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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의 상태는 어떤가? 치료할 수 있는 거겠지?!"


사령관실 밖으로 기진맥진한 다프네가 나오자 득달같이 달려든 마리가 질문을 퍼붓는다.

다른 지휘관들도 낙관적인 대답이 나오길 바라며 침을 삼켰다.


"최선을 다했지만...가슴의 파편을 제거하는 건 무리에요. 

너무 깊숙이 박혀있고 심장에 가까워서 자칫했다 정말 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정교한 수술을 해야 하는데...."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가로젓는 반응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쏟아진다.

수술을 가능케 할 섬세하고 다양한 도구와 설비도, 집도할 뛰어난 실력의 의사도 이제는 없다.

방금 있었던 일로 모두 한 번에 날아갔으니까.


"수복실에 이어 연구실까지 완파라니...상황이 너무 공교롭군"


칸의 말대로다. 창고에 붕대와 몇몇 의약품을 비롯한 재고가 있지만, 

이걸로는 기껏해야 경상을 치료하거나 상태 악화를 막는 게 고작이다.

심신을 갉아먹는 해저감옥의 쇠창살이 한층 두꺼워졌다.


"그럼 저대로 두고 구경만 해야 한다는 거야? 다른 방법은 없어?"


"네...리제 언니가 상처가 썩지 않도록 소독하고 붕대를 감는 중이에요. 

해당 부위에 자극이 가해지는 건 피해야 하고, 사령관님께서 사소한 스트레스라도 받지 않으시도록 각별히 배려할 필요가 있답니다"


"이를 어쩌지...."


암담한 안내에 라비아타가 시선을 내리깐다.


"지금이라도 오르카의 방향을 돌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주인님의 안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잖아요"


삼안의 생체 재건 설비.

철충화 됐던 사령관에게 새 육체를 안겨줬던 그 설비라면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중추신경을 제외한 전신을 교체할 수 있으니 가슴의 파편 정도야 대수일까.

충성스러운 경호대장의 제안 덕에 이 혼란을 수습할 가닥이 잡혀간다.

지금까지는 오르카라는 폐쇄된 공간에 함께 있는 미지의 적이 혹여 밖으로 탈출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해 귀환을 주저하고 있었지만,

드리워졌던 장막을 벗기고 벗긴 끝에 진상이 드러나고 아직 남아있는 한 무더기의 쇼거스도 해당 구역을 아예 봉쇄하는 초강수를 뒀다.

잠재적인 불안이 0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무엇보다 사령관의 안위야말로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되는 중요사항.

심해에서의 방황을 끝내고 새 목적지로 향할 때가 왔다. 

다만 김지석의 묘까지는 상당한 거리다.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사령관의 몸이 버틸 수 있을까.


"우리가 지금 있는 위치에서 목적지까지 이동하려면 최대한 신속히 이동해도 며칠은 걸릴 텐데,

상황이 상황이니 무리해서라도 출력을 끌어올려 달라 해야겠군"


"그러면 좋겠지만 솔직히 좀 힘들 것 같거든?"


포츈의 등장에 모처럼 희망의 손길이 보이던 분위기가 전환된다.


"정비 중에 갑자기 주요 장치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망가져서 원인을 분석 중인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워낙 광범위하게 고장 났고 부품을 수리한다 해도 연동될 시스템에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라...

지금 오르카는 사실상 통제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하거든"


"갑자기 그런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니...단순한 사고일 가능성은 얼마나 되죠?"


기껏 짜낸 생각이 무위로 돌아간 게 신경 쓰이는지 리리스가 채근했다.


"정비공으로서 지내온 경험을 토대로 말하자면...이건 절대 사고가 아니거든.

누군가 의도적으로 오르카를 무너뜨리고자 치밀하게 공작한 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 될 정도라 너무 당황스러운 거 있지.

닥터나 아자즈님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혹시 본 적 있어?

듣자 하니 사령관이 다쳤다던데 심각한 건 아니지?"


정비라는 자신의 소임에 너무나도 충실했던 나머지 상황파악에 한 박자 늦은 포츈의 물음은 주변 이들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말하기도 좀 그러니 자리를 옮기지"


"전 여기서 리제 양이 나오는 것까지 보겠어요"


"어차피 각하의 경호도 해야 할 테니...그런데 정말 치료를 받지 않아도 괜찮겠나? 온몸이 상처투성이이지 않나"


"이건 상처가 아니라 훈장이랍니다"


"그런가...잘 부탁하네"


마리의 격려에 리리스가 싱긋 미소로 화답한다.




무리가 떠나고 복도에 홀로 남자, 책망과 후회가 하나둘 고개를 내민다.

자신을 믿고 그 구렁텅이로 단둘이 갔던 건데, 제대로 경호하지 못했다.

그때 사령관 대신 리리스 본인이 직접 돌을 향해 사격했다면 파편이 달리 튀었을까?

로자 아줄을 사령관에게 집중했다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천만에.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것임을 잘 알지 않나.

감각이 무뎌진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쇼거스의 파도에 휩쓸렸을 때, 온몸을 관통하는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후부터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녹색의 점액질은 왜 그리 무겁게 느껴졌는지 블랙 맘바를 쥔 팔이 빠지지 않았고, 로자 아줄을 조작하려 하자 의식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때 리리스는 소리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물속을 허우적거리는 느낌이다.

결국 자신의 무력함으로 사령관을 위기에 빠뜨렸다는 사실만이 걸러져 깨질 것 같은 머리를 한층 뒤흔들었다.


"지잉"


문이 열리고 살짝 물기 어린 눈가를 훔치던 리제가 우뚝 멈춰 섰다. 못 볼 것을 봤다는 시선이다.


"스토커, 주인님은 어때?! 정신은 차리셨어?"


"...역겨운 해충, 네가 감히 주인님의 안위를 물을 자격이나 있어?"


대답 대신 날카로운 매도가 돌아온다.


"입조심해. 난 경호대장이고 주인님의 신변을 책임질 의무와 자격이 있어. 사적인 감정으로 경솔함을 드러내지 마"


"입 간수를 잘해야 하는 건 바로 너겠지. 잘도 그 오만한 말을 떠들어대네? 

주인님의 신변을 책임질 의무와 자격? 그 결과가 이거야? 

지금 사경을 헤매이며 고통에 젖어 신음하는 저 모습이 네가 그렇게나 자랑하는 경호라고?"


"뭐?! 사경을 헤매? 주인님, 괜찮으신...!"


걸음을 떼려 들자 과격한 움직임에 앞이 가로막힌다. 눈빛만으로 죽일 기세로 리제가 계속해서 째려본다.


"비켜, 주제 파악 못하고 설치면 더 이상 재미없을 줄 알아"


"입뿐 아니라 뇌도 곪아버렸구나. 곪은 부위는 절제를 해야지"


대기를 가르는 쇳소리. 묵직하지만 예리한 충돌이 연이어 복도를 뒤흔든다.


"...너, 너...!"


"말로 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경호대장이면 경호 똑바로 해. 

지난번처럼 추잡한 욕망에 눈이 멀거나, 무능함으로 주인님을 사지로 몰아가는 꼴을 한 번만 더 보이면 

그때는 확실히 구제에 들어갈 테니까"


리리스의 머리 바로 옆 벽에 가윗날을 박아넣은 리제는 한 마디 한 마디 확실하게 속삭이고는 거칠게 무기를 뽑아들었다.


'...안 돼, 이런 몸으로는 주인님을....'


악연으로 오랜 시간 투닥거렸지만 미운 정이 들어 내심 인정했던 관계에 금이 더 깊어진다.

하지만 지금의 리리스에게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

용납할 수 없는 폭언도, 명백히 선을 넘어 평소라면 확실히 응징했을 무력행위도 머리에 남지 않는다.

혼란에 빠져 멈춰버린 사고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사실은 

뻔하니 머리쪽을 향해 날아오는 저 가윗날에 제 때 반응할 수 없었다는 거다.

이런 망가진 몸뚱어리로 사령관을 지킬 수 있을까?




"으으음...."


자신이 내는 것 같지 않은 신음에 놀라 의식이 돌아온다.

몸을 살펴보니 가슴을 정성스레 감싼 붕대가 반긴다.

잔해와 이물질로 더럽혀졌던 전신은 말끔하게 닦여있고, 편한 옷으로 갈아 입혀져 익숙한 침대에 누워있다.


'무사히 돌아온건가....'


마지막 기억을 되짚어 본다.

닥터의 연구실에서 믿을 수 없는 진실을 목도했고, 결단을 행동으로 옮겼다.

재앙의 결정체인 돌을 쐈던 것까진 떠올릴 수 있다. 그 뒤로는 모르겠다.


'쇼거스를 막아야 해...내가 지시를 했던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는다. 오르카의 유능한 구성원들이라면 어련히 알아서 잘했겠지만, 그래도 확인하지 않고서는 편히 누워있을 수 없다.

침대 옆 탁자의 패널을 조작해 지휘관을 소집한다.


"...아, 진짜...."


검고 둥근 돌이 탁자 위에 놓여있다.

아마 주머니에 있던 것을, 간호하던 다프네나 리제가 옷을 갈아입히던 와중 발견하고 소중히 올려둔 거겠지.

저게 그저 작고 예쁜 돌멩이로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령관은 안다. 저것이야말로 이 모든 파국을 조장한 악의 속삭임이라는걸.

당장 치워버려야 한다. 쇼거스라도 튀어나온다면 걷잡을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처리하지?'


손을 뻗어 돌을 쥐고 고민한다. 

운 좋게 자신은 영향이 덜한 것 같지만, 닥터는 돌을 가까이한 결과 속절없이 타락해 어마어마한 재앙을 불러왔다.

다른 바이오로이드에게 맡길 수는 없다.

AGS의 고화력을 동원해 파괴할까? 아니, 이것도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앞서 돌을 파괴하려 했던 시도가 어떻게 됐나. 연구실을 비롯해 오르카의 중추가 대파됐고 파편이 가슴에 박혀 이 꼴이지 않은가.

애초에 돌이 제대로 부서지긴 했을까?

어쩌면 여전히 연구실에서 끝없이 쇼거스를 뿜어내고 있지 않을까?

안된다, 해당 구역을 격리하지 않으면....


"주인님, 정신이 드셨나요?"


라비아타를 필두로 지휘관들이 몰려왔다. 뛰어왔는지 숨을 고르는 포츈도 보인다.


"연구실, 거기를 봉쇄해야 해. 어떻게 됐어? 설마 쇼거스가...."


"기억 안 나시나요? 지시를 리리스 양이 곧바로 전달했고 일대는 격벽으로 몇 겹이나 틀어막아 오르카의 다른 공간과도 단절됐답니다.

핵심 시설들도 같이 묶인 건 안타깝지만...."


"아, 그랬어? 미안. 요즘 하도 정신이 없어서"


이미 수습했다는 소식에 긴장이 확 풀린다.

급하게 일으켰던 몸을 다시 침대에 앉히니 찌릿한 통증이 가슴을 저민다.


"크윽...!"


"사령관, 괜찮아?!"


몸을 내던질 것만 같은 레오나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안심하라 이른다.

원래부터 하얗던 얼굴은 피가 제대로 도나 싶을 정도로 창백하고, 눈가에 생긴 다크서클은 설원 위를 무대로 하여 한층 두드러진다.

사령관보다 레오나 본인의 건강부터 신경 쓰는 게 어떨까 싶을 정도로 피폐한 몰골이다. 그만큼 괴로운 나날의 연속이었겠지.


"안심이 되니 좀 느슨해졌나 봐. 그래, 그렇단 말이지..."


"리리스로부터 이야기는 들었다. 정말 뭐라 해야 할지"


아스널이 평소의 시원시원한 모습과 달리 말을 아꼈다. 비단 아스널만이 아니겠지. 누가 이 현실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질 수 있을까.


"불행 중 다행인 건, 이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늪의 바닥에 닿았다는 거야. 최소한 지금보다 상황이 나빠지지는 않겠지.

쇼거스가 불안요소이긴 한데 구역을 통째로 봉쇄됐다니 다행이고. 설마 빠져나올까?"


"신중해서 나쁠 건 없다고 본다"


"그래, 그 말대로야, 칸. 해당 구역...앞으로 D구역이라고 부를게. 

D구역 일대의 경계태세는 항시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포착된다면 지체 말고 보고해줘"


함께 하자며 집요하게 달라붙던 닥터에게 보내줄 것은 모두가 멀리하고 경멸하는 구역의 이름뿐이다.

자신의 이니셜이 붙은 것을 저세상에서 기뻐하라지.


"주인님, 보고드릴 게 있어요"


"응? D구역 건은 아니지?"


"많은 인적, 물적 손실이 있었으니 이를 수복하고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당초 목적이던 수산자원의 확보와 트리아이나 양의 합류도 진작에 달성했고 사태도 일단락됐으니,

최대한 신속히 오세아니아 거점으로 돌아가는 건 어떨까요?"


삼안의 생체 재건 설비든, 감마가 오세아니아에 구축해놨던 인프라든 

최소한 지금의 오르카보다는 사령관의 몸을 고치기에 훨씬 나은 환경이다.

상황이 상황이니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다. 


"물론이지. 더 이상 이 기분 나쁜 곳에 있을 이유는 없어"


라비아타가 슬쩍 곁눈질하자 포츈이 말을 이어받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거든? 직설적이고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오르카는 심하게 망가져 제대로 항행도 어려운 상황이야.

정비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이 자리에서 답하기 어려워. 최대한 노력은 하겠지만 솔직히 무지 큰일이거든...."


산 넘어 산이구나.


"...그래, 결국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구나. 우리 모두에겐 시간이 필요해. 상처를 핥고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이.

최선을 다해줘. 독촉하고 싶진 않지만, 시간이 있는 것과 여유가 있는 건 별개니 최대한 신속하게"


"후훗, 누나만 믿고 기다리면 되는 거거든? 제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든든한 서포트가 되어줄 테니까"


시원시원한 미소에 상쾌한 바람이 조금이나마 분다.


"각하, 외람되오나 메이 지휘관의 시신은 이만 수습해도 되겠습니까? 고이 보내줘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마리의 직언에 사령관은 구석에 펼쳐진 천을 바라보며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때가 아니야. 그대로 둬"


"네?! 아, 알겠습니다"


예상 밖의 대답에 순간 당황한다.


'따로 뜻이 있는 거겠지'


'아직 이별의 준비가 되지 않은 건가....'


저마다 나름의 의중을 가늠해본 지휘관 일동은 사령관의 안정과 쾌유를 기원하며 방을 빠져나왔다.


'...아, 돌 처리하는 걸 깜박했네. 어떻게 하지...좀 더 생각해볼까'

42

한 발 앞서 진실에 도달하고자 했던 지휘관을 덮고 있는 천을 걷는다.

아무런 미동 없이 조용히 누워있는 모습. 얼핏 보면 편안히 자고 있다 착각할 정도다.

하지만 이내 부질없는 망상은 흔적도 없이 흩어진다. 핏기없는 안색, 무표정한 채 그대로 굳어버린 얼굴.

무엇보다 몸과 떨어진 목은 시체에 무슨 기대를 하느냐고 비웃는다.


'메이....'


과격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이지만 동시에 그 냉철함과 전략적 식견은 위기의 순간에 이정표가 되어줬다.

지휘관의 용무를 벗어던지고 사심을 품은 채 나타나면 말과 몸짓에서부터 의도가 빤히 보여서 놀려먹는 재미도 있었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안아 여자로 만들어줄 수 있었지만, 그 반응이 좋은 자극이 되어 일부러 모른 척하곤 했다.

농염한 여체는 얼마든지 다른 바이오로이드로 대신한다 한들 이 풋풋한 연애감정은 메이 외에는 대체할 수 있는 이가 없었으니까.

이제 와선 왜 그랬나 진한 후회만이 남았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다음에 더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

그렇게 미루고 외면하며 답답해하는 모습에, 속앓이하는 투덜거림을 웃고 즐겼다.

한때의 만용은 부메랑이 되어 짊어지기 힘들 정도의 회한으로 돌아왔구나.


"미안해, 네 감을 믿었어야 했는데...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받아줄래?"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들어 올린다. 그대로 입술을 포갠다.

본디 한없이 부드러웠을 입술은 생전의 탄력만큼은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 그저 달콤하다.


"비록 죽었지만 첫 키스야. 보고 있니, 느끼고 있니? 

지휘관으로서 마지막까지 헌신하려 했던 그 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생전에 받아주지 않은 그 마음을 뒤늦게 받는 의미에서 널 안을게"


머리를 조심스럽게 침대 옆 탁자에 올리고 몸을 안아 든다.

사후경직이 시작됐는지 팔과 어깨가 뻣뻣하지만, 아직 다른 곳은 그럭저럭 부드럽다.

탄력이 확 사라진 게 아쉽다. 생전에 몇 번 몸을 스치거나 짓궂은 장난삼아 포옹했을 때는 정말 탱탱했는데.

그때에 비하면 약간 무거운 듯도 하다. 축 늘어져서 그런 걸까?

침대에 고이 눕히고 옷을 하나둘 벗기려 시도하지만, 곱게 벗기는 건 무리일 것 같아 반쯤 찢는다.


"이렇게 보니 억지로 강간하는 것 같잖아...차라리 살아있을 때 덮칠걸"


그랬다면 예상 밖의 급전개에 크게 당황하고 화내기도 하면서 결국 방법이 없어 일방적으로 유린당했겠지.

앳된 순정이 짓밟힌 것에 말없이 눈물만 흘리며 그 뒤로 얼굴도 마주 보려 들지 않고 거리를 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꼬인 관계를 풀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 또한 있을 수 있었겠지.

만약이지만 메이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천박한 본성을 깨닫고 앙앙거리며 허리를 흔들었을지 누가 알까.

무수한 가능성이 있었다. 관계의 진전이든 파탄이든 그 방향을 떠나 살아있다고 실감할 수 있는 희로애락이.

그러지 않았던 게 통탄스럽다. 왜 삶에 충실하지 않았을까.


"정말 미안해...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 해줄 게 없어. 이건 내 진심을 담은 사과야"


시체를 범한다는 배덕감과 눈앞에 놓인 풍만한 육체가 가하는 시각적 자극에 사령관의 물건이 한껏 발기한다.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큰 가슴과 잘록한 허리, 머리 없이 얌전히 놓인 몸...어떻게 보면 맞춤형 오나홀이 아닌가.

허벅지를 잡아 억지로 비튼다. 생각 이상의 저항에 순간 놀랐지만,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된 근력에는 별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

다급히 젖히다 혹여 부러질까, 시신이 상할까 주의하며 힘 조절을 한 끝에 

양다리를 M자로 벌린 채 순결을 가져가 주길 바라는 지고지순한 지휘관의 가슴을 움켜쥔다.

통증도 못 느낄 테니 망가뜨리지만 않으면 되겠지.

거친 손길이 허리를 지나 엉덩이를 쓰다듬고, 굳게 닫힌 균열을 억지로 벌린다.

사령관 본인의 성기에 윤활 젤을 넉넉히 바르고 남은 건 아낌없이 메이의 꽃잎 사이로 붓는다. 이래도 좀 빡빡하겠지만 어쩔 수 없겠지.

손가락 하나 비집고 들어가기 힘든 틈에 귀두를 대고는, 심호흡을 한 후 한번에 밀어 넣는다.


"여자가 된 걸 축하해, 메이"


거칠게 허리를 흔들며 탁자 위의 머리를 향해 달콤하게 속삭인다.

자신의 첫 경험을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영혼이나마 만족하고 있을까?

살아있는 몸이라면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질과 자궁이 파열돼 실신했겠지만, 죽었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일말의 거리낌 없이 박아대며 생전 나누지 못했던 애정을 주고받는다.


"으읏, 처녀라 그런지 피가 흐르긴 흐르는구나...처음이라 해도 피가 안 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던데"


진작에 차갑게 식어 혈액순환이 멈춰버린 몸에서 다시금 피가 흐른다. 아마 마지막으로 흐를 피겠지.

물건의 크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움직임에 맞춰 아랫배가 볼록해졌다 꺼지는 걸 정겨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희열이 최고조에 달한다.


"메이, 메이...!"


아찔한 오르가즘과 함께 더 이상 생명을 품을 일 없는 자궁에 씨앗을 한가득 쏟는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제멋대로 축 늘어진 팔이 생전의 도도함을 연상시키는 듯해 

사정 직후의 물건이 수그러들기는커녕 더 부풀어 오른다.


"오늘은 그동안 안지 못했던만큼 해줄게. 사랑해, 메이...."




윤활 젤을 몇 통이나 비웠을까.

지치는 기색 없이 연이어 허리를 튕기는 사령관의 등 뒤로 문이 열리며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주인님, 드시라고 과일을...꺄악!"


쟁반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정성 들여 깎은 과일들이 바닥에 뒹군다.


"무슨 일인가요?! 설마 적...."


"각하, 괜찮으십...."


문 앞에서 사령관실로 다가오는 모두를 철통같이 감시하던 리리스와 때마침 지나가던 마리의 시선이 침대로 향하고,

어쩌면 수면부족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어 지금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게 아닌가 고민하게 만들었다.


"...진정하고 이쪽으로...."


"흑, 흐윽...."


"크흠, 흠...."


충격을 억누르지 못하고 흐느끼는 콘스탄챠의 어깨를 리리스가 조심스럽게 안아 밖으로 데려간다.

마리는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바닥의 쟁반과 과일을 줍고 뒷걸음질로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고서야 자신이 왜 뒷정리를 했나 당황했지만, 그건 사소한 문제였다.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주인님의 머리가 이상해진 걸까요?! 당장 의사를...마땅한 의사도 없잖아요, 아아...!"


"흑...주인님...어떡해...."


"다들 거기서 뭐 하고 있나?"


패닉에 빠져 수습할 길 없는 셋을 향해 아스널이 호기롭게 걸어온다.


"아스널 대장인가, 사령관실에서 비명이 들려 들어가 봤더니 각하께서...이걸 말해야 할지...."


"마리 대장이 주저하다니 별일도 다 있군. 개의치 말고 말해줬으면 하는데"


반대쪽에서 어느새 접근한 칸도 걱정스럽게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래, 이건 그저 정보 전달일 뿐이다.


"놀라지 말고 침착하게 듣도록...사령관 각하께서 메이 대장의 시체를 범하고 계셨다"


"......."


아스널은 언제나와 같은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지만 말이 없다.


"...아스널 대장?"


"아아, 잘못 들었나 해서 말이야. 음...이건...."


당황하는 아스널이라니, 퍽 진귀한 광경을 요즘 들어 자주 본다.

그렇게 찾아온 침묵의 시간. 숨 막히는 적막 가운데 눈 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긴장의 끝이 팽팽하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접근해야 할까. 누가 그럴듯한 도전이라도 해준다면.


"...사령관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니 걱정스럽지만, 그렇기에 다소의 돌출행동은 너그러이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프네도 사령관이 사소한 스트레스라도 받지 않도록 각별히 배려해야 한다고 했지 않나"


칸의 말에 차츰 진정을 찾고 저마다 본 광경을, 들은 내용을 곱씹는다.


"각하께서 그 행위로 안정을 찾으실 수만 있다면 용인할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메이 대장에게 미안하군"


어떻게든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는 마리의 노력이 눈물겹다.


"이상성욕이라 볼 수도 있지만...우리의 생각이 짧았는지도. 

단순히 남녀 간의 쾌락을 넘어 죽음마저 초월하는 진정한 사랑의 행위로 볼 수도 있지 않나?"


"실례지만 그 우리에서 저는 빼주시겠어요?"


"아스널 대장은 어째 중간이 없나"


리리스와 칸의 연이은 지적에 캐노니어의 자랑스러운 지휘관이 어깨를 으쓱한다.


"레오나가 자리에 없어 다행이군. 가뜩이나 마음고생이 심한데 연이은 충격으로 다가왔을 테니...."


"레오나라면 안드바리의 명복을 빌어준다며 회당으로 갔다"


"...마리 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콘스탄챠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음? 말 그대로다. 얼마 전에 희생된 안드바리가 영혼이나마 평안을 찾길 바란다며 코헤이 회당으로 가더군"


"안드바리가 죽었다고요?!"


소스라치는 비명에 외려 콘스탄챠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더 놀란다.

분명 서글픈 일이지만, 왜 이제 와서 새삼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걸까?


"언제,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나요?! 어째서 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지...!"


"콘스탄챠, 진정하도록. 설마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지금 처음 듣는 내용이에요. 회당이라 하셨죠? 어떡하면 좋아...."


다급히 달려가는 뒷모습은 척 봐도 당황으로 물들어있다. 대체 뭐지?


"최근 충격적인 일이 많았으니 일시적으로 기억 상실이라도 걸린 건가?

바빠서 잊어버렸다 하기엔 사소한 사건이 아니니 말이야"


"메이드장으로서 짊어진 짐이 무거울 텐데 참극까지 연달아 벌어졌으니...정신적으로 많이 무너졌겠지"


"갑자기 신경 쓰이는 건데...주인님도 방금 있었던 일을 잊고 재차 물어보신 적이 있어요"


"그게 정말인가?"


리리스의 고백에 지휘관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한 번은 무슨 특이한 일이든 그 자체로 끝나는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부터는 다르다. 두 번째는 세 번째를 부르기에.


"가벼이 넘길만한 일은 아닌 것 같군...어쩌면 또 다른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한 유형의 위험일지도"


모두가 다채로운 경험을 쌓은 노련한 전사들이다. 

설령 비교적 최근에 복원됐다 한들 계승된 기억은 물리적인 시간을 뛰어넘는다.

하물며 마리와 칸은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 

그런 이들마저도 어렴풋이 느끼는 이 불온한 기류는 겪어본 적 없는 미지의 무언가다.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전장이 사무치게 그립다. 적이 있고 이를 제압하면 끝인, 지극히 단순하고 명확한 전장.

기술과 전략의 발달로 양상이 복잡해져도 이 본질은 변치 않는다.

설령 패배해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거기에 씁쓸함은 있을지언정 의문은 없다.

그러나 오르카는, 지금 우리 모두가 이미 발을 들인 이 전장은 상식이 통하기는 하는가? 인지의 범위 내에 있긴 한 건가?

애초에 끝없이 솟아나며 변신과 위장을 일삼는 녹색 괴물이라니, 농담거리조차 못 된다. 


"이런 때일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다들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가장 가까이에서 곁을 지키는 경호대장으로서 헌신하리라 믿는다.

지금처럼 사령관 각하가 우리의 힘을 필요로 하신 적이 없었다. 그 기대에 부응해야겠지"


충실한 정도가 지나쳐 몇몇 부하들에게 원성을 사기도 하는 마리였지만, 

그 올곧은 자세는 그야말로 정론이었기에 다른 이들도 긍정하며 스스로를 돌아봤다.


"안 그래도 포탄의 재고를 점검하다 오차가 너무 커 확인하려던 중이었지.

이랬던 적이 없는데, 마침 전산 시스템도 오류투성이라 참 곤란하단 말이야"


아스널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실은 스틸라인도 병사의 정원이 어긋나 긴급 점호 중이다.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부끄러운 일이군...."


리리스는 말을 아꼈다. 자신의 몸 상태가 엉망이라는 걸 말해봤자 걱정만 끼치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칸은 별일 없나?"


"...혹시 탈론페더를 본 적 있나? 얼마 전부터 도통 보이질 않는군"


"그 친구라면 어디 으슥한 곳에 숨어서 동영상이라도 찍는 거 아닌가 싶은데"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군...."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에도 모두의 기억은 조금씩 마모되어가지만 그 누구도 깨닫지 못한다.

당연한 이치다.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을 무슨 수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각한단 말인가?

어둠이 드리운 이상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있었는지 알 길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오르카는 거대한 손아귀에 사로잡혔다. 빠져나갈 시점은 진작에 지났다.

43

침대에 누워 멍하니 익숙한 천장을 바라본다.

옆구리에는 메이가 얼굴을 파묻고 있다.

얼마나 탐닉했는지 모를 몸은 정액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직이 심해져 안는 맛이 줄었고, 

살아있을 때 이렇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짜증으로 돌변해 거칠게 집어던졌다.

콘스탄챠든 바닐라든 알아서 정리해주겠지.


"아무 생각도 안 나...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넌 어때, 메이?"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 높이 들어 올린다.

내리쬐는 조명이 빚어낸 음영 속에서 딱딱한 표정이 한층 굳은 것 같다.


"몸도 굳더니 얼굴도 굳는 거니...됐어"


손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친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머리가 바닥을 구른다.

뭘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를 쓰러뜨린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을 때는 온 정신과 열정을 거기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자신의 전부를 걸어서라도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있었고, 그것만 해내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누굴 쓰러뜨렸지?

뭐 상관없다, 이제 와선 달라질 것도 없고.

그 뒤로 예상치 못했던 배신과 결단이 오가며 결국 사태는 그럭저럭 수습됐다.

가슴에 깊숙이 박힌 파편과, 다급히 봉쇄한 위험천만한 D구역을 선물로 남기고.

돌아가야 하는데 내키지가 않는다.

이 파편을 일분일초라도 빨리 제거해야 한숨 놓을 텐데, 지금 상태로도 딱히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통증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고.

쇼거스도 봉쇄구역 안에서 불어나는 건 한계가 있을 테니, 아무튼 괜찮지 않을까?

지금 이게 현실도피인지 목표를 달성한 후의 번아웃인지 모르겠다.

그저 숨이 붙어있어 살아있고, 멍하니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

유능한 지휘관들이 있지 않은가. 사령관인 자신이 농땡이를 좀 부린다 해도 알아서 잘하겠지.


'알바트로스....'


특히나 유능하고 신뢰를 한 몸에 걸었던 지휘관이 문득 떠오른다.

사사건건 되지도 않는 시비와 충돌로 고장을 의심하며 결국 회의에서 배제하는 극단적인 결정까지 내렸는데,

이제 와선 그 모든 게 닥터의 이간질이었다니.

바로잡아야 한다.

일그러진 관계를 올바로 돌리고 그간 행했던 잘못을 사과하고자 하는 결단이 사그라지기 직전의 의욕에 불을 지핀다.

알바트로스가 이를 받아줄지는 미지수지만, 부디 받아주기를.

기대와 약간의 두려움을 품고 호출신호를 보내자, 얼마 안 있어 문이 열리며 검은 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렀나, 사령관"


"응. 오래간만에 보는 것 같네, 알바트로스. 이렇게 단둘이 마주하니 한층 반가운걸"


살갑게 인사를 건넨다.


"용건은?"


냉정히 말을 자르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자세도 그저 흡족하기만 하다.

여느 지휘관이 이런 식으로 반응했다면 분명 지난 일을 마음에 두고 앙심을 품었다 여기겠지만, AGS는 그럴 일이 없으니까.

감정 모듈이 존재한다고는 하나 논리와 냉철한 판단을 중시하는 명석함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존재가 으레 의식하기 마련인 거추장스러운 형식, 혹은 예의범절이라 불리는 것을 과감히 생략하곤 했다.

그 과감함과 진정 핵심적인 것만 추리는 통찰력이 어찌나 그리웠던지.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다른 이 백전노장은 갈피를 못 잡고 헤매이는 사령관에게 또렷한 이정표가 되어줄 터였다.


"지난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어"


그래도 사령관은 인간인지라, 그 거추장스러운 형식을 취했다.

알바트로스는 이를 무가치하다 여길지 몰라도 이를 통해 사령관 본인이 납득하고 만족할 수 있으니까.

상대에게 전하는 사과지만 동시에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어리석은 일련의 절차 뒤에 숨어있는 의도마저도 간파하고 받아주겠지. 그런 친구니까.


"얄팍한 선동에 휘둘려 누구보다 충성스럽고 가치를 빛내는 너를 수상히 여기며 잠시나마 멀리했어.

실수를 바로잡고자 하니 받아줬으면 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효율적인 인선은 언제나 환영이다"


상대의 감정은 고려하지 않고 보다 나은 결과만을 도출하려는 무심한 대답. 이 반응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그래서 말인데, AGS를 기존보다 적극적으로 투입하려 해. 

닥터의 연구실이 있던 구역 일대를 봉쇄하긴 했지만,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적성 개체 때문에 큰 문제거든.

아군의 모습으로 위장하거나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커서 

바이오로이드보다는 이에 별 영향을 받지 않을 AGS가 적격이야. 전투력 측면에서 더 뛰어나기도 하고.

그...네가 내부 순찰에 전념하는 동안 얻은 많은 정보를 토대로 내린 결론이야"


■■를 추적해 사살하고 그 뒤 일어난 당황스러운 일련의 사건, 끝내 닥터로부터 들은 진상을 낱낱이 말하기엔

이 많은 일이 있을 동안 마냥 배척해뒀다고 인정하는 모양새가 되는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절한다"


"뭐?"


예상 밖의 대답이 들려온다.


"쇼거스라 지칭하는 해당 적성 개체는 아직도 정보가 부족하다. 섣부른 접근은 지양함이 옳다"


"정보라면 제공해줄게. 알아낸 게 제법 많거든. 별의 아이의 수족인 모양인데...."


"그렇다면 더욱 멀리해야 한다"


주저없이 말을 끊는 태도는 단호했다.


"사령관으로부터 검출되던 FAN 전파의 세기가 훨씬 강해졌다. 일부 몇몇뿐 아니라 오르카의 대부분 바이오로이드에게서 검출되고 있다.

쇼거스의 성분을 토대로 한 혈청을 투여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고, 조우 및 전투도 원인일 수 있다.

당장 대처가 요구되는 긴급상황이다"


또 그 말이다.

당시엔 알바트로스가 이상을 보인다 여기고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그 전제가 모두 무너진 지금 함부로 흘릴 수 없겠지.

정말로 FAN 전파라면 오르카의 탑승자가 걸어 다니는 휩노스 전이체라는 소리와 진배없다.

멸망 전의 세계라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재앙이겠지.

다행히 사령관과 바이오로이드 모두 구조적으로 이에 대한 보완을 갖춘 상태이기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AGS는 말할 것도 없고. 신중한 건 좋지만 너무 호들갑인 건 아닐까.


"걱정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휩노스가 우리를 파고들진 못해. 잘 알잖아?

오르카는 정비 중이고 해당 작업이 완료되는 대로 오세아니아 거점으로 귀환할 거야. 그곳에서 대대적인 점검과 치료를 받을 거고.

봐봐, 가슴에 이렇게 파편이 박혀 수술해야 하는 상황이야. 그러니 조금이라도 신속히 돌아갈 수 있도록 내부 단속에 힘을 쓸 필요가 있어.

알바트로스 네가 아니면 누구에게 이 임무를 맡기겠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3m가 넘는 거체가 달려들었다.


"으왓!"


"진정해라, 사령관"


상의를 걷어 가슴을 보여주던 사령관의 바로 앞까지 몸을 옮긴 알바트로스가 유심히 무언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지금 FAN 전파는 크게 두 유형으로 방출되고 있다. 사령관의 전신에서 고루 방출되는 1형, 가슴의 파편에서 집중적으로 방출되는 2형.

1형의 단위시간 방출량이 지난 측정값의 9배를 뛰어넘었고 2형은 이를 상회한다"


"어쨌든 곤란하다는 말이지? 그러니 저마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


"우선순위의 문제다"


푸른 안광이 순간 예리해지더니 지시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역으로 제안이 튀어나왔다.


"사령관을 보좌하는 지휘관으로서 말한다. 당장 오르카를 탈출해 최대한 신속히 가슴의 파편을 적출해야 한다"


"뭐? 그럼 오르카는 어떻게 하고? 사령관인 나보고 배를 버리라는 거야?"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헛웃음이 나온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령관이다. 병력과 장비는 얼마든지 다시 편성할 수 있다"


"농담이지? 급한 건 알아, 내 몸이니까. 그러니까 정비를 마치자마자 방향을 돌리겠다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소중한 동료들을 심해에 냅두고 나 혼자 뭍으로 향하라고?"


"내가 함께하겠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일방적인 태도에 인내심이 슬슬 사라져간다.


"알바트로스, 지난 일은 미안해. 내 오판이었고 실수였어.

하지만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무리한 주장을 펼치면 어떻게 받아들이겠어?

선장이 배를 버리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모두 다 함께 살아야지 그렇게 과민반응할 필요가 있어?"


"경우에 따라 모두를 포기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이제 바닥이다.

책상을 향해 주먹을 내리친다. 악취미라고밖에 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머리가 살짝 흔들린다. 대체 누가 저런 걸 올려놓은 걸까?


"알바트로스, 그건 아니지. 모든 일은 경중이 있는 거야.

