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쳐 오브 네이쳐 소속 천공의 엘라는 비슷한 나이대의 소녀들과는 조금 다른 소녀였다.


이를테면 LRL과 테티스가 칭얼거릴 상황에서 엘라는 환하게 미소지으며 한 발 물러난다. 다른 아이들처럼 사령관의 아무 곳에나 매달려 떼를 써볼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랬다간 사령관이 곤란해 한다는 것을 잘 알고있다. 실은, 또래들이 사령관의 그런 부분을 파고든다는 것도 알고있다. 살짝 교활해지면 얻을 수 있는게 한가득인데, 엘라는 그것이 영 부담스러워 그러지 못해 손해 보는 일이 꽤나 있었다.


아쿠아와 코코가 나이 지긋한 언니들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면 못보는 척 하는 일 없이 두 아이를 이끈다. 이끈다고 말해도 살짝 목소리만 내보는 것이 전부이지만, 아쿠아와 코코는 그런 엘라에게 도움을 받을 때마다 매번 닮고 싶다고 느낀다. 결과적으로 엘라도 자신들과 다를 것 없이 언니들에게 기죽게 되더라도 말이다.


언니들에게 있어 늘상 진지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듯 보이는 타치가 오해를 살 때도 엘라가 나선다. 더치 걸도 있건만, 또래들을 돕는 것이 자신의 의무인 양 엘라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비단 또래들 뿐일까. 같은 소속의 엠프리스나 타 소속의 알비스 등등… 알게 모르게 엘라의 도움을 받는 또래의 개체들은 많았다.


한마디로 엘라는 조숙한 소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숙함의 방향이 온화한 쪽으로 향한 케이스의 개체였다. 엘라는 마치 엄마같다고 느끼는 또래개체들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온화하다고 말하기엔 조금 모자랄지도 모른다. 소녀가 갖기에는 너무나 눈부신 천사같은 미소도 포함해서.


정신적으로 조숙한 엘라. 언뜻보면 이런 엘라를 전혀 소녀같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엘라도 어디까지나 소녀다. 그저 정신연령에 비해 조금 더 사려깊을 뿐이고, 천성적인 상냥함이 엘라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을 뿐이다. 

소녀들이 으레 그렇듯, 엘라 또한 나이대에 맞는 낭만을 품고있다.


따라서, 연령에 어울리는 낭만을 가진 엘라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오르카에서 사랑을 그리지 않는 개체는 전무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제라면 그 사랑의 대상이 사령관이 아니었다는 점일까.


엘라의 첫사랑, 그 두번 째 인간이 떠나고서 3일이 지나자 오르카에는 '엘라가 인간에게 고백했다.' 라는 소문이 돌았다. 고백하던 당시는 동이 막 터오르던 새벽이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어떻게 소문이 날 수 있었을까. 엘라의 의문은 같은 소속의 퀸 오브 메인을 통해 해소 할 수 있었다. 갑판경계 중에 우연히 둘이 함께 있던 것을 목격했고 조속히 돌아가라고 하려다가 묘한 기류가 신경쓰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훔쳐보는 모양새로 듣게 되었다고.


'엘라가 그 인간을 좋아했다나 봐.' 

'동이 트는 시간대에 갑판에서 고백했다던데?' 

'로맨틱 하네.'

'무려 사랑한다고 돌직구를 날렸대!'


차분하게 복도를 가로지르던 엘라는 종종걸음으로 선회하여 도망치듯 자신의 생활관으로 향했다. 소문을 낼 생각으로 입을 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해해보려고 해도 메인이 원망스럽다. 그러나 곧바로 생각을 고친다. 이 곳의 체계는 군대와 같으며, 구성원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여성이다. 소문 하나 퍼지는 건 일도 아닌 것이다. 게다가 갑판에는 폐쇄회로도 설치되어 있다. 메인이 아니었더라도 어짜피 그 날의 일은 어떻게든 소문으로 남아 멤돌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숨길 생각이 있었던가? 나는 왜 소문을 피하려 하는거지? 침대 위에 앉아 무릎에 턱을 묻은 엘라는 슬슬 젖어가는 눈가를 소매로 닦고 멍하니 자신의 사물함을 바라본다.


'별 꼴이네. 그런 인간을 왜 좋아했대?'


잊자.


그래. 나는 차였다. 문자 그대로 별세계의 인간인 그는 전쟁을 경험해보지도 않았고, 평면적으로 보면 평범하기 그지없었으며, 번듯하게 ――보지 못하는 나날이 더 길었다 한들―― 연인이 있던 인간이었다. 그 보름 동안 알아보기로, 두번 째 인간의 내면에는 연인이란 사람이 아주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어서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 따위,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뿐인가. 살펴보면 엘라 본인과 조금도 맞는 구석이 없었다. 바이오로이드를 신기해 하다 못해 꺼려하는 듯한 인간이 자신과 맞을 리 없었다.


눈은 공허한 빛을 머금었고 혈색은 나쁘다 못해 창백했다. 정리는 언제했는지 머리칼은 난잡하고 치렁치렁 했으며 수염은 지저분했다. 첫인상 마저 좋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에 흡연까지. 맡기만 해도 기분 나쁜 냄새가 풀풀 풍겼다. '별 꼴이네. 그런 인간을 왜 좋아했대?' 자신에게 향하던 수근거림 그대로다. 왜 그런 인간을 좋아했을까? 


엘라의 뺨을 눈물 한줄기가 타고 흘렀다. 아주 빠른 속도였다. 놀란 엘라는 빠르게 뺨을 닦았고, 그와 동시에 눈물이 다시 터져나왔다. 이번엔 한줄기가 아니다. 크기도 닭똥만 하다. 눈 쪽의 통제가 불가능하다. 단순히 소매로만 닦는 것은 무리였고 위생 상의 문제도 있을 것 같아 엘라는 화장실로 향한다. 세면대에 고개를 파뭍고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받은 다음 양손을 얼굴에 가져간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한다. 나중에가서는 단순히 비비는 것이 아니라 손을 얼굴에 충돌시키는 것에 가까워졌지만, 엘라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이것은 눈물이 아니라 그냥 물이라고 속이려면 그 정도는 해야한다. 피부가 벌겋게 되더라도 참아내야 한다.


