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공식 설정과 어긋난 점이 있습니다.


 2차 연합전쟁 중 한 스틸라인 부대. 12월로 접어들어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 마지막 실키가 죽음을 맞았다. 다음 실키 충원 또는 제조 예정은 없었다.


실키 236번 상병의 짧은 갈색 단발은 끈적한 피로 덮여 있었고, 그런 그녀의 표정은 총알이 두개골을 관통하는 순간의 짧은 고통을 담고 있었다. 


그녀와 친했던 레프리콘 590번 상병은 눈물마저 말라버려, 건조해진 눈을 멍하니 뜨고 실키의 눈을 감겨 주었다. 


간부도, 보급병도 남지 않은 부대. 대다수의 소속 바이오로이드들은 실키가 죽었다는 슬픔보다, 보급이 곧 끊길 것이라는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혔다. 


이 부대로 배치된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난 브라우니 1273번 이병은 그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버텨야 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는지, 막사에 둥둥 떠다니는 선임들의 감정들이 무거운 바위가 되어 브라우니의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거기 신병."

"이, 이병 브라우니 1273번!"


그 순간, 레프리콘 590번 상병이 그녀를 지목했다. 자기도 모르게 친우를 잃은 레프리콘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아, 브라우니 1273번은 언제나 활기찬 브라우니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뭐든 좋으니 덮을 것 가져오세요."

"네 알겠슴다!"


실키의 시신을 덮을 모포를 가지러 가며, 브라우니 1273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막사로 달려가는 이 순간만큼은 피가 꿉꿉하게 묻은 공기를 피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이런 곳에서 버티는 건 쉽지 않지 말임다......'


모포를 챙긴 브라우니 1273번은 막사 뒤에 쭈그려 앉아 실키 236번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건네 준 초코바를 품속에서 꺼냈다. 허나 보급병인 실키가 죽은 지금, 이 초코바는 브라우니가 가진 유일한 초코바가 되어 버렸다. 달달한 것으로 기분을 가라앉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녀는 초코바를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아껴 놨다가 다시 보급이 오기 전까지는 아껴 놓을거지 말임다.'


브라우니는 한 톨쯤 남은 인내심을 발휘해 초코바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


 "어이 팬씨! 스틸라인 지급용 보급품 있나!"

"네, 네! 지금 갑니다!"


같은 시간, 한 보급 기지. 버뮤다의 테스트 바이오로이드 '팬텀'은 자기 몸만한 상자를 들고 토토토 뛰어갔다. 살을 에는 바람 때문에 손발이 어는 것만 같았지만, 보급품을 기다리는 병사들을 위해 몸을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팬텀은 오늘도 부지런히 보급품들을 나르고 있었다. 


"휴우......."


팬텀이 한숨을 쉬자 하얀 입김이 밤하늘에 훅 나타났다 사라졌다. 보급품들을 드론에 실어 보내고, 팬텀은 땀에 젖은 보랏빛 머리카가락을 귀 뒤로 넘겼다. 왠지 모를 탄성 때문에 금방 머리카락이 귀 앞으로 튀어나왔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내일부터는 파견 업무인가......'


팬텀은 방금 나른 스틸라인 보급 상자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실키를 대신해, 내일부터는 그녀가 한 스틸라인 부대의 보급 담당을 맡게 되었다.


후방의 보급 기지와는 다르게 총알이 빗발치는 '진짜' 전장에 간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앞섰다. 그곳에서 할 일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것이 그나마 행운이었다.


'스틸라인에는 무서운 자매들이 많겠지?'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스틸라인이 모든 바이오로이드 부대들 중 가장 위계질서가 엄격한 부대라는 것은 어깨 너머로 들어 알고 있었다. 아무리 버뮤다 소속 바이오로이드라지만 그곳에서 일할 팬텀도 그 분위기에 영향을 받을 것은 확실했다.


혹시 구타라도 있을까 싶어 불안이 몰려왔지만, 팬텀은 고개를 저어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내일부터는 정말 열심히 해야 해.'


팬텀은 얇은 벙어리 장갑에 싸인 손을 꽉 쥐었다. 주먹을 쥐자 열기가 퍼져, 조금은 안도감이 느껴지는 듯 했다.


*

 

 다음 날 아침, 부대의 비공식 소식통 브라우니 994번 일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막사 사이사이를 뛰어다녔다.


"특종! 특종이지 말임다!"

"아이씨, 시끄러. 말년에 보급 끊긴 것도 서러운데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그러실 때가 아니지 말임다, 이뱀. 오늘 새로운 보급 담당이 배치된다고 하지 말임다!"


그녀의 폭탄발언에, 막사에 있는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 이프리트 35번 병장이 입을 열었다.


"그거 진짜냐?"

"임펫 상사님이 말하신 거 똑똑히 들었지 말임다."

