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마법사






* * *





"이젠 아주 지각이 일상이 되셨어? 됐고! 아르망 씨! 어제 내가 결재받을 서류들 모아서 올리라고 말 안했어?"


뭐라는 거지.


"죄송합니다."


나는 또 뭐라는 거지.


"업무도 날림으로 한다며? 내내 멍때리고 앉아있다가 퇴근시간되면 아무도 모르게 휙 사라진다던데? 그럴거면 회사에는 왜 와?"

"죄송합니다."

"그게 대답이야? 죄송한거 알면 왜 오냐고! 아르망 씨! 지금 내 얘기 듣고있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 그냥 전부 죄송해요. 지각을 해서 죄송하고 일을 못해서 죄송하고 당신이 지금 계속 나를 붙들어두면서 무엇을 퇴근 후에 같이 있을 구실로 삼을까, 대가리를 굴리고 있는 걸 아는 것도 죄송해요. 한 두잔 넘겨갈 수록 몸이 달아오르면서 의식은 멍해질 그 때를 노리는 거겠죠. 얼큰하게 취해 알싸한 냄새를 뿜어대는 숨결을 교환해가며, 쓸 일도 별로 없을 그 물건을 제 몸으로 적시고 싶은 거겠죠.


다 알아. 그 욕망에 답해줄 수 없는 것도 죄송해요.


그나저나 저는 왜 이곳에 있는걸까요? 제 안에 뭘 채워넣으려고 이 지긋지긋한 곳에 찾아온 걸까요? 여기있는 인간들이 줄 수 있는 건 술이나 담배연기 정도인데. 그런 걸로 깊숙한 곳에 생긴 구멍을 만족시킬 수는 없어요. 날선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질질 흘리는 구멍은 좀 더 다채롭게 반짝이는 것을 원합니다.


회사에 온 이유야 별 거 아니겠죠. 그저 2년의 관성이 빚어낸 의미없는 몸짓이었던 겁니다.   


지적받은 그대로 자리에서 내내 멍하게 있다가 퇴근했습니다.

송년회 자리에 없었으니 오늘 술자리를 갖자는 그 더러운 권유들에 힘겹게 미소지어주고서요.  


세상의 종말과도 같던 폐하의 죽음에도 아랑곳 않고 2021년, 아니, 그 죽음으로부터 1주가 지난 2022년의 세계는 무탈하게 톱니바퀴를 돌려가고 있습니다. 그 어느 톱니바퀴에서도 자그마한 균열이나 세월에 따른 변색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그것을 종말이라 받아들인 것은 저 뿐인가 봅니다. 이제부터 그 종말 속에서 넌 외톨이야, 라고 낙인을 찍혀버린 것처럼.


퇴근 길에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깔끔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그제야 저는 제 모습을 의식했습니다.


스모키 스타일의 메이크업을 한듯 눈밑은 꺼멓고 좀 더 아래엔 기미가 낄 낌새가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피부가 퍼석퍼석합니다. 미용에 신경 쓸 틈은 없었어도 유지해왔던 머릿결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머리는 한맺힌 원령처럼 부스스하고 갈라져있습니다. 쇼윈도에 비친 그런 제 모습은 좋게 말해도 남 앞에 보일 꼴이 아닙니다. 이런 상태로 회사를 오가고 바깥을 활보했다니, 폐하께서 아셨다면 쓴소리를 하셨을 겁니다.


시각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퇴근 길의 풍경을 온전히 시야에 담을 수 없었지만, 문제없이 집에 도착했습니다. 


지나치게 방치된 제 외모만큼 지나치게 방치된 방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악취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저 구석 한가운데엔 반쯤 흘러내린 크리스마스 케익이 있고 그 옆에는 옷가지가 쌓여있습니다. 새해가 되어 구입 한 남성용 겨울 옷. 기분내서 한 번 사봤던 겁니다. 입어주실 분은 이미 저세상으로 가셨지만요. 먼저 떠났던 반쪽과 함께 영원히 계속 될 영원한 허무를 영위하시려고요.




마지막으로 언제 설거지를 했는지, 옷을 개었는지, 방바닥에 걸레질을 했는지 몰랐습니다. 옷도 벗지않은채 이제는 제 것이 된 매트리스 위에 몸을 뉘이고 이불을 몸에 말았습니다. 그대로 방 여기저기를 굼뱅이 마냥 굴러다닙니다. 싱크대, 세탁실, 매트리스, 협탁, 냉장고… 방 한바퀴를 가늠할 요소들은 이 정도 뿐이라 다 구르고 나면 다시 매트리스로 와 구릅니다. 그렇게 수어번 반복하고 나서야 천장을 똑바로 마주보고 누워있을 수 있습니다.


