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낙엽이 지기 시작했다.

 여름 내내 푸르렀던 이파리들이 붉게 물들어, 이윽고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작전시기를 제외하곤 생활의 대부분을 심해에서 보내는 오르카 호에 있어 창밖을 볼 기회는 좀처럼 없던 일이다. 특히나 낙엽지는 풍경은 한정된 기회, 한정된 시간에 밖에 즐길 수 없는 특별한 이벤트다. 나 역시 자칭타칭 ‘오르카 호 이벤트의 황제’라 불리는 몸, 자연이 만들어준 이벤트를 놓칠 수 없어 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낙엽이 지는 이유는 이파리에 있는 영양분이 다해 엽록소가 파괴되고, 결국엔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라고 닥터는 설명했다. 하지만 하르페이아는 낙엽 지는 모습을 보면 쓸쓸해진다고 했다. 나무가 여름 내내 함께하던 가족을 떠나보내고 홀로서기에 도전하는 시기라나 뭐라나. 닥터는 “이래서 문과는 이해할 수 없어”라며 한숨을 쉬었지만, 확실히 가을이란 계절과 이별을 앞두고 붉게 물드는 나무의 이미지는 상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존재할 리가 없는 나의 감정모듈에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정박한 오르카 호가 가져온 가을 낙엽과 쓸쓸함이라는 미니 이벤트를 변명삼아 상념에 빠져있을 때, 사령관실의 문이 열렸다. 서류 더미의 저편으로 머리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보나마나 키가 작은 말괄량이 공주였다. 이윽고 총총걷는 소리와 함께 LRL의 모습이 보인다. 가방을 메고 온 걸보니 오늘은 학교가 열리는 날이었나보다.

 

 “크크큭... 인간, 여기있었군. 진조의 프린세스의 감은 틀리지 않았도다”

 “아니 대체로 여기에 있는걸”

 “흥, 알고 있어”

 

 LRL은 뾰로통하게 대답하더니 의자에 앉아있는 내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올라 앉았다. 나는 LRL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왼손으로 LRL의 허리를 살짝 감아 내 쪽으로 끌어들였다. LRL은 안정감이 느껴지는지 나를 돌아보며 “히히”하고 웃었다.

 

 “여기에 전세 내셨습니까 공주님”

 “권속은 짐의 인간의자이니라~”

 

 당연한 듯 대답한 LRL은 메고 있던 가방을 책상 위로 올려놨다. 그녀는 “오르카 스쿨”이라 적힌 가방에서 스케치북과 크레파스 세트를 꺼냈다.

 

 “숙제있었구나?”

 “크윽.. 일렉트릭 위치.. 그 마녀 녀석...”

 “선생님”

 “으으.. 알렉산드라 선생님 숙제가 너무 어려운걸...”

 

 LRL은 스케치북을 폈다. 마법소녀 모모가 그려진 화려한 색감의 스케치북 표지와 달리 내용은 백지 상태였다. LRL은 난감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작게 신음하고 있었다.

 

 “숙제 내용이 무엇인데 우리 프린세스가 이리 고민을 할까?”

 “소중한 걸 그려오래”

 “그래? LRL한텐 무엇이 소중한데?”

 “그걸 모르겠단 말이다..”

 

 LRL은 여전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손가락이 크레파스로 향하진 못하고 있었다. 표정은 볼 수 없지만 필시 고민 중이겠지.

 

 “친구들은 뭘 그린대?”

 “타치는 오렐리아를 그리러간다고 했다”

 “그래 둘은 친하니까”

 

 타치는 오렐리아를 보곤 ‘전생에서의 연이 느껴집니다, 마스터’라며 의미모를 소리를 했었다. 둘이 친하게 지낸다면야 다행이건만.

 

 “알비스는 부식 창고로 갔다. 권속이랑 함께 먹으려고 발할라 자매들이 주문한 스페셜 초코가 있다나. 안드바리는 씩씩 화를 내며 따라갔구”

 “엥? 그런 이야기 들은 적 없는데?”

 “11월 11일에 공개한다고 비밀로 하랬는.. 아! 방금건 비밀이다?!”

 

 당황했는지 허공을 교차하는 LRL의 오른손을 살며시 잡아주곤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턱이 정수리 닿는걸 느꼈는지 LRL은 말은 이어갔다.

 

 “코코는 나와 같이 고민하다가 지구를 그리겠다며 에이다한테 지구 사진을 보내달라며 교신을 보냈다”

 “스, 스케일이 크구나...”