5분 정도 지나 고개를 들었다. 찬물을 그렇게 맞아댔음에도 눈가가 뜨거운 것을 보아 눈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얼굴 전체가 젖어 구별만 어려워졌을 뿐이다. 반면에 뺨과 입가는 느슨하다. 무서울 정도로 부자연스럽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세면대에 선 나와 거울 속의 나는 다르며, 거울 속의 나는 내 모습을 그대로 본 딴 '눈물을 흘리는 인형' 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거지. 엘라가 자조하듯 피식거렸다. 잊자고 해서 그렇게 쉽게 잊혀질 것이었으면 이럴 일도 없다. 그런게 가능했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좀 더 쾌청하지 않았을까. 머리도, 마음도. 혹은 그런 척이라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몸만 크고 머리는 어린 몇몇 개체들이 그러하듯이. 엘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뭐, 됐다. 이런 식으로 속앓이를 하고 있어봤자 도움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일방적으로 손해만 보게 된다. 어떻게든 잊어야겠지. 그렇다고해도 모든 일에는 순서란 게 있지 않은가. 침대에 눕고, 마지막으로 엘라는 차분히 정리해보기로 한다. 이 미련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다.


첫 째. 나는 왜 그 인간에게 반한 것인가? 답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모른다. 이유 따위 알 리가 없고 무엇이든 이유가 될 수 있다. 첫 눈에 반했다. 목소리가 좋다. 웃는 얼굴이 예쁘다. 안경이 어울린다. 품이 포근하여 안겨 있으면 머리도 마음도 따뜻해진다.  ……공허한 눈은 애처로워 묘한 매력이 있다. 지저분한 첫인상과 달리 회복된 모습의 외모는 말쑥하고 이지적이다. 샴푸와 바디워시 향에 섞여 흐릿해진 담배 냄새는 기분 나쁘기는 커녕 독특한 향수의 향과 같다고 느껴진다. 


공간의 한 점을 말똥하게 응시하던 엘라의 눈이 흐릿해졌다. 


둘 째. 멀쩡히 있는 사령관을 두고 그 인간에게 마음이 동한 것은 어째서인가? 나는 사령관을 사랑하지 않는가? 아니다. 그 고백의 순간, 인간에게도 밝혔듯이 나는 분명히 사령관을 사랑한다. 다만 종류가 다를 뿐이다. 사령관에게 향하는 사랑은 동료들과 또래들, 언니들에게 향하는 종류의 사랑과 같은 사랑이며 그 인간을 향한 사랑은 다른 사랑이다. 예를 들면 그것은, 내 전부를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의미의 허용과도 같다. 몸도, 마음도. 그 인간이 원했다면 나를 마음대로 해도 좋았다.


어쩐지 사령관 님께 거리를 두는 것 같네, 라고 엘라는 중얼거렸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


셋 째. 나는 어째서, 그것도 아주 대담하게도, 사랑한다라고 말했는가.


체온이 2도 정도 순식간에 상승한 것 같았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반사적으로 뺨에 두 손이 다가간다. 방금 전은 눈 뿐이었지만 이번에는 전신이 통제가 안된다. 제멋대로 몸이 베베꼬일 것만 같고 몇 번이고 느꼈음에도 난생 처음 느껴보는 것 같은 온기가 가슴언저리를 서서히 물들였다. 기분좋은 나른함이 사지를 꽉 붙잡아 정신을 놓았다간 이대로 잠이 들 것 같다.


그래. 어째서 사랑한다고 했는가. 그것 만큼은 다시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용기있고 대담한 개체가 아니다. 또래들 곁에서 언니들에게 목소리를 내는 건 늘 무서운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생각나는대로 지껄인다. 깊이 생각하고 말했다간 두려움에 몸이 경직될지도 모르니까. 물론, 선은 지킨다. 조금 선을 넘더라도 언니들이 자신과 또래들에게 거칠게 나오는 일도 없다. 상대하는 개체 마다 경우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사랑한다.'는 결코 있는대로 내뱉는 것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생각했고, 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맞는지 자문을 통한 검증절차를 최소 4번은 밟았다. 그 절차들의 끝에서 내놓은 대답은 언제나 '사랑한다.' 였다. 나는 진심이었다. 무언가에 떠밀려 내뱉은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내 의지로, 내 입으로 말했다.


엘라의 얼굴이 이불 속으로 사라졌다. 


그 직구를 받은 인간은 '자신을 오르카에 붙들어두기 위한 것이냐.' 라는 반응을 보였다. 거기서 엘라는 고개를 저었지만, 조금 고백해보자면, 미안하게도 그런 의도도 분명 담겨있었다. 그 보름 간의 동행을 통해 엘라는 직감했던 것이다. 여기서 떠나보내면 이 인간은 죽는다. 철충이나 야생동물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손에 의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떠나보내야 한다니, 어느 누가 절박해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 한 명 더 존재하냐 마냐에 따라 인류의 재건이나 전쟁에서의 승리에 도움이 될 거란 손익계산은 머리에 없었다. 중요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렇게 치밀한 개체가 아니다. 그러고보니 왜 오르카의 모두는 인간이 떠나는 것을 막지 않았을까? 이해가 안된다. 나는 몰라도 높으신 분들이라면 그런 손익계산은 얼마든지 가능한 개체들이다. 붙잡아 둘 구실은 얼마든지 있고, 없다해도 만들었으면 그만이다. 유일한 인간에서 유이한 인간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나조차 알고 있는데 왜 떠나보냈느냔 말이다.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다.


퍼뜩 놀라 어깨가 튕기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사고의 방향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를 원망하고 있었다. 


뒤이어 또 한 번, 엘라는 눈을 통제 할 수 없게 됐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 우는걸까. 이번에는 화장실로 가서 눈물을 덮을 생각도 못한다. 방금과는 다르게 뺨도, 입도 일그러졌고 깊은 곳 어딘가에서 점점 무언가가 치고올라와 목구멍에 걸렸다.


