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바깥도 안과 다를 게 없이 안개가 자욱했다. 전면부의 빛마저 수증기와 함께 응결된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전조등과 안개등은 영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의지할 것은 애니의 바이크 후면부가 발하는 빛 하나다. 수동운전이 익숙하지 못해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으나 애니를 놓치면 안개가 걷히기 전까지 꼼짝없이 고립되고 만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그럴 상황이 높은 확률로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집중력이 솟았다. 물론, 그런 상황이 온다면 애니가 뒤돌아오겠지. 그러나 초면부터 내 멱살을 잡아올렸던 애니가 배려심을 발휘할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최소 걸쭉한 욕 한사발은 먹을 것이다.


수동운전은 할 줄 모른다고 말할 걸. 운전하는 내내 발바닥으로 클러치의 감각을 재확인하고, 엑셀과 브레이크가 확실히 존재하고 있는지 번갈아 발을 가져다댔다.  


앞서가는 애니를 따라 국도처럼 보이는 곳, 갈라진 균열로 가득한 도로, 비포장 길을 지나 세 시간 쯤 달리자 교량이 나타났다. 


진입부를 지나고나서 룸미러를 올려다봤다. 룸미러에는 여전히 잠들어있는 티타니아와 고개를 창밖에 고정 중인 레아가 있었다.


"원효대교도 오랜만이네." 라고 출발하고부터 침묵하던 오드리 씨가 말했다. "할 거 없을 땐 산책하러 나오곤 했는데."


조금만 클러치를 늦게 조작했더라면 시동이 꺼졌을 것이다. 옆얼굴이 따가운 걸 무릅쓰고 속도에 주의하며 조수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 한국이에요?"


"그렇게 불리던 땅이었지."


그렇다면 이 교량도 원효대교라 불리던 교량이라고 해야되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말꼬리를 붙들어볼까 생각했다. 오드리 씨에겐 이제껏 당한 게 많았기도 했고, 슬슬 티타니아가 일어날 조짐이 보였어서.


교량의 중간 쯤 왔을 때 앞서가던 애니에게서 변화가 보였다. 오른 팔로 교량 너머를 가리키고 있다. 그에 따라 창밖을 바라보던 오드리 씨가 헙- 하고 숨을 삼키더니, 차창을 내리고 고개를 내밀었다.


"야! 저기 봐! 고래야!"


꺅꺅 거리는 것도 모자라 애처럼 눈을 빛낸다… 라고 여길 수가 없었다. 나도 똑같이 입이 벌어졌으니까. 고래의 브리칭을 봤을 때는 탄성을 흘렸다. 거리가 상당함에도 저만한 질량에 짓눌려 터져오른 수면의 크기가 작지 않았고 소리도 굴러가는 차 바퀴와 구동음에 뭉개지지 않을만큼 선명했다. 


저만한 크기의 고래는 민물에서 서식하지 않을텐데. 그보다 한강에 고래라니. 인간이 사라진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라면 볼 법한 광경이라며 태연하게 받아들이려 해도 빠져들듯이 시선을 고정하고 만다. 빌딩을 휘감은 덩굴에게서도, 도시의 사거리가 제 영역인 것 마냥 돌아다니던 들짐승들에게서도 인류의 멸망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고래에게서 충격에 준하는 감상을 품는 것은, 역시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스케일에서도 차이가 있다. 고래는 서너 마리가 아니라 최소 서른 마리는 되었고, 폭 1km의 강은 좁다고 여길 그만한 숫자의 덩치들이 여기저기서 뛰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긴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고래들은 편안해 보인다. 신이 난 것 같기도 하다. 이 세계에서도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역시 인간은 사라지는 편이 좋은걸까. 그런 소리들을 하던 사람들 중엔 오직 자연만을 생각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 한 종만 사라진다면 지구상 모든 생명체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자연이 다시 재생할 것이라고.


비록 내가 살던 세계는 아니나 그런 이들의 염원이 이루어진 한 장면을 보고 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도 한강에 저런 크기의 고래가 수십 마리나 있는 건 좀 과한게 아닐까. 저 쯤 되면 자연의 재생이 아니라 팽창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전방을 주시했다. 편안이니 재생이니 행복이니 하는 단어는 나나 동승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코앞까지 다가온 수축의 계절에 맞춰 우리의 기분도 수축해있고, 기록적인 한파가 불고있는 지금의 가을보다도 기온은 내려갈 것이다.


더 이상의 팽창은 없다. 상승도 없다. 오직 수축과 하강만이 있을 뿐이다.







* * *






여기가 한국이고 향하는 곳이 남쪽이라면 목적지는 호남이나 영남 둘 중 한 곳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속도로를 거치는게 빠를텐데 애니는 그러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의도적으로 고속도로는 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유가 궁금해 쉬어가기로 한 곳에서 정차하고 짐칸에서 내린 확성기에게 물었다. 확성기가 대답하길, 고속도로 자체는 존재하나 이용 할 수 없는 상태란다. 아포칼립스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고속도로는 포화되기 마련이고, 좋든 싫든 철저히 인간만 죽이던 철충들에게 고속도로는 차려진 밥상과 같았다는 것이다.


백골이 된 주인을 품은 자동차들이, 열릴 리 없는 출구를 기다리는 풍경이 그려지자 확성기가 동체를 으쓱했다.

그것이 '어쩔 수 없었다.' 라는 의미인지, '나는 거기까진 안했다.' 라는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쉬어가기로 한 곳은 산을 끼고 드넓은 부지를 가진 놀이동산이었다. 도중에 서울을 지나고, 운전했던 방향을 생각해본다면 경기도의 모처일 것이다. 경기도에 있는 놀이동산 중 주변에 산이 있고 이렇게나 넓은 곳이라면 내가 사는 세계에서도 비슷한 곳이 있었다. 설마, 하고 나는 말을 아꼈다. 이쪽 세계와 내가 살던 세계, 두 세계 모두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지만 그랬다간 나라는 존재의 농도가 옅어질지도 모른다는, 설명하기 어려운 우려가 저항감을 피워냈다.


