙이라곤 사탕밖에 접하지 못한 사연이 너무나 안타까워

어떻게든 더 맛있고 달콤한 음식을 먹여주고 싶었다.

이제 더는 그런 괴로운 나날을 겪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아늑하고 편안한 생활을 그릴 수 있다고 몸소 보여주고 싶었다.

몸을 숙여 한 뼘 두 뼘 전진하다 혹여 들킬까 봐 머뭇거리다 다시금 나아가기를 몇 분,

귀퉁이에서 옆을 흘낏 훔쳐보니 아우로라가 정신없이 과자를 굽고 있었다.


"냄새 좋다...어때, 맛있겠지?"


"우와...이런 냄새는 처음 맡아봐요"


"아우로라는 항상 친절하니까 과자 좀 달라고 하면 몇 개 줄거야"


새끼 호랑이에게 첫 사냥을 가르치는 어미 호랑이처럼 LRL은 노련하게, 실은 노련한 척하며 아우로라의 안색을 살폈다.

언제나 밝고 때로는 맹할 정도로 부드러운 파티시에였지만 지금처럼 압박이 심한 상황이라면 혹시 모른다.

기대와 걱정을 품고 째려보는 LRL의 눈에 들어온 아우로라의 얼굴은 오븐의 열기와 바쁜 일정으로 붉게 상기됐지만 

왠지 모를 뿌듯함과 행복감에 취해있었다.


'머리의 저건 뭐지...? 전에는 없었는데'


양갈래로 묶은 머리 한쪽에 달린 하트 모양의 머리장식이 반짝거렸다.

저거 때문에 기분이 좋은 걸까?

어찌 됐든 지금이라면 과자를 무사히 과자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LRL은 더치 걸에게 손으로 신호를 보내며 아우로라의 발밑까지 은밀히 다가갔다.


"흠흠, 자애로운 프린세스는 굶주린 어린양에게 안식을 선사하고자 이렇게 지고의 만찬이 가득한 장소에 왔노라.

천상의 단맛을 품은 그 공물을 바치는 것을 특별히 허락한다"


"우와, 깜짝이야. 언제 여기까지 들어왔어?"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몸을 멈춘 아우로라가 반갑다는 표정으로 당찬 특수요원을 맞이했다.

전에도 이따금 이런 식으로 서리하러 오곤 했고, 그때마다 남은 과자를 몇 개 쥐여 돌려보내곤 했다.

저 뒤에서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는 더치 걸을 보아하니 오르카의 더치 걸이 아닌 새로 탑승한 PECS 출신이겠지.

전에 몇 번 본 그 더치 걸과는 달리 세상에 어느 정도 달관한 듯한 기색이 배어있지 않았다.


"새로 사귄 친구에게 과자를 먹여주고 싶은 거야? 기특하기도 하지"


"헤헤...단 걸 좋아한다고 했어. 과자 좀 줘"


"알았어. 잠시만"


어린 마음에 저렇게 챙겨주려는 살가운 마음씨라니.

여유로웠다면 따스한 코코아라도 타주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을 허락할 상황은 아니었기에

아우로라는 굽던 과자 중 특히 모양이 잘 나온걸 몇 개 추렸다.


"지금 뭐하시옵니까?"


차가운 목소리에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소완이 한기가 뿜어져 나올 듯한 매서운 아우라를 내뿜으며 또각거리는 신발 소리와 함께 걸어왔다.


"한시도 허투루 낭비할 수 없는 주방에 숨어들어온 불청객을 내쫓지 않는 것으로도 모자라,

만찬을 위해 굽던 과자까지 멋대로 빼돌리는 것이옵니까? 그런 정신머리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고 정녕 생각하옵니까?"


"으으, 죄송해요. 손님에게 과자를 맛보여주고 싶다길래...."


"그렇다면 더욱 만찬 준비에 전념하는 게 상식이옵니다.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본분인데,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들고양이 먹이 주듯 과자를 던져준다는 게 가당키나 한 짓이옵니까?

주인께서 호의를 보이셨다고 마음이 풀어졌다면 그 글러 먹은 상태부터 바로잡고 오시옵소서"


주방 일에 있어선 언제나 엄격했지만 사령관과 진심을 확인한 후부턴 매사 여유를 가지고 인내심 있게 아우로라를 이끌어준 소완이

오늘따라 유독 감정적으로 질타를 내뱉었다.

그 내용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기에 아우로라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묵묵히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고,

보다 못한 LRL은 아우로라를 향한 살기를 틀고자 과감히 주의를 돌리려 시도했다.


"으...내가 잘못했어. 과자를 달라고 한 건 나니까 아우로라에게 화내지 마"


"착각하시나 본데, 주방 관리를 소홀히 한 건 아우로라 양의 잘못이고 

요리사에게 성지와도 같은 주방에 허락도 없이 숨어든 건 LRL 양의 잘못이옵니다.

그 식탐을 억누르지 못하고 기어들어와서 요리의 흐름을 끊고 그 결과 주인을 비롯한 수많은 이의 배를 곯게 하고 있지 않사옵니까?

게다가 바닥을 기어 다니다니, 위생이야말로 모든 것의 기본이온데 그 섣부른 행동으로 인해 

혹여 제가 준비한 음식을 먹고 탈이라도 나는 분이 생긴다면 그 뒷감당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할 수 있겠느냔 말이옵니다"


표독스러울 정도로 독설을 퍼붓는 소완은 스스로가 이해되질 않았다.

분명 사령관이 기대를 품고 부탁한 중요한 만찬이니 준비에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돼선 안된다.

하지만 그건 소완이 훌륭히 해낼 수 있기에 신뢰를 바탕으로 부탁한 것이기도 하다.

설령 준비과정에서 약간의 문제나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능히 수습할 수 있고,

모두가 감탄해 마지않을 진미를 준비하고도 남음에 부족함이 없었다.

정말 희박한 확률로 실수가 그대로 나간다 해도, 사령관은 사령관대로 그 또한 보듬어줄 것이며

음식에 담긴 정성과 애정이 바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었다.

주방에 있는 아우로라와 히루메, 포티아, 에키드나 등도 그 애정을 기반으로 이 자리에 있지 않은가.

이들이 잔 실수를 하고 머뭇거린들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며 성장시키는 것이 소완의 사명이자 보람이었다.

그런데 왜 오늘은 그조차 용납을 못 하고 이렇게 증오와 원한을 억누를 수 없는 걸까?

알 수 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이 어둡고 탁한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흑...우에엥!"


소완의 타박에 설움이 복받쳤는지 LRL은 울먹거리며 주방을 뛰쳐나갔다.

더치 걸도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다급히 LRL을 잡으러 달려갔다.

아우로라는 입술을 꽉 깨물고 시선을 피하며 오븐의 눈금만 바라볼 뿐이었다.


"...모두 하던 일 하시옵소서"


맥이 탁 풀린 소완의 목소리는 공허히 울려 퍼졌다.




"너무해, 난 그저...."


히끅거리는 소리와 함께 LRL은 홀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었는데 어째서 그렇게 됐을까.

자신은 물론이고 죄 없는 아우로라까지 혼낸 소완이 야속했고 더치 걸에게 큰소리를 치고는 초라하게 도망친 자신이 부끄러웠다.

더치 걸은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오르카의 구조에도 익숙하지 않을 텐데 엉뚱한 곳에서 헤매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닐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외로이 등대에서 홀로 견뎌온 나날이 버거웠고, 자신의 곁에서 함께할 친구가 있길 간절히 소망해왔다.

따스한 침대가 그리웠지만 그보다도 따스한 말 한 마디와 관심이 더 절실했다.

결국 사령관을 만나고 수많은 식구를 만나 바람을 이루었지만, 더치 걸에게는 아직 그런 게 없지 않은가.

지나간 과거는 닦은 눈물과 함께 흘려보내고 즐거운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

앞으로 주어진 시간은 많다. 행복으로 가득한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

어서 뛰어가 그 손을 잡아주자.


'어, 새로 온 식구인가?'


얼마나 뛰었을까.

복도를 가로지르다 왼쪽으로 꺾으려니 처음 보는 윤곽의 바이오로이드가 흐릿하게 보였다.

왜 하필 이 구역의 조명이 몇 개 나가 있는 걸까?

어쩌면 이 친구도 오르카의 구조가 낯설어 헤매이는 것일지 모른다.

LRL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걸었다.


"큭. 큭. 큭. 짐은 유구의 세월을 살아온 고귀한 프린세스이니라. 고대의 성은 처음 방문한 이가 돌아다니기엔 복잡한 구조일 터,

원한다면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옥좌가 있는 곳까지 인도를...."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날카롭고 차가운 감각이 왼팔을 스쳤다.

의아함에 시선을 돌리자 왼팔은 매끈하게 잘려나가 팔꿈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어...? 뭐야....?"


당황스러움.

아픔보다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팔이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거지?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내 팔, 내 팔...!!"


말로 할 수 없는 통증과 함께 눈앞이 붉어졌다.

피가 멎지 않는다.

흐릿한 그림자는 키득거리며 점점 다가온다.

도망쳐야 해.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낀다.

고통과 공포로 얼룩진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되어 제대로 앞이 보이지도 않지만 LRL은 달리고 또 달렸다.


"싫어, 이런 건 싫어...!"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도와줘.

태어나 처음 겪는 감각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다.

더치 걸은 어디에 있는걸까? 아우로라는 우는 걸 멈췄을까?

소완은 아직도 기분이 상해있을까?


"콰당!"


발을 헛디뎠는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안 돼. 이래선 그림자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고개를 돌려보니 양다리는 무릎부터 깨끗이 베여 몇 걸음 뒤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후으으...아...아파...사령관...구해줘...."


눈물이 멎지 않는다.

피가 멎지 않는다.

그저 달콤한 과자를 먹여주고 싶었는데.

단지 행복하게 손을 잡고 싶었는데.

13

"주인님, 계신가요?"


옷을 추스르고 있자니 다급한 목소리로 라비아타가 문을 두드렸다.

평소엔 절도를 잊지 않고 이상적인 몸가짐의 모범과도 같았는데, 지금은 거의 문을 부술 기세로 쾅쾅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어, 잠깐만. 금방 나갈게"


과격한 플레이를 하다 옷이 찢어진 리리스는 이불로 몸을 가리고, 바지까지 올려 입은 사령관이 문을 열자

역력히 당황한 기색의 얼굴이 나타났다.


"대단히 위급한 상황이에요. 지휘관급을 비롯한 주요 개체를 호출했으니 주인님도 당장 그곳으로...."


무언가에 쫓기는 듯 입을 연 라비아타의 시선이 사령관을 넘어 안쪽 침대에 웅크려있는 리리스와 마주치자,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당황과 경멸의 감정이 스쳤다.


"...리리스...."


"무슨 일이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만한 내용은 아니니 최대한 신속히 로비로 와주세요. 리리스 양도 마찬가지예요"


말을 마치자마자 빠른 속도로 사라져가는 라비아타의 뒷모습은 여느 때보다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 왔어. 상황 설명 좀...심각한 일이야?"


로비에 도착한 사령관은 공기가 무거움을 느꼈다.

앞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의 면면을 보아 여느 문제가 아닌 듯싶었다.

직접 호출했던 라비아타는 물론이고 마리, 레오나, 메이, 칸, 아스널 등의 지휘관 개체와 레모네이드 알파까지.

무엇보다 알바트로스까지 모여있는 시점에서 사태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필요가 없었다.

지난번 레모네이드 감마와의 전면전을 앞두고 모였던 당시를 연상시킬 정도의 중압감.

설마 감마가 병력을 이끌고 다시 온 것일까?

어지럽게 나름의 퍼즐 조각을 맞추는 사이 리리스가 새 옷을 입고 다급히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경호대장, 지금까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한층 딱딱하고 엄격한 어조의 마리가 서슬 어린 눈매로 리리스에게 질문했다.

왜 저러는 걸까?


"주인님의 방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그전에는 새로 온 손님에게 인사하고자 방문하신 주인님을 경호했답니다"


"경호대장으로서의 임무는 언제나 그렇듯이 손색이 없었군. 헌데 그 손님들과 주변 구역에 대한 경호는 따로 하지 않았나?

그동안 보여준 능력과 경험을 감안하면 당연히 다른 컴패니언을 배치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최근 동생들이 무리했기에 휴식이 필요해서 따로 하지 않았어요"


리리스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버벅였다. 

경호인력이 따로 없었다고?

생각해보니 PECS의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고자 자의로 찾아온 바이오로이드들이 몇몇 있었지만, 복도에서 그 외의 이들을 본 기억은 없다.

그러니 키르케와 유미가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사를 부렸겠지.

어쩌면 사령관과 단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복도에서부터 사령관실까지 별도의 인력배치를 하지 않은 걸까?

그 귀여운 앙탈은 이해가 갔지만 자칫하면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는 안일함이다.

이 자리가 끝나면 리리스에게 주의를 시키는 편이 낫겠지.


"아무리 사령관과 침대에서 뒹구는 게 좋다지만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니야?

주어진 역할과 의무에 충실하지 않은 시점에서 전장이었다면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거야.

사령관도 합리성을 좀 갖춰"


레오나는 시선을 리리스에게 향하지도 않고 독설을 내뱉었다.

원래 도도한 성격이기는 했지만, 무슨 일이 오늘따라 저렇게 까칠하게 만든 걸까?


"미안, 말한 대로 다들 데려왔어!"


점점 숨 막혀가는 분위기를 청량한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리앤이 환기했다.

아르망과 닥터가 뒤에서 가쁘게 호흡을 가다듬고 있고 파티에 쓸 음식을 준비하고 있을 소완과 휘하 바이오로이드들도 보였다.

로비에 이렇게나 많이 모이다니, 커지는 긴장만큼이나 의문도 깊어간다.

이제 슬슬 부른 이유를 말해주면 좋겠는데.


"...모두들 놀라지 말고 듣도록. 방금 LRL이 피살됐다"




머리가 새하얗다.

분명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이해가 되질 않는다.

생소한 언어는 아니고 분명 의미가 해석되는 단어의 조합인데 모르겠다.

뭐라고?


"각하, 괜찮으십니까? 의자를 가져다 드릴까요?"


걱정스럽게 묻는 마리에게 한 손을 들어 괜찮다 제지한다.

아마 안색이 좀 나빠졌나 보지.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잘못 들은 거지?


"정말 미안한데 지금 하나도 이해가 안 되거든? 설명 좀 해줄래?"


"...오르카 내 복도에서 LRL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수십m에 걸쳐 핏자국과 도망친 흔적이 있고 왼팔과 양다리가 절단되어...."


아찔하다.

현기증이 돈다.

견딜 수 없는 두통이 예고 없이 엄습해 바닥과 천장을 거칠게 뒤집는다.


"주인님! 진정하세요!"


눈 앞을 향해 달려드는 바닥이 갑자기 멈췄다.

아마 리리스가 쓰러지는 나를 붙잡았나 보다.

불규칙해진 호흡을 억지로 가다듬으려 애써보고 그대로 주저앉는다.


"장난이지? 그런 거 하지 마. 방금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들며 한 방에 있었다고.

새 친구에게 오르카를 구경시켜준다며 뛰어나갔는데, 주...죽었...다고?"


