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앞서 주의사항


1. 설정이? 좀 다릅니다? LRL의 오른쪽 눈은 창작이라는 의미에서 고의적으로 대칭시켰습니다?

2. 글을 뭐 이렇게 썼냐고? 무조건 네 말이 다 맞다!!!!!!!!!!!!!!!!!!!!!!!!!!!!!!!!!!!!!!!!!


위 사항을 인지하고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신다면 저는 좋고,

아니면 미안!!!!!!!!!!!!!!!!!!!!!!!!!!!!!!!!!!!!!!!!!!!!


───────────────────────────────────────────

 

 ◆

 

 

 철충이 할퀴고 간 잔해 위.

 등대의 등뼈가 벼려낸 달빛이,

 상처에 바르는 연고처럼 내려앉는다.

 

 그늘 속, 가려움을 참던 아이가 기어 나왔다.

 

 마른기침.

 멈추자, 잔해 위에 붉은 점이 하나, 둘.

 

 사실 그 점은 과거의 것이다. 

 지금의 기침은 현재에서 벗겨진, 무의미한 것.

 

 점 위로 쌀알들이 기어간다. 

 

 가까이에 쌀자루가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정확히는 쌀자루가 쏟아졌음을 예상해볼 수 있게,

 다르게는 쌀자루가 사람이었음을 기억해낼 수 있게.

 

 달빛이 스민 쌀자루가 찢어진 채로 울고 있다.

 눈가에 어린 눈물이 생명력 넘치게 꿈틀거린다. 

 

 아이의 손이 저절로 오른눈을 긁었다.

 그러자 손에 꾸덕한 눈물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나는……”

 

 그런데도,

 

 쉴 수 있도록 눕혀둔 소방용 도끼를 일으키고,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까지, 임무를 시작했다.

 

 

 ◆

 

 

“LRL?”

“네, 사장님.”

 

 사령관이 내민 입술에 펜 끝을 괴었다.

 금일 부관인 뽀끄루도 난처한 얼굴이었다.

 

“예상 못 한 요청인데.”

 

 사령관의 시선이 화면의 지도로 향했다.

 현재 오르카 호가 위치한 좌표에는 푸른 점,

 스카이나이츠의 정찰 범위는 펴 바른 주황색.

 

 주황색 내부에 속한 매우 작은 섬 중 하나가,

 그리폰이 LRL을 회수해 온 장소였다.

 

 향수,

 재확인,

 

 아니면.

 

“……사장님, 아르망 씨를 불러올까요?”

 

 LRL의 단독 면담 요청.

 뽀끄루의 의도가 명백하다.

 

 사령관은 고개를 젓고,

 다른 주제를 되물었다.

 

“백 년은 어떤 시간일까?”

 

 닿기만 해도 울 듯한 표정으로,

 폐쇄된, 망령된 기억의 부활처럼,

 뽀끄루가 깊은 어조로 답했다.

 

“체험이 결정하죠.”

 

 멸망 전 개체로서의 대답.

 사령관은 눈을 감았다.

 

“소완도 아니고, 좋아.”

 

 기지개를 피는 사령관,

 숙인 얼굴로 퇴실하는 뽀끄루.

 

 그리고 침묵,

 은 앉을 자리를 찾지도 못했다.

 

“나의 권속이여.”

 

 부관을 교대하듯 LRL이 난입했다.

 

“문 앞에 있었니?”

 

 짧은 호흡, 사령관의 입은 멈춘 채.

 술렁거리는 위화감, 기묘한 긴장감.

 

 정체가 불분명한 공백.

 

 LRL이 발하는 감정의 실체를,

 사령관의 피부가 본능에 고발한다. 

 

 위장.

 가짜.

 

 사령관의 입이 열린 것은,

 LRL이 허락했기 때문이다.

 

“……감이 좋구나.”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하대.

 처음인 것처럼, 관찰한 사령관은,

 

“누구냐.”

 

 안대를 끼지 않은 채로,

 초점 하나를 잃은 눈에 물었다.

 

 한 호흡 정도의 틈.

