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설정과 다를 수 있음

*약간 맵다. 새드 엔딩

*이전 글 술 한 잔에 그리움을 담아, 당신을 그리우며 키르케

*그 외 그동안 쓴 문학 총 정리 6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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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손이 참 많이 가는군요."


야트막한 언덕 위. 깔끔하게 정돈되어 수많은 꽃들과 가로수가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이 장소는 사령관이 묻힌 곳이다. 철충과의 전쟁을 끝내고, 세상을 복구하는 것에

모든 것들을 내던진 그는 이후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평소 게으르던 주인님 답게 조금만 제가 신경 쓰지 않으면 바로 더러워져선.."


사령관의 무덤은 수많은 전사자들이 묻힌 곳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는 살아 생전 단 한번도

지난 철충과의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잊지 못했었다.


"벌써 누군가 다녀간 모양이네."


그의 무덤 앞에 놓여있는 꽃다발.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바닐라는 정중하게 꽃다발을 들어 한 쪽으로 잠시 치워두었다. 그녀가 사령관을 사랑했던 만큼

이 꽃다발을 놓고 간 인물도 그를 사랑했을 것 이리라.


"어휴, 이 먼지 좀 봐!"


바닐라가 정성스럽게 묘비에 쌓인 먼지를 닦기 시작했다. 그의 식별 번호인 0번과 그의

이름이 적힌 묘비. 그 묘비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문구들이 쓰여있었다.


"참나, 이렇게 게으르고 무책임한 주인님껜 너무 안 어울리지 않나요?"


하지만 그런 말과는 다르게 바닐라의 얼굴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가 남긴 삶의 족적을

모두가 인정한다 생각하니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사령관은 마지막 떠나는 그 순간까지 바이오로이드와 후손들을 걱정하며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 쓰러졌을 때에는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추고 그가 입원한 병원 앞에서

간절히 기도를 올릴 정도였다.


"저희들을 남겨 놓고 참 매정하시지. 어떻게 사람이 그 정도의 인정도 없이 떠납니까?

하다못해 편히 노년을 보내셨으면 제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마지막까지 사령관의 곁에서 그의 수발을 들어온 바닐라는 그때 세상이 멈추는 경험을 했다.

아직도 그때의 그 상처는 바닐라의 마음에 말뚝을 박아 뽑히지 않았다.


"오랫동안 모셨는데 그렇게 제가 싫으셨나요? 아니면 제가 잔소리를 좀 했다고 삐진 건가요?

주인님같이 자기 몸 상해가며 일 하는 분들은 딱히 부지런하다고 칭찬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바닐라는 사령관을 멈추지 못했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멈추지 못한 채. 그저 바라 만 보았다.


"이렇게 세상 편히 누워있는 주인님을 보자니 제 신세가 처량맞게 느껴집니다.

어린애 같이 툭하면 심술 부리고.. 또 조금만 칭찬하면 표정이 풀려서 헤실거리고...

정말 바보 같아서... 정말.. 흑..!"


바닐라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사랑하는 이를 무력하게 떠나보낸 자신에 대한 원망.

그의 몸이 그렇게 망가지는 것을 바라 만 본 무력감. 모든 것들이 그녀의 가슴에 깊게 맺혀있었다.


"바보... 멍청이... 왜.. 왜! 저를 먼저 떠났어요!"


하지만 바닐라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 자신은 그저 만들어 진 바이오로이드.

태생부터 수명이 다르다. 그가 먼저 떠나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바닐라가 묘비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며 울부짖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낸 슬픔은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바닐라의 마음을 옭아매었다.


"보고 싶어요... 제발... 이젠 잔소리도 하지 않을게요... 그저... 그저 제 옆에 계셔주세요!"


바닐라의 마음은 사령관에게 닿지 못한다. 그저 허무하게 이 장소에 울려 퍼질 뿐.

그는 이 세상을 떠났고, 그녀는 이 세상에 남겨졌다. 두려운 마음과 슬픔이 몰려왔다.


"주인님이 쓰다듬어 주시던 손..."


그녀가 잔소리를 할 때면 늘 허허 웃으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듬직한 손. 그 손이 너무 그리웠다.


"주인님의 목소리..."


그녀의 잔소리에 변명하며 그녀를 놀리기도 하고, 달래주기도 하던 살가운 목소리.

그 목소리가 너무 그리웠다.


"주인님의 체온..."


언제나 꼭 끌어안아 주었던 그의 듬직한 품, 그 품에서 느낀 따스한 그의 체온.

그 체온이 너무 그리웠다.


"주인님의 얼굴..."


언제나 그녀를 바라보고 따스하게, 부드럽게 웃어주던 그의 얼굴.

그 얼굴이 너무 그리웠다.


"무엇 하나 그립지 않은 것들이 없는데.. 왜 먼저 가셨어요..! 왜!"


바닐라의 두 손이 사령관이 잠든 묘지를 두들겼다. 하지만 살아 생전의 사령관이 그랬듯이

그저 묵묵히, 아무런 대답 없이 바닐라의 투정을 받아주었다.


한참을 사령관의 묘지를 끌어안고 울던 바닐라가 조용히 일어서 얼굴을 닦았다.

그와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기에, 언젠가 하늘에서 다시 만날 그 날을 위해서.


"분명 제가 찾아가면 청소할 것들이 많이 쌓여있겠죠. 주인님은 그런 분이니까요."


바닐라가 감정을 다스리고 다시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사령관을 사랑하지만,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던 그 모습으로 돌아왔다.


"흥! 걱정 마시죠. 다시 만나면 주인님이 지겨워 할 정도로 사랑한다고 말 하겠습니다!"


그녀의 손이 사령관의 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금은 그저.. 편히 쉬세요. 저희들 걱정은 다 내려놓고.. 편히.. 제가 주인님의 곁으로 돌아갈 때 까지."


먼저 떠나간 이를 그리워 하는 마음을 담아 바닐라의 손이 사령관이 잠든 묘를 어루만진다.

영원한 이별이 아니기에, 외로움을 잘 느끼던 사령관을 떠올리며 바닐라가 사령관의

묘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사랑하는 주인님... 다음엔 청소 상태도 확인할 거니까.. 기대하세요."


바닐라의 마음이 하늘 넘어 사령관에게 닿은 것일까.

구름에 가려졌던 하늘 사이로 따스한 햇빛이 바닐라를 비춰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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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마음을 담아 당신을 그리우며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