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lastorigin/33300477 > 전편링크


-------------


***


 “아르망 언니! 방금 전에 공성 방벽이 무너졌다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계획이랑 다르잖아! 여진이 여기까지 와서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예상, 아니 예지대로랄까, 닥터는 아르망이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그런 닥터에게 설명하기조차 피곤하다는 듯 아르망은 옆에 있던 아자즈에게 짐을 떠넘겼다. 소개한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그건 여기 아자즈 님께서 설명해주실 거예요, 닥터.”


 “아! 언니가 아자즈 언니야? 반가워! 난 여기 연구실 책임자 겸 오빠 담당인 닥터야.”


 칙칙한 전선 다발과 잭스가 든 수용액이 기괴하게 빛나는 이곳에 닥터의 천진난만한 표정은 굉장히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아자즈는 오히려 그런 점에 더 끌리는지, 호기심에 이곳저곳을 훔쳐보며 닥터가 내민 손을 마주잡았다.


 “반가워요, 닥터. 아자즈에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리네요?”


 “히히, 어려도 알 건 다 안다구. 그나저나 공성 방벽 무너진 게 언니랑 무슨 상관이야?”


 “아, 그거요. 아마 우리 뽀삐가 그런 걸 거예요. 미안해요. 제가 떠나기 전까지 잘 고쳐 놓을게요.”


 “뽀삐?”


 옆에서 지켜보던 아르망이 넌더리가 난다는 듯 한마디 끼어들었다.


 “…아자즈 님이 데려온 타이런트의 이름이에요.”


 “아하핫! 설마 타이런트 이름을 뽀삐라고 지은 거야? 언니 되게 귀엽게 이름 짓는다!”


 “하아…….”


 아르망은 골치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결국 머리를 짚었다. 아자즈와 닥터의 조합은 좋게 말하면 신선했고 나쁘게 말하면 골치가 지끈거릴 정도로 변수가 많았다. 변수를 싫어하는 그녀에겐 거의 쥐약 같은 조합이었다.


 “안목이 높으시네요, 닥터. 이따가 우리 뽀삐 설계도라도 보면서 같이 얘기 좀 해볼래요? 제가 우리 뽀삐한테만 특별히 달아놓은 게 좀 있거든요.”


 “응, 나중에. 오빠부터 보고. 아자즈 언니가 여기 온 목적이 우리 오빠잖아.”


 아르망은 순간적으로 손을 들어 올리려고 하다 멈칫했다. 또 닥터가 거기에 맞장구를 치면 제지할 목적으로. 그러나 닥터는 그러지 않았다. 닥터의 입은 여전히 빙글빙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은 섬뜩하리만치 번득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르망은 목덜미에서 소름이 쭉 돋을 정도였다.


 “소개할게. 우리 오빠야. 이름은 잭스. 이 지상에 남겨진 최후의 인간님이지.”


 “이분이 소문의 그 인간님이시군요. 외형이 좀…많이 다르긴 하지만요.”


 가릴 곳만 겨우 가린 채 탱크 속에 떠 있는 잭스의 모습은 살아 있는 ‘인간’이라기보단 포르말린 병에 든 개구리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자즈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놀리는 대신 탱크 이곳저곳을 살피며 잭스의 상태를 검사하기 시작했다.


 외형이 어떻든 뇌파는 인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골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기계음만 간간히 들리는 연구실 안은 잭스가 든 탱크를 만지는 아자즈만 움직이고 있었다. 닥터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아자즈는 이 탱크를 직접 설계한 사람이었다. 지금 아자즈의 손길이 닿는 곳에선 닥터가 그동안 예상도 못 했던 기능과 수치들이 속속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거기까진 다 좋은데…….


 “…언제까지 만지고만 있을 건데!”


 아자즈가 잭스의 아랫도리를 가만히 쳐다보며 뭔가를 누르려고 하자 결국 보다 못한 닥터가 제지하고 나섰다. 장장 30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아직 검사가 안 끝나셨나요, 아자즈 님?” 아르망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검사요? 그건 아까 끝났는데요.”


 “그럼 지금 만지고 계신 건요?”


 “이건 약간의 호기심이죠. 마지막 인간님이시잖아요?”


 “…….”


 “언니, 자꾸 딴길로 새지 말고 오빠 상태나 좀 말해 봐. 그것부터 말해줘야 뭘 할 거 아냐.”