 “에이다가 해.. 해상도?란걸 물어보니까 옆에 있던 후사르가 이상한 말을 하며 당황했다”

 “쉽지 않겠구나 거기도”

 

 LRL은 “이 몸의 지배를 받는 지구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니라”라고 답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더치는 풍선을 그린다며 제일 먼저 교실을 나섰다”

 “풍선?”

 

 이외의 대답이었다. 삶의 대부분을 갱도에서 보낸 더치걸한텐 소중한게 많을텐데. 하지만 LRL의 대답으로 나의 질문은 우문이 되었다.

 

 “키르케가 만들어준 풍선말이다. 분명 이름이 포니였던가...”

 

 “...분명 소중한거네”

 “풍선이? 아자즈한테 부탁하면 풍선으로 알바트로스도 만들어주는걸?”

 “알바트로스든 트리톤이든, 더치한텐 그 망아지 풍선이 제일 소중할거야”

 “흐음.. 그런가...”

 

 LRL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친구들이 무얼 그리는 지는 알고 있지만 결국 LRL의 답이 되진 못했기 때문이다. 자칭 진조의 프린세스는 “으음.. 으으음...”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권속인 내가 도움을 주어야겠지. 대신 그려줄 순 없어도, 해답이라면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고민할 필요없어. 지금 이 순간 제일 소중한걸 그려보면 되지 않을까?”

 “지금?”

 “그래, 지금. LRL이 좋아하는 드레곤 슬레이어 모형칼도 있고, 잘 때 껴안고 자는 곰돌이도 있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으음~”

 

 LRL은 오히려 더 고민에 빠졌다. 내 조언이 실패한 걸까.

 

 “아!”

 

 LRL은 무언가를 깨달았단 듯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곤 나를 쳐다봤다. 마치 라비아타가 욕탕에서 떠오른다며 유레카를 외친 닥터의 모습과도 같았다.

 

 “찾았다!”

 

 LRL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고는 곧장 크레파스를 손에 쥐었다. 백지 위에 동그라미가 그려지더니 몇 개의 작대기들을 그린다. 그리곤 그 작대기들을 하나로 연결하니 마치 발달린 허수아비 같은 것이 그려진다. LRL은 마음에 든 듯 ‘흐흥!’하며 콧김을 내뿜더니 다시 나를 쳐다본다.

 

 “봐바 인간! 인간을 그렸어!”

 “이.. 이게 나라고...?”

 “응. 왜 인간.. 이상해?”

 “이상이고 뭐고 넘어서, 내가 이렇다고?”

 “응.. 인간.. 싫어? 내가 그려서 기분나빠...?”

 

 초롱초롱하던 눈은 어디가고 금새 눈망울에 눈물이 차오른다. 나는 곧장 답했다.

 

 “아니야. 너무 기뻐. 이 권속은 몸둘바가 없습니다~”

 “그, 그렇지이..? 역시! 권속은 내가 소중하고 나도 권속이 소중한거야! 그럼 그렇지~”

 

 금방 기분이 풀어진다. LRL은 기분이 좋은 듯 백지 위에 덩그러니 그려진 두발달린 허수아비를 몇 번이고 바라본다. 하지만 이대로는 숙제라며 제출할 수가 없다. 이 세상 모든 아빠라면 똑같은 반응일 것이다.

 

 “그, 그럼 프린세스여.. 나 다음으로 소중한 권속은 누구인가~”

 “인간 다음? 음... 에이미 언니!”

 “그, 그래! 에이미 언니도 그려보자 그럼”

 “아, 알았어..!”

 

 LRL은 다시 크레파스를 손에 쥐고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그리는 모습이 사뭇 다르다? 노란 크레파스로 머리칼을 나름 예쁘게 그리고 에이미가 자주 입는 스커트도 신경을 써서 그린다.

 

 “저, 정성의 차이가 느껴지는구나 프린세스여...”

 “당연한 소리를 하고있어”

 “그래.. 그래야지...”

 

 이로써 LRL의 스케치북에는 여성과 허수아비가 그려지게 되었다. 여전히 숙제라고 내보이기엔 퀄리티가 너무 낮다. 뭐라도 더 그려야한다.

 

 “그럼, 에이미 언니 다음으로 소중한 사람은 누구일까?”

 “음...”

 

 LRL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고민하는 모습에 그만 숙제를 마무리시키고 싶었지만, 아빠된 마음에서 이대로 멈출 순 없다. LRL은 고민 끝에 작게 중얼거린다.

 

 “포, 폭력녀려나...”

