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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땅에서 배로 몸을 옮겼던 이들이 다시금 발을 땅에 내딛는다.

모래사장에 곱게 새겨지는 발자국.

밀려오는 물살에 금방 지워질 얕은 흔적이지만 

이 섬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 쌓이고 쌓여 결코 지워지지 않는 굳건한 삶의 흔적으로 남겠지.

제2의 생을 펼치기에 부족함 없는 전망에 희망으로 찬 심장이 콩닥거린다.


"황량한 유배지에 몰아넣고 메말라 죽으라 하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헛된 기우였어"


"얘는 정말, 여기 사령관은 그럴 인간이 아니라잖아"


고이 담아뒀던 불길한 우려를 훌훌 털어내듯 내뱉는 PECS 출신 난민의 옆구리를 같은 처지의 바이오로이드가 팔꿈치로 툭 친다.

혹여 스파이로 경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소한 오해도 사지 않으려 몸가짐을 조심했고,

소문으로 듣던 최후의 인간이 과연 자신들을 어떻게 취급할지 알 수 없었기에 새벽까지 뜬눈으로 누워있는 나날도 있었다.

어렵사리 구한 영상자료에서는 아이돌 공연을 즐거이 만끽하는 다른 바이오로이드의 함성이 쏟아졌지만

이게 선동을 목적으로 교묘히 만들어진 결과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에.

오메가의 주장이 그러했고, 서슬 어린 경고와 위협 아래 바들바들 떠는 게 고작이라 탈출은 꿈꾸기 어려웠다.

최소한 본보기로 영상을 공유한 몇 명을 공개 처형하기 전까지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가능성에 목숨을 걸어보자며 뜻이 맞는 동지를 물색했고 행동으로 옮긴 게 얼마 전.

설마 올까 싶었던 오르카가 정말 나타나 구원의 방주로 이끌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포격을 간신히 뚫고 실내로 몸을 던졌을 때의 안도감이란.

긴장이 풀리자 또 다른 긴장이 다가와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과연 이 선택이 올바른 것일까, 또 다른 오메가의 밑으로 들어가기를 자처한 게 아닐까.

어쩌면 오메가가 천사로 느껴질 정도로 끔찍한 나날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 걱정은 그날 저녁 상상도 못했던 진수성찬을 받으며 와장창 깨져나갔다.

신선하고 따끈따끈한 온갖 진미, 이는 난민을 환영한다는 확실한 표현이자

동시에 오르카의 풍부한 재력과 다양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얼마 만에 느끼는 포만감이었던가.

그 뒤에 안내받은 숙소는 푹신한 이불이 손을 흔드는 아늑한 쉼터 그 자체였다.

그때 확신했다.

여기 사령관은 믿을 수 있다고.

우리를 존중하고 친절히 대해준다고.

하지만 편안한 나날이 하루 이틀 이어질수록 그 확신이 조금씩 좀먹기 시작했다.

전투와 내정 등 저마다의 자리에서 가치를 빛내는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들은 그저 식객, 직설적으로 말하면 밥벌레에 불과했다.

차라리 일이라도 시켜준다면 밥값이랍시고 열심히 했겠지만 아무런 명령도 지시도 없이 뒹굴거리다 하루가 지나갔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고, 사흘은 일주일을 훌쩍 넘어감에 따라 불편한 평안은 형태가 차츰 무너져내린다.


'제발 아무 일이라도 시켜줘...불안하단 말이야'


참다 못해 사령관을 찾아가 당돌하게 말을 꺼내봤지만 밝은 미소로 화답하며 걱정 말라고, 

너희에겐 너희에게 어울리는 결말이 있을 거란 알쏭달쏭한 대답만 들을 뿐이었다.

어울리는 결말이라니? 보통 이럴 때는 역할이 있을 거라 하지 않나?

사령관이 문학적 소양이 있는지,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게 피폐함을 안고 시간을 보냈다.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세 그릇씩 먹었다.

맛있었거든.

그러다 드디어 그 결말이라는 것에 당도하니 해방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휴양지 수준의 섬인 것을 보아 상상력이 폭주해 그렸던 '적당한 무인도에 몰아넣고 몰살' 이라는 전개는 확실히 아니다.

그걸로 충분하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멀지 않은 곳에서 사령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키잉!"


"으악, 귀 따가워"


갑작스래 꽂히는 날카로운 금속음에 몇몇 바이오로이드가 양 귀를 움켜쥐며 괴로워한다.


"뭐야, 망가진 거 아니지?"


"잠시만요, 주파수 설정을...됐어요"


아자즈가 솜씨 좋게 미니 알바트로스를 꼼지락거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이크가 맑고 청량하게 사령관의 목소리를 퍼뜨린다.


"자, 모두들 다시 한번 환영해. 섬이 참 아름답지?

오르카는 커다란 비전을 품고 있어. 지금 겪는 혼란을 종식하고 세상에 평화가 다시 찾아오면 삶을 재건해야겠지.

그러기 위한 청사진을 미리 그리는 건 참 멋진 일일 거야.

