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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큭, 큭. 충실히 임해줬노라, 진조의 보이지 않는 검은 발톱이여"


숲을 등진 언덕 위, 바다가 훤히 보이고 근방에 여러 건물도 위치한 요충지에 지어진 아담한 오두막.

소박하고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한 작은 거처에서 비밀스러운 회동이 열렸다.

이 오두막의 주인인 LRL과 쿠노이치 카엔이 지난 작전의 대성공을 두고 축배를 나누고 있다.


"프린세스의 마력이 담긴 신비한 와인이다. 사양하지 말고 들도록"


"카엔, 술 안 좋아해"


"응?! 이거 과일 주스인데...."


나름 성의의 뜻을 담아 어설픈 솜씨로 만든, 하지만 정성이 깃든 주스를 입에도 대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LRL이 순식간에 박살난 컨셉을 주워담을 생각도 않고 당황한다.

그 모습에서 귀여움을 느꼈는지, 술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에 드는지 

카엔이 얼핏 보면 잘 숙성된 포도주와도 같은 붉은빛을 두른 잔을 든다.


"훗...천년의 세월이 깃든 역작이다. 이 정도 포상은 그대가 행한 위업에 비하면 그저 하찮은 것에 불과할 뿐이니"


창고로 옮겨진 어마어마한 양의 참치캔.

그걸 탈취한 정체불명의 닌자는 다름 아닌 카엔이었다.

이 무슨 언어도단.

작은 체구에 걸맞지 않은 거대한 야망을 품고 있는 사악한 꼬맹이 LRL의 제안에 응해 상상도 못할 짓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피로 피를 씻고 칼로 칼을 부러뜨리는 무의미한 소모전도 언젠가 끝을 고할 터...

파괴 끝에 창조 있으니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날에 옥좌에 앉는 건 다름 아닌 짐이 될 운명이다"


언젠가 다가올 평화로운 세상.

철충도 별의 아이도 사라지고 PECS를 비롯한 바이오로이드도 모두 사령관이 이끄는 오르카에 복속되면

총을 내려놓고 쟁기와 펜을 들어야 한다.

사령관은 아마 신세계의 신이 되겠지.

그를 따르는 바이오로이드는 자비로운 신의 배려 하에 신인류의 일원이 되어 사회를 복구할 것이다.

멸망 전의 인프라도 다수 남아있으니 아무것도 없는 바닥부터 모든 걸 재건하는 수고까지는 들일 필요가 없을 터.

이는 즉 기존의 체제 상당 부분도 그대로 승계한다는 뜻이다.

특히 화폐경제.

참치캔이 화폐로 쓰이는 이상 누가 더 많은 참치캔을 가지고 있느냐가 부의 척도가 될 것이고

돈이 돈을 부른다는 말이 있듯 한번 생긴 경제적 격차는 쉬이 좁혀지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질 것임이 분명하다.

과거에 썼다는 종이와 금속으로 된 화폐를 다시 쓰게 될지도 모르나, 

이미 나름의 자리를 굳힌 참치캔의 자리 자체가 부정당하지는 않겠지.

기득권층의 탐욕은 그리 가볍지가 않다.

그리고 그 탐욕에 편승하는 교활함이야말로 진정 현명함이라 할 수 있겠지.

즉 참치캔을 쥐는 자가 새로운 세계의 패권을 쥔다.

모두에게 얕잡아 보이던 하찮은 꼬맹이가 진정한 절대자로 군림하는 것이다.

평소 참치캔 노래를 부르며 알음알음 모으던 나날은 다 이를 위한 것.

물론 맛있어서 까먹은 수도 상당히 많지만, 이 허름한 오두막의 지하에 놀랄만한 규모의 비밀공간이 숨겨져 있고

앞선 창고 습격사건으로 손에 넣은 참치캔이 고이 잠들어있는 진실을 그 누가 아랴.

단둘, 패왕 LRL과 그 충실한 수족 카엔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약속대로...초밥집, 차려주는 거지?"


"물론이다, 고귀한 진조의 프린세스는 한 입으로 두 말 따위 하지 않는다.

세상이 고요한 평화의 장막으로 가라앉으면 둘도 없는 화려한 초밥집은 너의 것일지니!"


전세계가 줄을 서서 먹는 유명한 초밥집.

그 초밥집의 주인장 카엔이 되기 위해 이 닌자는 어두운 음모를 받아들였다.

말할 수 없는 비장한 과거를 숨기고 있는 달인이 정성 들여 빚는 초밥, 사령관이 분명 좋아하겠지.


"무엇보다 그 사악한 문지기 안드바리에게 통쾌한 일격을 먹였다니, 백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도다!