매표소를 낀 개찰구 형식의 출입구 앞에 자리를 잡았다. 확성기의 동체에 매달려있던 짐들을 내리고 물품을 확인한 뒤에 각각 필요한 만큼만 꺼내고 다시 정리했다. 오드리 씨가 챙겨온 겨울 옷, 간이 스토브와 4인용 크기의 작은 텐트, 간편식 위주로 챙겨온 식사와 세면도구 등등… 복수라는 단어를 떼어놓고 본다면 꼭 오랜 기간 떠나는 여행길에 나선 것 같은 구성이다.


애니의 지시에 따라 짐칸 측면에 텐트를 설치하고 스토브를 달궈 줄 뗄감을 찾아다녔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 곳에서 묵고 갈 모양이다. 아직 해는 제대로 떠있지만 한 두시간 뒤면 산 너머로 사라질 위치에 있다. 밤은 위험하여 차를 몰기엔 적절치 못하다는 애니의 말을 생각해보면 지금 해가 있는 위치는 애매하다. 한 두시간 더 달릴 바에야 쉬어가는 쪽이 좋을 것이다.


그런대로 하룻 밤 분의 뗄감을 구해서 돌아오자 마침 하늘의 명도가 낮아져 바로 뗄감을 필요로 하는 때가 되었다. 물기가 적은 적당한 크기의 뗄감을 골라 스토브에 넣고 그러모은 종이쪼가리와 나뭇잎을 섞어 라이터를 가져다댔다. 바람이 거세 불이 붙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듯 했지만 생각과 달리 적당한 양의 바람이었는지 금방 캠핑장에 온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스토브 위에 뚜껑을 덮고 반합을 올려놨다. 5분 정도 지나니 물이 부글부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스테인리스 잔에 뜨거운 물을 한 잔 따르고 주변을 둘러봤다. 애니는 오드리 씨와 함께 놀이동산의 개찰구 쪽에서 서성거리며 담배를 피우는 중이고 레아는 짐칸에 실은 짐에서 담요를 챙긴 참이었다. 티타니아에게 덮어줄 생각이겠지.

텐트는 불침번용이고 자동차가 취침에 이용된다. 히터가 빵빵하게 나오는데 굳이 텐트 안에서 밤바람과 사투를 벌일 필요는 없으니까.


오드리 씨, 애니, 레아, 뒷좌석에서 여전히 잠들어있는 티타니아. 


확성기가 보이질 않는다.


"레아. 확성기 어디갔어?"


티타니아에게 담요를 덮어준 레아는 뒷좌석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대답했다.


"잠깐 주변 좀 둘러보시겠다고 놀이동산 안으로 들어가셨어요."         


"둘러보긴. 그냥 구경 나간거겠지."


"그렇겠죠."


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레아였지만, 평소라면 한숨이 동반되었을 터였다.


"……우리도 잠깐 둘러보러 갈까?"


"네?"


"달리 할 것도 없고 여긴 딱히 위험해보이지 않으니까. 아직 그렇게 어둡지도 않잖아."


우물쭈물, 반응이 시원치 않다. 티타니아가 걸리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먼저 레아에게 뭔가 하자고 권유한 것은 처음이다. 이 부분이 신경쓰이는 것일수도 있겠지. 


차량의 뒷좌석을 한 번 바라보고, 레아는 걸쳐입은 스트링 야상의 벨트를 조였다.


"가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개찰구로 향했다. 그 근처에 있던 오드리 씨와 애니가 따가운 건지 미지근한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선을 보내오다가 서로 불을 주고 받았다. 요 몇 시간 동안 몸에 주입하지 못한 니코틴을 그 자리에서 전부 채워넣을 생각인 듯 하다.


개찰구를 빠져나오고 가장 먼저 시야에 담긴 것은 대장격으로 보이는 거대한 잭 오 랜턴과 내 머리만한 크기의 부하 잭 오 랜턴들로 이루어진 군집, 붉은색으로 Trick or Treat이라 쓰여진 색바랜 간판과 현수막들이었다. 허공에 매달려 있어야할 만국기들은 전부 어느 한 쪽이 끊어져 땅바닥에서 몸부림치듯이 펄럭거리고 있고 먼 곳에 보이는 어트랙션들은 완전히 무너지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은 상태여서 위태로웠다. 롤러코스터의 차량은 뒤집힌 선로 한복판에 거꾸로 매달려있다. 아이들을 태우고 끝없이 회전했을 목마들은 눈이 없었다. 


폐업 수순을 밟아가는 곳이었다면 이 삭막한 풍경을 블루 시트로라도 가렸을 것이다. 트릭 오어 트릿도 그렇고 잭 오 랜턴도 그렇고 곁에서 만국기를 괴롭히는 중이었을 허공의 꼬마유령들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이 놀이동산이 가졌던 테마는 할로윈이었던 듯 했다. 


잠깐 멸망 당시의 놀이동산을 상상해본다. 아기자기하고 으스스한 할로윈에 들떠 놀이동산을 찾은 아이들. 많은 아이들이 놀이동산에서 분장을 하고 처음보는 또래의 좀비나 처녀 귀신, 광대 악령, 늑대 인간과 친구가 되어 서로를 놀래키거나 웃기거나 하면서 시끌벅적 했을 것이다. 부모들은 웃어주고, 때로는 아이들의 장난스런 위협에 놀랐다는 시늉을 한다. 조금 과장되게. 작위적이란 것을 아이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만.


그런 놀이동산에 철충들이 들이닥친다. 놀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할로윈이니까. 처음보는 외형의 괴물에게 흥미가 생긴 아이들은 새로운 친구로 삼고자 다가간다. 부모들은 말리긴 커녕 망설이고 있는 아이들을 다독여 먼저 다가가길 권한다.


한 소녀, 아마도 처녀 귀신일까. 처녀 귀신의 손이 육중한 동체에 닿자마자 놀이동산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그 누구도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핏빛과 할로윈은 서로 친한 편이고 전설이나 동화 속에선 귀신이나 괴물이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니까. 