 LRL이 대신 답했다.

 

“공상.”

“누구의?”

“등대지기의.”

 

 두려움이나 불안은 미지에서 오지만, 

 그만큼 뚜렷한 실체에서 오기도 한다. 

 

 사령관이라는 위치, 그 의미의 무게가,

 굳은 입을 채근해 뻣뻣한 말을 짜낸다. 

 

“일단 앉지.”

 

 LRL의 몸에 깃든 것이 끄덕였다.

 

“그러지. 하지만, 다음은 없다.”

 

 사령관은 방금의 감상을 수정했다.

 

 깃든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창조물이 창조주를 넘을 수는 없으니.

 

 그렇기에,

 깃들었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지친 방랑자처럼 앉았다.

 사령관은 안전한 표현을 꺼냈다.

 

“저는……”

“사령관이지. 좋군. 존중하지.”

 

 생략된 표현들.

 사령관은 긴장 속에서 조심스럽게,

 가려진 단어들을 낚아채 조립한다. 

 

“통성명이 무의미하니, 편한 방식으로 부르거라.”

 

 직감이 재조립한 문장을,

 사령관은 미음처럼 곱씹어보고,

 

 ‘대화가 파탄 나면 나를 죽이겠다는 뜻이군.’

 

 해보라는 듯이 물었다.

 

“좋습니다. 무슨 용건입니까?”

 

 그는 의아한 말을 꺼냈다.

 

“잠시. 행동이 앞섰더니, 정리가 늦군.”

 

 LRL의 손에 턱을 괸 그의 모습을,

 사령관은 다시금 천천히 관찰했다.

 

 평소에는 안대를 끼고 있었다.

 

 작전 수행 시에는 안전을 기해 벗었지만,

 그렇다고 작전 수행 전용도 아니었던 눈.

 

 타지에서 회수하거나 만난 LRL과,

 오르카 호에 있던 LRL의 차이였다. 

 

 나는 그 안대를 만져본 적이 없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을까?

 

 LRL의 적극적 호의 속에,

 안대 이야기는 일절 없었다.

 

 애매한 터부.

 

 완전한 금기, 적극적 금지는 아니며,

 뚜렷한 기피, 음성적 담화도 아니다.

 

“희미해지고 있어서,”

 

 그건 마치.

 

“사라지기 전에 봐야겠어.”

 

 지금도 어딘가를 부유하는 시선으로,

 초점을 홀로 사선에 둔 저 눈처럼.

 

“……등대입니까?”

“자네는, 꽤 좋군.”

“외출에는 동행이 붙습니다.”

“무거우니 혹은 떼고 오게.”

“그건 불가능합니다.”

“인간에게 불가능이 있나?”

“인간이라 불가능합니다.”

“순수한 인간도 아니잖나?”

“전부 알고 계시잖습니까?”

“중요한가?”

“그만두지?”

 

 그의 눈 끝이 날카로워졌다.

 

“이건, 안 좋군.”

 

 사령관도 눈매를 얇게 갈았다.

 

“당신의 평가는 관심 없다.”

 

 그리고 그림을 그려보았다.

 문밖의 블랙 리리스가 난입하고,

 이어지는 비참한 포박과 심문.

 

 보기 싫은 풍경이므로,

 의도적으로 큰 숨을 내쉰다. 

 

“주는 존중만큼은 돌려주십시오.”

 

 그는 눈을 감았다.

 

 사령관이 자세히 보니,

 손아귀에 안대가 있었다.

 

 안대의 목이 졸렸다.

 

“하기야 의미가 없군.”

“무슨 뜻입니까?”

“조문을 허락하지.”

 

 LRL의 몸이 일어섰다.

 

“등대로 안내하게.”

 

 그렇게 했다.

 

 

 미숙한 요참형을 집행당한 등대.

 햇빛의 위치가 실로 절묘하여,

 폐허임에도 그림자 없이 화창하다.

 

 의아해하는 블랙 리리스는 배후,

 LRL 모습의 늙은 손님은 전방.

 

 사령관에게 있어,

 백 년처럼 느껴지는 폐허 관광.

