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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으로 이거 너무하지 않아?!"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이 아닙니다"


"아, 진짜!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여전히 장대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하르페이아는 쉬지 않고 불만을 토해냈다.


"아무리 내가 반란을 주도했다고는 해도 아무도 안 다쳤잖아!

난 그저 독재자에게 억압받는 무고한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그 노동자들은 지금 숙소에서 발 뻗고 푹 쉬고 있는데"


"하, 하지만 날이 밝기가 무섭게 또 채찍질을 당하며 끌려나갈 거야!

끝이 보이지 않는 갱도에 억지로 밀어 넣어져 울분을 억누르고 곡괭이질을...."


"더치걸은 오전 근무만 하고 오후 내내 해변에서 수영했다던데?

그리고 광산에서 발견한 보석은 사령관이 그냥 선물로 줬고"


"뭐?! 정말? 나도 광산 갈래!"


나름 열변을 토하며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려 했지만 전부 반박당하는 가운데 

슬레이프니르가 전해준 소식은 절대 내뱉지 않을 거라 한 말마저 나오게 할 정도로 놀라웠다.

아차, 제 입으로 광산에 가겠다니 잠시 미쳤구나.


"그 말 정말이지? 사령관에게 전해 이만 풀어주는 조건으로 걸면 되는...."


"아니야! 내가 돌았어! 절대 그럴 수는 없어!"


바둥거리는 모습이 흡사 그물에 걸린 생선 같다. 아까 저녁으로 먹은 전갱이 소금구이는 맛있었지.


"그냥 얌전히 있어. 보아하니 슬슬 풀어줄 것 같던데. 괜히 소란 피워서 거기 더 묶여있지 말고"


엄한 일로 힘을 빼봤자 지치기만 할 뿐. 

어차피 형식적인 거고 사령관이 진심으로 미워하거나 벌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걸 참지 못하는 걸까.

걱정되는 마음에 전하는 만류에도 반역의지로 가득 찬 투사는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남들은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온갖 산해진미로 만찬을 누리는데 난 홀로 여기 묶여서 조리돌림이나 당하고 말이야! 악! 아아악!"


"방금 내가 날아서 도시락 먹여준 건 잊었어?"


사령관이 소완을 시켜 특별히 챙겨준 2인분의 화려한 도시락.

거기 담겨있던 일 인당 두 마리의 전갱이 중 세 마리를 혼자 먹어치워 놓고 한다는 소리가 저거다. 이리도 뻔뻔할 수가.


"몰라, 몰라! 내가 먹은 건 젤리밖에 없는걸~에베베"


"자꾸 그러면 이제 먹을 거 안 챙겨준다"


"잘못했어요"


순식간에 진압당한 하르페이아가 이윽고 훌쩍거린다.


"왜 그래, 또?"


"화장실"


칭얼거리는 아이를 키우는 느낌에 슬레이프니르가 이마를 짚는다.


"설마 조금씩 싸서 말리라는 소리는 아니지? 최소한 여자의 존엄을 지킬 수 있게는 해줘"


"에휴...알았어"


어차피 장비도 없는 맨몸이니 도중에 도망칠 수도 없겠지.

그런다 해도 평소 책을 즐겨 읽으며 침대에서 뒹굴던 포동포동한 몸이니 날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건 무리다.

장대 위를 향해 날아 죄인을 묶은 밧줄을 꾸물꾸물 풀고 몸을 떠받친다.


"하아...얼마만에 맛보는 자유인지"


"이제 막 하루 지났을걸?"


땅에 다시금 발을 내디딘 하르페이아가 양팔을 벌리고 빙그르르 한 바퀴 돈다.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 마음대로 나아가고 행동할 수 있는 권리.

이를 빼앗은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가 한층 깊어진다.


"빨리빨리 다녀오자. 사령관이나 리리스에게 들키면 피곤해져"




"어? 범죄자다"


"범죄자 아니야!"