내일부터는 회사에 나가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저는 그 동안 결여되어있던 원초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평소엔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공원을 새벽부터 찾아가 차분하게 산책합니다. 공원으로 오가는 길에 남성 옷가지를 하나씩 버립니다. 돌아오는 길에 장을 보고, 무심코 구입한 레시피를 펼쳐 저라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요리들에 도전했습니다. 요리를 다 만들면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남겨두고서 집앞의 회색이에게 가져다줍니다. 회색이는 제가 가져다 주는 요리라면 가리지 않고 모두 먹어줍니다. 


만들게 된 요리의 종류가 12가지가 넘어간 것에 비례해 벽을 수놓은 폴라로이드 집게줄도 길쭉해져 갔습니다. 밑쪽 여백에는 요리를 만든 날짜와 먹어줬다면 기뻤을 것 같은 진짜 동료들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샬럿, 뽀끄루, 백토, 모모, 카엔에 제로… 작은 꼬맹이들 여럿… 실가락 늘어뜨리듯 폴라로이드를 손으로 훑고 샤워기 아래에 한 시간 이상 서있습니다. 보일러가 웅웅대는 소리가 화장실 외벽을 뚫고 들려옵니다.


직접 만든 요리로 식욕을 채우고, 평균적으로 갖던 수면시간보다 2시간 더 자는 것만으로도 혈색이 돌아왔습니다. 제가 거울을 보고 안 것은 아니고, 아랫층에 사시는 할머니께서 그렇다고 하길래 스마트폰으로 확인해 봤습니다. 과연. 바이오로이드의 우수함이란. 이것을 좋아해야 하는지 어때야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어서 보이는 그대로 생각했습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만들었던 요리를 가지고 계단을 내려가 회색이를 찾았습니다.

평소라면 제가 다 내려오기도 전에 헌옷수거함 근처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데, 그 날은 제가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면서 눈사람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날씨는 흐리고, 이번 겨울 중 가장 추워 뼛속까지 시렸습니다.

눈사람 하나를 다 만들었는데도 회색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해 연신 회색이를 불렀는데도 회색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아랫층 할머니가 다가왔습니다.


아무 말 없이 제 손을 끌고 가신 곳에는 옆으로 누워있는 회색이가 있었습니다.

외상은 없으니 인간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할머니가 제멋대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딸이 알려준건데, 고양이는 말이지. 죽을 때가 되면 홀연히 사라진다고 해.

자신의 마지막을 알리고 싶지 않은건지, 시체가 된 모습이 추할 거라 생각하는 건지, 생전에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이에게서 최대한 멀어진다나 봐. 쯧, 그런데 여기 주차장 한구석에 있다는 건, 이 건물의 누구도 소중하지 않았다는 거겠지.

진짜 소중한 녀석은 저기 어디 멀리에 있나. 그렇게나 올 때마다 챙겨줬는데.

학생. 학생도 이제 더 이상 밥 가지고 나올 필요 없어. 매일 챙겨주던 은혜도 모르고 여기에 나자빠져 있잖아."         


얼마남지 않았을 네 앞날이나 신경쓰지그래,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습니다. 세상에는 모른 채 떠나보내고 싶은 것도 있으니까요.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폐하. 고양이 같은 면이 있으셨군요.

귀여우셔라.


물론 저를 아르망이 아니라 콘스탄챠로 여기셨으니 그렇게 떠나신 거겠죠.

유서에선 콘스탄챠를 이미 떠나보내신 주제에.

제정신이 아니셨나봐요.




"이게 뭐에요?"


폐하께서 떠나시고 딱 한 달이 된 날, 남자가 찾아와 불쑥 손을 내밀었습니다.


"당신의 폐하가 남긴 유품. 당신이 가지고 있어야죠."


작은 케이스, 안에 든 것은 하얀 진주반지입니다.


"됐어요."


딱히 폐하께서 제 앞으로 남기신 것도, 원래부터 제 물건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맡을 이유 따윈 어디에도 없습니다.


"됐기는. 여기다 둘게요." 멋대로 들어온 남자가 협탁 위에 유품을 올려두고 나가려다가, 다시 뒤돌았습니다.


