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모음


한창 영상을 보던 일동.

닥터가 영상을 잠시 중단하고, 숙연함만이 감돌았다.


블랙 리리스.

멸망 전부터 경호원으로 쓰였던 기종이라는건 이미 다들 알고있는 사실이다. 주인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친다는 것도 역시 알고있는 사실.


하지만 그녀들이 직접 보았던 블랙 리리스는 이곳 오르카호의 리리스 뿐.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을 인격체로서 존중해주는 사령관 덕에 모든 이들이 인간적인 사고로 움직이고,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영상 속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더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무고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다니는 그 모습은 악마라 불리어도 부족함이 없는 수준.



자신들이 알고있던 리리스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모두가 혼란스러운 듯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령관 역시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말없이 두 눈을 감고있었다. 그녀가 어떠한 존재인지 익히 들었었지만, 막상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풀석.



그 때, 문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블랙 리리스가 있었다. 그녀 역시 충격을 받은 듯 제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아버렸고, 옆에서 그녀를 부축해주던 펜리르와 페로, 포이는 어쩔 줄 몰라하며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리리스... 언제 여기에... 아니 그보다 아직 다 안나았잖아."



그녀가 걱정되어 접근하는 사령관. 그러자 리리스는 흠칫 놀라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소리쳤다.




"주, 주인님! 저, 저건 제가 아니에요! 저, 저는 저렇지 않다고요!"




"리리스, 진정해."




"제,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저, 저는 절대 인간님을..."




"블랙 리리스!"



사령관이 소리치자 그제서야 얌전해진 리리스. 사령관은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 네 말대로 저건 네가 아니야. 멸망 전의 또다른 누군가지."




"...대체 무슨 영상이죠? 어째서 멸망 전의..."




"이건 존의 기억이야. 우리가 찾은 두번째 인간의 기억."




그제서야 떠오르는 존의 모습. 강철의 육신으로 자신을 죽이려했던 그의 모습을 되새긴다. 자신의 목을 조르며 증오어린 목소리로 소리치던 그 남자.

리리스는 그제서야 그가 왜 자신을 그토록 증오했는지 깨달았다.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는 리리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울음을 터트린다.




"멸망 전의 저는... 그 분께 그런 짓을..."




"리리스, 저건 네가 아니니까 신경쓰지마. 넌 멸망 전부터 살아온게 아니잖아. 그리고 지금껏 사람을 죽인 적도 없고."




"하지만, 하지만..."




"리리스, 일단은 방으로 돌아가서 쉬도록 해. 그리고 존에게는 되도록이면 접근하지 말고. 현재로선 둘이 마주쳐도 서로에게 상처만 줄 뿐이야."




그렇게 리리스가 동생들과 같이 돌아가고, 사령관은 씁쓸함을 애써 삼켜넘기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술렁임이 계속되자 사령관은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 정숙. 지금부터 리리스에 대해 아무런 말도 꺼내지 마라. 너희들도 알겠지만, 영상 속의 리리스와 오르카호의 리리스는 엄연히 다른 인물이야. 그러니 이 영상을 토대로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거나, 부조리를 행란다면 가차없이 징계처리하겠어."




그렇게 말하는 사령관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 그는 애써 잡념을 떨쳐내고는 닥터에게 물었다.




"닥터... 영상은 얼마나 남았지?"




"아직도 많아... 이걸 다보려면 며칠은 걸릴거야."




"...모두, 오늘은 돌아가도록. 시간이 늦었으니 다음에 마저 보겠다."




그렇게 부하들을 해산시키고, 닥터와 단 둘이 남은 사령관. 그는 닥터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고는 입을 열었다.




"존이 겪은 불행은... 이게 끝이지?"




"......."




아무런 대답이 없는 닥터. 사령관은 제발 자신의 예상이 틀리기를 기도했다.




"닥터... 뭐라고 대답해봐..."




"오빠... 영상을 전부 보고나면... 많이 힘들어질거야."




"......존은 하루라도 행복했던 적이 있었어?"




"오빠가 초반에 본 내용이 전부야. 할아버지와 형과 같이 살던 때... 그 때가 존 오빠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말이 안돼잖아... 쓰레기통 뒤지고, 인육으로 만든 사료나 주워먹으면서 사는게 가장 행복했을리가 없잖아...!"




사령관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같은 인간으로서 존이 겪은 일들에 대해 크게 분노했고, 동시에 크게 슬퍼했다.


닥터 역시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 침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빠... 나도 영상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 나는 지금껏 많은 자매들을 치료했어... 그런데... 그런데... 존 오빠는 어떻게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무리 나라해도... 어떻게 존 오빠의 상처를 치료해줄지 모르겠다고..."




