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먹고사는 것과 같은 말이 되는 순간, 삶과 책임이 뒤바뀌는 순간 - 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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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싫은 일들은 모두 피해왔다. 낮선 일들은 모두 피해왔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은 반절밖에 도망쳐나오지 못 했다.



 그것이 지금의 타고 남은 결과라고 믿어왔건만.




 싫은 일들을 절반이라도 해두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가, 덕분에 좋은 일들의 절반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다만, 그 골목의 주린 개가 떠올랐다. 비좁은 골목에서 포효하듯 으르렁대던 그 녀석이 떠올랐다. 그녀가 함께 본 그 개와 다를 것 없는 본질이나, 어찌 이리도 야생성을 거세당할 수 있는가.


 포만감이라는 것이 옳고 그름으로 따져볼만 한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지금, 피둥피둥 살이 찌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언가.



 굻주린 들개여야 할까. 나는. 굶주린 들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역겨운 데모 냄새. 비살상이 풍기는 피냄새. 권리가 곪은 상처 위로 반창고만을 덧댄 나머지 진물을 흘리게 되었다. 돌아온 대학가의 생김새는 그러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런 얄팍한 믿음. 충동과 본능에 대한 혐오조차 막지 못 한 발걸음. 나는 어디까지 나를 잃어버린 것일까. 다만 간직했어야 하는 것인지 그 가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기숙사는 여전히 고요했고 창밖은 흙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바닥의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기이할 정도로. 언젠가는 누군가의 무덤, 누군가의 집, 누군가의 사당이었을 수도. 그 위로 이념의 소용돌이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학교는 거의 휴교에 준하는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연구실은 텅 비고 칠판에는 먼지가 앉았으며,


 외진 곳은 거미들이 살살 걸어다니고 있다. 줄에 걸린 잡벌레들이 아우성을 지르고 있다.



 오직 눈에 띄는 곳에만 학생이 있었고, 아무도 모르게 하는 데모는 없으므로 하나같이 분개하며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에 분노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다만, 그 형용 불가한 역동은 목적 없는 인형들이 취하기 쉬운 질 나쁜 알코올같은 것이다. 그 취기가 풍겼다.



 제 삶에 별 목적이랄 것이 없는 것들에게, 앞만 보고 달려온 이들에게 마약상과 다를 바 없는 수법으로 동기를 심어주는 것. 드디어 내가 무언가 해내고 있다는 믿음에 중독시키는 것. 슬픈 일이었다. 




 줄에 걸린 잡벌레들에게는. 




 - 




 일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학교 기숙사는 못 빌리겠는데.



 저 시위대는,



 휴학계 내기 전부터 쭉 있었어, 규모는 좀 커진 모양이지만.



 무슨 목적일까요.



 생각 없이 주는 지식만 받아먹다가, 생에 처음으로 주권이 생겼으니까. 그런 중에 겪는 과도기야. 흔히 지가 뭐라도 된 줄 아는 대학생들이 겪는. 



 데모를 하는 학교는 여기 뿐인걸요.



 살 궁리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니까. 학교 간판을 바보들이 떠받들어 주니, 지 잘난 맛에 하는. 제대로 되고 있는 수업은 하나도 없지만, 이래뵈도 최고의 학교 중 하나로 꼽히니까. 선민의식 비슷한 우월감에 취해있지.



 그리고 그 먹고사는 것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구조의 붕괴와 역전에 있다고 믿는 헛똑똑이의 혼잣말에 마음을 빼앗겨버린 거지. 이성은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고 말하면 마치 그렇게 된 기분이 들거든. 비노동은 고귀하다는 착각.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지만 말이지. 




 이상하네요. 바쁜 세상인데도. 




 청년문화에 젖어있는 동안은, 누구나 자신이 시간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착각하니까. 나도 그랬고. 





 주인님께서 데모를 하셨었나요 ?




 데모 빼고 다 했었지.  



 -



 오랜만이네, 복학하려고 ? 




 오랜만에 뵙네요. 지금은 입주하기 어려울까요 ?