 “아, 그리폰 말이구나”

 “내가 뭘 하려고만 하면 딱밤부터 먹이는 폭력녀다. 그러면서 무슨 가수를 하겠다며 얼굴에 화장은 그렇게나 하던지 원”

 “우리 LRL을 때리다니 아주 못됐네”

 “그러게 말이다. 권속이 그 모습을 밤에 보았다면 귀신인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쳤을 것이다”

 “하하... 그럼 그려볼까?”

 

 LRL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허수아비의 오른편 빈공간에 허수아비가 더 그려지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가슴을 표현했는지 몸통 부위에 수박이 두 개 추가된 점이랑 마귀할멈같은 얼굴이려나.

 

 “됐다.. 어때 권속?”

 “어.. 아주 똑같네...”

 

 그나마 스케치북에 셋이 그려지면서 최소한의 구색은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럼 마무리로 나무나 두 그루 그려볼까?”

 “나무..? 나무라.. 흐흠, 좋지. 영생을 사는 존재. 짐의 그림에 어울리도다”

 “그래. 창 밖에 나무들도 보이니까 따라 그려보자”

 

 나는 창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르카 호의 밖에는 붉게 타오른 나뭇잎들이 모든 걸 불살리곤 스러지듯이 나무에서 떨어져가고 있었다.

 

 LRL은 창밖을 보며 ‘흐흠..’이라 작게 되뇌었다. 이후 갈색 크레파스로 슥슥 그으며 몸뚱이를 그렸다. 그리곤 초록색 크레파스를 들어 나뭇가지 주변을 색칠하기 시작했다.

 

 “응? 밖에 보이는 나무는 붉은 색인데 초록색으로 칠하는거야?”

 “크크큭.. 뭘 모르는구나 권속이여. 바이오로이드는 수명이 길다. 게다가 권속과 함께라면 붉게 시들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아...”

 

 나는 작게 감탄했다. 내 마음을 알리 없는 LRL은 신나게 나무를 색칠하고는 외쳤다.

 

 “끝!! 덕분에 지옥의 과업을 완수했도다 권속이여”

 “장하다 내 딸”

 “딸이 아니다. 프린세스다”

 “그래그래 프린세스”

 

 LRL은 히죽웃으며 크레파스를 뚜껑을 닫으려 했다. 크레파스 통의 뚜껑이 정렬히 놓인 크레파스 위를 덮으려던 순간 LRL의 팔이 멈췄다.

 

 “이.. 인간...”

 “왜그래? 무슨 일이야?”

 “크, 큰일났다... 문제가 생겼다...”

 “문제?”

 

 “내가 없잖느냐!!”

 “아앗!!”

 

 LRL은 붉은색 크레파스를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에이미의 왼편 빈공간에 붉은 드레스가 그려지기 시작한다.

 

 “네가 주인공인데, 가운데가 아니야? 에이미와 나 사이에 그리면 돼잖아”

 “아직 그 자리에 서고 싶진 않다. 짐도 다 생각이 있느니라”

 

 LRL은 뜻모를 소리를 하면 스스로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다. 엉망진창인 그림이지만 LRL은 즐거운지 마법소녀 모모의 주제가를 흥얼거리고 있다.

 

 LRL이 그림을 마무리하곤 진짜로 끝났다며 크레파스 뚜껑을 덮으려던 무렵, 사령관실의 문이 열린다.

 

 “앗! 여기 있을 줄 알았다, 땅꼬마”

 “크크크.. 기동형인 주제에 여전히 느리군”

 “이게 진짜”

 

 머리 위의 고글이 인상적인 그리폰이 심술이 난 듯 다가온다. 쿵쿵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언젠가 보았던 괴수영화가 떠오른다.

 

 “사령관, 땅꼬마 좀 넘겨줘. 숙제를 시켜야하는데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요게 도망갔다니깐”

 “아 그 숙제...”

 “후후후.. 이걸 보아라 마녀할멈”

 “너 또! 응? 숙제 다 그렸구나?”

 

 그리폰은 ‘어디보자..’라며 그림을 들여다본다.

 

 “땅꼬마에, 이건 에이미 언니고, 이건 사령관인가... 푸훕”

 “감히 사령관을 보고 웃어?”

 “아, 아니.. 푸흐흐.. 잠깐, 이 마귀할망구 같은거는 뭐야?”

 “크크크...”

 

 LRL은 그리폰이 못말리겠다는 듯이 한손으로 머리를 누르며 얘기한다.

 

 “아아.. 이 얼마나 우둔한 여자인가... 스스로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너어!!”

 “아직도 짐의 걸작을 모르겠느냐...”

 

 “이건 ‘가족’이라 하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