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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폰에게 멱살잡이를 당한 지 사흘이 지났다. 다행히 순찰 중이던 브라우니가 내가 멱살을 잡힌 광경을 보고 제지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대신 이상한 소문이 빠르게 퍼진 거 같다. 이제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는 나를 보면 내가 말을 걸기도 전에 도망간다. 그래도 예외는 있다.

 

“사령관!”

 

사령관실에서 업무를 보다 잠시 상념에 빠져있었는데 갑자기 아스널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아이 씨... 깜짝이야...”

 

“그게 사실인가! 며칠 전 기록물 보관소에서 스카이 나이츠의 소대장의 첫경험을 그녀의 부대원이 보는 앞에서 억지로-”

 

“아니야! 아니라고!”

 

그 소문이 아스널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아스널은 나한테 매우 흥분한 상태로 따지기 시작했다. 잠깐... 흥분한 상태로? 실망이나 분노가 아니라?

 

“괜찮다! 난 이해한다. 나도 가끔 마음이 동할 땐 전 사령관을 억지로 끌고 간 다음-”

 

시발... 이 미친 색정광년이 나를 자기랑 동급으로 취급하면서 갑자기 지 범행 썰 풀고 있다. 이러니까 ‘그 새끼’가 도망갈 법도 하다.

 

“대장!”

 

때마침 아스널의 부관 비스트 헌터가 들어왔다.

 

“사령관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 마침 잘 왔네. 지금 막 얘기가 재밌어질 참인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서 강제로 하는 게 재밌는 얘기라고? 역시 미친년이 확실하다...

 

“대장... 제발... 사령관님.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지 말고, 마침 자네도 온 김에 같이 듣게.”

 

미안하지만 그런 외설적인 이야기는 더는 들어줄 수 없다. Listen! Listen! I can’t listen!

 

“야! 여기가 니네 집 안방이냐? 함부로 막 들어와서 잠자리 썰 푸는 곳이야?”

 

“그래도 듣다 보면 재밌을 텐데...”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작 잘못한 아스널 대신 비스트 헌터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다. 너도 참 고생이 많아...

 

“다른 용건 없으면 나가. 바빠 죽겠으니까... 그리고 아스널 넌 오늘 일과 끝나면 다시 와.”

 

“일과 후에 다시 오라는 건가?”

 

“그래.”

 

“역시 뒷이야기가 궁금한가 보군.”

 

“그런 거 아니야. 넌 사령관실에 함부로 들어온 벌로-”

 

“벌이라니... 그런 명목으로 날 불러내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아니... 시발 왜 기대하는 눈빛인 건데? 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옆에 있던 비스트 헌터의 안색은 실시간으로 창백해져만 간다.

 

“그런 거 아니야. 올 때 시말서 써서 가져와. 그게 벌이야. 알겠어?”

 

“알겠다...”

 

다른 이상한 헛소리가 나오기 전에 컷했다. 아스널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실망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비스트 헌터는 그 옆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아스널과 비스트 헌터가 나가고 드디어 조용해졌다. 아이고 머리야... 이대로 가다간 철충, 별의 아이, 펙스고 뭐고 화병으로 먼저 뒤지게 생겼다.

 

‘똑똑똑’

 

잠깐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들어와.”

 

이번에 들어온 건 메이였다. 며칠 동안 둠 브링어가 영원한 전장에서의 전투를 맡았는데 별다른 보고 없이 복귀한 걸 보니 다행히 다들 무사히 복귀한 듯하다.

 

“사령관. 여기 영원한 전장 전투 결과 보고서.”

 

“아 그래... 고마워. 수고했어.”

 

“그나저나... 아까 아스널 준장이 이상한 얘기를 하던데 그동안 뭔 일 있었어?”

 

“아... 아니야... 뭔 일이 있기는...”

 

“이상하네...”

 

아스널... 이 미친년... 그나마 다행인 건 자세한 얘기는 못 들은 모양이다.

 

“... 며칠 동안 고생 많았는데 필요한 건 없어?”

 

또 이상한 얘기가 나오기 전에 빠르게 화제를 전환 시켰다. 필요한 거 없냐는 질문에 메이는 고민에 빠진 듯했다.

 

“... 딱히 필요한 건 없어. 대신, 그 멍청이나 데려와.”

 

“멍청이라니? 누구?”

 

“있잖아... 그... 전 사령관...”

 

아... ‘그 새끼’... 근데 걔는 지금 나한테 제일 필요한데...

 

“그거 말고 다른 건 없냐?”

 

“없어... 최대한 빨리 찾아서 멀쩡히 데려온다고 약속해. 그거면 돼.”

 

“그래.”

 

“정말?”

 

지가 약속하라고 해놓고 알겠다니까 못 믿는 눈치다. 뭐지...

 

“정말이라니까. 당연히 멀쩡히 데려와야 하는 거 아니야?”

 

“... 보복하려던 거 아니었어? 지난번엔 잡히면 가만 안 둔다며...”

 

그건 또 언제 들은 거지... 언젠가 무심코 말한 걸 되게 진지하게 들은 모양이다.

 

“걱정 마. 니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어... 근데 문제가 있어.”

 

“... 무슨 문제...?”