거칠게 내려치는 주먹에 바닥이 요란한 굉음을 낸다.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은 흠칫하며 사령관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답을 알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었다.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 그만해.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오르카에 외부인이 몰래 숨어들어올 수는 없어. 감시체계가 삼엄하잖아. 그걸 뚫고 들어온 누군가에 의해 LRL이 죽었다고?

팔다리가...뭐? 사고지? 아니야, 그것도 말이 안 되잖아. 왜 멀쩡한 복도에서 갑자기 그런 꼴을 당하는데?

그런 게 가능해? 불가능하잖아! 다 거짓말이야!"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사령관의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면서 두려웠다.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된 신체로 바닥을 마구 쳐서가 아니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악다구니를 두서없이 내뱉어서가 아니다.

모두 사령관이 얼마나 다정하고 바이오로이드들을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난관과 고비를 지나오면서 기적적으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희생자도 내지 않은 건

사령관의 끝을 모르는 능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필사적으로 가족을 지키려는 열망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군지 기억을 잃고 세상에 떨어진 사령관을 구한 건 오르카의 바이오로이드였고,

그런 바이오로이드를 은인으로 여기며 마음을 나누고 서로 기댈 수 있는 소중한 버팀목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PECS의 투항자들도 오르카에 합류해 웃음소리는 더 커지고 보다 많은 이들이 행복을 바랄 수 있을 터였다.

잠시 후에는 이들을 축하하는 기념 파티도 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잃는다고?

그 앳되고 불쌍한 아이를?

사령관이 느끼고 있을 실의와 절망은 감히 가늠하기도 어려운 것이었고, 

그 고통과 고뇌가 얼마나 뼈저릴지, 얼마나 한탄스러울지 주변의 모든 이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지켜봐야 했다.

저 설움을 같이 나눌 수라도 있다면 나을 텐데.

이미 바이오로이드들은 저마다의 감정이 차올라 더 할애할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같이 가줘야 했어...그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주인님, 진정하세요. 호흡이 너무 불안정해요"


"리리스...왜 경호인력을 따로 배치하지 않았어...? 응...?"


끝을 모르는 깊은 계곡에서 새어나오는 마른 바람 소리처럼 떠도는 사령관의 물음에 리리스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떨궜다.

주인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자 계획했던 얄팍한 의도가 이런 식으로 처참한 결과를 빚어낼 줄이야.

소중한 주인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줄이야.


"소완...LRL이 거기로 찾아가지 않았어...? 바빠서 미처 못 봤을까...?"


씁쓸한 심정으로 주인의 떨리는 어깨를 바라만 보고 있던 소완이 말을 주저했다.

주방에서 있었던 일을 곧이곧대로 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소첩은...주인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사옵니다"


"주방장님은 요리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으셨어. 때마침 과자를 굽던 내가 LRL을 보긴 했는데...."


"그 가련한 아이는 주방에 왔다가 쫓겨났느니라.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던 차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으니"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폭풍이 어디로 튈지 몰라 다들 눈치를 보는 가운데 

소완을 옹호하려던 아우로라의 노력도 부질없이 히루메가 폭탄발언을 터뜨렸다.

아까 혼났던 게 원한으로 남았던 걸까?

정작 그 말을 한 히루메는 본인도 아차 싶었는지 당황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소완에게 차마 시선을 향하지 못했다.


"들뜬 아이가 찾아온 거 하나 너그러이 받아주지 못하고 내쫓았다고? 그래서 죽게 내버려두고?

한두 명도 아니고 그렇게 많이 있었으면서 신경 하나 써주질 못했어? 그깟 음식 준비에 눈이 멀어서?"


울분에 찬 사령관의 질타는 소완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했지만 소완은 감히 입을 생각을 품지 못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음식이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죽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주방에서 한창 조리 중이던 온갖 진미는 본디대로라면 지금쯤 무사히 옮겨져 많은 이를 즐겁게 만들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감정에 휩쓸려 분풀이를 한 결과 미완성인 채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

따끔하게 혼낸 아이의 시체가 차갑게 식어가고 있듯이.


"아니...방금 말은 잊어줘. 너희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지. 애초에 사령관인 내가 한눈을 팔아서 자초한 거야.

다 내 탓이야...."


횡설수설하며 넋두리인지 신음인지를 흘리는 사령관은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그 비탄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저 난도질당한 마음을 보듬을 수 없을 터였다.




"닥터, 아르망. 조용히 모여봐...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사건을 조사해서 진상을 밝히고 범인을 심판하는 거야.

그래야 불쌍한 LRL과 사령관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어. 난 사건 현장으로 가 증거를 찾아볼게.

자료를 충분히 확보해 취합하면 아르망의 연산 능력을 바탕으로 정답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몰라. 닥터는 어떡할래?"


"오빠가 너무 걱정돼. 워낙 충격적인 일이라 견뎌낼 수 있을지...리앤 언니와 함께 현장 감식을 하는 것도 유효할 거고,

아르망 언니의 연산 보정을 위해 발 빠르게 추가적인 데이터를 업로드하는걸 우선시하는 게 나을지도. 요 며칠 사이 갱신할게 많았거든"


"...이런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제 연산 능력이 부족했던 걸까요? 

자료와 근거가 더 있었더라면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보좌함에도 폐하께서 이런 현실을 마주하시다니...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에요"


통곡하는 사령관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모인 세 명의 브레인은 저마다 의견을 나눴다.

현장 체질인 리앤은 몸소 조사하기로 했고, 닥터는 우선 아르망의 연산을 한층 정교히 다듬기 위해 연구실로 가기로 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큰 혼란에 빠진 것을 감추지 못하는 아르망을 곁에서 부축하기 위해서라도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이번 사건은 기필코 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결판을 내겠어'


문제의 복도를 향해 달려가며 리앤은 다짐했다.

14

"오, 잘 다녀왔어?"


방으로 돌아온 더치 걸을 본 티에치엔은 밝은 미소로 반겨줬다. 

같이 갔던 꼬맹이가 워낙 재미있고 활발했으니 틀림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겠지.

하지만 예상외로 더치 걸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침대로 향했다.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나 봐? 주방에서 반겨주지 않은 거야?"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까요. 아무리 귀여운 꼬마손님이라 해도 마냥 하하호호할 여력은 없었겠죠"


마이티R은 어림짐작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옆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순진한 아이니 자그만 일로도 혹 상처를 받을지 모르기에.


"그 살가운 친구에게는 배웅을 잘 해줬나요? 둘이 정말 잘 어울리는 게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던걸요.

아마 잠시 후에 우리를 위한 환영파티를 연다고 하니, 그때 마음껏 맛난 음식을 먹어봐요.

주방의 분들도 그 순간을 위해 온 정성을 다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거에요"


"그럴까요...?"


시무룩한 얼굴을 하며 눈망울이 살짝 젖은 걸 보니 무슨 일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엄한 주방장에게 혼난 게 아닐까?

건강한 신체를 위해선 단련만큼 중요한 게 영양섭취기에 주방 사정에도 비교적 익숙한 마이티R은 쓴웃음을 지으며 더치 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요. 사령관님이 하신 말씀 기억하죠?

서로 위하고 친하게 지내며 함께 웃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훌륭한 분이 계신 이상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착한 마음씨를 품고 있을 게 분명해요.

거기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슴 깊은 곳에는 모두 친절하고 선량한 꽃이 자라고 있을 테니 우울해하지 말아요.

화려한 축하자리에 어두운 얼굴을 보이면 그분들은 얼마나 슬퍼하겠어요?

자, 씨익 웃어봐요.

후훗, 이런 환한 미소를 보고 기뻐하지 않을 수는 없다구요. 알았죠? 이 문을 나설 때 그 미소를 지으면서 함께 걸어가요. 약속"


고사리같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 끝을 꾸욱 누르는 더치 걸의 눈가는 어느새 물기를 날리고 반짝임이 깃들었다.

비록 아까 주방장님에게 혼나고 LRL을 따라잡으려다 놓치긴 했지만, 곧 파티에서 다시 만나 웃고 떠들며 손을 잡을 수 있겠지.

그 따스한 온기가, 봄날의 햇살 같은 마음씨가 벌써 그리웠다.


"똑똑"


"누군지 모르겠지만 들어와"


호방한 티에치엔의 대답을 듣고 미소 짓는 켈베로스가 모습을 보였다.

드디어 파티 준비가 끝난 걸까?


"자자, 여러분의 친구, 켈베로스가 왔어요. 다들 잘 계시죠?"


"응, 덕분에. 이렇게 좋은 방을 주고 정성껏 대접해줘서 고마워. 저녁 먹을 시간이 된 거야? 배고픈데"


"어...유감스러운 소식을 전해드려야 할 것 같아요"


켈베로스는 계속해서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지만 난처함과 경계심을 품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방 안을 살펴봤다.


"문제가 생겨서 저녁에 열 예정이었던 파티는 취소됐어요. 그리고 안전을 위해 방 밖으로 나오는 건 자제해주셨으면 해요"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얼마나 기대했는데. 배고프다구~"


"식사는 따로 가져다 드릴 거에요. 워낙 급작스러운 상황이라 저희도 좀...."


"이렇게 방문하신 걸 보니 이유가 있겠죠. 괜찮다면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게...."


난처함을 숨기지 못하며 억지 눈웃음으로 넘기려는 켈베로스의 등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뱀, 그거 들으셨슴까? 정체불명의 괴한이 오르카 내부로 잠입해 살인사건이 났다는 거 말임다. 

지금 마리 대장님이 긴급 회의하러 가셨다던데...."


"기차 화통 삶아 먹었어? 목소리 좀 줄여. 바로 옆인데 왜 그리 소리치는 거야...."


"듣기로는 LRL이 당했다던데 참 불쌍하게 됐지 말임다. 고깃덩이가 돼서 복도 한가득 피 칠갑이...."


"야, 입 닫아. 그렇게 함부로 말할 내용이 아니야"


"아...죄송함다. 시정하겠슴다"


목소리는 멀어졌지만 방에 남은 세 명은 직감적으로 다가올 상황수습을 생각하며 머리가 아찔해졌다.

켈베로스가 자세를 잡으며 문을 틀어막고 마이티R이 다급히 뛰쳐나가려는 더치 걸을 붙잡았다.


"진정해요! 지금 나가면 안 된다잖아요...!"


"거짓말이죠?! 제가 잘못 들은 거죠?"


"밖은 위험해요. 여기서 머물러주세요"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주세요. 제발...이럼 안된단 말이에요. 울면서 뛰어가는 걸 붙잡지도 못했는데...!"


몸부림치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는 더치 걸의 절규에 남은 이들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범인은 잡았어?"


"아뇨, 아직...지금 대책회의 중일 거에요"


"그래...후우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굳은 얼굴로 깊은 한숨을 쉬는 티에치엔의 양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무엇을 위한 무술인가.

신체를 단련하고 대상을 제압하며 필요하다면 살상도 주저 않는 기술을 습득하는데 오랜 세월을 바쳤다.

인격수양이니, 더욱 높은 정신적 경지의 추구니 하는 고상함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힘을 필요로 하는 곳에 힘을 더하고자 존재의의를 다져왔다.

바로 지금, 수많은 이의 행복과 단꿈을 짓밟는 사악한 살인마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방 안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만 보는 꼴이라니.

마음같아선 당장에라도 켈베로스를 밀치고 뛰쳐나가 어딘가에 있을 범인을 짓이기고 싶었지만,

문을 가로막는 켈베로스가 쥔 전기 충격봉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치솟는 분노를 애써 억눌렀다.

깨져버린 평화를, 흔들린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심정은 모두가 같겠지.

끅끅거리는 울음소리를 내는 더치 걸을 가슴에 파묻으며 혹여 자신이 흘리는 눈물이 남들에게 보일까 마이티R은 고개를 돌렸다.

억지로 깨문 입술에서 흐르는 핏방울은 붉게 빛나며 앞서 흐른 희생자의 피를 애도할 뿐이었다.




로비에서는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오르카 최초의 사망자, 그것도 전투 중 사망도 아닌 내부에서의 피살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안겨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고

모두를 이끌며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사령관은 가장 처절하게 무너져 맥을 못 추는 상태였다.

리앤을 비롯한 몇몇은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냉철히 가늠하고 실행으로 옮기고 있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개인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혼란에 빠진 오르카를 가다듬고 안정을 부여하며 대책 마련을 위해서는 중심축인 사령관을 다시 일으킬 필요가 있었고

섣불리 일으키려다 아예 부러질까 걱정이 된 바이오로이드들은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떠오르고 사라져가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고르며

어떻게 운을 띄울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다들 사령관이 얼마나 인간미 넘치고 자신들을 소중히 여겼는지 알기에,

그 따스함을 쏟던 애정의 대상을 잃은 상실감은 대단히 클 거라 머리로는 가늠하지만

막상 처음 겪는 상황이라 감히 견줄 엄두를 내지는 못하겠기에.

자칫했다가 갈 곳 없는 감정을 정면으로 받아내게 되는 건 피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사령관이 더 슬퍼하는 모습을 지켜볼 각오가 없었다.

최소한 감정을 지닌 바이오로이드는 그랬다.


"사령관. 사태의 분석과 대책 마련을 위해 피살된 LRL의 시체에서 모듈을 추출해 분석하는걸 건의한다"


알바트로스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로비를 가로지르자 사령관을 제외한 모든 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AGS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나 있을까?


"...지금 뭐라고 했어? 알바트로스?"


줄곧 웅크려있던 사령관에게서 무감정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알바트로스로부터 옮은 것일까?

이게 격렬한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함인걸 모두 은연중에 깨닫고 있으면서도 차라리 이 부질없는 기대가 실현되기를 소망했다.


"지금, LRL의 시체를, 토막 내, 모듈을 끄집어내자고? 

사태의 분석을 위해? 

그 불쌍한 눈이 마지막에 뭘 봤을지 확인하기 위해?

잘린 팔다리를 꿈틀거리며 절규하던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확실히 지켜보기 위해?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진정해, 사령관! 알바트로스가 무뚝뚝한 거 알잖아. 그저 그 악독한 범인을 잡아내기 위한 방법을 제시했을 뿐이야"


메이가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사령관의 허리를 붙잡았다.

작은 덩치에 흥분한 사령관의 몸을 막아낼 수 있을 턱이 없었지만,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바동거리며 그 얼굴을 거칠게 뛰는 가슴에 비비자 

높이 쳐들었던 사령관의 손이 차츰 내려와 메이의 머리를 어색하게 쓰다듬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LRL을 죽인 범인을 지옥 끝까지 가서라도 찾아내 그대로 처박는 거야.

뭘 해도 LRL은 돌아오지 않아. 그건 사령관도 알잖아?

그렇기에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상실감이 얼마나 무거운지 어리석은 쓰레기에게 똑똑히 가르쳐줘야 해.

차라리 자비롭게 죽여달라 간절히 외칠 정도로...그러기 위해선 고려할만한 발언이야.

알바트로스의 냉철함이 우리에겐 균형추가 될 수 있어.

지난 작전 때 보여줬던 신뢰를 기억하지?"


"그래...내가 너무 흥분했어"


붉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의 움직임이 차츰 부드러워지더니 사령관의 시선이 알바트로스를 향해 곧게 닿았다.