사람을 해치는 괴물들이지만, 그 괴물들이 주는 두려움을 즐기는 날이 바로 할로윈이다. 그런 날이니까 아이들은 모두 하루 한정으로 귀신과 괴물이 된 것이다. 다만 여기엔 전설이나 동화와는 달리 철저히 현실의 규율과 통념이 적용된다. 누구도 죽여선 안된다. 허용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장난스럽고 귀여운 수준이어야만 한다. 귀신과 괴물들의 깜찍함에 못이겨 어른들이 제 발로 사탕을 조공으로 바치는 수준.


처음보는 검은 괴물인 철충은 그것을 어겼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이들은 으깨진 갑충같은 꼴이 된 처녀 귀신의 부모들이다. 터져나온 비명이 처녀 귀신은 정말로 죽었단 사실을 모든 방문객들에게 알리고 그 뒤는…… 일방적인 학살의 연속이다.   

   

그런 최후를 맞지 않았을까, 하고 두서없이 시작한 상상을 마치자 정원에 도착했다. 플랜토피아라는 이름의 정원이다. 그 이름을 보자마자 나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1255059에 존재하는 이 놀이동산은 내가 살던 세계에도 존재하는 놀이동산이다.


머릿 속 서랍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아둔 기억이 스멀스멀 뇌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 정원은, 내 세계에도 존재할 이 정원은 그녀와 함께 방문했던 적이 있는 장소다.


노을의 옅은 주홍빛을 품은 레아의 두 눈이 천천히 정원을 살피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관리받지 못한 정원은 말라붙은 시체로 즐비하다. 반대로 인간이 사라져 무성해진 곳도 있다.

정원이라고 하기엔 민망하고 숲이라고 하기엔 모자르다. 녹색과 구리색이 혼합된 정원은 당장 마귀할멈이 튀어나온다해도 이상하지 않다.


애써서 이런 삭막한 걸 눈에 담으려고 놀이동산에 입장한게 아니다. 출발부터 지금까지 레아는 필요한 말을 제외하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저런 쓸쓸한 눈을 하게 둘 바엔 아무 대화라도 하는게 낫다 싶어 적당히 할 말을 고르며 정원의 광장으로 향했다.


정원 한 구석에 내 몸통만한 애벌레와 딱정벌레가 있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미소짓고 있는데에 지쳤는지 애벌레는 눈이, 딱정벌레는 입이 일그러졌다. 추하다기보다는 인상적이었다.  


나는 애벌레에, 레아는 딱정벌레에 걸터 앉았다.


"꽃 하니까 생각난건데." 라고 말하며 나는 레아를 곁눈질했다. 좀 더 어두워진 탓에 레아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너희랑 지내면서 꿈을 꿨거든. 그… 너도 알고 있는 그런 꿈이 아니라, 좀 이상한 꿈이었어."


"어떤 꿈이신데요?"


꿔봐야 별거였겠느냐, 라는 느낌의 톤이었다. 나와 관련된 거라면 열 일 다 제치는 레아가 그러니 낯설었다.


"음… 뭐라고 해야되나. 처음 꿨던 꿈은 어떤 공장지대 같은 곳에 있는 폐건물에서 처음보는 여자를… 그…… 고문했고, 두번 째 꿈에선 알고있긴 하는 바이오로이드가 죽는 걸 봤어. 유치부의 미호선생이 나한테 받은 날붙이로… 여기까지만 할게."


"개꿈이겠죠."


"그러겠지. 근데 너무 생생했던데다가, 두 꿈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 단어가 있어가지고. 혹시 꿈 간에 관련이 있는가 해서. 여긴 이상한 세계니까."


"단어?"


"응. 라벤더. 꽃 이름인가 싶었는데 말이지. 꿈에서 오고 간 대화를 보면 꽃은 아닌가 봐. 바이오로이드의 개체명 같던데?"


"……인간님은 참…"


딱정벌레의 뿔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한숨을 푹 쉬더니 말하고 싶은게 많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요 근래엔 모르는 편이 좋은 것만 알게 되시네요. 티타야 그렇다 쳐도 이번엔 꿈이라니, 손 쓸 방도가 없잖아요."


"그래? 그 라벤더인가 뭔가하는 바이오로이드가 뭐길래? 혹시나 해서 네가 준 설정집에서 찾아봤는데 그런 개체명을 가진 바이오로이드는 없었어."


"그렇겠죠. 저희가 붙인 별명이니까."


"누군데?"


"인간 님, 해리포터 시리즈 보셨다고 했죠?"


"봤…지." 갑자기 튀어나온 마법사의 이름에 당황해 살짝 대답이 늦어졌다. "유명하니까."


"볼드모트 아시죠?"


"라벤더는 볼드모트 같은 개체라는 거야?"


"네. 그러니까, 라벤더의 라 자도 꺼내지 마세요. 어르신들 앞에선 특히 주의하세요. 큰일 날 수도 있어요."


"그 라벤더인지 뭔지가 도대체 누구길래 그래? 무슨 짓이라도 했어? 나쁜 녀석인가?"


"그, 저희 요람엔 그런 말이 있어요."


연달아 쏟아지는 질문을 한손으로 제지하고 내 점퍼의 왼쪽 주머니를 가리켰다.


"가장 악랄한 독은 라벤더 향이 난다."


시적인 걸. 점퍼에서 담배를 꺼내 레아에게 건네고 불을 붙여줬다. 술을 마실 때만 핀다더니, 지금은 취기가 돌지 않더라도 담배가 필요한 모양이다. 강하게 술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확성기 녀석이 술도 챙겨왔을지 돌아가면 확인해보기로 했다.


"과거에 많은 이들이 당했어요. 철충에게도 통하는 유일한 독을 가진 개체… 라서요. 그래서 누구도 입에 담지 않는데, 아이들이 안자고 칭얼거릴 때 재우는 소재로는 간간히 사용해요."


전설이나 괴담 수준의 개체라는건가. 이쪽 세계를 게임으로 접하고 있을 때의 조각만한 기억과 설정집을 머릿 속에 펼쳤다. 


강한 몇몇 개체는 떠올랐어도 철충에게 괴담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설정의 개체는 떠오르지 않는다.


"균열 속에만 있으면 죽을 일도 없을텐데, 왜 바깥으로 향하는 거야? 자원 때문에? 먹고 사는데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지않아?"


