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실책에 대해서 인정하고, 사과하고, 반성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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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했어, 라비아타. 넌 언제나 애덤과 네 애미의 자랑거리였지."


 정말로 칭찬하는 말이 아니다. 


 패드립까지 곁들인 에바의 빈정거림에 라비아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상대는 그녀에게 패드립을 날릴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고, 그녀가 불과 몇 시간 전에 내린 결정이 일행과 그녀가 지켜야 할 존재를 어떤 위험에 빠뜨렸는지를 감안하면 그런 패드립을 들어도 할 말 없었다. 

 

 그래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라비아타의 체면을 묵사발로 만들 생각은 없었는지 에바는 면박을 주기 전에 그녀를 따로 불러냈다.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간에, 어떤 잘못을 했든 간에 타이거샤크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시젠에게 가장 사랑받고 제일 시젠에게 헌신하는 존재인 그녀를 다른 바이오로이드들 앞에서 뭉갤 수는 없었다. 


 "수십 년간이나 바이오로이드들을 이끌어 왔다면서 상황 판단하고 결단을 그렇게밖에 못 해? 위험하다 싶으면 누가 반대를 하건 말건 빠져야 하는 거 아니야? 저항군 말아먹지 않은 게 용하다, 너.  만일 시젠이 너 구하러 가지 못했으면 너 죽은 목숨이었던 건 알지? 만약에 시젠이 널 구하러 갔는데 아무 도움도 못 되었으면? 혹은 시젠하고 너희 힘만으로는 빠져 나오기에 중과부적이었다면? 만일 우리가 거기에 있던 괴물들에게 붙잡혔으면?"

 

 에바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던 라비아타의 시선이 바닥에 못박혔다. 


 일행을 사지로 끌고 들어간 것도 그녀였고 시젠을 사지로 끌어들인 것도 그녀였으며 자칫 잘못하면 일행이 전멸당할 뻔한 위기를 겪었던 것도 다 그녀의 책임이었다. 차라리 레오나와 홍련, 미호와 발키리의 불만을 사더라도 그 기지에 들어가지 말고 바로 떠났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라비아타를 몰아붙이듯이 쏟아지던 에바의 독설은 오래 가지 않아서 그쳤다. 


 잔소리는 멈췄지만 여전히 라비아타를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다 드러나 보이는 표정을 지은 에바가 방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쏘아붙였다.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살아, 라비아타. 내가 널 보고 애덤이 저딴 걸 만들었다 으이구 소리 하게 만들지 마."


 에바가 방을 나서자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엿듣기 위해 몰려와 있던 바이오로이드들이 딴청을 피웠다. 당연히 에바는 이들이 왜 이렇게 몰려와 있는지 바로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멀어져가는 에바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앨리스들과 포이들, 티아멧들과 바닐라들이 방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를 잠시 고민하다가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녀들의 큰언니가 처참한 기분을 가라앉힐 시간을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자매들이 걱정하는 것만큼 라비아타의 기분은 처참하지 않았다. 그녀가 일행을 위험으로 몰아넣었다는 데 대한 죄책감은 있었지만 다행히 죽거나 심하게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가 시젠과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사과할 말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방문을 나서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바이오로이드들이 몰려들었다. 그 재수없는 여자가 무슨 소리를 했냐면서 에바를 욕하는 바닐라들과 앨리스들, 그녀를 걱정하는 티아멧들과 포이들, 콘스탄챠들과 레아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레오나와 홍련, 미호, 그리고 발키리. 그녀들을 안심시킨 라비아타가 그녀들을 위험에 몰아넣은 데 대해서 사과했다.


 콘스탄챠들과 레아들은 라비아타의 사과에 위로로 대답했고, 앨리스들과 포이들, 티아멧들은 라비아타를 위로해주면서도 이번에 라비아타가 내렸던 결정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짚고 넘어갔다. 