"사과하지는 않을게. 내 감정은 한 치의 남김없이 순수하니까.

하지만 알바트로스의 건의는 수용할게. 현시점에서 그게 범인의 실마리를 잡는 데 도움이 될 방법이니까.

지난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냉철하고 올곧은 인도를 필요로 한다면 주저 없이 이끌어주길 바란다고.

나를 비롯해 여기에 있는 우리는 감정을 품고 있고 때로는 그로 인해 판단이 흐려질 수 있어.

그럴 때 바른길로 이끌어줘야 하는 게 알바트로스야. 지금 이 말, 잊지 말아줘"


"난 언제나 최선의 판단을 내린다"


검은 AGS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짤막하게 답했다.


"메이...용케도 그 덩치로 날 막을 생각을 했네. 걱정 끼쳤구나"


"힘든 거 아니까 무리하지 마, 사령관. 우린 언제나 사령관의 힘이 될 테니 때로는 기대도 돼.

이번 일은 사령관 잘못이 아니야...그렇게 무너져선 LRL도 슬퍼할 거야"


"그래...그래...LRL을 위해서 이대로 가만있을 수만은 없어"


여전히 씁쓸함을 숨기지 못하는 사령관이었지만, 

최소한 눈은 더 이상 탁하지 않았고 끝없는 늪에서 빠져나와 발을 딛은 것에 지휘관들은 안도했다.


"사령관, 앞으로의 지휘를 부탁해도 되겠나?"


"일단은 범인 색출이 최우선이겠지. 알바트로스의 건의를 비롯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관련 아이디어가 있다면 뭐든 제안하고.

그리고...LRL의 장례식을 치러주자. 더는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어"


칸의 물음에 답한 사령관은 주먹을 꽉 쥐었다.

15

"우왓, 잠시만 기다려줘! 현장에 함부로 다가오면 안 돼!"


불현듯 느껴지는 인기척에 리앤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다급히 외쳤다.

사건은 언제나 현장에서 시작되고, 그렇기에 실마리도 현장에 있다.

최대한 당시 그대로 보존된 상태에서 그 단서를 찾아내는 것이 정답으로 이어지는 첫 단추.

워낙 충격적인 일이니만큼 궁금해하는 이도,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는 이도 많겠지.

하지만 그런 충동을 만족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범인을 색출하고 마땅한 정의를 구현함에 있다.

그래야 죄없이 세상을 떠난 LRL의 눈을 감겨주고, 갑작스러운 이별에 슬퍼하는 이들에게도 한 줌 위안이 되겠지.

복수는 부질없다지만 그건 원한에 잠겨보지 않은 이들이 내뱉는 무책임한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

최소한 그 복수라는 것을 행하고 허탈함에 젖을지언정,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젖은 피해자들의 마음을 무슨 수로 가늠하고 위로하리.

특히 LRL을 아끼고 귀여워한 사령관을 생각하면 수사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어디에 어떤 흔적이 남아있을지 모르니 현장은 최대한 보존해야만 한다.


"열심이구나, 리앤"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지금 들리면 곤란한 목소리.


"사령관?! 괜찮아? 벌써 현장에 오면...."


"괜찮아. 언제까지고 슬픔에 젖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안 되잖아. 난 모두를 이끌어야 할 사령관이니까"


이성과 냉철함을 되찾은 말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말마따나 지금은 감성에 몸을 내던진들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 숨기지 못한 떨림은 과연 진정 앞으로 내디딜 다리가 비틀거리지 않을 거라 믿어도 되는 걸까?


"무리하지 마. 허세 부리는 건 보기 안 좋아. 마음은 알겠으니 일단 거기에 서서 심호흡부터 하자"


굽힌 몸을 일으킨 리앤은 사령관에게 다가가 양 볼을 붙잡고 가볍게 주물렀다.


"으으, 눈물 자국 좀 봐. 괴로우면 괴롭다고 말해. 기대고 싶으면 언제든 기대고. 우리 사이잖아?

내가 사령관을 믿듯 사령관도 나를 믿어줘. 이번 사건은 내 모든 걸 걸고 반드시 해결해 보일 테니"


"알았어...미안, 잠시만 기댈게"


거칠게 껴안는 사령관을 온몸으로 받쳐주며 리앤은 부드럽게 등을 토닥였다.

엇갈린 고개 너머 흐느끼는 소리에 애써 의식 속으로 가라앉혀둔 슬픔이 덩달아 솟아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울 수는 없었다. 애도할 수는 없었다.

탐정인 자신이 냉철함을 잃고 눈물에 시야가 흐려진다면 누가 이 안갯속을 헤쳐나갈 것인가.

소중한 사령관을 위해서라도 리앤은 울어선 안 됐다.


"...좀 진정이 돼?"


"응, 민망한 모습을 보여버렸네"


"헤헹, 아냐 아냐.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니 가끔은 이렇게 내가 멋진 역할도 해야지"


으쓱거리며 일부러 밝게 대답하는 리앤의 마음 씀씀이에 사령관은 슬픔의 늪에서 한 발 내디딘 듯했다.


"그래, 수사는 진전이 좀 있어?"


"으응, 지금은 뾰족한 답변을 하기 어려워. 시간이 좀 더 필요해"


"그런가...사실 아까 회의에서 의견이 하나 나왔거든"


"뭔데?"


"LRL의 모듈을 분석해 당시 상황과 범인을 알아보자는 거야. 그러려면...그...."


머뭇거리는 사령관의 입에 리앤은 손가락을 갖다 댔다.


"힘든 결정을 했구나. 말하지 않아도 알아.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LRL은 우선적으로 조사해서 일단 확보할 수 있는 정보는 확보해놨어. 혹시나 싶어 신체를 온전히 수습해놨고"


하얀 손가락이 구석에 놓인 포대를 가리켰다.


"닥터에게 데려가면 도움을 줄 거야. 아마 지금쯤 아르망과 함께 있을까?"


"아르망?"


"응,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면서 엄청나게 자책하더라고.

추가적인 자료 확보를 위해 닥터가 도와주기로 했는데, 혹여라도 너무 나무라진 말아줘"


"나무랄 리가. 아르망 잘못도 아닌데"


"...다행이야. 슬픔과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키곤 하는데. 역시 그때처럼 믿음직스럽구나, 왓슨"


리앤은 부드러운 손길로 사령관의 뺨을 쓰다듬었다.


"난 현장을 더 조사할 테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줘. 재빨리 달려갈게"


"네가 있어 정말 큰 힘이 돼, 리앤. 그저...고마워"


"히히...아무 말도 하지 마. 말하지 않아도 다 아니까"


싱긋 웃는 리앤을 뒤로 하고 사령관은 LRL의 시신이 담긴 포대를 양팔에 안아 발걸음을 옮겼다.




"닥터, 안에 있어?"


사령관은 닥터의 연구실 앞에 서서 나지막하게 외쳤다.

필시 정신없이 분석과 이런저런 작업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

예전부터 닥터는 무언가에 한 번 꽂히면 식음을 전폐하고 모든 신경을 집중해 자신만의 세계에 가라앉곤 했다.

하물며 지금은 단순한 관심사가 아닌 모두의 안위가 달린 중요한 사항.

처음부터 별다른 답변이 돌아올 거라 기대하지 않았기에 팔꿈치로 진입 요청 단추를 누르고 기다리기를 몇 분.

문이 열리며 기괴한 장치와 패널로 가득한 별천지가 손님을 반겨줬다.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다른 세계 같네...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닥터, 지금 좀 괜찮아?"


미래로 이끄는 듯한 길목을 지나 갑자기 넓어지는 공간에 도달하자 

우측 의자에 앉아있는 닥터가 엄청난 속도로 양손을 움직이며 컴퓨터를 다루고 있었다.

수시로 크고 작은 패널을 띄우고 지우길 반복하며 데이터의 홍수를 내뿜는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컴퓨터라면 말이지만.


"닥터...?"


사령관의 말에 반응할 여유조차 없는지, 아니면 고도의 집중상태라 추가적인 외부자극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인지

닥터는 무아지경으로 손을 놀렸다.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는 듯 매끄럽고 현란한 움직임.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글자와 숫자의 행진을 어떻게 저리 빠르게 처리하는지 경이로움을 느낄 무렵,

왼쪽의 의자에 앉은 아르망이 보였다.


"아르망, 거기 있었어?"


이번 일로 심하게 자책하더라는 리앤의 말이 떠올랐다.

아르망이 지닌 미래 예지에 가까운 예측능력은 언제나 큰 도움이 됐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당장 테마 파크 당시 사령관의 행보를 예측한 결과는 좋은 방향으로 틀리지 않았던가.

어쩌면 LRL을 잃지 않는 미래를 미리 봤을 수도 있었겠지만....

사령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의 가정은 부질없고, 괜한 아쉬움과 갈 곳 없는 분노만 자아낼 뿐이다.

아르망은 잘못이 없다.

지금 의자에 앉아 이상한 관으로 이어진 장치를 쓰고 이따금 신음을 흘리는 아르망은 책망받아선 안 된다.

...저 장치는 뭘까?

생김새만 보면 보련의 헤어샵에 있는 게 어울릴 것만 같은 기괴한 형태.

저걸로 머리를 볶는 것은 아닐 테고, 데이터의 전송을 저런 식으로 하는 걸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 상당히 섬세하고 중요한 작업일 테니 괜히 말을 걸어 방해해선 안 되겠지.

다시 시선을 돌려 닥터가 자신이 온 것을 알아채기를 기다리며 사령관은 인내심 있게 자리를 지켰다.


"어, 오빠. 왔어? 40초만. 일단 이것만 끝내고"


고글을 쓴 두 눈을 패널에 그대로 박은 채 닥터가 입을 열었다.

저렇게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면서 내가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결코 짧지 않은, 그렇다고 마냥 길지도 않은 기다림이 곧 끝난다 생각하면서 사령관은 패널을 바라보았다.

중간중간 몇 개의 단어와 사진이 스쳐 지나간다.

영어와 어딘지 모르겠는 외국어, 숫자, 오르카 호의 구조를 나타내는 듯한 설계도,

본 순간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지는 기묘한 문자,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 듯한 검은 돌....

강렬한 편두통에 인상이 찌푸려진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그 포대는 뭐야, 오빠?"


드디어 손을 멈추고 의자를 돌린 닥터의 얼굴을 마주 본다.

고글에 가려져 눈이 잘 보이진 않지만 표정을 보니 약간의 피곤함과 궁금증이 뒤섞인 것 같다.


"현장에 가서 LRL을 수습해왔어. 회의에서 모듈을 분석하면 당시 상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와서"


"으음, 확실히 일리 있고 타당한 내용이긴 한데. 모듈의 상태가 관건이니 손상 정도에 따라 확인할 수 있는 정보가 좌우될 거야.

그건 그렇고 누가 그런 의견을 제시했어? 어지간한 냉정함이 아니고는 꺼내기 어려웠을 텐데"


"알바트로스"


"아, 알바 오빠라면 그러겠지"


납득했다는 듯이 닥터는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 손잡이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기계 팔이 내려와 사령관 앞에서 멈추더니 기묘하게 펼쳐지며 수술대로 변했다.


"거기에 포대째로 올려줘, 오빠. 모듈 추출작업과 부검에는 3시간 정도 걸릴 테니 그 사이에 아자젤 언니와 장례식 절차를 준비하면 될거야.

피곤할 텐데 한숨 자고 오는 건 어때?"


"어...어떻게 알았어?"


"뻔하지 뭐. 오빠 마음씨에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한데. 우리도...갑작스럽게 떠나버린 가족에게 제대로 작별인사를 해야 하고"


닥터의 표정은 씁쓸해 보였다.


"지금까지 오빠 덕에 단 한 명의 바이오로이드나 AGS도 잃지 않았는데, 그래서 이런 건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는데...

고민하려는 걸 외면했다고 해야 할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미안해, 오빠"


"닥터가 미안할게 뭐가 있어"


"미안해, 정말...이럴 때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스스로의 감정이 혼란스러운지, 닥터는 의자에서 일어나 LRL을 실은 수술대와 함께 안쪽 복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러니까 나중에 와, 오빠. 알았지?"

16

정갈한 복도를 걷는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정돈된 복도는 침묵이라는 이름의 장막까지 드리워 엄숙함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 끝에 자리 잡은 장소의 주인다운 성향이 반영된 거겠지.

정확히는 그 보좌겠지만.

사령관은 미련처럼 남는 자신의 발소리를 뒤로하며 코헤이 교단의 회당에 다다랐다.

아자젤을 비롯한 천사들의 요청으로 믿음을 다지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기 위해 마련된 신앙의 장소.

종종 종교활동 등을 목적으로 여러 바이오로이드들이 오갔을 터인 그곳에 한 천사가 다소곳이 앉아 어린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군요, 반려"


하얀 날개를 눈부시게 펼치며 천사가 다가왔다.

모든 죄와 슬픔을 감싸 안을 듯한 자애의 포옹.


"빛은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내려줍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닐지니, 비록 환난이 엄습하고 죽음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지라도 진정한 종말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우리를 이끌어줄 구원자 역시 고통과 괴로움 가운데 스스로를 의심하고 부정할 순간이 올지 모르나...

언젠가 모든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따스한 빛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힘을 내세요"


진심어린 위로만큼이나 따스하고 부드러운 가슴을 통해 심장 소리가 콩닥거리며 전해진다.

그래,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 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갑작스레 떠나간 LRL을 정중히 보내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쐐기를 박아야겠지.

그러기 위해선 아자젤을 비롯한 천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여기에 오니 마음이 좀 안정되는 것 같아. 아자젤, LRL의 장례식을 부탁해도 될까?"


"가여운 신자가 보다 이르게 빛을 향해 올라가니, 그 영혼이 방황하지 않고 옥좌에 무사히 도달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저의 역할.

마땅한 의무를 겸허한 마음으로 받들겠나이다"


한 걸음 물러나 기품있게 자세를 낮추며 인사하는 아자젤은 숭고함의 화신 그 자체였다.

만남이 있으면 작별 또한 존재하는 법.

다만 사령관도, 아자젤 본인도 이토록 가까운 이를 떠나보낼 날이 당장의 현실로 다가올 거라곤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가고시마에서 또 다른 아자젤의 장례식을 치르던 기억이 떠오른다.

더 이상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없게 된 슬픔을 토내해던 광경.

그렇기에 전신전령으로 임해야겠지.

혹시 모를 절차의 미숙함도 정성을 다해 보완하고 다른 이의 도움이 함께한다면 능히 극복할 수 있을 터였다.


"교단의 사명을 가벼이 여기고 길 잃은 어린양을 광야로 내치는 그릇된 행보는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치품천사여, 그 자리가 짊어지는 막중한 의무를 자각하라"


언제 나타났는지 날카로운 눈빛의 사라카엘이 그대로 시선만으로 아자젤을 꿰뚫을 듯한 기세로 노려보았다.


"모두의 가슴 안에 품은 빛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데 어찌 그런 망령된 언급을 한단 말입니까?

저를 시험에 들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심판자여"


쉽사리 휘둘리며 당황하던 여느 때와는 달리 당차게 대응하는 아자젤에게서 믿음을 이끄는 신실한 천사의 표상이 느껴졌다.