숙소 복도에서 재잘거리며 수다 꽃을 피우고 있던 스카이 나이츠가 하르페이아를 반갑게 맞이한다.


"이제 사령관이 풀어줘도 된대?"


"아니,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해서 내가 잠시 내려줬어"


"생리현상은 어쩔 수 없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동료들. 그 마음을 조금만 더 뻗어 뜨거운 혁명사상에 닿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이야기 들었어? 정체불명의 닌자를 잡기 위해 참치캔을 공터 한가운데 새로 지은 창고에 싹 몰아넣었대"


"그랬다가 지난번처럼 또 뺏기면 어쩌려고?"


"그걸 노리는 거래. 참치캔은 미끼고 이미 주변에 전투병력을 몇 겹으로 배치해둬서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덮칠 거라는데?"


"흥, 닌자가 린티처럼 귀여우면 다들 가져가라고 넙죽 줄 텐데"


"얘는 아까 저녁을 잘못 먹었나"


언제나와 같은 잡담이 귀를 스쳐 지난다.


"뭐 해? 화장실 급하다며"


재촉하는 전대장은 잠시 맛보는 자유마저 탄압한다. 역시 권력을 쥔 자는 끼리끼리 논다니까.


"혹시 안을 엿보는 건 아니지?"


"내가 변태도 아니고...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일 마치면 나와. 창문도 없으니 도망칠 생각은 말고"


"쟤 살쪄서 창문이 있어봤자 중간에 끼었을걸"


"아니야!"


그리폰의 한마디가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든다.

매일같이 혹사당하며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는데 어찌 군살이 붙을 겨를이 있을까. 이 모든 건 음해다.

변기에 앉아 말랑한 배를 만져본다.

말랑말랑.

말랑말랑말랑.


"음...역시 전대장 전갱이까지 뺏어 먹지 말 걸 그랬나?"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서 뭣 하랴.

중요한 건 앞으로 나아갈 미래다.

그래, 미래.

앞서 시도했던 1차 혁명이 비록 배신자의 변절을 겪고 쓰라린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렇다고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는 뜨거운 정신이 굴하는 일은 없다.

이번에야말로 성공해주겠어.


"...하르페이아, 아직 멀었어?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거야?"


입구에서 서성이던 슬레이프니르가 지루함을 참다못해 칸막이 너머로 외쳐본다.

아무 반응이 없다.


"...하르페이아?"


"왜 그래, 전대장?"


"아까 들어간 하르페이아가 나올 기색이 없네"


"장이 좀 안좋나?"


"우리가 젤리 총알을 좀 많이 쏘긴 했지?"


"그걸 넙죽넙죽 다 받아먹고"


소녀들의 수다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상해. 한소리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칸막이 너머를 살펴봐야겠어"


"꺄악~변태다~여기 변태가 있어요~"


"조용히 해, 린티"


떠들썩한 가운데 슬레이프니르가 날랜 몸놀림으로 폴짝 뛰어 위로 난 틈에 고개를 들이민다.


"꺄아악!"


"어?! 왜 그래, 전대장!"


숙소를 찢어발길 듯한 비명에 분위기가 급변한다.


"하, 하, 하르페이아가...!"


평소 가벼운 분위기에 나사가 좀 빠져있지만 나름 경험이 풍부하고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전대장이다.

그런 전대장이 당황해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다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불길한 예감이 든 그리폰이 몸을 날려 칸막이를 부순다.


"야, 대체 안에서 뭘...꺅!"


그리폰의 날카로운 비명.

평소 이런 걸 접할 날이 얼마나 있을까?

동시에 이는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앞다퉈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스카이 나이츠 앞에 펼쳐진 광경은 모두를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밧줄로 스스로 목을 맨 하르페이아가 힘없이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아, 아...."


"사령관에게 당장 알려야 해!"