지금 내가 시간을 허투루 낭비할 상황은 아니지. 그래서 이러는 거잖아?

네 말대로라면 바이오로이드들도 FAN 전파를 방출하는 이상이 있는데, 이건 외면하고 나만 도망치라고?

아, 혼자는 아니네. 너도 같이 간다고 했지?

...좀 그렇지 않아?"


짜증과 분노, 실망이 버무려져 쏟아진다. 

일부러 이러는 걸까? 감정 모듈이 생각 이상으로 뛰어나 질투와 원한마저 품은 걸까?


"지휘체계의 상하구조에 따라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를 경시하면 안 된다"


"됐어. 싫으면 싫다고 해. AGS 투입은...아니, 말을 말자"


기껏 문제를 해결하나 싶으면 또 다른 문제가 튀어나온다.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와서야 명령으로 강요한다 한들 제대로 처리할 턱이 없겠지. 손뼉도 마주 봐야 치는 마당에.


"일부 AGS에게는 오르카 내 방비를 위해 기존처럼 순찰임무를 배정하겠다.

하지만 직면한 위협으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두고 전력을 온존하는 편이 향후 전략적 포석을 위해 바람직하다 판단된다.

관리 동선은 의도적으로 문제의 구역 일대를 회피할 것이며, 가능하다면 남은 AGS를 포함한 탈출대를 꾸려 당장 오세아니아...."


"무슨 헛소리야? 아까는 나보고 오르카를 버리고 홀로 도망가라더니, 이젠 AGS마저 빼돌리고 바이오로이드만 남겨두자고?

따로 의도가 있는 거 아니야? 대체 왜 그래?"


억지주장이 점점 윤곽을 드러내는 듯하다.

이건 필시 바이오로이드를 배척하려는 음험한 수작이다.


"현 사령관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 이럴 때 이끌어달라 하지 않았는가?"


"또 그 소리...! 그건 잊어버리지도 않고 잘도 써먹네?"


기가 찬다.

무기력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잘못된 것을 하나씩 바로잡으려 했더니만 첫단추부터 이 꼴이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됐어, 가봐"


손을 휘저으며 침대로 몸을 거칠게 던진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검은 동체는 말없이 물러가는 듯하다 그대로 우뚝 섰다.


"...뭐 해? 가보라니까"


"성립될 수 없는 수치의 이상 파장 검출. 사령관, 주머니 안에 숨긴 것을 드러내라"


방향을 돌리며 재차 달려드려는 모습이 지긋지긋하다. 또 뭘 문제 삼으려고.


"이젠 진짜 질린다...자, 돌멩이뿐이야. 됐어?"


꺼내는 순간 앗차 하는 충격이 밀려온다.

트리아이나가 해저유적에서 발견해 기념품으로 가져온 돌.

닥터와 사령관에게 선물로 하나씩 주고, 모든 문제의 시작이 된 그 돌.

이것만 없었다면 닥터가 미치지도 않았을 거고, 오르카를 덮친 재앙은 시작조차 없었겠지.

하나는 연구실에 방치되어 있다.

끝없이 쇼거스를 불러내는 문제 때문에 파괴하고자 했지만 총알도 튕겨져나갔고, 돌아온 건 그저 가슴에 박힌 작은 파편뿐.

다급히 격벽을 쳐 해당 구역을 봉쇄했지만 그 안이 어떤 지옥도가 됐을진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기에 경계를 위해 정신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AGS를 기용하려 한 건데, 담당 지휘관이 그걸 뻗대며 막고 있으니.

이 돌은 위험하다.

소유주를 포함해 주변의 이들을 망가뜨린다.

영혼을 지닌 자는, 영혼의 그릇을 모방한 자들은 이를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그렇기에 기울이는 각고의 노력을 근시안적인 질투로 외면하려 해?

사령관은 알바트로스가 괘씸해서 견딜 수 없었다.


"해당 기물은 매우 위험하다. 다른 누구에게도 노출해선 안된다. 사령관, 내게 양도하도록. 책임지고 처리하겠다"


"하, 웃기셔. 뭘 믿고? 다른 누구에게도 노출해선 안된다며? 그럼 알바트로스 너도 마찬가지잖아. 이건 사령관인 내가 보관하는 게 마땅해"


"현 사령관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


"그 소리는 됐어!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기계처럼 똑같은 짓만 반복할 거면 얌전히 사라져! 사령관 말이 말 같지 않아?"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더이상 할 말이 없는지, 알바트로스는 진부한 말을 남기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44

"주인님은 좀 괜찮아지셨니?"


"전혀요,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세요"


라비아타의 걱정어린 물음에 콘스탄챠가 깊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날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령관의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에 빠지기도 했지만,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각별히 배려해야 한다는 진단 결과를 버팀목 삼아 그저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주길 바라며 지내왔다.

그런 돌출행동을 할 정도로 사령관의 심신이 피폐한 것일 테니, 

휴식과 안정을 충분히 취한다면 다시 예전의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돌아오리라 믿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 때마다 펼쳐지는 광경을 부디 감당할 수 있길 소망했고

그 기대가 조금씩 보답 받는가 싶다가 한층 절망스러운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에 절규하며 몸을 떨었다.

달콤한 간식이라도 드시면 기분이 좀 좋아질까 싶어 다가갔다가

레모네이드의 머리가 날아오며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흉한 것을 당장 어디로 치워버리라고 할 때는 기절할 뻔했다.

사령관의 정체를 의심한 라비아타가 칼을 들이댔을 때도 주저 않고 맞서 총구를 향했던 그 충성심은 여전히 굳건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광기 앞에 뿌리부터 조금씩 균열이 가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인가요?"


"주인님께서 갈아입으실 옷을 가져왔어요. 들어가도 되겠죠?"


"아직 옷을 갈아입으실 때는 아닌 것 같은데요. 따로 속셈이 있는 건 아닌가요? 그 옷, 이리 줘보세요"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리리스가 의심의 눈초리를 번뜩이며 콘스탄챠가 가져온 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머! 왜 이러시는 거에요?"


"당당하다면 피할 이유가 없을 텐데, 역시 뭘 숨기고 있는 거죠? 주인님을 위협하는 건 그 무엇이든 용납할 수 없어요"


예상치 못한 공격적인 반응에 놀란 콘스탄챠가 옷가지를 품에 안자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비아냥을 흘리며 거친 손길이 달려든다.


"꺄악, 그러다 찢어져요...! 알았어요, 알았으니 좀 차분히 살펴보세요"


기세에 못 이겨 준비한 옷을 내주자, 흡족함을 숨기지 못하는 리리스가 꼼꼼하게 이음매를 살펴보더니 

이게 아니라는 듯한 의아한 표정을 띄우며 의심의 대상을 마지못해 품으로 돌려줬다.


"이상하다...대체 왜...."


"이제 들어가도 되겠죠?"


"...네, 방금은 죄송해요. 경호에 집중한 나머지 신경이 조금 예민해졌나 봐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불현듯 정신이 들어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달은 듯한 리리스가 쭈뼛거리며 한 사과를 부드럽게 받으며 

문 너머에 있을 사령관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부디 이번엔 상태가 좀 나아지셨기를.


"주인님, 콘스탄챠에요. 갈아입으실 옷을 가져왔어요"


"...콘스탄챠?"


처음 듣는 단어라는 듯한 어색한 반응이 맞이한다. 괜찮으신 걸까?


"배는 고프지 않으신가요? 며칠째 방에서 나오지 않고 계신데, 가볍게 산책이라도 하시는 게 건강에...."


걱정에 안부를 묻다가도 혹여 심기를 자극할까 침대 옆 탁자에 조심스럽게 옷가지를 올려두고 가려던 찰나, 

먹이를 낚아채는 맹수처럼 매서운 몸놀림으로 사령관이 덮쳐왔다.


"꺅!"


순식간에 채여 침대 위로 쓰러진 콘스탄챠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대로 위에서 몸을 겹치며 거칠게 목덜미를 향해 얼굴을 파묻는 움직임은 제대로 된 저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주, 주인님?"


"미안해, 콘스탄챠...항상 나를 위해 헌신하는데 걱정만 끼쳐서"


전에 듣곤 했던 그 따스한 목소리다.

그동안의 우려와 설움을 한달음에 녹아내리게 하는 목소리.


"괜찮아요, 이제 좀 기분이 나아지셨나요? 모두가 주인님께서 건강해지시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어요"


아이를 안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포근하게 머리를 감싼다.

언제나 변치 않고 헌신하는 충성스러운 메이드의 애정에 보답하듯,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친 사령관이 씨익 웃더니 그대로 입술을 포갰다.


"츄읍...."


짧지만 강렬한 입맞춤이 지나고, 콘스탄챠의 섬세한 손놀림에 몸을 맡기며 옷을 갈아입는다.

이따금 주어진 사명보다 애정이 앞서 다분히 사심에 젖은 어루만짐이 어깨와 가슴을 지났지만,

그때마다 가볍게 웃으며 그저 받아줄 뿐.

언제나와 같은 다정다감한 사령관이었다.


"가슴의 상처는 좀 괜찮으신가요?"


"응, 아무렇지도 않아. 이제는 통증도 전혀 없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짐짓 과장된 자세로 건재함을 과시하는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콘스탄챠는 조용히 뒷걸음으로 방에서 물러났다.

다시 혼자 남은 방에서 사령관은 생각에 빠졌다.

말끔히 다려진 새 옷을 입었으니 다시 침대에 눕기도 그렇고, 찌뿌둥한 몸을 좀 움직여볼까.

가볍게 양팔을 휘두르며 스트레칭을 마치고 문을 나선다.


"어머, 주인님? 방을 나와 처음으로 마주하는게 리리스라니, 리리스는 정말 행복하답니다"


복도에서 마주친 리리스가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살짝 상기된 볼이 귀엽다. 지금까지 줄곧 방 앞에서 경호를 한 걸까?

기특함에 볼 주변을 가볍게 쓰다듬어준다.


"...읏"


기대 이상의 반응이라 당황했는지, 짧은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것도 잠시, 다시 방실방실 웃는 표정으로 돌아온 리리스는 반걸음 뒤에서 사령관을 졸졸 따라오기 시작했다.


'방금 주인님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어. 나...몸이 어떻게 된 거야?'


고민을 내색하지 않고 혼자만의 영역에 가라앉히고는 눈앞의 경호대상에 집중한다.

다시는 그 어떤 실수도 하지 않으리라.

등 뒤의 근심을 알 턱 없는 사령관은 발걸음이 내키는 대로 걸으며 뻣뻣한 육체를 풀어갔다.




어느덧 코헤이 교단의 회랑에 이르자,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에 한 줄기 위안을 얻고자 모여든 바이오로이드와

이를 보듬는 천사들 앞에 놓인 흉물스러운 장대가 눈에 들어왔다.


"으...이건 뭐야?"


절로 탄식이 새어나왔다. 이 무슨 악취미란 말인가.

본디 육감적인 미녀였을 몸뚱어리는 사지와 목이 잘린 채 매달려 구타와 낙서로 물들어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생전에 상당한 미인이었을 것 같은데...우와, 이게 다 들어갔다고?"


깊숙이 박혀있는 딜도를 끄집어내려니 뽑아도 뽑아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한참을 뽑아내자 마침내 자태를 드러낸 흉기는 족히 사령관의 팔뚝에 비견될 정도의 크기와 굵기였다.

죽어서도 이런 지독한 능욕이라니, 대체 무슨 악행을 저질렀기에 시체마저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걸까.

창백하지만 여전히 분홍빛을 띠고 있는 말랑한 유두를 잠시 꼬집어본 사령관은 반갑게 맞이하는 천사들과 마주했다.


"구원자, 그 사랑스...축복받은 얼굴이 회당을 비추니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릅니다. 빛의 인도하심 덕이겠죠"


"'석양이 지고 칠흑이 깔렸다 해서 두려워하지 말라. 여명이 밝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니'"


"그냥 구원자께서 다시 오실 거라 믿고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심판자여"


사라카엘의 날카롭게 째려보는 시선이 익숙하다는 듯, 베로니카가 넉살 좋게 받아넘기며 사령관의 위아래를 훑었다.


"기력을 되찾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구원자님의 방문만으로 이곳에 모인 가련한 영혼들이 희망을 가슴에 품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 많은 이들이 심적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을 텐데 내가 미처 신경 쓰질 못했어. 그 빈자리를 훌륭하게 메꿔줬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사령관의 칭찬이 베로니카에게 향하는 것에 질투가 났는지, 아자젤이 볼을 살짝 부풀리며 손을 잡아끌었다.


"구원자의 인도하심에 따라 떠나간 이를 기리며 남은 이를 위로하는 빛의 자비를 전심으로 펼치고 있었답니다.

거친 바람이 부는 가운데 일렁거리는 촛불이 꺼지지 않고 밝게 타오르는 건 모두 구원자의 광대하신 헤아림 덕입니다"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눈을 빛내며 교단의 상징과 그 주변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보여준다.

유치한 디자인의 안대, 우그러진 충격봉, 누가 놓고 갔는지 놓여있는 초코바와 관리일지까지....

마음을 놓고 편하게 지내라고는 했지만 이 정도로 방만하길 바라진 않았는데.

여기가 쓰레기장도 아니고, 이것저것 쌓아둬도 천사들은 아무 감흥이 없는 걸까? 심지어 교단의 상징 곁에서?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중요한 관리일지를 놓고 간 건 어디의 누구일까. 

이렇게 느슨하니 요즘 들어 기록이 안 맞고 재고관리에도 혼선이 빚어지는 거겠지.

사령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구원자?"


기대와 다른 반응에 아자젤의 목소리가 당황으로 물든다.


"아자젤, 내가 구원자라면 내 말이 곧 법이고 진리인 거지?"


"빛의 뜻 아래 진정으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것들 다 치워줘. 저 장대에 걸린 것도 그렇고"


천사들뿐 아니라 모여든 바이오로이드들도 웅성거리며 술렁이기 시작한다.

장엄한 연설과 추모를 위한 세심한 안배는 어디로 가고 이제 와서 손바닥 뒤집듯 무른단 말인가?


"...아"


혼란에 머뭇거리던 아자젤이 무언가 깨달은 듯 양손을 가슴에 모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 또 한 걸음 빛의 진리에 다가갑니다. 옥좌 옆에 앉은 자이자 계몽을 위한 전령임에도 그 큰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다니,

이를 바로잡아주시는 구원자가 있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지시를 남기고 멀어지는 사령관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나머지 두 천사가 치품천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빛의 뜻은 전적으로 옳지만 때로는 그 광휘에 압도당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지. 뭔가 본 건가?"


"구원자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형식과 실체에 연연하면 정작 그에 사로잡혀 핵심을 놓칠 수 있다.

기존에 했던 말을 의식해 빛의 대리인인 나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주저하는지 시험해보겠다'"


"과연, 일부러 시험에 들게 한 것인가...그걸 훌륭하게 돌파했군"


"하마터면 큰 죄를 범할 뻔 했어요. 

빛의 하수인을 자처하면서 자칫 우상숭배에 빠져 곁의 진리를 외면할 뻔했으니...구원자께 어찌 감사드려야 할지"


안도감에 젖은 목소리에선 평안이 묻어나왔다.


"그렇게 됐으니, 당장 이것들을 치워버리도록 하죠. 한데 모아 불태우면 될까요?"


"저 장대는 내가 맡도록 하지. 이단 심문관이여, 거들어주겠나?"


"...알겠습니다"


감탄한 두 천사와 달리 여전히 미심쩍은 시선으로 사령관이 사라져간 복도를 바라보던 베로니카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자젤님, 뭐하고 계십니까?"


일련의 정리가 끝난 후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던 아자젤을 찾던 베로니카가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성스러운 자태의 치품천사는 오간 데 없고 늘어진 티셔츠를 걸친 채 감자칩을 먹고 있는 잉여가 한 명 침대에 엎드려있다.


"...또 멸망 전의 만화를 검색해 보시는 겁니까?"


"우물우물...아니에요, 과거에 존재했다는 여러 종교의 경전과 교리를 살펴보고 있었다구요"


자신을 얼마나 폐급으로 보냐며 항의하는 듯한 억울한 시선을 가볍게 흘려넘긴다. 겉모습만 보면 폐급 맞구만, 뭘.


"방금 발언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사라카엘이 들이닥쳤다.


"꺅...이번엔 또 뭔가요?!"


"교단의 길잡이가 되어야 할 치품천사가 감히 이단의 경전과 교리에 손을 대다니! 이 무슨 불경인가!

그동안 온갖 죄악을 참고 또 참아왔지만 이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얌전히 타락한 그 목을 대라!"


파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에서 뿜여져 나오는 전기를 창의 형태로 늘이려는 것을 베로니카가 온몸을 던져 저지한다.

여느 때와 같은 투닥거림이면 좋겠지만, 이번엔 기세가 심상치 않다.


"아자젤님, 어쩌자고 그런 망발을! 당장 변명이라도 하세요! 얼마 못 버팁니다!"


"어, 아, 이게 다 빛의 대리인인 구원자의 뜻이에요!"


"...뭐?"


거짓말처럼 스파크가 사라졌다. 그만큼 어처구니가 없었다는 거겠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어쭙잖은 말을 입에 올리기만 해봐라. 치품천사는 오늘 빛의 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아니지, 타락한 날개가 닿을 곳은 불타는 지옥뿐이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기세를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이제 와서 부정하기엔 허공에 띄워놓은 여러 개의 패널 때문에 그러지도 못한다.

척 봐도 온갖 종교를 망라하는 화면이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어찌 구원자를 거론하면서 기만을 일삼겠습니까? 

형식과 실체에 연연하지 않고 신자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본질을 추구하고자 열린 자세로 과거를 돌아보는 거에요.

종교란 결국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궁극적인 깨달음, 그리고 그 깨닫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지 않나요?

그 가운데 정답처럼 보이지만 잘못된 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렇게 몸과 마음을 바쳤던 코헤이처럼 말이에요"


불편한 진실이 언급되자 사라카엘의 몸이 움찔한다.


"한때 유일한 기준이었던 교단의 율법은 결국 욕망과 추악함으로 점철된 거짓이었습니다. 

구원자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거기에 얽매여 있었겠죠. 

좁은 시야로는 모든 걸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과거를 반면교사 삼아 나아갈 길을 재고하는 것뿐이에요"


"......."


사라카엘은 아무 말도 없다.

하지만 대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없다. 아까까지 치솟던 살기가 누그러졌으니.


"그래...편협함은 날개를 좀먹는 죄악이지"


"이해해주시다니 다행이에요. 그럼 전 계속 하던 일을...."


"하지만 그 방만한 작태는 무엇인가!"


다시 감자칩 봉지를 향해 내뻗던 아자젤의 손등을 탁 치고 티셔츠를 말아 올린다.


"빛의 이정표를 새로 그려나가는 과정은 신성해야 하거늘, 과자나 씹으면서 만화 보듯 뒹굴고 있다니!

경건한 의복을 갖추지 않고 이런 세속과 나태에 물든 누더기를 걸친 시점에서 규탄을 피할 수는 없다!

보나 마나 음욕을 자극하는 속옷까지 입고 있을게 분명...음, 그건 괜찮군"


"히이잉...."


간절히 도움의 눈길을 보내는 아자젤을 향해 베로니카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티셔츠만 걸치고 뒹굴지 말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고개를 내저으며 여러 패널 중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해석할 수 없는 기묘한 문자. 보기만 해도 속이 메스꺼워진다.

둥근 돌이 그려진 저 삽화는 대체 뭘까.

45

"너무 지체되는 듯한데...."


마리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정비가 끝나는 대로 오르카의 방향을 돌려 오세아니아로 귀환하기로 결정을 내린 지 며칠이 지났다.

지금쯤 이미 도착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어느 정도 거리를 좁혔을 거라 생각한 시점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위치는 한결같다.

두꺼운 창문 밖을 바라보면 어두컴컴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다뿐.

시계가 없다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알지 못했을 터다.

실제로 몇몇 병사들의 생활패턴이 흐트러지는 듯해 기강을 잡고자 한층 강도 높은 훈련을 이끌고 온 직후라 온몸은 땀범벅이었다.

마음 같아선 상쾌하게 샤워라도 하고 싶지만, 정기적으로 가지는 지휘관급의 회의가 우선이기에 자리에 참석했더니 두 명이 오지 않았다.

칸과 아스널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최소한의 책임감도 내버린 거겠지. 그냥 끝내고 좀 씻으러 가는 게 어때? 땀 냄새 나는데"


도도하게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대는 레오나의 지적에 얼굴을 붉힌다. 

평소에도 다소 까칠한 성격이긴 했지만 요즘 들어 레오나는 한층 표독스럽다.


"크흠...5분만 더 기다려보고 여전히 안 오면 파하도록 하지"


"무의미한 자리에 발목 잡혀 주인님의 곁을 비우고 싶진 않은데요"


"정보를 주고받고 앞으로의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훌륭한 경호의 일환이야. 조금만 기다려보자"


다급함을 숨기지 못하는 리리스를 라비아타가 달랬다.


"늦어서 미안하다"


다급히 칸이 달려와 의자에 앉았다. 뒤이어 나타난 아스널도 숨을 고르며 자리를 채웠다.


"칸 대장이 늦다니 별일이 다 있군. 무슨 다급한 일이라도 있었나?"


신속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칸은 약속 시각에 늦는 일이 없다시피 했다. 이런 경우는 언짢기보다 궁금증이 더 커진다.


"...잊고 있었다"


"하, 기가 막혀서 진짜. 명색이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면서 중요한 보고 회의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고?

사막의 모래냄새를 맡을 수 없으니 기강이 해이해지나 봐. 대장이 그 모양이니 부대원도 그런 거 아니겠어?"


"말이 좀 심하군그래. 실수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나"


레오나의 비아냥이 선을 넘었다 생각했는지 아스널이 중재를 시도했다.


"아, 누군가 했더니 빵빵 쏴대면 다 되는 줄 아는 캐노니어의 잘난 대장님이시네.

그러니 지난 오세아니아 전투 때 다짜고짜 철충 무리에 포격을 가해 근처에 있던 우리 발할라를 위험에 빠뜨릴 뻔했지.

아스널 대장님은 무슨 거창한 이유로 회의에 늦으셨을까?"


"...나도 깜빡 잊었지 뭔가"


"참나"


예상 밖의 무안한 대답에 점점 감정적으로 치닫던 레오나가 제풀에 맥이 풀렸다.

다들 썩 유쾌한 기분이 아닌 듯하니, 이번 회의는 간략히 끝내야겠다.


"오르카 호의 정비가 생각보다 까다로운 모양이다. 포츈이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언제 출발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닥터...는 그리됐다 하고, 다른 도움이 될 인재들도 정황상 음모에 휘말며 희생됐거나 언제부터인가 감감무소식이니.

지금의 오르카는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병력의 편재를 비롯해 구성원의 동향파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이에 한층 신경 써주길 바란다"


분명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최후의 보루이자 지친 몸을 이끌고 쉴 수 있는 장소는 누구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하나둘 사라지는 정체불명의 미궁과 다를 게 없어졌고,

더 큰 문제는 이게 대단히 심각한 상황임에도 제대로 자각하는 이가 없다는 점이었다.

상식과 인지의 뒤틀림은 은밀히 다가와 자연스럽게 모두의 사이로 파고들어 영혼부터 좀먹어가고 있었다.


"분명히 이 잠수함 내에 있을 텐데 어디로들 숨은 건지...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의 연속으로 충격을 받아 조용한 방에서 쉬고 있기라도 한 걸까?"


"오르카의 방이야 워낙 많고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장소도 있으니...뒤지다보면 브라우니들이 튀어나오는 건 아닌가?"


라비아타의 걱정을 덜어주려는지 아스널이 키득거리며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스틸라인의 군기를 너무 가볍게 보지 말아줬으면 하는군. 솔직히 몇몇은 구석에서 스팸이라도 까먹고 있지 않을까 싶네만...."


"캐노니어는 별문제 없나?"


칸의 물음에 호탕한 반응이 튀어나온다.


"아무렴, 우리야 부대의 귀염둥이인 에밀리를 중심으로 단단히 뭉쳐있지. 그 아이만 보고 있으면 피로와 부담이 눈 녹듯 사라지고말고"


"부대의 분위기를 이끄는 활력소는 언제나 소중한 법이지"


"호드라면 그런 점에서 어느 부대에게도 밀리지 않을 텐데. 다들 개성이 강하잖나"


"탈론페더가 줄곧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촬영 스팟이라도 찾느라 돌아다니는 것이라면 차라리 좋으련만"


"나중에 찾게 되면 관련 이야기를 좀 들을 수 있을까요? 그 촬영 스팟에 흥미가 좀 있는데...."


갑자기 활력이 샘솟은 리리스의 난입 덕에 가라앉았던 공기가 살짝 들떴다.

모임의 마무리는 기분 좋게 해야겠지, 적절한 지원에 마리가 마음속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럼 저마다 주어진 자리에서 역할에 충실하길 바라며, 이쯤에서 해산하도록 하지"




"으응...."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요즘 들어 자주 피곤해지고, 자도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자매들도 마찬가지인지 매사 표정이 찌푸려져 있고 투닥거림도 빈번하다.

에밀리가 모습을 보이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로 반겨주며 화기애애하지만, 

억지로 짜증을 누르고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다투지 말라고 보이는 곳마다 찾아가며 화해시키고 싶지만 그러다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불안하다.

에밀리 때문일까? 뭘 잘못한 걸까?

걱정에 우울해져 홀로 방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 보면 제녹스가 웅웅거리며 녹색 빛을 내뿜는다.

지난번에 만난 정령이 빠져나와 풀죽지 말라고 날개를 나풀거리며 춤추는 모습이 위로로 다가온다.

이 귀여운 친구를 자매들에게 소개해주면 다시 예전의 부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작전 때 큰맘 먹고 대장을 비롯한 모두에게 말해봤지만 하나같이 웃기만 하며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으로 끝났다.

믿지 않는 걸까? 이건 에밀리에게만 보이는 걸까?

곁에 있기만 해도 상쾌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데, 이 축복을 공유할 방법은 없는 걸까.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에밀리의 손등에 앉은 정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을 휘두른다.

무기질적인 방이 지워지며 꽃이 만발한 동산이 다시금 펼쳐진다.


"아...다시 왔네...."


낙원으로 돌아왔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입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아, 저기 있다. 거대한 떡갈나무에 아기자기한 문이 달려있다.

제녹스의 정령이 손뼉을 짝짝 친다. 에밀리도 덩달아 손뼉을 친다.

공중을 한 바퀴 멋들어지게 돈 정령이 어느새 옆에 놓인 커다란 손가방을 낑낑거리며 들고자 시도한다.

어림도 없다.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큰 기묘한 생김새의 가방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내가 들어볼게"


에밀리가 크게 숨을 들이쉬고 양손에 힘을 준다.

생각보다 너무나도 시시하게 가방이 가볍게 들려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감탄한 정령은 따라오라는 듯 떡갈나무에 난 문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같이 가"


문을 넘자 놀라운 광경이 기다린다. 안이 밖보다 넓다.

아홉 빛깔 무지개는 재미있는 형태로 하늘을 수놓고 크고 작은 나무는 온갖 과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꽃 무더기 사이로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장난치는 작은 동물들도 보인다.


"와...귀여워"


서로를 핥아주던 사슴뿔 달린 토끼와 꼬리 두 개 달린 다람쥐가 에밀리의 혼잣말을 듣고 고개를 돌린다.

빼꼼 바라보는가 싶더니 조금씩 다가오는 광경에 가슴이 콩닥거린다.


"■■■, ■ ■■? ■■■ ■ ■■?"


기묘한 울음소리.

정령이 가방을 든 에밀리의 손을 쿡쿡 찌른다.

고개를 내려다보니 가방의 단추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이걸 누르라는 걸까?


"꾹"


호기심에 눌러보니 샤방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방이 열리며 무지개가 뿜어져 나온다.

영롱한 빛줄기에 맞은 토끼와 다람쥐는 즐겁다는 듯 빙글빙글 돌다 온갖 과자와 사탕을 쏟고는 사라졌다.


"마법 가방인 거야...? 재미있어"


땅에 떨어진 길쭉한 사탕을 하나 집어 먹어본다.

새콤달콤하면서 향긋함이 솔솔 피어오르니 천국이 있다면 여기일까.

저 멀리 몇 마리의 동물이 더 보인다. 같이 놀자고 달려오는 게 분명하다.

다시 한 번 가방의 단추를 누르니 이번에는 머리만 한 크기의 빵과 하얀 별사탕이 마구마구 쏟아진다.

오븐에서 금방 꺼낸 듯한 모락모락한 온기.

에밀리는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하음...정말 맛있어"


단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맛이다.

소완도, 아우로라도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지만 이 빵은 그보다 훨씬 대단하다. 자매들도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정령이 옷을 잡아당기며 저 앞을 가리켰다.


"왜 그래...? 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거야?"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서 걱정하지 말고 믿으라는 확신이 새어나온다.

의욕이 샘솟은 에밀리는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신나게 달려나갔다.




무지개를 마음껏 쏘아대며 동물과의 숨바꼭질을, 때로는 술래잡기를 했다.

지나온 길은 과자의 행렬이 줄지어있다.

앙증맞은 동물들은 에밀리를 보고는 잡아보라는 듯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도망치기도 하고, 꽃 더미 사이에 숨어있다 튀어나와 놀래키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무지개 안에서 즐거운 춤을 추고는 보상으로 먹을거리를 줬다.

볼을 한가득 우물거리며 다종다양한 맛을 봤지만, 입을 즐겁게 하는 이 행복을 이제 혼자만이 아닌 소중한 이들과 나누고 싶다.

언제나 에밀리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자매들, 시원시원하고 당당한 대장, 다가가면 가슴이 콩닥거리는 사령관까지.

갑자기 켕켕거리는 소리가 들려 향한 시선 끝에 덩치 큰 여우가 두 발로 서있다.

맞춰보라는 듯 양팔을 벌려 떡하니 움직이지 않는다.


"너도 같이 놀자"


단추를 건드리려는 순간 여우가 잽싸게 달려든다.

상상 이상의 기민함에 당황하는 사이 무지개가 바로 앞까지 들이닥친 여우를 향해 뿜어져 나온다.

이번에는 살짝 빗나갔는지 여우는 반쪽이 되어 저 멀리 나동그라지고 약간의 과자만 떨어졌다.


"아쉽네...한 번 더 쏘면 될까"


잘록한 과자를 집어 먹으며 다시금 단추를 향해 손을 뻗는다.


"에밀리, 들리나? 정신 차려라...!"


아스널 대장의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번쩍인다.

알록달록 동산은 오간 데 없고 오르카의 복도다.

저 앞에는 좌반신이 날아간 아스널이 피를 흘리며 간신히 서있다.


"아스널 대장...? 왜 그러고 있어...?"


입 안에 갑자기 피 맛이 확 돈다.

다급히 뱉어보니 과자로 생각해 먹고 있던 건 바닥에 뒹굴고 있는 아스널의 손가락 중 하나였다.


"우욱, 우웩...!"


균형을 잃고 몸이 휘청거린다.

쓰러질 뻔한 몸을 간신히 옆에 놓인 제녹스에 기댔지만, 그 덕에 걸어온 길이 두 눈에 여과 없이 들어온다.


"에밀리, 보면 안 된다!"


다급한 외침은 이미 늦었다.

피 칠갑이 된 복도는 사방에 온갖 육편과 내장이 뒹굴며 지옥도를 그리고 있었다.

커다랗고 둥그런 빵을 몇 입 먹다 던졌을 자리엔 레이븐의 머리가 반쯤 파먹힌 채 텅 빈 시선을 보냈다.


"아...아아...아...."


말이 나오지 않는다.

동산에서 귀여운 동물을 쫓으며 무지개를 쏴댔던 기억에 피투성이 절규가 겹치기 시작한다.

잘 잤는지, 기분은 좀 어떠냐며 다가왔던 비스트 헌터.

상황을 알리기 위해 다급히 달려가던 파니.

그토록 달콤했던 자매의 살점들.

녹색 날개를 팔락이는 정령은 정말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며 부풀어오르더니 

점액질의 덩어리로 변해 에밀리와 제녹스를 집어삼켰다.


"그렇게 둘 수는...!"


절뚝거리며 아스널이 몸을 던진다.

아직 남아있는 오른팔로 저지해보려 하지만, 제녹스에서 섬뜩한 녹색 섬광이 터져 나오는 게 더 빨랐다.


"-지잉"


소름끼치는 빛과 소리만이 아직 살아있던 둘이 느낀 마지막 감각이었다.

46

불현듯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깬다.

땀으로 축축해진 침대보가 끔찍한 악몽의 편린을 보여준다.


"주인님, 괜찮으신가요?"


리리스가 달려와 안색을 살핀다.

괜찮다며 손을 내젓고 바싹 말라버린 입을 축이고자 탁자의 컵을 집어든다.


"응?"


잘 봉해진 편지봉투가 하나 놓여있다.


"리리스, 혹시 내가 잠든 사이에 누가 들어왔었어?"


"트리아이나 양이 잠시 용무가 있다며 들어갔었어요. 금방 나오긴 했는데...."


자신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불안요소가 있을까 눈에 띄게 초조해하는 리리스를 진정시키며 봉투를 찢는다.

편지에 적힌 떨리는 글씨체에서는 억누르려 했지만 숨길 수 없었던 혼란과 책망이 묻어나온다.


'다 내 탓이야, 사령관.

진작 알아챘어야 했어. 모든 게 내가 해저 유적에서 그 돌을 가져온 후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만화 같은 이야기지. 어떻게 생각하면 그토록 원하고 꿈꾸던 일이야.

모두로부터 잊힌 고대의 숨겨진 유적에서 발견한 미지의 유물, 그로부터 시작되는 신비하고 놀라운 사건...

포기하지 않고 모험을 하다 보면 언젠가 겪을지 모른다며 기대하곤 했어.

참 웃기지? 기대가 이루어졌지만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길 바란 건 아닌데.

사실 조금 더 일찍 깨달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 우리를 덮친 재앙은 석연치 않은 의문투성이였으니까.

모험가의 감은 하나의 길을 가리켰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외면하고 또 외면했어.

내가 모두를 괴롭게 하고 소중한 대원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었거든.

하하, 어처구니없지? 모험을 하다 보면 온갖 위기상황을 마주하고 과감한 결단력을 필요로 하게 돼.

잠깐의 머뭇거림이 돌이킬 수 없는 위기로 이어지거든.

최고의 모험가인 내가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 위기를 돌파하기는커녕 계속 미루기만 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결국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고 마음 같아선 시간을 되감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겠지.

나에게 남은 건 이 일에 책임을 지고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는 거야.

이런다고 죽은 애들이 돌아오진 않을 거야. 하지만 적어도 더 죽는 건 막을 수 있어.

이 돌은 재앙 덩어리야. 함부로 내버릴 수도 없어.

사령관이 잠든 사이 몰래 상의를 걷어봤어. 가슴의 그 파편, 닥터에게 줬던 그 돌에서 나온 거지?

사령관이야 머리가 좋으니까 나보다 빨리 원인을 파악하고 행동으로 옮겼겠지. 

응, 틀림없이 돌을 파괴하려 했을 거야.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을 거고.

저주받은 돌인 거야.

멋대로 바다 밖으로 버린다면 어떤 식으로 업보가 돌아올지 몰라.

이런 건 원래 있던 자리로 온전히 되돌려놔야만 해.

그리고 그 돌을 가져온 게 나니까, 돌려놓는 것도 나여야만 하지.

간단하지? 이러면 될 거야, 틀림없어.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전에 말했었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함께 그 유적으로 가보자고. 

그러면 안 돼. 거긴 아무도 발을 들여선 안 돼.

그러니 나만 가야 해. 나만이 감당할 수 있어. 나만이 책임져야 해.

미안해, 캡틴'


절박함에 생각나는 대로 옮겼을 내용이 가슴을 아린다.

그 밝고 꺾이지 않던 심해 모험가를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는가.

말마따나 돌을 오르카 밖으로 적당히 내던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애초에 돌을 버릴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으니까.

사령관인 자신도 그렇고, 다들 무언가에 홀린 걸까?

지금 스스로를 정상이라 할 수 있을까?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작용이 온전히 이루어지긴 하는 걸까? 왜곡되진 않았을까?

오히려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이 주체할 수 없는 충동이야말로 잘못된 게 아닐까?

어지럽다. 머리가 팽팽 돈다.

아까 원인불명의 폭발로 구역 하나가 통째로 소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을 잃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다.

나를 괴롭히는 이 현기증도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소멸하면 좋을 텐데.