"바깥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자원도 있으니까… 일정 수준의 생활을 하려면 바깥으로 나가야 해요. 포기하고 그냥 살아갈 수도 있긴한데 그런 건 또 추기경 님이 싫으신가봐요. 다른 분들도 그렇고. 말려봐도 계속 나갔다 왔다 해요. 요람 근처의 도시 말고 꽤 먼 곳까지 다녀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의 절반은 멀쩡히 돌아오지 못해요."


"왜 그렇게까지… 확성기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런 고아들이 생겨나는데도 자원이 중요하다는 거야? 목숨보다?"


"…교회에 다녀오셨나보네요. 추기경 님은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공평하게 죽으니 상관없다는 태도에요. 엉뚱하죠. 죽는다는게 문제라는 걸 말해도 매번 엉뚱한 소리만 한다니까요. 일부러 그러는거에요."


"진짜로 미안하긴 한가보네. 너희한테든, 인간들한테든."


"이젠 안그래도 되는데 말이죠."


다 피운 담배를 딱정벌레의 정수리에 비벼끄고 레아는 일어섰다.


"돌아가요."


정원까지 왔을 때는 나란히 걸었지만 돌아갈 때는 어쩐지 레아의 뒤를 따르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내가 교회에 갔다왔다는 걸 알게 되서였는지 앞서가던 레아는 아자젤 수녀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과 같이 운이 좋은 몇몇을 제외하면, 비싼 바이오로이드든 저렴한 바이오로이드든 쓰임이 다하면 모두 비슷한 결말을 맞이한다, 수녀가 그 예다, 레아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 듯 했지만, 아자젤 정도되는 고급 바이오로이드가 눈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어떤 경험을 했을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며 담배 한 개비를 더 빌려갔다.


수복이라는 마법이 존재하면 뭐하나. 오히려 그런 마법이 존재하기에 더욱 괴로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레아의 혈색 톤이 한층 낮아졌다. 나는 뭐하자고 레아를 데리고 반세기도 넘게 죽어있는 놀이동산에 들어왔던걸까. 어쨌든 이러려고 잠깐 돌아다니자고 한게 아니었다. 당초에 생각하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와버려 씁쓸해졌다.           


개찰구를 빠져나오고 돌아오자 차량 주변은 조금 변해 있었다. 확성기가 돌아와 있었고 애니와 오드리 씨는 욕지거리를 퍼부어가며 스토브 근처에 널부러진 사체를 표적 삼아 다 피우고 모아둔 담배꽁초를 던져대던 중이었다.


"옘병할. 사자가 습격해오다니 생각도 못했어." 


습격자들을 조롱하듯 확성기는 낮게 그르렁거리는 잡음을 흘리고 말을 이었다.   

  

"촌장. 네 동생이 아니었다면 오드리나 애니나 사자밥이 됐을거야."


스토브에서 떨어진 물컵을 도로 올려놓고 오도카니 숫사자의 사체를 내려다보는 티타니아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라고 묻기 전에 티타니아의 오른손에 들린 것에 시선이 갔다.

스토브의 불에 의해 주홍색 윤기를 발하는 그것은, 고드름이었다.

길이는 한 뼘 반 정도에 굵기는 내 엄지만 하고 갈수록 얇아져 끄트머리는 아주 예리했다.


고드름이라기보다는, 송곳이다.


그걸로 죽인걸까. 숫사자의 갈기엔 피딱지 같은 얼음쪼가리가 덕지덕지 붙어있고 목 언저리와 그 근처의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추워…"


나직이 말하고 티타니아는 베이지색 페이크퍼 코트를 여미며 차량으로 향했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닫히자 들려오는 것은 바람소리와 분이 풀리지 않은 오드리 씨의 욕지거리 뿐이었다.


"흥. 눈의 여왕같은 녀석이 추위를 탄다니, 사자 한무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작살내놓고선."


확성기가 지껄이는 걸 제지할 생각은 없었다. 확실히, 외모만 봤을 때 티타니아는 그런 이미지다. 하지만 자신을 찾아다녔던 겔다 같은 존재인 애니와 레아가 있다는 걸 생각해봤을 때, 눈의 여왕이 아니라 카이 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눈과 마음에 거울조각이 박히고, 눈의 여왕에게 받은 두 번의 키스로 추위도 기억도 모두 저편으로 날아가버린 카이. 차이가 있다면 티타니아는 기억이 온전하다는 것이겠지.


차라리 충격으로 인해 기억이 없었다면,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랬다면 반세기 동안 괴로워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복수같은 걸 염원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상처 자체는 남아있으나 웃을 수는 있는 상태일 수도 있을 것이고, 이렇게 복수를 위한 길을 떠나오는 게 아니라 레아와 함께 페니와이즈가 된 메리에게 사탕을 바치며 미소지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 소용없는 생각이다. 티타니아 본인도 하지 않을 망상을 내가 대신해서 뭐하자는 건가. 티타니아가 불쾌해 할지도 모른다.


가늠할 수도 없던 반세기가 넘는 크기의 그 윤곽이 보인 듯 했다. 얼마나 복수를 바랐던건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 그만한 크기의 원한이다. 겔다에게 구원받은 카이와는 다르게, 지금의 티타니아는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진심어린 눈물도, 사랑도, 애정도, 따뜻한 품도, 상냥함도.

복수라는 즉효약을 두고 그런 뜨뜻 미지근한 것을 선택할 리 없지.

그렇다기 보다 복수 말곤 다른 방법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눈물과 애정으로 없애기엔, 그 거울조각은 너무 단단히 박혀있을테니까.


운전석에 들어가 점퍼를 벗고 뒷좌석을 확인했다. 사라진지 1분도 되지 않았거늘 티타니아는 벌써 꿈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히터를 좀 더 세게 틀고 흐트러진 담요를 어깨높이까지 정리해준 다음, 눈을 감았다. 텁텁한 냄새가 나는 히터의 열기가 솔솔 졸음을 유도했다. 

   

       


    


* * *





C구역인지 뭔지를 찾아 (결국 찾을 수 없었단다.) 놀이동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는 확성기의 말에 따르면, 그 사자들은 사파리에서 탈출한 녀석들의 후손일 것이란다.