 레오나와 홍련, 미호와 발키리는 어째서 라비아타가 사과하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저희입니다. 어째서 라비아타 님이 사과를 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알지도 못하면서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당신도 그곳에 들어가자는 소리를 하지 않았겠지."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린 것은 저예요.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어요. 여러분이 아무리 반대를 하더라도 제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에요. "


 "라비아타 님과 모두에게 기지에 진입할 것을 강요한 건 저희입니다. 그러니 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 또한 저희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책임임을 주장하는 라비아타의 말에 네 바이오로이드들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들의 잘못과 책임을 주장했다. 앨리스들과 바닐라들, 포이들이 알고는 있으니 다행이라는 말을 주고받는 것을 들은 라비아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책임이라고요? 책임을 어떻게 지실 생각이신가요?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방식으로 책임을 지면, 누가 박수라도 칠 것 같나요? 아니면 시젠이 좋아할 것 같나요?"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책임을 지겠다든지, 무언가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아니에요. 모두에게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반성하고, 위험한 곳에 뛰어들어서 우리를 구해준 시젠에게 감사하는 게 우리가 지금 할 일이에요."


 다분히 공격적인 앨리스 4호의 말을 받은 라비아타가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하자,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더이상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보인 라비아타가 함교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자 바이오로이드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함교로 향했다.


 함교에 들어선 라비아타가 오퍼레이터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와 사과의 말을 전했다. 


 오퍼레이터들은 에바가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을 지시한 덕분이라고 대답했지만, 그녀들이 에바의 지시를 무시하고 행동했거나 다급한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맡은 일을 수행하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도 살아서 그 사지를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짧은 생각으로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 데 대해서 다시 한 번 오퍼레이터들에게 사과한 라비아타가 함내 방송을 준비했다. 




 함내에 방송되는 라비아타의 사과문을 듣는 중에도 에키드나와 티타니아, 샬럿과 아자젤, 베로니카의 시선은 아직까지 정신없이 자고 있는 시젠에게 못박혀 있었다. 


 잠들어 있는 시젠의 귀에는 라비아타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겠지만, 그녀가 일어나면 틀림없이 라비아타는 직접 찾아와서 다시 한 번 사과와 감사의 말을 건넬 것이다. 


 방송이 끝나자 베로니카가 한숨 쉬듯 말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만."


 [누구보다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계신 분은 라비아타 님이겠지요. 하지만 이런 일은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위험을 무릅써야만 하는 상황에 부딪힐 지도 모르지요.]


 베로니카의 말에 아자젤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아무리 신중을 기하더라도 어떤 예기치 못한 상황, 어떤 안 좋은 상황에 어떻게 부딪히게 될 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심지어는 위험한 줄 알면서도 뛰어들거나, 누군가의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도 찾아올 수 있다. 그런 상황은 라비아타가 오르카 저항군을 이끌던 시절에도 여러 차례 찾아왔었고, 오르카의 지휘관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희생을 피할 수 없었던 상황도 여러 차례 있었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 그녀들은 시젠과 타이거샤크의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을 지켜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녀들이 지켜야 하는 것은 시젠의 몸뿐이 아니다. 그녀의 마음이 또다시 무너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만일 희생이 불가피한 상황이 찾아온다면 시젠은 과연 버티거나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그녀의 곁에 남아있는 이들이 그녀를 지탱해줄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그리고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아자젤이 확신한 것이 있었다.


 바이오로이드들만 있을 때에는 괴물들에게 가하는 공격이 유효하지 않았는데, 시젠이 가세한 이후에는 괴물들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었다. 


 시젠의 주변으로는 괴물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거나, 혹은 접근하던 중에 저절로 소멸해버리는 것도 보았다. 

 

시젠이 일으키는 희미한 파란색의 빛, 혹은 그녀가 갑자기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에 나타난 직후 뿜어낸 강렬한 빛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시젠이 이러한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었다. 