이내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오는 닥터. 사령관은 그녀를 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는 현재로서 그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후우... 닥터, 일단 오늘은 푹 쉬자. 영상은 내일 나한테 보내줘."




"알았어..."




그렇게 닥터의 공방을 나오는 사령관. 그는 무거운 걸음을 옮겨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러는 와중 수 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자신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고, 그는 애써 미소 지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해맑은 환한 미소. 그녀들의 미소를 볼수록 그는 마음이 찢어져갔다. 존도 저런 웃음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는 같은 인간으로서 그의 미소를 되찾아야만 했다.


어느새 다다른 존의 독방.

그는 문에 달린 창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벽에 기댄 채 천장을 바라보는 존. 기계의 몸을 지녔기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사령관의 눈에는 그저 그가 안타깝고 슬프게만 보였다.



마음같아서는 들어가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

하지만 존의 상처는 너무나도 깊고, 선명했다. 상처가 벌어진 채 방치되면 결국 곪아서 썩어들어가기 마련. 이제와서 그에게 접근해봤자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신이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결국 문에서 멀어져가는 사령관.

그는 생각에 잠긴 채 함장실로 향했다.




***




독방 안, 존은 벽에 기댄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시야에는 보여서는 안될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장 위에 매달린 머리없는 시신. 그것은 틀림없는 형, 아놀드였다. 존은 먼저 떠나간 자신의 형을 멍허니 바라보았다.

귓가에 울리는 형의 목소리. 형은 구슬프게 동생을 찾고있었다.




"존... 앞이... 캄캄해..."




"......"




존은 이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듯 그저 멍하니 눈앞에 아른거리는 형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내 하나둘 늘어나는 환각.


스콧 할아버지가 나타나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있었다.




"존... 어디있느냐...? 여기는 몹시 춥구나..."




"......"




그리고 뒤이어 나타나는 또다른 환영. 이번에는 베키였다.




"존... 보고싶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작은 소녀.




"아저씨..."





사방팔방에서 자신을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오고, 존은 그 한가운데서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전방만 주시했다.




"...나도 보고싶어... 보고싶은데..."




존은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분명 눈앞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그는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는 듯 소리쳤다.




"다들 날 두고 어디로 간거야...! 어디로!!!"




환청에 시달리던 존은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향해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사물들을 잡히는대로 집어던지고, 보이는 것은 모조리 걷어차고 때리며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자 경계를 서던 브라우니들이 곧바로 상부에 보고했고, 이내 오대기조가 오자 같이 들어가서 존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인간님, 더 이상 움직이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움직이는 순간 발포하겠습니다!"




브라우니들과 레프리콘, 노움 등등이 총을 들고 바짝 긴장한 상황. 존은 난동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끼기긱.



녹슨 쇳덩이가 내는 마찰음에 일동 섬뜩함을 느끼며 메마른 침을 삼켰다.




"...너희들은 뭐야...? 형은? 할아버지는? 베키는? 꼬맹이는 또 어디갔어? 왜, 아무도 없는거야? 모두 나랑 같이 살기로 했는데... 왜!?"




초병들과 오대기조는 내심 확신했다. 그가 기어코 정신줄을 놔버렸다는 것을. 이 상태로는 굉장히 위험하다. 그 블랙 리리스를 제압할 정도의 출력을 자랑하는 기체. 그것이 이성을 잃고 날뛰는 순간 자신들의 힘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으리라.



"브라우니, 어서 라비아타 통령을 불러요, 어서!"




레프리콘의 말에 곧바로 라비아타를 무전으로 호출하는 브라우니. 그러는 사이, 존은 느릿느릿 그녀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너희들... 바이오로이드... 그래, 너희들이었어... 너희들이 세상에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난 이렇게 살지 않았을텐데... 너희들이...! 너희들이!!!"




존이 다시 난동을 부리려는 그 때,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와 존을 가로막았다.

다름아닌 더치걸과 LRL이었다.


어린 소녀 둘이 갑자기 나타나자 크게 당황한 오대기조가 둘을 황급히 끌어내려 했으나, 더치걸이 그들에게 외쳤다.



"난 괜찮으니까 모두 물러서! 여긴... 나와 LRL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어쩔 줄 몰라하는 오대기조. 어서 둘이 다치기 전에 구출해야하는 상황. 결국 노움은 브라우니와 레프리콘에게 신호를 보내고는 조금씩 더치걸과 LRL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노움은 이상한 낌새를 인지할 수 있었다. 존에게서 방금 전의 살벌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존은 물끄러미 더치걸과 LRL을 내려다보았고, 이내 손을 들어 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때마침 라비아타가 황급히 뛰어오고, 그녀는 곧바로 존을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더치걸과 LRL을 쓰다듬는 모습을 보고는 행동을 멈추고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아저씨... 너무 슬퍼하지마. 왜 혼자서 그렇게 슬퍼하는거야?"