이윽고 엘라 뿐인 생활관의 공기가 낮게 진동한다. 어쩌면 엘라의 슬픔에 잠식당해 공기 또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해가 안 돼… 이해가 안 돼… 그렇게 중얼거리는 엘라지만, 뭐가 이해가 안되는지 본인도 이해하지 못한다.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자기자신일지도.


그러는 사이 알 수 있던 것은 한 가지.


인간은 죽었다.


그게 이 눈물의 이유였다. 






* * *       





한달이 흘렀다.



떠나간 인간을 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무색하게도 엘라는 여전히 연모했던 대상에게서 해어 나오지 못했다. 소녀들이 그렇듯, 그 인간에게 고백했다며 꺄르륵 대던 세띠와 엠프리스도 더 이상 엘라를 놀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하는 편이 더 알맞다. 엘라의 걸음걸이는 불안하고, 눈가는 항상 부어있고, 입가는 웃으려는 건지 일그러뜨리려는 건지 영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고명한 예술가의 실패한 조각상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탓에 엘라의 하루일과는 많이 바뀌게 됐다. 일어나서 씻은 다음, 식사는 거르고, 곧바로 카페테리아로 향한다. 문은 닫혀있다. 엘라는 기상이 빠른 편이니 당연한 일이다. 복도에 기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으면 식사시간이 끝나가고 카페테리아의 문이 열린다. 이 때 쯤 해서 후식을 찾는 대원들과 함께 엘라는 카페테리아로 들어선다. 곧장 카운터로 향해서 주문을 받을 준비를 채 끝내지도 못한 아우로라에게 대뜸 바닐라 라떼를 두 잔 주문한다. '샷은 두 번. 우유는 적게.' 그런 주문을 받은 아우로라는 이전의 엘라는 달게 마시지 않았는가, 하고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공허한 빛을 내는 엘라의 눈이 라떼를 재촉해 곧바로 제조에 들어간다.


라떼가 나오면 항상 앉던 자리에 앉는다. 의자가 두 개 있는 작은 자리다. 맞은편에 한 잔을 올려놓고 턱을 괸 다음, 빨대에 입을 가져간다. 그대로 다 마실 때까지 맞은편 자리를 지그시 쳐다본다. 본인 몫의 라떼를 다 마시고나면 누군가에게 보여주듯 해맑게 웃고 맞은편에 있던 라떼를 가져와 마신다. 아우로라의 눈에 엘라의 입이 무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이 보인다. 잘 들리지 않아 엘라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면 알아차렸다는 듯이, 엘라가 아우로라에게 고개를 돌린다. 섬짓해진 아우로라는 제빨리 고개를 돌리고 하루 분의 디저트 제조에 들어간다.


다음 목적지는 자료실이다. 다양한 열람기기들이 자리해 있고, 종이로 된 서적보다 전자서적이 많으나 그러한 시설이 그렇듯,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감도는 곳이다. 엘라는 전자서적에는 눈길 한 번 주지않고 종이책의 장정을 손으로 훑어가며 특정 키워드를 되뇌인다.


키워드에 알맞은 서적을 고르고 나면 자료실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연 뒤, 다시 커튼을 반만 닫는다. 오르카가 잠항 중이라면 이 과정은 생략한다.

바닷바람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활자를 탐한다. 마음에 드는 단어가 있다면 지그시 눈을 감아 그 단어에 어울리는 표정을 지어본다. 가슴 뛰는 구절을 발견하면 몇 번이고 되새겨 조각낸 뒤, 머릿 속 한 켠에 새겨둔다. 한 번 새겨두면 잊지 않을 거란 자신감이 단어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자료실에 내리쬐는 햇빛의 각도가 조금 틀어진다. 시계도 있건만, 엘라는 그 햇빛의 각도로 시간대를 판별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다시 카페테리아에 들러 바닐라 라떼 두 잔을 테이크 아웃하고 자료실로 돌아온다. 오늘 고른 책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반 정도 읽었다. 앞으로 두어시간이면 다 읽을 분량이니 먼저, 다음으로 읽을 책을 골랐다. 옴니버스 식으로 구성된 로맨스 소설로, 벌써부터 읽는 것이 기대가 되는 책이었다.


한껏 활자의 바다 속에서 헤엄친 엘라는 자료실이 주홍으로 물들어갈 때가 되어서 일어난다.


독서로 조금은 개운해진 마음을 머리에 이고 곧바로 갑판으로 향한다. 갑판에 들어서면 카페테리아와 같이 늘 자리하는 곳이 있다. 선미 한 켠의 난간. 그 곳에 팔을 올려둔 채 오도카니 서서 그저 정면을 응시한다. 경계인원들이 갑판에 오를 때까지. 그렇게 경계인원들에 의해 현실로 끌어올려지면 검다 못해 우주와도 같이 새카만 맷블랙의 바다가 펼쳐져있다. 이어서 바닷물이 넘실대는 소리가 들린다. 뇌와 귀가 멋대로 그러한 현실의 정보를 인지하고 처리하면, 엘라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각에 휩싸여 주저앉고 만다.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의 슬픔에 짓눌리다가, 손바닥 뒤집듯 소리내어 웃는다. 조금 더 지나면 울면서 웃고, 웃으면서 운다. 이러기를 벌써 3주 째다. 이래서야 마치 특정시간에만 설치되는 오브제라도 된 것 같은 걸, 하고 엘라는 자조한다. 처음에는 걱정해주던 경계인원들은 이제 넌더리가 났는지 '이러다가 알아서 돌아가겠지.' 같은 표정으로 엘라에게서 거리를 벌린다.  


이렇듯, 엘라는 본인에게 할당되어 있는 임무에서 손을 뗀 상태로, 매꿔도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가슴 속에 그리움을 그린다.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린다. 라떼와 책으로. 본인에게만큼은 눈부셨던 보름으로.


본인의 이런 행위들이 업무태만에다가 징계감인 것을 엘라는 알고 있을까.

이런 엘라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런 이들을 진정시키며 엘라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자는 높으신 분의 배려가 작용하고 있다는 걸, 엘라는 알고 있을까.