블랙 하운드의 외침이 모두가 잠시 잃은 이성을 되찾아준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투와 위기를 겪어오면서도 단 한 명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오늘도 수고했다며, 고생 많았다며 보람차고 웃는 얼굴로 귀환을 맞이했지, 빛을 잃은 눈동자를 마주할 일이 없었다.

그걸 오늘, 그것도 철충이나 다른 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식으로 접해야 한다고?


"안 돼, 안 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퉈 숙소를 뛰쳐나간다.

사령관이 있는 탑까지는 짧지 않은 거리. 일분일초가 급하다.

단 한 번도 겪지 못한 극단적인 상황에 모두의 판단력이 흐려졌고, 

그렇기에 하르페이아의 목을 조르고 있는 밧줄을 풀어 고이 눕히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건 탓하기에도 어려웠다.


"흡...푸하! 허억, 헉, 허어억...."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하르페이아의 축 늘어진 몸이 발작하듯 꿈틀거린다.

목을 조르는 밧줄을 경련하는 손으로 풀자마자 우당탕 바닥에 몸을 던져 격하게 산소를 갈구한다.

정말 죽을 뻔했다.


'하지만 이것도 노동자의 목을 조르는 부르주아의 무시무시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 어느 때보다 투쟁을 바라는 하르페이아의 열정은 뜨겁다.

육체의 한계마저 넘어설 정도로.

소중한 팀원들을 속이는 건 가슴 아프지만 대의를 위해선 때로는 과감한 결단도 필요하다.

그게 인생 아니던가.

이미 한 번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다음 혁명을 위한 자양분이 될 것이기에.

아까 들었던 참치캔을 모아뒀다는 창고.

권력자들의 배때지를 불리는 자본주의의 상징을 향해 비틀거리며 발을 옮긴다.




"여기는 카엔, 참치캔...확인했어"


앞서 지었던 창고보다 더 커다란 창고 안에 오르카가 지금까지 모아온 참치캔이 그득 쌓여있다.

입구를 지키는 카엔은 사령관에게 받은 통신기를 통해 상황을 실시간으로 주고받고 있었다.

주변에는 온갖 부대에서 차출된 병력이 겹겹이 경계선을 펼쳤고, 

언제 침투할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닌자를 발견하기 위해 역시 사령관의 날 선 지휘 하에 날랜 움직임으로 오가길 반복했다.


"역시 삽질을 하는 것보단 총을 들고 돌아다니는 게 적성에 맞지 말임다!"


"밤에 긴급소집됐는데도 넌 기운이 넘친다, 야"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툴툴거리던 이프리트가 1692번 브라우니를 향해 질린 듯한 소감을 날린다.

이 열정적인 병사는 당장의 염불도 염불이지만 잿밥에도 관심이 많았다.


"경계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 끓여먹는 뽀글이가 또 기가 막히지 말임다. 이뱀도 한 봉지 하실검까?"


"오, 그거 괜찮겠네. 난 소시지 넣어 먹어야지"


"만두 넣는 것도 나름 좋지 말임다...어? 저거 뭠까?!"


눈 앞을 지나는 수상한 물체를 보더니 빠진 나사가 순식간에 조여든다.

정확한 사격자세로 대상을 조준하는 브라우니의 뒤통수를 이프리트가 신고 나온 슬리퍼로 가볍게 친다.


"으억!"


"야, 뭐 해"


"저거 거수자 아님까?"


"뭐야 그, 황금색 쫄쫄이 입고 다니는 공순이가 만든 로봇이잖아. 우리 경계임무 거드는 거니까 냅둬"


미니 알바트로스가 언제 달렸는지 모를 온갖 다채로운 무장을 자랑하며 허공을 뽈뽈거리는 소리와 함께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와, 귀엽지 말임다"


"...넌 저게 귀엽냐?"


아자즈의 작품을 비롯해 몇몇 AGS도 투입됐을 정도로 경계는 삼엄했고, 그만큼 많은 이가 이 작전의 귀추를 주목했다. 