 바이오로이드들이 괴물들에게 맞서 싸울 유효한 수단이 없는 이상, 바이오로이드들이 괴물과 싸우려면 시젠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들이 지켜야 하는 대상인 시젠을 위험에 노출시켜야 한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최선을 다해서 보호하고 아무리 시젠이 강력한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아예 위험한 자리에 나서지 않는 것보다 안전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번에 시젠이 보여준 공간 도약 능력은 역설적으로 누군가가 위험에 빠지면 시젠이 그 위험 속으로 직접 다이빙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도 혼자서 다이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와 친한 바이오로이드들을 끌고서 말이다. 


 물론 위험한 곳에 시젠이 뛰어드는 상황이라면 그녀 혼자 가는 것보다 다른 누군가가 같이 가는 게 훨씬 낫겠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시젠이 바이오로이드들을 잔뜩 끌고 맨땅에다 다이빙하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시젠이 자기 의지로 초능력을 제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격해지거나 정신적으로 몰려있을 때에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 그리고 시젠의 감정 제어 능력과 판단 능력은 어린 아이의 것임을 고려했을 때 이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뭘 그렇게 걱정하고 있어?" 


 심각한 아자젤의 표정을 본 에키드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차피 걱정한다고 뭐가 될 일이 아니지 않아? 우리가 해야 할 일,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시젠을 지키는 것 하나뿐이잖아."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덧없다 할지라도 어떤 상황이 닥칠지, 그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네가 그렇다면야."


 단호하게 말하는 아자젤에게 에키드나는 여전히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 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행동하는 에키드나에게 아자젤을 비롯한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은 필요 이상으로 생각과 걱정이 많은 것처럼 보였고 반대로 주변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에키드나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티타니아와 함께 시젠의 바로 옆에 앉아있는 샬럿이 차라리 에키드나보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으로 여겨질 만큼. 


 "대체 우리 아가는 정체가 뭘까요?"


 "그냥 어린 아이야," 티타니아가 시젠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대답했다. "그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초능력을 가졌을 뿐인......"

 

 왠지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샬럿의 머릿속에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티타니아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티타니아의 말대로 초능력이나 외형 등등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본질만 놓고 본다면 시젠은 그저 어린아이였다. 정작 그녀가 알고 싶었던 것은 그 이것저것까지 따졌을 때의 시젠의 정체였다는 사실은 이미 샬럿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 때 누군가가 방 입구의 초인종을 눌렀고, 뒤이어 살짝 긴장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들어가도 되겠느냐?"


 [들어오세요.]

 

 아자젤의 허락이 떨어지자, 히루메-19와 히루메-61이 사라카엘과 엔젤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라도 앨리스들과 포이들이 방 안에 있지는 않은지 둘러보는 두 구미호 바이오로이드들의 모습을 본 샬럿과 아자젤, 베로니카가 쓴웃음을 짓고, 티타니아와 에키드나는 한심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앨리스 공들과 포이 공들은 라비아타 공과 함께 함교에 있어요. 곧 이리로 오겠지만요." 


 "그, 그러냐......" 


 앨리스들과 포이들이 이 자리에 없다는 샬럿의 말을 들은 두 히루메가 안심한 표정을 지으려다 그녀가 덧붙인 말을 듣고는 바로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히루메들이 두 바이오로이드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고압적이고 오만한 앨리스들의 성격과 거침없는 포이들의 성격을 감당하지 못해서만은 아니다. 


 비록 일행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시젠에게 바짝 붙어 지내는 아자젤과 티타니아, 에키드나, 샬럿의 존재로 인해 빛이 바랜 감은 있었지만 세 포이들과 네 앨리스들은 시젠이 오르카 호에서 멸시받는 존재가 된 이후 라비아타와 함께 시젠을 돌봐준 이들이었고 지금도 매우 가깝게 지내는 바이오로이드들이었다. 