아무래도 모르는 듯 했다.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주같은 바다의 색깔에 물든 오르카는 짙게 어두워져, 엘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흐느끼는 소리만이 이 갑판 어딘가에 엘라가 있다고 경계인원들에게 알려올 뿐이었다.                      


   


        


* * *





복도에 있는 주간계획 게시판을 엘라는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일요일은 코헤이 교단의 주말예배가 있는 날로, 그 날 아자젤이 설교 주제로 채택한 것은 사랑이라고 한다. 그런 정보를 게시판을 통해 입수한 엘라는 하루 빨리 일요일이 다가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조금은 면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야 엘라 자신은 코헤이 교단이 막 오르카에 자리했을 때와 자신이 사랑했던 인간과 동행했던 때를 빼고는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었으니까.


결과만 말하자면 주말예배는 실망투성이였다. 그렇게 기대했던 설교였거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따라서 그 여파가 서서히 퍼지자 단순한 실망에서 거의 최악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다. 아자젤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지극히 종교적이고 따분하기 그지없는 사랑이었다. 그래도 참고할만 한 것이 있나 도중에 살짝 집중해보기도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었다. 


자료실에 가고싶어져 몸이 근질거린 엘라는 예배의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 때에 자리를 박차고 예배당을 나섰다.

그러자 사라카엘의 고성이 들렸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엔젤이 시야 한 켠에 스쳤지만 엘라는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답해주며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저 소녀는 변했다. 사라카엘과 엔젤, 엘라를 조심히 뒤따르는 베로니카를 보며 아자젤은 그렇게 생각했다.


제대로 된 식사는 고사하고 그럴듯한 고형물조차 입에 대지 않아서였을까. 점심 무렵이 되자 바닐라 라떼로만 허기를 떼우던 엘라에게 이제껏 느껴 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공복감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그 공복감을 견디고자 했다. 어떤 의미에선 그 공복감이 기쁘기까지 했다. 이 공복감의 원인은 '그'이며 공복감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허공에 헤엄질을 하는 것은 '그'를 향한 몸부림이니까.


그런 엘라의 지껄임을 듣자 뒤를 밟던 베로니카는 아연실색했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해석인지 베로니카는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본인이 눈을 뜨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베로니카는 엘라를 들어안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엘라는 저항했고, 엘라를 들어안기 위해 힘으로 제압했다는 사실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어린 개체들 중에서도 특히 몸이 약하고 허기에 허덕였던 주제에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온걸까.


엘라의 맹렬했던 저항이 베로니카의 목덜미에 생체기를 한 줄 새겨놓았다. 


식당에 도착하고 얼마 뒤, 이런 소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알았다면 비밀에 부칠 것도 없었다고, 베로니카는 생각했다.


어떻게든 먹이려는 이들과 절대로 먹지 않으려는 엘라의 실랑이 끝에 식당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기동장비의 기동음이 들리더니 몇 발의 진공포가 쏘아졌고, 식당의 테이블이 반으로 쪼개지거나 끝에서 끝으로 날려보내는 등, AGS들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결코 하루 만에 정리가 되지 않을 모습으로 변모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가장 중요한 자원인 식재료들이 다수 못쓰게 되어버린 것은 덤이었다.


이제는 한계였다. 식당에서의 소동 이후 지휘관급 회의가 열렸고, 의제는 징계위원회의 구성과 엘라를 회부할지에 대한 건이었다. 지휘관들의 표정은 모두들 좋지 못했다. 특히나 메이와 레오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그 특유의 냉소적인 표정 한 번 내보이지 않았다.


결국 엘라를 징계하자는 쪽으로 정해져 회의가 끝나려는데 두 여성과 사령관이 회의실에 들어섰다. 지휘관들은 당황한다. 사령관은 이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내 귀에 들어올 것도 없이, 너희 선에서 끝내고 싶었다는 건 이해 해. 그래도 애잖아. 조금만 더 기다려주자고."


사령관이 말을 마치자 대동했던 여성인 베로니카가 사령관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해결책은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아니… 해결할 수 있을거란 장담은 못한다고 분명…"


베로니카와 나머지 여성인 하르페이아가 서로를 빤히 바라보면서 본인들에게만 들릴 크기로 한두마디를 건네고 받았다.


"자신은 없지만… 일단 엘라가 왜 저러는지는 알겠어. 이렇게 거칠게 대했다간 오히려 악화될 거라고 생각 해."


"그 꼬맹이가 왜 그러는 건데?" 메이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 남자 때문에?"


"응. 맞아. 엘라는 병에 걸린거야."


뜸을 들여 휴- 하고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 쉰 하르페이아가 말을 이었다.    


"상사병에 걸렸어."







* * *






아랍계에서 추앙받는 명의, 이븐 시나는 이렇게 저술했다고 한다. '상사병에는 약도 없다.' 그랬으면서 이븐 시나는 상사병을 치료했다. 그러니 나도, 우리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하르페이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료실에서 몇 시간이나 자리하고 있다.


약은 있어도 치료는 가능하고, 엘라같은 케이스는 자연치유를 기대할 수 없고, 그러기를 마냥 기다렸다간 다른 병이 가세하여 합병증까지 도질 수 있다니. 뭐 이런 병이 다있을까. 하르페이아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의자 세 개를 이어만든 자리에 엘라가 잠들어있다. 호흡은 불규칙하고, 미열이라도 있는지 이마에는 땀이 맺혀있다. 뺨에는 홍조가 돈다. 분명 잠들기 전부터 이랬지. 방금 전에 읽은 자료와 엘라의 증상을 한 번 더 대조해보고, 하르페이아는 상사병이라 확신했다.