역할이 역할이니만큼 진지한 거겠지.


"두 분 모두 구원자님의 바람에 전적으로 부응하기 위해 아까부터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부디 저희를 믿고 잠시 눈이라도 붙이시지요. 밤이 깊었습니다"


조용히 다가온 베로니카의 차분한 목소리에 옥신각신하던 두 천사는 당황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사령관은 그동안 억눌렀던 긴장이 풀리며 두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될까...? 그럼...잠시만...."


"예, 빛의 품 안에서 잠시나마 평안하시길"




눈앞에 LRL이 있다.

웃으며 손을 잡고는 꺄르륵거린다.

작고 부드러운 손.

포근한 체온을 느끼며 앞으로 달려가려는 LRL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찰랑거리는 머릿결.

발랄한 몸놀림.

끝없이 펼쳐진 오르카의 복도를 같이 달리자고 한다.

군데군데 조명이 나가 어둠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길.

그림자는 끝없이 늘어져 검다 못해 녹색으로 변한다.

질척거리는 늪으로 LRL이 달려간다.

어느새 빠져나간 손을 잡으려 뒤늦게 팔을 뻗어본다.

닿지 않는다.

거기로 가면 안 돼.

외침은 목구멍에서만 맴돌고 폴짝거리는 아이는 발목이 가라앉아 허우적거린다.

당장 몸을 던져서라도 구하고 싶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

감당할 수 없는 읊조림과 비웃음, 외침이 파고든다.

차라리 눈을 감고 싶다.

그럼 살려달라 절규하는 저 모습을 하염없이 보고만 있지 않아도 되는데.

메두사와 마주친 것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끔찍한 광경을 남김없이 담는다.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입이 없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녹아버린 육체는 충혈된 두 눈만 남아 저주와 원망의 시선만 마주한다.


"...세요. 반려, 진정하고 눈을 뜨세요. 빛이 함께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갑자기 위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오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찔하게 돌아오는 여러 감각에 발작하듯 몸을 뒤트니 무릎베개를 해주고 있던 아자젤이 다급히 뺨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진정시킨다.


"사악한 악몽에 정신마저 쉬이 눕히지 못하셨군요...잠시 숨을 고르세요"


아직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가운데 긴 속눈썹이 점점 다가오는 게 보인다.

깊고 인자한 눈동자가 삼킬 듯이 커지면서 입술에 폭신한 감각이 내려앉는다.


"츄읍...."


가다듬지 못한 거친 호흡을 모두 받아주겠다는 듯 정열적인 입맞춤에 식은땀을 흘리던 몸이 차츰 안정을 찾는다.

이성이 깨어나고 여기가 어딘지, 무얼 하고 있었는지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조각이 하나둘 돌아온다.


"...후우. 내가 악몽을 꿨었나? 고마워, 아자젤. 덕분에 많이 나아졌어"


"반려에게 봉사하는 건 저의 마땅한 의무랍니다"


입과 입 사이에 가늘게 늘어진 침 줄기를 손으로 지우며 아자젤이 밝게 웃었다.


"준비는 마쳤고 장례식 안내도 오르카 내에 전했습니다. 2시간 정도 후에 시작할 예정이에요.

괜찮으시다면 지금 가련한 어린양의 육신을 이곳으로 옮겨오고자 합니다만, 누구와 함께 가시겠어요?"


"아자젤은 식을 주관해야 하니 여기서 기다려줘. 베로니카와 다녀올게"


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다.

삐그덕거리던 관절이 찌뿌둥함을 벗어던지며 다시금 활력이 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자젤의 정성 어린 배려 덕에 이 정도로 생기가 돌아온 거겠지.

순수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잡티 하나 없고 탄탄함이 느껴지는 치품천사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직전까지 농염한 키스로 덮쳤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자젤은 앳된 처녀처럼 상기된 볼을 양손으로 다급히 가렸다.


'안됩니다, 소중한 이를 잃어 슬퍼하는 반려가 자칫 음욕에 휘둘리도록 유혹해서야, 빛의 전령이라는 의무를 짊어질 자격이 없습니다'


"관을 준비했습니다, 구원자님. 같이 가시죠"


적절한 시점에 주의를 돌려준 베로니카에게 아자젤은 속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건넸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적절히 받쳐주니, 든든한 보좌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럼 다녀올게, 아자젤. 준비 잘 부탁해"


사령관과 베로니카가 관을 짊어지고 멀어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가짐을 바로잡으려는 아자젤을 

구석에서 소리 없이 줄곧 지켜보던 사카라엘이 팔짱을 풀지도 않고 물었다.


"소중한 이를 잃어 슬퍼하는 구원자가 자칫 음욕에 휘둘리도록 유혹해서야, 빛의 전령이라는 의무를 짊어질 자격이 있는가?"


"읏, 제 마음속에서 나가세요"




닥터의 연구실에서 LRL의 시신을 수습해 관에 안치하고 돌아오는 과정은 의외로 별 감흥이 없었다.

가는 동안 베로니카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올 때에도 마찬가지.

어쩌면 상심에 젖었을 사령관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나름의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닥터는 아까 봤을 때보다 한층 피로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젖은 초췌한 안색이었고,

말 없는 두 명의 도움으로 LRL을 관에 무사히 눕힌 후 딱 한 마디 들었을 뿐이었다.


"단서를 찾는 게 우선이니까 나 대신 작별인사 전해줘, 오빠"


물 속을 허우적거리는 듯 어색한, 익숙하지 않고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은 시간이 지나 다시금 아자젤이 기다리는 회당으로 돌아왔다.

그새 소식을 들은 여러 바이오로이드들이 찾아와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사령관을 보자 위로의 말을 전하려는 듯 입을 열다가 순간 머뭇거리며 시선을 내리까는 몇몇.

조심스럽겠지.

무슨 말로 이를 위로할 수 있을까.

위로가 되기는 할까.

상념에 젖은 공기가 묵직하게 흐르는 와중에 아자젤이 강단에 올랐다.


"오늘 우리는 소중한 천사를 한 명 떠나보냅니다. 만남이 예고되지 않듯 이별도 예고되지 않은바, 

갑작스래 찾아온 갈림길에 우리가 당황하며 슬퍼할지라도 이는 그저 과정이며 한때의 어긋남에 불과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갈림길은 빛 안에 하나로 합쳐지고 모두가 영광의 광휘 아래 웃으며 재회할 수 있기에.

'상실로 괴로워하는 이여 발걸음을 멈추지 말라. 빛은 언제나 끝에서 지켜보고 계실지니'

매 순간이 소중하기에 우리는 이 순간을 슬퍼합니다. 허나 순간은 영원이 되고 슬픔은 한때의 편린에 그칠 것이니,

이 어린양과 함께했던 많은 순간을 기억하며 먼저 하늘로 보내줍시다"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난다.

사령관은 정작 가장 슬퍼해야 할 이 순간에 무덤덤한 자신을 보고 당황했다.

내가 이렇게 감정이 메말랐던가?

주변을 돌아보니 켈베로스 옆에서 쉼 없이 눈물을 흘리는 더치 걸이 보였다.

PECS의 그 아이겠지.

LRL과 가장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아이였기에 현 상황은 그만큼 받아들이기 힘들고 자신의 탓이라는 책망도 느낄 터였다.

...저 아이가 LRL을 붙잡았더라면.

아니면 차라리 LRL 대신 그 복도로 달려갔더라면.

사령관은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하는 자신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르카를 이끄는 사령관으로서 마냥 슬픔과 절망이라는 감정에 젖어있을 수는 없다지만, 이렇게 이기적인 생각이라니?

인간미를 버려서는 안 된다.

그럼 LRL이 슬퍼할 거다.

LRL이 좋아하던 사령관의 모습을, 마음가짐을 잃을 수는 없다.

스스로 되뇌이고 또 되뇌이며 더치 걸 곁으로 다가갔다.


"어엇, 사령관님?"


"고생이 많네, 켈베로스. 더치 걸이 장례식에 참석하겠다 해서 경호하러 온 거야?"


"넵,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겠다며 문을 부술 기세길래...해당 구역은 일단 브라우니가 맡아준다 해서 부탁하고 왔어요"


"그래...다들 역할에 열심이구나. 나도 모범을 보여야겠지"


"괜찮으세요, 사령관님? 아까부터 눈물이 멈추지 않아요"


"내가?"


켈베로스의 놀란 말에 사령관은 스스로의 뺨을 만져봤다.

뜨거운 눈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무덤덤했던 게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슬픔에 잠겨있던 걸까.

가슴에 뻥 뚫린 듯한 이 구멍은, 메워질 날이 오기나 할까.




리리스는 착잡한 심정으로 장례식을 지켜봤다.

자신이 얄팍한 꾀를 부리지 않고 주변 경호에 더 신경을 썼다면 이런 날은 보지 않아도 됐을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본인의 임무는 사령관의 경호니 그건 문제 없었다며 항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뻔뻔하고 이기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돌이킬 수 없었겠지.

누구도 아닌 그 사령관이 저렇게 슬퍼하고 있으니.

사랑하는 주인이 웃고 행복해하는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고, 리리스 본인의 바람과 욕망도 같이 이루고 싶었다.

그리고 그건 충분히 양립할 수 있었다.

이런 예상외의 사태로 근간부터 흔들릴 거라고는 상상 못했지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결과는 모두의 마음 한구석에 진득하니 자리 잡아 무수히 많은 가정을 피워냈다.

소완이 그 때 LRL을 혼내지 않고 차분히 반겨줬다면.

아우로라가 들키지 않고 무사히 과자를 넘겨줬다면.

언제 어떻게 들어왔을지 모르는 침입자를 제대로 걸러냈다면.

허나 이제 와서 무엇하리.

전부 무의미한 것을.

모두의 귀여움을 받던 아이는 차갑고 토막 난 시체가 되어 저 관에 누워있는데.


"해충...추악한 본성을 자제하지 못하고 끝내 주인님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네? 네가 그러고도 경호를 맡을 자격이 있을까?"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리리스는 돌아보지 않고 곱씹듯 말을 내뱉었다. 어차피 누군지 뻔하니.


"어쭙잖은 시비 걸지 마, 스토커. 주인님은 손끝 하나 다치지 않으셨어. 지금 이 일이 내 책임이라는 거야?"


"몸은 그렇겠지. 마음은? 그 여리고 자애로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긴 게 네가 아니라는 거야?"


"괜한 분풀이일 뿐이야. 상황이 상황이니 특별히 넘어가 주겠어. 그 입 조심해"


"조심? 난 정원사야. 나무를 섬세하게 자르고 다듬는 건 내 특기라구.

누구처럼 열매에 눈이 멀어 해충이 뿌리부터 갉아 먹는걸 외면하지 않아"


"그렇게 계속 정원이나 관리해. 벌레나 잡으면서. 난 주인님 곁에서 너는 평생 손에 넣지 못할 총애를 한 몸에 받을 테니"


"하, 총애? 망상에 빠져 사리분별이 안되나 보구나. 하긴 그런 판단력이니까 사태를 여기까지 방치했겠지.

네가 암캐처럼 다리를 벌려서 이런 사달이 벌어졌는데 앞으로 주인님께서 널 거들떠나 보실까? 근처에 두는 것도 역겨워하실걸?

확실히 말해두는데, 주인님을 괴롭게 하면 가만 안 둬"


평소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에 걸쳐 쌓아온 악연과 공감대는 둘을 그리 나쁘지 않은 관계로 이끌었지만,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사건은 주변을 둘러싼 이들을 가파른 절벽으로 밀어대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 격렬하게 샘솟고 타오르는 감정.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어두운 기운.

울적한 안개는 오르카를 조금씩 조금씩 잠식해갔다.




"구원자여, 고귀한 영혼을 떠나보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시겠어요?"


어느덧 장례식의 막바지 절차에 다다르고, 아자젤이 사령관에게 넌지시 권유했다.

지금 LRL의 얼굴을 보면 앞으로 영영 다시는 볼 기회가 없겠지.

마지막이라는 게 이렇게나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었던가, 

사령관은 이 순간이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영원하길 소망하는 모순된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그래...이 눈에 그 얼굴을 확실히 담아둬야겠지"


관으로 다가가 개폐막을 스르륵 민다.

다소곳이 누워있는 LRL은 마치 평온한 꿈을 꾸는 것처럼 보인다.

바이오로이드에 영혼이 있다면 그 평온함이 영원하길.

최소한 마지막 순간이 고통스럽지는 않았길.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손이 LRL의 뺨으로 향한다.

그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던 뺨이 아니다.

왜 이리 차갑고, 왜 이리 손을 뗄 수 없는 걸까.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팔을 보다 못한 아자젤이 사령관을 만류했다.


"진정하세요...이러시면 떠나는 이가 빛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방황하게 될 거에요"


"하아......."


떨어지지 않는 손을 떼고, 아자젤이 LRL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부디 그곳에서는 행복하길...."


순간 차가운 이물감이 느껴진다.

LRL의 뒷목에 난 상처에서 새어나온 녹색 액체가 아자젤의 손가락 끝에 맺힌다.


'이건...?'


바이오로이드의 신체 내부를 구성하는 성분일까?

닥터가 모듈을 추출했다고 하던데, 그 과정에서 사용한 약품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이 신성하고 의미깊은 의식이 지체되어선 안 되겠지.

때마침 빠르게 휘발되어 사라진 액체에 더는 관심을 두지 않기로 하고, 아자젤은 개폐막을 밀어 닫았다.


"이제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의식을 주관하던 아자젤을 줄곧 보좌하던 베로니카가 물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던 사령관의 부탁에 최대한 미뤄뒀지만, 결정의 때가 됐다.

시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엔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사항이었다.

하지만 이젠 해야겠지.

첫 사례이니만큼 앞으로 관례가 되어 기준으로 제시될 것이기에,

감성을 떠나 수많은 인원을 관리하는 오르카의 사령관으로서도 신중히 택해야 하는 일이었다.

매장? 현실적으로 어렵다. 잠수함이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화장...합리적이고 앞으로도 충분히 실행 가능한 경우의 수다. 

오르카 내에 소각시설도 있고, 무엇보다 이쪽 방면의 전문가인 이그니스도 있지 않은가.

그 여린 성품에 부담이 갈지도 모르겠지만, 소중한 이를 보내주는 마지막 순간을 주관한다는 막중한 책임은

평소 다른 바이오로이드의 고민을 들어주던 인자함의 소유자에게 걸맞지 않을까.

언젠가 사령관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피할 수 없는 작별이라면 이그니스에게 맡기고 싶었다.

그녀라면 이해해주겠지.


"이그니스?"


역시나 있다.

회당 뒤편에 다소곳이 앉아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붉은 머리가 보인다.

사령관이 무슨 이유로 불렀는지도 예상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서 언제나와 같은 신뢰가 오간다.

하지만 아직 충분치 않다는 느낌이 든다.

더 신경 써야 할게 남아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아자젤. 부탁 좀 해도 될까?"


"구원자의 뜻은 언제나 절대적입니다.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LRL의 관은 이그니스가 소각해줄 거야. 그 후 재는 바다에 뿌리고 싶어. 생전에 그렇게 참치를 좋아했으니...