 

 그러다 정상.

 다시 말해, 더는 올라갈 수 없는 위치.

 

 그 가운데에서 LRL의 몸이 묵례했다. 

 

 사령관이 블랙 리리스를 돌아보자,

 양해를 구하기도 전에 그녀가 끄덕였다. 

 

 경호원은 사담私談과 관계짓지 않는다.

 블랙 리리스는 거리를 벌려 자리 잡았다.

 

 LRL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령관은,

 너무 억눌려 빈사가 된 혼잣말을 들었다.

 

“자유군.”

 

 자유.

 

 ‘무엇에서?’

 

 사령관보다 그의 말이 앞섰다.

 

“보이나?”

 

 공상이 가리킨 돌무덤.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쉽게 짐작해서는 안 되는,

 

 아무 흔적도 없는 돌무덤.

 

 그러므로 그 돌무덤 앞에 선,

 그 존재는 돌무덤의 유산이었다.

 

“여기에 시체가 있었다.”

 

 사령관은 잠깐의 경직 후,

 상황을 가늠할 수 있었다.

 

“묻겠다.”

 

 그의 손이 가슴에 얹어졌다.

 

“두 번째 나를 만들 셈인가?”

 

 고개를 저은 사령관은,

 확신이 담겨있기를 바라듯,

 명확히, 힘 있게 말했다.

 

“제가 마지막입니다.”

 

 그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를 하나 물려주마.”

 

 물려준다. 

 

 특이한 표현이지만,

 사령관은 그럴듯하게 느꼈다.

 

“전형적인 노인이 있었다.”

 

 서두나 목차도 없이,

 물림이 시작됐다.

 

“거칠고 서투른 남자였지.”

 

 늙은 몸은 보조가 필요했다.

 그렇게 LRL이 등대에 도착했고,

 노인을 도와 등대의 불을 밝혔다.

 

“그래서 존중이나 표현이 하찮았어.”

 

 그러나 사랑은 진짜였다.

 LRL도 그 마음을 느낄 정도로.

 

“올라오는 길에 서고를 봤지?”

 

 섬의 등대에 즐거움은 적다.

 그리고 노인은 LRL을 위해,

 서고의 내용을 바꾸어갔다.

 

“불쌍한 동경이지.”

 

 여자아이가 좋아할 내용은,

 거친 남자에게 퍽 민망했다.

 

 그래도 LRL은 기뻐했다.

 

 그래서 그 기쁨의 이유를,

 노인은 잘 모른 채로,

 그저 그 미소를 보고 싶어서.

 

 오래전 자신이 꿈꾸던,

 모험으로 서고를 채워갔다.

 

“그리고 폭격이 떨어졌지.”

 

 책 바깥 모험의 진실.

 

“아이는 잔해에 깔렸다.”

 

 대체로 진실은 끔찍하다.

 

“와중에 한쪽 눈을 잃었고,”

 

 그런 주제에,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는,”

 

 계획이 없고 충동적이며,

 

“노인의 죽음을 봐야 했다.”

 

 뻔뻔하고 오만하며 불손하다.

 

“짧지만, 무한히 늘어나는 시간 속에서.”

 

 ‘백 년은 어떤 시간일까?’

 

 움직이지 못하는 몸.

 도와줄 이 하나 없는,

 폐허로 완성된 고독.

 

 극한 속 고독은 개인에게,

 정신의 유통기한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썩기’ 전에.

 

“내가 생겨났다.”

 

 사령관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기억을 공유합니까?”

 

 그는 쓴웃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중인격의 장점이라 할 수 있군.”

 

 공유하는 사례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애초에,

 ‘기억하지 않기 위해’서다.

 

“대신 재미있는 설정이 붙었지.”

“설정이라고요?”

“아이의 공상이어도 뿌리는 필요해.”

 

 사령관의 입이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담으려다 멈추었다.

 

 그것은,

 부르기 좋은 이름은 아니다.

 

 사선으로 내던져진 사령관의 시선을,

 그는 주워 담아 도로 돌려주었다.