"내가 한 말 기억 안나요?"

"무슨 말?"

"당신이 산에서 내려가기 전에 내가 했던 말."

"안나요."

"…음. 그래요?"

"그래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 때가 농담할 상황이었나요?"


그렇군요. 라고 나직이 중얼거린 남자는 한마디를 더 남겨두고 방을 나섰습니다.


"시간되면 거울 좀 봐요."


'시간이 되면 거울 좀 봐요.'


그 말에 그런 내용의 문자를 받은 적이 있었다는 걸 기억했습니다. 아마도 무단결근을 결행한지 1주일 째 되는 날이었을 겁니다.


스마트 폰을 키고 확인해봅니다.


역시나. 임 대리로부터 '어떤 뜻인지는 알겠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걱정하는 건 아니고, 시간나면 거울 좀 봐요. 건강하고.' 라는 문자를 3주 전에 수신 했습니다. 이 문자의 내용이 진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나 저를 못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여자였으니까요. 조촐한 우월감이 빚어낸 문자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남자가 떠나면서 남긴 말과 문자의 내용을 머릿 속에서 굴리다가 화장실의 세면대 앞에 섰습니다.

어디에서든 무기로 사용했었던 그 미소를 지어봤습니다.


미소에는 미소다운 구석이 하나도 없었고, 얼굴은 지독하게도 공허해서, 마치 회색이가 떠났던 날 만들었던 눈사람 같았습니다.

그것은 머지않아 다가올 봄 속에서 녹아내려 일그러진 미소를 띠우고 봄의 전령에게 잡아먹힐 피식자처럼 보였습니다.

이상하진 않습니다. 마음이 메마른 인간은 메마른 미소 밖에 지을 수 없는 겁니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 몸을 구석구석 씻고 폐하처럼 매트리스 위에 누웠습니다.

지금까지 보낸 시간들을 반추하고,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폐하께선 한 달 전에 죽으신게 아니라 그보다도 더 전에 죽으셨음을.

소풍을 나갔던 동산에서 이미 명을 다하셨음을.


모 책의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누구든 태어나려하는 자는 세계를 부수지않으면 안된다, 라는.


그 구절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자세히 모릅니다. 정신적인 부분의 성숙 혹은 향상이란 의미와 통한다고만 짐작할 뿐입니다. 뭐가 됐든 심오한 의미 따위 모조리 집어치우고 그 구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봤습니다. 입맛대로 해석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결론 내렸습니다.


저와 폐하는 하나의 세계를 부수는 것만이 아니라 시간 마저 무너뜨리고 새로이 기회를 부여 받은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었죠.


한심한.


하나의 세계를 부수고 새로운 세계로 고개를 들이밀었다고 해서, 그 세계가 이전의 세계보다 더 나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데.


애초에 어떻게 부술 수 있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고 그런 바람을 가지게 된 계기부터가 불순하기 짝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콘스탄챠가 아니면 안되는 폐하의 곁을 저 따위가 지켜봤자, 함께 해봤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던 겁니다.


맙소사. 저는 이제껏 뭘 위해 살아왔던 걸까요?

이 매트리스 위에 있던 것은 폐하가 아니라 진즉에 시체가 되어버린 폐하였던 '것' 이었습니다.     

 

이대로 있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번 더 몸을 깨끗히 씻고 스마트폰으로 헤어샵에 예약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가장 비싼 곳입니다. 돈이라면 썩어나고 딱히 쓸 일도 없습니다. 찾아간 샵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서비스를 다 받았습니다. 제 외모에 경탄한 디자이너가 서비스하는 내내 새된 목소리를 울려대서 시끄러우니 조용히 하고 빨리 끝내기나 하라고 윽박 질렀습니다. 이게 효과가 있었는지 안내받은 시간보다 30분 빨리 샵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차려입은 사무용 정장 위에 걸친 퍼프코트의 앞섶을 여미고, 회색이가 있을 곳에 찾아갔습니다.

옆으로 누운채 회색이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칼날같은 밤바람이 푸석해진 회색이의 털을 세우고 내리기를 반복했습니다.


가사없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무선 이어폰을 귀에서 뗐습니다. 요샌 통 이런 음악만 들었습니다. 가사는 살아가면서 저절로 채울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었는데, 지금은 믿지 않습니다. 다 헛짓거리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가는 한숨을 뱉었습니다. 겨울에 움츠러든 입김이 세찬 바람에 허공으로 쫓겨납니다.