하필 캐노니어의 숙소가 위치한 곳이라 걱정이 태산이다. 아스널이라면 분명 잘 대처했겠지만 아직까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

괜찮다, 시간을 보내다 보면 평소처럼 보고사항이 있다며 호쾌하게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오겠지.

그러니 기다리면 된다.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면 된다.


"주인님,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편히 누우세요"


리리스의 부축을 받아 다시 침대에 몸을 기댄다.

건조해진 입안 못지않게 마음도 말라 비틀어져 간다.




쏘우피쉬가 어둡고 찬 바닷물을 가른다.

끝없는 어둠 너머에 기다리고 있을 미지의 발견, 예상치 못한 조우는 언제나 훌륭한 자극이 되고 동기부여로 다가왔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다.

떨리는 가슴을 가득 채우는 감정은 절박함, 자책, 실낱같은 희망과 그마저도 집어삼키려는 두려움이었다.

사령관 몰래 집어온 돌이 웅웅거리며 기분 나쁜 소리를 낸다.

보기만 해도 속이 메스껍고 눈을 돌리고 싶다.

이걸 왜 발견 당시엔 매혹적이고 대단한 발견이라 여겼을까.

오르카를 삼킨 미증유의 참극은 모두 이 돌에서 시작됐음이 분명하다.

오컬트나 음모론에 너무 심취한 게 아니냐며 깔깔거리는 닥터의 모습이 떠오르지만, 

암암리에 탑승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에 의하면 그 닥터가 돌의 저주에 빠졌다고 하니 이 무슨 역설일까.


"역시 그때 돌을 넘겨주지 말았어야 했어"


뒤늦은 한탄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온다.

항상 진취적이고 역경에 굴하지 않는 트리아이나였지만, 그건 오롯이 자신만의 도전이자 개척이기 때문이었다.

위험은 홀로 짊어지고, 성취는 모두와 나눈다.

그로 인해 달성한 위업은 한층 빛나고 자신의 가치를 드높일 수 있다.

공명심이라면 공명심일 것이다.

모험은 그 자체로 의미 있지만, 화려히 귀환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청자들에게

자신의 놀랍고도 흥미로운 모험담을 들려주는 게 크나큰 낙이기에.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 다음 내용을 궁금해하며 쫑긋거리는 귀.

열정의 결실인 수집품을 내놓으면 그 눈은 한층 커졌고,

이를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난관을 극복했는지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게 그렇게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 전에 멈췄어야 했다.

돌을 사령관과 닥터에게 주지 않고 그대로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다행이야"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에 스스로가 깜짝 놀란다.

오르카의 일원을 죽이고 사방에 피를 흩뿌리는 건 본인이었겠지. 닥터가 그 짐을 대신 지고 가줘서 얼마나 잘됐는지 모른다.

잘됐다고? 이 일이?


"와악!"


눈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기둥에 화들짝 놀라 다급히 쏘우피쉬의 제동을 건다.

하마터면 거침없이 들이받아 큰 사고가 날 뻔했다.

외곽을 장식하는 문어 머리의 조각은 어설픔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표정이 일그러져있다.

대략적인 방향을 파악하기 위해 켜뒀던 어군탐지기는 언제부터인가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아내지 못한채 

검은 화면만 덩그러니 보여주고 있었다.

한순간의 방심이 치명적인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런 기초적인 실수를 할 줄이야.

딱히 신앙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목숨을 구해준 신의 자비에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뭐지, 기분 탓인가...?"


문어의 표정이 한층 뒤틀린 듯하다.

기둥이 보이는 걸 보니 저 끝에 제단이 있을 터.

돌이 놓여있던 제단, 모든 것이 시작된 제단.

기억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간다.


"......."


나아가려 한다.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제단에 돌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끝난다.

하지만 그걸로도 만약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모두를 좀먹고 있는 불온한 기류가 걷히지 않는다면?

두 번 다시 예전의 밝고 희망찬 사령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면?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의 떨림이 차츰 커지더니 버튼을 제대로 누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으...아...안돼...."


해내야 한다. 도망치고 싶다.

책임져야 한다. 무슨 수로?

내 탓이다. 그저 사고일 뿐이었다.

이것만 제자리로 돌려놓으면 다 잘 풀릴 거다. 그저 그럴듯한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이대로 사령관을 볼 낯이 없다. 나도 피해자야.

당분간 어디서 시간을 보내자. 그럼 다 해결될 거야.


"......."


멍하니 쏘우피쉬의 동체를 돌린다.

지금까지 나아갔던 방향의 반대쪽으로.

오르카로 복귀해 성대한 환영파티를 받으며 향했을 목적지로.

그저 과정이 좀 얽혔을 뿐이야, 결과는 같아.

따스한 맞이와 장엄한 모험담이 아직 기다리고 있어.




"세이렌, 뭐 해? 사령관이 언제 오나 보는 거야?"


갑판 위에 쭈그리고 앉아 넋 놓고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세이렌에게 네레이드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슬슬 돌아오실 때가 됐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네요...."


"깜짝 놀래주려는 게 아닐까? 틀림없이 참치를 어마어마하게 잡아오는 거야. 네리네리는 신선한 회를 실컷 먹을 생각에 기대돼.

DNA였나? 머리를 좋게 해주는 성분도 많으니 강한데 똑똑하기까지 한 슈퍼 네리네리네리네리가 되겠어!"


"DHA겠지"


운디네가 샐쭉하니 끼어들며 말을 바로잡았다.


"사고라도 난건 아니겠죠...?"


"부함장님은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요. 사령관님이잖아요? 어떤 문제든 휘리릭! 하고 해결하는 슈퍼맨"


세이렌의 근심을 덜어주려는 의도, 그리고 그 안에 깔린 굳건한 신뢰가 느껴져 푸훗, 하고 웃음이 나온다.


"그래요, 조만간 오시겠죠. 저 혼자 축 늘어져 있는 것도 그렇네요"


"키위 먹을래? 몇 개 받아왔어. 그 작고 귀여운 새가 이렇게 맛있기까지 하다니, 놀랍지 않아? 맛도 고기가 아니라 과일 같아"


"꺄하핫, 키위는 과일이야, 바보 네리"


어느새 날아온 테티스가 발랄하게 키위를 하나 집어들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품었던 상념이 사르륵 녹아간다.

한 명 한 명이 소중하고 함께 있으면 즐겁다. 오르카 호가 돌아오면 이 즐거움이 더욱 커지겠지.

오늘따라 사령관의 얼굴이 한층 그립다.


"응? 저거 뭐지?"


운디네가 근처의 파도를 가리킨다.

밝은 노란색의 잠수정이 떠올라 물살에 몸을 맡기고 있다.




"트리아이나가 거기서 떠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어. 오르카 호와 엇갈린 거야?"


쏘우피쉬를 함에 무사히 싣고 안에서 벌벌 떨고 있던 트리아이나의 몸에 담요를 덮어줬다.

따스한 코코아도 한 잔 타 건네니, 호호 불면서 양손으로 머그컵을 감싸 온기를 느끼는 모습이 가련하다.

지치지 않는 불굴의 상징과도 같던 의욕 덩어리 모험가가 무슨 일을 겪은 걸까.


"아, 아니...돌을...."


"키위도 먹을래? 와, 이거 예쁘다!"


품에서 꺼낸 검고 둥근 돌을 보고 네레이드가 환호성을 질렀다. 칠흑 같은 색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리저리 바라보며 문지르기도 하고, 감정사가 된 것처럼 한쪽 눈을 감고 유심히 관찰해본다.


"어디서 난 거야? 괜찮다면 네리네리가 가져도 돼?"


"......응"


고개를 끄덕이는 트리아이나의 반응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폴짝폴짝 뛰어다닌다.

다른 대원들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내뿜는 돌에 시선을 빼앗겨 

넘겨준 주인의 눈동자가 순간 녹색으로 빛났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코코아가 든 머그컵에서 따스한 김이 폴폴거리며 금단의 심연을 담은 눈을 가리운다.

47

하루에도 몇 번이나 도는 순찰이지만 돌 때마다 분위기가 달라져 간다.

사실상 위협이라 할 것은 전무하고,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려는 탈론페더를 잡거나 

창고에 스리슬쩍 잠입하려는 LRL과 알비스에게 가볍게 주의를 시키는 식의 평화롭다 못해 긴장이 풀어질 정도의 나날이었다.

가끔 다급히 뛰어가며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뽀끄루 대마왕과 그 뒤로 맹렬히 추격하는 백토의 모습은 괜찮은 볼거리였고,

비명이 들려 찾아가면 뭐가 그리 불경한지 아자젤의 옷을 벗기거나 기물을 부수려는 사라카엘의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곁에 있던 베로니카와 조용히 지켜보곤 했다.

위화감을 느끼고 혹시 모를 침입자가 몸을 숨기고 있을까 싶어 수상한 옷장 혹은 침대 밑을 수색하면 브라우니나 이프리트가 튀어나왔다.

진지함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난장판.

하지만 이는 그만큼 범죄의 걱정 없이 평화롭다는 뜻이기에 미스 세이프티의 어깨는 갈수록 가벼워졌었다.

자신이 필요 없는 세계가 진정 이상적인 세계니까. 헛걸음 좀 하고 맥이 풀리면 어떠랴.

허나 이것도 옛날이야기.

한가로이 함 내를 돌아다니며 도넛이나 씹는 경찰이 천박한 농담거리조차 되지 못할 정도로 오르카의 환경은 급변했다.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탑승자,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위협.

분명 사태의 원흉은 진작에 처치했고 유일한 불안요소도 격벽을 세워 구역째로 봉쇄했을 터인데, 

이 형편없다 못해 바닥을 기는 치안은 뭐란 말인가?

누구도 안심하며 두 발 뻗고 편히 잠들질 못한다.

그 어느 때보다 두텁게 긴장감을 두르고 본분에 진정으로 충실할 시점이 됐다.


"스파르탄은 시민을 지킵니다. 더 이상의 접근은 위험하니 돌아가 주십시오"


복도를 순찰하던 스파르탄 어썰트가 멈추더니 친절한 안내를 출력한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도 시민을 지키기 위해 순찰하는 중이에요"


펍 헤드나 램파트 뿐 아니라 군용인 스파르탄 시리즈까지 돌아다니는 현실이 썩 내키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오르카가 흔들린단 말인가.

안전하니 자신이 필요 없는 게 아니라, 있어봤자 절망적인 상황은 달라지지 않기에 필요 없다고 고하는 것 같아 화가 치솟는다.

모두가 방긋 웃으며 아무런 걱정 없이 돌아다니는 밝고 희망찬 나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재차 다져본다.


"해당 구역으로의 접근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기껏 품은 결단을 기다렸다는 듯 박살 내려는 어썰트의 제지에 당황을 숨기지 못한다.


"네? 하지만 위험지역을 순찰해야 치안을 다질 수 있지 않습니까"


"해당 구역은 대상을 불문하고 접근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순찰인력이라 해도 권장하지 않습니다"


멈춘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러고 보니 순찰범위와 투입병력을 두고 사령관과 알바트로스가 격한 다툼을 벌였다던가.

언제나 최적의 조언을 하고 이를 과감하게 수용하는 둘의 궁합은 오르카를 승승장구로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그런 두 중추가 엇갈려 충돌하다니, 지금까지와 달리 모든 게 엉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군용 AGS를 투입하면서 동시에 그 수를 극히 일부로 제한한 것 역시 갈등이 빚어낸 결과일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가장 위험하고 경계해야 할 D구역에 발조차 들이지 않고 그저 멀리하기만 하다니, 

이래서야 잘해봤자 상황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한다 할 수 없다.

세이프티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눈앞의 AGS가 정의감에 눈뜨길 바랐다.


"오르카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위기와 역경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스파르탄 시리즈의 전투력은 명성이 자자하니, 함께 하시겠어요?"


"지시에 따라 배정된 구역 외의 이탈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답답한 로봇 같으니, 램파트였다면 기꺼이 응했을 터다.

같은 AGS라도 이리 차이가 날까.

세이프티는 한숨을 쉬며 홀로 복도를 향해 걸어갔다.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하긴 그게 당연하겠지. 그래야만 하겠지.

인기척 없는 공간에 세이프티의 구두 소리만이 또각거리며 울려 퍼진다.

듣기로는 이 앞에 격벽으로 몇 겹이나 봉쇄한 D구역이 있고, 

그 너머에는 아군으로 위장하여 현혹하는 번거로운 유동성의 적성 존재가 증식하고 있다고 한다.

사령관이 몸소 원인을 해결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구역을 틀어막는 것으로 수습했다던가.

얼마 전부터 이런 류의 정보전달이 깔끔하게 되지 않아 답답하다.

일사불란한 지휘 및 연락체계는 곳곳에 구멍이 뚫어 엉성해졌고, 

패널을 통해 전산망에 접근을 시도해도 찾고자 하는 정보가 삭제됐다면 차라리 다행인데다

오염된 허위내용이 반겨줘 어떤 게 옳고 그른지 분간하느라 시간을 더 허비한다.

뛰어난 전문가들은 다들 어디서 뭘 하는지 원.

현황을 곱씹으며 걸음을 이어가자니 예의 그 격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미스 세이프티 맞지?"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재빨리 리볼버를 뽑아든다. 여기에 자신 말고 다른 누가 있을 리가.


"나야, 토모. 다들 몸만 사리며 얼씬도 안 하길래 혹시 모를 위험이 걱정돼서 살펴보던 중이야.

다행히 나 말고도 정의를 추구하는 용자가 있었구나"


반갑게 손을 흔드며 다가오는 무방비한 모습에 기운이 빠진다.

바보라서 용감한 건지,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는 이 구역에서 저렇게 당당히 돌아다닐 수가.


"이런 곳에 계실 줄 몰랐습니다. 첩보원이라 그런지 신출귀몰하는군요"


안일한 생각을 날려보낸다. 그렇게 찾던 용감하고 올곧은 동료가 아닌가.

어려울 때 보이는 모습이 참된 본성인 것, 토모는 비록 어휘수준이 저렴하지만 가슴에 품은 신념만큼은 누구보다도 빛났다.


"이 벽을 두고 쇼거스라는 적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지...어디서 오고 있는지는 차치하고, 한정된 공간에서 늘어나 봤자 얼마나 늘어날까?"


"격벽이 굳건히 막고 있는 이상 D구역 내부를 가득 채우는 게 한계겠죠. 

혹여 틈 사이로 새어나오진 않을까 싶어 살펴보러 왔습니다만, 오르카의 설비 수준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봅니다"


함께 벽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혈청을 접종한 후로 쇼거스가 돌아다녀도 쉬이 분간할 수 있으니 위장한 겉모습에 현혹돼 당할 일은 없다.

몇몇 귀가 가벼운 이들 사이에서는 혈청이 사실 거짓이며 모두 속고 있는 거다, 

오히려 혈청은 쇼거스의 일부로 맞은 이를 오염시킨다는 질 낮은 헛소문이 돌고 있나 보지만

아직 정상적으로 관리되는 전산망의 공지에 의하면 이는 악의적인 선동으로 오르카에 내분을 꾀하려는 저급한 공작의 일환이라 한다.

우연찮게 지나가던 사령관과 몇 번 마주할 기회가 있어 물어봐도 처음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아끼더니

나중엔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냐며 반문하기에 괜히 부끄러웠다.

아마 처음의 반응도 이런 우스운 소리에 쉬이 넘어가는 모습이 어처구니없어 그런 거였겠지.

그때 일을 떠올리면 얼굴이 붉어진다.


"그 말이 맞아. 이렇게 견고한 격벽이라면 물리적으로 파고들 여지가 없지. 이 세상의 물리법칙을 따른다면 말이야"


이상한 소리를 하는 토모를 의아하게 바라본다. 

가만, 오늘따라 유독 말이 유창하지 않나?


"커흑...!"


날카로운 통증에 몸을 수그린다.

언제 당했는지 날카로운 창의 형태로 변한 토모의 팔이 복부를 꿰뚫고 있었다.

팔꿈치부터 벗겨져 늘어진 피부 사이로 빛나는 녹색의 이질적인 모습은....


"탕! 탕 탕!"


이를 악물고 리볼버를 잡아 토모를 향해 쏜다. 심장에 두 발, 머리에 한 발.

제대로 명중해 틀림없이 즉사했을 토모, 아니 쇼거스는 휘파람을 불며 감탄하기만 했다.


"멋진 실력과 근성이야"


"뭐...말도 안 돼, 분명 이 정도면 쓰러졌는데...?"


레모네이드 감마 제거작전 당시 여러 쇼거스와 마주했었다.

녹색의 반점이 보이는대로 총알을 먹여주면 여지없이 무너져 바닥에 고이는 액체로 전락했는데, 지금은 어째서?


"놀아준 거지, 뭐"


맞은 부위에 구멍만 나고 여전히 멀쩡한 토모 모습의 쇼거스는 키득거리더니 팔에 힘을 줬다.


"!"


무수한 가시가 돋아나 꿰뚫린 내장을 안에서부터 헤집는다.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무릎 꿇은 세이프티를 내려다보며 쇼거스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조금 더 꼼꼼하게 먹어치워야 하나. 이건 말투가 특이했었나 봐? 다음부턴 주의할게"


신체가 무너지며 눈에 익은 녹색의 유동체가 드러난다. 겉을 감싸던 토모의 가죽은 힘없이 흘러내렸다.


"...설마 잡아먹은...!"


'생각하기 나름이지. 어차피 결과는 같거든'


머리 속으로 직접 꽂아넣는 텔레파시에 두통을 느낀다.

선문답에 여념 없는 상대는 노골적으로 방심하고 있다. 세 발로 부족했다면 더 쏘면 될지 모른다.

리볼버를 쥔 늘어진 오른팔에 억지로 힘을 줘 다시금 조준하려던 세이프티는 

녹색의 유동체로 변해버린 팔이었던 것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아악! 내 팔, 팔이!"


'우리의 품에 온 걸 환영해. 늦고 이르고의 차이일 뿐이야'


혈관을 타고 흐르는 쇼거스의 정수가 노래한다.

몸 구석구석까지 차츰 잠식되어간다.

의식이 흐려지는 가운데,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두터운 격벽 그 자체를 넘어 섬뜩한 초록 물결이 밀려오는 광경이 보인다.

다른 차원의 존재인양 아무런 제약 없이 매섭게 몰아친다.

정신을 완전히 잃기 전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아직 왼손은 멀쩡하다. 무전기를 집어들 수 있다.

진작에 의도를 알아챘을 텐데 여전히 지켜보고만 있는 녹색의 괴물이 역겹기 그지없다.

간신히 들어 올린 무전기에 이 모든 것을 고하면 비록 여기서 죽을지라도 무의미한 최후는 아니다.

엄지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아'


무전기를 멀리 집어 던진다.

가슴 아래는 어느새 쇼거스로 변해있다.

한없이 편안하고 희열마저 느껴진다.

머리를 쾅쾅 울리던 두통은 씻은 듯 사라지고 대신 끝없는 쾌감을 안겨준다.

방금까지 저항하려 했던 게 너무나도 한심하다.

자비롭게 새 동족의 탄생을 지켜보는 시선을 마주할 염치가 없다.

괜찮다며, 전부 이해한다며 꿀렁거리는 저 움직임은 어찌나 아름다운가.

머리만 남고 전부 변해버린 유동성의 신체가 힘없이 무너지며 아직 익숙지 않은 감각에 꿈틀거린다.

뒤로 젖혀진 고개 너머로 널브러진 무전기가 보인다.

괜히 던졌다, 이 은혜에 모두 동참하라 전해야 했는데.

이윽고 시야가 온통 에메랄드 빛으로 뒤덮인다.

48

"하~암, 군 생활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냐...."


오늘도 평안한 숙면과는 담을 쌓은 현실에 이프리트는 절망했다.

바이오로이드가 세상에 등장하기 전, 징병제를 시행하던 몇몇 국가에서는 병장쯤 되면 거칠 것이 없고 매사 여유가 넘쳤다고 한다.

물론 피할 수 없는 몇몇 예외적인 상황과 적수가 있기야 했지만, 대체로 하릴없이 뒹굴거려도 다들 그러려니 하는 꿈의 계급.

그 병장인데 왜 행복할 수 없는 걸까.

사실 답이야 진작에 알고 있다. 자신은 바이오로이드니까.

강제로 징병 되어 한정된 기간 동안 복무를 한 끝에 전역하는 당시의 군인에게 병장은 결승점을 앞에 둔 보장된 자리였다.

어차피 머지않아 사회로 나가는 민간인이 될 몸, 굳이 건드려 서로 피곤하게 할 필요가 없다.

그게 사람의 융통성이자 정이니까.

이따금 FM에 충실한 상관을 재수 없게 만난다 해도 이 악물고 견디면 결국 해방의 순간은 찾아온다.

오늘이 힘겹다 해도 달콤한 내일이 있기에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사람은 그런 생물이니까.

하지만 이프리트는 다르다.

우선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바이오로이드이기에 계급은 병장일지언정 전역은 없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갇힌채 태어난다.

보장된 결승점? 꿈같은 이야기일 뿐.

거기에 FM에 충실한 상관이 군림하고 있다.

한 명도 아니다. 마리 대장과 레드후드 연대장.

병장 특유의 단련된 내공으로 틈만 나면 요령을 피워보려 하지만, 그때마다 귀신같이 들키고 결말은 매번 끔찍했다.

어쩌다 허락된 행운에 감사하며 눈을 좀 붙일라치면 폐급 후임이 화려하게 사고를 쳐 뒷골을 땡기게 한다.

브라우니가 정예로 거듭나는 게 빠를까, 자신이 하사로 말뚝을 박는 게 빠를까.

생각의 파도가 닿아서는 안 될 영역까지 이르자 이프리트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말뚝이라니, 터무니없는 소리.

멸망 전에는 드물지만 공로를 인정받아 전역하고 사회로 진출한 바이오로이드들이 있었다고 한다.

자신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인류는 사실상 멸망해 사령관이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이고 철충과 그 외의 무수한 적이 위협을 가하고 있지만, 

이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진정으로 평화가 찾아온다면 군인인 자신은 역할을 다하고 포를 손에서 놓을 수 있겠지.

그때까지는 희망의 끈을 계속해서 거머쥐리라.

...일단 눈부터 좀 붙이고.


"전투력 유지 측면에서도 최소한의 수면시간은 확보해야 하는 거야...암, 그렇고말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들키지 않고 숙면을 취할 장소를 찾아 돌아다닌다.

지금 이 '자체 점호'는 타당한 명분도 있다.

근래 자꾸 요령을 피우며 훈련은 물론이고 경계나 평시 점호마저 빼먹는 상종 못 할 병사들이 점점 늘고 있다.

기강이 해이한 다른 부대라면 몰라도, 스틸라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처음 문제를 파악했을 때의 순간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분노를 넘어 인지 부조화가 온 마리 대장의 얼굴, 그대로 휘하 장병들을 연대책임으로 갈아버리겠다 온몸으로 외친 레드후드 연대장까지.

단순한 태만이 아니라 전산상으로 병사 다수의 정보가 어긋난 것이 확인되어 이쪽으로 주안점이 쏠렸기에 망정이지,

적보다 무서운 게 무능한 아군이라는 말이 그토록 실감 났던 순간이 없었다.

하필 몇몇 생활관이 모종의 이유로 파손되어 임시로 새 생활관을 배정하던 과정에 일이 터진지라

붕 떠버린 부대원들이 어디서 지내고 있는지 알 도리도 없다.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지금 오르카에 닥친 상황부터가 더 말이 안 되니까.

진짜 문제는 이를 기회 삼아 곳곳에 짱박혀 도통 나오지 않는 괘씸한 병사들이 실제로 있다는 거다.


"병장은 성실히 의무를 다하고 있는데 머리가 꽃밭인 녀석들이 빠져가지곤...."


보나마나 브라우니들이겠지. 머릿수로 승부하는 부대 특성상 워낙 많아 솔직히 몇몇은 구분하기도 번거롭다.

바보 같고 단순한 녀석들이지만 맡은 소임을 등한시할 녀석들은 아닌데, 이상하긴 하다.

대체 누굴 보고 배운 걸까.


"이 방 느낌이 괜찮네...응, 딱 좋아...."


오가는 이도 없고 깔끔해 보이는 빈방을 찾았다.

비어버린 머릿수를 대신해 그만큼 추가로 경계근무를 소화한 터라 안 그래도 피로에 찌든 몸이 너덜너덜하다.

여기라면 임펫 상사나 레드후드 연대장의 매서운 눈초리로부터도 안전하겠지.


"음...."


널찍하고 깨끗한 침대가 몸을 내던지라는 듯 유혹한다.

하지만 숙달된 병사는 언제나 긴장을 늦추지 않는 법, 

정말 만에 하나 감시의 눈초리가 닿았을 때 침대에 널브러져 단잠을 자는 모습이라도 보였다간 뒷일을 감당할 수 없다.

애초에 지금은 구역경계를 돌아야 하는 시간이다. 걸렸다간 정말 큰일 난다.


"이 수납장이 좋겠어...크기도 마음에 들고...."


병장의 단련된 내공이 옆의 수납장을 가리킨다.

부드러운 매트리스에 눕는 것보다야 불편하겠지만 근무시간에 누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이다.


"끼이익"


수납장의 문을 열자 일찍이 안에 자리를 잡고 있던 브라우니가 몸을 웅크린 게 보인다.


"너 여기서 뭐 하니...?"


기가 찬다.

촉이라는 게 어쩜 이리 정확할까.

이병 주제에 병장과 맞먹을 정도의 판단력으로 은닉처를 선정한 점은 높이 살만하지만, 이를 용인하기엔 짬이라는 게 있다.

어떻게 갈굴지 머릿속에서 무수한 시뮬레이션이 병렬로 돌아가지만, 굴리기 전에 최소한 제 발로 나오도록 유예를 줘본다.


"...정신 못 차리니...?"


이것 봐라?

병장이 몸소 기다려주시는데 꿈쩍도 안 한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군기가 아무리 해이하다거니 이 정도로 선을 넘어도 되나?

노움을 갈궈야 할까, 레프리콘을 갈궈야 할까?

참다못해 어깨를 툭 치니 그대로 쓰러지면서 고개가 180도 돌아간다.


"뭐야?!"


엎드린 시체는 똑바로 이프리트를 바라보며 입을 살짝 벌리고 있다.

마치 당장 이곳에서 도망가라는 듯이.

수납장을 바라보니 녹색의 덩어리가 스멀거리며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아, 씨...!"


쇼거스? 갇혀있던 거 아니었나?

이프리트 혼자 상대하기엔 환경이 좋지 않다. 방 안에서 포를 쏜다니 말도 안 되지.

재빨리 문 옆의 단말기를 조작해 임시로 비밀번호를 건다.

쉬이익 하는 소리가 등 뒤를 덮치려는 찰나,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오며 방 안에 괴물을 가두는 데 성공했다.


"휴우...."


온갖 상황으로 연마된 병장의 기민함을 과소평가하면 안 되지.

아직 안심할 수 없다. 신속히 지원병력을 불러 처치해야만 한다.

오늘 농땡이는 다 부렸구나.


"이프리트 병장, 어딜 그리 급히 뛰어가는 건가? 애초에 거긴 담당 구역이 아니지 않나?"


마리 대장이다.

여느 때라면 무단이탈로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렀겠지만, 지금은 긴급상황.

저 엄격한 얼굴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마리 대장님, 쇼거스를 발견했습니다...!"


"뭐? 어딘가, 당장 가지!"




도중에 합류한 레드후드 연대장과 레프리콘을 이끌고 방에 도착했다.

모두 전투준비를 마친 상태로 이프리트가 비밀번호를 입력해 문을 연다.

쇼거스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든다 해도 흔적도 없이 날려버릴 수 있다.


"...여기가 맞는 건가?"


팽팽한 긴장감이 무색하게 방 안에는 쇼거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한가운데 쓰러져있는 브라우니의 시체만이 모두를 맞이할 뿐.


"분명히 봤습니다. 저 수납장에서 튀어나왔습니다"


마리가 방으로 들어가 수납장을 구석구석 살펴본다.

뒤이어 진입한 레드후드는 브라우니의 눈을 까뒤집어보고 맥을 짚더니 고개를 젓는다.


"이프리트 병장님, 여기가 분명한 거죠...?"


노움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확실해...어디로 간 거야, 진짜...."


졸지에 양치기 소년이 된 이프리트가 방을 두리번거린다.

아까 눈여겨봤던 말끔한 침대도 그대로고, 무엇보다 자신이 걸었던 비밀번호가 일치한다는 점이 부정할 수 없는 증거다.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애초에 나타나기는 어디서 나타난 거고?


"마리다, 무슨 일이지?...당장 가겠다, 놓치지 말되 절대 혼자 달려들지 말도록"


"무슨 일이십니까?"


"피닉스 대령이 쇼거스와 조우했다고 한다. 당장 지원하러 간다"


다급히 걸려온 무전에 새 목적지로 주의가 쏠린다.


"이프리트 병장은 따라올 필요 없다. 피곤한 것 같으니 좀 쉬도록"


대장의 자비로운 배려로 뻘쭘했던 마음에 평안이 찾아온다.


"감사합니다!"


이번엔 넘어가 주지만 정신 좀 차리라는 레드후드의 묵직한 시선을 스리슬쩍 넘기며, 

방에 홀로 남은 이프리트는 점찍어둔 침대를 향해 입맛을 다셨다.


"아, 그 전에 얘는 좀 치워야지...."


시체와 같은 방에서 자는 건 사양이다.

브라우니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어?"


등골이 서늘해진다. 

분명 고개가 돌아가 있지 않았었나? 지금은 멀쩡한데?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한다.

다급히 몸을 내던지려는 순간, 천장에서 쏟아지며 문틈을 빈틈없이 막는 녹색 점액이 시야에 들어온다.


"...말년에 이게 뭐야...."


브라우니의 껍데기를 뱉은 쇼거스가 등 뒤에서 덮치는 것을 직감하며 이프리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49

"상황이 좋지 않아...."


사령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철통같이 가둬놨던 쇼거스가 곳곳에서 포착됐다는 보고가 앞다퉈 올라오기 시작했다.

만류를 무릅쓰고 직접 상황을 확인하고 온 라비아타에 의하면 격벽은 여전히 굳건하게 D구역을 봉쇄한 상태라고 한다.

그럼 대체 어디서 무슨 수로 빠져나왔단 말인가.


"주인님, 외람되지만 제 소견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나날이 피폐해지는 사령관의 안색을 걱정하던 라비아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뭐든지, 마음 편히 말해.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라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야"


메마른 입술을 비집고 나온 대답은 신뢰와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동시에 체념에 물들어 있었다.


"불편한 내용이다 보니 부디 언짢게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덩치에 걸맞지 않게 몸을 베베 꼬며 눈치를 본다. 저렇게 귀여운 면도 있었나?

각박한 현실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이 봄볕 아래 얼음처럼 조금 녹는 듯하다.


"이리 와봐"


손짓하자 커다란 고양이가 쭈뼛거리며 다가온다. 눈표범이나 백호라고 해야 하나?

무릎을 탁 치자 자연스럽게 엉덩이를 대고는 품에 안긴다.

180kg이라는 어마어마한 체중이지만 오리진 더스트로 강화된 사령관의 신체가 느끼기에는 기분 좋은 묵직함일 뿐이다.


"그렇게 눈치 볼 것 없어. 이렇게 곁에서 위로가 되어주고 나를 생각해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데.

설령 자극적인 주제라 해도 괜찮아.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니까"


적당한 살집이 있는 배를 쓰다듬으며 머리를 가슴에 파묻는다. 기분 좋은 냄새가 안정으로 이끈다.


"지금의 오르카는 제대로 된 기지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심각하게 붕괴한 구역은 나날이 늘어가고, 이를 미처 수복하기도 전에 다른 곳이 무너져 이대로라면 최악에는 침몰할지도 몰라요.

통로가 끊겨 접근이 막힌 설비가 적지 않고 쇼거스는 상상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니 사실상 전장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에요"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은 심각했다.


"여기에 대원들의 사기는 하루가 다르게 떨어져 가고, 환각을 비롯한 정신이상을 호소하고 있어요.

혈청의 영향인지...쇼거스와 조우한 후엔 증세가 한층 심해져 전투는커녕 일상생활조차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면...."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걸 보니 애잔하기만 하다.


"그러니 혈청에 노출되지 않았고 정신적인 문제에도 한시름 놓을 수 있는 AGS를 적극적으로 투입해 

오르카의 안전구역을 점진적으로 확보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강력한 전력을 마냥 방치하는 건 비효율적이라 생각해요"


의견 자체는 일견 타당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야, 라비아타. 

하지만 이를 추진하고자 했을 때 알바트로스가 적극적으로 반대해 제대로 운용하질 못하고 있어.

분명 다수의 AGS가 있지만 일부 몇몇만 순찰에 투입한 게 고작이지.

기계 전투 사단장이라는 직급과 그간의 공헌을 참작해 분을 삭이고는 있지만, 차라리 무시하고 사령관 권한으로 찍어누를까 싶어.

어떻게 생각해?"


배려심 넘치고 상대를 존중하는 사령관의 성품을 잘 알기에, 라비아타는 쓴웃음을 지었다.

좋은 마음씨도 때로는 족쇄가 되기 마련.


"그 점이라면 더 이상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방금 확인한 건데, 알바트로스가 소수의 AGS를 이끌고 오르카 호를 탈출했거든요"


"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하다.

설마, 아니겠지.

한때 가장 신뢰하던 지휘관이 자기만 살자고 다른 이들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사령관마저 냅두고?


"저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보니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고민됐어요. 상상도 못했던지라...

하지만 현실은 저희를 기다려주지 않으니 판단과 행동이 필요해요. 주인님, 이끌어주시겠어요?"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따스하다.

한층 깊이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잠시 모든 고민을 잊는다.


"...그래, 지금부터 AGS의 지휘는 내가 대신할게"




브라우니 세 명이 한데 모여 경계임무에 나설 채비를 한다.

쇼거스가 다시금 활동을 재개해 오르카는 던전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됐지만, 

사령관의 결단으로 AGS를 적극 투입해 전력이 크게 올랐으니 한시름 놓을 수 있다.

장비와 탄약은 제대로 갖췄는지 1692번 브라우니 일병이 한 번 더 점검해본다.


"으앗, 두 분 모두 투시경을 놓고 왔지 말임다! 걸리기라도 하면 쇼거스가 아니라 레드후드 연대장님 손에 죽슴다!"


매번 덤벙대던 자신은 머리에 투시경을 잘 쓰고 왔는데 정작 같이 임무를 돌아야 하는 둘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


"으으...당황해서 그런지 갑자기 화장실에 다녀와야 할 것 같지 말임다. 금방 다녀올 테니 그동안 장비를 갖춰주셨으면 함다"


양해를 구하고 재빨리 달려가는 브라우니를 남은 둘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충분히 멀어져 근처에 아무도 없게 되자 머리가 녹색으로 부풀어 오르더니 투시경이 생겨난다.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두 개체는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완전무장한 브라우니였다.


"오래 기다리셨지 말임다. 투시경은...모두 챙기셨슴까? 그럼 가지 말임다"


씩씩하게 나서는 브라우니를 따라 셋이 복도를 순찰한다.

벽이나 천장에 녹색의 얼룩이 있을까 예의주시하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끝나면 좋겠지 말임다...."


조용해질라 치면 입을 열며 떠들어대는 브라우니와는 달리 나머지 둘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무안한지 머리를 긁적인 일병 앞에 스파르탄 캡틴이 나타났다.


"안심하십시오, 병사. 스파르탄이 임무 중입니다"


"아, 안녕하심까"


2m가 넘는 살인 병기가 정중히 인사한다.

브라우니는 이 든든한 AGS가 혹시 모를 위기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리라 생각하며 한결 마음을 놓았다.


"데이터 분석...목표 확인"


어썰트 라이플이 불꽃을 내뿜으며 복도에 가라앉은 고요함을 찢어발긴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뒤따르던 둘은 저항도 못하고 바람구멍을 선물 받았다.


"어...어어?"


홀로 남은 1692번 브라우니 일병의 몸이 굳는다.

여러 상황을 상정하긴 했지만, 아군의 배신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하물며 상대는 AGS. 싸우면 일방적으로 학살당한다.


"...비상, 비상사태임다! 들리심까? 아무나 대답 좀 해주시지 말임다!"


뒷걸음치다 전력을 다해 뛰며 무전기를 향해 외친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죽고 싶지 않다.

분명 AGS는 정신적인 악영향에 면역인 거 아니었나?