"큭큭, 이 진조의 프린세스는 권속의 슬픔도 덜어줄 수 있느니라! 그러니 두번째 권속이여. 우리들과 얘기를 나눠보자꾸나!"



존과 대화를 시도하는 두 소녀. 라비아타는 위험하다 생각해 둘을 구출하려 했지만, 더치걸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나, 이 아저씨와 얘기해보고 싶어... 이 아저씨는... 나하고 비슷한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 셋만 있게해줘."




"하지만 그건 너무..."




"날 믿어줘. 정말 위험하다 생각하면 빠져나올테니까."




너무나도 간절한 눈빛. 라비아타는 걱정이 앞섰지만, 더치걸의 눈빛을 보고는 마음을 굳게 잡는다.




"그럼 위험하다 생각되면 이걸 누르도록 하세요. 이걸 누르면 저와 자매들이 바로 달려올테니까."




라비아타는 더치걸에게 호출기를 건네주고는 경계병들에게 문앞을 잘 지켜달라 당부하며 자리를 떠나갔다. 오대기조 역시 걱정이 앞섰으나 더치걸의 뜻을 존중해 조용히 물러났다.




그렇게 셋만 남겨진 방.

존은 제자리에 풀석 주저앉고는 더치걸과 LRL의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너희들은 내가 무섭지 않은거냐? 난, 마음만 먹으면 너희 둘을 갈갈이 찢어죽일 수 있어. 내가 몸으로 쓰고있는 D - 077은 바이오로이드보다 더 강한 출력을 낸다고."




그 말에 LRL은 히익 하고 기겁하며 더치걸 뒤에 숨어버리고, 더치걸은 아무럼 동요없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아저씨, 아저씨가 옛날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




더치걸의 부탁에 존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낀다. 어두컴컴하기만 했던 시절, 그는 다시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고 싶지않았다.





"...너희는 바이오로이드잖아. 내가 말해준다고해서, 날 이해할 수 있겠냐?"




"...그럼 나부터 얘기할게."




"난 네 얘기 들어준다고 한 적 없는데."




"그러지말고 들어줘. 우린 아저씨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더치걸의 간절한 부탁. 존은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는 순간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아저씨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난 원래 탄광에서 일했었어."




그 말에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존. 그리고는 뒤늦게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이 박히고, 이곳저곳 울퉁불퉁 흉측하게 변해버린 손. 어린 소녀가 지닐 수 없는 손이었다.




'이런 자그마한 몸으로 탄광을...'




존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그 때는 정말 힘들었었어... 아무리 열심히해도 지원도 잘 안해줬고, 온몸이 부서질 듯 쑤시는데도, 쉬지 못하고 계속 땅을 팠어. 언제는 손에서 피가 나는데도 붕대를 감은 채 작업을 진행하던 적도 있었고..."




"......"




"난 인간님들의 명령대로 자매들과 같이 지하로 내려가서 하루도 쉬지않고 땅만 팠어. 산소도 부족해서 숨도 쉬기 힘들었지. 그런데, 갑자기 지상에 무슨 일이 생기더니 그대로 매몰되어버린거야. 그 때 나는 자매들과 지하에 같힌 채 수 년을 살아왔어."




그 말에 다소 놀란 듯한 존. 더치걸은 아랑곳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진행했다.




"정말 힘들었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어. 남아있는 식량들을 자매들과 나눠먹으면서 수 년간 지하에서 지냈지..."




"...그런데서 어떻게 살아나온거지? 너희 바이오로이드들도 산소가 없으면 살지 못할텐데..."




"비축해두었던 산소탱크로 겨우 숨을 쉴 수 있었어.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지. 식량도 다떨어지고, 산소도 부족해서 모두가 그 자리에서 죽기 직전이었어... 그런데, 그 때 나타난거야. 우리들의 슈퍼히어로가."




"슈퍼히어로..."




"응, 슈퍼히어로. 그 사람은 키가 크고, 근육이 빵빵하고, 멋있는 부하들을 데리고 다녔어. 그리고 옆에는 예쁜 친구들도 많이 있었지. 그 슈퍼히어로가 매몰된 지하를 파내면서 우리들을 구해준거야. 그 사람은 달려와서 날 안아주었어. 그리고는 이렇개 말해주었지. '우리와 함께하자'고."




존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떠올렸다. 

옛적에 스콧 할아버지가 해주었던 이야기. 누군가 힘들어 할 때, 슈퍼히어로가 나타나 따뜻하게 감싸안아준다고. 어릴 적의 환상으로만 남았던 이야기.