숨을 거두고 가지런히 누워있는 회색이가 담긴 풍경을, 저는 가만히 서서 관찰 했습니다. 그 풍경에 담긴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요.    

몇 분이나 관찰하고 있었을까요. 밤이 깊어져감에 따라 서서히 시야가 한정되어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져 갔습니다.

결국 뭘 위해 이렇게 한껏 꾸미고 나온건지 알 수 없어졌을 때, 순간적인 번뜩임이 있었습니다.

오랜 난제를 단박에 풀어낼 해답을 발견한 듯한, 그런 번뜩임이었습니다.


그 번뜩임 사이를 비집고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잠깐만. 정말로? 그게 맞아?


맞고자시고 간에 번뜩임은 너무나 강해서 목소리를 단박에 지워냈습니다.

이럴 수가. 왜 이제야 알았을까?


아뇨. 이제야가 아닙니다.

실은 몇 차례나 떠올리던 것이었습니다. 충동과도 같이 찾아오던 것이었습니다.


그냥 보면 이 고양이는 천수를 다해 죽은 것 처럼 보입니다. 그 노인네도 그런 식으로 말했었죠.

하지만 아닙니다. 이 고양이의 사체를 품은 풍경에 심적으로 가장 근접한 지금의 저라면, 알 수 있었습니다. 


회색이는 선택한 겁니다.


이 잿빛 겨울을.


매미에게 가을은 마땅히 찾아올 사신이듯,

눈사람에겐 봄이 자결수단이듯,


회색이에겐 겨울이 가장 떠나기 좋은 계절이었던 겁니다.

떠난 이유야 여러 사정이 있겠지요. 저처럼요.




얌전히 기다릴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는 걸, 저는 깨달았습니다.








* * *








상행선 지하철을 타고 네 정거장 지나서 내린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자 부슬부슬 이슬비가 내렸습니다.

목적을 수행할 최적의 장소에 도착했을 때엔 장대비로 변신해버려서 근방의 일대 전체는 빗줄기에 난타 당하는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재건축을 위해 반쯤 무너진 5층 빌라는 베란다가 없습니다. 외벽이 훤히 드러나있지요. 높이가 좀 애매한게 아닌가 싶어 밑을 내려다보니 콘크리트 파편 더미들이 피라미드 형태로 무질서하게 쌓여있습니다. 군데군데엔 고사리같이 뻗어나온 철근도 보입니다. 혹시 운이 안좋아 살아남을 가능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머리부터 낙하한다면 확실하게 저세상으로 갈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듭니다.


그나저나 겨울에 장대비라니. 마치 세상을 구성하는 톱니바퀴가 엇나간 것만 같습니다. 아무래도 요 몇 주간 톱니바퀴가 무탈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나 봅니다. 살짝 진심섞인 웃음이 나왔습니다. 얼마 만에 진심으로 웃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런 결단을 내린 것에 세계가 공감한다는 듯, 지금 이 순간만 톱니바퀴를 삐딱하게 돌려주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것이 기뻐서 무심코 소리내어 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잘 보면, 그것은 제게 공감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하필 이럴 때에 톱니바퀴가 엇나간겁니다. 순백을 내려줄 아량은 베풀 생각이 없다는 거겠죠. "너 같은 년한테는 장대비가 어울려. 그 누구도 네가 떨어지는 걸 볼 수 없어. 머리가 박살나면서 울리는 그 역겨운 소음도 들을 수 없어." 이렇게 비웃고 있는거죠.


그렇다고 한다면 저도 비웃어 주겠습니다. 지금은 그 누구에도 져줄 생각이 없으니까.


확실히 하자고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허공에다가 고해성사를 시행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폐하가 품으셨던 사랑이 완전히 파멸해버리기를 바랐습니다.

그 바람이 이루어진 듯, 폐하의 반쪽은 처참한 끝을 맞이했습니다.

그 반쪽이 죽음과 동시에 폐하도 죽어버리셨습니다.

그것에 온전히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제 모든 부분이 슬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던 주제에,


이미 죽어버리신 폐하께 사랑을 요구했습니다.

직접 말하지 않았어도 사랑을 요구했습니다.

추태라는 것을 압니다.

따뜻한 추억 한 조각 조차 바라선 안됐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저는 바랐습니다.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알면서도 바랐습니다.