기계가 미칠 수 있는 건가? 고장 난 건가?


"스파르탄은 임무에 충실합니다. 담당 구역을 이탈하지 않습니다"


등 뒤로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가 조롱하는 듯하다.




"지금 놀리는 건가...?"


허탈함에 사령관은 천장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야심 차게 AGS를 중용하자마자 아군을 사살하는 대형사고가 터졌다.

희생자의 시체는 심각하게 손상돼 껍데기만 간신히 남았을 정도로 처참하다.

침착하자, 상황을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

머리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않은가.

그저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 나아갈 뿐이다. 그게 사령관으로서 해야 할 의무다.


"정말 죄송해요, 주인님. 이렇게 될 줄은...."


라비아타가 무릎을 꿇은 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저렇게 죄책감을 느낄 일은 아니다. 이 일은 누구도 예상 못 했으니까.

과거 사령관을 철충으로 의심하고 칼을 들이댔던 일이 아직도 마음속 트라우마로 남아 필요 이상의 책임감을 옭아매는 모양이다.


"네가 죄송할 건 없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힘을 보태줬으면 해"


천장의 무늬가 유독 선명하게 보인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을 외면하고자 사소한 것에 관심이 쏠리는 걸까?


"문제의 스파르탄 캡틴은 신속히 확보해 지금 정비실로 옮겨진 상태에요. 

그런 짓을 벌이고도 정작 진압병력을 투입했을 때는 일말의 저항도 않고 얌전히 호송됐어요"


대체 뭘까.

두서없이 떠오르고 가라앉는 의심과 추리의 파도 사이에서 실마리를 찾아본다.

진범을 직감하고 닥터의 연구실로 찾아갔을 때, 닥터는 오르카의 데이터베이스가 손상됐다며 이를 수복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실은 반대였겠지, 전산망을 해킹하고 악성코드를 심어놨다는 ■■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가 누구였더라?


"주인님, 괜찮으세요?"


아찔한 현기증에 머리를 감싸 쥐자 라비아타가 놀라 다가온다.

괜찮다며 손짓하고 심호흡을 한다. 좀 낫다.

생각을 이어 가보자. 닥터가 오르카의 전산망을 작정하고 망가뜨렸고 이로 인한 여파는 바로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AGS의 모듈에마저 접근해 행동원리를 뒤틀어버린 건 아닐까....

워낙 유능한 녀석이었으니 적으로 돌아섰을 때 감당이 안 된다.


"사령관, 소식 들었거든?!"


포츈이 급하게 뛰어들다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어어,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지. 지금 상황은 받아들일 수 없거든? 스파르탄 캡틴이 그런 실수를 하다니, 뭔가 잘못됐어"


"확실히 뭔가 잘못되긴 한 것 같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눈앞의 정비공을 바라본다.

잠은 제대로 자기나 했는지 눈 아래 짙게 생긴 다크서클이, 초췌한 안색이 

그동안 밤낮으로 얼마나 고생하며 오르카를 고치는데 전념했는지 대신 말해주고 있다.


"이건 정비공의 자존심을 걸고 용납이 안 되는 일이야. 제발 부탁이니 스파르탄 캡틴을 처분하지 말고 한 번만 맡겨줘. 반드시 고쳐 보일게"


"...괜찮겠어?"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가 우려를 지울 수가 없다.


"괜찮고 괜찮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야. 장담하건대 스파르탄 캡틴은 이상 없거든. 호송할 때도 지시에 적극적으로 따랐고.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지 않고서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아"


그건 큰일이다.

포츈이 오르카를 고치지 않는다면 이대로 꼼짝없이 다들 말라 비틀어질 수밖에 없다.


"안 돼, 그건 안 돼...알았어, 기회를 줄게. 그나저나 오르카는 언제쯤 움직일 수 있어?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일분일초가 아쉽거든"


"세부적인 정비는 아직도 한참 남았지만 움직이는 것 자체는 몇 시간 내로 가능할 것 같거든. 오늘 내로 어떻게든 해볼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드디어 밝은 햇살을 볼 수 있겠구나.


"다행이야...스파르탄 캡틴을 점검하고 오르카의 정비를 마저 끝내줘. 우리 모두의 운명이 포츈 누나의 손에 달려있어"


"후훗, 믿고 기다리면 되는 거거든"




"쿠후후...어리석은 인간과 바이오로이드 같으니라고...이미 때는 돌이킬 수 없으니 얌전히 제물이 되면 좋을 것을...."


네 개의 팔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거머쥔 날붙이가 섬뜩한 광채를 내뿜는다.


"정비하라고 했더니 이상한 소리나 하고 앉아있고...농땡이 피우면 안 되는 거거든?"


"흐갸악?! 때리지 마십시오! 손바닥이 제 매끈한 몸에 닿을 때마다 회로 하나하나에 소름이 돋는 것 같단 말입니다!"


펄쩍 뛰며 경기를 일으키는 알프레드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포츈은 머리를 젓고는 공구를 낚아챘다.


"워터 펌프 플라이어가 어디 갔나 했더니만...공구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잖아?"


"하지만 심심하단 말입니다"


"심심? 누구는 눈도 제대로 못 붙이고 당장에라도 정신을 놓을 것 같은데 심심?"


아뿔싸.

치명적인 말실수를 수습하기 위해 알프레드는 다급히 연산 능력을 총동원했다.


"생각해보니 정비실 입구에 공구상자를 놓고 왔습니다! 당장 가져오도록 하지요!"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잽싼 속도로 멀어져가는 AI를 보며 포츈은 어깨를 들썩였다.

이 거대한 오르카의 온갖 설비를 고치려니 힘들기야 하겠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알프레드의 뛰어난 능력은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마저도 없었더라면 포츈이 쓰러지는 게 먼저였을 거다.

뭐, 좀 천천히 오더라도 봐주도록 할까.

안쪽에 옮겨진 스파르탄 캡틴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알프레드는 입구에 도착해 공구상자를 집어들었다.


"당장의 정의는 주관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볼 수 있기에 좀 느릿느릿 돌아가도 괜찮겠지요. 암튼 괜찮을 겁니다.

모처럼 입구에 왔으니 매력적인 DNA를 소유한 바이오로이드가 앞을 지나가며 머리카락을 한 올 건네준다면 정말 좋을 텐데...."


입맛을 다시며, 실제로는 다실 입도 없지만 그런 감각을 상상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마침 탈론페더가 걸어오는 게 보인다.


"오오,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가! 실례지만 머리카락 한 올만 주시겠습니까? 제 몸에 닿지는 마시고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탈론페더는 당황하지도 않고 물끄러미 시선을 고정한다.


"쿠후후, 생각지 못한 제안이라 고민하시나 보군요. 

괜찮습니다, 이는 과학의 발전을 위한 일! 그러니 아무쪼록...어이쿠!"


너무 들뜬 나머지 발이 꼬였다.

졸지에 무저항인 바이오로이드를 덮치는 모양새가 된 알프레드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자칫 변태로 오인당해서야 신사를 자처하는 자신의 드높은 긍지에 흠집이 나는 일. 품위는 중요하다.


"이거 이거,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해서 그만..."


탈론페더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다. 자신도 별다른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회로가 순식간에 식으며 정신이 번쩍 든다.


"당신...단백질 구성체가 아니군요?"


키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유동성의 점액질이 기계 몸을 파고든다.

순간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쇼거스가 처절한 움직임으로 거리를 벌린다.


"아까 제안은 잊어주시지요. 한 발짝도 들일 순 없습니다"


즉석에서 짜낸 전기 보호막을 해제하며 검은 동체의 출력을 끌어올린다.

실시간으로 적의 정보를 분석하며 최적의 대응책을 짜내본다.

도무지 결과 값이 도출되지 않지만, 문제는 없다.

자신은 최고의 AI니까.




"흐흥~흐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스파르탄 캡틴의 상태를 점검한다.

무고함을 밝혀주겠다는 제안에 캡틴은 흔쾌히 수락하며 일시적으로 잠들었다.

대체 왜 브라우니를 공격했는지는 미스터리지만, 단순히 아군을 오인해 사살했을 거라 생각되진 않는다.

물론 편파적일 순 있다. 노골적으로 AGS를 옹호한다 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포츈 자신에게 AGS는 유용한 도구가 아닌 소중한 가족이다. 

감정에 치우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소중한 이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건 지극히 당연하지 않은가.

사령관이 이를 받아줘서 고맙기만 하다. 오늘 내로 어떻게든 오르카를 마저 고쳐봐야지.


"끼익...끼이익...."


묵직한 금속 덩어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린다.

공구상자가 도착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리는구나.

포츈은 돌아보지도 않고 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알프레드, 상자에서 3/8인치 라쳇 핸들 좀 줄래?"


턱하니 쥐어져야 할 공구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정말, 장난칠 여유 없거든?"


가볍게 화를 내며 돌아보자 관절부마다 녹색 점액이 들어찬 알프레드가 물끄러미 내려보고 있었다.

중추가 위치하고 있을 머리 부분은 엉망진창으로 박살이 나 있고, 대신 뭉쳐있는 결정이 영롱한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인다.

50

주변을 감싸는 차가운 바닷물이 점점 밝아진다.

알바트로스는 소수의 AGS를 별도의 함에 태우고 오르카를 떠나 오세아니아 거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쯤 자신의 독단적인 행동이 사령관의 귀에까지 들어갔겠지. 배신행위라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진정으로 오르카와 사령관을 위한 충성에서 비롯된 타당한 판단의 결과다.

이번 항행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탑승자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신호 삼아 다방면으로 질서와 체제를 어그러뜨리는 불온한 움직임을 알아챘다.

충분한 정보가 모이지 않아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때로는 과감한 결단을 보여야 하는 순간도 다가온다.

사령관을 비롯한 몇몇에게서 FAN 전파가 방출되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는 분석에 큰 난항을 겪었다.

온갖 변수와 데이터를 반영해 시뮬레이션해도 납득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본 개체는 인류 과학 기술의 정수.

그 어떤 AGS 커맨더와 비교해도, 범주를 바이오로이드까지 넓혀도 가장 뛰어나고 유능한 지휘관이다.

진정 유능하다면 기존에 접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에 놓여도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하는 법.

오르카는 위험하다. 지금의 오르카는 내부에서부터 곪아가고 있다.

피와 살을 지닌 생명체들은 자각하지 못했겠지만, 

그들은 기존에 지녔던 이성과 판단력을 상당 부분 소실하고 눈앞의 상황을 온전히 가늠하지 못한 채 눈먼 장님으로 전락했다.

모두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사령관마저도.

바로 그런 순간에 대비해 냉철하고 올곧은 인도를 필요로 한다면 주저 없이 이끌어달라 당부하지 않았던가.

이 알바트로스의 판단이 곧 사령관의 판단이라면서.

충심 어린 직언은 팔랑거리는 감정 앞에 온전히 닿지 못했고,

결국 대의를 위해 표면적이자 일시적인 항명과 이탈이라는 형태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변명거리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사령관은 분명 마지막 만남에서 얌전히 사라지라 했다.

그 명령에 충실할 뿐.

하지만 알바트로스는 사리분별을 못하고 일의 경중을 가늠할 수 없는 고철덩이 로봇이 아니다.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다시 돌아온다 했고, 그 말을 지키고자 한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차츰 가라앉는 오르카 안에 머물며 흐름을 바로잡으려 해도 소용없다.

늪 안에 몸이 잠겼는데 제 발로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진정 늪에 잠긴 이를 구하고자 한다면, 더 늦기 전에 디딜 수 있는 땅에 자리를 잡고 손이든 밧줄이든 뻗어야 한다.

그리고 그 땅은 오세아니아 거점이다.

아마 아직도 귀환하지 않는 오르카와 사령관의 소식이 궁금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터.

무적의 용을 설득해 대대적인 병력을 따로 편성하여 진정한 원흉을 제압해야 한다.

말을 꺼낼 때마다 이상이 있는 게 아니냐며 비웃음을 사거나, 이간질과 의심에 번번이 막혀 끝내 알리진 못했지만

FAN 전파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하게, 더 많은 곳에서 검출되고 있었다.

사령관과 닥터를 비롯한 몇몇을 시작으로 오르카에 탑승한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

쇼거스가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다는 D구역,

그리고 저 깊은 심해의 어느 지점.

남위 47도 9분, 서경 126도 43분.

측정값이 맞는다면 수심 4,000m가 넘는 곳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FAN 전파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어찌나 강력한지 일시적으로 탑재 모듈에 부하가 걸릴 정도였다.

그곳에 이 모든 재앙의 진정한 원흉이자 흑막이 자리 잡고 있으리라.


'별의 아이'


고민할 필요도 없다.

살덩이를 먹는 자, 바다에 들어간 모든 영혼을 찢는 자, 인간 영혼의 수확자.

최후의 인간인 사령관을 눈독 들이고 음험한 손길을 뻗는 것이리라.

바이오로이드, 인간을 모방해 만들어진 조악한 살덩이는 자신의 창조주마저 농락하는 어두운 그림자에 저항할 도리가 없다.

그들에게 영혼이 있는지는 차치하고, 사령관과 바이오로이드 모두 휩노스에 저항력을 갖췄음에도 속절없이 휘둘리고 있다.

애초에 심연에 거하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가 내쉰 숨결이 고작 그 정도일진대, 직접 어루만진다면 무슨 수로 버티랴.

인류가 일궈온 찬란한 업적도 그 앞에선 한 줌 먼지에 불과하다. 

회심의 한 수라면 기계 육체로 이루어진 AGS.

차가운 논리와, 감정모듈을 인위적으로 짜 넣어야 할 정도로 이성의 결집체인 로봇이라면 

정신을 일그러뜨리고 광기를 속삭이는 존재의 대극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마저도 잠식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적에게, 어쩌면 물질우주의 법칙마저 초월할지 모르는 존재에게 이쪽의 잣대를 들이대 봤자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승산이 있다면 시도해봐야 한다. 그것이 실낱같다 할지라도.

알바트로스가 도출한 유일한 답은 바로 이것이었고, 이것만이 사령관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만약 통하지 않는다면, 불가해한 존재로부터 승리를 취할 길 따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 전에 이 모든 추론이 어긋났다면....'


정보가 부족하다.

충분한 정보를 확보한 후 실행으로 옮기는 알바트로스에게 현 상황은 결코 달갑지 않았고, 따지고 보면 이 행동도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례적인 대응을 취할 수밖에 없는 미증유의 사태.

신중히 정보를 모으려 해도 기어드는 혼돈이 주변을 차츰 옥죄고, 기존의 경험과 지식을 송두리째 부정하며 비웃는다.

그 사이에서 실낱처럼 빛나는 하나의 길을 택했다.

어쩌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사령관의 신뢰를 한몸에 받던 최고의 지휘관이라는 타이틀을 반납해야겠지.

그건 상관없다. 그런 명예 따위 헛된 것일 뿐.

유일하고 절대적인 가치는 사령관에게 바치는 충성과 승리다.


'슬슬 가까워지는가'


내리쬐는 햇살이 해수면에 거의 다다랐다고 알려주고 있다. 며칠만의 지상인가.

마침내 수면을 뚫고 튀어나온 알바트로스는 예고 없이 찾아온 두 가지 사실에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시간이 어긋났다.

동체 내부에 탑재된 시계와 위성을 포함한 대조정보를 토대로 측정한 시계가 큰 차이를 보인다.

어긋난 시간이야 동기화하면 그만이지만, 어긋났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다.

알바트로스가 계산을 실수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크게 양보해서 여러 요인으로 미세한 오차가 발생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며칠 이상의 차이는 날 수 없으며 나서도 안 된다.

설마 오르카 안에선 시간의 흐름마저 일그러졌단 말인가?


'본 개체마저도 혼돈 속에 사로잡혀있었나'


납득이 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도 없다.

어떻게 거짓말처럼 물 밖으로 나와서야 기다렸다는 듯 오차를 파악하는가.

단순한 동기화라면 진작부터, 저 깊은 물 속을 거슬러 오를 때부터 했어야 했다.


'.......'


두 번째, 오세아니아 거점이 붕괴했다.

시각 센서를 채우는 건 무너지고 폐허가 된 건물과 시설뿐.

무적의 용이 호령하고 있을 대규모의 함대도 자취를 감추고 몇몇 잔해만이 주변을 떠다니고 있었다.


"휘하 AGS에게 알린다. 생존자를 비롯해 현 상황 파악에 도움이 될 정보를 수집하라"


오르카에 전부 내버려둘 바에 소수라도 구렁텅이에서 꺼낼 요량으로 데려온 병력은 한 줌밖에 안 된다.

권한이 막강한 기계 전투 사단장이라 한들, 오르카의 전력 상당 부분은 AGS에 의존하고 있고 

사령관이 이를 필요로 할 순간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설령 제대로 운용하지도 못하고 썩히거나 최악에는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보다 효과적으로, 가치 있게 운용할 수 있는 자신이 전부 끌고 오는 게 아니라 사령관의 손에 안긴 채 돌아왔다.

자신의 역할은 사령관에게 충성하고 승리를 안겨주는 것이니까.

늪에서 빠져나와 디딜 땅이 무너진 이상, 흐름을 바꿀 전투에 일조할 병력을 충원할 길이 사라진 이상 대응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아직도 불타고 있는 천막을 지난다.

이 웅장하고 가치가 큰 거점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투항자만 해도 약 3천 명, 무적의 용이 이끌던 함대에 탑승한 이들까지 합치면 족히 수만 명은 될 이들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최소한 후자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얻었다.

가는 곳마다 온갖 형태와 방식으로 최후를 맞이한 시체들이 넘쳐난다.

어지러운 흔적은 당시의 혼란을 어렴풋이 알려주고, 작은 소요가 아닌 거대한 광기가 모두를 덮쳤음을 고한다.


'이 지역은 함대의 포격을 받았는가'


해안으로 고개를 돌린다.

두 동강이 나 반쯤 가라앉은 전함이 을씨년스럽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령관이 만일에 대비해 배치한 몽구스 팀도, 제6 스파르탄 강습대대도 결국 조우하긴 했다.

무슨 의식을 진행하려 했는지 기묘한 형태로 그려놓은 그림이 둘러싸고 중앙에 꼬챙이가 세워져 있다.

거기에 목만 걸려있는 홍련이 하나 남은 눈동자로 당시의 참극을 호소한다.

일정 간격으로 꽂혀있는 머리들의 주인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사방에 흩어진 피와 살점 사이로 빼꼼 튀어나온 조각난 AGS의 위장무늬는 익숙한 예의 그것이다.


'.......'


반쯤 불탄 일지를 발견했다.

표지에는 코헤이의 상징이 그려져 있다.

어쩌면 이 안에 진실이 담겨있을지 모른다.


■월 ■일

새로운 신자 분들을 만나게 돼서 너무나도 두근거려요. 

비록 직전까지 총구를 맞대고 다퉜다고는 하나, 이는 모두를 더 큰 영광으로 이끌기 위한 시험일 뿐.

구원자님의 현명하신 인도로 죄 없는 양이 피를 흘리지 않고 품으로 돌아왔으니, 그 이름 높임 받으시리.

한 분 한 분의 기대와 희망이 쌓이고 쌓여 황홀경에 빠질 지경입니다.

잠시 우리의 곁을 떠나신 구원자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 빛 안에서 하나 되어 환영의 기도를 올릴게요.


■월 ■일

다들 좋은 분이세요.

감마의 악명이 워낙 드높아 내심 걱정도 있었지만, 모두의 부정적인 성격을 한데 모아 감마에게 몰아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마주하는 분마다 친절하고 인자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답니다.

PECS에서 지낼 때는 삶에 별다른 의욕도 없고 시키는 대로 힘든 일을 해왔지만

오르카에 합류하여 구원자님을 새로운 목표로 삼아 헌신하고 싶다는 간증을 듣고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어요.

다시 뵐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져요.


■월 ■일

슬슬 돌아오실 때가 된 것 같은데, 아무런 소식이 없네요.

제법 멀리까지 가셨으니 며칠 정도 늦으실 수도 있겠죠.

이 또한 빛의 시험, 저는 기꺼이 받아들이겠어요.

라미엘님께서는 요즘 유독 환하게 웃으신답니다.

구원자님께 죄 사함을 받은 이래, 이토록 많은 생명을 그 광활하신 자비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에 몸 둘 바를 모르고 계세요.

그때 느꼈던 감사와 희열을 나눌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고백하실 때는 저도 감동의 눈물을 글썽거렸어요.


■월 ■일

어제 트리아이나님이 홀로 돌아오셨어요.

구원자님의 오르카 호와 엇갈리기라도 한 걸까요.

모험이 힘드셨는지 이것저것 여쭤봐도 제대로 대답을 안 하시고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고 계세요.

빛이시여, 차가운 기억을 온기로 덮으사 긍휼을 보여주소서.

불경하게도 불안에 조금씩 흔들리는 이 마음을 굳건히 잡아주소서.


■월 ■일

뭔가 이상해요.

사소한 일로 곳곳에서 다툼이 일어나고 부정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어요.

사실 구원자님께선 우리를 버리고 떠나셨다는 감히 입에 담지도 못할 신성모독을 들었을 땐 충격에 몸을 가눌 수 없었어요.

빛이시여, 감히 이를 글로 남기는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해안의 함대에서 이따금 고함소리가 들려와요.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요?

구원자님, 하루라도 빨리 돌아와 주세요. 보고 싶어요.


■월 ■일

빛이시여, 왜 저를 이런 시련에 들게 하시나이까.

어느 다툼이 시작이었습니다.

고성이 오가며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결국 폭력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귀를 찢을듯한 총성이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어요.

피를 흘리며 쓰러진 신자는 슬프게도 다른 분들보다 먼저 빛의 곁으로 떠나가셨습니다.

범인을 찾아내야 한다며 다들 이성을 잃어가던 와중, 미호님이 쏘는 걸 봤다는 증언이 재앙의 문을 열어젖혔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건 필시 악마의 꼬드김이었어요.

그럴 리가 없다고, 맹세할 수 있다고 막아선 홍련님은 분노한 신자들의 린치에도 

이들을 다치게 할 수 없다며 소극적으로 임하다 쓰러지셨고,

들불처럼 번진 폭주는 결국 하늘과 땅을 화염의 비로 적시는 포성으로 산산이 조각났습니다.

지금 무너진 건물의 벽에 몸을 숨겨 일지를 적고 있어요.

아직도 저 너머에선 고함과 비명, 사격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구원자님, 제발....


■월 ■일

나태했던 지난날을 반성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

이를 외면하고 분에 넘치게도 낙원을 꿈꿨기에 심판이 내려왔습니다.

바다를 뒤덮으며 영원히 무적일 것만 같았던 함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처참한 잔해만 남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퍼붓는 강철과 불의 고해성사는 스스로를 속죄물로 삼았지요. 

교만의 끝이 무엇인지 빛께서 몸소 보여주신 거에요.

라미엘님께서는 본분을 등한시했던 그간의 배교행위를 낱낱이 고하시고는 온 힘을 다하여 수많은 신자들과 함께 승천하셨습니다.

그 숭고한 희생에 영광 있으라.

저도 미력하게나마 사명을 재개하고자 합니다.


■월 ■일

기억이 잘 안 나요.

교단의 상징을 어떻게 그렸더라?

아무튼 정성을 다해 그렸으니 괜찮아요. 빛도 어여삐 여기실 거에요.

믿음을 시험한 죄인 홍련과 그 추종자를 사로잡아 제물로 올리고자 했습니다.

자신이 대신 죽을 테니 제발 나머지는 살려달라고 울며 외치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그래서 한 명도 남김없이 빛께 바쳤답니다.

빛의 자비에 무궁한 영광 있으라.


■월 ■일

죄인의 눈알 맛있어.

구원자, 왜 안 와?

기다렸어. 계속 기다렸어.

저기 빛이 보여. 저기로 갈래.


"......."


알바트로스는 자신에게 입이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다행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사태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이를 어떻게 한다.


"휘하 AGS에게 알린다. 현 거점에 머물며 전력을 온존하고 상황을 주시하라"


어차피 답을 내고 출발한 상황이었다.

과정이 좀 달라진다 한들 방향은 바뀌지 않는다.

알바트로스는 다시금 바다를 향해 출격했다.

51

답답하다.

이 모든 상황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며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답답하다.

더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는데, 그럴 능력이 있고 권한이 있는데 어째서 침대에 앉아 멍하니 자리만 지킬까.

나지만 이해할 수 없다.

나라면 더 잘할 수 있는데.

사실 지켜보기만 하는 건 나다.

무력하게 공기나 축내는 이 몸뚱어리와는 달리, 의욕은 넘치지만 지시할 입이 없다.

내저을 손이 없다.

걸을 다리가 없다.

있기만 하다면 당장에라도 모든 걸 뒤바꿀 텐데.

언제까지 그저 바라기만 해야 하는 걸까.

존재하지 않는 눈을 감으며 의식의 저편으로 잠긴다.

끝없이 떨어지는 터널.

녹색의 세계.

내가 태어난 곳, 내가 비롯된 곳.

그 너머에서 다른 너머로....


"허억!"


깜짝 놀라 눈을 뜬다.

이상한 꿈이다. 또 몸이 흠뻑 젖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우선 물을 한 컵 마신다.

태어나 처음 식도를 축이는 듯한 느낌에 온몸의 감각이 깨어난다.

물이라는 게 이렇게 맛있었나?

일단 몸을 좀 움직이고 싶다. 격렬히, 한계까지 시험해보고 싶다.

지체 없이 문밖으로 나선다.

침대에 또 다른 내가 누워있다는 사실은 의식하지 않는다.

사령관의 가슴에 박혀있던 녹색 파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또 다른 사령관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


사령관실 입구에서 리리스가 곤히 잠들어있다.

며칠간 쉬지 않고 경호하다 한계가 왔는지, 숨은 약하고 안색은 어둡다.

기특한 녀석, 안쓰러운 마음에 이마를 살짝 쓰다듬는다.


"으음...주인님...?"


가늘게 눈을 뜨며 눈앞의 사령관을 바라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어머, 주인님...! 옷을 입으셔야...."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오른팔의 감각이 없다.

사령관은 조용히 하라는 듯 집게손가락을 리리스의 입술에 부드럽게 대더니, 

그대로 양다리를 붙잡고는 억지로 벌리며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주인님?!"


거침없는 행동력에 당황하면서 한편으로 가슴이 콩닥거린다.

이런 상황도 내심 바라왔지만, 리리스가 알던 사령관이라 하기엔 상당히 야성미가 넘친다.

팽팽하게 발기해 배꼽 주변에서 까닥거리는 성기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혈관이 도드라졌다.


'저게 내 안에....'


상상만 해도 흥분에 몸이 젖는다.

오랜 나날 사령관과의 육체 관계로 충분히 농익고 조교된 질은 전희 없이도 부드럽게 사령관의 부푼 성기를 뿌리까지 집어삼켰다.


"하아, 주인님...."


아무리 불러도 한마디 말도 없이 오직 허리를 들썩이기만 한다.

자신이 사령관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로만 굴려지는 듯한 취급에 아랫배가 움찔하며 조임이 한층 강해진다.


"...크윽!"


외마디 탄성과 함께 뜨거운 파도가 밀려드는 듯한 감각이 리리스의 가장 소중한 곳을 시작으로 차츰 온몸을 향해 퍼져 나간다.


"아...하아...사랑해요, 주인님...."


물기 젖은 달콤한 숨을 내쉬며 리리스의 홍조 어린 얼굴이 행복을 만끽한다.

자신의 안에 사정된 것이 정액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점액질이고, 자궁을 통해 흡수되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 채.


"리리스, 피곤하면 방에서 좀 쉬는 게 어때?"


"후후, 주인님께서 리리스의 방까지 안아서 옮겨주시면 생각해볼게요"


"깍쟁이 같으니라고. 같이 가자, 겸사겸사 거기서 내 옷도 입고"


평소 잦은 애정행위 덕에 리리스의 방에는 아예 사령관의 옷을 여벌로 보관하는 옷장이 따로 있었다.

이를 미끼 삼아 넓은 가슴에 안겨 옮겨질 수 있다니, 이토록 행복할 수가 있을까.


"주인님...정말...좋아...해...요...."


어느새 품 안에서 잠든 리리스를 안아 들고 사령관은 발걸음을 옮겼다.




말쑥이 차려입은 사령관이 카페를 지나다 때마침 모여있는 지휘관들을 발견했다.

한시도 오르카를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는 모범적인 자세가 실로 만족스럽다.


"다들 수고가 많아.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병력을 보다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쇼거스의 위협에 노출되어 잃는 인원을 줄이고자 아예 한데 모으는 것이 어떨지 의논하던 중이었습니다"


마리의 말을 곱씹어보니 제법 흥미롭다.


"흠...확실히, 한 곳에 인원을 모으면 쇼거스가 기습을 할 수는 없겠지. 

본색을 드러내고 덮치는 시점부터 적진에 몸을 내던지는 꼴이니까.

전면전으로 넘어간다면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이 화력과 병력으로 이어지는 힘 싸움이니 차라리 상대하기는 편하고. 

문제는 오르카의 그 많은 이들을 수용할만한 공간이 있는가인데...."


"가장 넓은 로비를 선정한다 해도 전부 수용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표현을 살짝 달리 해보죠. 각 숙소에 대기하고 있다가 상황 발생 시 집결해 편재를 구성하고 출격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로비로부터 바로 출격하는 식으로 절차를 상당히 압축할 수 있습니다. 

정예 위주로 최대한 큰 규모의 신속대응부대를 짠다 보시면 어떨까 싶군요.  

말씀하셨듯 각개격파당하는 상황도 최소화할 수 있으니, 이를 두고 다른 지휘관들의 생각을 묻고 있습니다"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본다. 호드는 동참하도록 하지"


"그럼 난 반대야. 발할라는 각자도생할 테니 구상에서 제외해줘"


칸이 말을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레오나가 찬물을 끼얹는다. 이유야 안 봐도 뻔하다.


"레오나, 공사구분은 해야 하지 않겠나? 한 명 한 명의 목숨이 아쉬운 마당에...."


"그 한 명 한 명의 목숨을 누구 때문에 잃었는지 알지?"


표독스러운 반응에 마리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돌린다.

칸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을 뿐이다.


"레오나가 발할라의 지휘관인 이상 당연히 의사는 전적으로 존중하겠지만, 결국 이건 같이 살아남자는 거잖아.

그 택한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어? 자매들을 마주 보면서?"


날카롭게 후벼 파는 내용이지만 따스하고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건네는 사령관의 얼굴을 보며 레오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떨린다.

지휘관인 자신의 아집을 추궁하는 건지, 아끼는 자매를 잃은 슬픔을 알기에 더는 같은 고통을 겪지 않도록 권유하는건지 

가늠하려는 듯 눈빛이 흔들린다.


"...알았어, 모일게"


결단을 내려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자 손을 덥석 잡자 창백한 얼굴이 살짝 붉게 달아오른다.

아늑한 온기, 곁에서 자신을 어루만져주며 때로는 기댈 수 있는 온기가 레오나에겐 절실했다.


"그 많은 인원이 모이면 몸을 누이고 식사를 하는 것도 일이겠네요. 동생들에게 준비를 시킬게요"


배틀 메이드의 진가를 보여주겠다며 라비아타가 안경을 고쳐 썼다.

한 명 한 명이 정말 믿음직스럽다. 이들과 함께라면 어떤 역경도 끝내 헤쳐나가겠지.


"제안을 한 입장에서 이런 말을 꺼내긴 뭣하지만, 스틸라인의 규모가 규모다 보니 가장 나중에 모일까 합니다.

먼저 진입하면 저희 부대만으로 로비를 가득 채울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지. 미처 합류하지 못하는 나머지 대원은 어떡할 거야?"


"반대쪽에 별도의 로비가 하나 더 있으니 거기에 모이라 할까 생각 중입니다. 

레드후드 연대장을 대리로 삼으면 문제없으리라 사료됩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취지가 취지니까 각 담당 부대뿐 아니라 소속 외의 전투력이 뛰어난 바이오로이드들도 원한다면 모이라 할까 싶어.

전력을 집중하고 동선을 단순화한다면 결국 적도 영향을 받아 장단을 맞출 수밖에 없겠지.

다만 졸지에 단체생활을 하게 될,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은 대원에겐 상당히 미안하게 되겠는걸"


아무리 군인이라지만 쉴 때는 쉬어야 하는 법.

개인, 혹은 소수의 몇몇을 위해 마련된 아늑한 숙소에서 널찍한 로비로 생활 무대를 바꾸는 건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닐 터다.


"때로는 대의를 위해 희생도 필요한 법입니다"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각자의 의사를 존중하는게 어떨까 싶군"


사령관의 평가에 각 지휘관의 엇갈린 반응이 나오는 것도 퍽 재미있다.

이런 각양각색의 개성을 지닌 이들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힘을 합치고 있다. 그 끝은 비극적이진 않겠지.


"그럼 난 이쯤에서 일어나볼게. 사령관으로서 말하지만, 너희가 있어 정말 다행이야"




레오나와의 거리는 도무지 좁아질 줄을 모른다.

칸은 복도를 걸으며 암담한 현실을 곱씹었다.

분명 감정적이고 지나간 일을 잊지 못해 냉철한 판단이 필요한 일에마저 어깃장을 놓는다.

하지만 이를 탓할 수는 없다.

지나간 일을 잊지 못하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니까.

소중한 이를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아니까.

너무나도 쓰라리고 빈자리를 채울 수 없기에, 앞으로 평생 이를 탓한다 해도 칸이 대꾸할 말은 없다.

워울프가 잘못한 건 아니다. 생리현상이지 않았나.

방심이라면 방심이고 안일함이라면 안일함이겠지만, 부하의 잘못은 대장의 책임이다.

레오나가 비난의 화살을 날리는 대상은 칸으로 한정되면 된다.

힘들 것은 없다. 예전부터 줄곧 홀로 모든 것을 짊어졌으니까.

이렇게 해야 자신을 둘러싼 이들이 다치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대로 행복하게, 즐겁게 웃어주면 그걸로 족하다.

충분히 웃지 못하고 떠나버린 전우들이 그저 안타까울 뿐.

501번 퀵 카멜 소령, 331번 워울프 상사, 634번 샐러맨더 하사....

발걸음이 멈춘다.

머리를 거머쥔다.

한순간도 잊지 않았던, 가슴에 줄곧 묻어왔던 전우들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어째서?

안 돼, 자신이 잊으면 안 된다.

그들을 기억하는건 이제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

칸이 잊으면 그들은 영영 잊혀져 존재를 증명할 수 없게 된다.

떠올려야, 기억해야....


"...모르겠어, 도무지 모르겠어...."


워 페인트 위로 한줄기 눈물이 흐른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칸을 위로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52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지금 몇 시지?

너무 잤다. 심해에서의 잠수함 생활은 낮과 밤을 알 수 없어 생활리듬이 쉬이 깨지곤 한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물을 한 잔 마신다. 

컵을 이 자리에 뒀던가?


"주인님, 준비가 끝나 주요 병력이 로비로 모였어요. 한 번 살펴보시는 건 어떨까요?"


라비아타가 들어와 이상한 말을 한다.


"준비? 무슨 준비를 말하는 거야?"


"네?"


아리송한 시선을 서로 주고받는다.


"아까 말씀하셨던 병력 집결 건이 완료되었답니다. 

사령관으로서 둘러보시고 대원들에게 얼굴도 보여주시면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요"


"라비아타, 미안한데 하나도 모르겠어. 대체 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라비아타의 표정이 굳는다.


"...주인님, 지금 제가 올리는 말씀이 다소 언짢거나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해요.

쌓인 의문을 해소해 드리고자 함이니, 괜찮으실까요?"


"응, 말해봐"


"혹시 요즘 기억상실증을 겪지는 않으신가요?"


"이따금 몇몇 기억이 잘 안 떠오르긴 하지만...지금 이건 아니야, 느낌이 달라. 대체 무슨 소린지 감조차 안 와"


"아까 카페에 오셔서 저를 비롯한 지휘관들과 대화를 나누신 건 기억나지 않으시나요?"


"난 계속 자고 있었어. 입구에 리리스는 없었어? 계속 경호하고 있었을 테니 내가 나가지 않은 걸 알 텐데"


"리리스 양은 주인님께서 몸소 방으로 옮겨 잠들었다가 방금 일어나 로비로 이동했어요"


"뭐라고?"


대화를 이어갈수록 의문은 커져만 간다.


"로비라고 했지? 직접 가봐야겠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당혹과 의아함 속에 조금씩 커지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로비로 향한다.




"실로 장관이군"


마리는 뿌듯한 듯 로비를 가득 채운 병사들의 군집을 바라봤다.

