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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투명한 적도의 바다.

크고 작은 물고기가 자유로이 헤엄치고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은 잔잔한 평화를 노래한다.

인류가 멸망한 지 수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지구를 지배하던 흔적은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있지만

지속적으로 배출하던 오염물질과 남획의 영향은 상당 부분 지워졌다.

종의 유지를 걱정해야 하던 희귀 어종도 이제는 큰 무리를 이뤄 푸른 물살을 가르며 자연의 먹이사슬 피라미드에 순응한다.

더는 일방적이고 불합리한 포식자인 인간이 없기에.

물론 바이오로이드는 곳곳에 남아있고 이들 역시 생존을 위해 물고기를 잡긴 하나 필요 이상으로 거둬들이지는 않는다.

탐욕이 사라진 아름다운 세상,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군도를 바라보며 

욕심을 한가득 품은 푸른 머릿결의 바이오로이드가 탐사 결과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좋아, 기대 이상으로 다양한 어종의 분포와 서식지를 확인했어.

저 녀석은 잡아가면 주방장이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어 주겠지. 흠...신선도가 생명인데 괜찮을까?

이 정도 거리면 속도를 최대한 올려서 그럭저럭 닿을 수도 있을 것 같고...

여차하면 산채로 옮겨봐? 오르카 호를 끌고 올 수만 있다면 안에 있는 수족관에 넣어도 되겠어"


홀로 깊은 바다를 탐험하다 보니 크게 혼잣말을 하는 게 버릇이 된 트리아이나가 자문자답을 하며 생각에 빠졌다.

사령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할만한 일이 없을까 고민하다 

섬 인근의 해역을 돌아다니며 어군분포 파악에 전념한 지도 며칠이 흘렀다.

이 풍성한 결실을 보고하면 틀림없이 좋아하겠지.

섬에는 온갖 자원과 식재료가 풍부하지만 얕은 해변에서 구할 수 있는 수산물의 종류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멀리 나갈 수도 없는 노릇.

트리아이나가 작성한 이 '바다 맛집 지도'의 존재감은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것임이 분명하다.


"겸사겸사 비밀스러운 해저 유적을 발견해 긴장감 넘치는 과정을 겪고 그 끝에서 놀랄만한 보물을 손에 넣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이번 탐험은 충분히 소득이 있었어"


반짝이는 보석이라도 주웠다면 고개를 한층 빳빳이 들고 귀환하는 그림이 그려졌을 텐데.

뭐,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슬슬 섬으로 돌아가 그리운 사령관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트리아이나의 머리 위 수면으로 거대한 전함이 지나간다.


"뭐야, 무적의 용 함대인가? 설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돌아다니는 건 아니겠지?"


그건 곤란하다. 바다는 다름 아닌 자신의 무대.

저마다 침범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는 법.

무적의 용은 그 뛰어난 지휘 능력을 토대로 전장에서, 트리아이나는 끝없는 모험심을 발휘하며 수면 아래에서 활약해야 한다.

공식적으로 그렇게 정한 적은 없지만 아무튼 그래야만 한다.

만약 사령관의 관심을 독차지하고자 선을 넘는다면 그건 엄연한 실례.

올라가서 한마디 해두는 게 낫겠지.


"나 왔어~뭐 좀 낚았어~?"


쏘우피쉬를 솜씨 좋게 올려놓고 갑판 위를 두리번거린다.

신호를 보냈는데도 멈추지 않고 계속 갈 길을 가길래 살짝 심통이 났지만 

혹시 모를 적을 경계하느라 순찰 중이라면 예고 없이 방문한 자신이 오히려 불청객이겠지. 그 정도는 너그러이 넘어가 주자.

묘하게 위화감이 드는 광경을 두리번거리며 승무원을 찾아 돌아다닌다.


"아무도 없어? 저 밑에 참치들이 모여있던데 몇 마리 잡을래?"


큰 소리로 외쳐보지만 인기척 하나 없다. 다들 어디로 간 거지?


"무슨 일이지? 넌 누구고?"


등 뒤에서 호기심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반가움에 뒤돌아 밝게 인사를 건네려 한 트리아이나가 헛숨을 들이킨다.