 

“솔직히, 나올 일이 없어서 좋았다만.”

“기억은 공유하지 않는다고 했잖습니까?”

“내가 아이에게 나눠주지 않을 뿐이야.”

 

 그러고는,

 그는 사령관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의미를 해석할 수 없어서,

 사령관은 그대로 그 시선을 감내했다.

 

 돌연, 그가 말했다.

 

“나는 사라지고 있어.”

“반가운 이야기군요.”

“네가 죽이고 있지.”

“그럼 안심하십시오.”

“너무 빠른 대답이군.”

“느리면 달라집니까?”

 

 그가 입매를 비틀었다.

 

“그렇군.”

 

 LRL의 보폭으로 걸어가,

 돌무덤에 손을 얹은 그는,

 어딘가 망령되어 보였다.

 

“물려줬다.”

 

 망령인지도 모른다. 

 

“받았습니다.”

 

 깃든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야.”

 

 그는 노인이고,

 아이를 아끼며,

 표현이 거칠고 서투니까.

 

“새 책이 올 거다.”

 

 아이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듯이,

 간절한 얼굴로 그는 눈을 감았다.

 

 

 사령관은 LRL을 품에 안은 채로,

 등대를 내려오다 서고 앞에 멈췄다.

 

“주인님?”

 

 책장은 보관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책은 한 권도 빠짐없이 꽂혀있었다.

 

 사령관이 눈여겨본 것은,

 쌓인 먼지의 정도였다.

 

 아주 미세하지만,

 그 오랜 시간의 축적을 구분하듯,

 먼지의 양은 각자가 달랐다.

 

 무엇보다,

 아래쪽 책장의 먼지가 더 적―

 

 돌연,

 어떤 소리를 들었다.

 

“주인님, 뛰세요!”

 

 블랙 리리스의 판단은 정확하다.

 LRL을 품에 안은 채이므로,

 달리는 일 외엔 할 수 없다. 

 

 계단을 빠르게 주파하고,

 등대 바깥으로 뛰어나오자,

 

“사령관, 그 녀석이야!”

 

 내려온 그리폰의 눈이 커졌다.

 자세한 설명을 할 시간이 없었다.

 

“미안하지만 시간을 벌어줘.”

 

 이전,

 낙후된 군사 기지를 발견했다.

 

 내용물은 엉망이었지만,

 활주로를 긁고 간 거친 자국은,

 곧 만날 적의 형태를 암시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은,

 사령관의 예상 범위였다.

 

 급조된 듯한 구두 지휘가,

 도저히 외울 수 없는 양으로,

 사령관의 입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그 내용의 중후반을,

 그리폰은 잠시 놓치고 말았다.

 

 섬광,

 같은 역광,

 

 폭발,

 같은 격발.

 

 교전과 붕괴는 동시였다.

 

 그리폰의 초 근거리 이륙과,

 배후 등대의 힘겨운 붕괴가,

 

 LRL의 손을 움켜쥐게 했다.

 

 사령관 위로 쏟아지던,

 등대의 파편들이 흩어지고,

 이를 신호탄으로 삼은 듯,

 대량의 드론들이 살포됐다. 

 

“그년도 아니고 해충 구제라……”

 

 환경 분석과 짧은 푸념.

 블랙 리리스가 총신을 휘둘렀다.

 

 철충이 감염된 드론들은,

 대부분 몸체가 비대칭형이다. 

 

 비행의 형태는 너클볼이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추락이다.

 

 그러나 사격만은 가능해서,

 제압의 필요성은 여전했다.

 

“……하치코 마음을 이해하겠군요.”

 

 대량의 물량이,

 개인의 포화에 사라진다. 

 

 큼직한 파편을 지워나가는,

 그리폰의 곡예 같은 엄호.

 손이 보이지 않는 속사와,

 블랙 리리스의 다급한 재촉.

 섬뜩하게 비행하는 일식日蝕과,

 사방으로 비산飛散하는 드론들.

 

 그 사이에서 어쩌면,

 등대의 붕괴를 지켜본,

 아이의 손이 떨고 있었다.