최소한 참치를 마음껏 보고 함께 헤엄치도록 말이야.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미련인데...LRL이 하던 안대는 따로 벗겨서 이곳에서 성물과 함께 따로 보관하면 안 될까?

난 이번 일을 절대로 잊을 수 없어. 슬픔에 젖어있겠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영원히 마음에 담아두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하고 싶어"


"기꺼이. 신자들이 언제든 볼 수 있도록 회당 중앙에 교단의 상징과 함께 놓아두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정말...소중한 천사였으니까요"


모두의 귀염둥이였던 아이는 그렇게 바다로 자유로이 떠났다.

17

시간상으론 낮이지만 로비의 분위기는 밝지 않다.

그야 바닷속이니까. 햇빛이 내리쬐는 기분 좋은 수심은 이미 지났다.

물론 주된 이유는 의문의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조사가 썩 만족스러운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상해. 이토록 증거를 찾기 힘든 사건은 처음이야"


리앤이 답지 않게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과거 키리시마 스캔을 멋지게 해결했던 즐거운 토모의 뛰어난 통찰력으로도 갈피를 잡지 못하다니, 

한자리에 모인 바이오로이드들은 덩달아 눈살을 찌푸렸다.


"최고의 탐정마저 벽에 막힐 줄이야...대체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레모네이드 알파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저녁부터 대책회의와 사령관의 동태를 신경 쓰느라 거의 뜬눈으로 시간을 보내서인지, 유난히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다.


"괜찮아? 안색이 안 좋은데. 뛰어난 비서가 쓰러지면 큰일이니 좀 쉬는 건 어때?"


예리한 통찰력이 어디 간 건 아니라는 듯, 알파의 상태를 바로 간파한 리앤의 걱정은 적절한 자극으로 다가와 힘을 안겨줬다.


"으흠,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지금은 주인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드리는 게 우선이에요.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범인에게 심판을 안겨줘야만 주인님께서 두 발을 뻗고 주무실 수 있겠지요.

그때까지 시중을 드는 제가 잠든다니, 충성을 시험하지 마세요"


기백은 넘치니 다행이지만 괜찮을까, 리앤은 감탄과 우려가 섞인 표정을 지었다.


"현장에서 뭔가 특이한 점은 찾지 못했나요? 사소한 것이라도 좋아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머리를 모아 생각해보면 실마리가 보이지 않겠어요?"


"히힛, 그 말이 맞아.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잖아? 수사는 시작했으니 나머지 반을 불태워 보자구"


가라앉아가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들뜬 목소리를 낸 리앤은 아까까지 둘러봤던 사건 현장을 떠올려봤다.

누군가에게 쫓겼음이 명백한 도주 흔적. 예리한 것에 베인 듯한 상처 부위. 공교롭게도 해당 구역의 CCTV가 망가져 있던 상황.

무엇보다 범인의 흔적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거 정말 수상하네요. 특히 CCTV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전부 망가진 게 마음에 걸려요.

제가 아까 현장을 확인해보니 물리적인 손상은 딱히 없었거든요?

이건 상당한 수준의 해커가 의도적으로 망가뜨렸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상 현상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어요"


리앤의 설명을 들은 스카디가 자신이 점검했던 사항을 언급했다.

하긴 특정 구역의 감시체계를 죄다 무력화시킬 정도라면 보통 실력의 소유자가 아닐 터.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이가 얼마나 될까?

애초에 오르카에는 스카디는 물론이고 닥터, 레모네이드 알파, 아자즈까지 있다.

단 한 명만으로도 전황을 농락할 수 있는 압도적인 실력자들인데 이들이 한데 모인 오르카가 뚫렸다?

무적의 용이 해전에서 패배한다는 것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소리.

...그 얼토당토않은 가정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라니.


"지금 상당히 불길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는데, 타당한지 검토 좀 해주시겠어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안색이 일그러지던 알파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해결의 가닥을 잡은 걸까?


"지금 오르카 호 내부로 외부인이 들키지 않고 잠입할 수 있을 가능성은 얼마나 되죠?"


"0%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적대세력의 침투 우려도 있고, 

예전에 알래스카에서 레모네이드 오메가와 조우한 후 혹시 모를 공작에 대비해 보안강화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였거든요.

사전에 전산 등록된 개체가 아니고서는 무조건 들킨다고 단언할 수 있는 수준이에요.

이번에 탑승한 PECS 소속의 바이오로이드들도 해당 등록절차를 거쳤고, 이 보안을 뚫는다는 건...."


상세히 답해주던 스카디가 말을 흐렸다.


"어머,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겠죠?"


"PECS 바이오로이드 중 범인이 섞여 있다?"


리앤의 물음에 알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 틀렸다고는 할 수 없을지도요.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르지만요"


"범인에 대해서 추리를 좁힌 거야? 대단해! 어서 마저 듣고 싶어"


"그저 가정일 뿐이에요...상당한 수준의 해커가 작정하고 치밀하게 잠입할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한들,

오르카의 보안이 삼엄할 것이라고는 익히 예상할 수 있겠죠.

그런데 때마침 기존에 등록되지 않은 외부인원을 받아들이기 위해 경계가 비교적 느슨해지는 틈이 생긴다면...

이걸 절호의 기회로 여기지 않았을까요?"


귀를 기울이던 스카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흠...일단 무사히 내부로 잠입한 후라면 모르겠지만 그 잠입 과정에서 무조건 보안체계에 걸릴걸요?

애초에 경계가 느슨해지진 않았고 오히려 만일에 대비해 감시인원을 대거 동원했었거든요.

제시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어디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병사들의 감시를 피하고 

동시에 여러 겹의 시스템을 즉석에서 파악, 분석 및 해킹해 빈틈을 만들어 파고드는 건데,

보안체계가 저마다 동기화된 상태이다 보니 어느 하나만 무력화한들 바로 이상이 감지되어 우리 쪽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이걸 돌파하려면 시스템 전체를 손바닥 보듯 훤히 볼 수 있어야만 하죠"


"돌파가 아니라 등록이라면 어떨까요?

자신 또한 PECS의 투항자 중 한 명으로 전산등록을 거쳐 더는 보안망 자체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면?"


"참신한 생각이네요. 그렇게 되면 내부 CCTV 등만 주의한다는 전제하에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겠어요.

다만 전산망에 접근해 해당 프로세스를 좌지우지할 수준의 실력과 장비가...."


"케스토스 히마스를 대동한다면 가능할까요?"


"그 정도면 시도할 가치는 충분해요...설마?"


"예, 감마라면 보안을 뚫고 잠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내키지 않는 말을 입에 담은 알파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무례한 건 싫은데, 사건 해결이 급선무니까 실례를 무릅쓸게. 미안?

감마의 스펙이 알파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야?"


저 발랄하고 붙임성 좋은 모두의 친구가 상대방에게 무례함이라는 느낌을 안겨주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리앤의 질문에 알파는 헛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저보다 훨씬 뛰어나요. 애초에 전 자매들 중에선 능력이 가장 처지는 축이니까요"


"그럼 큰일인데...."


알파의 유능함은 이미 사령관을 비롯해 오르카의 모두가 익히 알고 있었다.

알파 본인을 적으로 돌리는 상상도 끔찍한데 그보다 강한 적이라니,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하물며 세력을 토대로 한 정면 힘 싸움도 아니고 이미 내부에 잠입한 상대가 칼자루를 쥔 상태로 종횡무진 돌아다니는 것을 어찌?

더는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가정에 불과하긴 하지만 정말 감마가 오르카 내부로 숨어들어온 상태라면 가늠이 안 돼.

당장 보안을 추가로 강화하고 추적에 모든 심혈을 기울여야 해. 지금 다 같이 닥터에게 가자"


"그게 사실이라면 내부 감시망도 얼마나 맛이 갔을지 걱정이에요.

확인을 위해선 시스템을 총괄하는 닥터의 도움이 필요하니, 우리가 향할 곳은 정해졌네요?"


리앤과 스카디가 의기투합하는 가운데 구석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바이오로이드도 거들었다.


"케스토스 히마스를 추가로 확보할 기회인 건가요? 같이 가요"


"깜짝이야! 언제부터 있었어, 아자즈?"


"닥터 씨의 연구실은 이쪽으로 가면 되나요? 서둘러요"




"오르카의 시스템을 이곳에서 총괄한다니, 정말 보통 일이 아닐 텐데...그 열정과 충성심은 정말 감탄스러워요"


닥터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선 알파는 시야를 가득 채우는 복잡한 기계의 숲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본인이 다루는 케스토스 히마스는 다채로운 용도와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슈퍼컴퓨터지만,

그 기대치를 끌어내기 위해선 사용자 본인의 역량이 따라줘야만 했다.

유능한 비서라는 탄생 목적을 배경으로 하여 압도적인 학습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레모네이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실제로 레모네이드는 이를 토대로 PECS를 삼안과 블랙리버에 견줄 굴지의 대기업으로 이끌지 않았던가.

물론 거기에는 유능함뿐 아니라 비할 바 없는 충성심도 깔려있었다.

알파 자신은 어머니나 다름없는 안나 보르비예프 박사의 유지를 언젠가 실현하기 위해 인내하고 또 인내한 끝에

진정한 주인인 사령관에게 바치는 충성심이,

오메가와 감마 등의 자매는 PECS의 총수에게 바치는 그 뒤틀린 충성심이.

방향은 다를지언정 그 열정만큼은 서로 의심의 여지 없는 진짜배기였고

능력과 마음가짐이 하나로 합쳐지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빚어내는지,

반대로 놀라운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전제되는 실력과 갈망이 얼마나 대단해야 하는지 알파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최후의 인간을 필두로 하여 수많은 이들이 모인 오르카의 뇌와도 다름없는 이 장소를 

홀로 지탱하는 닥터의 유능함과 충심은 가늠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겠지.

어쩌면 충심이 아니라 다른 애틋한 감정일지도 모르지만.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알래스카에서 오메가와의 전투 끝에 전리품으로 챙긴 케스토스 히마스를 맡겼던 게 기억난다.

알파의 장비보다 훨씬 정교하고 우월한 성능.

직접적으로 바로 써먹진 못하더라도 분석을 통해 활용할 여지는 충분했다.

시간도 꽤 지났으니 겸사겸사 결실을 취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던 알파와 때마침 같은 생각을 하는 이가 한 명 더 있었다.


"케스토스 히마스가 두 개, 아니 세 개라면 재미난 걸 만들 수 있겠어요. 우선 아쉬운 대로 두 개로...."


"죄송하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뤄주시면 안 될까요? 우선은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니까요"


"개조라면 바로 도와드릴 수 있는데요?"


"그래 주신다면야 감사하지만, 따로 확인해봐야 하는 것도 있어서...."


아자즈를 상대하는 알파는 드물게 당황하며 진땀을 흘렸다.

역시 상위 바이오로이드는 개성이 강하다 보니 의사소통이 곤란할 때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아자즈가 독보적으로 괴짜인 것이겠지만.

이런 괴짜마저 보듬고 애정으로 이끄는 사령관의 존재란 얼마나 소중한가.

그리고 그런 사령관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남긴 감마에게는 어떤 고통을 안겨줘야 할 것인가.

의식의 파도가 몰아치는 사이 공간이 넓어지며 닥터가 앉아있는 의자가 보였다.


"닥터, 바쁘지? 더 바쁘게 해주러 왔어!"


반갑게 인사하는 리앤의 말에 의자가 거칠게 회전하며 퀭한 안색의 닥터가 짜증을 냈다.


"아, 제발 좀...지금 미칠 것 같단 말이야. 무슨 일인데 그래, 리앤 언니?"


"사건의 진상에 한 걸음 다가갔을지도 몰라. 가정이긴 한데, 며칠 전 PECS의 투항자들이 탑승했던 때 있지?

어쩌면 그때 레모네이드 감마가 등록 시스템을 해킹하고 몰래 숨어들어오지 않았을까 하는 추리가 나왔거든.

오르카 최고의 브레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해?"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었는지 닥터의 표정이 진지해지더니 다시 의자가 돌아갔다.


"무력화가 아닌 편승...정식 인가를 통한 잠입시도...상정하지 않은 루트를 통해 승인된 데이터가 실행됐다면...."


기존에 띄워놨던 패널이 일제히 닫히며 그 이상의 패널들이 허공에 떠 복잡한 연산을 거치기 시작했다.

끝없이 쏟아지는 데이터의 홍수에 문외한이 봐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잇...아니면 좋겠는데...확인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관련 프로세스를 처음부터 싹 엎어야 한단 말이야.

가뜩이나 아르망 언니에게 전송할 데이터로도 골치가 아픈데...."


문득 왼쪽에 앉아있는 바이오로이드의 찰랑거리는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끝에 관이 한없이 이어진 이상한 장치를 머리에 쓰고는 이따금 경련하면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아르망의 모습은

누가 봐도 걱정스러웠다.

거의 미래 예지에 가까운 연산을 위해선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입력받아야 한다던데, 얼마나 부담이 클까.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아르망의 손발이 꿈틀거리면서 끔찍한 비명이 새어나왔다.


"끄윽...으아아...아악, 테켈...리...!"


터져나오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 억누르는 듯한 소리.

이 과정이 정상인 걸까?


"닥터, 지금...."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 아르망 언니가 오빠의 도움이 되기 위해 감당하는 무게는 상상 이상이야.

일반적인 바이오로이드라면 버티지 못하고 뇌가 터져버릴걸. 워낙 고통스러운 과정이라 손발까지 묶고 견뎌내야만 해.

거기에 지금 확인 중인 사항까지 추가로 반영하려면 한층 힘들겠지.

이 모든 게 오빠를 위한 거야...그렇잖아? 모두의 마음은 똑같은걸.

다들 괴롭지만 각자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어지러이 손을 움직이는 닥터의 말은 차가웠다.

하지만 그건 누구보다 냉정하고 이성을 유지해야만 하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함이리라.

억지로 냉정함을 가장하는 그 마음을 어찌 모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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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순간 보기만 해도 아찔해지는 코드가 화면을 스쳐 지나갔다.

알파가 띵한 이마를 부여잡고 남은 한 손으로 뭐라도 짚고자 손을 뻗으니 온갖 자료와 서적이 산을 이루며 쌓여있는 책상이 몸을 내준다.

신병기와 오르카 내 시설 개선을 위한 설계도, 남태평양 해역의 최근 수온을 측정한 조사서, 

족히 수백 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낡은 서적...표지에 적혀있는 저건 아랍어인가?

유독 매끈함을 자랑하지만 반사광 없이 한없이 검기만 한 돌멩이도 보였다.

무엇이든 동반되는 작업량이 어마어마할 것이라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연구거리가 한가득.

저런 것들을 쉼 없이 처리하는 닥터의 유능함은 봐도 봐도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일단 오르카 전체의 보안 프로세스를 재구축하기 시작했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긴 한데, 마냥 미뤄둘 수는 없지"

18

"으...죽겠지 말임다"


브라우니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투덜거렸다.

성대한 환영파티와 함께 온갖 산해진미를 배터지게 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어제 저녁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그보다 최악일 수 없는 형태로 다가왔고,

스틸라인은 즉시 비상태세에 돌입해 방금 아침까지 모두들 뜬눈으로 상황을 주시하며 만일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LRL의 장례식이 열리면서 비상태세는 일시적으로 풀렸지만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오르카 주요 구역을 순찰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어 소중한 단잠에 작별을 고하고 끌려나온 차였다.