"당연히 위대한 탐...쿠헥! 쿨럭, 커헉"


몸에 착 달라붙는 칠흑 같은 전투복.

오른팔을 감싸는 거대한 무장.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새햐얀 머리카락과 피처럼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

이글거리는 외눈은 참으로 흥미롭다는 듯 앞에서 벌벌 떠는 트리아이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트리아이나 모델 아니야. PECS 소속 기종이긴 한데...누가 보낸 거지? 오메가 그 녀석인가?"


레모네이드 감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을 가볍게 혀로 핥았다.

어쩐지 배가 낯설다 싶었다. 갑판에 아무도 없던 것도 설명된다.

대부분의 시스템과 전투화를 자동화한 포세이돈이라면 굳이 승무원을 둘 필요가 없겠지.

이를 어쩐다...이대로 최후를 맞이해야 하나?

무수한 역경과 고난을 접하고 극복해온 트리아이나의 불굴의 정신이 이 상황을 빠져나갈 기지를 쥐어짜내려 들었다.


"하하, 당연히 맞아...요. 포세이돈이 지난번에 적지 않은 손실을 겪었으니 

지금쯤 어느 정도 복구는 했나 확인할 겸 저를 보냈어...요"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있는 오르카의 얼마 전 전투를 떠올리며 퍼즐 조각을 맞춰본다.

입에 맞지 않는 존댓말을 쓰려니 어색하다. 아무쪼록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감마는 살짝 언짢은 기색을 보이더니 그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으아악!"


아, 이렇게 가는구나. 아직 탐험하지 못한 미지의 장소가 많은데.

두 눈을 꼭 감고 이를 악물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설마 순식간에 천국에 온 걸까?

살며시 눈을 떠보니 기다렸다는 듯 감마가 손가락을 튕기며 이마에 딱밤을 날린다.


"아얏!"


"걔는 항상 주제넘다니까. 세력이 덩치 좀 있다고 이래라저래라 간섭인데, 자기 앞가림이나 똑바로 하라고 전해.

포세이돈은 이미 기함을 비롯해 전력 대부분을 복구했으니까.

이 어나이얼레이터 보이지? 지난번 손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흔적도 없이 머리가 날아갈 거라 생각했지만, 섬세한 힘 조절 덕인지 이마는 아주 살짝 따끔한 정도에 그쳤다.

다행이다, 최소한 적의는 없구나. 그럼 적당히 변명을 둘러대고 도망치자.


"에헤헷, 그렇지, 요? 괜한 걱정이라니까요. 그럼 전 이만 오메가님께 돌아가 볼게요"


"잠깐"


재빨리 쏘우피쉬를 향해 내달리려는 트리아이나의 등을 향해 감마가 한마디 내뱉었다.

짧은 말이었지만,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을 금방이라도 끊을 듯한 압박을 가하기엔 너무나도 충분했다.


"...살려주세요"


"응? 내가 너 죽인다고 했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감마에게선 일말의 적의도 느낄 수 없다.

아무래도 여기서 죽을 운명은 아닌가 보다.


"가서 안부 전해. 이번에는 지난번에 나누지 못한 인사를 제대로 하겠다고"


"예, 물론이죠!"


다시 붙잡히기 전에 온 힘을 다해 뛰어간다.

숨이 차오르는 가운데 눈앞에 그리운 노란색의 동체가 보인다. 

아아, 함께 온갖 위험을 향해 몸을 던지고 매번 살아남은 쏘우피쉬여. 이번에도 한층 노련함을 더했구나.


"푸하...! 어서 도망쳐야 해"


다급히 시동을 걸고 섬을 향해 나아간다.

여기서 섬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지만 가깝지도 않은 거리. 

최대한 신속히 헤엄치면 감마의 출현을 알리고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어느 때보다 크나큰 심리적 압박을 받아서인지, 뒷일까지 염두에 둘 겨를이 없이 멀어지는 트리아이나를 향해

감마가 씨익 웃으며 천천히 배의 방향을 돌렸다.


'어설픈 연기였지만 특별히 봐줄게. 분명 지금 가는 곳에 그 재미난 사령관이 있겠지. 그리고 용도 말이야'




"아자즈, 있어?"


자신을 위해 세워진 중앙 시설에 도착한 사령관이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일련의 모든 사건, 그 열쇠는 분명 엉뚱한 공순이가 쥐고 있으리라.