여러 부대와 병종이 있지만 그 사이에서 스틸라인의 각이 잡힌 배치는 한층 눈에 띈다.


"강도 높은 훈련의 성과인가. 매우 인상적이다"


간결한 표현이었지만 화자가 칸인 시점에서 진심을 담은 칭찬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무시무시한 일정에서 낙오하지 않고 소화해준 부하들이 인정받으니 지휘관으로서 자긍심이 한층 드높아지는 것을 느끼며,

혹시 사령관도 호평을 내릴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놓여.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어"


감탄어린 평가와 함께, 바쁘게 돌아다니며 이 많은 인원의 편의를 제공하고자 노력하는 바이오로이드를 주목한다.

손에 쥔 장부에 열심히 뭔가를 적는 바닐라, 미트 파이를 한 아름 들고 온 하치코, 구급함을 품에 안고 온 리제까지.

언제 어디서 덮칠지 모른다는 미지의 공포와, 주변의 친근한 이로 위장한다는 적의 특성이 빚어낸 의심으로 인해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 저마다 거리를 두고 단절되어가던 오르카에 다시금 예전의 활기가 넘치기 시작한다.


"이제 무사히 뭍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정말 좋겠는데...포츈이 올 때가 되지 않았나?"


그렇게 호언장담을 했으니 아무런 의심도 않는다. 포츈은 한다면 하는 실력자니까.

어차피 몇 분 내지 몇십 분의 차이겠지. 조만간 기쁜 소식을 들고 찾아오리라 믿고, 곁에 서 있는 리리스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는다.


"리리스, 항상 헌신해줘서 고마워. 이리도 많은 동료가 함께하니 우린 반드시 이겨낼 수 있을 거야"


"...."


"리리스?"


반응이 없어 당황하니 그제야 뒤늦게 미소를 짓는다.


"아, 죄송해요, 주인님.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방금 사령관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어깨를 안은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듯한 감각.

거기에 모든 주의를 빼앗겨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혹여 사령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큰 걱정을 끼칠까 일부러 과장된 움직임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척한다.

이미 왼쪽 눈은 보이지 않지만, 나머지 눈으로도 다종다양한 병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저쪽에 호드를 점검하는 칸이 보인다.


"탈론페더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그러게요...슬슬 눈치 좀 챙기면 좋겠는데 감감무소식이에요"


작은 한숨을 쉬는 퀵 카멜이 대장의 안색을 넌지시 살핀다.

워 페인트로도 숨겨지지 않는 불안과 초조가 느껴진다.

그렇기에 여전히 개인적인 촬영 명소를 찾느라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식으로 연락이 끊긴 전우를 매도할 수밖에 없다.

가슴 한구석에서 조금씩 부풀어가는 의혹을 마주 보고 인정하기엔 자신이나 칸이나 준비가 충분치 않으니까.


"워울프가 보이지 않는군"


"걔는 또 화장실 갔어요. 평소에도 툭하면 마시더니, 요즘은 위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들이붓는다니까요?

그러다 병 나는 거 아닌지 몰라...."


투덜거리는 소리가 차라리 듣기 좋은지 가볍게 씨익 웃으며 자리를 뜬다.

샐러맨더와 하이에나는 곁에 있는 게 보이니 달리 할 말이 없는 듯하다.

왁자지껄한 로비를 향해 저 멀리서 그림자가 다가온다.




복도가 끝나고 시야가 넓어지자 여러 부대원이 바글거리며 저마다 자리를 잡는 광경이 가득 들어온다.


"병력을 여기에 한데 몰아넣으면 어떻게 해? 

이러면 기습에는 대처하기 용이하겠지만 자폭이나 기타 폭발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감당할 수 없을 텐데"


"그도 그렇네요...하지만 분명 카페에, 서...!"


다급히 삼키는 숨소리와 동시에 주변에서 비명과 웅성거림이 귀를 어지럽힌다.

저 반대편에 자신이 있다. 거울도 아닌데 또 다른 내가 보인다.


"말도 안 돼...도플갱어인가?"


당혹으로 몸이 굳어 제대로 반응하기 어렵다. 바이오로이드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에 갈피를 못 잡는다.

가짜 사령관 곁에 있는 리리스도 마찬가지.

겉모습만이 문제가 아니다. 뇌파,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을 구분하는 뇌파의 형태마저 둘은 동일했다.

모두가 혼란에 삼켜져 허우적대는 가운데 더 큰 혼란을 불러오는 외침이 허공을 갈랐다.


"쇼거스다! 당장 처치해!"


자신이 말했을 리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가짜가 교활하게도 선수를 치다니.


"그쪽이 가짜야! 리리스! 빨리 쏴!"


"네?! 어...어떻게 해야...."


유능하고 빠른 판단력의 리리스마저도 쉽사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터질 듯한 긴장감.

바늘을 대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모든 게 갈기갈기 찢겨 흩날릴 일촉즉발의 상황은 폭발음과 함께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이에나, 안된다!"


"콰쾅!"


칸이 잽싸게 몸을 날려 하이에나가 든 폭탄을 쳐내려 했다.

신속이라는 이명답게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손이 닿았지만, 

바로 그 순간 폭발이 일대를 휩쓸며 더 심한 부상을 자처한 꼴이 되었다.


"크윽!"


"아악!"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과 신음.

코를 찌르는 매캐한 화약의 잔향과 피비린내.

하이에나의 행동은 도미노가 되어 로비에 모인 병력이 쥐고 있던 이성의 끈을 끊어버렸다.


"모두 진정하세요! 이런 때일수록 침착하...."


주변을 안정시키려던 실키의 머리를 향해 눈먼 총알이 날아들어 말을 끊는다.

언제나 모두를 배려하기만 했던 선량한 전우가 맥없이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에 눈이 돌아간 동료들이 보복사격을 시작한다.


"저 중에 분명 쇼거스가 섞여 있습니다! 이건 함정입니다!"


"개자식들, 가만두지 않겠어!"


방향 잃은 증오가 서로를 덮치며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상관없게 만든다.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시야를 가리고, 불규칙하게 숨을 내쉬던 칸이 몸을 질질 끌며 저 멀리 날아간 하이에나를 향해 간다.


"하이에나...괜찮나...?"


괜찮지 않다는 건 말을 걸기도 전부터 알고 있다. 사지 중 왼팔만이 붙어있으니까.

제대로 보이기나 하는지, 하이에나는 칸이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엉뚱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하하, 대장...나 한 건 멋지게 해냈지...? 폭발은 솔직해. 어떤 적이든, 무슨 속임수든...공평하게 날려버리거든...."


"더 이상 말하지 마라, 피를 너무 흘렸다"


"배려할 필요 없어, 대장...왼팔밖에 감각이 없는걸...난 곧 죽을 거야"


"그런 말 마라! 내 앞에서 다시는 그렇게 말하지 마"


"캬하핫...이제서야 나를 봐주는구나, 대장"


순간 정신이 번쩍 뜨인다.


"나 말이야...무서웠어. 얼마 전부터...봐서는 안 될 것들이 보이고, 들려서는 안 될 것들이 들리더라고...?

참고 또 참아봤지만...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대장을 만나려 했는데...계속 탈론페더만 찾으며 만날 수가 없더라...

다른 녀석들에게 털어놓을까도 생각했지만...대장에게 어리광을 피워보고 싶었어...이상하지? 왜 그랬을까...?

이해가 안 돼...이 상황이 잘못된 거지? 그래서 터뜨렸어...잘했지? 칭찬 좀 해줘...대장...."


"하이에나...."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자신을 떠나버린 동료들을 그리워하며, 보이지 않는 부하를 애달피 찾으며, 정작 곁에 있는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어련히 잘하고 있겠거니 어림짐작하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뭐에 홀렸던 걸까?

비어버린 자리를 그렇게 애달파 하면서 왜 남아있는 자리를 소홀히 했단 말인가.

모두의 눈을 멀게 한, 판단력을 흐리게 한 이 저주가 너무나도 밉다.


"대장...우는거야...? 왜 울어? 내가 잘못해서 그래...?

또 실수한 거야? 대체 왜 그랬지...? 

나 보고 있지, 대장? 곁에 있는 거 맞지...? 

아파...내가 모두를 아프게 했어? 내가 틀렸어?"


뒤늦게 자신이 저지른 행동이 실감 나는지 하이에나의 목소리에서 당황이 묻어나온다.

흐르는 피에서 녹색의 거품이 일며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붉던 피의 색이 차츰 변해간다. 아아, 안된다. 이건....


"하이에나, 정신 차려라, 난 여기 있으니 자신을 잃으면 안 된다!"


"누구야? 여긴 어디야?"


순수히 궁금하다는 어조로 물어본 하이에나가 왼손에 쥔 스위치를 꾹 누른다.

피투성이의 몸을 둘러싼 폭탄이 터지면서 칸의 시야를 검게 물들인다.

53

다급히 참호 방벽을 치고 방어에 전념한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많은 이들이 패닉에 휩쓸렸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뇌가 정지했던 순간이 있었으나 그것도 잠시, 현 상황을 냉정히 파악하고 최적의 대응을 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훈련을 통해 습득한 정답.

레프리콘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되짚어봤다.

사령관의 지시로 오르카의 주요 병력이 로비로 한데 모였고, 그 후 또 다른 사령관이 나타났다.

둘 다 구분이 안 되는 똑같은 사령관이지만 한 명은 가짜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뇌파마저 동일하다는 것.

쇼거스가 이 정도 수준까지 이르렀다면, 대체 무슨 수로 분간하고 대응해야 한단 말인가?

어쩌면 여기 있는 전우 사이에도 쇼거스들이 섞여 있을지 모른다.

피아의 구분이 안 되고 모두를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야말로 진정 최악이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교리와 대응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피로 피를 씻는 끝없는 투쟁만이 남게 된다.

마리 대장은 이를 예상하지 못한 걸까?

뒤늦게 허점을 깨닫는다.

이 계획이 성립하려면 로비에 집결한 모두가 온전한 오르카의 일원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일단 모여 태세를 갖추면 그 뒤부터는 추가로 접근하는 이들을 경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태세를 갖추기 전부터 적이 섞여 들어왔다면 더 큰 혼란에 머리를 들이민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일개 병사인 자신도 추론할 수 있는데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마리 대장이 해내지 못할 리가 없다.

가능성은 두 가지.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할 정도로 문제가 생겼거나, 혹은 마리 대장이 아니....

머리를 휘저으며 해괴한 생각을 날려보낸다.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희망이 완전히 곤두박질친 게 아닌가.

어렵고 복잡한 판단과 지시는 높으신 분들의 영역이다. 병사인 자신은 그저 열심히 싸우기만 하면 된다.

기합을 불어넣고 기관총에 혹 이상이 발생했는지 살펴보는 레프리콘의 곁으로 노움이 굴러들어왔다.


"왁!...노움 병장님이시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워낙 정신없는 상황이라...."


발포 콘크리트로 방벽을 보강하는 모습을 보며 한시름 돌린다.

이 정도라면 폭탄이라도 터지지 않는 이상 어지간한 공격은 막을 수 있다.


"쿠콰앙!"


안심하기가 무섭게 저 너머에서 귀를 찢는 폭음이 들리며 진동이 느껴진다.

몸을 웅크리고 귀를 막기를 몇십 초, 아직 몸이 멀쩡한 걸 느끼며 먼지가 가라앉은 머리를 가볍게 흔드니 노움이 쓰러져있었다.


"병장님, 괜찮으신가요?!"


"흐읏...그저 가벼운 찰과상일 뿐이에요"


파편을 툭툭 털며 일어나는 걸 보니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은 듯하다.

살짝 찢어진 전투복 사이로 흐르는 녹색 피는 금방 멎을 터였다.

레프리콘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노움 병장님?"


"왜 그래요? 혹시 다친 거에요?"


눈이 커지며 가까이에서 살펴보려는 듯 거리를 좁혀오는 노움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한다.

하마터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정말...아무도 믿을 수 없네요. 브라우니가 그리워질 줄이야...."


묵직하게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온몸의 힘이 빠져 드러눕는다.

사고뭉치에 뭐 하나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지만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 후임이 그립다.

그나저나 쇼거스의 진화가 두렵다.

겉모습뿐 아니라 말투와 분위기마저 그대로 따라 하고, 콘크리트로 방벽을 쌓는 노움의 역할까지 소화할 줄이야.

...뭔가 이상하지 않나?

괜한 위화감이 든다.

상체를 일으켜 곤죽이 됐을 쇼거스를 확인해보려 하지만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고개라도 들어 슥 쳐다보고자 하지만 목이 뻣뻣하다.

무의식적으로 온몸이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를 확인하는 걸 막으려 한다.


"으으...스틸라인은 어떤 상황에도 물러나지 않아요"


스스로를 훈계하며 강하게 힘을 준다.

분명 녹색의 점액질로 돌아가 바닥에 퍼져있을 쇼거스는 온데간데없고 

배신당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노움의 싸늘한 시체가 누워있다.

아까 확인했던 상처에서는 여전히 녹색 피가 흐른 흔적이 보이지만, 

온몸에 뚫린 구멍에서는 선명한 붉은 피가 흘러 참호 끄트머리를 적시고 있었다.


"......거짓말이죠?"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다니며 일촉즉발의 위기가 수시로 오가고 있지만,

넋이 나간 레프리콘은 아무런 대비도 않고 줄곧 주저앉아있기만 했다.




리리스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있었다.

함께 행동하던 동료들로부터 떨어져 철충이 점령한 지역을 헤맨 적도 있고,

세뇌에 빠져 사령관을 지킨다는 사명을 잠시 잊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 당황스럽고 돌파구를 찾을 수 없지는 않았다.

어떤 위협이 닥치든, 아무리 강대한 적이 몰려오든 온 힘을 다해 경호에 충실하고 여차하면 목숨을 바칠 각오도 있다.

하지만 사령관이 사령관을 죽이라 하는 순간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주인님, 우선 몸을 피하셔야 해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로비를 가득 채운 병력은 서로를 향해 아낌없이 화력을 퍼부으며 악다구니를 내뱉고 있었다.

불안과 충동을 억지로 틀어막던 이성의 댐이 폭발과 함께 무너진 것을 시작으로,

상대 부대 위주로 향하던 공격은 어느새 바로 곁의 전우를 상대로 한층 열을 더해갔다.

쉬지 않고 들리는 비명과 고함, 튀겨지는 팝콘처럼 날아다니는 팔다리.

결국엔 예외 없이 터져나갈 피주머니의 내용물은 마냥 붉기만 한 게 아니고 이따금 녹색이 섞여 있다.


"이제 와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건 썩 좋은 판단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쇼거스가 이 중에 암약한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불쾌한 초록 점액이 보일 리가 없으니까.

철저히 놀아난 모두는 죽느냐, 죽이느냐의 기로에 놓여 끝을 향해 맹렬히 달려나갔다.


"리리스 뒤로 오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드...."


로자 아줄을 펼치려 한 순간 현기증과 함께 세상이 옆으로 돈다.

아마 몸이 쓰러진 것 같은데 통증은 없다. 바닥의 차가운 감각도 전해지지 않는다.

입을 뻐끔거려보지만 아무 소리도 내뱉지 못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리스, 정신 차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마 몇 초 동안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다.

이러면 안 되지, 자신의 존재의의를 자각하며 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망가진 몸을 일으킨다.

설령 주어진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도 이 위기에서 구해 드려야 한다.

위협을 남김없이 배제해야 한다.


"...휴우"


숨을 들이마신다. 내쉰다.

극히 짧은 휴식이었지만, 몸이 기능을 되찾았다.

감각이 돌아오고 양손에 쥔 블랙 맘바는 그 어느 때보다 가볍다.


"■■■, ■■■ ■! ■■ ■■■ ■■■!"


저 멀리 로비 입구에 거대한 쇼거스가 꿈틀대는 게 보인다.

아비규환을 자아낸 게 만족스러운 걸까?

저것부터 우선적으로 배제해야겠다.

바로 옆에 서 있는 라비아타는 무슨 생각인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한다.


"타다닷"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영거리에서 쇼거스를 향해 총알을 박아넣는다.

길을 가로막는 병사들은 아무 방해도 되지 않는다.

그 어떤 사격도, 공격도 리리스의 몸에 닿지 못한다.

전부 보이고 그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이 혼돈의 도가니에서 리리스의 전투능력을 상회하는 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챙!"


유일하게 압도하는 존재가 공격을 저지했다.

라비아타가 재빨리 대검을 휘둘러 쇼거스를 향한 공격을 막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리친다.


"리리스, 지금 대체 뭐 하는...!"


아랑곳없이 몸을 틀며 다시 공격을 시도한다. 측면에서 한 발, 뒤에서 두 발. 머리 위를 넘으며 위에서 한 발.


"카앙!"


단 한 발의 총알도 쇼거스를 꿰뚫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 상대가 라비아타라면 실력 차는 명확하다.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저 역겨운 괴물을 무엇 때문에 보호하는 거죠? 결국 미치기라도 한 건가요?"


매서운 힐난에 대검이 순간 움찔한다.

라비아타는 문득 이 상황이 과거의 자신과 겹쳐 보였다.

최후의 인간이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 믿고 저항군을 힘겹게 이끌어가던 그 나날.

마침내 조우한 남성은 철충에 잠식된 꼭두각시였고 

콘스탄챠는 어리석게도 이를 인간이라 철석같이 믿으며 언니에게 총구를 들이대기까지 했었다.

결국 어리석었던 건 라비아타 본인이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때로는 진실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겪었기에,

그리고 그때의 행동이 얼마나 큰 후회로 돌아왔는지 뼈저리게 체감했기에 지금 리리스의 행동을 마냥 질타할 수가 없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점은 얼추 가늠하고 있었다.

그래도 환각까지 볼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큰언니로서 잘못된 길을 걷는 동생을 올바로 이끌어줘야만 한다.


"리리스, 진정하고 잠시 이야기를 들어보렴. 네 반응을 볼 때 아마 지금 옆에 계신 주인님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 같은데, 맞니?"


"저 괴물을 주인님이라 하다니, 그것만큼은 용인할 수 없어요"


속이 매스껍다는 듯이, 분노를 잠시나마 억누르던 표정이 흉측하게 일그러지며 경멸이 가득한 시선이 꽂힌다.

평소 사령관에게 보여줬던 헌신만큼이나 이 살의는 강력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라비아타가 갑자기 기침하더니 가슴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큭...!"


왜 하필 이럴 때.

하늘이 내린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며 리리스가 쥔 블랙 맘바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온다.


"끼긱!"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총알이 엉뚱한 방향으로 튕긴다.

거대한 가윗날이 묵직하게 내리꽂히며 궤도가 어긋난 회심의 일격은 라비아타의 볼을 살짝 스쳤다.


"이 해충...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구나? 구제의 시간이야"


지옥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로 리제가 눈을 희번덕거린다.


"스토커...그동안 많이 봐줬지만 이번에는 찌그러져 있어. 죽고 싶지 않으면"


여느 때처럼 장난을 받아줄 한적함은 없다.


"내가 할 말이야. 주인님을 경호하는 사명을 온전히 짊어지지 못한 것으로 모자라 이젠 암살을 시도해? 넌 처음부터 존재해선 안 됐어"


원한이 실린 날이 번뜩이며 리리스를 향해 휘둘러진다.


"수준 차이를 알아야지"


위력적이지만 몸에 닿기엔 너무나도 느리다. 저 정도 공격은 방심하고도 피할 수 있다.

적당히 손봐주고 다치지 않게 제압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당면한 과제가 너무나도 중요해 그런 여유를 부릴 상황이 못 된다.

리제는 문제가 안 된다지만 쇼거스를 보호하는 라비아타를 넘어선다는 건 가능이나 할는지.

무슨 하찮은 의도인지는 모르나 방어로 일관하며 소극적으로 나온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침 뭔가 이상이 생긴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커흑!"


숨이 막히며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심장을 쥐어짠다.

정면에 있는 쇼거스를 향해 내뱉어진 피는 선명한 녹색이었고, 멍하니 서서 이를 맞은 사령관이 쇼거스 대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인님...?"


사고가 정지한다.

분명 아까까지 커다란 쇼거스가 있었는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흔들리는 눈동자. 이럴 줄 몰랐다는 시선에 담긴 무수한 감정.

지금도 심장을 짓누르는 통증보다 저 시선이 더 따갑고 견디기 힘들다.


"아니야, 아니야...."


천근처럼 무거운 목을 어떻게든 돌려본다.

반대쪽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을 사령관이 기다리고 있어야 할 곳엔 또 다른 쇼거스가 꿈틀거리며 거품을 내뿜고 있었다.


"스릉-"


아.

차가운 느낌이 지나갔다.

자세를 다시 잡은 리제가 온 힘을 다해 휘두른 가윗날이 리리스를 두 동강 낸다.

오른쪽 어깨로부터 파고들어 왼쪽 옆구리에서 빠져나온다.

금속 골격마저도 매끈하게 베인 단면에서, 본디 공기와 접촉할 일이 없어야 하는 좌심실에서 폭발하듯 녹색 피가 치솟아 주변을 집어삼킨다.


"주인님, 위험해요!"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있는 힘껏 밀쳐낸 라비아타에 의해 사령관이 저 멀리 날아간다.

복도를 몇 바퀴는 구르며 온몸을 극심한 통증이 반겨주지만, 이는 직후 펼쳐진 참극에 의하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리리스로부터 뿜어진 액체가 일대를 휩쓸며 닿는 모든 대상을 녹이고 있었다.


"아아악! 몸이, 몸이!"


"이익...해충...! 너 끝까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라비아타가 사령관을 향해 손을 뻗는다.

등을 덮친 액체는 옷을 녹이고 피부를 녹이며 앗 하는 사이에 허벅지 아래를 흔적도 없이 먹어치웠다.

양손으로 복도 바닥을 긁으며 어떻게든 멀어지고자 애써보지만, 

이를 비웃듯 리리스의 심장에서 꿈틀거리며 튀어나온 거대한 촉수가 라비아타의 남은 상체를 낚아 마구 휘두른다.


"주인님, 주인님!"


그 강인했던 라비아타가 가녀린 소녀처럼 절규한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이 공포로 뒤틀린다.


"아, 아...."


비현실적인 광경에 사령관은 입을 뻐끔거리기만 한다.

바닥을 뒹구는 리리스의 상체가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듯 떠올라 제자리로 붙으려 하고, 

그 사이에 낀 라비아타의 상체와 맞물려 하나의 하체에 두 개의 상체가 달린 기괴한 형태로 재구축된다.


"역겨운 벌레년...죽어!"


가슴 아래로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 리제가 마지막 힘을 다해 가윗날을 휘두른다.

양 발목이 절단된 리리스의 하체가 균형을 잃고 넘어진다.

잘린 발목에서 치솟은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리제의 머리를 향해 달려든다.


"이...이익...!"


바둥거려보지만 우둑, 하는 소리와 함께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고개가 돌아가며 리제가 조용해진다.

이에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꽈배기처럼 비틀던 촉수 뭉치가 끝내 뽑힌 머리를 상체의 절단면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으아...아아아!"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조금씩 뒤로 몸을 빼던 사령관이 마침내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나 도망친다.

그런 사령관을 처연히 바라보는 듯한 리리스-라비아타-리제의 융합체를 중심으로 녹색 점액이 뭉치더니 절단면을 차츰 봉합해간다.

옷과 피부가 자연스럽게 합쳐지고, 셋이었던 바이오로이드가 하나로 뒤섞여 부정형의 괴물이 태어난다.

있을 수 없는 광경에 한 줌 남은 이성을 붙잡고 있던 이들마저 넋을 잃었다.

54

황급히 방으로 돌아와 문이 닫히자마자 잠금장치를 건다.

책상을 질질 끌며 입구를 틀어막는다.

밖은 위험하다, 나가면 죽는다.

잠들었던 사이에 대관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가늠조차 못하겠다.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조명이 깜박인다.

이젠 마지막으로 허락된 공간에마저 장막이 드리우려 하는구나.


"후으...후으으...."


떨리는 몸을 침대로 내던지며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태아처럼 웅크린 채 이 실감 나는 악몽이 끝을 고하기만을 소망한다.

절대 고개를 내밀지 않아, 여기서 버틸 거야.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언제쯤 의식이 흐려졌을까.

이따금 작게 울리던 외침도, 이불을 움켜쥔 손에 한층 힘을 넣게 하던 쾅쾅거리는 노크도 이젠 들리지 않는다.

그저 코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의 숨소리만이 귀를 자극하는 전부일 뿐. 

다 끝난 건가?

이불을 살짝, 아주 살짝 올려보니 캄캄하기만 하다.

결국 조명이 완전히 나가버렸나 보다.

비상등이 어디 있더라.

손을 뻗어 탁자 위를 더듬어본다.

컵이 스치며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으으음...."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두리번거린다.

계속된 어둠에 적응한 시야는 익숙한 방의 구조를 더듬다 입구 쪽의 책상에서 멈춰 섰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가며 서랍을 열어본다. 마치 이런 상황을 위해 미리 준비했다는 듯 양초와 라이터가 나온다.

몰래카메라인가? 어쩜 이리도 절묘할까?

그래, 처음부터 사령관인 자신을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한 쇼였던 거야. 분명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마음껏 흩뿌리며 과장된 손뼉을 친다.

이건 무서워서 그러는게 아니다. 그저 방의 온도조절 장치가 고장 나 추울 뿐이다.

훌륭한 오케스트라를 관람한 직후처럼 손뼉을 치던 사령관은 너무 웃어 땅기는 배를 부여잡았다.


"큭큭...크흐흑...."


웃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어떠랴.

이러지 않고선 못 배기겠는데.

복근을 문지르던 손이 매끈하고 상처 하나 없는 가슴에 닿자 문득 멈췄다. 박혀있을 파편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알겠다, 전부 꿈이었던 거야. 너무나 정교하고 생생해 현실과 전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꿈.

전에도 그랬잖아, 마키나와 만났을 때. 아마 진짜 나는 어디 캡슐 안에 누워 짓궂은 바이오로이드들의 시선을 받고 있겠지'


이건 좀 너무한 것 같다. 지난번에는 바닐라를 아내로 삼아 알콩달콩한 신혼생활을 누리게 해줬더니만.

최근에 마키나를 섭섭하게 한 일이 있는지 떠올려봤지만 딱히 짚이는 건 없다.


"마키나, 듣고 있지? 다 알아챘으니까 이만 깨워줘. 최면이 지난번보다 한층 정교해졌네? 화 안 낼 테니까 어서!"


천장을 향해 소리치니 조명이 다시 들어오는가 싶다 도로 꺼져버렸다. 심술궂기는.


"그래...아직 깨워줄 생각이 없다는 거지? 다 알아챈 이상 이제 뭐가 나와도 놀라지 않을 거야"


진실에 도달한 이상 여유가 넘친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가상현실 게임을 하는 감각으로 어울려주자.

어차피 자각한 시점에서 깨어나지 않는 걸 보니 달리 방법도 없을 듯하고.


'일단 불부터 켜볼까'


돌다리를 두들겨보는 심정으로 조명 전원을 눌러봤지만 밝아지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다.

준비한 정성이 있으니 정해진 길을 따르라는 거지?


"탁, 탁"


촛불이 방을 은은한 불빛으로 채운 순간, 바로 앞에 멍하니 사령관을 바라보는 얼굴 세 개가 떠있었다.


"으아악!"


온몸의 털이 곤두서면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깜짝이야...괜히 엄포를 놨었네"


뭐가 나와도 놀라지 않는다 했던 게 무안하다.

지금은 마키나의 손바닥 안에 있는 상황이니 지나친 도발은 삼가는 게 나을 듯싶다.

감히 사령관을 이렇게 가지고 놀다니, 깨어나기만 해 봐. 침대에서 잘못했다고 빌어도 봐주지 않을 테니까.


"...너희도 나처럼 같이 잠든 거야? 마키나가 뭐라고 귀띔해주지 않았어?"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모모와 백토, 뽀끄루 대마왕을 향해 말을 건다.

셋은 아무 말도 않고 그저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하,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나 보구나. 뭐 됐어, 이왕 들어온 거 앉아. 혼자 있긴 심심하니까"


방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은 딱히 없다. 지금은 그저 가장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노닥거리고 싶다.




양초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은 넷 사이에서 적막만이 흐른다.


"그러지 말고 뭐라도 말해봐. 벌칙게임 중이야?"


사령관이 입을 열자 진동에 따라 불꽃이 일렁거린다.

세 마법 소녀는 싱긋 웃기만 하며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너무하네, 정말...."


정전된 방, 틀어막힌 입구,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촛불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무리.

괴담을 펼치기에 딱인 조건이다.


"우리 내기 하나 할래? 순서대로 무서운 이야기를 하며 가장 소름 돋는 내용을 들려준 이의 소원 들어주기"


약속이라도 한 듯 셋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가위바위보로 누가 먼저 할지...응? 너희 셋이 같이하겠다고?"


그럼 사령관이 이길 경우 보상이 세 배로 돌아오겠지만 반대라면 부담도 세 배가 된다. 

이 요망한 것들이 무얼 꾸미는 걸까. 

의도를 어림짐작하니 실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숨기기 어렵다.


"좋아, 먼저 해봐"


뽀끄루가 입을 연다.

불꽃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조용히 타오른다.




불 꺼진 복도를 다급히 달린다.

이따금 저 멀리에서 비명이 굽이친다.

구석구석까지 세심한 손길로 관리되던 오르카의 각 구역은 하나둘 황량해지고,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 구역도 점차 줄어들어 간다.

어쩌다 찰박거리는 바닥을 밟으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쇼거스가 어디서 나타나 덮칠지 모르니.

이제는 안전한 곳이라곤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다.

사령관 곁이라면 마음이 좀 놓일까.

매사 두려움을 품고 눈치를 봐야만 했던 백토마저 지금은 그립기만 하다.

그 많던 바이오로이드는 다들 어디로 간 걸까.

홀로 외로이 돌아다니던 과거의 나날이 떠오른다.

대화를 나누고 정을 주고받을 따스함이 어찌나 간절했는지.

그 바람에 보답하듯 나타난 오르카가, 사령관이 그저 고마웠다.

여기야말로 새 터전이라고, 진정으로 몸을 담을 곳이라 여겼건만 행복한 나날은 왜 예고도 없이 끝난단 말인가.


"덥썩"


"으아...!"


복도가 꺾이는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손이 뽀끄루를 덮친다.

당황에 비명이 새어나오지만 입은 이미 틀어막혔다.

읍읍거리며 몸부림을 치려 하니,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진정하세요, 저예요"


모모가 복도 너머를 살펴보며 천천히 손을 뗀다.


"흡, 하...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정말 반가워요"


"여기로 달려오는 동안 혹시 이상한 적을 만나진 않았나요?"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뽀끄루가 달려왔던 복도를 노려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아무도 없었어요. 왜 그러나요?"


분위기에 압도당해 목소리를 낮춘다.


"다른 분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끄는 것이 마법 소녀의 사명이라면서 백토와 함께 이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척 봐도 대단히 위험해 보이는 그림자와 마주쳤어요.

무턱대고 달려들려는 백토를 말리느라 고생했지만, 뽀끄루 씨가 왔으니 이제 힘을 합쳐 무찌를 수 있어요"


굳건한 신뢰에 울컥한다.


"마법 소녀가 함께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어요. 백토는 어디에 있죠?"


"여기 있어. 반대쪽을 살펴보고 왔지만 악의 무리는 발견할 수 없었지"


불쑥 나타나서는 아쉽다는 듯 매지컬 핑크 문 라이트를 바라보는 눈빛이 강렬하다.


"그럼 남은 방향은 여기뿐이네요. 같이 가볼까요?"




발걸음을 맞추며 드문드문 조명이 비추는 천장을 살펴본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나마 버티고 있던 전등 하나가 나가버렸다.


"악의 기운이 점점 강해지는 게 분명해...달의 가호가 우리를 지켜주길"


위축되기는커녕 결의를 다지는 백토의 자세에 뽀끄루가 싱긋 웃었다.

홀로 돌아다닐 때는 오싹함에 고개를 돌리지조차 못했던 길도 지금은 든든한 동료가 곁에 있으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위협의 실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낱낱이 밝혀지기는커녕 점점 의문을 더하고 있지만, 

얼마나 강대한 악이든, 얼마나 거대한 악이든 당당히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

한 명이라면 미혹에 흔들리고 공포에 마음이 꺾일지언정, 언제든 등을 맡기고 의지할 수 있는 정의의 용사가 모여 서로를 지탱한다.

단순히 합산하여 세 배로 그치지 않는다.

달이 내려주는 올곧은 마력은 거기서 세 배, 또 세 배 증폭되어 어떤 역경도 극복하게 해주니까.


"사장님은 보셨나요?"


"사령관실을 지나치며 문을 두드려봤지만 굳게 닫혀있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분명 어딘가에 무사히 계시겠지만...."


나직한 뽀끄루의 물음에 모모가 고개를 저었다.


"전 겁이 나 도망치기만 했는데,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지키며 당당히 맞서 싸우다니 정말 존경스러워요.

그 용기를 반만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천만에요. 지금 이렇게 악을 물리치기 위해 곁에 계시잖아요. 뽀끄루 씨는 충분히 용감한 마법 소녀랍니다"


격려를 발판삼아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비교적 상태가 괜찮은 구역에 이르렀다.


"저 방에 그동안 마주친 생존자 분들을 모셔놨어요. 피곤하다면 잠시 쉬어갈까요?"


"그래도 될까요?"


쉴 수 있다는 소리에 기운이 난다.

한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는데, 저 안에서 목이라도 축일 수 있을까.


"사악한 마족이 지금 이 순간에도 돌아다니고 있는데, 나태에 물들어 머뭇거린다니! 한시라도 빨리 달의 심판을 내려야 해"


다그치는 백토를 보니 그냥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꼬르륵"


근엄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굶주리고 목마른 마법 소녀의 배에서 나온다.


"...하지만 우리를 응원하는 이들의 우정과 염원을 나누어 받는 것도 좋겠지"


"백토...!"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음에 감격한 뽀끄루의 눈가가 글썽거린다.




"얌전히 기다리고 계신 여러분께 모모가 스티커를 선물하러 왔어요~ 동료도 데려왔답...."


활기차게 방에 들어온 모모가 말을 하다 만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


뒤이어 진입한 뽀끄루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털썩 주저앉았다.

옹기종기 모여 미소로 화답해야 할 바이오로이드들이 엉망진창으로 토막 나 사방에 뒹굴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어...!"


백토의 목소리가 떨린다.


"여기라면 틀림없이 안전할 거라 생각했는데...아...."


탄식을 내뱉어보지만 소용없다. 이미 벌어진 일을 없던 걸로 돌리지는 못한다.


"가자. 어느 때보다 정의가 필요해"


살육이 일어난 방에서 희망과 절망을 맞바꾼 세 마법 소녀가 정처 없이 복도를 걷는다.

그간의 노력이 송두리째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스러진 이들의 복수를, 달빛을 바라는 이들에게 곧은 손길을.

다시 조명이 군데군데 나간 어두침침한 길목이 붉은 혓바닥을 낼름거린다.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는 핏자국.

참극의 범인이 저 너머에 있으리라.

말이 오가지 않았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보폭이 점점 커진다.

수상한 그림자가 나타난다.

달이시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아니, 뽀끄루 대마왕님 아니십니까?! 마계 군단장 골타리온 XIII세, 혼란한 가운데 뒤늦게 복귀를 보고드립니다!"


"으...응?!"


기쁨과 낭패가 동시에 파고든다.

충성스러운 골타리온이라면 지금 같은 때에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다.

하지만 백토를 마주하는 순간 충돌은 당연지사. 어떻게 해야 하지?


"유유상종이라더니 악이 악을 불러모았구나. 이번에야말로 네놈을 산산조각내고 말겠어!"


"내가 할 말이다. 사사건건 발목을 붙잡는 하찮은 마법 소녀 같으니. 

그동안 승부를 내지 못했지만 대마왕님의 가호가 내린 지금이라면 다르다!"


"흥, 뽀끄루는 마법의 힘으로 정화되어 당당한 한 명의 마법 소녀로 우리와 함께하고 있어!"


"허튼소리! 대마왕님의 사악함이라면 충분히 네놈들을 조롱하고도 남겠지! 함정에 잘도 빠졌구나!"


"...그게 사실이야, 뽀끄루?"


망했다.

어느 한 명만 있다면 적당히 장단을 맞춰 상황을 모면할 수 있지만, 사이에 낀 지금이라면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어떻게 하지? 괜찮은 변명거리가 없을까?