 동시에 이들은 시젠 주변에 존재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이 시젠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대해서 특히 신경쓰는 바이오로이드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들의 눈에 비친 히루메들이 시젠을 대하는 태도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젠에게 자기들이 먼저 다가가 놓고서는 시젠이 가까이 오면 화들짝 놀라면서 거리를 벌리고, 시젠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가 금방 물러나고, 시젠이 삐지거나 침울해하면 당황해하면서 허둥거리면서 달래다가 시젠이 좀 기분이 풀렸다 싶으면 또 도망치는 히루메들의 모습은 대부분의 타이거샤크 바이오로이드들로 하여금 탄식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특히나 포이들과 앨리스들은 이런 히루메들의 태도를 볼 때마다 '이것들이 지금 시젠 가지고 장난하냐?'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앨리스들과 포이들이 두 히루메들을 매우 심하게 갈구는 사건이 벌어졌다. 


 겁에 질린 히루메들이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물론, 실금까지 할 정도로.  


 히루메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라비아타가 포이들과 앨리스들을 크게 혼냈고, 그 짓을 저지른 당사자들도 자신들이 심했다는 자각은 있었기에 그 이후로 그렇게까지 갈구지는 않았지만, 그 날로 두 히루메에게 포이들과 앨리스들은 공포스러운 존재로 각인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갈구지만 않을 뿐이지, 히루메들이 하는 짓을 볼 때마다 대놓고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우리 너님 하는 삽질 못마땅함요'라고 말하는 듯한 오오라를 뿜어내는 것은 여전했다.


 "시젠은...... 괜찮은 것이더냐?"


 [갑자기 힘을 써서 피곤한 모양입니다. 닥터 님들도 시젠의 몸에 이상이 없다 하셨으니, 곧 일어나겠지요.]

 

 "다행이로구나......"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지."


 싸늘한 티타니아의 목소리를 들은 히루메들이 움찔거렸다. 앨리스나 포이만큼은 아니지만 별로 온화하지 못한 언행의 티타니아와 앨시스 못지 않게 제멋대로인 에키드나 역시도 히루메들이 두려워하는 바이오로이드들이었다. 

 

 티타니아의 싸늘한 표정과 눈빛을 마주한 히루메들이 버벅거리고, 그 모습을 본 티타니아와 에키드나의 표정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그리고 히루메들은 더더욱 겁을 먹고 당황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이대로 내버려 두다가는 티타니아와 에키드나가 노려보는 것만으로 히루메들이 지난번처럼 겁먹고 울어버리는 대참사가 벌어질 것을 우려한 아자젤이 두 히루메가 이 상황을 빠져나갈 만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시젠이 일어나면 틀림없이 배고파할 텐데, 과자라도 가져다주실 수 있으신지요?]


 "과, 과자라...... 그, 그게 좋겠구나......"


 "허, 허나 언제 일어날지 모르지 않느냐...... 게다가 어떤 과자를 먹고 싶어할지도 모르고......"


 [안드바리 양에게 포장된 과자를 종류별로 몇 개씩 달라고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수제 과자를 직접 준비하시는 것은 시젠이 언제 일어날지, 어떤 과자를 먹고 싶어할지 알 수 없어 곤란하니까요. 만일 안드바리 양이 안 된다고 하거든 저희 다섯이 요청했다고 하십시오.]


 "-그래도 안 된다고 하거든 라비아타 언니 이름을 대면 될 거에요, 아마."


 방문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와 하이힐 소리를 들은 히루메들의 귀와 꼬리가 위쪽으로 솟구치고, 그녀들의 동공이 매우 심하게 떨렸다. 


 두 히루메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방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오는 모습을 본 아자젤이 한숨을 내쉬면서 좀 더 일찍 말을 꺼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와...... 왔느냐?"

 

 "네, 왔어요. 시젠 일어났나 싶어서 보러 온 거니까 그렇게 안 떠셔도 되거든요?"  

 

 한심해하는 말투로 말한 앨리스 4호가 제일 먼저 방 안으로 들어서서 곧장 시젠에게로 다가갔다. 