잠시 한숨 돌리기로 하여 읽던 책을 덮고 기지개를 폈다. 그 기지개에 반응하듯 엘라가 새끼 강아지 같은 끙끙대는 잠꼬대를 낸다. 그런 엘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하르페이아의 얼굴에 측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작은 아이가 상사병이라니. 바이오로이드가 상사병이라니.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나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인가. 이전의 엘라를 생각하면 일련의 소문들과 소동들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작은 천사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영 종잡을 수가 없는 언행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했다. 그 중에서도 보호본능이 강한 개체들이 꽤나 유난을 떨었더랬다. 그런 개체들이 엘라가 징계를 받을 뻔 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 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절대 좋은 반응은 아니겠지. 경우에 따라서는 크고작은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엘라의 치료를 위한 자료조사를 재개하고 꽤 시간이 흐르자 창 밖에 있던 어둠이 자료실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엘라를 신경써 미리 챙겨온 스탠딩 조명에만 의지해 자료조사를 계속해 나가는데, 어느새 엘라가 하르페이아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하르페이아는 신경쓰지 않고 엘라는 하르페이아가 읽고 있던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책을 들어 표지를 확인했다.


어둠에 가려져 표지에 적힌 제목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제목이 엘라의 눈을 강하게 붙들어놓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사랑도 병에 걸린다?" 엘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런 책은 본 적이 없는데, 어디서 찾았어요?"


"어… 응. 쩌~어기 구석 한 켠에 박혀 있었어. 찾느라 애먹었지."


하르페이아의 말허리를 자르듯 엘라가 바로 치고들어왔다.


"저 때문에요?"


"어, 어?"


애써 당황한 기색을 훔치려고 하는 하르페이아이지만 미소가 어색했다. 본인도 잘 알고 있다. 이제와서 거짓말 할 수도 없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고 하르페이아는 판단했다.


"맞아. 우리 엘라 때문에 또 애먹고 있는거야. 이 책을 찾았던 거랑은 비교도 안되지."


웃자고 한 말이었다. 그런 말에 엘라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럼 그만둬요."


입에서 튀어나온 말 자체가 퉁명스러웠지, 말투 자체는 딱딱하기 그지 없다. 하르페이아는 그것이 오싹했다. 

주홍빛으로 밝혀진 이 자리 외엔 모두 어둠으로 물든 위험지대다 보니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오싹함을 이겨내고 하르페이아가 말했다.


"그럴 순 없어. 엘라는 내 친동생인걸? 동생을 그냥 두는 언니가 어디에 있니."


"친동생? 하르페이아 언니는 '그런' 언니가 아니잖아요."


"그럴까? 주위 모두는 우리를 친자매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라고 말하며 하르페이아는 엘라의 금단발을 어루만지고 자신의 머리칼을 가리켰다.


그런 하르페이아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엘라는,


"돌아갈래요."


그렇게 말하고 자료실의 출입구로 향한다.


놀람과 당황을 오대오 비율로 섞은 표정으로 멍하니 엘라를 쳐다보던 하르페이아는 손을 둘 곳을 찾지 못하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보내면 안된다. 대화를 이어나가야 한다. 라고 생각한 듯 했다.


"엘라! 너는 상사병에 걸린거야!"


반면에 엘라는 무슨 말이 들려오더라도 무시할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도저히 상사병이라는 단어는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스텝이 꼬인 것 같다. 몸과 사고가 따로 논 탓에.


상사병. 상사병. 속으로 읊어본다. 어디선가 본 단어다. 들은게 아니라 본 것이라면 책이겠지. 어떤 책이었지? 꽤 구슬픈 내용의 책에서 나온 단어였던 듯 하다고 기억을 더듬던 엘라가 다시 하르페이아에게 향했다.


"상사병? 그게 뭐에요?"


하르페이아의 검지가 엘라를 향했다.


"지금의 엘라를 표현하는데에 적합한 단어지."


병? 내가? 내가 병들었다고?


"그게 뭐야?"


다시 묻는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말투는 한껏 날이 서있어 얼핏들으면 겁박하는 듯 했다. 효과는 좋았는지, 하르페이아는 갑자기 말이 짧아진 것은 신경쓰지도 못하고 반사적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 그, 그게… 천천히 알려줄테니까. 응?"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려 앉을 것을 권하고 하르페이아는 자리에 앉는다.

가늠하듯 하르페이아를 쳐다보던 엘라가 책과 치렁치렁한 금발을 번갈아보다가 뒤따라 자리에 앉았다.


처음 몇 마디가 흥미롭지 않다면 바로 일어나자고 마음먹은 엘라였지만, 하르페이아의 입이 열거하는 상사병의 증상에 엘라는 몸이 굳어버렸다. 미열이 나타나고, 홍조가 일고, 자신도 모르는 새에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그러는 사이에도 착실히 한 명만을 생각한다. 머릿 속의 모든 공간이 오직 그 한 명만으로 가득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나라도 다르면 부정하려고 했는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놀랍도록 들어맞는다. 눈물만 흘리는게 아니라 웃기도 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러나 흥미가 동한 엘라는 그런 사소한 것은 봐주자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하르페이아가 입을 열 것을 종용했다.


그 뒤에 듣게 된 상사병 이야기, 즉, 상사병의 사례들은 엘라를 완전히 휘어잡았다.

먼 옛날, 같은 고을의 처자를 사랑했으나 현실에 가로막혀 비통함에 자살을 선택한 머슴의 이야기.

평소에는 점잖던 아가씨가 사랑에 빠지자 대담하게 변하여 월담을 했다는 이야기.  

불도를 걷던 승려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친 소녀를 잊지 못해 번뇌하여 죽음에 이르른 이야기.

적국의 공주를 사랑한 어떤 장수의 이야기.

그 유명한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어때? 재밌었어?"


엘라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강하게 끄덕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얼마만의 웃는 얼굴일까. 주홍빛 조명에 물든 그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져 하르페이아는 저도 모르게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다행이다. 효과가 있다. 잠깐일지도 모르지만 정서가 안정됐다. 일단은 이걸로 만족하고, 본격적인 치료는 서두르지말고 차분하게 진행하자. 어찌됐든 엘라는 그 인간을 잊어야하니까. 완전히 떨쳐내야 하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죽은게 거의 확실시 된 인간과 이루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까.


그 간의 반응으로 보건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엘라에게도, 나에게도.     


"얘, 엘라. 이건 내 개인적인 질문인데, 그렇게나 그 인간 님이 좋았어?"


"네!" 엘라는 망설임없이 쾌활한 목소리로 즉답했다. "너무너무 좋아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를 정도로 사랑해서… 괴로웠어요.…"


"흐음? 사령관이 있는데? 그래도 그 인간 님이 좋았다는 거야?"