산에 있고 터가 넓어 안전할 것이란 이유에서 찾았는데, 사자굴에 들어간 꼴이었다며 애니는 혀차는 소리를 냈다.

   


대시보드 위에 있는 눈사람이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예정된 출발시간은 6시였지만, 사자가 돌아다니는 곳이었으니 호랑이나 곰이 없을 수가 없다는 이유로 조금 더 빨리 운전대를 잡게 됐다.              


우리는 맹수의 터전이 되어버린 곳을 산책하듯 돌아다녔던건가, 룸미러로 레아를 확인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티타니아에게 무릎베개를 해준채 멍한 얼굴로 어둠뿐인 창밖을 보고있었는데 지금은 창을 베개삼아 곤히 잠들어있다. 여러모로 피곤했던 것이다.

속도에 주의하고 노면을 골라가며 운전했다.


한참이나 글러브 박스를 뒤적거리던 오드리 씨는 카 오디오를 능숙하게 조작하여 CD한 장을 세트하고 듣기 좋은 볼륨으로 조절했다.


윤상의 '한 걸음 더'가 흘러나온다.


"뭐야. 우리 윤상 오빠가 나오는데 표정이 왜 그래. 레트로는 싫어?"


피식할 뻔 했다. 윤상을 두고 레트로라 표현할 수 있는 건 내가 살던 세계와 시간대가 아닐까. 23세기에 가까운 22세기에서 윤상이라고 하면, 쇼팽같은 고전적인 인물로 보일텐데 말이다.   


"싫긴요. 좋죠. 그냥 이쪽 세계에서, 그것도 22세기에서 윤상 노래를 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해서요."


"이쪽 세계?" 오드리 씨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기경이 놈 같이 말한다?"


"레아한테 들으셨다고 하지 않았어요? 제 이야기?"


"21세기 초의 인간이라는 것 밖에 못들었어."


"아… 그런가요.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니까요."


"흐음… 20세기에 21세기 초라. 어땠냐? 그 시대는."


"글…쎄요. 대답하기 어렵네요. 이쪽에 비하면 좋은게 많았죠. 그만큼 나쁜 것도 많았지만요."


"그렇겠지. 그 때도 인간은 존재했을 거니까. 바이오로이드는 없었을 거고. 궁금하네. 바이오로이드가 없는 세계라니. 분명 지금보다는 나았을 거야."


"딱히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은데요."


"시끄러워.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그 뒤로 오드리 씨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꺼내왔다. 덕분에 수면이 부족했어도 졸지 않을 수 있었다. 까칠하고 틱틱대는 건 여전하지만 은근히 나를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고맙다는 생각이 들 무렵 플레이어가 '가려진 시간 사이로'를 재생하기 시작해 오디오에 손을 댔는데, 단박에 제지당했다. 어떻게 안되겠냐는 시선을 보냈어도 오드리 씨는 봐주지 않았다.

윤상은 좋아한다. 다만 저 곡은 안된다. 가려진 시간 사이로 뿐만이 아니라 그런 느낌의 비슷한 곡은 이젠 질색이다.


불이 들어오지 않아 있으나마나 한 가로등이 늘어선 대교로 들어섰다. 균열에 있을 땐 가로등이든 네온이든 광공해를 유발하는 요소가 없는 세계는 꽤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운전하면서부터는 인공적인 빛 하나 없는 세계가 스산하기만 했다. 새벽 6시가 조금 넘어서 세계의 명도가 조금 높아졌어도 전조등에 의지해야했다. 이 쯤 되면 차라리 전조등을 끄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전조등을 켤 필요가 있을까? 어제고 오늘이고 몇시간 동안 운전하면서 전조등이 필요한 상황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정도로만 유지하고 있기에 급커브가 나타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혼자만의 불평불만을 씹으며 대교를 건너 도시로 들어섰다. 이정표로 여기가 구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 코너! 많은 분들이 기다리신 수요일의 코너죠. 10분의 세계의 첫사연 나갑니다. 아, 그전에, 늘 하던 건 하고 가야죠. 하이! 봉쥬르! 곤니치와! 부에나스 타르데스! 안녕하세요! 오늘도 모두 행복하길!"


"하이! 봉쥬르! 곤니치와! 부에나스 타르데스! 오늘도 모두 행복하길!"


"프흡…"


라디오 주파수를 건드린 적은 없다. 송출 중인 스튜디오도 없을 것이다. 멸망 전에 흘러나오던 라디오 방송을 CD에 담아둔 거겠지. 오드리 씨는 환상적인 미소를 띠우고 과거의 청취자가 되어 호스트의 진행에 열렬히 반응한다. 말을 안해서 몰랐지 이 차의 주인은 오드리 씨인게 분명하다. 세계 각국의 인삿말들을 우스꽝스럽게 읊어대는 호스트가 글러브 박스에서 잠들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추석에 부모님의 집에 다녀왔어요. 3년만이었어요. 그간 너무 바빴으니까요. 선물로는 곶감과 전병을 드렸어요. 우리 콘스탄챠가 직접 만든거라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을텐데 어머니는 산 건 아니라도 바이오로이드가 만든거란 걸 바로 아시더라구요……"


몇 개의 교차로를 지나고 대로를 타고 달리다 구미역에 도착했다. 내가 살던 세계의 구미역과는 역사의 외형이 꽤 달랐지만, 세련된 근미래형 디자인인 것이 무색하게 구미역사는 거의 다 무너져가는 상태였다.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에요. 그래서였을까요. 그 때까진 몰랐는데, 부모님께 단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한다 말씀드린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어요."


"야, 창 내려 봐."


바이크를 끌고 차량 옆으로 다가온 애니가 노크하다가 검지를 아래로 까딱였다.


차창을 내리자 애니가 오드리 씨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내 귀를 빌렸다.


"여기까지 오면서 뭐 못느꼈냐?"


"느껴? 뭘?"


오드리 씨를 따라 음악과 라디오에 집중하느라 주변 풍경을 신경쓰지 못했다. 


"여기, 너무 깨끗하잖아."