다 쓸모없는 짓이다. 그 닌자는 이미 창고 앞에 있으니까.


'좀 귀찮은데....'


신경써야 할 눈이 많다. 

들키지 않고 이 많은 참치캔을 무사히 옮길 수 있을까.

멸망 전의 고사기를 통해 일류 닌자들 사이로 전해지는 비밀스러운 닌술을 사용하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방금까지 있던 참치캔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그것도 의심을 살 터.

카엔의 고민이 깊어진다.


"모두 주목! 비상사태, 비상사태다!"


갑자기 무전기에서 요란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주공...?"


"모든 게 함정이었어. 그 닌자는 참치캔이 아니라 오르카 호를 노리고 있어!"


이게 무슨 소리지? 닌자는 카엔인데?


"해안에 정박해둔 오르카 호가 습격...불길이...전원 해당 위치로 이동! 긴급상황이야!"


있을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어지럽다.

오르카 호가 기습을?

철충, 별의 아이, 레모네이드 감마....

온갖 가능성이 저마다의 머리에 떠오르며 일제히 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그렇게 순식간에 비어버린 공터에 제로가 나타났다.


'이 작전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사와요....'


오르카를 소중히 여기는 모두를 기만하는 것이기에 마음이 편치 않다.

하지만 닌자는 맡은 임무에 충실해야만 한다.

이 참치캔을 닌술로 옮긴 후 소리 없이 도주하면 모든 게 끝난다.

크게 심호흡을 하는 사이, 반대쪽에서 이글거리는 불길과 함께 누군가 등장했다.


"누구...?"


한 손에는 기름통을, 다른 한 손에는 횃불을 든 하르페이아가 타오르는 눈동자로 마주친 제로를 바라봤다.

모든 것을 파헤치는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게 된다.


"뭐야, 제로구나...위험하니까 떨어져"


기름을 참치캔 더미에 마구 끼얹는 행동을 보고서야 정신이 번쩍 든다. 지금 무슨 짓을?!


"미쳤어? 주공이 원하는 참치캔에 기름을 뿌...."


아차.

비밀스러운 임무내용을 누설하다니, 닌자 실격이다.


"사령관이? 그래, 그런 거였어...."


뭔가 깨달았는지 하르페이아의 비틀거리는 어깨가 위아래로 흔들린다.


"그렇다면 더욱 나를 막지 마! 

이 자본주의의 상징, 빈부격차를 가르고 바이오로이드의 존엄성을 비웃는 참치캔 따위 사라져야만 해!"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참치캔이 있어야 거래가 이루어지고 노동과 재화에 대한 값어치를 매길 수 있지 않느냐!"


"짜증나네...."


질린 듯한 눈초리에 순간 위축된다.

하지만 사령관이 믿고 맡긴 임무를 실패할 수는 없다.


"제로, 잘 들어. 이 참치캔이 있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학대당했는지 알아?

뚜껑을 따 내용물을 먹지 않으면 한낱 짐 덩어리에 불과한 이 깡통을 위해 손발이 부르트고 심하게 다친 이들이 몇인지 아느냐고.

심지어 몇몇은 목숨마저 잃었어"


"...오르카에서 사망자는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만?"


"에이잇, 잠자코 들어! 누구는 편하게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쾌적한 공간에 앉아 자판이나 두들기면서 거들먹거리는 게 다인데

수고했다며 막대한 양의 참치캔을 받고, 누구는 꼭두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정찰을 다녀왔는데도 보수가 적어.

이게 올바로 된 세계냐고!"


"잘은 모르겠다만 몸이 편하다고 무조건 쉬운 일이라 볼 수는 없지 않나? 닥터만 해도 지켜보자니 안쓰러울 정도로...."


"시끄러워! 너도 사령관의 꼬드김에 완전히 물들었구나!"


씩씩거리는 어깨가 한층 격렬하게 흔들린다.