 음,




 옆에 아가씨도 같이 쓰시나 ?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럼, 빈 방을 줄 수밖에 없지. 곧 수업이 재개된다는 소문이 있어서 방이 다시 차고 있거든. 한밤중에 너무 시끄럽게만 하지 말라고. 뭐. 나머지는 다 알지 ? 이 시기에 동반입실은 원칙상으로는 안 되는건데, 널 아니까 해주는 거야. 


 비용은 2인실분으로 나가게 되지만, 사생장 자리가 비었는데 그거 해주면 1인분만 내도 되고. 너라면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하는 제안인데. 




 제안해주신 마음은 감사하지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알겠어. 친구들은 잘 지내고 ? 




 ㅡ나름대로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성 출입 금지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얼굴에 대놓고 사연이 적혀있어서 그래.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떼어놓을 수 없는 모양으로 보이니까. 오죽하면 이런 기숙사로 오고. 시간이 지나면 이런 눈치만 빨라지는거야, 나이 먹어봐라. 서럽다. 




 .. 한 번 먹어보고 나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




 201호. 공교롭게도. 다시.




 - 




 주인님은 확실히 동요하고 있었다. 낡은 방, 복도. 목적을 잃어버린 창살과 개폐를 잃어버린 유리. 이렇다할 특별한 것은 없었음에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지만. 대학시절의 그가 보이고 있었다. 나를 처음 집어갈 때의, 깡마르고 텅빈 공허한 사람이 아닌. 한 명의 촉망받는 소년이 보였다. 



 


 모두가 그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몇 년 전의 그는 아마 누가 보아도 건실하고 빛나는 대학 청년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상상에 대해서 함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념무상으로 부유하던 대학시절과, 아픈 결론들을 지어버린 그가 섞여 심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바라보는 나조차 그를 헷갈려 하고 있었다. 그가 정녕 나를 이불보 밑에 껴안아주던 이가 맞던지.


 마일스 데이비스의 소년이 맞던지. 



 이 골목에 발을 들인 그는 항상 아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건 마약의 금단현상과도 같은 표정이었다. 그의 친구가 절어있던 주삿바늘의 향기처럼. 사람이라는 건 온갖가지 방법으로 마약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부잣집의 가정부는 온갖가지 방법의 뒷수습을 하는 법을 알고 있다. 



 다시금 손 대기는 너무나 두려운 표정이었다. 쾌락과 삶을 뒤바꿀 수 없다는 듯이 양지의 삶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이와 능력에 걸맞는 학생다운 삶이 마치 비윤리적인 일이기라도 한 것 처럼.



 -



 아버지께서 해양물류를 하시는 친구가 있다. / 내가 그를 친구라고 생각한 것은 오직 그를 필요로 하기에 ?  / 해양청에 인맥도 있고. /  그를 마음 속 깊이 친구라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면서 / 남은 돈을 모아 어떻게든 해외로 밀입국 한 다음, 그곳에서 다시 일하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어디에나 노동자는 필요한 법이니까, 다시. 다시 적응하면 된다. 다시. / 정말로, 역겨운 발상이다 /


주인님.


 물론 그러려면 필요한 것은 두 손으로 세기 모자랄 정도로 넘쳐나겠지./ 나는 이렇게까지 그녀를 위해서, 떳떳한 삶을 포기해야만 하는가. 잘못이라면 불쌍한 바이오로이드를 길에서 주웠을 뿐인데 


 원하는 국가를 선택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상황상 선택권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영어권 국가가 아니라면 적응하기 꽤 어려울 것 같고. / 누군가에게 빚 지어가며 손 벌려가며까지 살아가야 하는가, 그게 싫어서 뛰쳐나왔으면서


주인님..?


 그렇지만 기다릴 수 있는 여유는 없어, 어찌되던 떠나야 한다. / 나는 그정도로 강인한가 ? 고작 대가리 박살난 불량 바이오로이드 하나 때문에 범죄자가 될 수 있는가 ? /


  방랑이 될 지 새로운 정착이 될 지 알 수 없다. / 나는 정녕 그녀를 원하고 있는가 ? 어쩌면 사명감에 매달려, 멋대로 그녀를 불쌍히 여겨 구역질나는 헌신을 하고 있는가 ? /



 지금 넌 헌신을 하고 있느냔 말이다. 네가 네 삶 내내 몸에 배어버려, 지긋지긋한 향기를 몰고 거리를 돌아다니던 그때 가장 혐오하던 그녀의 전철을 밟고 있냐고. 네 스스로 떳떳하게 내일을 살 수 있을까 ? 그녀에게 멋대로 대여받은 삶을 또 누군가에게 대여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이 역겨운새끼야. . . 