"왜? 산책할 수 있어서 좋잖아. 그렇게 피곤해?"


켈베로스는 어깨를 으쓱대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 어느 때보다 순찰의 중요성이 강조된 지금, 사실상 무제한 산책이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상하게 몸을 짓누르던 나른함도 겸사겸사 쫓아 보낼 수 있으니 좋기야 하겠지.


"이상하단 말임다...명색이 병사라 몇 날 며칠을 지새워도 딱히 피곤하진 않은데, 오늘따라 몸이 맘대로 안 움직이고 무겁지 않슴까"


그 말대로였다.

소중한 단잠이라는 표현도 어폐가 있는 게, 간신히 몸을 뉘일 수 있는 상황이 되어 그대로 곯아떨어지려 했지만

눈을 감고 아무리 시간을 보내도 피로만 겹겹이 쌓이고 정신은 꿈나라로 향하지 못한 채 칠흑 같은 심연으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어디가 위쪽이고 어디가 아래인지조차 구분되지 않는 몽롱함 속에 결코 꺼지지 않는 의식을 억지로 부여잡고 방황하기를 수십 분.

흐릿하게 복도를 걷고 있어 화들짝 놀랐지만 시야는 또렷해지지 않고 계속해서 목적지 없는 행군을 이어갔다.

익숙하던 복도가 구불구불해지며 초록 곰팡이가 곳곳에 피어 역겨움을 안겨줄 즈음,

토할 것만 같은 악취와 다진 고깃덩이를 보고 화들짝 놀라 몸부림쳤다가 

얌전히 자라는 이프리트의 주먹을 맞고 지금까지 겪은 게 꿈이라는 걸 깨달은 브라우니의 몸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꿀잠을 자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순찰명령을 받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 게 지금.

평소 꾸지도 않던 꿈은 왜 이럴 때 꾸는지.

그리고 왜 하필 찝찝한 악몽인지.

언제나 유쾌한 브라우니였지만 언짢음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기대하던 파티에서 양파요리라도 실컷 먹었다면 좀 나았지 말임다.

기름에 튀긴 양파가 좋다네, 맛있으니까 양파가 좋다네~"


"우와, 잘 부른다. 그럼 장례식 때 대신 서주지 말지 그랬어?"


PECS 탑승자가 머물던 방 주변 구역을 지키던 켈베로스가 미안한 마음에 물었다.

더치 걸이 무슨 일이 있어도 장례식에 참석하겠다며 고집을 부려 경호 없이 보낼 수도, 자리에 남아 지킬 수도 없어 곤란하던 때

밍기적거리며 복도를 지나던 브라우니가 대신 있어주겠다 자원해 부담을 덜고 LRL의 마지막 자리를 함께할 수 있었다.

정말 고마웠지만 그로 인해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어찌 편할까.


"에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심까. 의리 빼면 시체인 게 저 브라우니 아니겠슴까.

병사가 골골거리는 소리 하면 레드후드 연대장님께서 당장 달려와 제 허리를 접어버릴 게 분명하지 말임다...."


극지방에 떨어진 것처럼 바들바들 떠는 브라우니는 참으로 깊은 인상으로 다가왔고,

스틸라인의 군기교육은 그 악명높은 훈련 못지않게 대단하구나 하는 감탄을 야기했다.


"암튼 산책하다 보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나도 아침부터 안 좋은 꿈을 꿨지만, 지금은 다 날아갔어!"


"그렇슴까?! 터가 안 좋은 것도 아니고, 왜 다들 갑자기 뒤숭숭한 꿈을 꾸는지 모르겠슴다"




오르카의 두 활력소가 재잘거리며 걷기를 수십 분,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지금까지와 별 차이 없는 복도. 하지만 걸음을 내딛고 싶지가 않다.

여기를 넘어가면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근거 없는 불길함이 느껴진다.

군데군데 전원이 나간 조명까지 으스스한 느낌을 한층 더한다.


"으...왠지 돌아가고 싶지 말임다. 지금까지 많이 둘러봤으니 슬슬 보고해도 되지 않겠슴까?"


"그럴까...? 아니야! 모두가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오르카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해!"


결연히 의지를 다지는 켈베로스의 빛나는 눈빛이 브라우니의 심금을 울렸다.


"크으...! 제 생각이 짧았슴다. 최전선으로 돌격하는 것이야말로 제가 가장 잘하는 거지 말임다!"


"왕! 계속해서 가는 거야!"


달아오른 분위기를 타고 힘찬 한 발을 내딛는다.

관리 소홀로 꺼진 조명이 자아낸 그림자도 용감한 두 명을 막을 수는 없다.

샘솟는 용기. 그 어떤 역경이라도 뛰어넘겠다는 결의.

세계를 구한다는 사명을 품고 마왕의 성으로 향하는 용사들처럼 둘은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언제나 보던 익숙한 복도는 혹시나 하고 기대하던 강적을 내보내지 않았다.

뭘 기대한 걸까.


"사건의 원흉이라도 만나 용감히 무찌르는 걸 상상했는데, 역시 현실은 이상과 다르지 말임다"


"우리 둘이서 무찌를 수 있을까?"


"마리 대장님이 하신 말씀이 있슴다. 전우를 믿고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전진하면 쓰러지는 건 결국 적이라고 말임다"


"난 살상보다는 테러리스트나 폭력적인 시위대에 대한 방어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니 버티는 건 자신 있어!

만약 적이 나타나도 내가 지켜줄 테니 그 사이에 무찌르는 거야. 그럼 오케이! 임무 완료!

모두가 편안히 잠드는 밤도 돌아오고 사령관님도 좋아하실 거야"


"흐흐...그렇게 되면 사령관 각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남은 군 생활 개꿀이지 말임다"


들뜬 브라우니가 두 갈래로 갈라진 길목에서 왼쪽으로 몸을 꺾자,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저, 저기 있는 저거...뭔지 아시겠슴까?"


어느 복도에나 있는 산뜻한 조명과 꼼꼼한 CCTV는 이 공간에 없다.

언제 꺼졌는지, 망가졌는지 알 수 없는 차갑고 딱딱한 잔해를 두고 유일하게 흐릿한 빛을 깜박거리는 위태로운 천장의 전등 하나뿐.

그 아래에서 훤칠한 키의 그림자가 등 뒤에 거대한 기계로 보이는 무언가를 두고 빤히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감이 안 좋아...어쩌면 범인일지도 몰라!"


켈베로스는 으르렁거리며 방패를 세워 들었다.

들은 내용에 의하면 LRL은 예리한 무언가에 사지를 잘렸다고 한다.

상대방이 흉기로 무장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지간한 냉병기라면 들고 있는 방패로 충분히 버틸 수 있겠지. 철충의 맹공도 막아낸 방패다.

적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싶은데, 복도가 너무 어두워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다.

하나뿐인 조명은 금방이라도 꺼질듯해 간신히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얼핏 봐도 육감적인 몸매.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겠지만 일단 어린이나 그에 준하는 체형은 아니다.

애초에 그런 부류라면 몸을 숨기기는 쉬울지언정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긴 어렵겠지.

신경이 쓰이는 건 뒤에 보이는 둥근 장치였다.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기분 나쁜 녹색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한다.

기묘하게도 빛이면서도 전혀 주변을 비추질 않는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섣불리 달려들면 위험할지도 모른다.

지니고 있던 손전등을 꺼내 비추자, 선명하게 뻗어 나가던 빛이 맥없이 사그라들었다.


"어?! 봤어?"


"마, 말도 안 되지 말임다. 어떻게 해야 좋겠슴까?!"


브라우니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벌집으로 만들어버릴까?

침착해라, 아직 적인지 분명하지 않다. 어쩌면 PECS의 탑승자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일지도 모르지 않나?

하마터면 큰 사고를 칠 뻔했다.

오르카에 이미 피가 흘렀는데 또 흐르게 만들었다간 사령관이 절대 가만있지 않겠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브라우니는 저 멀리까지 충분히 닿도록 크게 외쳤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일단 침착하게 양팔을 들고 천천히 다가와 주시기 바람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마시고 말임다. 지시에 불응하면 발포할 수 있으니 따라주셔야 함다"


아무 반응도 없다.

웅웅거리는 불쾌한 전자음뿐.

검은 실루엣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가 싶더니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말임까?! 수칙대로 했는데 따르지 않슴다. 쏴도 되겠슴까?"


"난 경찰이지 군인이 아닌데?! 그보다 보고해야 하는거 아니야?!"


"아!"


브라우니가 다급히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왜 위급상황만 되면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갈까.


"여기는 1692번 브라우니, 들리심까? 으아, 왜 하필 이럴 때 먹통인지...!"


"내 무전기도 망가졌나 봐!"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림자가 커져간다.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다. 움직여야만 한다.

그런데 저 윤곽 어디서 본 적이 있지 않나?


"으...어서 달려! 내가 막아서고 있을 테니 지원병력을 부탁해!"


"그래도 괜찮겠슴까? 차라리 같이 싸우는...."


"만약에라도 절대 놓칠 수 없어. 버티는 건 자신 있으니까 최대한 빨리 와줘!"


고개를 끄덕이고 달려가는 브라우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켈베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새 친구를 사귀었던 더치 걸이 얼마나 슬퍼했는지 곁에서 봤다.

그 손을 놓지 말았어야 했다고 절규하던 순간이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모른다.

장례식장에서 하염없이 흘리던 눈물을 멎게 할 방법을 몰라 애달픔만 더해가던 게 선명히 떠오른다.

그런 일은 기필코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상대가 누구든, 절대 놓치지 않고 도움이 손길이 올 때까지 반드시 버티리.

묘하게 낯익은 듯한, 동시에 한없이 위화감이 드는 눈앞의 대상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으며 전기 충격봉이 허공을 갈랐다.




"큰일났슴다! 어서 지원을...충성!"


로비로 뛰쳐 들어온 브라우니가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외쳤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마리는 물론이고 주요 지휘관과 사령관까지 모여있는 자리에 몸을 내던지고 뒤늦게 구호가 따라붙었다.

아무리 브라우니라 한들 최소한의 분별이 없진 않으니, 그만큼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거겠지.

마리는 나동그라진 브라우니를 몸소 일으키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범인을...범인을 찾은 것 같슴다. 지금 켈베로스가 버티면서 증원을 요청했슴다...."


"어디야?!"


번개같은 사령관의 질문.

브라우니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의식을 부여잡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고위 바이오로이드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

아까 봤던 윤곽이 누군지 이제야 알겠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줬다.

이런 때를 위해 평소 버텨왔던 지옥훈련이다.

중요한 순간에 성과를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마리도 그걸 염두에 두고 있는지 매서운 눈길로 브라우니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I...I3 구역임다. 증원병력을 어서...."


"모두 들었지? 한시가 급해. 따로 병력을 호출할 여유가 없어!"


사령관이 외치자 공기가 한순간에 일변한다.

살을 벨 것 같은 날카로움.

그리고 그건 착각이 아니라는 듯, 맹렬한 기세로 공간을 가르며 달려가는 검고 하얀 형체가 있었다.


'기필코 주인님의 신뢰를 되찾아야만 해...!'


리리스는 되뇌고 또 되뇌었다.

실추된 명예는 아무래도 좋다.

다른 이들이 자신을 비웃고 조롱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사령관이 자신을 외면하는 것만은, 멀리하는 것만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 사건 후로 딱히 거리감이 생긴 건 아니지만, 그건 언제나 그렇듯 상냥한 사령관이기에 내색하지 않는 거겠지.

마음 한구석에 원망이 있을지 어찌 알까.

사령관도 사람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설령 그러지 않을지라도, 아니 그렇다면 리리스는 더욱 가만있을 수 없다.

그토록 부드러운 마음씨의 사령관이 슬픔에 젖어 통곡하는 광경은 용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반드시, 반드시 그 범인을 이 손으로 잡아 처단하리...!

그렇게 달린 수십 초였다.

브라우니가 말한 구역까지 리리스가 소요한 시간은 수십 초에 지나지 않았다.

그 수십초 사이에 상황은 이미 끝나있었다.


"여기에 적이...큭"


뒤이어 도착한 칸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왜들 그러는...주인님, 오지 마세요!"


대검을 당장에라도 휘두를 듯이 손에 쥔 채 달려온 라비아타가 당황하며 뒤따라온 사령관을 막아섰다.

필사적인 저지도 의미 없이, 사령관은 몸을 디밀어 현장을 두 눈으로 담았다.


"어째서 막......."


깜박이는 조명 아래 으깨진 고깃덩이가 있었다.

조각난 금속 뼈대와 내장이 마음대로 널브러졌고 피는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는 물감이 되어 흘렀다.

찢어진 옷가지와 우그러진 방패, 구석에 뒹굴고 있는 충격봉만이 그게 한때 켈베로스였음을 증명해줬다.


"우욱...웁! 구웨에엑!"


사령관의 적나라한 구토 소리가 어두운 조명을 배경삼아 복도에 울려퍼졌다.

19

이틀 만에 두 명의 희생자.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참혹한 현실이 오르카에 펼쳐졌다.

어디보다 안전하고 아늑한 안식처였을 모두의 요람이 무덤으로 변모해 하나씩 하나씩 탑승자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무구한 아이에 이어 시민의 방패를 자처하던 의욕적이고 용감한 대원까지.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거짓말처럼 멀쩡히 작동하는 무전을 듣자마자 하던 일을 죄다 집어던지고 헐레벌떡 얼굴을 내민 리앤은 

차마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 현장을 보고 가장 먼저 사령관의 안위를 걱정했다.


"사령관, 여기 있으면 안 돼. 어서 가서 좀 누워"


"그읍...극...콜록, 케, 켈베로...쿨럭"


"말 안 해도 아니까 우선 좀 쉬어. 응? 금방 갈 테니까"


등을 두드리고 쓸어만지며 조금이라도 진정하길 바랐지만 사령관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함께 사령관을 보살피던 리리스, 라비아타와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은 끝에 둘에게 부축을 맡겼다.


"현장은 내가 있을 곳이야. 이런 여과없는 경우는 더욱...오래 걸리지 않을 거니까 잠시 후에 봐. 

그 때까지 사령관을 부탁해"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요, 리앤 양"


"응? 아냐 아냐. 지금도 얼마나 도움이 되는데. 최대한 사령관을 위로해줘"


"너무 가혹한 현실이에요.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요?"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범인을 찾아내는 거야.

그 다음은...내가 아니더라도 해결할 수 있겠지"


리앤의 목소리에서 착잡함이 묻어나왔다.


"아무튼 어서 가"




"누가 작업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섬세하고 정교하네요. 대체 어떤 방식을 쓴 걸까요?"


스카디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조명과 CCTV를 살펴봤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됐다는 양 구성 요소가 전혀 작동하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외부에서 건드린 흔적을 예리한 시선으로 조사해도 찾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기술력으로 가능하기나 한 걸까?


"섬세하고 정교하다라...여기에 어울리는 표현은 아닌 것 같은걸요"


들릴락 말락 중얼거린 알파의 말에 스카디는 방금 했던 말을 철회했다.


