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는 보급용 표준 약통을 손에 들고 흔들어 보였다. 자락자락하는 소리가 의무실 안을 울렸다.


"솔직히 생각해봤지만. 오르카에서 그런 약을 좋아할 사람이 안 떠올랐는데. 누가 가져갔어."

"그래? 좋은 거 아냐?"

"좋기만 할 걸. 딱히 나중에 무슨 결과가 나올 약은 아닌 거 알잖아."


닥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한 발견이었다곤 하지만 바이오로이드의 신체에 남성기를 자라나게 하는 약을 만들어낸 바이오로이드 치고는 그렇게 기뻐보이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선내에 방송했어도 반응이 시큰둥하기도 했거니와. 이걸 쓰러 올 사람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 예상을 깨고 약이 하나 사라진 것이다.


"유효기간이 몇 시간이었지?"

"하룻밤 정도? 정확히는 사정 다섯 번."

"비상식적이긴 한데, 바이오로이드니까 그 정도면 즐기기 좋겠지."

"나한테 묻지마. 오빠는 나랑은 안 하잖아."

"그건 미안해."


아무튼 나에게 먼저 보고해야 할 일이라고 해서 내가 왔으니, 닥터는 내 인증을 통해 오르카의 감시 카메라 영상을 불러왔다.


"저기 휴게실 에스프레소 머신 옆에 이걸 뒀거든. 설탕통 옆에 보이지? 열 다섯 개 들이."

"해상도를 좀 높여볼래?"

"무슨 영화인 줄 알어?"


닥터는 잠시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리는 척 하다가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통에 무게 센서를 달아둬서 누가 가져가면 알아차릴 수 있게 해뒀지."

"그래? 그럼 누군지 알 수 있겠네."

"당연하지. 여러 사람들이 뒤적거린다고 노이즈가 많긴 했지만. 확실히 무게가 줄어든 시점은.... 저녁 식사 뒤네."

"그때 영상을 볼까. 띄워줄래?"

"음...."


닥터가 보여준 영상에는 누군가 카메라를 등지고 기분이 좋은 듯 어깨를 살짝 들썩이고 엉덩이를 부드럽게 흔들면서 커피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질을 높일 수는 없었지만. 이미 충분히 선명했던 영상에 나타난 바이오로이드가 누군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닥터와 나는 서로를 마주보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어.... 말이 되나?"

"그러게 말....."


문 여는 소리가 닥터의 말을 끊었다. 우리 둘이 문을 바라보자. 화면의 그 바이오로이드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서서 우리의 당황스런 시선을 애써 견디고 있었다. 찰랑찰랑한 하늘색 머리의 흔들림을 잠시 보던 나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해야만 했던 질문을 던졌다.


"....누구였어?"

"...."


설마.... 설마? 닥터와 나는 정말 우리의 예상이 맞을지 급히 눈길을 교환하며 다음 대답을 끌어내기 위한 질문을 속에서 마구 휘저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흐레스벨그 뒤에서 나타난 자그마한 바이오로이드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입을 딱 벌린 닥터와 눈이 크게 떠진 나는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기로 했다.


"어... 음.... 좋았니?"

"네...."


흐레스벨그는 수줍게 풍만한 자기 가슴에 얼굴을 묻는 모모를 끌어안으며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 없다는 미소로 내려다보더니. 나를 향해 시원하게 웃어보였다.


"세 알 더 받아갈 수 있겠습니까?"

"휴가 줄 테니까 세 통 가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