정신차려너는이렇게감정에휩쓸려서멋대로누군가에게짐을지워버리는무책임한놈이아니잖아내말이맞어틀려.맞어틀리냐고.이런희생이쌍방의관계에서나올수있는형태냐고.


니가생각해봐도이상하지? 

 이상하잖아. 

   이상하잖ㅇ.

      이상핮ㄶㅇ. 



 주인님 ! 


 어, 어. 바닐라, 미안.


 .. 



 표정이 괴로워보여서요. 



 혼자 살면서 생긴 나쁜 버릇이야. 



 표정을 못 숨기는 거요 ? 



 단순히 찡그리는 것, 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 



 .. 



  커피 마실래 ? 



 제가 내올게요. 



 아냐, 여긴 아직 익숙치 않을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네, 그럼 사양않고. 주인님께서 타 주시는 거니까요. 



 ...



 바닐라가 앉은 자리에 과거, 그녀의 잔상이 겹쳐보였다. 대학 시절, 매일 매순간 육체만을 탐하며 보낸 그 시간들.


 바닥까지 떨어져버린 선택권들에게 절규하듯 토해내던 기염과 그 모든 걸 받아내던 그녀가 바닐라 위로 겹쳐 미소짓고 있었다. 



 나는 어째서 잊고 있었는지, 그녀의 기억 속 무기력한 내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으면서. 다시 만나는 그날에 떳떳하게 인사하기로 했으면서.


 날개가 채 다 자라지 못 한 채로 절벽을 마주한 새처럼, 나는 그 준비되지 않은 만남의 가능성에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내 과거의 치부. 씻을 수 없는 기억. 



 너무나 미숙한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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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구두와 키스자국. 손에 땀을 쥐고 차마 놓기가 어려웠다. 



 항상 서글픈 미소를 짓는 사람과 방. 뿌연 흙바람이 날리기 전에 빨리 창문을 닫아. 




 네 의지가 되고 싶어. 목적이 되고 싶어. 얼핏 너는 방실방실 웃고 있었고, 



 또 동시에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았어. 조금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대학을 떠났다. 나를 떠났다. 

 나 또한 나를 떠나갔다. 그이의 발목을 붙잡고. 


 그가 다시 한 번만 나를 돌아봐주기를 기원하면서. 

 묵묵하게 나의 조바심 섞인 이별선고를 재고해주기를 기원하면서. 


 그 아픈 미소를 이끌고, 돌아와 줘. 







 기억해주시는 독자분이 한 분이라도 계신다면, 오랜만입니다.


 보통 존댓말은 금기지만 만일 기존 독자분이 있었다면 아직 기억에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요. 



 눈코뜰새 없이 바쁜 몇 주를 보내면서 3000자쯤에 정체되어 있던 7화를 드디어 마무리지었네요.


 3000천자까지의 내용도 가물가물할 지경에 이르러서 다시 재개하려면 1화부터 현재까지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만 하는 판이었습니다.


 글의 주인으로서 부끄럽네요. 다만 시험기간에 읽는 소설은 아주 달달합니다.


 자랑할 정도는 아니지만 제 기억보다는 볼만한 글이었습니다. 역시 글은 쓸 때 가장 구려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본 글의 리메이크 전에는 없었던, 오르카 이전 파트들이 꽤 방대하게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런 텐션이어서야 몇 년이 걸려도 다 못 쓸 것 같네요. 조금은 분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학파트부터 잠깐 맛빼기로 들렀다 간 부분들까지.


 설계에 고민을 많이 한 결과 그에 상응하는 알찬 글을 써야한다는 허들이 매우 높게 느껴집니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한 줄씩 몇 번이고 고쳐쓰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저 취미에 불과한 것에 쏟기에는 시간의 책정가가 너무 높은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음편부터는 본격적인 전여친 파트입니다. 본 글의 주인공처럼 매 순간 사상과 생각을 저울질당하는 삶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여러분은 순탄하고 평안한 하루 보내십쇼.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