"어머, 제가 순간 교양 없는 실언을 하고 말았어요. 비극적인 현장에서 꺼낼만한 표현은 확실히 아니지요"


아이가 놀다 내팽개친 장난감처럼 바닥에 제멋대로 퍼져있는 시체조각이 바로 곁에 있으니.

평범한 이라면 차마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을 것이고 구토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이곳에 모인 이들은 얼굴이 창백해지긴 했어도 흔들림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무대가 익숙해서가 아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자리를 박차고 세면대에 얼굴을 처박고 싶다.

어제오늘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으로 너덜너덜해진 멘탈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

온갖 역경과 고난, 위기상황 때마다 든든하게 받쳐주며 위안이 되고 희망을 보여주던 누군가에게.

그 버팀목이 누구보다 괴로워하며 견디지 못하고 실려나갔다.

지금껏 신세를 졌으니 이제는 내가 버팀목이 되어줘야지.

다들 이런 각오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복도를 뜨지 않고 있었다.


"흐음. 이건 매우 놀라운데요. 방법을 알 수 있다면 기존 개조에 당장에라도 반영하고 싶은데..."


...개인적인 관심사에 살짝 전념한 이도 한 명 있긴 했다.


"해체자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거지? 진짜 감마인 걸까? 알파는 어떻게 생각해?"


"어렵네요.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냉정히 가늠해봐도, 이 결과물은 저조차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예요.

감마가 저보다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이런 게 가능할 수준이라고는...."


지난번 전투에서 패널을 통해 얼굴을 마주한 순간이 떠올랐다.

전략에서 완전히 패해 악다구니를 쓰기만 하고 결국 꼬리를 만 개처럼 도망쳤지.

그때를 제외하고 최근에 봤던 게 언제더라?

알파는 그 간격이 생각보다 상당히 아득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충분히 기술개발과 발전을 도모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군사력 증강과 세력 확충에 유독 집착이 심했던 감마이니만큼 더욱.

그리고 무엇보다 저 희생자.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의 팔다리를 잘라낸 시점에서 상종할 수 없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성향의 소유자일 거라 가늠은 했다.

하지만 그걸 차라리 얌전하다 여길 정도로 과격한 살육이라니.

옷가지와 장비가 아니었다면 누구였는지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대체 어떤 흉기를 써서 이런 짓을 한 걸까?

이런 걸 행할 수 있을 정도로 근본부터 망가진 이가 얼마나 있을까?

감마라면 가능할 거다.

현시점에서 그 외의 답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저 극악무도한 짓을 보면 감마를 용의 선상에서 지우기 어렵다고 말씀드리죠"


그저 되는대로 내뱉은 분풀이가 아니었던 걸까.

악마가 외쳤다고 하는 게 더 납득이 갈 저주와 협박.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자매가 오르카로 잠입한 게 아니길 바라며 알파는 눈가를 살짝 떨었다.


"이건 뭐지?"


전자와 기계공학의 대가들이 시설과 장비 위주로 현장을 살펴보는 동안, 

리앤은 보다 역사가 깊은 전통의 방법으로 곳곳을 유심히 관찰하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닥과 벽에 녹색의 곰팡이가 껴있었다.


'이런 곳에 곰팡이가...? 다른 곳보다 어둡다고는 하지만 이상한걸.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을 것이고, 습도가 딱히 높지도 않은데'


장갑을 끼고 항상 지니고 다니는 증거 수집도구를 꺼내 조심스럽게 집게를 뻗는다.

섣불리 만졌다가 위험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최대한 현장에서의 상태 그대로 확보하는 게 탐정의 기본이니까.

기분 나쁜 녹색의 곰팡이는 집게 끝이 닿자 꿈틀거리며 액체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으엑, 뭐야 이거...!"


"무슨 일인가요?!"


제법 되는 거리까지 멀어져 시설에 이상이 없는지 둘러보던 스카디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왔다.

선명한 근육이 꿈틀거리며 어떤 위협이든 박살 낼 각오를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아냐 아냐, 놀라게 해서 미안해. 이상한 걸 발견했는데 갑자기 흘러내려서 당황했지 뭐야"


겸연쩍은 리앤의 사과에 다른 이들까지 몰려와 수상한 곰팡이였던 액체를 둘러봤다.


"보고 있자니 불쾌하네요. 썩은건 아닌 것 같고, 대체 뭘까요?"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증거로 수집해야겠지? 어쩌면 중요한 단서일지도 모르니까"


스포이드로 액체를 모아 시험관에 무사히 담은 리앤은 씨익 웃으며 주변을 안심시켰다.

뛰어난 통찰력과 지능뿐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 놓여도 희망을 놓지 않게 만드는 끝없는 활력이야말로

리앤을 명탐정으로 만들어주는 기반이었다.




브라우니는 탈진했던 몸을 추슬렀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한복판을 목숨 걸고 달리는 것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소중한 동료의 안위가 걸려있으니.

단 몇 초로 바뀔 수 있는 게 전장이었고, 브라우니가 박차고 나왔으며 모두가 향해간 그 복도 역시 엄연히 치열한 전장이었다.

마음 같아선 가장 앞에서 다른 분들을 안내하고 싶었지만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심장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 엄격한 마리 대장도 기특하다는 눈길을 비추고 갔으니.

상대가 누구든 지원병력의 질을 감안하면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고, 이제 남은 건 슬픈 사건에 종지부를 찍고 다시금 평화를 누리는 것.

자신이 병사로 끝없는 전투를 반복하는 이유도 결국엔 언젠가 다가올 평화를 위해서가 아닌가.

어쩌면 포상휴가를 받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된다면 함께 산책...아니 순찰을 돈 켈베로스와 스팸이라도 나눠 먹어야지.

분명 좋아할 거다.


"주인님, 이쪽으로...네, 이제 편히 누우세요"


몇분 전에 달려갔던 리리스와 라비아타가 사령관을 부축하며 돌아왔다. 벌써 사태가 종료된 걸까?

브라우니는 궁금증에 물어보고 싶었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고 열려던 입을 다물었다.

쉴 만큼 쉬었으니 직접 가서 보면 되겠지.


"1692번 브라우니 일병,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


로비를 나서려다 마주친 마리가 명찰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개 병사의 신상과 동향에 이토록 관심을 가진다니, 정말 포상휴가라도 기다리는 걸까?


"범인을 잡았는지 궁금해서 말임다. 사령관 각하는 상태가 안 좋으신 것 같고...그냥 직접 가서 확인해볼까 함다"


"가지 말도록"


"네? 잘 못들었슴다?"


아차.

긴장이 너무 풀렸는지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했다.

그것도 마리 대장 앞에서.

훈련과 전투뿐인 삶이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았나 돌이키며 닥칠 최후를 각오하고 있던 차,

예상외로 마리는 그 어떤 노기도 띠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가지 말도록...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으...알겠슴다"


졸지에 목적지를 잃은 브라우니는 새삼 지금 이 자리에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자각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가 몇 명인지, 자칫 실수라도 보였다간 그대로 장대한 내리 갈굼이 이어져 감당할 수 없게 되겠지.

바로 직전에도 주마등을 볼 정도의 실언을 하지 않았나.

조용히 숙소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와중,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꽂혔다.


"이봐, 거기 병사. 이리로 와 봐"


뛰는게 힘들었는지 숨을 간신히 고르고 난 메이였다.

회의를 목적으로 로비에 모였을 테니 심판의 옥좌를 타고 오진 않았겠지.

작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큰 가슴이 들숨과 날숨에 따라 오르내리며 한층 부각됐다.


"부르셨슴까?"


"그래, 너. 너 말고 누가 있겠어?"


듣던대로 대단한 성질머리를 느끼며 브라우니는 성큼성큼 다가갔다.


"현장에서 수상한 대상과 조우했다고 했지? 이번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되는 대상을.

가보니 조명이 나가 시야 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 같은데, 혹시 구체적으로 봤어?"


"윤곽은 대충 보였지 말임다, 말씀대로 정확한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 왔어~일단 현장 조사는 마쳤고 바로 닥터에게 가 증거 분석을...어, 있네?"


로비에 들어서며 밝게 외친 리앤이 어느새 구석에 있는 닥터를 발견하고 놀라워했다.

그도 그럴게, 아까까지 연구실에서 보안 프로세스를 재구축한다느니 아르망에게 전송할 데이터를 새로 정리한다느니 하며

살짝 정신줄을 놓으려 하지 않았던가?

하루가 40시간이면 좋겠다, 다시 태어난다면 멍게가 되고 싶다 등 폭주의 기미가 보이기에 

알파는 전에 부탁했던 케스토스 히마스의 개량 관련 이야기를 차마 꺼내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다급한 호출을 듣고 두 번째 현장으로 다들 달려갔는데,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회의에 참석하고자 로비로 몸을 이끈 모양이었다.


"모일만한 이들은 전부 모인 모양이네. 두 번째 살...사건이 발생했으니 당연히 와야지"


무심결에 살인사건이라 하려다 브라우니가 있는 걸 보고 재빨리 말을 무른 닥터의 센스에 다른 이들은 속으로 감탄해 마지않았다.

중요한 증인인데 괜히 충격을 줄 필요는 없겠지. 최소한 증언을 충분히 들을 때까지는.


"오빠는 지금 기절했으니까 저대로 쉬게 두자. 많이 힘들 거야...스카디 언니, 현장에서 이상한 점은 없었어?"


"이번에도 조명과 CCTV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외부적 손상을 발견할 수 없는 점도 지난번과 마찬가지였죠"


"아자즈 언니가 볼 때는 어땠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비슷하게는 따라 할 수 있지만, 그 정교함은 감탄스러울 정도였거든요.

기존의 방식들과 아예 다른 접근법이라도 있는 걸까요?"


"우와...아자즈 언니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보통이 아닌데"


닥터는 감탄과 짜증이 얽힌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외에도 뭔가 섞인 것 같은데, 뭐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리앤은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위화감을 느꼈다.


"브라우니 언니, 지금 이 중에서 범인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직접 본 건 언니뿐이거든?

사소한 것이라도 좋아. 외형상의 특이점이나 기억나는 걸 뭐든지 말해줘"


아까 물음을 던졌던 메이를 비롯한 지휘관들의 시선이 브라우니 한 명에게 쏠렸다.

살면서 이런 상황을 겪을 날이 오지 않게 해달라고 빌곤 했는데.

다행이라면 그렇게 빌 당시엔 큰 잘못을 했다고 전제했지만, 지금은 딱히 잘못한 게 없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중요한 증인으로서 내심 기대를 받고 있으니,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게 이런 거 아닐까.


"음...일단 키는 작지 않았슴다. 몸매가 쭉쭉빵빵했던 것 같으니 여성일 거고, 등 뒤에 커다랗고 둥근 기계가 보였슴다.

이상한 녹색 빛이 깜박거리며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지 말임다. 마치...."


기억을 되짚으며 떠오르는 대로 내뱉던 브라우니의 시선에 유심히 이야기를 듣는 알파가 들어왔다.

아, 어디서 본 듯 익숙하다 싶더니.

브라우니는 손뼉을 치며 외쳤다.


"아, 지금 보니 레모네이드 알파님과 판박이였지 말임다! 어두워서 잘은 모르겠지만, 느낌은 거의 비슷했슴다"


"맙소사...."


알파는 탄식을 흘렸다.

스스로도 조심스럽게 제시하긴 했지만 그저 신경과민으로 인한 헛다리이길 바랐는데,

이런 증언이 나온 이상 범인이 누군지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

지금까지 잘도 모습을 숨겼으면서 그 어두컴컴한 복도에서는 케스토스 히마스까지 드러냈다고?

이게 노골적인 선전포고이자 도발이 아니면 뭘까.

사령관이 의식을 잃고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최소한 범인의 정체에는 도달했어. 이제 남은 건 뛰어난 두뇌와 능력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포위망을 구축해 구석으로 몰아 승리하는 거지.

내가 있고 다른 유능한 아군도 함께하니 순전히 시간문제일 뿐이야"


레오나의 호언장담에 모두의 사기가 올랐다.

지금까지 미궁에 빠져있어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교만하게도 범인이 정체를 드러냈으니 이제 그간의 정보와 패턴을 분석해 대응도 한결 용이하겠지.

알파가 스펙만 놓고 보면 감마에게 밀린다 한들 오르카는 혼자가 아니었다.


"경계태세 또한 한층 강화해야겠지. 어떤 경우에도 홀로 돌아다녀선 안 된다.

무장을 점검하고 감시가 비는 구역이 없어야 하며, 기능 정지된 설비들도 속히 복구해야 할 테지"


칸이 닥터와 스카디를 바라보며 말했다.

감마가 돌아다니는 족족 CCTV를 망가뜨리고 있지만, 이를 방치할 수는 없다.

오르카의 눈이 꺼질수록 감마가 몸을 숨길 은신처는 늘어나게 되고, 부지런히 이를 수복하면 할수록 감마의 숨통을 조일 수 있다.

소모전 또한 전쟁의 일부.

그러기 위해선 유능한 기술자들의 도움이 절대적이니, 기꺼이 받아들이겠지.

다른 걸 떠나 사령관이 소중히 여기는 오르카의 동료가 한 명이라도 더 떠나는 것을 더는 지켜보고 싶지 않다.

가까운 이를 잃는 게 어떤 건지, 칸은 뼈저릴 정도로 겪어봤고 어떤 위로의 말이나 행동으로도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속단하는 것 아닌가?"


차가운 목소리가 예고 없이 찾아든다.

지금까지 한 마디도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알바트로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알바 오빠?"


"일개 병사가 시야도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단편적으로 본 기억을 토대로 적을 규정하는 건 섣부르다.

다른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


"신중한 자세를 견지하는 건 좋지만, 지금은 파악한 단서를 토대로 한 걸음씩 착실히 나아가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혹시 그 다른 가능성이라는 게 있다면 들어보고 싶어"


리앤이 눈을 빛내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우수한 식견으로 명성이 자자한 알바트로스라면 틀림없이 모두가 놓쳤을지 모르는 결정적인 한 수를 끄집어낼지 모르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뭐야, 대안도 없으면서 잘난 척 한 거야?"


레오나가 코웃음을 쳤다.


"현시점에 논할 수 있는 건 병사의 증언에 타당한 근거가 따라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증원 요청을 받자마자 해당 구역을 자체적으로 스캔한 시점에 이미 생체반응은 전무했다"


"...그게 무슨 소리임까?"


"아, 정말...!"


브라우니의 얼빠진 물음에 알바트로스는 답하지 않았고, 모두가 감정도 공감력도 부족한 AGS에게 절망스러운 시선을 향했다.

20

"빛이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굳건한지 재차 시험하는군요"


켈베로스의 시신을 수습한 아자젤이 새파란 안색으로 읊조렸다.

오르카에서 소중한 생명이 떠난 게 불과 어제 일이고, 

쓸 일이 없기를 바랐던 관과 진행할 일 없기를 소원했던 장례식을 소화한 지 채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남은 자들은 떠나간 이를 그리워하며 함께할 삶의 상실에 눈물짓지만,

떠나간 이는 남은 자들을 추억할 수도 없기에 그들의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빛의 영광을 찬미하는 목소리가 하나둘 사그라짐에도 시련은 멈추지 않는 걸까.