 아자즈의 태도는 너무 당당해서 할 말을 잊게 할 정도였다. 그 닥터가 짜증을 부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닥터를 향해 아자즈는 천연덕스럽게 한 마디 툭 던졌다.


 “아주 나빠요.”


 내용은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닥터는 비틀리는 입술을 꾹 참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 나쁘단 건 나도 알아. 구체적으로 얼마나 나쁜지 알고 싶은 거라고.”


 “오리진 더스트 강화 시술을 해야 해요. 안 그러면 돌아가실 거예요.”


 “…지금 오빠 몸으로 그런 대수술을 버티긴 힘들어. 다른 방법은 없어?”


 “없어요. 일주일 후에 오메가가 이쪽으로 온다고 했거든요.”


 “그래, 일주일…뭐, 뭐?!”


 “이이, 일주일이라고요?!”


 설마 이런 폭탄 정보가 장바구니에서 물건 꺼내는 식으로 나올 줄은 정말 몰랐던 터라, 가장 당황하는 건 아르망이었다. 오메가가 이곳에 온다고? 그것도 일주일 후에? 예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그 발언에 아르망은 거의 패닉 상태였다.


 “말도 안 돼! 분명 AGS 소모 문제로 이쪽에 신경 쓸 틈 따윈 없을 텐데!”


 “그건 오메가가 얼마 전에 가져 온 새 회로로 해결 됐어요. 이제 철충 감염 걱정 없이 타이런트 급 중장형 AGS도 찍어낼 수 있으니까, 그쪽 방면으론 한시름 놨을 거예요.”


 “그건 알아요! 그 생체 회로 칩을 인도했던 책임자가 바로 저였으니까……! 하지만 그걸 이렇게 빨리 적용할 줄은, 대체 어떻게…….”


 칩은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거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게 아니었다. 아예 그 칩에 맞춰 모든 공장의 공정을 갈아엎어야 했으니 말이다.


  “어머, 레모네이드 제타에 대해 안 들어봤어요? 아르망이라면 알고 있을 거 같아서 말 안 했는데. 오메가가 회로 샘플을 넘겨주는 대가로 기술력을 지원받았거든요. 분하지만 공장 설계로만 따지면 그쪽이 저보다 한 수 위에요.”


 레모네이드 제타. 아르망으로선 알기는커녕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레모네이드들의 정보가 함구된다 해도 아르망 역시 한때 오메가의 참모까지 한 전적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녀가 몰랐다는 건…….


 “…오메가가, 제게 정보를 통제했군요.”


 “정황상으로 보면 그렇네요. 하지만 제타의 존재를 알았다 해도 별 수 없었을 거예요. 레모네이드들도 자기 세력에 대한 얘기는 자기들 회의에서밖에 안 한다는 모양이니까.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아자즈 딴엔 나름 위로라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르망에겐 그렇게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식은땀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은 없고 상황은 최악이었다. 예지는 온통 절망적인 미래만 보여줄 뿐이었다.


 “아자즈 언니. 오메가가 일주일 후에 와서 오빠를 죽인대?”


 “네, 그것도 아주 화려하게요. 어떻게 할 진 모르겠는데 그 말을 할 때 아주 유쾌한 표정이었어요. 아! 직접 제게 말했단 건 아니에요. 실은 오메가의 케스토스 히마스를 수리할 때 살짝 도청기를 심었거든요. 왜 그, 인간님이랑 싸웠을 때 있잖아요.”


 아자즈는 잭스와 오메가가 한 판 붙었을 때를 언급하며 생긋 미소지었다. 닥터와 아르망은 미소조차 짓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제 닥터의 눈은 거의 광기로 번들거릴 지경이었다.


 “강화 시술 성공률은 몇 퍼센트 정도로 봐?”


 “20퍼센트요. 어쩌면 그보다 더 낮을 수도 있고요.”


 “…….”


 “하지만 저와 닥터가 힘을 합치면 80퍼센트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거예요. 자랑은 아니지만 생체공학 쪽 지식도 있거든요.”


 그 정도 수치면 아주 낙관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희망적인 말을 내뱉으면서도 아자즈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아까부터 계속 닥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닥터, 인간님을 살리는 게 의미가 있나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왜 의미가 없는데?”


 “닥터 양! 진정해요, 닥터 양!”