"그 슈퍼히어로 덕분에 난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게됐어."





"아, 그 슈퍼히어로는 짐에게도 나타났노라!"




불쑥 끼어들며 말하는 LRL. 안대의 소녀는 품에 안고있던 책을 존에게 건네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흠흠, 우선 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신성한 빛의 기둥에서 사악한 용들을 무찌르는 드래곤 슬레이어 였느니라!"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군."




"으윽... 사, 사실 나는 등대에서 일하던 바이오로이드였어..."




컨셉을 풀고 진중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LRL.

존은 소녀를 쳐다보며 귀를 기울였다.




"나는 인간님들의 명령대로 혼자서 등대에 남아 등대지기 역할을 했어. 처음에는 지원도 자주 오고, 식량도 풍족했었어. 그리고 인간님들과 연락도 할 수 있었고... 그런데, 언제부턴가 갑자기 연락도 끊기고 지원도 오지 않는거야... 나는 철수 명령도 받지 못했는데..."




"...그럼 등대에 방치된건가?"




"...응. 나는 혼자서 100년 가까이 혼자 지냈어. 아무런 지원도 못받은 채..."




"끔찍하군..."




"식량도 아껴먹고, 혼자 지내면 심심하니까 책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어. 언젠가는 인간님들이 찾아올거라고 믿으면서... 그런데, 갑자기 인간님들이 멸망해버렸다고 하더라..."




급격히 침울해지는 LRL. 그 순간의 기억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순간이었다.




"...그 때 엄청 울었어. 어린아이처럼..."




"어린아이 맞잖아."




"히잉, 어린애 아니야! 아무튼, 나는 엄청 슬퍼서 그냥 등대에서 뛰어내릴까 생각도 해봤어... 그런데 내가 읽던 책 중에 이게 있었어."



LRL은 존에게 건네준 책을 가리켰다.

그것은 슈퍼히어로가 나오는 만화책이었다.

존은 뒤늦게 그 책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분명 본 적이 있던 것이다. 옛적에 할아버지가 해줬던 이야기... 그 이야기는 언젠가 만화책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형과 쓰레기통을 뒤지며 찾아봤던 그 이야기...




"그 책에는 멋있는 슈퍼히어로가 있었어. 그 슈퍼히어로는 가끔 바보같지만, 아주 멋있고 용감했어. 나는 그걸 보면서 꿈꿨어. 언젠가는 이런 멋진 슈퍼히어로가 나타날거라고. 그래서 나는 뛰어내릴 생각을 버리고 맨날 책을 읽었어. 히어로가 나타날 때까지..."




"...그래서 히어로는 나타났나?"




"응! 어느 날, 슈퍼히어로가 나타나서 날 꼬옥 안아줬어. 그리고는 나와 마지막까지 함께하자고 말해줬어!"




싱글벙글 웃으며 이야기하는 LRL.

그 때, 문이 열리고 마리아가 황급히 달려와 더치걸과 LRL을 부둥켜 안았다.




"아니 얘들아, 어디 갔던거야?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면 안된다고 했잖니!"




마리아가 들어오고 뒤이어 들어오는 알렉산드라. 그녀는 전기채찍을 들고 존을 경계하며 마리아의 곁을 지켜주었다.

마리아는 두 소녀가 혹시 다친 곳은 없나 확인한 후, 존을 경계하며 빠르게 나갔다.

마리아가 나가고, 알렉산드라가 존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아이들에게 이상한 짓을 한건 아니겠죠?"



"...아이들이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더군."




"이야기?"




"슈퍼히어로가 나타나서 자기들을 구해주고 따뜻하게 안아줬다고 하더라고."




"...맞아요. 그 슈퍼히어로는 아이들은 물론, 여기있는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안아줬어요. 아주 멋진 분이시죠."




"사람... 너희들을 말하는건가?"




"아, 멸망 전에 살았던 당신은 이해 못하겠죠. 저희는 그저 도구에 불과했으니. 하지만 그 히어로는 달라요. 저희를 사람으로 여기면서 감싸줬죠."




알렉산드라의 말에 존은 손에 쥐어진 책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알렉산드라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나가려고 하자, 존이 그녀에게 물었다.




"모두에게 버려지고, 아무것도 없는 쓰레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올바른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히어로는 늘 그렇게 말하죠."




"......나한테도... 히어로가 나타날까?"




"당신이 간절히 바란다면, 히어로는 언제든지 나타날거에요.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제 가보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시길."




그렇게 알렉산드라가 떠나가고 존은 홀로 남겨진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꼬질꼬질한 책을 내려다보며 조용한 밤을 보냈다.



***



본 내용은 공식설정과는 전혀 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