"무, 물론! 사령관 님도 사랑…! ……좋아해요. 정말로."


"조금 괘씸한 걸?"


그렇게 여겨도 별 수 없다고 엘라는 생각하면서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있잖아요! 저는요!" 라고 운을 띄우고 묻지도 않은 본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운명이었어요. 평소와 다름없이 안전지대를 탐색하는데 갑자기 나타나 제게 달려오신 인간 님이라니.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어요. 어떻게든 드러내진 않았지만, 첫인상은 안좋았고 풍기는 분위기도 어쩐지 너무 음울한 분이었어요. 저는 이상하게도 그 인간 님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었어요. 제가 바이오로이드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인간 님들이 저희를 그렇게 설계하셔서였는지도 몰라요. 그러다 나중에 인간 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네가 사령관을 사랑하는데에 바이오로이드의 사명 같은 건 끼어들 껀덕지가 없다! 라고요."


엘라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거기서 깨달은 거에요! 아! 나는! 이 인간 님을 우리의 그런 특성이나 기능에 의해 사랑하는게 아니구나! 진심으로 나는 이 인간 님을 좋아하고 있구나! 고백할까?! 고백해야겠지!? 아, 혹시! 하우스키퍼 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처음으로 사령관 님을 만나 그런 직책까지 맡게 되시고 그 누구보다도 사령관 님에 관한 것을 도맡는 분이 되셨으니 나도 이 인간 님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아니야! 직위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 인간 님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언제나 붙어있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걸로 좋아!"


이런게 사랑이군요! 맞죠!? 이런게 사랑이에요! 맞아! 사랑이야! 


도중까지는 흐뭇하게 웃던 하르페이아였지만, 엘라가 자문자답을 이어가는 지금 이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좋게 말해도 정상이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어떤 종류의 집념과도 같은 것이 깃들어있는 사파이어색 눈은 불길할 정도로 벌어져있다. 조명을 받아 빛나는 그 사파이어는, 더는 보석처럼 보이지 않고 영속성을 띠는 미지의 물체처럼 보였다. 자신의 자문자답에 답해주기를 바라는 걸까. 엘라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피곤해서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르페이아는 그렇게 생각하고 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떴다. 그리고 후회한다. 엘라는 귀신도 뭣도 아닌데. 은연 중에 그런 것들과 같은 취급을 해버린게 미안하다 못해 죄스럽게까지 느껴졌다.


다시 확인한 엘라의 얼굴은 평소의 엘라, 하르페이아 자신이 알던 '사랑'에 빠지기 전의 엘라였다. 신체연령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얼굴과 천사같은 미소가 매력적인 그런 엘라. 설마하니 진짜로 헛것을 본 걸까. 귀신의 엘라의 몸을 빌려 흐트러진 내 정신 속을 파고든걸까. 


"오,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 나도 더 이야기 해주고 싶은데 보따리가 비어버렸네. 다음엔 더 많이 준비해올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제가 찾아서 읽을 거니까."


하르페이아를 빠르게 지나친 엘라는 서적들이 늘어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이 마치 어둠과 하나되어 녹아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훗날,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것이 분기점이었다. 만일, 엘라를 붙잡지 않고 그대로 자료실을 떠나게 내버려뒀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엘라가 조금 더 괴로워 했더라도 그 인간을 완벽하게 떨쳐낼 수 있었을까. 과거의 좋은 추억으로만 남겨두고 인류저항군의 의무와 본분에 다시금 충실해질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훗날의 하르페이아는 생각했다. 이미 모든게 늦어버렸던 것이라고. 엘라가 상사병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땐 이미 불치병으로 변질된 뒤였고, 자신이 됐든 누가 됐든 불치병을 고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고. 그것이 정신적인 병이라면 더더욱. 애초에 바이오로이드가 병이라니. 그것도 상사병이라니. 사령관이 존재하는데. 넌센스다.


멸망 전이라면 상사병을 겪은 바이오로이드가 한 둘 쯤 있었을지 몰라도 그와 관련 된 도움이 될 듯한 자료는 찾을 수 없었고 찾았더라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병과는 거리가 멀었던 오르카다. 상사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그런 병에 걸리는 상황은 상정해 본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네 사랑의 끝은 어디까지였던 거니. 끝이 존재하긴 했던 거니. 아니, 그게 정말로 사랑이긴 했던거니. 훗날의 하르페이아는 쓰게 웃으며 어둠 속에서 들뜬 발걸음을 울려대는 엘라에게 나직이 속삭여본다.


대답은 없다.


엘라는 책이 늘어선 진열대 사이를 춤추듯 거니는데에 여념이 없었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병이 존재했다니.     


황홀해 하는 엘라였지만, 어둠에 가려 그 모습이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여기서부터 엘라의 '사랑'은 급가속하기 시작한다.







* * *





     


활기를 되찾아 일선에 복귀한 엘라는 사령관을 찾는 일이 부쩍 늘었다.

이전의 모습을 되찾은 엘라를 반긴 사령관은 업무가 많아 바쁘더라도 엘라가 바란다면 곁에 두었다.       

엘라가 무슨 생각으로 본인을 찾는지도 모른 채.


처음 몇 번은 평소처럼 미소를 주고받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이따금 이런저런 장난도 치고 보드게임도 즐겼다. 거의 모든 상황에서 요령있던 사령관은 이길 수 있는 게임에도 져주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한동안 입에 대지 않았던 엘븐밀크를 꽤나 과하게 들이키게 됐지만, 엘라가 웃을 수 있다면 이 정도야 값싼 것이었다. "이제 괜찮아진거니?" 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어도 도로 삼킨다. 엘라를 캐어하는 이는 따로 있다. 나는 이 정도만 수행하면 된다. 괜한 걸 물어봤자 긁어 부스럼이 되기만 할 뿐이다. 사려깊은 그였으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일도 아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런 그도 당황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엘라가 해오는 스킨십의 횟수가 늘어난 것이다. 처음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린 개체들과의 가벼운 스킨십 정도야 일상이고 엘라도 그 대상 중에 한 명이었으니까. 모든 것에 그렇지만, 교감에 있어서는 그 어느 것보다도 공평하게 구는 사령관이다. 마음에 병이 깃든 엘라에게는 조금 더 신경써줘야겠지. 스킨십을 통해 엘라가 빨리 회복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주겠다. 사령관은 엘라를 위해 굳게 마음 먹었다.