"깨끗해? 저기 역사가 다 무너져 가는데?"


"저 뒤에 건물들 봐. 모르겠냐?"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뒤를 봤다. 지금까지 달려오면서 본 도시들과 동일하게, 오직 감청에 잠긴 회색만이 가득하다.


"모르겠…어?"


오직 회색?


녹색과 황토색은?


어느 건물이나 덩굴이 없다. 밑둥을 받쳐주는듯한 잡초가 없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왜 이렇게 깨끗하지? 간간히 보인 철충과 AGS들의 잔해들도, 떠다니듯 널부러진 도시의 파편들도 지금 여기에선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금부터라도 부모님을 모시기로 했어요. 단 몇 달 뿐이더라도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에요. 틈만 나면 사랑한다 말씀드리고, 원하시는 건 뭐든 해드릴거고요. 분명 거절하시겠지만… 그래도……" 


"야. 이거 받아." 라며 애니가 피스톨 한 자루를 건넸다. "티타랑 촌장 깨워. 이봐! 오드리 씨! 라디오 꺼!"


"새벽부터 소란이네. 해 뜰려면 멀었어!"


"일단 라디오 끄라니까! 아니면 볼륨이라도…!"


마지못해 오드리 씨는 오디오에 손을 뻗어 과거에서 이만 현실로 돌아오고자 했다.


그러려고 했다.


먼저 꺼진 건 전조등이었고, 이어서 오디오가 의식을 잃었다.


"씨이발 진짜!"


허리춤에서 리볼버를 꺼내든 애니가 주위를 신속히 살피고 말했다.


"나오지 마! 얘가 알아서 자가진단 끝내면 다시 전조등 들어올거니까 그 때 시동걸어!"


"야! 뭔데? 왜 호들갑이야?" 오드리 씨가 말하며 차창밖을 살폈다. "이런… 씨발…"


깨끗하다, 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대충 짐작은 간다. 굼실굼실 레아의 무릎에서 몸을 일으킨 티타니아가 눈을 비비고 멍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다시 레아의 무릎에 머리를 뉘였다. 진즉에 일어나 있던 레아는 확인하듯 손가락 사이에서 스파크를 몇 번 튀겼다.


짐칸의 확성기와 대화를 주고 받고 근처만 빨리 돌아보겠다며 애니는 바이크를 끌고 사라졌다. 


"잡초 하나 없네요. 돌쪼가리도. 새 소리도 안들려요."


"조용히 하고 잘 살펴 봐."


히터도 꺼져서, 숨 죽이고 5분 정도 지나고나니 차량 내부에 감돌던 히터의 온기가 모조리 창밖으로 빨려나갔다. 5분 더 지나선 옅은 입김이 나오기 시작했다. 창밖은 새카맣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어두운게 아닌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애매하게 어두워서 잘 확인되지 않던 안개가 잘 보이게 됐다. 귀신같은 건 믿지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지만, 저 반쯤 무너진 역사에서 지금 바로 괴생명체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으스스함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한껏 예민해진 오드리 씨가 두려워하긴 커녕 차를 탈 바엔 이런 고물이 아니라 더 쓸만한 걸 끌고왔어야 했다고 불평할 때가 됐을 때, 계기판의 연료 게이지에 불이 들어왔다. 뒤이어 의식이 돌아온 플레이어가 신음하듯 지직거리는 노이즈를 흘렸고, 전조등이 켜졌다.

곧바로 시동을 걸고 고개를 들어 전방을 보기 전에 히터를 틀려고 했는데, 오드리 씨가 어깨를 두들겼다.


"…야. 저거 봐."


방금까지 짜증으로 일그러져있던 오드리 씨가 경직된 무표정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뭔데요?" 

    

라고 반사적으로 반응했지만 이런 분위기와 타이밍에 그런 대사를 읊으면 본능적으로 불길한 것을 예감하기 마련이다.

예감에서 오는 저항감을 물리고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토끼가 있다.


"저거 토끼냐?"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오드리 씨가 확신하지 못하고 내게 물어본 이유는, 내 쪽에서도 그 물음에 선뜻 고개를 끄덕여줄 수 없던 이유는 쫑긋 선 두 귀만이 멀쩡했기 때문이다. 그 아래로는 녹아내린 것을 다시 제자리로 밀어올린 뒤에 굳게 만든 것 같은 인상이다. 그런 토끼탈을 쓴 무언가가 우리 쪽을 똑바로 향하고 있다. 그 무언가는 하얀 천쪼가리만 걸친 탓에, 전조등의 빛에 부옇게 뜬 살색 토끼탈은 가만히 보면 공중을 부유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오늘 할로윈이지?"


철컥- 하고 둔탁한 쇳소리가 울렸다. 오드리 씨 나름의 준비를 하는 소리다.


"아무리 할로윈이라도 저건 너무 힘이 들어간 것 같은데요."


"그러게. 딱 봐도 진짜 살가죽으로 만든 탈인 것 같은데. 악취미네."


살가죽, 이란 단어보다 그런 걸 바로 알아보는 오드리 씨에게 놀랐다.


"어떻게 아세요?"


"내가 뭐하는 년인데? 잘 안보여도 딱 질감만 가늠이 되면 다 알아. 흐흐… 저거 얼굴 껍데기 벗겨서 만든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태파악을 완료한 나는 최대한 으스스한 기운을 떨쳐내고 신중하게 시동을 걸었다.

클러치와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고 푸르게 떠오른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마자 곧바로 시동이 걸림과 동시에 라디오가 지직거렸다.


"인간. 거긴 어떤 상황이냐."


확성기였다.


"뭐야? 언제 라디오 mc로 데뷔했냐?"


"장난치는 거 아니야. 빨리 상황부터 알려 줘. 몸을 고정시켜놔서 전방 확인이 안된다고."


"전방에…" 토끼가 다가온다. "토끼가 한 마리 있어. 손에는…… 무슨 호미같은 걸 들고있네."


"그러냐? 후방에도 토끼가 있어. 멧돼지도 있고 두꺼비도 있고 호랑이도 있고…… 염소에 늑대, 양하고 사슴도 있군. 이야. 여기선 늑대랑 사슴이 친구 먹나본데? 갑자기 어디서들 나타난건지. 다들 상당히 굶주려 있는 것 같아."