백토의 손에 들린 매지컬 핑크 문 라이트가 기기긱거리며 대답을 재촉한다.


"당연히 아니지! 난 언제나 월광의 은총을 느끼는걸! 악 따위에 몸을 담았던 과거는 잊었어!"


"대마왕님...어째서...?"


골타리온의 목소리가 떨린다. 까다로운 줄타기를 강요하는 자리가 너무도 불편하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뽀끄루가 발끝에 작게 고인 피 웅덩이를 보고는 기지를 발휘한다.


"원대한 계획이 있느니라. 마법 소녀들은 눈엣가시지만 그 힘과 무모함만큼은 쓸만하지 않더냐.

너도 알 테지, 무엄하게도 본좌의 영역에 침범해 활개치고 다니는 이계의 존재를.

마음 같아선 몸소 예의를 가르쳐주고 싶으나, 저 둘과 맞닥뜨리게 해 공멸을 유도하면 이보다 상쾌한 광경이 또 어디 있겠느냐?

그걸 위한 연극일 뿐이다"


백토의 귀에 닿지 않도록 속삭이듯 꼬드긴다.


"오오...이 골타리온 XIII세, 깊은 뜻을 몰라뵙고 잠시나마 헤매고 말았습니다...!

마왕군의 영광이 온 세계를 집어삼킬 때까지, 

그리고 그 결실을 저 너머에서 지켜보시는 진정한 지배자께 오롯이 바치는 순간을 위해 잠시도 멈추지 않겠습니다!"


저 너머에서 지켜보시는 진정한 지배자?

대마왕은 여기 있는데?

아리송한 뽀끄루를 향해 마검이 휘둘러졌다.


"으윽...!"


"골타리온!"


분수처럼 치솟은 피가 검과 금속 육체를 적신다.

그제야 보인다. 어둠 속에 가려져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흔적이. 복도에 늘어진 핏자국이 끝나는 자리가.


"수없이 많은 이계의 존재를 베고 또 베다 깨달았습니다. 이 또한 대마왕님의 큰 그림임을.

저 간악한 마법 소녀와 노닥거렸던 나날에 종지부를 찍고 본색을 드러내고자 하심을!

그동안 집착했던 마와 달의 대립구도는 하찮은 연극에 불과했습니다. 

달 너머, 우주 너머에 계신 위대한 존재야말로 대마왕님의 진정한 실체...!

이제 모두가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피의 승천을 통해 붉은 달을 강림시키는 겁니다.

마법 소녀들이 그렇게 부르짖었던 달이 대마왕님의 새로운 육신이 될지니,

그동안 갇혀계셨던 제약투성이 화신은 제가 치우겠습니다.

마계군단장 골타리온 XIII세, 충성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궂은 일도 기꺼이 감수할 것입니다!"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눈에서 진득한 점액이 흘러나온다.

내막을 간파한 모모는 마법의 카타나를 빼어들어 뽀끄루의 목을 향해 내달리는 마검을 막았다.


"채앵!"


"건방진 것, 감히 대마왕님의 각성을 막으려 드느냐!"


"소중한 동료를 해치는 짓은 결코 용납하지 않아요!"


그 어떤 위기와 악이 절벽으로 내몬다 한들 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달의 마법은 흐려지지 않는다.

두 다리가 땅을 딛고 서 있는 이상, 손에 매지컬 카타나와 요술봉이 있는 한 무너지는 일은 없다.


"백토야, 어서 뽀끄루를 데리고 달아나! 내가 막고 있을게!"


"무슨 소리야! 마법 소녀는 절대 물러서는 법이 없어!"


"나를 믿어! 마법의 힘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지지 않아. 금방 따라갈 테니까, 뽀끄루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줘"


눈앞의 악에 맞설 것이냐, 부하에게 배신당한 대마왕을 구할 것이냐.

잠시 머뭇거리던 백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뽀끄루를 부축했다.


"달토끼의 수호가 함께하길"


골타리온의 관절부에서 꿈틀거리는 녹색 촉수를 베던 모모가 마지막으로 돌아보며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백토...난 괜찮으니 어서 모모를 도와줘...."


"정신이 들어?! 피를 너무 흘렸어.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


의식을 잃었던 뽀끄루의 중얼거림에 안도와 걱정이 교차한다.


"걱정은 마...이정도면 충분히 멀어졌으니까. 지금 도움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모모야.

제발 부탁할게, 백토. 비록 나는 함께 등을 맞대며 싸울 수 없지만, 이 마음을 전해줄 테니 내 몫까지 정의로운 승리를 향해 달려줘"


씨익 웃으며 올라간 눈썹 끝이 살짝 떨린다.


"...알았어. 뽀끄루, 한 때 악의 두령으로 대립했던 사이지만, 넌 그 누구보다 멋진 마법 소녀야. 기필코 매지컬 미라클을 펼쳐 보이겠어"


그럭저럭 깨끗한 벽에 등을 기대게 하여 앉히고, 달려나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동료를 향해.


"조금만 쉬고 나도 따라갈게. 달은 언제나 그곳에"


힘차게 복도를 박차는 발소리가 차츰 작아짐과 함께 뽀끄루의 눈이 스르륵 감긴다.


"커흑!"


터져나오는 기침에 피가 섞여 있다.

어떻게든 들키지 않고자 오른팔로 가려온 상처에서 내장이 삐져나온다.


"금방...따라갈게...."




딱딱하게 울려 퍼지는 걸음에 찰박, 하는 잡음이 섞인다.

간신히 역할을 해내던 흐릿한 조명이 하나둘 꺼져간다.

소중한 동료를 위해 몸을 내던진 모모를 향해, 또 다른 소중한 동료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부메랑처럼 돌아가고 있다.


"월광이여...모모를 지켜줘...!"


이제 곧이다.

귀를 어지럽히던 날붙이의 충돌음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고 적막만이 흐른다.

마법이 승리한 걸까?


"...모모!"


저 앞 길목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고 반갑게 손을 흔드는 모모가 있다.

달의 은총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 어떤 악도 우리를 가로막을 수 없어. 오랜 숙적인 골타리온을 마침내 무찔렀구나!"


기쁨을 안고 한달음에 거리를 좁혀 손을 마주 잡는다. 팔꿈치부터 이어진 녹색 촉수가 꿈틀거리며 빛을 발한다.


"...말도 안 돼...."


승전보를 울리며 동료의 귀환을 반겼던 모모는 생존자들이 모여있던 방의 참극을 재현하는 듯 마구 토막 나 촉수의 장난감처럼 휘둘리고 있었다.

잘린 목을 파고들어 입에서 튀어나온 점액질이 혓바닥처럼 날름거린다.


"달이시여...어째서...."


위대한 달은 여전히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다.

마법이 깃든 은빛 축복 대신 광기로 점철된 붉은 시선으로.




"정말 오싹한 이야기구나. 실제로 겪은 것처럼 생생해"


사령관이 양팔을 쓸어내린다.

어느새 땅딸보가 된 눈앞의 양초가 흘러간 시간을 노래한다.

그 장황한 내용이 쉬지 않고 입에서 나왔음에도 촛불은 미동조차 않고 계속 타올랐다.


"그럼 내가 하나 해볼게, 짤막하게"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촛불이 어지럽게 일렁거린다.


"너희가 들려준 괴담은 정말 소름이 돋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이 모든 게 저 벽 너머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거지"


세 마법 소녀가 서글픈 듯 웃는다.


"알아, 안다고...몰래카메라도 꿈도 아니라는 거. 그저 이 비참한 현실을 필사적으로 외면하기 위한 자기 합리화라는 걸.

인간의 상상력이란 참 어설프지? 차라리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도록 정교한 환상에 빠지면 좋았을 텐데,

문은 여전히 책상으로 틀어막은 그대로고 촛불은 내가 입을 열 때만 흔들려. 

어째서 이런 되다 만 망상에 사로잡히는 거야?

혈청의 부작용인 거야? 그럼 확실히 미치게 만들든가, 왜 어중간하게 이성을 남겨둬서 날 이리 괴롭게 하는 건데...!"


절규를 내뱉으며 거칠게 손을 뻗는다.

부드럽게 안겨야 할 뽀끄루의 어깨는 그대로 신기루처럼 사령관을 흘려넘긴다.

이불 속에서 들렸던 노크가, 달과 마법을 찾던 희미한 외침이, 집요하게 고기를 토막 내던 듯한 소리가 생생하게 기억을 비집고 되살아난다.

이 모든 걸 외면하고 못 들은 척하며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그 끝에 도달한 게 이거다.


"내가 원망스럽니...? 미안해...미안해...하지만 무서운걸...밖과 이어지고 싶지 않은걸...."


촛불이 결국 힘을 다하고 꺼진다.

쓸쓸하게 바라보던 세 마법 소녀의 환상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55

'정말 어떡하죠....'


마이티R이 창문을 바라봤다.

지금 있는 곳은 오르카 내부, PECS의 손님을 위해 제공된 방.

시설은 흠잡을 바 없지만 기분은 최악이다.

차마 입에 담기도 싫은 끔찍한 사건을 시작으로 수중호텔은 감옥으로 변했고, 

이젠 처형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맞이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내일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설령 내일까지 버틴다 해도 그 하루가 행복하지는 않겠지.

소중한 가족을 잃었음에도 동요할지언정 예의와 도리를 다하던 사령관과 휘하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점점 번져가는 혼돈에 몸을 맡기고 변해갔다.

걱정하지 말라고, 책임지고 보호해주겠다며 사소한 불편사항도 거리낌 없이 말하라던 켈베로스는 자취를 감춰버렸다.

새로 사귄 친구를 추모하고자 회당으로 매일같이 얼굴도장을 찍던 더치 걸은 

봐서는 안될 것을 봤는지 어느 날을 기점으로 방에 콕 박혀있다.

사명을 다하지 못해 기운을 잃어가는 근육을 조금이라도 보듬고자 단련 시설을 찾아 돌아다니려니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없이 째려보던 바이오로이드가 아직도 떠오른다.

이런 대접을 받고자 탑승한 게 아니라며 따지겠다고 방을 나간 티에치엔은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질 않고 있다.

저 창문.

깊고 깊은 수심을 증명하듯 검고 탁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닷물이 전부인 창문.

저게 우리의 운명인 걸까.

머리가 아파져 온다.


"쾅쾅!"


누가 거칠게 문을 두들긴다. 당장에 부숴버릴 것만 같은 기세다.


"네~나가요~"


가뜩이나 위축된 더치 걸이 놀랄라. 마이티R이 재빨리 문을 열었다.


"호오...아직 남아있는 자들이 있었나"


머리 위에서 의외라는 말이 들려온다.

고개를 드니 모두를 자신의 발아래 두고 평가하겠다 외치는 듯한 고압적인 얼굴이 있다.

작은 결점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며 구석구석 째려보는 날카로운 눈, 칠흑처럼 검은 머릿결, 그리고 그 이상으로 짙은 날개.

사라카엘의 시선이 마이티R의 머리카락에 잠시 머물더니 침대 위 더치 걸로 옮겨간다.


"어리기에 품을 수 있는 순수함이야말로 빛에 어울린다. 거기 너, 당장 나와라"


"네...? 저 말인가요...?"


그 어떤 이해관계도, 어림짐작도 없이 순수한 궁금증이 갈색 눈동자 위로 떠오른다.


"그래, 너. 회당으로 같이 가야겠다"


그 말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 걸까.

사자 앞의 토끼처럼 더치 걸이 발작하며 침대 아래로 파고들려 한다.


"아악! 싫어요, 잘못했어요! 뭐든 할 테니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혀를 차며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라카엘을 마이티R이 가로막자 이것 보라는 듯 내려다보는 눈매가 가늘어진다.


"지금 성스러운 빛의 뜻을 방해하겠다는 건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두려워하는데 다시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요? 저 아이에겐 안정이 필요해요"


강인한 신체와 그에 걸맞은 정신을 지닌 자신도 점점 피폐해지는데 꼬마야 오죽하랴.

진심을 담아 간절히 바라보자 심판자가 기묘한 눈웃음을 짓는다.


"그 녹색 머리카락...빛께서 또 다른 안배를 미리 하셨군. 좋다, 네가 따라온다면 저 아이의 순서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


"으응...뭔지 모르겠지만 제가 같이 가면 되는 거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지만 가보면 되겠지.

더치 걸이 왜 회당에 그렇게 경기를 일으키는지도 알 수 있을 터다.


"그렇게 됐으니 방 안에서 얌전히 있어요. 배고프면 냉장고 안에 있는 도시락 꺼내먹고요.

...저 말고는 누가 오든 문 열어주지 마요. 느낌이 좀 이상하니까. 아, 티에치엔은 열어주고요"


벌벌 떠는 몸을 꼬옥 껴안아주며 등을 토닥인다. 뜨거운 게 살짝 몸살기가 있나 보다.

돌아오는 길에 해열제라도 좀 받아와야지.


"가지 마요...가면 안 돼요...."


눈물을 글썽이며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한다.


"괜찮아요, 난 강하니까. 

자, 눈물 뚝. 씩씩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오면서 사탕을 가져올게요"


안심하도록 밝은 미소를 유지한다.

마이티R이 나가며 닫힌 문이 어느 때보다 무겁게만 보인다.




방을 나오니 기다렸다는 듯 브라우니들이 주변을 에워싼다.

사라카엘이 금빛으로 빛나는 두꺼운 줄을 꺼내자 이를 받아들고 마이티R을 묶으려 든다.


"아악, 무슨 짓이에요? 갑자기 이렇게 묶는 게 어디 있어요...!"


"얌전히 의식을 받아들여라. 저항은 용서치 않는다"


눈 앞이 번쩍이며 파치직, 하는 소리가 등골을 타고 흐른다.

전격이 관통한 마이티R의 몸이 멋대로 경련하며 저항을 포기한다.


"헛짓 말고 걸어라"


"으...으에...."


억지로 일으키며 걸음을 강요하는 작태에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지만.

서 있는 것도 고작인 정강이에 발길질이 거칠게 꽂힌다.


"커...커헉"


"어린양이 제 발로 빛의 품을 향해 걸어가는데 의의가 있다. 나약하게 굴지 마라"


억지도 이런 억지가 있을까.

조금씩 감각이 돌아옴을 느끼며 통증을 참고 비틀비틀 걸음을 옮긴다.

정갈하던 복도는 핏자국과 기계의 잔해, 녹색 점액질로 범벅되어 흡사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역겨운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이런 지옥도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지나가다니, 다들 비위가 좋아도 너무 좋다.


"아...드디어 오셨군요. 애타게 기다렸어요"


아자젤이 반갑게 맞이한다.

은은한 녹색 조명이 내리쬐는 회당에 모여앉은 신자들도 열렬히 박수를 보낸다.


"아...안녕하세요? 죄송한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안내를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럴 분들이 아닌데 좀 거칠게 대하시더라고요.

더치 걸도 꼬박꼬박 회당에 가다 어느 시점부터 방에서 나가질 않고요.

물어도 아무 말을 안 하던데, 혹시 아는 게 있으면...."


붙임성 좋게 말을 거는 마이티R이 뭐라 내뱉든 상관없다는 기색으로 차가운 손이 뺨을 쓰다듬는다.

오싹하니 몸의 모든 털이 곤두선다.


"이 선명한 색...그분의 상징과도 같은 색...오늘 제물은 한층 만족스럽게 받으시겠지요.

찬란한 빛의 영광이 모두를 비추길"


무슨 소리지? 제물?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시야가 하얗게 변한다. 아까 몸을 어루만졌던 전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한 충격이 신경을 남김없이 태운다.


"......!"


비명은 공허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다.

미처 쓰러지기도 전에, 현란한 무늬가 음각된 곡도를 받아든 사라카엘이 마이티R의 복근을 향해 춤을 춘다.


"와아!"


흩날리는 선혈과 내장.

현세에 강림한 신의 축복을 보는 양 회당에 모인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앞다퉈 몸을 던진다.

허겁지겁 피를 마시고 창자를 주워 먹는다.

미처 잘리지 않고 삐죽 튀어나온 간을 향해 탐욕스럽게 손과 입이 향한다.

배고픈 자식에게 맛난 음식을 먹이는 부모의 시선으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아자젤이 양손을 높이 들며 의식의 정점을 알린다.


"혼란과 광기가 내린 가운데 빛은 언제나 그곳에 계시니, 

믿음을 가슴에 품고 앞으로 나아가면 그 어떤 시험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합니다.

진정으로 헌신할 수 있음을, 몸과 마음 모두를 주저 없이 바칠 수 있음을 증명한다면 

현세에 펼쳐진 지옥도 잠시간의 시련에 그치고 성흔으로 회자될 것입니다!

'보라, 이는 내 살과 피이니 너희에게 떡과 포도주니라. 먹고 마시며 나를 받아들이라'

치품천사의 축성 아래 빛 안에서 하나가 되소서, 저 높은 곳에 영광 있으라!"


희열에 찬 선언이 끝나자 심판자가 마무리 절차를 밟는다.

몇 번의 들썩거림이 끝나고 높이 들어 올려진 마이티R의 잘린 머리가 모두를 내려다보며 소리 없는 찬양을 외치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불경한 외침이 신성한 장소를 뒤흔든다.

모두의 움직임이 멈추고 빛에 마땅한 예의를 갖추지 않은 무지몽매한 자를 향해 고개를 하나둘 돌린다.


"혼탁해진 세상에 올바른 길을 제시해야 할 치품천사가 앞서 타락을 일삼다니, 그 날개에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죄악을 규탄하고 빛의 의지를 바로 세울 심판자는 정작 자신의 손을 끔찍한 죄로 물들이는군요.

구원자께서 이 광경을 보시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무구를 쥔 베로니카의 손이 떨린다. 성전을 치르면서 온갖 이단과 부정을 봐왔고 그 추악함에 역겨워하면서도 믿음은 굳건해져만 갔다.

눈앞에 놓인 엇나감이 크면 클수록 자신이 걷는 빛의 길은 올곧다는 뜻이니까.

그 빛의 길 가장 앞에서 방향을 정하며 모두를 인도해야 할 숭고한 사명을 짊어진 교단의 두 날개가 몰락했다.

자신에게 자비를 구했던 그 어떤 이교도도 도달하지 못했던 부패의 경지에 이들이 머물고 있다.

이 또한 시련인 걸까? 가장 절실하게 비춰야 할 이때에 빛은 왜 느껴지지 않는 걸까?

당혹에 빠진 천사를 향해 아자젤이 자애로운 미소를 띤다.


"베로니카, 방황하는 작은 날개여...빛을 향한 그 신실한 믿음은 언제나 만인의 귀감이랍니다.

하지만 지나친 열정은 때로는 스스로를 눈멀게 하는 법. 주변을 둘러보며 빛의 너그러우신 포용을 느껴보세요"


"이게 정녕 빛의 포용입니까?! 죄 없는 이를 닥치는 대로 잡아와 참혹히 죽이고는,

그 육신마저 안식을 허하지 않고 유린하다니! 제가 겪어온 그 어떤 전장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입조심하라, 이단 심문관이여. 아무리 빛의 자비가 무한하다 한들 

그 뜻을 실행해야 하는 도구의 어리석음마저 묵인되지는 않는다"


사라카엘의 눈이 심장을 꿰뚫을 것만 같다. 몸이 굳어 식은땀이 난다.

질책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저 밝게 타오르는 눈동자의 색은 선명한 녹색이었다.

이를 만류하는 아자젤의 인자한 시선 역시 같은 색이 서려 있다.

요 근래 너무나 익숙해지고 만 색, 가능하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색.

구원자와 이를 따르는 바이오로이드의 안전을 위해 오르카를 이 잡듯 뒤지고 돌아다니며 마주쳤던 쇼거스의 색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두 천사가 저렇게 변한 시점이. 

자신이 점점 커져가는 불길함을 이 악물고 외면하며 회당을 멀리하기 시작했던 날이.

성전의 가장 앞자락에서 묵묵히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리라고,

자신은 교단의 손이 되어 낫을 휘두르고 발이 되어 뛰어다니면 그걸로 빛 앞에 부끄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틀렸다.

음험하고 깊은 죄악의 촉수는 전방을 우회해 교단의 심장을 거머쥐어 집어삼키고 있었으니.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는 별은 그만큼 깊게 추락할 수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으니 속죄의 순례를 떠나야 한다.

모두의 목숨을 바쳐,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라도.


"촤아악!"


무장을 개방해 낫을 휘두른다.

회당에 모인 광신자들이 한꺼번에 쓸려나간다.

저 눈, 초록색 눈.

본디 색을 잃고 하나로 뭉쳐 노래하는 저 눈이 너무나도 싫다.

자신의 부질없는 믿음을 비웃는 저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기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진정한 시련을 외면한 채 빛에 충실하겠답시고 임한 결과가 이것이지 않나.

곁에서 아자젤을, 사라카엘을 더 세심히 보좌했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터다.

마땅히 짊어졌어야 할 의무를 빛께서 어련히 지켜주시리라 등한시한 대가를 지금 치러야만 한다.

도망은 한 번으로 족하다.


"통탄을 금할 수 없군...! 교단의 이단 심문관이 정작 이단을 일삼다니! 율법을 어긴 대가는 크다!"


사라카엘의 진노가 일대를 휩쓴다.

안타깝게 바라보는 아자젤이 야속하기만 하다.

저 마음은 진심일 터다. 진정으로 베로니카의 행보를 속상히 여기고 빛의 품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더 멈출 수 없다. 그건 빛이 아닌 거짓 믿음이기에.


"그 눈이 미혹에 가라앉지 않았다면 저걸 보십시오.

신자를 자처했던 이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죄 없는 어린양을 습격하고 오르카를 지옥으로 만든 쇼거스가 아닙니까!

빛의 터전 그 자체였던 회당은 역겨운 녹색 점액으로 뒤덮여 부패의 온상이 됐습니다.

정녕 이 모든 게 이상하지 않은 겁니까?"


"맙소사...빛의 뜻을 전파하던 날개가 이리도 뒤틀릴 수 있다니"


사라카엘이 쥐고 있던 전격의 창이 팟 하고 사라졌다. 

진심이 닿은 걸까?


"저것이야말로 믿음의 궁극이자 빛에 가장 가까운 본질.

세상에 묶인 나약한 육체를 벗어던지고 전능에 다다른 승천이 아닌가!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뛰어넘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종착지이거늘 어찌 이 기본적인 것마저 잊었단 말이더냐!"


틀렸다.

어디부터인지 관념이 어긋나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다.

아마 그때인가?

한가로이 늘어진 셔츠와 감자칩을 끼고 고대의 경전을 살펴보던 순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빛이시여, 살면서 기적 한 번쯤은 허락해주셔도 괜찮지 않을는지요.


"빠직!"


숨이 멎는다.

몸이 날아가며 부딪힌 의자가 쪼개지고 벽까지 처박힌다.

욱신거리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온몸의 내장이 속부터 익어버렸다.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저벅버적 걸어오는 사라카엘을 바라본다.


"이 얼마나 가혹한 시련인가...하지만 빛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또 하나의 번제물을 올리겠다"


두 번째 전격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저걸 맞으면 다음은 없다.

낫은 손이 닿지도 않는 먼 곳에 뒹굴고 있다.

그 전에 어깨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는다.

결말이 확정된 가운데, 심판자가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자 마침내 멈춰 섰다.


"탕!"


발악 그 이상은 아니었다.

반쯤 탄 손가락으로 당긴 방아쇠는 사라카엘 근처를 스치지도 못했다.

한심한 모습에 쯧, 하는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털썩"


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리도 뒤이어 들린다.

뒤돌아본 사라카엘의 얼굴에 핏기가 가신다.


"치품천사...?"


총구는 처음부터 아자젤을 노리고 있었다.

뒤틀린 믿음이 퍼져 나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설령 전파할 대상이 지금쯤 거의 없다 할지라도, 이단은 전염병과도 같아 쉬이 번지기 마련이니.

철저함이야말로 빛의 미덕이다.


"지금 입에 담지도 못할 대죄를 저질렀구나! 흔적도 남지 않도록 태우고 또 태워주마!"


사라카엘이 불호령과 함께 손을 높이 치켜든다.

강렬하게 전격이 맺히는 대신 펑 하며 오른팔이 통째로 터져나간다.


"어...?"


눈에서 녹색 눈물이 한줄기 흐른다.

귀와 코, 입에서도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쇼거스로 변한 혈액이 육체라는 이름의 감옥을 벗어나고자 꿈틀거린다.


"어...아...빛이, 시여...영광 받으소서...마침내 승천하나이다...."


사라카엘이었던 껍데기가 마지막으로 느낀 감정은 기쁨과 성취였다.

거기에는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56

"흑...흐윽...!"


더치 걸이 울부짖으며 달려나간다.

이 잠수함이 너무나도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땅속에서 하염없이 드릴을 돌리고 곡괭이질을 하던 날이 나았다.

몸은 고되고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 기다려 미래가 없었지만, 최소한 더 나빠지지는 않았으니까.

달라지지 않는 나날, 언제나 똑같은 나날이 행복에 겨운 배부른 소리였을 줄이야.




LRL의 명복을 빌어주고자 향했던 회당에서 봤던 광경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입구에 세워진 장대에 걸려있던 몸뚱어리.

구석구석까지 새겨진 폭력과 유린의 흔적은 보기만 해도 치가 떨렸다.

이게 과연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주던 오르카의 구성원들이 저지른 행동인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너무나도 두려웠다.

과자를 줄 테니 잠시 앉았다 가라는 아자젤의 따스한 제안마저 섬뜩하게 다가왔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그 너머에는 어떤 본색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소모품처럼 굴려지며 인격체다운 대접을 기대할 수 없었던 PECS 시절에 종지부를 찍고

자유와 존중이 포근하게 반겨주는 희망한 새 삶을 기대했다.

그렇게 들었으니까. 사령관이라는 사람은 멸망 전의 인류와는 다르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게 기만이라면?

결국 자신도 저렇게 장대에 걸려 돌팔매질을 당하고 다리 사이로 흉측한 이물질이 박힌다면?

머리가 잘려 공처럼 굴려진다면?

지나친 피해망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사령관이 그때 무슨 연설을 했던가.

한 명이라도 오르카를 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끝까지 심판한다 하지 않았던가.

내가 과연 오르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을까? 혹여 실수라도 하면 바로 내쳐지는 건 아닐까?

알 수 없었다.

이들의 본성은 무엇인가.

과연 어떤 게 진정한 모습인가.


'LRL...보고 싶어....'


얼마 지나지도 않은 후에 겪은 일도 마찬가지였다.

추모를 그만둘 수는 없기에 꺼림칙한 마음을 품고 회당에 다시 향했다.

장대가 보이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도하려 교단의 상징 앞에 다가가니 유품인 안대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옮겨졌느냐 물어보니 쓰레기는 치웠다고 대수롭지 않게 답해준 아자젤.

그 무심하고 별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믿을 수 없는 말에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예배 시간이라며 모여든 인파에 치여 입구까지 밀려났고,

마음에 한 줄기 위안이라도 얻고자 귀를 쫑긋 세워 설교를 들으니 그 내용이 감당할 수 없이 잔인하고 가혹했다.

이야기로만 접했던 멸망 전의 인류가 감히 그랬으랴 싶을 정도의 소름 끼치는 연설.

더 무서운 건 이를 이미 행동으로 몇 번은 옮긴 듯한 신자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분위기에 압도당해 넘어지면서 낸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더치 걸 한 명에게 쏠렸고, 

뭐라 속닥거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손을 뻗으며 다가오는 모습이 숨을 막히게 해 무작정 도망쳤다.

그 뒤로는 감히 회당에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요즘 너무 초췌해진거 아니야? 기다려 봐, 주방에서 맛있는 거라도 가져올게'


급변하는 환경에 불안을 느낀 건 더치 걸 혼자만이 아니었다.

기대를 걸었던 오르카가 줄곧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에 점점 언짢음을 표하던 티에치엔이 

어느 날 사령관에게 직접 찾아가 따져보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방을 나선 적이 있다.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멍하니 있는 더치 걸이 걱정됐는지, 나가기 직전에 저런 말을 남겼었다.


'...늦네요....'


시간이 제법 지나도 돌아오지 않기에, 마침 냉장고도 텅 비어있기에 기다리다 못해 점점 배를 두드리는 허기를 달래고자 조용히 문을 나섰다.

바닥에 찍힌 발자국과 구석에 쌓인 먼지, 이따금 작동하지 않는 전등이 자꾸 눈에 밟혔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가며 시설 관리와 청소에 여념이 없던 서글서글한 인상의 메이드 언니도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다.

활달한 친구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모험을 하던 당시엔 그렇게나 두근거리고 가는 곳마다 따사로움이 느껴졌는데

이젠 하나같이 낯설고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유일하게 안 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주방을 빼꼼 살펴봤지만, 

마지막으로 손을 탄 게 꽤나 전인지 아무렇게나 방치된 조리 기구들만이 차갑게 반겨준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걷다 보니 저 멀리 회당이 보인다.

무의식적으로 발에 익었나 보다.

마침 예배 중인지, 왁자지껄한 열기가 여기까지 전해지며 한데 모여 춤을 추고 있다.

빙글빙글 손을 잡고 도는 원 한가운데 놓인 것은 매섭게 타오르는 장작불.

두텁게 쌓인 나무토막 위로 삐죽 솟은 장대엔 티에치엔이 묶인 채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다.


'히익!'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틀어막았다.

아무리 순진하고 어리다 한들 눈치 없는 바보는 아니다. 섣불리 인기척을 내면 뒷일이 어떻게 될지 짐작이야 할 수 있다.

물론 아이 특유의 마구 치솟는 상상력일 수도 있지만, 저 광경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모양새인가?

다행히 들키진 않은 듯하다.

복도 구석으로 몸을 숨기고 고개만 살짝 내민다. 잘못 본 거겠지.

그 강하고 매사 자신만만한 티에치엔이 한낱 장작 구이가 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단상 뒤에 서 있는 아자젤이 신호를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뜯어먹는 참상은 거짓임이 분명하다.

창자가 저렇게 길게 튀어나올 리가 없잖아.


'욱...우웩....'


소리를 죽여 구토한다. 먹은 게 없다 보니 위액만 나온다.

뭘 먹어야 할 텐데, 티에치엔이 맛있는 걸 가져오겠다 했는데, 정작 지금 저렇게 보기 좋은 갈색으로 구워져서는....


'커헉, 우웨에엑!'


역겨움에 더는 버틸 수가 없다.

누가 쫓아오는지 뒤돌아볼 엄두도 내지 않고, 그저 방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무슨 일 있었어요?'


마이티R이 걱정스럽게 물어봐도 대답할 수 없다.

말한들 믿을까? 믿는들 뭘 어떡할까?

여긴 지옥이다. 가장 고통스럽고 괴롭게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다 죽은 후 시체마저 곱게 두지 않는 최악의 장소다.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곤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것.

괜히 주의를 끌지만 않으면 될 거야. 얌전히 숨죽이고 있는데 억지로 끄집어내진 않겠지.

이런 유치한 기대도 몇 시간 전에 산산조각 났다. 회당에서 몇 번 본 검은 천사가 찾아와 마이티R마저 데려가 버렸다.

방 안에 얌전히 있으라 했지만, 그러다 천사가 돌아오면?

더 이상 자신 대신 끌려갈 이도 없다.

아마 지금쯤 더치 걸을 엄마처럼 잘 보살펴줬던 마이티R은....




"아아,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받아주는 이 없는 사과를 외친다.

잠시나마 자신은 아직 살아있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대신 잡혀가 줘서 고맙다고 생각했다.

어쩜 이리 잔혹하고 이기적일까? 내가 오르카의 저 괴물들과 다른 게 뭘까?

더 이상 여기 머무를 수는 없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




"쿵...쿠웅...."


묵직한 기계음이 불규칙하게 들려온다.

커다란 잠수함이니 분명 작은 탈출정도 딸려있을 거라는 생각에 정비실을 찾아 정처 없이 뛰어다녔다.

어디가 어딘지 몰라 같은 곳을 빙빙 돌기도 하고, 혹여 다른 바이오로이드와 마주칠까 겁이 나 몸을 웅크리기도 했다.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분위기가 사뭇 다른 구역에 진입했다.

코를 찌르는 금속의 냄새.

예전 지하에서 맡았던 것과 비슷한 냄새라 차라리 반가울 지경이다.

어둑어둑한 조명이 신경 쓰이지만, 앞이 아주 안보이는 건 아니니 다행이다.


"찰박"


바닥에 웅덩이가 고여있었나 보다.

내려다보니 녹색 점액질이 신발에 눌어붙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니 이만 가라는 듯 갑자기 물처럼 훅 퍼진다. 정비에 쓰는 용액인 걸까?


"어, 안녕하세요...? 일부러 들어온 건 아니에요, 화나셨다면 죄송해요"


좌우를 살피다 정작 앞을 제대로 못 봤다.

정비복을 입은 여성이 떡하니 가로막고 있기에 몸을 숨기기에도, 도망치기에도 늦은 듯하여 공손히 인사를 올린다.

하지만 맞인사는 돌아오지 않고, 조심스레 안색을 살펴보니 철제 프레임에 기묘한 자세로 몸을 기대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저기요...? 으아악!"


흐릿한 조명에 차츰 익숙해져 자세한 모습이 드러난다.

팔이 달려있어야 할 자리엔 다리가 달려있고, 무릎 아래로는 팔뚝이 붙어있어 손바닥이 발 대신 몸을 지탱하고 있다.

접합부는 공업용 스테이플러로 대충 박은 철심이 얼기설기 얽혀있다.

목 위로는 아무것도 없고, 임신한 건가 착각이 든 볼록한 배는 세로로 찢겨 머리가 들어있었다.

악취미의 결정체인 오브제가 곧 너도 이렇게 될 거라며 속삭이는 것 같다.


"흐앙, 흐아앙!"


최대한 빨리 여기서 멀어지고 싶다.

차라리 입구로 돌아가면 나았을 텐데, 바로 옆의 계단에 다짜고짜 몸을 던진 게 화근이었다.

아래로 향하는 구조는 갈수록 어두워지고, 중간에 발을 헛디뎌 엉망진창으로 구르기도 했다.

팔이 쓰라리고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지만 멈출 수가 없다.

절뚝거리면서 다른 층에 도착한 걸 뒤늦게 깨닫지만 이제 와서 다시 올라갈 용기는 나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헬멧을 쓰고 올걸.

몸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고자 장비를 전부 두고 온 게 오판이었다.

거기 달린 탄광 등이 유용할 거라는 걸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저 멀리 보이는 조명을 향해 나아간다.


"...어?"


느낌이 이상하다. 올록볼록한 금속이 마치 살아있는 듯 꿀렁거리고, 뭔가 손등을 살살 간질인다.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로봇이 어깨에 여성을 태운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제가 기분 나쁘게 했을까요...?"


제발 이번에는 아니길 바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해본다.


"대마왕님의 진정한 각성을 기념할 선물이 제 발로 굴러 왔구나. 마검을 붉게 물들이면 그분께서 한층 기뻐하시리라!"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귀 옆이 시원해진다.

그것도 잠시, 불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는 생존본능이 심장을 때린다.


"아악! 아아악!"


저 앞의 복도를 향해 달린다.

떨어진 귀를 주울 여유는 없다.

검을 마구 휘두르며 골타리온이 더치 걸의 뒤를 쫓는다.


"거기 서라! 얌전히 목을 대면 고통 없이 보내주겠다!"


올곧게 난 복도를 달린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다.

다시금 넓어진 공간에 저장고로 보이는 시설이 한가득 펼쳐진다.

그럴 여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뒤돌아보니 로봇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져 있다.

계속 달리면 떨쳐낼 수 있을까?

가만, 방금 뭐였지?

다시 뒤를 돌아본다.

추적자의 관절마다 튀어나온 녹색 촉수가 꿈틀거리며 발목을 채려 하고 있다.

어깨에 올라탄 것으로 착각했던 여성은 머리만 남은 채 촉수가 장난감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 머리가 하나, 둘, 셋.

속히 네 번째 머리가 되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싫어...! 초록은 이제 싫어...!"


무성한 나무와 싱그러운 풀도 필요 없다.

저 녹색, 소름 끼치는 녹색은 동공을 지나 뇌 가장 깊숙한 곳에 새겨져 영원히 떨칠 수 없을 것 같다.

살고 싶다. 영원히 땅속에서 돌을 부수고 깊숙이 파나가야만 한다 해도 살고 싶다.

어딘가로 파고들면 될까? 그럼 저 괴물을 따돌릴 수 있을까?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거기 서라! 이 쥐방울만한 녀석 같으니, 내가 찾지 못할 줄 아느냐!"