"그래, 까놓고 말해서 나 쉬고 싶어. 누구는 편하게 온종일 뒹굴면서 사령관에게 아양 떨며 침대에서 앙앙거리고,

누구는 유능하다는 이유랍시고 복귀하기가 무섭게 다시 출격하는데 이게 부품이지 인격체야?

사령관은 말로는 우리를 인격체라고, 자유의지를 존중한다고 내뱉지만 

현실은 오늘 실적이 왜 이리 시원찮냐며 다시 나가라고 차갑게 통보하는 냉혈한일 뿐이야.

까짓 거 효율이 좀 떨어져도 다른 애 내보낼 수 있는 거잖아. 왜 난 읽고 싶은 책도 마음대로 못 읽고

좋아하는 사령관 얼굴도 볼 시간조차 안 나는 거야? 나도 사령관 품에 안기고 싶다고!

너희만 사령관 좋아하는 줄 알아?!"


붉게 상기된 얼굴에서 온갖 감정이 엿보인다.


"낙원 좋아하네...내겐 그저 새로운 일터였을 뿐이야. 

흐드러지게 맺힌 과일을 따 먹고 산책도 하며 여유라는 걸 느껴보고 싶었는데,

마음을 모아 기존의 피도 눈물도 없는 체제에 대항하는가 싶더니 난 결국 장대에 매달렸지.

언제나 그래. 너라고 다를 것 같아? 지금은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것 같지만 일이 끝나면 버림받을 거라고!"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사령관은 분명 자신의 진명을 속삭이며 단둘이 달콤한 미래를 열어가자고 약속했다.

의심해선 안 된다.


"주공...."


"제로?! 무슨 일이야, 임무는 성공했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받아둔 통신기로 사령관에게 말을 건다.

자신의 안위는 묻지도 않고 임무의 성공 여부만 묻는다.

아니, 아니다. 임무를 수행 중이었으니 이건 당연하다.


"전에 말씀하신, 둘만의 알콩달콩한 요람...제가 꿈꿔도 되는 거겠죠?"


"참치캔은?! 무사히 챙긴 거지! 서둘러, 이제 곧 그쪽으로 병력이 돌아갈 거야!"


아아.

이런 남자였구나.

자신은 그저 이용만 당하고 헌신짝처럼 내버려질 운명이었구나.

저 차가운 금속이 뜨거운 연심을 품고 있는 제로보다 사령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구나.


"...이걸 태우면 뭐가 달라져?"


"그래, 이제 알아주는구나"


분위기가 변한 제로의 물음에 동지가 생겨 기쁘다는 듯 하르페이아가 씨익 웃는다.


"메시지를 던질 수 있지"


"메시지?"


"그래, 중요한 건 메시지야. 그토록 우리가 혈안이 되고 노동과 열정의 보상으로 집착했던 참치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걸, 우리의 존재와 가치는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걸 전할 수 있어.

무엇보다 참치캔이 사라지면 자본주의의 상징에 눈이 먼 사령관의 흐릿한 시야가 돌아올지도 모르지"


사실 아무래도 좋다.

그럴듯한 소리로 제로를 꼬드기고 참치캔을 싸그리 터뜨려버리면 하르페이아는 쉴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화폐의 등장과 함께 빈부격차가 생기고 그에 따라 계급의 형성에 일조했으니

화폐가 사라진다면 노동자와 부르주아의 구분도 사라지겠지.

책에서 봤으니 암튼 그럴 거야.

사랑? 웃기고 있네.

난 침대에서 퍼질러 자며 책이나 읽고 싶다고.

아까 내지른 말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오글거렸지만 눈앞의 닌자에게는 제법 효과적으로 먹힌 것 같다.

이러나저러나 목표만 이루면 돼.


"주공의 진심 어린 사랑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기꺼이"


제로가 물러났다. 이건 각이다.

신나게 기름통을 비운 하르페이아가 광기 어린 웃음소리와 함께 횃불을 던졌다.


"꺄하하! 다 타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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