"별 일이 다 있네. 실키 충원 계획도 없었는데 이렇게 바로 온다고?"

"지금 왔다니 나가 보시지 말임다."


그 한 마디에 정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막사에 있던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이 우르르 문을 젖히고 새로운 보급 담당을 맞이하러 갔다. 


'새로운 실키가 오는 거지 말임다?'


짬찌 주제에 선임들보다 먼저 나갈 수 없어 한 박자 늦게 엉덩이를 뗀 브라우니 1273번은 그제야 헐레벌떡 달려가기 시작했다. 


'실키 236번 상뱀처럼 좋은 실키가 왔으면 좋겠지 말임다.'


브라우니 1273번은 선임들에게 혼나고 훌쩍훌쩍 울던 자신에게 초코바를 건네던 실키 236번 상병을 떠올렸다. 거기다가 이번에 올 실키는 자신의 첫 후임이기도 해서, 그녀의 기대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팬텀.......이라고 합니다."

'후임이 아니지 말임다?'


노란색 후드에 커다란 짐가방을 멘 실키를 상상했건만, 그녀의 앞에 나타난 바이오로이드는 보라색 머리카락에 빛바랜 하얀색 귀마개를 쓴 팬텀이었다. 


"뭐야. 실키가 아니었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자매네요."

"어째 딱봐도 글러먹은 것 같냐."


주변에서는 실망과 절망이 섞인 목소리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다 글렀다며 막사로 돌아가는 바이오로이드들을 본 팬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야, 브야."

"이병 브라우니 1273번!"

"후임 들어오니까 좋냐?"


팬텀을 보러 나온 병사들 대부분이 들어가자, 분대장인 이프리트 35번 병장이 브라우니 1273번에게 물었다.  


"아님다!"

"아닌 척 하기는. 근데 쟤 니 후임 아니라 동기다."

"잘 못 들었지 말임다?"

"너랑 제조 날짜 같댄다. 어쨌든 동기니까 잘 챙겨줘라. 수고."


그렇게 이프리트 병장마저 돌아가고, 브라우니 1273번과 울상을 지은 팬텀만이 덩그라니 남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팬텀이 금방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아, 브라우니 1273번은 먼저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반갑슴다. 팬텀씨라고 하셨지 말임다. 저는 팬텀씨 동기인 브라우니 1273번임다."

"죄, 죄송해요. 저 같은 게 괜히 여기 와서는...... 다들 제가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겠죠......?"


브라우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팬텀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그럴 리가 없지 말임다!"

"네?"


갑작스러운 브라우니의 부정에 놀란 팬텀은 울었던 것도 잊어버렸는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기세를 탄 브라우니는 활기찬 목소리로 계속 떠들어 댔다.


"팬텀 씨 아니면 우리는 다 죽었을 거지 말임다. 선임분들이 지금은 그러셔도 팬텀 씨가 보급 하시는 거 보면 다 인정하실 거지 말임다."

"정말 그럴까요?"

"당연함다!"


자신도 전입한 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호언장담한 브라우니는 어제 먹지 않고 아껴둔 초코바를 팬텀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브라우니 1273번 이병이지 말임다!"


허겁지겁 초코바를 까 먹는 팬텀을 보며, 어엿한 선임이 된 것 같아 브라우니 1273번은 어깨를 폈다. 하지만 둘은 몰랐다.


진정한 고생은 지금부터 시작한 것을.


*


 스틸라인의 바이오로이드들이 실키가 아닌 팬텀을 보급 담당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특히 전임 보급 담당이었던 실키 236번과 절친했던 레프리콘 590번 상병은 특히나 팬텀에게 까칠했다. 


"팬텀, 제가 의류는 1번 창고에 넣는 거 아니라고 누누이 말했죠?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참인지 모르겠네요."

"죄, 죄송합니다. 레프리콘 상병님."

"미안한 거 알면 처음부터 잘 알아 보셨어야죠. 브라우니 1273번! 도대체 동기 안 챙기고 뭐 했어요?"


이렇게 팬텀의 동기 취급인 브라우니 1273번까지 같이 엮여 혼날 때가 많아, 팬텀은 점점 자신감을 잃어 가고 있었다. 


"미안해요, 브라우니."

"괜찮슴다. 레프리콘 상뱀 저러시는 것도 하루이틀 아니고 말임다."

"브라우니, 혹시 제가 보급 말고 도움이 될 일이 있을까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브라우니는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 전장에서 도움이 될 만한 일은, 보급이 아니면 전투였다. 그리고 전투 기술을 배운다는 것은, 팬텀이 전장에 투입될 가능성이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전장은 위험하지 않슴까?"

"괜찮아요. 이대로......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보다는 나아요."


결심을 굳힌 듯, 팬텀의 붉은 눈동자가 브라우니를 응시하고 있었다. 항상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하던 팬텀이 처음으로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을 알아챈 브라우니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