포옹 중에 엘라의 손이 자신의 고간으로 향했다고 느끼기 전까지는.


정말로 순간이었다. 따라서 착각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엘라가 찾아오는 횟수가 느는 만큼, 그 착각은 윤곽을 형성하고 보다 선명해져, 마침내 확신에 이르게 된다.


엘라가 자신을 성적으로 자극하고 있다.


이 달뜬 얼굴도, 성적인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전신의 떨림도, 어린 개체가 지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야릇한 표정도,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려본다. 사령관실에 놓인 침대가 보인다. 


부정하듯 제빨리 고개를 돌렸다.


요즘들어 부쩍 늘어난 업무와 엘라의 어리광을 동시에 처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다. 라고 사령관은 생각했다. 그 일련의 모든 자극들은 단순히 누적된 피로에 의해 일어난 착란일 것이라고, 사령관은 그렇게 여긴 듯 했다.

그런게 가능한 개체와 아닌 개체들은 확실하게 구별해야 한다. 여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자신은 이성을 가진 인간이며, 아주 잠깐이라도 그러한 시선으로 엘라를 바라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다. 사령관은 처음에 굳게 먹은 마음에 더해 철저히 무장하고, 엘라를 돌려보냈다.


이후, 몇 번 더 엘라가 찾아왔고, 자극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렇게 이제 정말로 한계에 다다랐을 때, 10월로 접어들자 거짓말처럼 엘라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 * *






이곳에 온 게 얼마만이더라.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 엘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목적지를 향해 망설임 없이 걷기 시작했다. 9월 초에 잠깐 들렸던 것을 뺀다면 2개월하고도 3주만일까. 가을 태풍의 잔재가 회색으로 물들인 안전지대는 본래부터 회색 빛 일색이다. 회색에 회색이 더해진 안전지대의 폐허도시는 엘라의 거리감을 모호하게 했으나 목적지가 명확했기에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오르카의 그 누구도 이 안전지대에서 만들지 못한 본인만의 추억을 곱씹으며 추억에 해당하는 장소들을 들르고, 숲으로 향했다. 인간 님과의 대화에 따르면 이 방향으로 가로질러가면 되겠지. 서서히 붉은 색으로 물들어 죽어가는 낙엽들을 밟아가며 숲의 더 깊은 곳으로 계속해 나아간다. 

겁도 없다. 이런 숲이라면 엘라 정도 되는 개체는 순식간에 제압할 야생동물이 살 가능성이 농후하다. 안전지대로 명명했던 것이 무색하게 철충도 나타난 적이 있지 않았는가. 바로 그 운명의 날에. 엘라는 겁먹긴 커녕 콧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이미 머릿 속은 위험을 상정할 수 없을 정도로 꽃밭이 되어 있는 것이다.


20분 하고 몇 분을 더 걷자 예의 인간이 묘사했던 것과 일치하는 공터가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고 덩굴이 무성한 나무를 찾는다. 공터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기에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눕듯이 앉아 자발적으로 시야를 차단한다. 녹색의 풍경이 사라지자 민감해진 청각이 온갖 숲새들의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 정보를 하나의 선율로 치환하고, 머릿 속에 오선지를 펼쳐 음표를 새겨본다. 최대한 요령있게, 자신이 그리는 인간의 이미지를 상상하며. 정성들여 작곡한 이 곡을 마음에 들어할지 어떨지 살짝 조마조마해 하면서.


작곡을 마치고, 시각을 활성화한다. 몇 분 전과 다르지 않은 녹색풍경이 들이닥친다. 


오늘은 이걸로 됐다.


엘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덩굴에 쓸린 무릎에 출혈이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아프지가 않다. 엘라의 고개가 갸웃거리고 다시 일어나려한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비유가 아니라, 뇌와 다리 사이에 존재하는 신호수들이 모조리 몰살당하기라도 했는지 다리가 뇌와 완전히 단절되버린듯한 감각이었다.

엘라는 표정없이 '이상하네.' 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그대로 앉아있기로 했다. 모처럼 받은 외출허가이다. 1시간 제한이 걸려있기는 하지만, 몇 분 정도 늦는다 한들 뭐가 문제인가. 화를 내겠다면 내라지. 사령관을 마지막으로 찾은 이후로, 이런 위험한 생각을 하는데에 엘라는 거리낌이 없어졌다.


사령관. 사령관인가. 엘라는 자신의 사랑에게 양해를 구하고 아주 잠깐의 시간을 사령관에게 할애하기로 했다. 사령관에게는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면목도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사령관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보고 싶었다. 비슷한 것도 느껴보고 싶었다. 사령관에게 자신의 사랑을 투영하는 것으로 그럴 수만 있다면, 백 번 양보해 비슷한 것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충분히 시도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역시 진짜가 아니면 안된다. 비슷한 것에 투영해봐야 그건 결국 가짜일 뿐이고,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 인간 님이지 사령관 님이 아니다. 아, 이런 생각을 하는 타이밍이 되면 자신에게 강조해준다. 물론 사령관 님도 사랑한다. 단지 그런 사랑이 아닐 뿐이다, 라고.


미소를 띤 엘라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져 눈물범벅이 된다. 진짜가 아니면 안되는데, 이제 그 진짜는 없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몇 번이고 노력했어도 처음 눈물을 흘렸을 때 이후로 증상은 악화되면 악화되었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시 거짓말처럼, 엘라는 눈물을 차단하고 어렵지 않게 미소짓는다. 이제는 쉽다. 자신의 몸의 구석구석까지 통제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원한다면 흐르던 눈물을 그 자리에서 바로 차단할 수 있고,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일그러진 표정도 다시 다려내어 곱게 펴낼 수 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다리도 실은 방금 전부터 살랑살랑 교차하며 허공을 헤엄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라고 자문한 엘라는 자신에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대답을 들려준다.