 

 사령관이 오르카 호에 올랐다.

 

 LRL을 포츈과 콘스탄챠에게 맡기고,

 

 명령권자를 찾아 뛰어오는 뽀끄루와,

 

 현황 보고 속에서 추가 지시를 내리며,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까지, 임무를 시작했다.

 

 

 ◆

 

 

 중천?

 백야?

 

 변화는 없고,

 구분도 없다.

 

 아지랑이처럼 구불거리는 시야.

 아이가 자신의 도끼를 눕힌다. 

 

 거의 다 접혀가는 그림자 안,

 몸을 구긴 아이는 중얼거렸다. 

 

 읽어서 닳고 헤진,

 먼지가 된 단어 품에서,

 

 꿀 수 있는 꿈을 꾼다. 

 

 차디찬 달빛을 내뿜는 용이,

 보화가 모인 탑 위에 앉아있다.

 

 보화 속 으뜸가는 것은 당연히,

 아름다운 미모의 일국의 왕녀지만,

 

 그 안에서 아이는,

 다른 배역을 받았다.

 

 전설의 검과 갑옷으로 무장하고,

 타오르는 용기와 사랑을 말하는,

 

 그런 것들은,

 여기에 없다.

 

 아이의 눈이 떠졌다.

 

 비가 오고 있었다.

 

“생존 개체 발견.”

 

 빗물을 뺨으로 받아내며,

 아이는 현실을 인식한다. 

 

 타인의 목소리가,

 너무나 생경해서,

 아이는 몸을 뒤로 밀었다.

 

 그런 아이 앞에,

 금발의 소녀가 내려섰다.

 

“말할 수……이런.”

 

 아이의 오른눈을 본 소녀는,

 통신 상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소녀는 이것저것 묻는 대신,

 아이의 경계가 풀릴 때까지,

 조심스럽게 주변을 관찰했다.

 

 그런,

 

 말이 없는 소녀에게서,

 아이는 용사를 느꼈다.

 

 비로소 아이는 깨달았다.

 

 배역을 빼앗긴 게 아니다.

 자리를 잃은 것도 아니다.

 

 단지 작품이 달랐을 뿐이다.

 

 그 지각이 괴리를 일으켰다.

 

“응?”

 

 소녀의 눈이 커지는 반응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아이는 실제로 깨져버린 듯한 착각이 드는 머리를 부수고픈 마음으로 움켜쥐었다. 백 년의 기다림을 무색하게 만드는 지리멸렬한 분열이 벼락처럼 시작됐고, 아이는 자신에게 세상이라는 작품이 던져준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기억할당구역의 구석 어딘가로 몰아넣은 뒤 새로운 기억의 관리자를 만들어내 버렸고, 갑작스럽게 생겨난 관리자는 자신의 상관이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랐기에 백 년의 시간을 오롯이 자신만의 유산으로 받아들이며 분노했고, 안락을 찾는 마음과 노인에 대한 부채감과 그런 감정들이 출산한 자기혐오와 피로와 비명 속에서 아이는 드디어 찾은 일말의 해방감에 환희하는 척하며 피를 토하듯 울었고, 느려진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에 목을 졸려가며 아이는 썩어들어가는 오른눈을 자기파괴에의 충동으로 후벼 파다 제지당했다.

 

 아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붙잡은 아이의 손목을 내려놓는 대신,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한 강한 어조로 물었다.

 

“너는 누구지?”

 

 아이의 입이 벌어졌다.

 

“나,”

 

 이제는 없는 기억들이,

 있었던 흔적을 통해서,

 아이의 자의식을 채근한다. 

 

“…나…”

 

 기억이 모인 탑은 무너졌다.

 

 공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부를 지키던 용은 죽었다.

 

“……나는,”

 

 그러니 작품에서 자신의 배역은,

 

 공주와 함께 돌아갈 용사가 아닌,

 

 그저 용을 죽이기만 하는 존재이리라.

 

“드래곤 슬레이어다.”


─────────────────────────────────────────── 



이렇게 오늘도 반면교사가 하나씩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