토끼의 걸음걸이가 빨라진다. 멀리 잡아도 최소 20걸음이면 앞유리에 도달한다.

그렇게 되면 굉장히 높은 확률로 보닛 위로 달려들겠지. 손에 들고있는 호미로 유리를 두드리는 그림이 쉽게 그려진다.


"앞 뒤만이 아니라 사방에 있군. 포위됐어. 인간, 지금부터 내가 하라는대로 해라."


"말해."


"앞으로 밀고 나가."


진짜로? 라고 재확인하려 했는데 그럴 여유가 사라졌다. 한 번 튀어오르듯 움찔한 토끼가 걸음걸이를 박차서 달려와 예상보다도 빨리 보닛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1단에서 2단, 3단까지 올라가 4단으로 기어변속이 되던 참이라 속도는 충분히 가속해있는 상태다. 호미로 보닛을 엉금엉금 기어오는 토끼와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는, 눈이 있어야 할 곳과 마주봤다. 동공이 뻥 뚫려 눈 대신 블랙홀을 달아둔 것만 같아 시선이 빨려들어간다. 애써 고개를 돌리고 싶어도 전방을 확인해야하는 탓에 시야에 잡힌다. 싫어도 보게 된다.


후크에 걸린 물고기마냥 휘청거리던 토끼는 마침내 팔을 뻗지 않아도 유리가 닿는 곳에 까지 다다랐다.


"인?간?"


눈은 탈 아래에 확실히 달려있는 듯 했다. 그럼에도 뻥뚫린 자리가 너무 새까매서 눈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연신 불규칙하게 갸웃대던 토끼가 얼굴을 가까이한다.

중심이 제대로 잡힌건지 속도계는 이제 슬슬 80km에 접어들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휘청거리지도 않는다.


"남?자."


"야! 빨리 떼어내 봐!"   


"속도는 계속 올라가고 있어요!"


"아니 씨발 짧게짧게 좌우로 돌리라고!"


"남?자. 남?자 남자. 남자. 남자. 남자. 남자남 자 남 자남자남 자남자."


"토끼 눈 돌아갔잖아! 호미에 대가리 찍히고 싶냐!"


"남자남자남자남자남자남자남자남자아아아!!" 


치켜올려진 토끼의 손에 호미가 들려있다.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설정이 떠오르고 금새 사라진다. 호미가 겨냥하는 건 나인게 명백하다. 이제 곧 금방 달려들 것 같이 토끼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짧게 왼쪽으로 스티어링을 돌려본다. 무릎으로만 몸을 지탱 중이라 위태로워 보이는데 내 걱정아닌 걱정도 무색하게 토끼는 꿈쩍도 안한다. 힘도 좋다. 이 쯤 해서 가면 너머의 정체가 궁금해지고 급브레이크로 떼어내려는 순간, 오른쪽 귀가 울렸다.


"전방 똑바로 주시해! 또 오잖아!"


머리가 뒤로 넘어간 토끼가 보닛에서 떨어졌다. 바퀴를 통해 짓이겨지는 감각이 있었고 트럭의 동체가 덜컹하고 지면에서 잠시 떨어졌다. 그리고 사라진 토끼와 바톤터치하듯 어스름에 깔린 안개 속에서 다른 탈을 쓴 녀석들이 트럭에 덤벼들어온다. 따로 말할 것도 없이 토끼의 동물친구들이다. 가장 먼저 달려든 돼지는 보닛에 올라타려다가 나가 떨어졌고 늑대는 그런 돼지에게 치여 우측 앞바퀴 밑으로 사라졌다. 처음에 가졌던 '인간과 유사한 외모를 가진 바이오로이드를 차로 뭉개고 지나간다.' 라는 수단에서 오는 저항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전방만이 아니라 좌우측에서도 덤벼들고있고, 지금 막 오드리 씨의 권총이 조수석에 달라붙은 독수리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슬슬 달라붙는 동물의 숫자가 늘어간다.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매달린 동물들이건 아직 매달리지 않은 동물들이건 모두가 남자를 연호한다. 동물들이 부르짖는 남자가 나라는 건 아주 잘 알고있다. 안좋은데. 최악의 경우엔 전복 당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숫자가 달려들든 바이오로이드는 모두 여성인데 어떻게 전복이 가능하겠냐, 라는 멍청한 자문을 되삼키고 기어를 5단으로 변속한다. 바이오로이드 중엔 나보다 힘이 센 녀석들이 차고 넘친다. 내가 지내던 균열에도 꽤 존재하고, 가장 처음으로 트럭에 삼켜진 토끼도 무릎으로만 시속 80km에 육박하는 트럭의 보닛 위에서 몸을 지탱했다. 


운선석 쪽 창이 텅텅 울린다. 곁눈질로 확인한다. 너구리가 이마를 들이받고 있다. 어지간히도 내가 탐나는 것 같다. 전복 당하면 어떻게 될까? 일단 무사하지 못할 건 분명하다. 그 포니테일과 보련이 그리워하게 될 꼴을 당할지도 모르고 얼굴 껍데기가 벗겨져 지금 보이는 너구리의 친구 해달로 재탄생할지도 모른다. 나 뿐만 아니라 오드리 씨와 티타니아, 레아도 비슷한 꼴을 당하겠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한 줌도 안되는 망설임이 사라졌다.


악셀을 최대한 구겨밟고 스티어링 휠을 중앙에 위치시킨다. 속도계가 100km을 순식간에 돌파했다. 돌파한 건 좋은데, 이런 속도로, 동물들에게 시야가 가려진 상태로 얼마나 달렸는지 몰랐다. 이렇게 쭉 달리다가 가로등이나 외벽이나 단단한 잔해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최악의 최악을 상정하면서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던 그 때, 하늘이 노랗게 빛났다.


"야! 조명탄! 보안관 계집애다! 빨리 저리로 가!"


잊고 있었다. 애니가 있었지. 조명탄이 떠오른 위치를 최대한 가늠하면서 속도를 더욱 올린다.