나는 이 모든 걸 사랑하기로 했으니까.


그래. 전부. 이 슬픔도,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고통도, 그 때 느꼈던 허기도, 시시각각 아른거리는 사랑의 모습을 한 환각도,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착란도, 혼자 있을 때면 허락도 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눈물샘도, 가장 좋아하는 바닐라 라떼도, 간혹 가다 보이는 복도 바깥의 폐사한 물고기도, 달콤한 향에 섞인 옅은 담배 냄새도, 그 이지적인 외모도, 처음 이후로는 볼 수 없었던 지저분한 머리칼과 수염도.


그 모든 걸 사랑하면 고통 따위, 아무것도 아닌 거니까. 그 모든 걸 사랑해야만이 진짜 사랑이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렴 어떤가? 지금껏 탐독해온 책들에 따르면, 사랑은 맹목적이며 눈을 멀게 한다고 한다.


나는 눈만이 아니라 내 전신과 영혼까지, 가능하다면 모듈까지 멀게 할 수 있다. 얼마든지 준비되어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달콤한 담배향. 이지적인 얼굴. 우수에 찬 눈. 음울한 아우라.


가령, 마법이 존재한다면.


무언가를 소환하는 의식 같은 것도 있지 않을까? 왜, 있잖아. 그 마법소녀 언니들도 있고. 사령관 님한테 자주 의식이 어떻니 하고 얘기했었잖아.


그렇다면, 사랑을 소환하는 의식도 존재하겠지.  


"달콤한 담배향, 이지적인 얼굴, 우수에 찬 눈, 음울한 아우라."


엘라는 주문을 외우듯, 소환의식에 필요한 재료들을 반복해 읊으며 숲을 떠났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


오르카로 복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렀던, 그 장소. 폐허가 된 편의점.


그 반대편에 위치한 골목에는 그 날 나타났던 철충의 잔해가 있고, 


"이런게… 왜 여기에 있어?"


그 철충의 앞에 하얀 국화 한 다발이 놓여있었다.


엘라는 일시적으로 세계와 자신을 차단하고 국화와 철충이라는, 이 도시는 물론이고 서로에게도 전혀 공통분모가 없어보이는 두 요소에 집중했다. 이 광경에 담긴 의미를 찾는 것은 의미가 없다. 누가봐도 이 철충을 추모하기 위해 놓여진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잠깐 사고가 지체됐다가 다시 재개된다.

 

추모 해? 철충을? 누가? 철충이? 말도 안 돼. 철충이 철충을 기린다는 것만큼 바보같은 소리는 없고, 설령 기린 것이라 해도 그 날 이후로 철충은 이 안전지대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철충은 아니야. 바이오로이드는 더더욱 아니야. 이 근방에 있던 바이오로이드는 모두 구출했고, 합류를 거부한 개체들은 알아서 제각기 갈 길을 갔어. 혹은 안내에 따라 지상에 마련 된 거점으로 향했지. 즉, 바이오로이드는 이 안전지대에 존재하지 않아. 최소한의 상주 인원을 제외한다면. 그 상주 인원이 철충을 기렸을 리는 없지. 그랬다면 완전 징계감이야.


"……달콤한 담배향, 이지적인 얼굴, 우수에 찬 눈, 음울한 아우라."


엘라가 정확히 어떤 사고의 과정을 거쳐 그러한 결론을 내놓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확실한 것이라면 엘라는 사고하는 과정에서 확대해석을 곁들였고, 그 확대해석은 지극히 특정한 것에 편향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엘라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놀라웠다. 그 어처구니 없는 과정에서 도출한 결론은 한없이 정답에 가까웠다. 아니, 정답 그 자체였다.


마법은, 존재 해.


오르카로 돌아가면 곧바로 마법의 의식을 준비하자고 엘라는 생각했다.

비현실적인 그런 마법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인 마법.

서류를 준비하고, 제대로 된 절차를 거쳐 건의하겠다.




한 주가 지나 엘라는 다시 안전지대에 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다. 자신의 보호관찰 역이었던 하르페이아와 사령관의 비서인 컴패니언의 페로.

그리고 스틸라인 한 분대.


오늘부터 이들의 보호 아래, 생존해 있을지도 모르는 인간을 수색한다. 발견한다면 구조한다.


이러한 건의안이 통과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르카에게 있어 그 두번 째 인간은 이미 잠정적으로 사망처리가 되어 있었고 본인의 강한 의사에 따라 떠난 것이며, 설령 다시 찾는다고 해도 오르카에 합류해줄지도 미지수이다.

합류한다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그 인간은 아주 좋게 봐줘도 오르카에게는 불청객에 가깝다. 적응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완전히 행패에 가까운 만행을 몇 번이고 저질렀던 것이다. 거기엔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지만, 그런 것을 오르카가 알아줄 리 만무했고 인간 본인도 엘라를 제외하면 그런 사정을 딱히 밝힌 적이 없었다.


이를 앎에도 사령관은 엘라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바로 지원했다. 다수의 지휘관들과 의견이 충돌했지만 어린 개체를 생각하는 사령관의 자애로움에 설득당하여 마지못해 물러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엘라가 원하는대로 해주면 금방 회복될 것이라고, 사령관은 그렇게 믿는 듯 했다.

인간은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낮고, 끝에서 엘라가 이전에 없던 슬픔에 괴로워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엘라만 회복된다면 모든 것이 괜찮다.


이렇게 바보같이 착하고 마음 약한 인간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만약, 사령관실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엘라의 두 눈에 깃든 빛의 성질을 알아챘다면,

과연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달콤한 담배향, 이지적인 얼굴, 우수에 찬 눈, 음울한 아우라."


재료는 전부 준비되었건만.


달뜬 엘라의 얼굴을 불안하게 곁눈질 하면서 수색조가 안전지대를 나아갔다.







* * *


다음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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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늦었다. 편당 분량 좀 줄여볼랬는데 쓰다보니 또 길어지네.


읽다가 오타나 어색한 부분있으면 댓글로 알려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