그 죄를 품고, 이제 떠나고자 합니다.


끝입니다.


홀가분함 따위는 티끌만큼도 없었습니다.


밑을 내려다봅니다. 콘크리트 더미가 언제든 뛰어내려도 좋다는 듯 손짓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수어번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고서 허공의 한 점을 응시했습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건지 장대비는 그칠 기미를 안보입니다. 짐작컨대, 제가 떨어져 머리통이 박살남과 동시에 비는 멎겠지요.

나쁜 놈 같으니.


뭐, 좋습니다. 나머지는 본능을 억누르고 두 발을 한 발자국씩만 앞으로 내밀면 됩니다.


저는 질끈 눈을 감고, 이대로 앞을 향해, 찾아올 허무에 온 몸을 맡기기 위해,


"크흠."


……잘못들은 걸까요.

헛기침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 혹시 방해 했나요?"

"…"


빌라의 거실 벽에 삐딱하게 기대어있는 남자와 눈이 맞았습니다. 

다시 허공에 고개를 돌려 흠뻑젖은 얼굴을 문지르고 남자 쪽으로 몸을 돌렸습니다.


"왜 왔어요?"

"ㅋㅋㅋ 어떻게 알았어요? 가 아니라 왜 왔어요 에요?"

"어떻게 알았어요?"

"따로 알아보지 않아도 알겠던데요? 당신 표정에 그렇게 쓰여있었니까."

"왜 왔어요?"

"저번에, 당신이 말했잖아요. 모른다고. 그래서 다시 알려주러왔죠."


벽에서 몸을 떼고 남자가 다가옵니다. 저는 이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말을 뒷걸음질로 대신했습니다.


"나 원, 그런 짓을 해서 어쩌겠다는건지. 아르망, 당신의 폐하랑 다시 만날 수 있다니까요?"


그 한마디에 가슴 깊은 곳에서 격랑이 일었습니다. 품었던 모든 감상과 감정들이 일거에 휘발되어버렸습니다. 


"…다시." 다시 말해 봐. 라고 말하기 전에 그가 선수를 쳤습니다.


"만날 수 있다고요."

     





* * *






"이야. 술에 취해서 난리야, 자살을 해서 난리야, 좀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전혀 없었네요?"


키득거린 남자는 무릎에 올라온 새하얀 고양이를 지분거리다가 젖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쳤습니다.

찾은 곳은 제 집과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양이 카페였습니다. 남자가 소유한 매장이라는 듯 합니다.


"우리, 서로를 인지하고서 2년. 이제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겠네요."


턱시도 무늬의 고양이가 기웃거리며 저를 관찰합니다. 회색이가 생각나 서둘러 쫓아내려 했습니다.


"포이한테 그러지마요. 나 외엔 험하게 구니까."

"…포이?"

"응. 포이. 그리고 얘는 페로. 어때요? 당신이 아는 그 고양이 아가씨들이랑 닮았죠?"


두 고양이 모두 오드아이라는 점은 닮았지만 그 외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지금 저는 뭘 태연하게 진짜 고양이와 지금은 죽어버린 여성들과의 유사점을 찾아내려 하는 걸까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폐하를 뵐 수 있다는게 무슨 뜻이죠?"

"으응? 말 그대로의 의미인데?"


어느새 남자의 손에는 강아지풀 장난감이 들려있었습니다.

휘적거리는 강아지풀을 잡아채려는 고양이 두 마리가 진심으로 이뻐 죽겠다는 듯 웃으면서,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습니다.     


"급한 건 알겠는데요. 대화란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버리면 상대입장에선 맥빠지거든요. 서운할 수도 있어요."


더 이어질 말허리를 끊었습니다.


"내가 지금 한가하게 당신따라 고양이랑 놀러온 줄 알아요? 잔뜩 신경 끌어서 방해했으면 바로바로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야?"

"오우야… 당신 진짜 아르망 맞아요? 으음… 요 2년이 꽤 고달팠나?"


진짜 제가 뭔지는 이제 알 수 없어졌습니다. 추기경으로서의 아르망은 오래 전에 제 손으로 죽였으니까요.


이래서는 대답다운 대답을 들을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남자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살피고서, 시간을 들여 신중히 할 말을 고르고, 내가 원하는 답을 이끌어 낼 질문이 무엇인지를 가늠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남자는 고양이 두 마리를 데리고 촐싹대거나 껴안는 등 신경을 거슬리는 짓만 골라서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 시간여행자라고 했지."