분명 지난번에 여기 어디에서 알바트로스를 닮은 전파 방출 장치를 본 것 같은데...아, 저기 있다.


"마침 잘 됐어, 아자즈. 여기서 못 찾으면 섬을 한 바퀴 돌아야 하나 싶었다고. 물어보고 싶은 게 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사령관은 말을 미처 잇지 못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분명 아담한 크기였던 장치는 어느새 알바트로스 원본에 맞먹을 정도로 덩치가 커지고 

척 봐도 무시무시한 무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저 구석 작업 테이블에 놓여 반쯤 분해된 부품은 알바트로스가 잃어버린 한쪽 팔이 아닌가?


"정말 멋지지 않나요?"


칭찬해달라는 듯 들뜬 목소리로 아자즈가 말을 건다. 아니, 이건 그런 레벨을 한참 넘어간 것 같은데.


"아자즈"


"네"


"이거, 내가 부탁했던 그 전파 방출 장치 맞지?"


"맞아요"


"그런데 왜 이리 묵직해졌어?"


"기동성은 훨씬 보강했어요. 최대 시속은 마하...."


말을 끊으며 손을 크게 휘젓는다. 자칫했다 이 마이페이스의 흐름에 그대로 휩쓸릴지 모른다.


"아니, 그 뜻이 아니라. 며칠 전만 해도 껴안을 수 있을 정도로 작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알바트로스와 싸워도 전혀 밀리지 않을 것처럼 무시무시해졌잖아. 이럴 필요가 있는 거야?"


"핵심 기능만 유지하면 외형과 부가 기능은 제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닥터와 계약했는걸요"


또 계약이다. 맙소사.

불현듯 찾아오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고 크게 심호흡을 한다.


"갑자기 두통이라도 왔어요? 여기 약 먹어요"


아자즈가 미니, 아니 이젠 미니라 부를 수도 없는 알바트로스 형태의 장치를 가볍게 툭툭 치자

가슴 부분이 열리며 기다란 로봇 손이 튀어나오더니 섬세하게 손가락 끝으로 들고 있는 진통제를 건넸다.


"만능 로봇이네...."


"그 말을 듣고 싶었어요"


큰 맘 먹고 입은 드레스가 어울린다며 칭찬을 들은 여자친구처럼 한 바퀴 빙그르르 돈 아자즈는

손뼉을 짝짝 치며 방방 뛰었다. 그 훤칠한 장신의 미녀가 이리도 귀여울 수가 있구나.


"그래, 계약이 그렇다니 내가 뭐라 할 여지는 없겠지.

하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찾아온 건 핵심 기능 때문이야. 이거라면 분명 귀를 기울여주겠지?"


"물론이죠"


"난 본디 불안과 걱정에 떠는 바이오로이드의 멘탈을 안정시키고 낙관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는 장치를 부탁했거든.

그런데 저 로봇이 나타난 후로 오르카의 대원들은 지나칠 정도로 과격하고 자기 합리화를 보이고 있어.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분명 기존과는 다른 무언가를 느껴. 아무리 생각해도 장치가 원인이 아닌가 싶은데"


"흠...."


아자즈가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져있다. 이런 모습도 보는 날이 있긴 하구나.


"어쩌면 제 작품의 성능이 너무 뛰어나 발생한 약간의 부작용일 수 있어요.

닥터가 설정한 전파의 유효범위를 섬 전체로 넓히기 위해 출력을 증폭했는데, 

그 과정에서 전파가 끼치는 영향이 당초 상정수준을 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겠네요"


"그럼 그걸 고쳐줘"


"단순히 출력을 낮추면 그만큼 유효범위가 줄어들어요"


"닥터에게 부탁하면 될까?"


"전파의 파장은 제 담당영역이 아니었으니 자세히 할 말은 없네요. 가능하기야 하겠지만요"


다시 수복실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안 돼, 지난밤 그 광기 어린 표정을 지울 수가 없다.

아마 지금의 닥터라면 기껏 사령관을 위해 밤낮으로 연구해 개발한 결실을 

감사히 다루지는 못할망정 트집 잡고 이것저것 요구하기만 한다며 불만을 터뜨리겠지.