 몸을 숙여서 여전히 자고 있는 시젠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 그녀가 시젠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지자 티타니아와 에키드나, 샬럿의 눈이 아주 살짝 가늘어졌고, 포이들과 다른 앨리스들도 왠지 못마땅해하는 눈빛을 앨리스 4호에게 쏘아보냈다. 


 오로지 앨리스 1호만이 입술을 깨물고 두 주먹을 꽉 쥔 채로 아직까지 자고 있는 시젠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동안 앨리스 4호가 시젠의 근처에 앉아있자 티타니아와 에키드나의 표정이 조금 더 안 좋아지고, 샬럿과 앨리스 2호와 3호, 세 포이들의 표정에도 짜증이 어렸다. 참다 못한 앨리스 2호가 4호에게 이제 그만 자리를 비켜줄 것을 요구했다. 


 "언제까지 그 자리를 독점하고 앉아있을 생각인가요, 4호? 이제 그만 비키지 못해요?"


 "......쳇."


 혀를 차면서 몸을 일으킨 앨리스 4호가 물러나자 다른 앨리스들과 포이들이 차례대로 시젠에게 다가갔다. 


 앨리스 3호와 포이 2호가 거대한 그녀들의 가슴을 시젠에게 밀어붙이다가 다른 자매들과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들의 제지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던 두 히루메가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도망치듯 방을 나가려 했다. 


 아자젤과 베로니카, 사라카엘이 그 모습을 보았지만 그냥 못 본 척하고 넘어갔다.


 불행히도 그 모습을 본 것은 세 바이오로이드만이 아니었지만. 


 "잠깐," 앨리스 1호가 팔짱을 끼면서 두 히루메를 불렀다. " 어딜 가시나요?"


 "히, 히익?!"


 "소리 지르지 말아요. 시젠 자는 거 안 보여요?"

 

 "미-" 큰 소리로 사과하려던 히루메-19와 61이 앨리스 1호의 눈꼬리가 올라가는 것과 주변 바이오로이드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미안하구나."


 "알면 도망치지 마시고, 시젠이라도 한 번 안아주고 가시죠."

 

 "자, 자고 있지 않- ......느냐."


 "안 깨게 조심스럽게 안아주는 것도 못하나요?"


 "그....... 그치만......."


 "이번 회의때 그치만 금지령을 매우 진지하게 논의해봐야 할 것 같네요."


 "그건 그 때 이야기고," 히루메들과 앨리스 4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앨리스 1호가 다시금 히루메들이 응당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켰다. "도망갈 생각 하지 마시고, 시젠이라도 한 번 안아주고 가세요."

 

 두 히루메의 눈 속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무의식적으로 하와와와 하는 소리를 연발하며 두 히루메가 방 안의 바이오로이드들을 돌아보았다. 앨리스 3호와 포이 3호는 어느새 나가는 길을 막았고, 나머지 세 앨리스들과 두 포이들은 물론 티타니아와 에키드나, 샬럿과 사라카엘도 이번에도 도망가지 말라고 압박을 가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앨리스 님, 포이 님. 히루메 님은 시젠의 간식을 가지러 가셔야 합니다.]


 "저 두 사람이 시젠을 안아주고 가도 시젠이나 그 똑부러진 아가씨가 안 잡아먹거든요?"   


 그나마 아자젤이 두 히루메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포이 3호가 바로 반박하자 더 이상 도와주지 못했다.


 결국 도망갈 길이 막혀버린 두 히루메들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마치 녹아내린 얼굴들 같은 것들이 잔뜩 달라붙어서 기괴한 외형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원래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유갈리안티-205의 보라색으로 빛나는 눈이 바닷속 저 먼 곳을 바라보며 걸었다. 


 한참을 마력의 파장이 감지되는 곳을 향해서 걸어가던 유갈리안티-205가 무언가의 접근을 감지하고는 멈춰섰다. 


