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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잘 부탁해"


수복실에 리앤을 눕히고 카엔이 있을만한 곳을 찾는다.

숙소에도, 식당에도, 혹시 비밀스러운 수련을 하는가 싶어 숲 속 깊은 곳에 있는 폭포를 둘러봐도 카엔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 참, 어디 있는 거지"


탑으로 돌아가 공개 방송으로 호출할까 싶기도 했지만, 되도록 비밀스럽게 일을 처리하고 싶었다.

아까도 리앤이 들이닥쳐 모든 계획이 들통 날 뻔하지 않았던가.


"언니라면 요즘 초밥에 심취해있으니 해변에 있을지도 모르와요"


초밥이라.

전에 카엔이 쥔 초밥을 몇 번 먹은 기억이 아롱아롱 샘솟는다.

수동적이고 평소에 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카엔이지만 초밥을 앞에 두면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고집이 강해진다.

장인정신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결과물을 입에 넣으면 감탄하고 엄지를 척 들 수밖에 없는 맛.

언젠가 모든 과제를 끝내고 평화가 찾아오면 카엔이 차린 초밥집에서 한가로이 초밥을 먹고 싶다 내뱉은 적이 있다.

그때 발그스름한 얼굴이 참 볼만했지.

카엔은 기억하고 있을까.


"저기 오두막이 있었던가?"


해변을 바라보는 언덕에 작게 솟아있는 오두막이 눈길을 잡아끈다.

워낙 넓은 섬이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했으니 누가 따로 지었나 보다.

이 귀여운 공간의 주인은 누굴까.




"안에 누구 있어? 들어갈게~"


"우와악!"


투박한 문을 열자 기괴한 비명이 튀어나온다.


"으으...사령관...내가 다 잘못했어...."


"응? LRL이잖아"


요즘 어디서 뭘 하나 싶었더니 이 앙증맞은 집을 만들었던 걸까.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다 생각하는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며 끅끅거린다.


"다시는 안 그럴게! 앞으로는 참치캔 욕심 안 부리고, 피망도 꼬박꼬박 다 먹고...."


"응? 괜찮아, 섬은 넓으니까. 여기 오두막 지었다고 화 안 내"


"응?"


커다란 눈망울을 끔벅거리기를 몇 초,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가 급변해 당당해져선 양팔을 허리에 얹는다.


"아, 그렇지! 이 넓은 섬 일부를 진조의 영역으로 선언해도 별문제는 없을 터! 아까는 그저 빈틈을 꾀하기 위한 연기였노라!"


방금까지 보였던 당황이 묻히도록 크게 크게 웃는다.

참치캔을 빼돌린걸 들킨 게 아니구나.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던 심장을 고이 붙잡아 제자리에 돌려놓은 듯한 느낌이다.


"혹시 카엔 못 봤어?"


"카엔...여기"


바로 옆에서 불쑥 그림자가 튀어나온다.


"깜짝이야...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오두막을 지나치지 않고 들어온 게 정답이었다.


"주공...볼 일 있어?"


"정체불명의 닌자가 창고를 습격했던 사건 때문에 조언을 좀 구하려고"


두명이 동시에 헛숨을 삼킨다.


"왜 그래?"


"쿨럭...공기, 맛있어서"


"크흠, 흠! 그렇다, 이 섬의 공기가 어찌나 입에 맞는지 절로 한껏 들이마시게 되는구나!"


오늘따라 나사가 좀 빠진 듯한 두 바이오로이드가 들고 온 통나무 밑동 의자에 앉아 진지하게 말을 꺼낸다.


"그 닌자...누군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참치캔을 훔쳐갔다는 거야"


"밤에 드리우는 어둠의 장막처럼 슬픔이 맴도는구나. 안드바리가 아직도 정신을 되찾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나이스, 두 악당은 내뱉는 말과 달리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직 더 옮길 참치캔이 많이 남아있지만 창고를 털린 이상 섣불리 옮기기도 뭣해.

그렇다고 오르카에 계속 선적해둘 수도 없고.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마침 현장을 지나가던 제로가 적과 마주해 싸워봤다는 거지.

닌자야, 닌자.

닌자를 상대하는 법은 역시 같은 닌자가 잘 알지 않겠어?

그래서 카엔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 거야"


정말 날카로운 판단이다.

카엔의 공략법을 알아내기 위해 카엔을 찾았으니.

무뚝뚝한 닌자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눈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카엔, 왜 그래? 혹시 부담스러워서 그래?

마음 편히 가지고 도움이 될만한 건 뭐든 말해줘도 괜찮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온 거니까"


"응, 카엔...더워서 그래"


시원한 바람이 벽 틈으로 살랑살랑 불어오는데 무슨 소리일까, 얘는.

옆에서 머리를 갸우뚱거리던 LRL이 갑자기 손뼉을 짝 치며 벌떡 일어났다.