골타리온이 저장고 뒤로 잽싸게 돌아간 더치 걸을 시야에서 잠시 놓치고 아득바득 외친다. 

지금이 기회다. 완전히 따돌려야 한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 저장고 꼭대기에 이른다. 

안에 맑은 물이 한가득 차있는 물탱크다. 운 좋게도 뚜껑이 열려있다.

이 거대한 저장고를 덮는 뚜껑이니, 만약 닫혀있었다면 더치 걸 혼자선 도저히 옮기지 못했겠지.

잠수 경험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아니다. 추적을 완전히 뿌리치기 위해선 몸을 수그리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첨벙!"


혹시 이 소리를 듣고 위치를 파악한 건 아니겠지?

불안을 억누르며 어색한 물장구를 친다. 다행히 반 뼘 정도 숨을 쉴 여유는 있다.

최대한 숨죽이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피에 눈먼 살육 병기가 제풀에 지쳐 떠나길 바라면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갔을까?


"터억"

 

뚜껑이 밖에서부터 닫혔다.


"어?!"


당황해 손을 뻗어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도저히 옮길 무게가 아닐뿐더러, 애초에 안에서 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안돼, 살려주세요, 안에 있어요!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바로 곁에 골타리온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지금 이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익사하고 만다.

쾅쾅거리며 뚜껑을 두드려보지만 미동조차 않는다. 

한 줄기 빛도 비추지 않는 어둠 속에서 차디찬 물이 온몸을 집어삼킨다.


"살려...주...꼬르륵""흑...흐윽...!"


더치 걸이 울부짖으며 달려나간다.

이 잠수함이 너무나도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땅속에서 하염없이 드릴을 돌리고 곡괭이질을 하던 날이 나았다.

몸은 고되고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 기다려 미래가 없었지만, 최소한 더 나빠지지는 않았으니까.

달라지지 않는 나날, 언제나 똑같은 나날이 행복에 겨운 배부른 소리였을 줄이야.




LRL의 명복을 빌어주고자 향했던 회당에서 봤던 광경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입구에 세워진 장대에 걸려있던 몸뚱어리.

구석구석까지 새겨진 폭력과 유린의 흔적은 보기만 해도 치가 떨렸다.

이게 과연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주던 오르카의 구성원들이 저지른 행동인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너무나도 두려웠다.

과자를 줄 테니 잠시 앉았다 가라는 아자젤의 따스한 제안마저 섬뜩하게 다가왔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그 너머에는 어떤 본색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소모품처럼 굴려지며 인격체다운 대접을 기대할 수 없었던 PECS 시절에 종지부를 찍고

자유와 존중이 포근하게 반겨주는 희망한 새 삶을 기대했다.

그렇게 들었으니까. 사령관이라는 사람은 멸망 전의 인류와는 다르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게 기만이라면?

결국 자신도 저렇게 장대에 걸려 돌팔매질을 당하고 다리 사이로 흉측한 이물질이 박힌다면?

머리가 잘려 공처럼 굴려진다면?

지나친 피해망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사령관이 그때 무슨 연설을 했던가.

한 명이라도 오르카를 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끝까지 심판한다 하지 않았던가.

내가 과연 오르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을까? 혹여 실수라도 하면 바로 내쳐지는 건 아닐까?

알 수 없었다.

이들의 본성은 무엇인가.

과연 어떤 게 진정한 모습인가.


'LRL...보고 싶어....'


얼마 지나지도 않은 후에 겪은 일도 마찬가지였다.

추모를 그만둘 수는 없기에 꺼림칙한 마음을 품고 회당에 다시 향했다.

장대가 보이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도하려 교단의 상징 앞에 다가가니 유품인 안대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옮겨졌느냐 물어보니 쓰레기는 치웠다고 대수롭지 않게 답해준 아자젤.

그 무심하고 별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믿을 수 없는 말에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예배 시간이라며 모여든 인파에 치여 입구까지 밀려났고,

마음에 한 줄기 위안이라도 얻고자 귀를 쫑긋 세워 설교를 들으니 그 내용이 감당할 수 없이 잔인하고 가혹했다.

이야기로만 접했던 멸망 전의 인류가 감히 그랬으랴 싶을 정도의 소름 끼치는 연설.

더 무서운 건 이를 이미 행동으로 몇 번은 옮긴 듯한 신자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분위기에 압도당해 넘어지면서 낸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더치 걸 한 명에게 쏠렸고, 

뭐라 속닥거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손을 뻗으며 다가오는 모습이 숨을 막히게 해 무작정 도망쳤다.

그 뒤로는 감히 회당에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요즘 너무 초췌해진거 아니야? 기다려 봐, 주방에서 맛있는 거라도 가져올게'


급변하는 환경에 불안을 느낀 건 더치 걸 혼자만이 아니었다.

기대를 걸었던 오르카가 줄곧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에 점점 언짢음을 표하던 티에치엔이 

어느 날 사령관에게 직접 찾아가 따져보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방을 나선 적이 있다.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멍하니 있는 더치 걸이 걱정됐는지, 나가기 직전에 저런 말을 남겼었다.


'...늦네요....'


시간이 제법 지나도 돌아오지 않기에, 마침 냉장고도 텅 비어있기에 기다리다 못해 점점 배를 두드리는 허기를 달래고자 조용히 문을 나섰다.

바닥에 찍힌 발자국과 구석에 쌓인 먼지, 이따금 작동하지 않는 전등이 자꾸 눈에 밟혔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오가며 시설 관리와 청소에 여념이 없던 서글서글한 인상의 메이드 언니도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다.

활달한 친구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모험을 하던 당시엔 그렇게나 두근거리고 가는 곳마다 따사로움이 느껴졌는데

이젠 하나같이 낯설고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유일하게 안 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주방을 빼꼼 살펴봤지만, 

마지막으로 손을 탄 게 꽤나 전인지 아무렇게나 방치된 조리 기구들만이 차갑게 반겨준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걷다 보니 저 멀리 회당이 보인다.

무의식적으로 발에 익었나 보다.

마침 예배 중인지, 왁자지껄한 열기가 여기까지 전해지며 한데 모여 춤을 추고 있다.

빙글빙글 손을 잡고 도는 원 한가운데 놓인 것은 매섭게 타오르는 장작불.

두텁게 쌓인 나무토막 위로 삐죽 솟은 장대엔 티에치엔이 묶인 채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다.


'히익!'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틀어막았다.

아무리 순진하고 어리다 한들 눈치 없는 바보는 아니다. 섣불리 인기척을 내면 뒷일이 어떻게 될지 짐작이야 할 수 있다.

물론 아이 특유의 마구 치솟는 상상력일 수도 있지만, 저 광경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모양새인가?

다행히 들키진 않은 듯하다.

복도 구석으로 몸을 숨기고 고개만 살짝 내민다. 잘못 본 거겠지.

그 강하고 매사 자신만만한 티에치엔이 한낱 장작 구이가 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단상 뒤에 서 있는 아자젤이 신호를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뜯어먹는 참상은 거짓임이 분명하다.

창자가 저렇게 길게 튀어나올 리가 없잖아.


'욱...우웩....'


소리를 죽여 구토한다. 먹은 게 없다 보니 위액만 나온다.

뭘 먹어야 할 텐데, 티에치엔이 맛있는 걸 가져오겠다 했는데, 정작 지금 저렇게 보기 좋은 갈색으로 구워져서는....


'커헉, 우웨에엑!'


역겨움에 더는 버틸 수가 없다.

누가 쫓아오는지 뒤돌아볼 엄두도 내지 않고, 그저 방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무슨 일 있었어요?'


마이티R이 걱정스럽게 물어봐도 대답할 수 없다.

말한들 믿을까? 믿는들 뭘 어떡할까?

여긴 지옥이다. 가장 고통스럽고 괴롭게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다 죽은 후 시체마저 곱게 두지 않는 최악의 장소다.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곤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것.

괜히 주의를 끌지만 않으면 될 거야. 얌전히 숨죽이고 있는데 억지로 끄집어내진 않겠지.

이런 유치한 기대도 몇 시간 전에 산산조각 났다. 회당에서 몇 번 본 검은 천사가 찾아와 마이티R마저 데려가 버렸다.

방 안에 얌전히 있으라 했지만, 그러다 천사가 돌아오면?

더 이상 자신 대신 끌려갈 이도 없다.

아마 지금쯤 더치 걸을 엄마처럼 잘 보살펴줬던 마이티R은....




"아아,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받아주는 이 없는 사과를 외친다.

잠시나마 자신은 아직 살아있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대신 잡혀가 줘서 고맙다고 생각했다.

어쩜 이리 잔혹하고 이기적일까? 내가 오르카의 저 괴물들과 다른 게 뭘까?

더 이상 여기 머무를 수는 없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한다.




"쿵...쿠웅...."


묵직한 기계음이 불규칙하게 들려온다.

커다란 잠수함이니 분명 작은 탈출정도 딸려있을 거라는 생각에 정비실을 찾아 정처 없이 뛰어다녔다.

어디가 어딘지 몰라 같은 곳을 빙빙 돌기도 하고, 혹여 다른 바이오로이드와 마주칠까 겁이 나 몸을 웅크리기도 했다.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분위기가 사뭇 다른 구역에 진입했다.

코를 찌르는 금속의 냄새.

예전 지하에서 맡았던 것과 비슷한 냄새라 차라리 반가울 지경이다.

어둑어둑한 조명이 신경 쓰이지만, 앞이 아주 안보이는 건 아니니 다행이다.


"찰박"


바닥에 웅덩이가 고여있었나 보다.

내려다보니 녹색 점액질이 신발에 눌어붙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니 이만 가라는 듯 갑자기 물처럼 훅 퍼진다. 정비에 쓰는 용액인 걸까?


"어, 안녕하세요...? 일부러 들어온 건 아니에요, 화나셨다면 죄송해요"


좌우를 살피다 정작 앞을 제대로 못 봤다.

정비복을 입은 여성이 떡하니 가로막고 있기에 몸을 숨기기에도, 도망치기에도 늦은 듯하여 공손히 인사를 올린다.

하지만 맞인사는 돌아오지 않고, 조심스레 안색을 살펴보니 철제 프레임에 기묘한 자세로 몸을 기대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저기요...? 으아악!"


흐릿한 조명에 차츰 익숙해져 자세한 모습이 드러난다.

팔이 달려있어야 할 자리엔 다리가 달려있고, 무릎 아래로는 팔뚝이 붙어있어 손바닥이 발 대신 몸을 지탱하고 있다.

접합부는 공업용 스테이플러로 대충 박은 철심이 얼기설기 얽혀있다.

목 위로는 아무것도 없고, 임신한 건가 착각이 든 볼록한 배는 세로로 찢겨 머리가 들어있었다.

악취미의 결정체인 오브제가 곧 너도 이렇게 될 거라며 속삭이는 것 같다.


"흐앙, 흐아앙!"


최대한 빨리 여기서 멀어지고 싶다.

차라리 입구로 돌아가면 나았을 텐데, 바로 옆의 계단에 다짜고짜 몸을 던진 게 화근이었다.

아래로 향하는 구조는 갈수록 어두워지고, 중간에 발을 헛디뎌 엉망진창으로 구르기도 했다.

팔이 쓰라리고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지만 멈출 수가 없다.

절뚝거리면서 다른 층에 도착한 걸 뒤늦게 깨닫지만 이제 와서 다시 올라갈 용기는 나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헬멧을 쓰고 올걸.

몸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고자 장비를 전부 두고 온 게 오판이었다.

거기 달린 탄광 등이 유용할 거라는 걸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저 멀리 보이는 조명을 향해 나아간다.


"...어?"


느낌이 이상하다. 올록볼록한 금속이 마치 살아있는 듯 꿀렁거리고, 뭔가 손등을 살살 간질인다.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로봇이 어깨에 여성을 태운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제가 기분 나쁘게 했을까요...?"


제발 이번에는 아니길 바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해본다.


"대마왕님의 진정한 각성을 기념할 선물이 제 발로 굴러 왔구나. 마검을 붉게 물들이면 그분께서 한층 기뻐하시리라!"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귀 옆이 시원해진다.

그것도 잠시, 불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는 생존본능이 심장을 때린다.


"아악! 아아악!"


저 앞의 복도를 향해 달린다.

떨어진 귀를 주울 여유는 없다.

검을 마구 휘두르며 골타리온이 더치 걸의 뒤를 쫓는다.


"거기 서라! 얌전히 목을 대면 고통 없이 보내주겠다!"


올곧게 난 복도를 달린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다.

다시금 넓어진 공간에 저장고로 보이는 시설이 한가득 펼쳐진다.

그럴 여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뒤돌아보니 로봇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져 있다.

계속 달리면 떨쳐낼 수 있을까?

가만, 방금 뭐였지?

다시 뒤를 돌아본다.

추적자의 관절마다 튀어나온 녹색 촉수가 꿈틀거리며 발목을 채려 하고 있다.

어깨에 올라탄 것으로 착각했던 여성은 머리만 남은 채 촉수가 장난감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 머리가 하나, 둘, 셋.

속히 네 번째 머리가 되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싫어...! 초록은 이제 싫어...!"


무성한 나무와 싱그러운 풀도 필요 없다.

저 녹색, 소름 끼치는 녹색은 동공을 지나 뇌 가장 깊숙한 곳에 새겨져 영원히 떨칠 수 없을 것 같다.

살고 싶다. 영원히 땅속에서 돌을 부수고 깊숙이 파나가야만 한다 해도 살고 싶다.

어딘가로 파고들면 될까? 그럼 저 괴물을 따돌릴 수 있을까?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거기 서라! 이 쥐방울만한 녀석 같으니, 내가 찾지 못할 줄 아느냐!"


골타리온이 저장고 뒤로 잽싸게 돌아간 더치 걸을 시야에서 잠시 놓치고 아득바득 외친다. 

지금이 기회다. 완전히 따돌려야 한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 저장고 꼭대기에 이른다. 

안에 맑은 물이 한가득 차있는 물탱크다. 운 좋게도 뚜껑이 열려있다.

이 거대한 저장고를 덮는 뚜껑이니, 만약 닫혀있었다면 더치 걸 혼자선 도저히 옮기지 못했겠지.

잠수 경험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아니다. 추적을 완전히 뿌리치기 위해선 몸을 수그리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첨벙!"


혹시 이 소리를 듣고 위치를 파악한 건 아니겠지?

불안을 억누르며 어색한 물장구를 친다. 다행히 반 뼘 정도 숨을 쉴 여유는 있다.

최대한 숨죽이고 신경을 곤두세운다. 피에 눈먼 살육 병기가 제풀에 지쳐 떠나길 바라면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갔을까?


"터억"

 

뚜껑이 밖에서부터 닫혔다.


"어?!"


당황해 손을 뻗어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도저히 옮길 무게가 아닐뿐더러, 애초에 안에서 열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안돼, 살려주세요, 안에 있어요!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바로 곁에 골타리온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지금 이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익사하고 만다.

쾅쾅거리며 뚜껑을 두드려보지만 미동조차 않는다. 

한 줄기 빛도 비추지 않는 어둠 속에서 차디찬 물이 온몸을 집어삼킨다.


"살려...주...꼬르륵"

57

"...아직 살아있습니까...하아...."


베로니카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뜬다.

죽는 한이 있어도 빛을 모독하는 행위를 저지하고자 아자젤을 쐈던 기억은 난다.

동시에 사라카엘이 자신을 향해 전격의 창을 휘두르려던 것도 같다.

맞았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텐데, 지금 이렇게 숨이 붙어있다는 건....


"빛이시여...이걸 감사해야 합니까? 저를 이 지옥의 무저갱에 아직 남겨두신 게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비틀거리며 억지로 일어나본다.

다리는 그럭저럭 움직인다. 왼쪽 눈은 뿌옇게 안개가 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다. 어쩌면 진작에 타버렸는지도 모른다.


"전...이제 대체 어찌해야 하는 거죠...."


파괴의 상흔이 남은 회당을 바라본다.

쓰러진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몇십 분? 몇 시간? 어쩌면 며칠?

교단의 상징은 산산조각이 나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없고, 아자젤의 축 늘어진 시체가 코헤이의 파멸을 알리고 있다.

근처에 널브러진 심판자의 옷조각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기 어렵게 한다.

만약 다시 마주친다면 그때는 확실하게 살해당하겠지.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교단이 무너지고 신앙이 붕괴했는데 살아서 무엇하랴.

목표를 잃은 공허함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구원자....'


문득 아직 남은 목표가 떠오른다.

모든 걸 잃었지만 여전히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가장 굳건한 유일한 목표가.

곱씹어보니 씁쓸하다.

자신보다 훨씬 건실한 신앙의 소유자인 아자젤도, 사라카엘도 타락했다.

단순히 빛에 충실한걸 말하는 게 아니다.

코헤이의 추악한 실체는 가고시마에서 모두 깨달았고, 

그 후로 사령관을 진정한 구원자이자 빛의 화신이라 재차 인정하고 섬기며 새로운 기준으로 삼았다.

너무 직설적이라, 그리고 세속적이라 표현을 지양했지만 그건 분명 사랑이었다.

공적인 자리가 아니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풀어지고 어설퍼지는 아자젤이 품은 진정으로 굳건하고 흔들림 없는 감정.

율법을 중시하며 강경한 자세로 일관했던 사라카엘의 딱딱한 마음마저 결국 녹인 위대한 힘.

사령관이 우리를 이끌어주는 이상, 사랑이 존재하는 이상 그 어떤 위기와 시련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쇼거스의 광기는 이마저도 뛰어넘었단 말인가?

아니, 순서가 잘못됐는지도 모른다. 사령관을 향한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았겠지.

그 사령관이 일그러졌다면?

레모네이드의 토막 낸 시신을 들고 와 회당 입구에 세웠던 순간이 아른거린다.

여전히 오르카의 일원을 아끼고, 거기서 비롯된 행동이라 했지만....

기존에 알던 사령관의 모습은 분명 아니었다.

어쩌면 잘못된 건 베로니카 자신이 아닐까?

사령관을 진정 사랑한다면 달라진 모습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아자젤이 그랬고, 사라카엘도 그랬다.

예배, 그 심판받아 마땅한 추악한 부정을 예배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기에 참석한 다른 바이오로이드들도 한마음으로 뭉쳤다.

다들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데 나 홀로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태된 건 아닐까?

믿음은 지식으로, 논리로 따르는 게 아니다. 그저 믿는 거다.

아니, 그렇지 않다. 지금 급변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합리화를 시도하는 거다.

그 둘은 이단의 행보를 걸었으니 마땅히 빛의 심판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뭐가 이단이지? 사령관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자이자 기준이 아닌가? 그 기준을 벗어나 고루한 행보를 고집한다면 이야말로 이단이 아닌가?

내가 이단인가?


"아자젤...들리나요? 대답 좀 해주세요. 제가 틀린 겁니까, 그대가 틀린 겁니까? 전 이제 어떡해야 하죠?"


대답할리 없는 시체를 붙잡고 흔들어본다.

사령관의 방에 가 고해성사를 하면 좀 나아질까?

아니, 무슨 낯으로 갈 수 있을까. 

그렇게나 오르카의 일원을 아끼는 사령관인데, 베로니카가 저지른 짓을 알면 사지를 토막 내고는 장대에 매달게 분명하다.


"빛이여...."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고 정처없는 순례를 떠난다. 목적도 도착지도 없는 순례를.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낫겠지.




"어머, 무사하셨군요?"


키르케가 반갑게 손을 흔든다.


"아아...살아계셨습니까"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띄워본다.

도저히 웃을 기분이 아니지만, 자신이 망가졌다고 다른 이까지 망가뜨릴 수는 없다.

빛은 언제나 온 방향으로 뻗어 나가니까.

그 끝에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해도, 의미 있는 씨앗을 틔운다면 그걸로 족하다.


"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식사는 하셨어요?"


"그리 배가 고프진 않습니다"


위장이 속에서부터 익어버렸으니까.


"흐흥~고민이 있는 것 같은걸요. 그것도 아주 깊고 큰 고민이. 괜찮다면 한잔 걸치면서 풀어볼까요?"


살갑게 여느 때와 같은 술자리를 권하지만 내키지 않는다. 풀 수 있는 고민이 아니니까.

어지간하면 최대한 비위를 맞추며 어울려주고 싶지만, 지금 가슴에 품은 상념을 드러내 봤자 걱정만 끼치겠지. 정중히 사양하도록 할까.


"죄송하지만 이번엔...."


"쉿, 부담 갖지 마세요"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마녀가 다시 유혹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억지로 털어놓을 필요는 없어요. 강요하는 게 아니니까.

전 그저...제가 정말 힘들고 괴로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지 못했을 때, 

술에 기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공허한 껍데기로 숨만 이어갔을 때,

그 절망의 늪에서 끝내 구원받은 경험이 있기에 손을 내밀고 싶을 뿐이에요.

일단 살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다 보면 살아있는 것 자체가 괴로울 뿐인 현실도 잠시 잊을 수 있겠죠"


"풋"


당당한걸 넘어 뻔뻔한 선언에 절로 헛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솔직함이야말로 강력한 무기. 마녀의 마술이 효과를 발휘했다.


"좋습니다. 오래간만에 같이 잔을 기울이도록 할까요"




"헤헤, 역시 술은 같이 마실 친구가 많을수록 좋죠"


키르케의 방으로 들어가니 먼저 기다리고 있던 커넥터 유미가 반긴다.


"오늘은 한층 즐거울 거에요. 제가 특별히 빚은 술을 꺼낼 거거든요"


의미심장하게 웃는 키르케의 눈이 반짝인다.


"...빗자루 연료로 만든 건 아니겠죠?"


"걱정 마세요. 이번 건 엄선한 재료를 썼으니까요"


찬장에서 꺼낸 잔 세 개에 쪼르르 하고 맑은 술이 담긴다.


"오옷~향이 정말 좋네요?"


유미가 깜짝 놀란다.

냄새를 제대로 맡을 수 없는 베로니카의 코에도 은은하면서 매력적인 향이 느껴진다.


"그럼 다 같이, 건배~"


잔이 짠 부딪치고 저마다의 입으로 향한다.

혀끝을 맴도는 비장의 레시피가 한껏 존재감을 뽐내며 부드럽게 목넘김으로 이어진다.


"어때요?"


"...다 좋은데, 마지막에 살짝 이상한 맛이 나는데요?"


유미가 인상을 찌푸린다.


"네?! 그럴 리가?"


당황한 키르케가 자신의 잔을 다시 채우고는 급하게 들이킨다.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한잔 더 들이킨다.


"...이상하네요. 설마 물이 상했나?"


"어디 물을 쓰셨습니까?"


"오르카 정수시설에서 받아 만들었죠. 물탱크에 뭔가 섞였나...."


기껏 준비한 비장의 술이 만족스럽게 빚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제법 언짢은 모양이다.


"요즘 설비 곳곳에 문제가 워낙 많으니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마실만한데요? 전에 도전했던 빗자루 연료주에 비하면...."


"나름 인상적인 경험이지 않았나요?"


"뱃속에 케미컬 칙이 들어가 있고 머릿속에서는 하베스터가 쿵쿵거리는 경험은 다시 하고 싶지 않은걸요"


몸을 부르르 떨며 진절머리 치는 광경에 문득 웃음이 나온다.


"후후, 어때요. 같이 마시니 좋죠?"


키르케의 말대로다.

고민을 들어줄 이가 있는 것도 좋고 머리를 맞대 해결책을 찾는 것도 좋다.

하지만 모든 걸 잊고 그저 잔을 기울이는 이 순간도 좋다.

숨이 붙어있다면, 살아가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겠지.


"어라...도수가 좀 높았나 봐요...갑자기 취기가...."


유미가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내더니 휘청거린다.

키르케가 베개를 꺼내 머리를 받쳐주려 하자, 양손으로 얼굴을 움켜쥐더니 갑작스럽게 입을 맞춘다.


"으읍...."


"크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살짝 돌린다.

취하면 온갖 기행이 일상이라지만, 설마 내재된 성 취향을 보게 될 줄이야.

술에서 깨면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 그러길 바라야겠다.

슬슬 진정됐으려니 싶어 둘을 바라보니, 유미의 입에서 튀어나온 녹색 점액이 키르케의 입으로 들어가 둘을 잇고 있었다.


"...빛이시여...."


취기가 싹 가신다.

아까 마신 술이 생애 마지막으로 마신 술이 될지도 모르겠다.




홀로 잔을 기울인다.

사방팔방이 폭격이라도 맞은 듯 엉망진창이 된 오르카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펍은 멀쩡하다.

바텐더가 있다면 분위기가 살 텐데, 직접 술병을 꺼내 잔에 따르는 꼴이라니, 원.


"딸랑~"


나무로 된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누군가 들어온다.

이 어둡고 음울한 시기에 술로부터 위안을 얻고자 하는 고독한 영혼이 또 있는 모양이다.


"뭐야, 탈론페더잖아?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야? 칸 대장이 한참 찾았다고"


워울프가 손을 가볍게 들며 반긴다.

탈론페더는 아무 말도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기 시작한다.


"혼자 마시는 것도 낭만이 있지만, 역시 곁에 잔을 나눌 친구가 있는 편이 낫지"


새로 잔을 하나 집어 얼음을 담는다.

능숙하게 탁, 치니 테이블을 미끄러져 바로 옆자리에 정확하게 멈춘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뭐 해? 앉아. 계속 서 있을 생각은 아니지?"


시선을 앞에 고정하고 어떤 술을 새로 딸까 여념이 없는 워울프를 향해 탈론페더의 등에서 녹색 낫이 튀어나온다.

그대로 크게 휘두르려는 찰나, 마음에 드는 병을 집었는지 들뜬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좋겠다. 모습을 흉내 낼 수 있으면 술도 마실 수 있지? 어울려줘"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뽕, 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튀어 오른다.

글라스에 졸졸 따르는 술을 물끄러미 바라본 쇼거스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한잔 들이켰다.


"...이런걸 왜 마시는지 모르겠어"


"어른의 맛이지. 넌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래"


키득거리는 웃음에 여유가 넘친다. 한잔 따라달라는 듯 잔이 미끄러져 온다.


"하아...좋구만"


한숨인지 감탄인지 모를 것을 내뱉고 워울프가 천장을 바라본다.


"나 말이야...대장에게 상처를 줬어"


다음 말을 기다리며 빈 잔을 채워준다. 이렇게 태연자약한 필멸자는 흔치 않으니.


"솔직히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생리현상이잖아? 

옷에 지릴 수도 없고 말이야. 그 잠깐 사이에 그런 일이 생길 줄 알았겠느냐고.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레오나 대장은 큰 충격을 받았고 칸 대장에게 분풀이했지.

대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미소가 씁쓸하다.


"소중한 부하를 잃는다는 게 뭔지 잘 아니까. 

대장 본인부터가 아직도 그 상처에 시달리니까 같은 상처를 입은 레오나 대장이 안쓰러웠겠지.

정작 대장은 아무 잘못이 없고 순전히 내 탓인데"


"죽음을 극복하면 그만이야. 너도 이리로 와"


"이럴 때 영업이냐...모처럼이니 장단 좀 맞춰줘"


얌전히 한잔을 더 따른다.


"그 뒤로 눈에 띄게 불안정해지더라고.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 탈론페더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노심초사에,

평소보다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니 상대적으로 보이는 부하들에겐 관심이 덜 갔겠지.

그 결과 하이에나가 한 건 제대로 한 모양이지만"


변장을 풀어버릴까, 쇼거스는 잠시 고민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때도 난 화장실에 잠시 다녀오느라 자리를 피했어.

뒤늦게 로비에 가보니 난리도 아니더만. 하, 그런 난장판은 본 적이 없어"


"역시 술이 원인 아니야?"


"뭐 어때, 결과적으로 새옹지마잖아"


얌전히 한잔 더 따른다.


"하마터면 나도 휩쓸릴 뻔했지...그나마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녀석을 찾아 이야기를 듣고, 칸 대장을 찾아다녔어.

정말 찾기 힘들더라. 산산조각이 났으니까"


"......."


"부하로서 예의는 갖춰야 하잖아? 오르카에 뭐 묻을 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화장했지. 네 친구들이 알짱거려서 고생 좀 했어"


"다른 동료는?"


"같이 화장했지. 우리 부대에서 살아남은 건 나 혼자야"


술병이 바닥을 보였다.


"뭐,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야. 내가 먼저 죽었다면 칸 대장의 마음에 빈자리가 하나 더 생기는 거잖아?

대장보다 더 오래 살았으니 그런 상처를 주진 않았지. 이 정도면 최악은 아니지?"


"이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됐다는 식으로 워울프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런 건 기대도 안 했어. 애초에 너 얼굴도 없잖아. 

그저...누구에게든 속내를 털어놓고 싶었어"


총성이 바를 뒤흔든다.

순식간에 꼬나든 권총이 쇼거스를 정확히 맞췄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뭉개진 머리가 탈론페더의 형태로 돌아간다.


"아...역시 안되나"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최악은 면했다지만, 그래도 못난 부하로서 저승에서 대장 얼굴 마주할 일은 하고 싶었어. 그게 다야"

58

"으으...이건 악몽이야. 나같이 고귀한 바이오로이드가 어째서 이런...."


드라큐리나가 투덜거리며 불 꺼진 복도를 걷는다.

오르카는 이미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형태에 이르렀다.

사령관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다른 바이오로이드는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어 마주치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나마 주어진 명령에 충실할 AGS도 쇼거스가 물리적으로 들러붙어 AI를 송두리째 뒤트는 모양이었다.


"여긴 또 왜 이렇게 더워...짜증나, 진짜...시원한 토마토 주스 한 잔만 마시면 소원이 없겠는데"


아늑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쉽지 않다.

환상을 본 것인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인지 유독 심하게 날뛴 몇몇에 의해 통로가 상당수 파괴됐다.

그나마 멀쩡한 통로는 쇼거스가 꿈틀거리며 무고한 희생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안전한 곳이 없을까.


"가만...이 진동은 뭐지...?"


민감한 몸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엄청난 질량의 무언가가 들이닥치려 하고 있다.

억지로 틀어막혀 몸부림치는 듯한 이 느낌....


"...세상에, 여기가 그 D구역?! 왜 하필 이딴 곳에 온 건데!"


듣기로는 쇼거스가 끝없이 솟아나 다급히 봉쇄한 구역이 있다고 한다. 

그 역겹고 무시무시한 괴물을 확실히 무찔렀어야지, 어쭙잖게 일을 처리해 왜 이리도 번거롭게 할까.

어쨌든 당장 여기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어딜 가도 여기보다는 낫다.


"아아, 그 웃기는 녀석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필요할 때는 없어...."


아자즈와 이터니티가 그립다. 같이 있을 때는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어느 정도 의지할만하니.


"......."


저 앞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비스마르크의 기술이 집약된 덕에 드라큐리나는 조명이 망가진 복도도 거리낌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자신을 제대로 보호할 수도 없는 나약한 신체지만, 

애초에 위험에 노출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신경을 곤두세워 이리저리 빠져나왔다.

곳곳에 쓰러져있는 시체에 발 한번 걸리지 않은 것도 다 이 진동 감지 능력 덕분이다.

다른 녀석들이라면 꺄악꺄악 비명을 지르며 보기 좋은 사냥감으로 전락했겠지.

어쩌면 이 시체들이 그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AGS는 아니고...제법 묵직한 장비를 걸치고 있나 본데...가슴 무지 크네...아, 이그니스다'


어쩌면 위장한 쇼거스일 수도 있지만 한참 멀리서부터 줄곧 일관된 느낌이었다.

정말 이그니스라면 일대의 유독 높은 온도도 설명된다.

혹시 모르니 일단 근처의 시체 옆에 몸을 숨겨 지켜보자.


"아...여기도...."


멍하니 내뱉는 혼잣말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드라큐리나의 피부에 닿는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다는 상실감.

주어진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

앞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복도는 이그니스에게 남은 현실이자 미래 그 자체였다.


"전 언제나 느리고 쓸모없죠...필요할 때는 없고 뒤늦게 나타나 정리나 할 뿐...."


상심이 큰지 듣는 이를 절로 우울하게 만드는 자학을 일삼는다.

하긴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누구라도 저렇게 되겠지.

과장되게 투덜거리고 불평을 내뱉으며 안에 쌓인 불안을 억지로 쏟거나,

자신의 무력함을 통감하면서 끝없이 무너져 내리거나.

드라큐리나가 전자라면 이그니스는 후자였다.


"흥, 뭘 그리 축 늘어져 있는 거야. 덩치에 안 어울리게.

마침 잘 됐네, 호위가 필요하던 참이었어. 너라면 믿을만하니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줘"


몸을 일으켜 당당히 앞에 선다.

쇼거스라면 위장한 대상의 심리에 이입해 홀로 돌아다니는 상황에서 저리 중얼거리진 않겠지.

남을 속이는 게 목적이지, 자신마저 속이는 게 목적은 아니니까.

논리적으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미지의 대상이기에 어쩌면 헛짚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드라큐리나는 자신의 섬세한 생존 본능을 믿어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저 멀리서 격벽을 계속 두들기는 묵직한 진동을 더는 견디기 어렵다.


"아...아...!"


이그니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탄식을 내뱉으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눈앞의 드라큐리나를 보고도 믿을 수 없는지, 무릎을 꿇어 꼭 껴안는다.


"으윽...아파! 힘 좀 빼"


"여기서 이렇게...흑...흐윽...."


바둥거리며 품을 빠져나오려 들지만 어림도 없다.

연약한 드라큐리나의 근력으로는 중화기의 무게에 익숙한 이그니스로부터 도저히 벗어나지 못한다.


"하아, 됐어...특별히 봐줄게.

너도 힘들었을 테니...덩치에 안 맞게 질질 짜기는"


화염을 다루는 고되고 위험한 역할이지만,

이와 대비되는 인자하고 너그러운 성격은 오르카 내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어떤 고민거리든 묵묵히 들어주는 과묵함, 섣불리 판단하거나 대답하지 않고 마음의 안정을 선사해주는 배려심.

드세고 모난 바이오로이드도 밤이 되면 이그니스를 찾아가 상담을 요청한다는 풍문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런 유순함을 지녔기에 이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는 환경 하에선 버티기 힘들었겠지.


"갑자기 피곤하네...이왕 안은 거 침대까지 옮겨다 줘. 걸을 힘도 안 남았어"


도도한 공주님이 투정을 부린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눈꺼풀이 무겁다.

뭐 이 정도는 괜찮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이그니스니까.

아자즈였다면 즉석에서 부품을 모아 로켓을 만들고 그대로 태워 날려보냈을지도 모르겠다.


"가엽게도...마지막까지 책임질게요"


"응? 그래 주면 나야 좋고...."


진지한 선언에 외려 부담스럽다.

이그니스의 막강한 화력이라면 쇼거스가 튀어나와도 능히 제압할 수 있다.

더 이상 복도를 돌아다니고 싶지도 않지만, 만약 그래야 한다면 곁에 꼭 붙어 떨어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렇게 먼저 챙겨준다니 드라큐리나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다.




품에 안겨 한참을 이동한다.

커다란 가슴이 몸을 누르지만, 부드러워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다.

살짝 높은 체온이 기분 좋게 따스해 스르륵 잠이 올 것만 같다.


"...응? 뭐야?"


조심스러운 손길로 어딘가에 눕혀졌다.

두리번거리니 관인 듯하다.

드라큐리나의 까다로운 취향을 맞추려는 듯 바닥은 푹신한 완충처리가 되어있고, 

흔하디 흔한 직사각형의 형태가 아닌 기교가 넘치는 미려한 디자인이다.


"헤, 제법이잖아? 이 몸에게는 평범한 침대보단 이런 고귀한 잠자리가 어울리지"


이그니스의 세심한 배려에 감탄한다.

토마토 주스도 한 잔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그럼 난 한숨 잘 테니까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깨워줘"


편안히 몸을 눕히고 의식을 저 너머로 가라앉힌다.

얼마만의 숙면인지 모른다.

잠시 후 고로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때마침 준비를 마친 이그니스가 관의 뚜껑을 덮었다.


"미안해요...늦기 전에 찾았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오르카에 재앙이 닥치고 많은 이들이 살해당했다.

복도를 돌아다니면 어렵지 않게 시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돌아다니기도 힘들뿐더러 죽은 자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기에, 이그니스는 무력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정했다.

사령관이 부탁했었던 일.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순간을 책임져달라는 일.

그때 마주했던 눈동자의 빛을 잊지 못한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지만 필사적으로, 억지로 버티던 빛.