 아르망이 깜짝 놀라 제지했을 땐 이미 닥터가 아자즈 앞에 선 상태였다. 소름끼칠 정도의 살기가 닥터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 닥터 앞에서 제 할 말 다 하는 아자즈도 과연 보통 성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오메가가 여기 온다는 건 더 이상 인간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일 거예요. 오메가는 자기에게 필요가 없으면 곧바로 처분하는 성격이잖아요? 거기에 한번 자기를 모욕까지 한 인간님이니까, 아마 그 존재만으로도 자신의 세력을 분열시킬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오빠를 살리는 게 의미가 없단 거야? 어차피 살려도 오메가 손에 죽을 거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잖아요. 이 대륙 어디서 숨을 수가 있겠어요? 안전한 곳은 손바닥 한 뼘만한 땅도 죄다 레모네이드 세력권이고, 아닌 곳은 철충들이 득시글거리는데.”


 “내가 지킬 거야.”


 닥터가 씹어뱉듯 말하자 아자즈가 픽 미소를 지었다. 아르망은 조금 뒤에야 아자즈가 ‘처음으로‘ 빈정거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와, 저 지금 처음으로 닥터가 어린애처럼 보였어요. 좀 더 귀여운 주제로 떼쓰면 좋았을 텐데. 가령 민트맛 사탕 대신 레몬맛 사탕을 달라거나.”


 “아자즈 언니, 나 농담할 기분 아냐.”


 “우연이네요. 저도 그럴 기분 아니거든요.”


 “둘 다 그만하세요. 부탁이니까.”


 감정이 어긋나기 반 보 직전 상황에서 아르망은 둘 사이를 더듬거리며 끼어들었다. 진짜 적이 버젓이 다가오는 마당에 내분이 좋은 선택지일 리가 없었다.


 “아자즈 님, 그냥 닥터를 도와주시면 안 되나요? 인간님은 저희들의 마지막 희망이세요. 아자즈 님도 그걸 아시니까 저희들에게 협력해주신 거 아니에요.”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아르망, 전 지금 추상적인 희망의 상징이니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님만 살아 계시면 나중에 어떻게든 될 거다, 라고 그저 막연하게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도 싫고요. 미안하지만, 지금 제가 보기엔 닥터가 인간님을 별로 살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아요.”


 “네?”


 닥터가 잭스의 생존을 바라지 않는다니 대체 무슨 소린가. 문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걸 바쳐 잭스를 돌보는 닥터였다. 그 광기어린 헌신을 아르망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닥터는 더욱 그랬다.


 “언니, 지금 내 신경 긁으려고 자꾸 그런 말 하는 거야? 내가 오빠를 살리고 싶지 않은 것 같다고? 그럼 내가 뭐하는 걸로 보여?”


 “죄책감에 파묻히려는 것처럼 보여요.”


 아자즈는 딱 잘라, 그것도 아주 차갑게 말했다.


 “그냥 인간님께 미안하니까, 뭐든 하려는 것 같아요. 그것도 자기 자신에게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만. 그걸 속죄라고 생각하는 거죠?”


 “…….”


 순간 닥터의 눈에서 독기가 빠졌다. 가장 마음 깊숙한 곳, 깊디깊은 어둠이 들춰진 듯 닥터는 아자즈를 멍하니 올려다볼 뿐이었다.


 “진짜 인간님을 살리고 싶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앞뒤 생각도 안 하는 대안을 내놓지 않았을 거라고요. 그런 말을 하는 당신께 협력할 순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좀 전과 다를 바 없이 온화했지만 차가웠다. 금속만큼이나 차갑고 딱딱했다.


 “제 협력을 얻고 싶다면 그 답부터 찾아내세요. 인간님을 살리는 의미가 뭔지를요. 그 전까진 우리 뽀삐가 망가뜨린 공성 방벽 수리에 집중할게요.”


 “…….”


 아자즈는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고개를 떨구는 닥터도, 당황하며 그런 닥터의 어깨를 감싸는 아르망도, 심지어 잭스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로 말이다.


 “아, 물론 제 협력 없이 혼자서 인간님께 강화 시술을 해도 돼요. 그게 딱 당신이 원하는 상황이죠, 닥터? 그렇게 해서 인간님을 살려내면 당신은 또 한 번 당신 죄책감에 파묻힐 수 있잖아요.”


 아자즈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소름끼칠 정도로. 닥터는 반박할 수 없었다. 아르망 역시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어렴풋이 알고 있던 걸, 그저 닥터에 대한 연민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잘해봐요.”


 비웃음일까, 아니면 응원일까.


 수수께끼 같은 인사를 남기며, 그렇게 연구실의 문은 아자즈의 등 뒤에서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