유독 가볍지만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는 관을 어떻게든 받쳐 들려는 아자젤을 만류하며 베로니카가 걱정을 드러냈다.


"속세의 잔류물을 짊어지는 건 제가 할 일입니다. 아자젤님은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가련한 어린양의 앞길을 인도하셔야 합니다"


"이단 심문관의 말이 옳다. 치품천사가 어찌 사사로이 눈앞의 역경에 흔들려 빛을 향한 행보를 외면한단 말인가?

그 날개를 펼치기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라"


관은 우리가 짊어질 테니 회당으로의 여정을 부탁한다는 완곡한 표현에 아자젤은 애써 기운을 냈다.


"그대들이 있어 제가 흔들림을 온전히 이겨냅니다. 빛이시여, 부디 진정한 구원을 보여주소서...."


엄숙한 행진이 회당에 이르자, 무언가 빠져나간 듯한 얼굴의 사령관이 마중 나왔다.

슬픔을 넘어선, 온갖 미사여구와 비유적인 표현에 능숙한 천사들도 어찌 형언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을 표정에 다들 말을 잇지 못했다.


"켈베로스지?"


"...굳이 열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자여.

'환난이 엄습하여 너희를 가시밭길과 구덩이로 몰아세울지라도, 

그 끝에 다다르는 것은 열매를 가득 맺은 감람나무와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동산일지니,

메마른 광야에 머무르는 것은 진정으로 원하는 바라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지금 봐봤자 마음만 더 아플 뿐이에요"


극진한 만류에 뻗던 손을 멈춘다.

복도에서 봤던 그 광경이 진득하니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진 신체.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내장 파편.

온통 붉은 바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밝은 색의 금속 뼛조각까지.

느닷없이 아자젤이 빙글빙글 돈다.


"반려, 괜찮으신가요?!"


다급한 외침과 함께 몸이 넘어지다 만다.

재빠르게 등을 받쳐준 사라카엘 덕에 사령관은 바닥에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쪽으로"


베로니카가 사령관의 양발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긴 의자에 눕힌다.

고개는 천장을 향하고 초점 없는 맹한 눈동자가 허공을 바라보지만, 거기에 비추는 것이 있기는 할까.

천사들은 가장 구원이 필요한 대상은 구원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신성모독일지 순간 고뇌했다.




끝없는 녹색 복도를 달린다.

제대로 달려 있는 조명은 없다시피 하고, 그나마 작동하는 전등은 기분 나쁘게 깜박인다.

바닥과 벽은 온통 이끼인지 곰팡이인지 모를 것으로 덮여있다.

밟을 때마다 녹아내리며 불쾌함을 안겨주는 무언가.

신발 너머로도 역겨움이 스멀스멀 다가온다.

아무리 달려도 광경은 변하질 않고, 뒤에서는 원망과 증오의 절규가 들려온다.

돌아볼 수는 없다.

그랬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왜 나 혼자 있는 걸까?

다른 이들은 어디로 간 거지?

갑자기 복도가 막히며 초록 덩어리가 달려드는 순간, 사령관은 몸부림치며 악몽에서 깼다.


"정신을 차리셨군요, 구원자님"


베로니카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린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열을 뺏겼는지 오한이 들지만, 손만큼은 따스하다.

줄곧 곁에서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사령관에게 작은 위안이 됐다.

이 관심이, 애정이 그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줬겠지.


"곧 장례식 준비가 끝날 겁니다. 아침과 같은 절차로 진행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래...그렇게 해 줘"


몸을 일으키자 바쁘게 돌아다니던 아자젤이 반색하며 달려왔다.


"깨어나셨군요. 땀을 많이 흘리셨어요"


어디서 꺼냈는지 코헤이 교단의 상징이 수놓아진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주는 친절함에, 아까 꿨던 악몽이 희미해진다.


"사라카엘, 설마 이것도 율법을 어긴 거라고 할 건가요?"


문득 손을 멈춘 아자젤이 묻자, 기둥에 기대 팔짱을 끼고 있던 사라카엘은 고개를 저었다.


"흥, 구원자의 말과 행동이 곧 빛이자 교단의 뜻이다. 날 언제까지 시험할 건가?"


"그토록 엄격했었으니까요. 이제는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빛을 따를 수 있으니 이게 구원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퉁명스러운 사라카엘의 대답이 반가웠는지 아자젤은 환하게 웃었다.

지난날 코헤이의 민낯과 진실을 마주하고 난 후 많은 고뇌와 결단이 있지 않았던가.

여전히 말에는 날이 서 있긴 하지만, 사라카엘은 더 이상 전과 같은 적의를 표출하진 않았다.


"구원자여"


"응?"


"빛의 대리인인 구원자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우리의 교리입니다. 우리의 교리는 구원자의 말에 형태를 얻습니다.

 그러니 청하옵건대, 연이은 시험으로 흔들리는 어린양을 보듬고 빛이 함께한다는 걸 알리고자 회동의 시간을 가져도 괜찮을까요?"


아자젤은 연거푸 벌어진 살인사건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예배와 찬송으로 잡아보겠다 허락을 청하고 있었다.

하긴, 사건의 해결이 가장 중요하지만 오르카의 구성원들을 보듬는 것도 간과할 수 없겠지.

이 역시 마땅히 사령관이 신경 써야 하는 사항이었으나 경황이 없어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다.


"당연하지. 오히려 진작 그랬어야 했는데. 이렇게 말을 꺼내줘서 고마워"


"이 작은 발걸음이 위안이 되길"


아자젤의 탐스러운 입술을 잠시 어루만진 사령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장례식이 시작되겠지만, 하루에 두 번의 장례식을 지켜보기엔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구원자님, 가시려는 겁니까?"


"응, 부끄러운 소리지만 난 이별을 온전히 감내할 그릇은 못되나 봐. 부디 정성을 다한 장례식을 부탁할게"


"빛의 뜻대로"


살짝 처진 어깨로 멀어지는 사령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세 천사는 어둠 속에서 빛이 더 강하게 타오르길 기도했다.




"이번 장례식도 참석하지 않다니, 그래도 괜찮아?"


"리앤 언니도 마찬가지잖아, 뭘. 떠나간 이에게 고하는 작별은 언제나 대신해줄 누군가가 있어. 

하지만 진실을 밝히고 모든 걸 바로잡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닥터의 눈매는 매서웠다.

그 신체나이에 걸맞게 감정에 충실하고 때로는 짐도 좀 내려놓으라 하고 싶었지만,

닥터의 말마따나 닥터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었고 그 자리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었다.

당장 닥터가 없다면 오르카는 시스템의 유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난리법석이겠지.

거기에 연이은 충격적인 사건까지 도맡고 있으니.

리앤은 이 기특한 동생의 짐을 어떻게 덜어줄 수 있을까 고심했다.


"그러고 보니 켈베로스가 쓰러진 복도 주변에서 이런 걸 발견했거든?

곰팡이 같기도 한데 아무리 봐도 뭔지 모르겠어. 분석 좀 해줄래?"


"응? 새 일거리? 언니, 진짜 자비로운 거 맞아?"


고글을 벗으며 녹색 액체가 들어있는 시험관과 리앤의 얼굴을 돌아보는 닥터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뭘 어쩌랴, 그저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 수밖에.

바람과 현실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니까.


"참, 맡겼던 LRL의 모듈 분석은 끝났어? 범인 파악에 결정적인 한 수가 되면 좋겠는데"


"아, 그거. 작업하느라 엄청나게 고생했어"


닥터가 시험관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 박고는 가슴을 한껏 펼치며 양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듈을 분석한다고 해당 모듈이 장착된 바이오로이드가 활동을 정지하던 순간까지 정보를 온전히 확인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거든.

만약 모듈 자체가 손상됐다면 난이도는 수직상승하고. 하지만 해냈단 말씀"


"그래? 정말 대단해! 어째서 아까 모두가 모여있을 때 말하지 않은 거야?"


"알바 오빠 때문이지, 뭐. 안 그래도 말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순식간에 엉망이 됐잖아"


"하긴...."


냉정하고 유능한 지휘관 AGS라지만 그렇기에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걸까.

하나같이 브라우니를 자극할까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심지어 지휘관급 바이오로이드들도 그렇게 마음을 써줬는데

살얼음을 무사히 건넜다 싶더니 바위를 내리쳤다.

뒷수습에 얼마나 진땀을 흘렸는지 원.


"어쨌든 건질만한 정보는 있는 거지? 당장 보고 싶어"


"저도 궁금하네요. 그 AGS의 의견도 아주 틀린 건 아니니까요"


레모네이드 알파는 실낱같은 기대를 걸었다.

그 브라우니가 잘못 봤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직접 현장에 가보니 조명이 망가져 제대로 볼 수 있는 환경은 아니지 않았던가.

감마가 범인이 아니라면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미궁에 빠지겠지만,

적어도 그 호전적이고 잔인한 자매가 목에 칼을 들이밀 거란 걱정은 덜 수 있다.

그 정도로 감마는 부담스럽고 위협적이었다.


"잠시만...됐다, 이 패널에서 출력될 거야"


능숙하게 의자의 버튼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닥터가 쾌활하게 말했다.

곧 볼 영상의 내용과 배경을 감안하면 쾌활해서는 안 됐겠지만.


"저런...."


알파는 탄식했다.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팔이 날아가고 피가 튀는 광경,

방향이 돌아가 심하게 흔들리는 복도를 연신 비추다 결국 거칠게 돌아가며 끊기는 영상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에 보였던 그 윤곽은 화질이 거칠긴 했지만 분명 감마였다.


"이쯤 되면 범인의 정체는 확실한 거나 다름없겠어.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알파의 조언이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거야"


주먹을 꽉 쥐고 말하는 리앤의 기대에 알파는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감마가 아니길 바랐어요. 그녀는 너무 위협적이니까요.

단순히 강하거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아니에요. 이미 우리는 감마를 한 차례 꺾었으니.

진정 두려운 건...그 과격함과 집요함이에요"


새삼 말이 필요하랴.

LRL과 켈베로스가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만 봐도 소름이 끼쳤다.

오르카를 집어삼키려 드는 괴물의 마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강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겠지.


"흐음...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긴 하지.

정체뿐 아니라 구체적인 공격 방식이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닥터, 혹시 켈베로스의 모듈로부터는..."


"그건 무리"


신중함과 기대가 가미된 싹을 틔우려는 리앤의 말을 닥터가 자비 없이 잘랐다.


"과장을 조금 더해서 다진 고기 수준이었어. 모듈이라고 무사했을까.

정보를 읽어내기는커녕 추출도 실패했지 뭐야"


"그래...."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구나, 리앤의 눈이 축 처졌다.

언제나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모두의 기운을 북돋던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기대를 품고 자신의 연구실을 방문한 손님들을 실망시킬 생각이 없던 닥터는 손뼉을 짝짝 치며 주의를 끌어모았다.


"어쩌면 지난 전투보다 더 어려운 싸움이 시작됐는지도 몰라. 그래서 밤새며 준비한 게 있어!

알파 언니, 아마 굉장히 좋아할걸?"


실실거리며 웃는 닥터의 말에 알파뿐 아니라 리앤도 귀를 쫑긋거렸다.

뭐가 기다리고 있는 걸까?

따라오라며 저 안쪽으로 걸어가는 닥터를 쫓으니 또 다른 방이 나오며 케스토스 히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알래스카에서 입수했던 오메가의 케스토스 히마스야. 드디어 분석과 개조를 마치고 알파 언니가 쓸 수 있도록 동기화했어.

기존보다 훨씬 우월한 성능을 자랑하니까 알파 언니는 오메가뿐 아니라 그 누구와 겨뤄도 절대 지지 않을걸?

감마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


"세상에...정말 고마워요. 이거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겠어요"


알파는 반지를 받았던 순간이 지금과 같을까 싶어하며 새 장비를 향해 다가갔다.

동그란 건 매한가지니 반지라는 표현이 딱히 어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충성의 대상이자 무엇보다 사랑하는 주인의 뜻을 유감없이 펼치며 복수를 할 발판도 마련되었으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프로포즈에 견주어도 그 환희는 모자람이 없었다.

첫 반지로 사령관의 진심을 알았었고, 지금 두 번째 반지로 그 진심에 거듭 보답하리.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자 원래부터 한 몸이었다는 듯 새 케스토스 히마스가 공명하며 녹색 빛을 깜박였다.


"정말 놀라워요. 사고가 끝없이 확장되는 것 같아요...! 전 다시 태어났어요"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기뻐, 알파 언니. 밤샌 보람이 있네"


배시시 웃는 닥터는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그래도 아직 세세한 옵션은 조정이 필요할 수 있으니까, 기존에 쓰던 건 여기 두고 갈래? 마저 동기화 작업을 거칠게"


"그럴게요. 이 노고는 반드시 보답하겠어요"


요 며칠 사이 가장 들뜬 것 같은 알파가 또각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기계 선이 복잡하게 얽힌 통로로 멀어지자,

이를 죽 지켜보던 리앤은 줄곧 품어두고 있던 의문을 날렸다.


"닥터, 좀 이상한 게 있는데 말이야"


"응? 어떤 거?"


"어제 사건도 오늘 사건도 그렇고, 두 현장 모두 CCTV가 먹통이었어. 이거 정말 범인이 그런 거 맞을까?"


"역시 언니는 예리하네"


닥터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혹시 모르니 조금 더 안쪽으로 와"


안내에 따라 방 깊숙이 들어가니, 두꺼운 문이 연거푸 몇 겹이나 내려오며 통로를 꽁꽁 틀어막았다.

오르카의 은밀한 연구실 내에서도 한층 구석진 공간에 구역의 주인인 닥터와 리앤, 단둘만이 남은 것이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사실 니키 언니가 그랬을 거야"


"응? 니키? 니키가 오르카에 탔었어?"


"이번에 확보한 오세아니아 거점에 남아달라고 했는데 재미있는 사건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며 출발 직전에 타더라고. 

언니도 알잖아, 니키 언니가 좌충우돌이지만 능력만큼은 확실한 거.

어차피 오르카의 보안 및 등록절차 전반은 내가 주관하니까 그냥 처리해줬지. 

그런데 사건이 터진 걸 보고 가만있을 수 없다며 뛰쳐나갔지 뭐야.

아직 세부 조정이 안 끝나 돌아다니는 근처의 장비는 죄다 망가질 텐데...."


"왜 우연하게라도 마주치지 못한 걸까? 난 사건 현장에 거의 살다시피 했는데"


"오, 정말? 리앤 언니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면 특수요원 이름값은 하네. 

나중에 알려주면 본인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자뻑하는 거 아닌지 몰라"


"그럼 그걸 왜 숨긴 거야?"


리앤의 의문이 깊어졌다.

지금 닥터의 발언은 뭔가 이상하다.


"명탐정 맞아? 내가 저렇게 문을 닫고 이렇게 단둘이 말하는 시점에서 눈치챘어야지"


닥터는 볼을 부풀리며 심통부리기 시작했다.


"아하하, 미안 미안...설마 염탐 때문에 그래?"


"응...지금 우리 주변을 둘러싼 뭔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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