"응응. 그랬죠."

"믿어도 돼?"

"안믿으면 어쩔건데 ㅋㅋㅋ?"


씨발. 

안 돼요. 화내선 안 됩니다.


"증명 해."

"오케이."


대수로운 것도 아니라는 듯 남자는 고양이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찡긋 오른쪽 눈을 윙크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


"봤어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10초도 안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방금까지 강아지풀을 들고있던 손에는 흙으로 빚은 토기 같은 것이 들려있었습니다.    


"일주일간 선사시대에서 머물면서 가져온 거에요. 믿을지 말지는 당신 몫이지만. 그나저나 당신한텐 몇 분이었어요?"

"……믿을게요. 그리고 몇 분이 아니라 몇 초였어요."


물론 저 토기가 진짜 선사시대의 물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반적이라면 가짜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히 지금 이 남자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그 가짜일지도 모르는 토기를 고양이들의 새 장난감으로 삼았습니다.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이 점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아휴… 그래요. 표정이 영 탐탁치않지만 당신이 믿겠다면 믿는거겠죠. 자, 그렇게나 본론을 원하시니 당신 얘기를 들어볼까요."


어쩌다 이 쪽에 오게 됐어요? 라고 남자는 물었습니다. 그 어떤 질문보다 가장 먼저 받았어야 할 질문을 이제야 받은 것 같아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 때의 기억은 단 하나도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는 터라 저는 시간을 들여 차분히 설명했습니다.


폐하께서는 하우스 키퍼 님만을 진심으로 사랑하셨던 분이라는 것. 

소풍을 가졌던 자리에서 그 하우스 키퍼님이 사망하셨던 것.

완전히 망가져버리신 폐하께서 스카이나이츠의 처형을 명하고 주방장 님이 자결하신 그 날, 바닷 속에서 철충이 습격해온 것.

그 감압실에서 별의 아이와 마주한 직후, 눈을 떠보니 2019년이었던 것.



"……비슷하네."

"네?"

"아, 아뇨." 남자는 뭔가를 황급히 감추듯 고개를 젓고 말했습니다.

"어휴. 처형이라니. 무섭네.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도 그렇고 철충이 바닷 속에서? 거기에 별의 아이? 놀랍네 놀라워."


말을 끝내고나니 기운이 빠져서 포이에게 무릎을 허락하고 말았습니다.

네가 뭘 해야할지 알지 않느냐는 눈빛으로 보기에, 머리부터 등까지 떨어지는 매끄러운 라인을 조심조심 쓸어내려줬습니다. 

   

"저기… 그러니까…" 말문이 막힐 것만 같은 것을 이겨내고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이 시간여행자라면…"


"ㅋㅋ 150년 후의 시간대로 데려가줄 수 없느냐고 묻고 싶은거죠?"

"네."

"급하긴. 알았어요. 결론부터 말해줄게. 그런 식으로는 못 도와 줘. 시간여행장치는 1인용이거든. 여기 팔목에 고무밴드 같은거 보여요?"


"뭐?"

"거 참 이거 보라니까. 아, 도와줄 수 있었더래도 안 도와줬을 거에요. 이미 많이 도와줬잖아요?"

"…그 서류들?"

"응. 서류들. 여기서 살게 해줬잖아."


그게 무슨 도움이 됐다고? 폐하가 이미 2년 전에 죽어버렸던 걸 안 이상 아무 의미도 없어졌는데.


"내가 왜 그런 식으로 밖에 도와줄 수 없는지 모르겠어요?"

"…바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맞아요. 이거 1인용이라 다른 사람까지 데려가려고 하면 조각나버려요. 당신의 폐하를 뵈기는 커녕 잘게 토막이 나버린다고."

"그럼… 그러면… 당신이 말한 폐하를 뵐 수 있다는 말은…"


대화가 여기까지 오니 남자의 대답을 짐작 할 수 있었습니다.


"150년을 고스란히 맞으면 뵐 수 있단 소리죠. 바이오로이드 좋다는게 뭐겠어 ㅋㅋ? "

"하…"

"난 분명히 당신이 양자역학이니, 할아버지의 역설이니, 가변역사설이니, 멀티버스니,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 것들을 들이밀면서 내가 한 말이나 정체를 거짓으로 규정하려고 들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폐하를 뵐 수 있다는데 그딴 걸 따지고 앉아있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네.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설령 그랬더라도 거짓임을 까발리려고 하기보다는 진짜라고 믿고 싶기에 그런 질문들을 했을 겁니다. 거짓이라는 여지를 모조리 없애버리기 위해서.