한 발 더 조명탄이 쏘아올려진다. 얼마나 달린걸까. 좌회전에서 우회전, 사거리를 네 개나 지나갈 때까지 동물들은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인간 님. 멈추세요."


뒷좌석에서 그런 말이 들리더니 썬루프가 와장창 깨졌다. 앞유리고 옆유리고 여기저기를 총알이 꿰뚫은 탓에 히터는 진즉에 의미없게 됐지만 총알만한 크기의 구멍이라면 덕트테이프로라도 어떻게든 바람을 막아볼 수 있다. 하지만 썬루프라면 경우가 다르다. 추운 건 질색인데… 나는 그렇다고 쳐도 추위에 약한 티타니아가 걱정이다.


얼굴 껍데기가 벗겨질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뒷전으로 둬도 좋을 걱정거리에 잠겼던 것은 내가 이상해져서가 아니다. 썬루프가 깨지고 난 직후에 돌풍이 몰아치더니 동물들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마냥 떨어져나갔다. 이어서 하얀 명멸이 일자 가장 근처에 나가떨어졌던 너구리와 도마뱀에게서 스파크가 튀었다. 그 스파크가 얼마나 강했는지 지금은 머리에 불이 붙어있다. 아하. 감전이로군. 누가 그런건지 확인해 볼 것도 없었어서 안도에 몸을 맡겼다. 클러치를 맡던 왼다리가 축 늘어졌고, 스티어링 휠을 구길듯이 쥐고 있던 양손엔 땀이 흥건했다.


"왜 진작에 안나섰어?" 조수석 창을 열고 오드리 씨가 말했다. "덕분에 안써도 될 탄환을 낭비했잖아."


"없앨거면 가능한 많이 몰아서 없애는게 낫잖아요. 게다가, 이럴 수 있는 장소가 아니면 인간 님이 다치세요."


오드리 씨와 레아가 눈씨름을 벌인다. 둘 다 이해가 되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안된다. 얼굴 껍데기를 걸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일단 안전부터 확보하면 서로 흥분한 부분을 풀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저 냉랭함을 부술 필요가 있어 가능한 한 밝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레아는 내 감사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아직 목숨이 붙어있어 황급히 달아나려던 오소리에게 전기 세례를 퍼붓고 뒷좌석으로 돌아왔다.


레아에게 저런 일면이 있었을 줄은. 다시 티타니아의 베개가 되어준 레아를 룸미러로 살폈다.

레아는 짧은 한숨을 쉬고 내 시선을 알아챈 듯 차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지금은 조명탄이 쏘아올려진 위치를 찾도록 하자. 

은연 중에 껐던 시동을 다시 걸기 위해 클러치에 발을 올렸다. 

…가 다시 내렸다. 위치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됐으니까.


전방에 보이는 다음 사거리에서 바이크 하나, 아니 둘이 다가왔다. 하나가 아니다. 하나는 애니가 분명한데 나머지는 누굴까. 애니와 함께 오는 것으로 보아 방금 나를 사냥(아마도) 하려들던 동물친구들은 아닐 것이다.


차창을 내리고 애니를 맞이했다.


"젠장,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 있어서 좋았는데 하필 그런 녀석들이 습격할 줄은. 무사해서 다행이야."


"머,머머머머,머머,머고?"


면목없어하는 애니 옆에서 귀신이라도 본듯한 얼굴로 나를 가리키던 누군가가 애니에게 속닥거렸다. 

동남방언으로.


"지,지지 진짜가… 이, 인간이다아이가…"


"진짜라고 했잖아. 그것도 남성. 자, 약속한대로 정보를 제공해. 대갈통 날아가기 싫으면."


애니의 손이 닿은 허리춤의 홀스터와 동남방언으로 당황해하는 자를 번갈아보다가 물었다. 


"…누구야?"


내 물음의 방향은 애니였는데, 동남방언 구사자가 답했다.


"히야~ 진짜 인간이다! 와~안전 잘생깄네! 인간 오빠야. 내는 후사르다. 쪼오기 아래에서 산다! 먹을 것좀 찾으려고 잠깐 올라왔는데 짐승들한테 쫓기대? 우야노~ 우야노~ 하는데 요기 쪼꼬미 언니랑 마주쳤다. 얘기하다보니까 내는 정상인 거 같다고, 급하다고 도와달란다아이가. 인간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꼬. 협조 안하면 대가리에 빵구내겠다자나. 씨바 먼 개소리고, 하면서 왔는데… 진짜 인간이 있네? 그래서……"


자신을 후사르라 소개한 소녀의 말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이 일대는 짐승이라 불리는 야만인들의 영역이니 위험하다, 이 도시에서 벗어나면 자신의 은거지가 있다, 할 이야기가 있다면 거기로 가서 더 하는게 어떠겠냐…… 중간중간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믿어도 되겠어?" 라고 바이크로 돌아가는 후사르를 보며 애니에게 말했다. "아까 습격해온 녀석들이랑 다를게 없는 녀석일 수도 있잖아."


"그럼 계속 여기 있을거야? 애초에 여기서부터는 여기저기 들쑤시면서 조사하려고 했어. 내가 아는 건 녀석들이 있을만한 지역이었지, 멸망 후엔 따로 수사를 계속 했던 것도 아니야. 아예 손을 놓고 있던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따라가자고?"


"일단은. 잠깐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까 남쪽 지리나 정보에 빠삭한가봐. 신세져서 나쁠 것 없지.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한 것만 취하고 깔끔하게 없애버리면 되고."


"아니 그건 좀…"


"시끄럽고 똑바로 따라 와. 아, 그리고 인간. 방금은 잘했어."


낮아졌다가 높아졌다가, 뭐냐 도대체. 애니가 취하는 온도의 변화를 따라가기가 힘들다. 오드리 씨와는 다르게 이녀석은 이녀석대로 대하기 피곤하다.


"그런 상황에선 백퍼센트 얼탈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침착하네."


툭 던지듯 내뱉고 애니는 후사르를 뒤따랐다.

침착하긴 뭘 침착해. 하면서 마냥 따갑지만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오드리 씨에게 인공적인 미소를 지어주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