 

“블랙 리리스가 같이 갔잖아. 막상 그쪽에서 저항하기 시작하면 데려오기 힘들 수도 있어. 소재 파악이랑 별개로 회유할 방법도 찾아야 해.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다는 것만 알아둬.”

 

블랙 리리스의 전투력을 생각했을 때, 그녀가 마음먹고 저항한다면 매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다.

 

“전투는 우리한테 맡겨. 화력으로 밀어붙이면 무조건 제압할 수 있어.”

 

“안돼.”

 

“왜?”

 

“전투가 발생하면 어느 쪽이든 간에 다칠 수밖에 없어. 특히 화력으로 밀어붙이면 더더욱.”

 

“뭐? 그런 건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안된다는 거야.”

 

“...”

 

“그 녀석은 리리스든 저항군이든 다치면 슬퍼할 거야. 너도 그 녀석이 다치면 슬프잖아. 안 그래?”

 

“뭐... 뭐...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뭘 슬퍼한다고 그래!”

 

“그럼 왜 멀쩡히 데려오라고 약속하라는 건데?”

 

“...”

 

메이는 자기 머리 색 만큼이나 얼굴을 붉힌 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항상 자신만만하다가도 ‘그 새끼’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된다. 뭔가 귀엽기도 하고... 왜 맨날 ‘그 새끼’가 놀려먹는지 알 거 같기도 하다. 나도 재미 좀 볼까?

 

“야. 지금 둘밖에 없는데 솔직히 말해봐. 너 걔 좋아하지?”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그 멍청이를...”

 

“그래서 그렇게 걱정이 돼서 제발 멀쩡하게만 데려와달라고 부탁했어?”

 

“...”

 

“정말 솔직하지 못하네... 내가 걔 무사히 데려와 줄 테니까 그동안 솔직히 말하는 거 연습해보는 건 어때?”

 

“...”

 

메이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부들부들 떨고 있다. 아ㅋㅋㅋ 이거지ㅋㅋㅋㅋ 이 맛에 놀리는 거였구나ㅋㅋㅋㅋㅋ 진짜 반응이 너무 혜자다.

 

”... 해...“

 

응? 뭐라고?

 

“나... 나도 그 멍청이 좋아해! 좋아한다고!”

 

결국 폭발했는지 메이는 소리를 지르면서 눈물을 보였다. 어라? 눈물? 갑자기 여기서 급발진을? 이건 예상에 없었는데...

 

“그래! 그동안 자존심 때문에 부끄러워서 솔직하게 표현 못 하고 맨날 모질게 굴었고! 그것 때문에 남들 진도 다 빼는 동안 혼자 속앓이하고 있었어! 그런데다가 이젠 그 멍청이가 없어져 버려서 이제 영영 고백 못 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뭐! 너도 내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자존심 세우면서 이러는 게 한심해 보이냐?”

 

“...”

 

“흑... 흐윽... 끅....”

 

메이는 한바탕 소리를 지르더니 이젠 울기 시작한다. 내가 너무 심했던 거 같다. 얘한테 그런 고민이 있는지 하나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선을 넘었다... 사과해야겠지...

 

“저기... 미안해... 그런뜻이 아니었어...”

 

“됐어! 이제 와서 사과하지 마! 그런 되지도 않는 사과 따위 필요 없어!”

 

이걸 어떻게 해야 한담... 일단 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때 문밖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이트 앤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일단 들어갈게요.”

 

나이트 앤젤이 밖에 있다는 소리에 메이는 황급히 울음을 멈추고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대장. 여기 있었군요.”

 

“뭐야. 나앤? 넌 또 왜 왔어?”

 

“전투 결과 보고하러 간다더니 한참을 안 오잖아요.”

 

“이제 막 갈려고 했어.”

 

“... 대장 울었어요?”

 

“내가 울긴 왜 울어?”

 

“근데 눈이 왜 이렇게 뻘게요?”

 

“...”

 

“옷 소매에 이건 또 뭐에요?”

 

“... 몰라!”

 

그 말을 끝으로 메이는 사령관실을 뛰쳐 나갔다. 아까 일은 사과해야 하는데... 오늘 업무 끝나면 따로 찾아가든가 해야겠다...

 

그나저나 나이트 앤젤은 어느새 내 앞으로 왔다. 근데 눈에 초점이... 없다...? 이윽고 나이트 앤젤의 오른손이 내 몸쪽으로 온다.

 

“커헉...”

 

“대장한테 뭔 짓 했어요?”

 

난 분명 앉아있었는데 어느 순간 목을 잡힌 채 위로 들어 올려졌다. 어떻게 풀어보려 두 손을 가져다 대도 전혀 풀리지 않는다. 무슨 힘이 이렇게 쎄... 이게 인간과 바이오로이드의 ‘힘의 차이’인가...

 

“당장 말해! 대장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컥...”

 

아이고... 숨도 못 쉬겠는데 말을 어떻게 합니까... 대답할테니까 제발 놔주세요... 그리폰의 멱살잡이도 그렇고 상관 폭행은 기동 공격기의 기초소양인가...

 

“당장 말하라고! 말해!”

 

“끄윽...”

 

그냥 업무나 볼걸. 왜 괜히 꼬맹이 하나 놀려 먹으려다가 울렸을까...

 

점점 몸에 힘이 빠지고 의식이 희미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