그동안 맞은 딱밤의 복수다! 헤헤"


역대급으로 창고를 털렸다는 소식에 수복실로 실려간 안드바리의 소문은 이미 섬 전역에 퍼졌다.

억장이 무너지는 그 심정을 익히 가늠할 수 있었기에 대부분 이들이 애도했다. 소수의 몇몇을 빼고는.


"우리의 꿈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아직 갈 길이 남았노라. 다음 임무를 준비하도록"


"카엔, 초밥집 차릴 거야...."




실로 사악한 둘의 은밀한 대화를 벽 너머에서 몰래 엿듣는 이가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명탐정 리앤은 나름의 추리를 통해 이미 진실에 상당히 근접해있던 것이다.


'세상에...창고 급습사건의 범인이 카엔이고 배후에 LRL이 있었다니...!

이를 당장 사령관에게 알려야 해'


대어를 낚았지만 결코 조급해하지 않는다.

목표를 달성하기 한걸음 직전이 가장 위태롭다는 걸 익히 알고 있기에.

혹여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하지만 최대한 신속하게 사령관이 있을 탑으로 몸을 빼낸다.

삭. 사라락.

억누른 풀 밟는 소리가 오두막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빠르게, 크게 울린다. 


'설마 카엔이 따라붙은 건 아니겠지?'


전력으로 질주하며 리앤이 고개를 돌린다.

다행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닌자가 일개 탐정에게 쉽사리 모습을 보이지도 않겠지만, 들키진 않은 것 같다.

눈앞에 건물이 보인다.

문 안으로 몸을 던지면 한숨 돌릴 수 있다.

갑자기 비수가 날아오지만 않는다면...!


"헉...! 하아, 하아...다행이야, 무사히 들어왔어"


산소를 갈구하는 폐가 온몸을 쥐어짜는 감각에 당장에라도 정신이 끊어질 것 같다.

하지만 사령관에게 속히 진실을 알려야만 한다.

이는 오르카의 운명이 걸린 시간싸움이다.


"왓슨...! 큰일이야, 내가 끔찍한 음모의 전말을 밝혀냈어!"


사령관실을 향해 들이닥치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자세한 설명을 할 겨를이 없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다급히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이 어색한 몸놀림과 과장된 어조,

평소의 리앤이라면 이를 놓치지 않았겠지만 신체와 정신 양쪽 모두 몰려있는 상황이었던 게 실책이었다.


"놀라지 말고, 흡, 들어봐...오르카의 일원이 참치캔을 노리고 창고를 털려고 해"


"...뭐?"


치켜올라간 눈꼬리.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

그렇겠지,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이 놀라운 진실을 마주하고도 어찌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미안해, 내가 급하게 달려와서...그래도 걱정 마, 다 알아냈거든.

닌자는 그저 이해관계가 일치한 꼭두각시고 그 배후에 진정한 흑막이 있어.

당장 이를 모두에게 알리고 막아야 섬을 어지럽히는 사건을 해결할 수...."


리앤의 말이 흐려진다.

사령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언제 어디서 들었어?"


"응? 그야 방금...."


"아니, 알 필요도 없어. 나도 참, 보안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왓슨...?"


나와서는 안 되는 반응.

나올 수 없는 반응.

사령관이 이렇게 차갑고 잔인한 눈으로 자신을 봐선 안 된다.

어째서...?


"설마, 아니지? 그저 내 억측일 거...."


리앤의 움직임이 멈춘다.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묻어나오던 물음, 조금씩 떨리던 입술이 그대로 멎었다.

새로운 의혹에 흔들리던 눈동자도 빛을 잃고 굳었다.

건전지가 다 닳은 인형처럼 어색하게 몸이 굳더니 그대로 우당탕 쓰러진다.




"나 참...알아채지 못한 거야, 제로?"


바닥에 나뒹구는 리앤을 향해, 아니 그 너머를 향해 사령관이 혀를 차며 퉁명스러운 타박을 날린다.


"죄송해요, 주공...설마 엿듣는 이가 있을 줄은...."


그림자가 짙어지는가 싶더니 쿠노이치 제로가 모습을 드러내고 부끄럽다는 듯 무릎을 꿇는다.

숙인 고개는 모든 게 자신의 실책이라 말없이 고한다.


"아무에게도 들켜선 안 돼,

난 명색이 사령관이잖아. 그것도 모두의 자유와 의사를 존중하는 자비로운 사령관.

그 이미지는 분명 내게 도움이 되고 그걸 깨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미지가 밥 먹여주는 건 아니거든. 

개인적으로 넉넉한 비자금을 확보해야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온갖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단 말이지.

그러니 제로 널 믿고 시키는 거야.