"인간이여, 내게 어두운 밤바다를 환하게 밝히는 등대처럼 찬란한 묘수가 떠올랐도다!"


"좋아, 말해줄래?"


현자는 어린아이를 통해서도 배운다는 말이 있다. 사령관은 열린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 누군지 전혀 모르겠는 닌자는 분명 참치캔을 노린다. 

그렇다면 이를 역이용해 섬의 모든 참치캔을 한곳에 모아두고 유인해 덮치면 되는 일 아니더냐!"


"...오, 그거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인걸"


흥미로움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지?! 이대로 발만 동동 굴려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그러니 오르카에 아직 쌓아둔 참치캔을 모두 옮기라고 하자!"


마치 자기 일인 양 열정을 쏟는 모습이 기특하다. 그만큼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던 걸까?


'후후후...일단 참치캔이 모인 장소만 파악하면 

진조의 위대한 검은 발톱이 비밀스러운 닌술로 눈 깜짝할 사이에 가져올 것이다...진정한 주인에게 말이지'


어떤 의미로는 맞았다.

혹시나 앞선 행적으로 꼬리를 밟힐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더 이상 참치캔을 확보하지 못할까 내심 걱정이던 차에

이렇게 먹음직스럽게 호박이 굴러 오다니.

사령관을 조금만 더 구워삶으면 LRL의 원대한 야망이 실현될 것임이 분명하다.


"참치캔을 일부러 눈에 잘 띄는 곳에 모아놓고 병력을 주변에 잠복시켰다가 

그 닌자가 나타나면 한 번에 덮치면 될까...."


깊은 생각에 빠진 혼잣말이 신경 쓰인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자인 카엔이라 해도 수많은 병사를 뚫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곁눈질로 물어보니 그건 부담스럽다며 조용히 고개를 내젓는다.


"그, 그럴 필요는 없느니라! 닌자는 닌자가 상대해야 하는 법!

아무리 많은 병사를 투입한들 닌자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비밀스러운 닌술 앞에선 모두가 오합지졸이 될 뿐!

차라리 카엔에게 맡기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일리가 있어. 그럼 제로, 부탁해도...."


"아니, 그건 안된다! 어, 그러니까...."


공이 제로에게 넘어가려 하자 LRL이 다급해진 나머지 말을 끊었다.

이내 자신의 행동이 충분히 수상하게 느껴진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저 의심의 눈초리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LRL, 좀 이상한데? 왜 그리 펄쩍 뛰는 거야?"


"다, 당연하지 않느냐! 제로는 부상을 당한 몸! 

다친 동생을 전선에 보내고 마음 편히 지내는 언니라니, 이는 하늘이 결코 용서치 않을 거다! 그렇지? 응?"


지금 대처 나쁘지 않았지?

뒤는 부탁한다는 LRL의 콕콕 찌르는 시선에 카엔이 고개를 끄덕인다.


"카엔...고수. 그 닌자는 카엔을 넘지 못해"


당연하지. 카엔 본인인데.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는 합리화로 마음을 다스려본다.


"듣고 보니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그래, 그렇게 하자"


사령관이 결국 무사히 함정에 발을 들였다.

좋은 생각을 제시해 기특하다는 듯 LRL의 머리를 쓰다듬고 카엔도 가볍게 껴안는다.


"조심해야 해. 지난번에 제로는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쓰러졌어.

네가 다치는 건 원치 않아"


"응...그건 걱정 마"




잘 부탁한다는 당부와 함께 둘이 오두막을 나가자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이 한 번에 풀리며 공기가 녹아내린다.


"히이잉...들키는 줄 알았어"


"마음, 불편해. 꼭 해야 돼?"


자신을 굳게 믿고 걱정하는 사령관을 배신하는 비밀스러운 임무가 내키지 않은지, 카엔이 착잡하게 묻는다.


"흔들리지 말거라, 충실한 그림자여. 다 원대한 미래를 거머쥐기 위한 순간의 시련일 뿐...

그 숙련된 손길로 빚어낸 초밥을 올리기에는 걸맞은 장소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느냐"


"...알았어"


가게문을 걸어잠그고 사령관 단 한 명만을 위해 선보이는 만찬.

온갖 종류의 생선을 능숙한 솜씨로 손질해 초밥으로 쥐면 분명 맛있다고 칭찬해주겠지.

그리고 그 끝에는 카엔의 몸을 접시로 삼아서....


"괜찮아? 얼굴이 무지 빨개졌는데. 창문 열까?"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스러운 말투에 장밋빛 망상에서 깨어나 고개를 휙휙 돌린다.


"이번 한탕만 제대로 하고 손 씻으면 돼. 난 참치왕이 될 거야!"