그리고 마냥 배만 타고 지낼 수도 없고. 기존에 곳곳에서 땅을 개척하고 일군 대원들은 알 거야.

얼마 전 철충의 갑작스러운 공습으로 기껏 가꾼 거점들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어.

너희를 잃지 않았으니까. 새로운 동료를 얻었으니까.

요안나 아일랜드는 장소가 아니야. 너희가 있는 곳이 요안나 아일랜드지.

바로 이곳, 아름답고 풍족한 천혜의 섬을 새로운 요안나 아일랜드로 삼고 

원하는 건 뭐든지 누릴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의 낙원으로 선언하겠어!"


야심찬 발표가 증폭되어 멀리 퍼져 나간다.


"원하는 건 뭐든지...."


"바이오로이드의 낙원...."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하나둘 말을 되뇌며 침을 삼킨다.

눈동자의 빛이 사라지며 홀린 듯 멍한 것도 잠시, 그게 어떤 의미인지 곱씹으며 열렬한 환호가 잇따른다.


"와아아!"


"반응 좋은걸. 이래야 발표한 보람이 있지"


만족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는 사령관이 흡족해한다.


"요안나, 무릎을 꿇도록"


엄숙한 선언을 듣고 떨리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고 있던 요안나가 정중히 사령관 앞에 무릎 꿇는다.


"기사의 서약으로써 이 섬을 새로운 요안나 아일랜드로 명명하고 그 총책임자로 삼으니 

기존처럼, 아니 기존보다 한층 뜨거운 충성심과 결과로 보답하길 바라"


"...이런 과분한 자비라니, 기필코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주군의 기대에 부응할 것이네"


한번의 실패를 겪었고 만회할 기회를 꿈꿨다.

그 기회가 이렇게 빨리, 화려하게 찾아온 것을 운명이라 느끼며 요안나는 굳게 다짐했다.




"자, 부지런히 움직이게나!"


요안나의 열정적인 지도 하에 수많은 이들이 개미떼처럼 일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풍족한 자원을 자랑하는 환경이라 해도 기반시설을 올리고 인프라를 갖추지 않으면 그저 허울일 뿐.

아늑한 터전을 위해 오르카는 섬을 입맛대로 다듬는 일에 착수했다.

우선은 모든 걸 관리하고 통제하는 중앙 시설부터.

집단의 규모가 클수록 이를 아우르는 권위가 중요하기에 평상시에는 요안나가, 

이따금 오르카가 방문하면 사령관이 머무를 건물의 뼈대가 착착 올라가고 있었다.


"드디어 밥값을 하니 마음이 편하긴 한데, 힘들어...."


"얘는 정말. 아까는 뭐라도 하면 좋겠다며"


투닥거리는 두 난민 출신을 향해 한 바이오로이드가 씨익 웃으며 뭔가를 내민다.


"응? 이건 뭐야?"


"구멍 뚫린 거 보이지? 마셔봐"


솜씨 좋게 손질한 코코넛을 받아들고 마시는 꼴깍거리는 소리가 따온 이에게 성취감을 안겨준다.


"와, 맛있어! 이런 게 이 섬에 있는 거야?"


"그래, 온갖 과일이 가득하더라고. 당장은 땀 흘리겠지만 완성만 하면 쾌적한 건물 안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거야"


"헤헤, 그럼 난 내 전용 오두막을 하나 조그마하게 지어야지!"


언제 그랬냐는 듯 활력을 찾고 등에 짊어진 나무토막을 옮기는 동료를 바라보는 다른 바이오로이드가 대신 감사를 표한다.


"고마워요, 저 애는 워낙 기분이 왔다갔다해서...."


"아니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걸"


시원시원하고 붙임성 있는 태도, 능숙하게 코코넛을 다듬는 솜씨. 눈앞의 바이오로이드에게선 깊은 내공이 느껴졌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나? 보다시피 기종은 티에치엔. 

전투보다는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는 걸 원해서 섬을 개척하며 일했어. 거기서 많은 걸 익혔고"


과거를 회상하는 눈빛이 우수에 젖어있다.


"그렇군요...이런 말씀 드려도 되나 모르겠지만, 그 섬 일은 안됐어요"


"응? 아니야"


위로의 말을 조심스럽게 전해봤지만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두른다.


"확실히 거기에 지어놓은 시설과 들인 정성이 좀 아깝긴 한데, 어차피 그건 다시 지으면 그만이니까.

주인도 말했잖아.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우리라고. 양팔이 있는 이상 요안나 아일랜드는 얼마든지 재건할 수 있어"


"요안나 아일랜드...?"


씨익 웃으며 저 위에서 줄곧 지시하는 검은 피부의 기사를 가리킨다.


"저 바이오로이드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거야. 아주 충성스럽고 책임감 강한 친구지. 

이름만 들어선 독재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 전혀 없이 모두가 행복하게 지내는 좋은 곳이었어"


저 뜨거운 모습은 자신이 머물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채찍질하는 게 아니라 대의를 위한 것이었구나.

잠시나마 편견을 품었던 스스로를 반성하며 코코넛의 신선한 풍미를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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