"결국 이번에도 대화다운 대화는 못했네요. 난 좀 더 느긋한 주제의 느긋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원하는 대답과 원하던 부분만 콕 찝혀 거절당하니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걸 알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저를 붙잡지 않았고, 말없이 카페에서 따라나와 한적한 골목까지 뒤따라 왔습니다.


"지금 바로 당신의 폐하한테 데려다 줄 수 없다 뿐이지, 도와주긴 할 거에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원하는 대답을 거절 당한 이상, 다른 어떤 방식으로 도와준다더라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요 몇 년간 그랬듯, 다시 방어기제를 펼쳤습니다. 그 어떤 남성들을 상대할 때 보다도 몸을 더 웅크리고 한껏 부풀린 가시를 내밀었습니다.


제게 깃든 기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취직할 지도 틀렸고 말이죠. 뭐, 도움은 될 거에요. 폐하를 만나기까지의 그 시간을 고스란히 받아낼 생각이라면."

"…뭘 하려고요?"

"도와준다니까? 걱정 마요. 이상한 짓 안해요.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그럼, 도움을 받고싶거든 방금 그 카페로 찾아오면 돼요. 1주일 내로."


거기까지만 말하고 남자는 "에밀리."라고 속삭이듯 허공에 말했습니다.


에밀리? 제가 아는 그 에밀리일까요.

실험 개체.

단 하나만이 존재했던 유일 개체.

백지 같던 소녀.


남자의 부름에 나타난 건 소녀가 아니었습니다.


"제녹스…?"

"ㅋㅋㅋ 나한텐 에밀리지만요. 그래도 알고 있네요? 제녹스를?"

"왜 제녹스가 아니죠?" 아무래도 좋은 걸 저는 굳이 물어봤습니다. "에밀리라는 개체가 쓰던 무기이름이 제녹스에요. 지금 당신이 부른."


"어디서 나타난 건지는 안궁금해요?"


그러고보니, 어디서 나타난 걸까요. 남자의 부름에 '에밀리'라고 불린 제녹스는 남자의 곁에서 느닷없이 나타났습니다.


"내가있는 공간 자체가 가방이거든요. 봐요. 손 들어간 거. 잘 봐야 돼요. 얼핏보면 손이 사라진 걸로 보이니까."

"…"


뭐라 대답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대답했다간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았습니다.


남자는 이제껏 흘렸던 익살스러운 웃음소리를 한 번 더 흘리고 '에밀리' 위에 올라타 손으로 두들겼습니다.


그러자 서서히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아서 클라크가 말한 과학 3법칙 중, 제3 법칙이 떠오릅니다.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저 제녹스 자체는 놀랄게 아니지만 부름에 나타난 것이 마법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법칙을 통해 공중으로 떠오르는 남자를 보니, 바라보는 구도에 따라서는 지팡이에 올라탄 마법사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나 싶습니다. 


분명 미래인이라고 그랬죠?

과거의 시간대를 휴양지로 삼고, 공간을 가방으로 삼고, 도대체 얼마나 먼 미래의 인간인 걸까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해줄게요. 당신의 폐하와는 재회할 수 있어요. 정말로.

아이고 참. 나도 나에요. 먼저 사정을 들었으면 서류같은 걸 마련해주는 게 아니라 좀 더 괜찮은 걸 가르쳐줬을텐데.

미안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당신은 홀몸도 아니라 경계했을텐데. 배려가 지나치면 되려 독이 되나봐요."


혼자 주절거리고 남자는 떠나갔습니다. 그야말로 한겨울 밤의 마법사라고 할 법한 모습으로.


비는 진즉에 멎었고, 빗물로 생긴 까만 얼룩만이 듬성듬성한 길을 걸으며 생각했습니다.

뭘 도와주겠단 걸까요. 어떤 식으로 도와주겠단 걸까요. 

도움을 받는다 만다 하기 이전에 다시 피어오른 경계심을 억누르고, 저는 카페를 찾아갈 수 있을까요.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주일은 커녕 그 절반도 지나지 않아 저는 카페로 찾아가게 됩니다.





* * *




내 이번에는 반드시 완결짓고 말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