"카엔...초밥왕의 길, 걸을 거야"




"주공, 언니라면 그 닌자를 제압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제가 몰래 참치캔을 빼돌리는 건 도저히...."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숲길을 걸으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올리는 제로의 말을 단칼에 자른다.


"네...?"


"LRL이 아주 괜찮은 의견을 제시해줬지 뭐야"


사령관이 음흉하게 미소 짓는다.


"참치캔을 한데 모아놓고 주변에 경비 인력을 쫙 깔아놓을 거야.

그리고 현장에는 카엔을 둘 거고. 이 정도면 누구도 보안에 허점이 있다 생각하진 못하겠지.

하지만 이럴 수가, 정체불명의 닌자가 오르카 호를 폭파하려 한다는 긴급 경보가 나에게서 날아오고

다들 당황한 가운데 하던 일을 멈추고 모조리 달려나가겠지. 카엔을 비롯해 말이야"


"설마...?"


"그래, 이 틈을 타 네가 참치캔을 모두, 단 하나도 남김없이 싹 챙겨오는 거지.

교활한 닌자의 기만책이었고,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했지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 책임을 질 이도 없어.

그렇게 슬픔 가운데 지금껏 온갖 역경을 딛고 걸어왔듯 이 사건을 발판삼아 더 열심히 하자는 나의 연설로 상황을 수습하고

우리는 비밀스러운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거야. 괜찮지?"


"......."


상상을 초월하는 속물근성에 할 말을 잃은 제로가 자신에게 감탄했다 생각하는지, 사령관은 신나게 말을 이어나갔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도 사령관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이야. 그런 점에서 난 충분히 유능하지. 

정체불명의 닌자가 나타난 것은 분명 골치 아픈 일이지만, 이마저 결국 내 장기말로 쓰일 테니까"


이런 남자를 사랑해도 되는 걸까.

이런 남자의 마음을 얻어보겠다고 음모에 동참하는 자신이 옳은 걸까.

제로의 고민이 깊어졌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 스미레. 분명 나를 재물에 눈먼 쓰레기로 보고 있겠지. 

하지만 아니야. 이 모든 건 수많은 여성 가운데 홀로 남은 인류의 대표로서, 

그렇기에 번성의 의무를 지고 또한 그 많은 바이오로이드의 멘탈과 달아오른 몸을 보듬어줘야 하는 사명을 품은 자로서

여럿과 관계를 맺어온 나의 의미 있는 반항이야.

나도 사랑을 알고 단둘만의 알콩달콩한 신혼을 꿈꿔. 그러기 위해선 기반을 갖춰야만 하지.

그리고 그 요람에는...네가 있을 거야"


어맛, 나쁜 남자.

이 기묘한 프로포즈에 잠시나마 갈등하던 닌자는 한 명의 소녀로 돌아와 다시금 충성을 맹세했다.


"주공의 흥을 깨지 않도록 미천한 이 몸을 바치겠어요"


"알아주니 고마워"


사실 다 뻥이다.

참치캔, 더 많은 참치캔.

이를 위해서라면 사랑에 눈먼 바이오로이드 쯤이야 감언이설로 얼마든지 구워삶을 수 있다.

참치캔은 중대 문제다.


"그럼 다가오는 밤을 기다리자"




"물수건을 갈아드릴게요"


수복실에서 환자를 돌보는 다프네가 침대에 누워있는 리앤의 이마를 부드럽게 짚어본다.


"으음...."


사령관이 업어온 후로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뒤통수에 난 어마어마한 크기의 혹을 볼 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원한이 있거나 반드시 살해하려 했던 듯싶다.

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이냐 물어봤지만 사령관은 말없이 고개를 저을 뿐,

그 비장한 분위기에 짓눌려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평화롭기만 할거라 생각했던 이 섬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너무 걱정하지 마, 다프네 언니. 어차피 별일 아닐 거야"


닥터가 패널을 두드리며 바쁘게 자료를 정리하는 와중에 격려의 말을 던진다.

가뜩이나 할 일이 많을 텐데 이렇게 환자를 보살피러 와주다니, 얼마나 기특한지 모른다.


"안드바리 양은 상태가 어떤가요?"


"사실 어떻게 보면 이쪽이 더 심각해"


손을 멈추고 의자를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리앤 언니야 머리 쪽에 강한 타격을 입은 거고, 검사 결과 뇌가 손상되진 않았으니 머지않아 깨어날 거야.

하지만 안드바리는...너무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아 깨어나길 거부하고 있어"


"하긴...그동안 애써 관리해온 참치캔을 도둑맞았으니까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겠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참치캔을 되찾거나 범인을 잡지 않는 이상 계속 잠들어 있을지도 몰라"


"세상에...."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어쩌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닥터의 아리송한 말에 채근해봐도 미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표정만 돌아올 뿐이다.

뭔가 감을 잡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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