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5일 06시 00분부로 영영 남이 되었다

반년 조금 더 되는 시간동안 뭐 하나 건진 것도 없이 상처만 남았다

근데 양육분쟁이니 뭐니 생각해보면 차라리 이게 나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짧은 반년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왔다고 생각했다

근데 단 한번의 실패 앞에 내 삶의 모든 것이 부정당했다

산산조각나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다


어려서부터 주변에선 항상 그런 이야기를 반복한다

젊어서 재미를 쫒다보면 인생 파탄난다

재미는 어른이 되어서 찾으면 된다

결국엔 자원과 경험치 책과 다채롭고 강력한 OS를 뿌리는 게 중요하다

지금 참을때마다 배우자의 얼굴이 바뀐다

결국 재미는 한때의 불장난이요, 남는 건 자원과 경험치책이라


다 개소리였다


지금은 이혼한 쌩판 남과의 만남은 지금 생각해보면 영 좋지 못했다

그게 다 내가 처음이고 모자라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다

모자란걸로 따지면 내가 경험이 모자라고 재미가 모자라긴 했다

얼굴 몇번 보고 급하게 한 결혼, 시작부터 삐걱였다

그래도 처음이니 다들 그럴거라 스스로를 속이며 맞춰나갔다

어떻게든 마음을 얻어보려 무진 애를 썼다

열심히 자원을 퍼붓고 경험치 책을 쥐여주며 각종OS와 승급재료를 선물했다

부족함이 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끔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좀처럼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순 없었다

결혼 한달이 지나고 힘보다도 기술이 중요하단 이야기를 어디서 주워들었다

마냥 자원을 무식하고 우직하게 들이밀기만 해선 마음을 얻지 못하는 걸까

이벤트에 좀 더 공을 들여 바리에이션을 늘려보았다

스쿼드 인원X2회 피해최소화에 효저100% 적중600%짜리 철충 장식으로 멋도 한번 부려보았다

대차게 깨졌다

오만 쌍욕이란 쌍욕은 다 듣고 철충장식도 갖다버렸다

그뒤론 타성적으로 꼬박꼬박 자원 갖다바치는게 전부인 5개월이었다

대체 어디다가 그 많은 자원을 탕진하는지 알길이 없었다

그저 요구량이 날로달로 늘어가니 쎄빠지게 공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운명의 결혼 반년차

믿을 수 없는 관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어디서 똥통같은 년이랑 바람피는 모습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생긴것도 똥통같은 년을 변소야♡하고 애칭으로 불러재끼는 모습이란

도저히 글로 표현할 길 없는 감정이 내 속에서 솟구쳤다

그 뒤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차려보니 시간은 보름이 넘게 지나있었고

난 이혼당해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겐 배리나 취급까지 받으며 조리돌림 당하고 있었다

어디가서 하소연 한들 들어줄 이 하나 없었다

하소연 할 곳이라곤 익명성이 방패가 되어줄 라오챈 뿐이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언제부터 잘못된 걸까


재미없게 태어난 것이 잘못인걸까

재미없게 자라난 것이 잘못인걸까

어릴 적 꼰대들이 하던 말은 뭐였냔 말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줄 아는 이가 성공한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내가 깎아내온 과거의 결말이 어째서 이런 현실이란 말인가

혹시 아직도 인내가 부족한 걸까?

좀 더 참으면 달콤한 과실이 떨어질까?

떨어지긴 개뿔 나무가 말라비틀어졌는데


남들이 옳다는 대로, 남들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달려왔다

많은 것을 인내하고 많은 것을 깎아내며 견뎌왔다

많은 것을 미래에 쌓고 드디어 그 결실을 수확했다고 생각했다

미래의 곳간은 텅비어있었고 내 젊음의 희생은 가정 하나 지키지 못했다

마음 하나 돌리지 못했고 이젠 나 자신의 가치관 조차 지키지 못한다

속빈 강정이고 벌레먹은 밤송이다

나아갈 방향을 잃고서 현실의 자기장 교란앞에 갈팡질팡하는 나침반이다


방향이 틀린걸까

결국 그 똥통같은 년과 놀아나는 재미가 내 젊음의 희생을 꺾은 셈 아닌가

무엇을 희생했는가

동년배들이 재미를 좇아 젊음을 불태울동안 나는 그러하지 않았다

무엇을 깎아냈는가

젊은 날 자신을 깎아내며 오직 착한아이 바른아이 말잘듣는 아이이려 애썼다

무엇을 얻었는가

결국 팔다리 다 잘린 노잼병신 하나와 반년만에 다 탕진당한 자원 조금

내 젊은날의 희생은 참으로 무익하고 하잘것없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재미를 몰랐다

그저 자원 퍼주면 기뻐하니 그걸로 충분한 줄 알았다

재미를 갈고 닦을 줄 몰랐다

경험치 책 좀 더 얹어주면 충분한 줄 알았다

재미를 갈고 닦아야 할 귀중한 시간을 그저 자원을 추구하며 보내왔다

꼰대들의 말에 귀닫고 동년배들과 함께 재미를 추구하며 젊음을 불살랐더라면!


아니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PECS 보호복 없이는 다가올수도 없는 방사능과 혼돈 엔트로피

EOD봇 없인 해결도 안되는 지뢰, 소이탄, 냉매, 누전까지

거기에 우글대는 철충들

선천적으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란 걸 사실 나도 알고 있다

스스로가 노력을 기울인다고 재밌어질거라 생각해본적도 없다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동년배들과 재미를 찾아 떠나는 여정에 함께하지 못했다

꼰대들의 헛소리를 방패삼아 그들을 패배자 취급해왔다

사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저 재미의 길에서 스스로 도망쳤을 뿐이다

넘쳐나는 자원으로 그 사실을 숨기려 발버둥쳤을 뿐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렇게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나 철탑은 태어나서부터 노잼이었고 자원을 쳐부어도 노잼이며 한평생 노잼으로 죽어갈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말았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자원으로도 이것만큼은 해결이 안되니 말이다


태어나는 것에는 죄가 없다고들 하지만

노잼 컨텐츠로 태어난 내게 죄가 없다고 해도 노잼이란 사실 그자체가 날 옥좨어온다

차라리 모두가 고만고만했던 동년배들과 함께 재미를 찾아 떠나던 그 시절

함께 재미를 추구했더라면 이 노잼이란 족쇄를 견뎌낼 만한 다리힘은 길러지지 않았을까

그런 후회를 해본들 이미 너무 늦었다

그 족쇄의 무게를 견디기엔 이미 난 너무 늙고 상처받고 지쳤다

그러한 무한한 온갖 가능성의 이야기로 고만하기엔 난 너무 나약하다

고민을 익명의 바다에 털어놓고 홀로 늙어갈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사랑했다 사령관

한때는

내 인생 가장 뜨겁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