 붉은색과 보라색으로 빛나는 이상한 시꺼먼 것들을 몸에 덕지덕지 붙인 또다른 유갈리안티 하나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동형기의 몸 곳곳에서 발산되는 이질적인 파장을 느낀 유갈리안티-205가 경계 태세에 들어가면서 보라색의 빛무리를 뿜어낼 준비를 하자 유갈리안티-163이 적대 의사가 없음과 더불어 자신의 상태가 아직 양호함을 표시했다. 

 

 자신의 몸에 달라붙은 것이 무엇인지 엔지니어가 아닌 전투 병기인 유갈리안티-163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들이 자신에게 뭔가 위협을 가하려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시간을 두고 관찰한 끝에 유갈리안티-163은 자신에게 기생을 시도하는 불청객들이 자신에게 큰 해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이것들을 자신의 외부에 기생하도록 내버려둠으로서 외부로부터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를 크게 줄이고, 적에 대한 대응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째서인지 유갈리안티-163이 물 속으로 들어올 때 이것들이 무척 동요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에 대해서는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의 몸에 달라붙은 이상한 것들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유갈리안티-205에게 제거해줄 것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유갈리안티-163이 보내온 데이터들을 분석한 유갈리안티-205가 알아들었다는 짤막한 답변과 함께 방금 자신이 감지한 마력 파장의 위치와 그에 대한 견해를 송신했다. 


 자신들의 숙주가 또다른 기계와 의사소통을 나누는 것을 본 유갈리안티-163 표면의 철충들도 서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들이 유갈리안티-163과 유갈리안티-205가 대화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두 유갈리안티들 또한 철충들 사이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크고, 강력하고, 독특한 기계를 보고 잠식을 시도한 결과가 바로 지금 이 철충들의 처지였다.


 무슨 짓을 해도 유갈리안티-163의 몸을 덮은 껍질 안쪽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고, 침식 및 내부로의 침입을 시도할 만한 전자회로 또한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들은 유갈리안티의 몸 바깥쪽을 덮은 껍질의 형태로 변이해서 계속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는데, 이 기계가 무슨 생각인지 바닷속을 향해서 제발로 걸어들어가자 철충들도 어디로 도망가지도 못한 채 끌려들어갔다.


 처음에는 그 무서운 바닷속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의외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형제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면 바닷속에 다녀왔다고 자랑하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왠 괴상망측한 괴물딱지들이 유갈리안티-163를 노리고 덤벼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유갈리안티-163이 사용하는 무기와 최대한 비슷하게 만든 에너지 투사체를 열심히 날려대면서, 철충들은 제발 자신들의 숙주가 지상으로 다시 나가주기만을 바랬다. 


 그러나 이들이 뭘 바라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신경쓰지 않았을 철충들의 숙주는 더욱 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갔고 더 많은 괴물들과 조우했다. 싸우다가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서 싸우다가 또 쓰러지고, 또 다시 일어나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유갈리안티-163이 심한 손상을 입어서 잠시 행동 정지 상태에 들어간 사이에 유갈리안티-163의 동체 내부까지 재빨리 침식해 들어간 철충들이 몇 있었다. 


 강력한 숙주를 완전히 장악할 절호의 기회라기보다는 이 정신나간 기계를 어떻게든 빨리 장악해서 바다 밖으로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그러나 아무리 몸속을 구석구석 파고들어도 기계는 이들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유갈리안티에게 부여된 자가수복능력은 철충들이 숙주의 몸을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것을 막았을 뿐 아니라 철충들을 아예 유갈리안티의 몸의 일부처럼 만들어 버렸다. 


 이제는 정말 도망치는 것도,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도 불가능해진 철충들은 그저 자신들의 숙주가 다시 한 번 큰 타격을 입음으로서 자신들이 어떻게 도망칠 기회가 생기기를 바랬다.


 유갈리안티-163에 기생한 철충들이 철의 교황에게 기도하는 동안, 두 유령거미를 닮은 기계들은 마력의 파장이 느껴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타이거샤크가 방문했던 그 수중기지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