다른 이들은 슬퍼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더라도, 사령관에게만큼은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모두를 이끌고 보듬어야 하는 자리니까.

그렇기에 그 슬픔을 대신 짊어진다.

눈물을 흘리며 비탄을 머금고 보이는 시체마다 거둬들여 장례를 치른다.

예기치 못한 죽음이지만 최소한 이 세상을 온전히 떠날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드라큐리나가 담긴 관을 소각로로 밀어 넣는다.

불쌍하게도 D구역 근처에 쓰러져있었지.

그 최후가 어땠을지는 감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화르륵!"


모든 것을 태우는 불꽃이 관을 집어삼킨다.

몇 번이나 해왔고 봐온 일이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관을 밀어 넣어야 할까.

코끝이 찡하다. 눈앞이 흐려진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끝까지 집중한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자신밖에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게 이그니스가 오르카에 헌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꺄아악!"


일렁거리는 화염도 서글픔을 이해하는지, 깊숙이 비명을 지르는 듯하다.

59

"허억!"


발작하듯 몸을 일으킨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침착히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

두 명의 사령관,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쇼거스, 혼란한 총성과 폭발....

로비에 있을 터인 레오나는 땀으로 흠뻑 젖은 침대 위에 반쯤 누워있었다.


"뭐야...?"


방금까지 목숨이 위태로웠는데, 거짓말처럼 평화롭다.

낯익은 방은 평소대로의 모습이고, 선반에는 전에 사령관에게 받은 고급 초콜릿이 놓여 있다.

다급히 날짜를 확인해본다.

그날이다. 알비스와 안드바리를 잃었던 날.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꿈이었던 걸까? 기나긴 악몽에서 마침내 풀려난 걸까?

알 수 없다. 꿈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했고, 현실이라기엔 감당할 수 없었다.


"대장, 발키리입니다. 늦으시는데 혹시 몸이 안 좋으십니까?"


문 너머에서 정중한 노크와 함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으, 응. 좀 피곤해서 그래. 금방 나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허둥지둥하며 거울을 본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얼굴이 반기며,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대장이 이상하다.

매사 완벽하고 빈틈없는 모습을 자랑했는데, 오늘따라 유독 붕 뜨고 당황한 분위기다.

매끈하게 빗던 찰랑거리는 머릿결도 지금은 대충 가라앉혔는지 군데군데 삐죽 튀어나왔다.

요즘 숙면을 취하지 못하던 것 같은데 혹시 그 때문일까.

잠시 후 마주칠 자매들이 걱정스럽다. 괜한 트집을 잡히지 않으면 좋겠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발키리의 걱정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열심히 전투소총을 정비하는 베라와 침대에 철퍼덕 늘어져 있는 알비스가 보인다.

레오나의 기분이 좋지 않다면 저 성실한 분해 정비마저도 진작에 마치지 못했다면서 질타받겠지.

알비스는...말이 필요 없다.

아니나다를까 레오나는 한마디 말도 없이 큰 걸음으로 나태한 햄스터를 향해 다가갔다.

아침부터 큰 사달이 나겠구나 모두 침을 꿀꺽 삼킨 순간, 의외의 광경이 펼쳐졌다.

알비스를 꼭 껴안은 레오나가 숨을 죽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대장? 알비스 무서워...잘못했으니까 울지 마"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그 중심에 놓인 입장에서는 당황스럽다 못해 두려움이 느껴졌다.

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며 소곤거리는 베라와 님프에 아랑곳하지 않고, 레오나는 알비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잘못했어, 알비스...다시는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아무리 봐도 사과하는 대상이 뒤바뀐 것 같다.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내뱉으며 발할라의 지휘관은 자신만이 기억하는, 자매들은 알지 못하는 길을 벗어난 것에 안도했다.




"일정을 갑자기 변경하신 이유에 대해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창고 입구에 선 발키리가 맞은편의 레오나에게 조심스럽게 운을 띄운다.

본디 이 구역의 경계 임무는 알비스가 맡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오늘 하루 숙소에서 푹 쉬라며 깜짝 선물을 안겨주고는 

지휘관 본인이 직접 부관과 해당 임무를 소화하는 솔선수범을 보이는 게 아닌가.

이런 식의 모범은 스틸라인의 마리 대장에게나 어울리지, 효율을 중시하는 레오나에게 어울리지는 않았다.


'사령관과 끝내주는 밤을 보낸 게 아닐까요?'


'분명해요.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확 바뀔 리가 없어요'


분홍빛 낭만을 속닥이는 자매의 방종에도 그저 씩 웃을 뿐, 별다른 제지가 없다. 설마 정말인가?


"가끔은 이런 것도 좋겠다 싶어서 그래. 다른 건 없어"


정말인가보다.

애틋한 사랑이 결실을 맺고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에 발키리는 자신도 모르게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오세아니아에서 있었던 굴욕이 마음에 상처로 남았을까 싶었는데,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법이구나.


"고마워, 발키리"


느닷없는 고백에 어안이벙벙하다.


"자매 모두가...그저 고마워. 나를 믿고 따라줘서. 나와 함께 있어줘서. 

내가 너희를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는 걸 알아줘. 그러니 절대 죽거나 다치면 안 돼"


사랑이 여자를 변하게 한다지만, 이쯤 되면 부담스럽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는 게 부관의 도리겠지.


"새삼스러운 말씀입니다. 저희 모두 대장의 진심을 알고 있습니다. 

발할라는 언제나 함께할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대답에 그간의 회한과 자학이 눈 녹듯 사라진다.




경계 임무는 무사히 끝났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던 워울프는 자신을 째려보는 레오나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금방 복귀했고,

쇼거스는커녕 수상한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창고 관리에 여념이 없는 안드바리를 안아 볼을 비비니 당황하면서도 내심 좋아하는 얼굴이 어찌나 귀엽던지.

그 곁을 지키는 저격수에게선 한치의 방심도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게 완벽하다. 잘못된 걸 바로잡았다.

방으로 돌아와 알비스에게 줄 고급 초콜릿을 집어들자, 다급한 호출이 들어온다.


"큰일 났어! 당장 지휘실로 와봐!"


일렁거리는 불안감을 흩으며 발걸음을 서두른다.

침통한 표정의 사령관과 마리, 칸, 메이, 아스널 등 다른 지휘관들도 보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방금 알비스가 살해당했어"


기껏 바로잡았다 생각한 길이 다시금 뒤엉킨다.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는다.

먹을 이를 잃은 초콜릿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난다.


"레오나...."


칸이 다가와 측은하게 바라보며 손을 뻗는다.

이번엔 칸의 잘못은 없다. 사전에 원천봉쇄했으니까.

하지만 끓어오르는 절망을 억누를 방법이 없다.

제멋대로 분출하는 이 감정을 통제할 수가 없다.


"짜악!"


거칠게 손을 휘둘러 뺨을 때린다.

모두가 놀란 가운데 슬픔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온다.


"어째서, 어째서야...! 이번엔 막았는데, 바로잡았는데...!

그렇게 했는데도 알비스가 살해당했다고? 죽는 걸 막을 수 없다고?

이런 게 어디 있어, 살려내, 살려내란 말이야!"


절규가 메아리친다.

이해할 수 없는 말 사이로 저주가 섞인다.

아끼는 자매를 잃은 슬픔을 누가 감히 이해한다 할 수 있을까.

설령 그럴 수 있는 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렇기에 묵묵히 받아줄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순간에는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기에.


"너,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으면...!"


"꺄악!"


권총을 집어든 레오나가 닥터를 향해 발사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전개에 분위기가 일순간 얼음장처럼 변했고,

아까의 비명이 단말마가 되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놀라운 반응속도의 칸이 레오나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아쇠를 당긴 순간에 밀쳐진 손은 조준이 흐트러졌고

총알은 아쉽게도 닥터의 관자놀이를 스쳐 얕은 상처를 남기는데 그쳤다.

털썩, 하는 소리를 신호로 모두가 레오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압해! 권총부터 떨궈!"


"이거 놔! 저 괴물을 없애야 해!"


"레오나, 진정해라! 이런다고 알비스가 돌아오진 않는다!"


"네가 뭘 알아?! 그 입 닥쳐!"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마리와 칸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저항은 격렬했다.

간신히 일어난 닥터가 한가득 젖은 눈망울을 꿈벅거리며 사령관을 향해 안겼다.


"오빠...나, 나...우와앙!"


"괜찮아, 닥터. 내가 곁에 있잖아. 크게 다치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


다행이라고? 저 괴물의 기만에 다들 속아 넘어가는 게?

시야가 붉게 변한다. 내장 깊은 곳부터 끄집어내는 듯한 기침이 튀어나온다.


"커흑!"


"레오나, 이 무슨...! 정신 차려라, 레오나, 레오나!"


"닥터! 어서 와봐! 레오나가 이상해!"


한가득 내뱉은 피의 선홍색이 아름답다.

저 괴물의 녹색 피와는 다르다. 난 굴복하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심장이 마지막으로 박동했다.


"레오나!"




"허억!"


발작하듯 몸을 일으킨다.

지휘실 바닥에 쓰러졌던 레오나는 땀으로 흠뻑 젖은 침대 위에 반쯤 누워있었다.


"뭐야...?"


분명 심장이 멈췄던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싼 환경은 거짓말처럼 평화롭다.

설마 수복실로 옮겨져 소생한 걸까?

아니다, 여긴 레오나의 방이다.

낯익은 방은 평소대로의 모습이고, 선반에는 전에 사령관에게 받은 고급 초콜릿이 놓여 있다.

떨어뜨려 산산이 조각났던 그 초콜릿이.

머리를 부여잡아 상황을 이해하려 해본다.

될 턱이 없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장, 발키리입니다. 늦으시는데 혹시 몸이 안 좋으십니까?"


문 너머에서 정중한 노크와 함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 하하...하하하...."


메마른 웃음이 새어나온다.

다시 한번 기회가 왔다. 또 한 번 발버둥칠 수 있다.

이번에는 살릴 수 있을까.

이 미로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있는 것일까.




"잠시 쉬었다 가시지 말임다"


브라우니가 숨을 돌리며 제안했다.

마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쓰러진 시체를 의자 삼아 걸터앉았다.


"자네와 함께 싸운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군...얼마나 됐지?"


"그게...37년 후부터는 까먹었지 말임다"


난처하다는 듯 긁적이며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찰랑거린다.

자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저렇게 길었나.

그 정도로 세월이 지났나.


"1692번 브라우니 일병이었던가?"


"그렇슴다"


"내 곁에서 무수한 전과를 올리고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니 일병은 어울리지 않는다.

각하께 돌아가면 부관으로 삼고 특진을 요청하도록 하지"


마리의 제안에 쓴웃음을 짓는다.

어리버리하고 빈틈투성이였던 과거의 병사는 오간 데 없고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용사가 지난 세월을 곱씹고 있었다.


"이야...일개 병사인 제가 그런 말을 들을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슴다.

레프리콘 상병님이나 이뱀이 여기 계셨어야 했는데...."


부질없는 바람이다.

로비에서의 혼란을 어떻게든 수습하고자 마리의 지휘 하에 하나둘 정신을 차린 스틸라인이 맞닥뜨린 것은 밀물처럼 몰려드는 쇼거스였다.

기존의 화력이 전혀 통하지 않는 부조리 가운데 목숨을 갈아 넣으며 어떻게든 버텨나갔고, 

때마침 일어난 정전 후 펼쳐진 광경은 

갑자기 수십 년은 지난 듯 녹슬고 망가진 오르카에 떨어진 부대와 좀비처럼 되살아나 달려드는 전우들이었다.

전쟁에 감정이 개입할 여지는 없고 그저 주어진 역할을 다하면 그걸로 족하다.

하지만 방금까지 등을 맞대고 싸웠으면서 주저 없이 머리를 날려야 하는 상황은 매일같이 극한의 훈련을 거친 병사들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적의를 보이면 좀 나았다.

괴롭다고, 고통스럽다고 외치며 무기도 들지 않고 뻗는 손에 닿으면 몸이 녹아 쇼거스로 변했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바람구멍을 내주면 그제야 안전해졌다.

지난 전장에서 자신을 구해줬던 선임에게 다가오지 말라며 총구를 들이밀어야 하는 현실은 누구도 버티기 힘들었다.

당장 그렇게 레프리콘 상병을 보냈다.

믿을 수 없다며 흔들리던 시선이 기억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그렇게 싸우고, 또 싸우고, 아무리 싸워도 복도는 끝없이 이어지고 전우였던 것들도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신기하게도 배는 고프지 않았다. 피곤하지도 않았다.

온전히 24시간을 전투에 쏟아부을 수 있었고, 중간에 잠시 한숨 돌리는 휴식만으로도 이 지옥을 계속해서 내달릴 수 있었다.

탄약 보급도 문제없다. 기다렸다는 듯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워 쓰면 되니까.

마치 전투를 강요하는 듯한 세계 속에서, 스틸라인은 차츰 마모되고 깎여나가며 최후에는 단둘만이 남았다.


"대장님, 부관이나 특진은 됐으니 소원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슴까?"


"원하는 게 따로 있나. 가능한 선에서 뭐든 해주도록 하지"


"절 쏴주셨으면 함다"


마리의 눈빛이 흔들린다.


"지금 뭐라고 했나?"


"암다...용서받을 수 없는 발언이라는 거 말임다. 하지만 이제 더는 못 버티겠슴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 손으로 죽인 전우들이 다시 나타나 원망함다. 왜 그랬냐고, 꼭 그럴 수밖에 없었느냐고.

차라리 혼자 AGS에게 달려들라면 기꺼이 그러겠슴다. 그 어떤 강력한 적이 상대든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울 자신이 있슴다.

그렇지만 함께 고생하며 전장을 헤쳐온 동료를 이제 필요 없다며 없애는 건...제가 감당할 짓이 못됨다"


묵혀둔 한이 깊었는지, 마침내 말했다는 사실에 표정은 상쾌했다.


"이런 나약한 병사 따위 아무짝에도 쓸모없지 않슴까? 있어봤자 발목만 잡슴다.

아니면 항명했으니 즉결처분해도 아무 불만 없을 검다. 그러니 어서...."


"1692번 브라우니 일병"


마리의 호명에 점점 빨라지던 말이 뚝 끊겼다.


"하나만 묻지. 그럼 왜 자결하지 않은 거지?"


"...전장에서 도망치는 건 병사로서 부끄러운 일임다. 스틸라인의 일원으로서 그렇게 배웠슴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해 남의 손에 죽음을 구걸하는 뻔뻔한 놈이지만, 그래도 그 가르침은 끝까지 지키고 싶었슴다"


수십년에 걸친 설움이 복받친다.


"사실 죽고 싶지 않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무사히 돌아가고 싶슴다!

제가 이런 전장을 뚫고 결국 여기에 왔다고, 사령관 각하의 얼굴을 다시 뵐 수 있어 행복하다고 외치고 싶슴다...!

제 머리를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슴다...하지만 불가능하다는걸 암다...벗어날 수 없다는걸 암다...."


흐느끼는 어깨가 처량하다.

지휘관이 홀로 수많은 부하의 목숨을 짊어지듯, 저 병사는 홀로 수많은 전우의 죽음을 짊어져 왔다.


"......알겠네, 1692번 브라우니 일병. 제대를 허가하지"


"마리 대장님은...기적을 거머쥐시길 바람다"


잠시간의 정적.

이내 짧은 총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아......."


홀로 남은 스틸라인이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전장을 향해 발을 디딘다.

60(完)

"딸깍"


조명을 켜본다.

어떻게 시스템이 복구되기라도 했는지, 방에 다시 불이 들어온다.

여전히 입구를 틀어막은 책상. 하지만 이제 치울 때가 됐다.

갑자기 의욕이 샘솟고 희망을 느껴서가 아니다. 이미 오르카는 현세에 펼쳐진 지옥이다.

여기에 틀어박혀 시간을 끌어본다 한들, 바뀌는 건 없다.

아, 하나 있을 수는 있다. 내가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가리고 있는 사이 광기는 한층 짙어지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나도 저들과 하나가 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 옛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어느 도시에 마녀가 방문해 모두가 마시는 우물에 마법을 걸었다 한다.

그 물을 마신 백성들은 미치광이가 됐지만, 궁성 안의 높으신 분들은 멀쩡했다지.

따로 쓰는 귀한 우물이 있었기에.

광기의 한복판에서 이성을 온존한 귀족들은 느긋하게 바깥의 광란을 지켜봤지만, 점점 옥죄는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고립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고민한 끝에 얻은 해답이 백성들이 마셨던 우물물을 같이 마시는 거였다.

결국 모두가 평등하게 미친 도시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나, 아니었다나.


"그래, 난 오르카의 사령관이야. 사령관이라면 모두를 이끌어야지"


다들 저곳에 있는데 홀로 선을 그을 수는 없다.

심호흡을 한다.

문밖으로 나서자마자 쇼거스가 덮칠 수도 있다.

미쳐버린 바이오로이드가 난도질을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까.

뭐가 됐든 중요한 건 이 상황이 변한다는 거다.

사람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

미래는 변화를 의미한다.

언제나 똑같은 오늘에 머물러 정체될 수는 없다.

두려울지언정, 발을 내딛는 거다.


"리-릿-"


반가우면서 뒤틀린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니 부정형의 리리스가 꿈틀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 죽는구나.


"...극적인 전개는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거였나"


혀를 차며 얌전히 양팔을 벌린다.

로비에서 나를 죽이려 달려들었지만, 마지막에는 머뭇거리며 혼란에 빠진 눈치였다.

곁에 있던 또 다른 나와 헷갈렸겠지.

이제 와서 탓할 생각은 없다.

그동안 리리스가 충성스럽게 경호했던 나날이 떠오른다.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던 집착이 기억난다.

그 부드럽고 탄력 있는 몸의 촉감이 그립다.


"......?"


눈을 감고 다가올 죽음을 기다렸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느껴지는 건 매끈하고 애정 어린 접촉.

문질문질, 문질문질.

살짝 실눈을 떠보니 리리스의 옷...팔인가? 뭐라 표현할 수 없이 뒤섞인 부위가 사령관의 가슴 주변을 문지르고 있었다.


"리리스...."


이렇게 되어서도 아직 헌신하는 걸까.

두려움이 일지만 용기를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리리스의 몸 전체가 밝게 빛난다.

기분이 좋은 걸까?


"이상성욕의 범주를 한 차원 더 넓히셨군요, 주인님"


"으악!"


뒤에서 들려오는 매도에 비명을 지른다.

돌아보니 바닐라가 공손히 양손을 모르고 경멸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바닐라...살아있었어?"


"얼마만의 재회인데 첫인사가 아직 죽지 않았냐는 물음이십니까? 

평소에 책임지고 인성 발달을 도와드려야 했는데...다 제 불찰입니다"


전보다 매도의 수위가 한층 높다.

그보다 첫인사가 막 나가는 건 바닐라도 마찬가지 아닌가?


"어쨌든 다시 봐서 반가워. 정말...보고 싶었어"


"...저도 보고 싶었어요"


애정어린 포옹에 퉁명스럽던 볼이 붉어진다.




"그래서 로비의 그 아비규환 속에서 간신히 몸을 빼내 지금까지 어찌어찌 버텨왔고,

오르카 내의 생존자는 몇이나 남았는지, 어디서 뭘 하는지 파악할 수도 없다라...."


"모든 걸 총괄하는 사령관이 잠적했으니 별수 없었죠"


포옹을 한 번 더 하면 표독스러운 기세가 좀 누그러질까.

팔을 뻗으니 능숙하게 몸을 피하며 손등을 가볍게 탁 친다.


"너무 남발하면 효과가 떨어집니다. 본인의 가치를 고급스럽게 끌어올릴 생각을 하세요"


"최후의 인간이면 충분히 고급이지, 뭐"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투닥거리는 이 순간이 꿈만 같다.

분명 언제나와 같은 일상의 일부였을 텐데, 일상이 비일상이 되고 비일상이 일상이 된 시점이 언제부터였을까.


"때로는 신체적 접촉보다 그윽한 눈빛과 달콤한 속삭임이 더 유용한 순간도 있습니다.

주인님의 외모라면...꺅!"


비명에 신경이 곤두선다.

이 작은 안식마저도 어지럽히는 무언가가 또 나타난 모양이다.

역시나 지난 일상은 꿈의 저편으로 보내야 하는구나.


"무슨 일이야?"


"주인님...거울을 마지막으로 보신 게 언제죠?"


"글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굴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왜 비명을 지르...."


거울에 비친 얼굴은 언제나의 그 얼굴이다. 약간 수척해지긴 했지만.

다만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엔 ■■■■■가 가지고 갔을 돌이 에메랄드빛을 내고 있었다.




"앞은 제대로 보이십니까?"


"응. 아까 만났을 때는 멀쩡했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왜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바닐라가 혀를 찼다.


"이 돌 때문에 그 사달이 났는데, 어떻게든 멀리하려고 구역째로 봉쇄하고...."


말문이 막힌다. 분명 누가 한 몸 내던져 돌을 오르카 밖으로 가져갔던 것 같은데, 누구였지?


"...결국 이 저주인지, 광기일지 모를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나 봅니다"


"지금이라도 괜찮으니 어디 안전한 방을 찾아봐. 리리스가 경호해줄 거야"


"경호라고 하셨습니까...."


바닐라가 저 구석에 얌전히 머물러 있는 리리스를 바라본다.

꿈틀거리던 배가 갈라지며 잠시 리제의 머리가 튀어나오나 싶더니, 양팔로 억지로 밀어 넣고는 기묘한 울음소리를 낸다.


"전 주인님만큼 담력이 강하지 않아 무리입니다. 그냥 계속 여기 있도록 하죠"


"괜찮겠어?"


자신은 어떤 미래든 각오했지만 바닐라는 무사하길 바란다. 

아직 몸도 정신도 멀쩡한 것 같고, 끝까지 살아남는 걸 보고 싶다.

이런 재앙 속에서도 최소한 지켜낸 것이 있음을, 아름다웠던 시절과의 마지막 연결고리가 이렇게 건재함을 증명하고 싶다.


"...사랑하는 분 곁에서 끝까지 함께하고 싶습니다"


들릴락말락 작게 속삭이는 고백은 제대로 닿지 않았다.


"응? 잘 안 들렸어. 뭐라고 했어?"


"머리에 이어 눈도 돌이 된 멍청한 주인님을 제가 아니면 누가 보살피느냐 한탄했습니다"


"너무하네, 정말...."




오르카 전면의 지휘실로 가는 길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았다.

미쳐버린 바이오로이드도, 망가진 AGS도 마주치는 일은 없었고, 

중간에 쇼거스와 맞닥뜨리긴 했지만 달려들기는커녕 천천히 물러나며 길을 터줬다.

마치 왕의 앞길을 막은 무엄함을 용서해달라는 듯이.


"그 해괴한 계획을 재고할 생각은 정녕 없으십니까?"


"이래야만 할 것 같아. 말이 안된다는 건 알지만, 그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불신 가득한 눈매의 바닐라를 달래며 어설픈 변호를 해본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뭍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돌을 발견한 유적으로 향한다니.


"분명 지금의 오르카라면 무사히 돌아가기 전에 침몰할 가능성이 더 크겠죠.

하지만 더 깊은 곳에 위치한 유적으로 간다니...돌이킬 수 없을 거에요"


가능하다면 지상의 햇살을 다시 쬐고 싶다.

모든 걸 내버리고 아무도 모르는 작은 섬에서 바닐라와 단둘이 알콩달콩 여생을 보내고 싶다.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행보지만, 그게 솔직한 심정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변화하는 미래라면 족하다며 목숨을 내던지던 각오는

바닐라와 재회하면서 점점 흐려졌다.

마지막 남은 일상의 연결고리, 소중했던 추억의 조각.

이 조각을 흉측하게 일그러뜨리지 않고 무사히 보물 상자에 집어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상자에 손이 닿지 않는다.

마음속 깊은 목소리는 유적으로 오라고 속삭인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모른다.

하지만 가보면 알겠지.


"설비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지나 모르겠습니다. 복도의 조명조차 군데군데 나간 마당이니...."


둘만의 여생을 꿈꾸는 건 비단 사령관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계속되는 만류에 공감하며,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에 따르며 패널을 띄운다.

오르카의 조작을 이 패널 하나로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애초에 사령관은 명령을 내리기만 했지, 직접 조작해본 경험은 거의 없다.

지나가다 호기심에 몇 번 건드려본 게 다일 뿐.


"...만화도 이러면 욕먹어"


남위 47도 9분, 서경 126도 43분.

기다렸다는 듯 출력된 좌표와 마지막으로 승인 여부를 묻는 확인창이 사령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4,000m가 넘는 수심을 돌파한다.

좌표가 가리키는 지점이 가까워져 온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그럭저럭 순탄했다.

마치 이 모든 게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이.

거리상으로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고, 언제 작동을 멈출지 걱정이던 설비는 놀라울 정도로 잘 버텨줬다.

중간마다 패널에서 출력되는 데이터가 일그러지며 오류로 이어지나 했지만, 

그 때마다 읽을 수 없는 미지의 문자가 화면을 뒤덮으며 붉게 점멸하던 경고가 녹색으로 전환됐다.

방금 외부의 강한 충격으로 오르카 동체 뒷부분이 뜯겨나갔지만, 다급히 격벽을 쳐 피해를 최소화했다.

소실된 게 6할이고 남은 게 4할도 안 되지만 어쨌든 아직 오르카는 전진하고 있었다.

전방을 비추는 탐조등의 불빛 사이로 거대한 기둥이 잡힌다.


"저긴가...."


돌이 놓여있었다는 제단이 이 기둥의 행렬 끝에 위치하고 있을 터.

그곳에 모든 진실과 이 사태의 종지부를 찍을 열쇠도 존재할지 모른다.

아니면 그저 이대로 비참하게 가라앉아 다가오는 최후를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고.


"리릿...."


리리스가 몸을 떨며 분열과 융합을 반복한다.

진정하라고 쓰다듬는 손끝에 닿는 촉감이 기묘하다.

바닐라는 기둥 주변을 감싸고 있는 특이한 외형의 조각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몸은 사람인데 머리는 문어처럼 생겼군요...보기만 해도 속이 메스껍습니다"


사령관이 조각을 보는 순간, 온몸의 피가 멎으며 시야가 급격히 넓어진다.

유체이탈을 하듯 몸을 벗어나 사령관 자신이 보인다.

전면부만 남은 오르카가 보인다.

깊고 깊은 태평양의 수심을 거슬러 오른다.

수면을 돌파해 세계지도에서나 본 대륙의 형태가 보인다.

대기권을 벗어나 지구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창백한 푸른 점을 넘어 태양계가 조그마해진다.

광활한 우주를 두 눈에 품고, 그제야 자신과 마찬가지로 모든 걸 내려다보는 존재와 마주한다.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내용에 머리가 새까맣게 변한다.


"주인님, 주인님!"


바닐라의 다급한 외침에 정신이 든다.


"......아"


눈 앞에 아까 마주한 존재가 있었다.

별의 아이.

지휘실을 감싸는 투명한 창을 사이에 두고, 사령관과 별의 아이가 시선을 주고받는다.

칠흑 같은 어둠 가운데 에메랄드빛이 번뜩인다.


"그래...모든 게 이 순간을 위했던 거야"


닥터의 말이 이해된다.

그동안 소중하다 여겼던, 가치 있다 여겼던 것들이 하등 부질없다.

철충과의 하찮은 병정놀이, 세력의 판도를 두고 겨뤘던 PECS와의 소꿉장난,

멸망이 확정된 가운데 가당찮게도 몸부림쳤던 오르카의 저항 운동.

저 손짓에 응하면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다.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전지전능에 닿아 무궁한 존재로 거듭난다.

어쩌면 자신을 따르던 바이오로이드들도 그 은혜를 덧입을지 모른다.

사령관이나 그 수족이나 별의 아이에겐 일개 장난감에 불과하지만, 그렇기에 소중히 여길 수도 있으니.

손을 뻗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다.

마주 뻗는 저 손과 끝이 닿기만 하면....


"사령관! 포기하지 마라!"


이끌리는 영혼을 붙잡는 목소리가 들린다.


"알바트로스?!"


한 때 신뢰했던 지휘관이 물살을 가르고 돌아와 별의 아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쐐애액!"


맹렬한 돌진이 거대한 몸 한가운데를 꿰뚫는다.

검은 일격을 허용한 무궁한 존재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약속을 지키러 왔다"


담담하게 내뱉는 말이 흐릿해지던 기억 사이에서 한마디를 끄집어낸다.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모두가 죽고 뒤틀려 사령관을 떠난 가운데, 자신을 버렸다 여겼던 지휘관이 돌아와 신의를 입증하고 있다.

그렇게 의심하고 매도했는데 저 충성은 한치 흔들림이 없다.


"사령관이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아직 끝나지 않는다. 

내가 있는 한, 결코 지지 않는다"


분노를 휘감은 촉수가 물리법칙을 벗어나며 날아들지만, 기민한 회피기동을 잡아채지 못한다.

플라즈마 포가 심해의 어둠을 유린할 때마다 전지전능한 육신이 조금씩 찢겨나간다.


"주인님...."


바닐라가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본다. 이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사령관은 마음을 굳히고 답했다.


"이건 끝이 아니야. 시작일 뿐이지"


손을 마저 뻗는다.

오르카의 투명한 창을 사이에 두고 별의 아이가 마주 뻗은 기묘한 손가락과 끝이 닿는다.

뒤에 있던 리리스의 몸이 부풀어 오르며 지휘실을 가득 채워간다.

남은 손으로 바닐라의 손을 꼭 감싸 쥔다.


'넌 선택받았다'


시야가 온통 하얗게 변한다.




불현듯 몸을 일으킨다.

침대 위다.

옆에는 메이의 부드러운 몸뚱어리가 옷을 입은 채 놓여있다.

지난번에 즐긴 후 아무렇게나 팽개쳐뒀는데, 바닐라가 말끔하게 정돈한 걸까.

거칠게 안아 옷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주무른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가슴.

툭 튀어나온 젖꼭지의 촉감이 좋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붉게 변한 얼굴도 볼만하다.

...머리가 제대로 달려있다?


"무, 무, 무, 무슨 짓이야!"


작은 몸에서 어쩜 그리 큰 비명이 나올 수 있는지 신기하다.

아침부터 오르카 호를 뒤흔든 메이가 사령관의 뺨을 맛깔나게 후려갈긴다.


"우와아아앙!"


두다다다 하는 소리를 남기고 맹렬히 뛰어나가는 메이의 뒷모습이 믿기지 않는다. 질 나쁜 꿈인가?


"왜 그래요, 대장?"


"사령관이, 저 멍청한 멍청이 사령관이...!"


충격에 언어능력이 퇴화했는지 메이가 울며 하소연하는 내용이 여기까지 들린다.

문이 열리더니 나이트 앤젤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척 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지금 어떻게 된 거야?"


일단 물을 한 잔 마신다.

식도를 타고 찬 기운이 온몸을 휘감으니 정신이 든다.

분명 별의 아이를 만나 손을 뻗었고, 그 뒤엔....


"설마?"


손등을 꼬집어본다. 따갑다.

뺨을 쳐본다. 아프다.

아니, 애초에 물의 차가움도 느끼고 메이의 부드러운 가슴도 만졌지 않은가. 탄력이 남달랐는데....


"아니, 기대하면 안 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거울을 본다. 두 눈이 멀쩡하다.

가슴을 쓸어도 걸리는 것 하나 없다. 파편은커녕 상처의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꿈인가? 너무나 생생해 현실 같은 꿈? 이제 와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올 리가 없잖아"


문을 나서 복도를 둘러본다.

빗자루로 바닥을 쓸던 바닐라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저 멀리 LRL이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게 보인다.

그 뒤로 안드바리가 소리를 빽빽 지르며 뒤따르고 있다.

있을 수 없는 광경이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다.


"마침 잘 만났구나! 진조의 프린세스가 위기에 빠졌으니, 도움의 손길을 내밀 영광을 특별히 허락하노라!"


"거기 서요! 이번에 잡히면 정말 가만 안 둘 거에요!"


안드바리가 던진 볼펜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LRL의 옆을 스쳤다.


"으악! 살려줘, 사령관!"


그대로 품에 달려드는 LRL을 자신도 모르게 꼭 껴안는다.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느껴진다. 달아오른 숨의 온기가 피부에 와 닿는다.

이건 현실이다. 정교한 꿈 따위가 아니다.

설령 꿈이라 해도 깨고 싶지 않다.


"사령관, 왜 그래? 어, 우는 거야?"


"헥, 헥...뭐에요, 무슨 짓을 했길래 사령관님까지 울린 거에요?"


팔을 뻗어 안드바리를 끌어와 함께 안는다.

체중이 확실히 감긴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진짜다.


"...아침부터 어린아이 둘을 껴안고 흐느끼다니, 이젠 마지막 남은 인간성마저 내버리신 겁니까"


못볼 것을 봤다는 표정으로 내뱉는 바닐라의 매도도 그저 고맙기만 하다.

모든 게 돌아왔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걸 종합해보면 FAN 전파가 오빠의 강화된 신체에 약간의 영향을 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거지"


닥터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름의 가설을 제시했다.

방을 나선 후로 많은 해프닝이 있었다.

살해당한 오르카의 가족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멀쩡히 잘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때마다 감정이 복받쳐 나중엔 리리스가 티슈를 박스째로 들고 따라다녔다.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건강하게 저마다의 위치에서 빛나고 있다.

닥터가 활기찬 아침 인사를 건네며 다가왔을 때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날이 선 말투로 대했지만,

카페에서 아우로라가 정성껏 타준 카페모카를 홀짝이며 그간의 모든 일을 말해주니

진지하게 듣고는 즉석에서 분석에 여념이 없다.

이토록 위하는 모습에 아까의 냉대가 미안하기만 하다.

괜찮다며, 인간의 의식은 연약해 충분히 꿈과 현실을 분간할 수 없다며

나중에 연구실로 와 실험에 응해주면 그걸로 봐주겠다는 제안을 하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가만...닥터의 연구실은 아직 확인하지 않았잖아?'


"좋은 아침~왓슨, 에헤헷. 뭐 마셔?"


됐다.

굳이 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자꾸 귀찮게 해서 미안한데, 내가 겪었던 이 모든 현상이 저 깊은 곳에서 방출되는 FAN 전파의 영향이라고?"


"단정 짓기엔 일러. 하지만 가능성 자체는 고려할만해. 

솔직히 우린 아직도 별의 아이의 정체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잖아.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원인이야. 오빠의 신체가 아무리 강화됐다 한들, 무적이라고 단언하는 건 조심스러워"


영 꺼림칙하다. 한시라도 빨리 뭍으로 돌아가 따사로운 햇살과 사랑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을 마주하고 싶다.


"내가 아직 정신이 좀 오락가락해서 그런데, 오늘이 무슨 날이지? 우리가 왜 여기 있는 거고?"


"우와, 그 악몽이 엄청 지독했나 보네. 

내가 말했던 어군을 포획해 연구대상...아니지, 참치를 마구 확보해 PECS의 손님들에게 배불리 대접하기로 했었잖아.

겸사겸사 근처를 탐사하고 돌아오고 있을 트리 언니도 맞이하고"


맞다, 기억이 난다.


"그래, 전부 떠올랐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소완! 오늘 저녁은 성대한 최고의 만찬을 들고 싶은데, 가능할까?"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소첩, 오늘에야말로 주인의 곁에 가장 어울리는 손길이 누구인지 증명하겠사옵니다"




"이번에도 위대한 모험가 익스트림 네오 뉴 트리아이나의 이름에 걸맞은 멋진 여정이었어!

다들 내 이야기를 들으며 두근거릴 모습이 기대되는걸"


실로 오래간만에 느끼는 큰 만족감이다.

이리 깊은 곳에 놀라울 정도로 거대하고 정교한 유적이 잠들어 있었다니.


"나중에 대규모의 탐사대를 조직해 다시 와야겠어. 사령관이 이 장관을 직접 보면 얼마나 감동할까!

그럼 그때까지 잠시 작별이야, 멋진 유적아!"


손을 흔들며 쏘우피쉬의 방향을 튼다.

장엄한 비밀이 깃든 고대의 유산이 말없이 배웅한다.

일단은 이 작은 돌멩이만 챙겼지만, 다음엔 더 흥미로운 유물을 발굴할 수 있겠지.

오르카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금빛 자맥질 뒤로 물거품이 보글거린다.

아무도 들을 리 없는 검고 차가운 바닷물 사이로,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비웃음이 속삭인다.


"발버둥쳐도 소용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