마침 섬에 안전한 창고도 지었겠다, 참치캔을 모조리 거기로 옮기는 걸 의심할 이는 없어.

참으로 불행하게도 도중에 누가 급습해 탈취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한들, 가슴 아픈 사고지 어쩌겠어?"


또 다른 간악한 음모가 탑에서 진상을 드러냈다.

이 탐욕스러운 사령관은 기존의 좋은 이미지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더러운 수작을 통해 참치캔을 빼돌리려는 뒷공작을 꾀하던 중이었다.

물론 권력을 휘둘러 대놓고 독차지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선 지금까지 애써 쌓은 위신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린다.

설마 그렇게 썩어빠졌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는 안드바리의 공허한 눈동자를 받아낼 자신은 없다.

멸망 전에는 인간의 도구 취급을 받았던 바이오로이드마저 배려하는 친절하고 마음 씀씀이 넓은 인격자라는 추앙.

동시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참치캔을 거머쥔 압도적 재력가.

두 마리 토끼는 머리를 조금만 굴리면 잡을 수 있었다.

특히나 얼토당토않은 이유였다고는 하나 반란이 일어났던 게 바로 전, 민심을 보살피며 체면관리에 힘써서 나쁠 건 없었다.

도둑맞은 참치캔은 정체불명의 닌자가 창고를 습격해 털어갔다 하면 그만이니까.


"하아...말이 씨가 된다더니 그 자식은 대체 누구야...."


하지만 설마 정말로 닌자가 나타나 그리할 줄은 몰랐지.

선수를 뺏기다니, 세상 일이 마냥 의도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소녀가 부족한 탓이에요. 그때 조금만 더 서둘렀더라면...."


제로가 스스로를 탓한다.

몇 분만 빨랐다면 창고에 쌓인 참치캔을 닌술로 싹 옮겼을 터인데, 하필 정체불명의 닌자와 마주치다니.

자신도 상당한 수준의 닌자지만 상대 역시 결코 뒤지지 않았다.

아니, 자존심을 내려놓고 솔직히 말한다면 실력이 앞설지도 모른다.

무기를 제대로 꺼내기도 전에 견제당하고 단 일격에 정신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몸에는 상처가 딱히 남지 않았다.

그 정교하면서도 섬세한 솜씨.

동시에 너 따위에겐 굳이 전장의 영광스러운 훈장을 안겨줄 가치도 없어 손대중으로 어루만져준다는 조롱.

더할 나위 없는 굴욕이었다.


"아니,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중요한 건 미래야"


사령관이 담담하게 위로를 건넨다.


"뭐, 마냥 꼬인 것만은 아니지. 오히려 잘된 점도 있어.

정체불명의 닌자와 맞서 창고를 지키려다 쓰러졌다는 알리바이를 얻었으니 

다음에 창고를 털어도 우리를 의심할 이는 한 명도 없을 거란 말이지.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 보면 돼, 스미레"


진명을 부르는 저 따스한 목소리.

도의적으로는 분명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령관의 음모에 동참한 건

이렇게 해서 신뢰를, 애정을 한몸에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녀의 앳된 기대감이었다.

비록 이 임무가 오르카의 많은 이에게 크고 작은 피해로 다가올지라도

사랑하는 주공의 총애를 한몸에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거래가 아닐까.


"그나저나 이거 대책을 마련하긴 해야겠는데...

창고에서 그 정체불명의 닌자와 또 마주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

제로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상대는 결코 만만치 않아.

괜찮은 생각 없어?"


"으으윽...어떻게 그런...."


들려선 안 되는 신음이 들린다.


"어?! 제로, 분명 리앤을 기절시킨 거 아니었어?"


"윽...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당황한 사령관의 물음에 더 크게 당황한 제로가 리앤의 뒤통수를 전력으로 짓밟는다.


우직, 하는 상당히 묵직하고 위험한 소리와 함께 조금씩 올라오던 리앤의 머리가 힘없이 무너진다.


"우와...제로, 그거 괜찮은 거지?! 리앤 죽은 거 아니지?"


절도를 꾀하는 잡범에서 살인자가 될까 공포에 질린 사령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리앤을 살펴본다.


"괜찮아요, 닌술이어요"


"머리에 혹이 주먹만 하게 났는데?!"


"아무튼 닌술이어요"


바이오로이드는 인간보다 튼튼하니 괜찮겠지.

애써 끔찍한 광경을 외면하며 사령관이 아까의 주제로 돌아갔다.


"흐으음...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으니 카엔에게 상담이라도 받아볼까?"


"언니라면 믿을 수 있어요"


등에 리앤을 둘러업은 사령관이 제로와 함께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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