장치 제작의 대가로 걸었던 소원을 들어달라고 역으로 달려들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그것 말고도 이 섬을 찾아주는 조건으로 소원 하나 더 들어주기로 했었지.

지금 닥터를 찾아갔다간 개미지옥에 제 발로 가는 꼴밖에 안 된다.


"어쩌지...."


"좋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 들어볼래요?"


아자즈답지 않은 제안에 어안이벙벙하다. 보통 저지르고 난 후 사후통보를 하지 않았던가?

드디어 배려심이라는 걸 깨우친 걸까, 아니면 엄청난 무언가를 준비하는 걸까.


"닥터는 바쁘겠죠. 그렇다면 이 알바포스에게 자율학습 인공지능을 탑재해 

스스로 판단하고 성장하도록 개량하는 건 어떨까요?"


알바포스? 이름은 또 언제 지은 거야.


"그게 가능해?"


"시간이 좀 걸리지만 가능해요"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다.

성장하는 로봇이라니, 어쩌면 기존의 알바트로스보다 믿음직한 친구가 탄생하는 건 아닐까.


"혹시 말이야, 그 인공지능이라는 게 잘 자라면 전파를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조율하고

화려하게 달린 무장으로 경비나 전투에 이바지할 수도 있을까?"


"물론이죠. 저도 그걸 염두에 두고 말한 거에요"


마음이 통해 기쁘다는 듯 아자즈가 환하게 미소 짓는다.

남자라면 이 흥미진진한 선택을 안 할 수가 없지.


"좋아, 사령관으로서 승인할게. 아무쪼록 잘 부탁해!"


"헤헷, 틀림없이 재미날 거에요"


기대감을 안고 건물 밖으로 나온다.

흔들리는 나뭇잎이 오늘따라 유독 싱그럽게 보인다.

아자즈라면 모두가 놀랄만한 결실을 안겨줄 것임이 분명하다.




스윽.

혹여 누구에게 들킬까 조심스럽게 몸을 내민다.

지금 이 건물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있는 건 오직 스노우 페더 단 한 명뿐.

오늘도 피리연습을 하기 위해 어느새 익숙해진 언덕을 향해 걸어가던 와중, 

어려진 사령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급히 통제 시설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

이는 분명 비밀스러운 음모의 냄새.


'수상해....'


과거 요정 마을에 머물던 당시 처음 보는 바이오로이드가 길을 묻던 날을 기억한다.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냈지만 그 안일함이 어떻게 돌아왔던가.

자신과 아크로바틱 써니를 친절히 보살펴준 마을 주민이 레모네이드 오메가에게 세뇌당해 꼭두각시로 부려 먹혔다.

어제의 은인이 오늘의 적이 되고 마을을 구하고자 하는 저항활동이 테러리스트의 만행으로 치부되던 쓰라린 시절.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에 한줄기 구원의 빛으로 다가온 건 다름 아닌 사령관이었다.

그 사령관이 저렇게 음험한 움직임을 보이다니.

어쩌면 그때의 빚을 갚을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숨겨져 있는 걸까'


소리를 죽이고 들키지 않도록 뒤를 밟았다. 사령관이 들어가고 닫힌 문에 살포시 귀를 대 안의 소리를 엿들었다.


"방출 장치...무시무시...두통...불안과 걱정...부작용...인공지능...전투...재미...."


최소한의 방음처리를 거친 벽 때문에 흰올빼미 유전자가 가미된 예민한 감각으로도 

드문드문 몇몇 단어만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다.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의미의 나열.

전체적인 문맥을 가늠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행동력 충만한 어느 바이오로이드의 방대한 상상력을 자극하기엔 너무나도 충분한 재료였다.

어쩌면 사령관도 그때처럼 이미 정신을 빼앗겨 사악한 범죄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건 아닐까?

아니, 섣부른 판단이다.

안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지 알지도 못한 채로 단정 지어선 실수를 할 뿐이다.

방을 살펴보고자 마음먹은 스노우 페더가 구석으로 몸을 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사령관이 나왔다.


'주인님이 대화를 나누신 걸 보아 안에 최소한 한 명이 더 있어'


지금 성급히 들이닥치는 건 삼류나 할 짓.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자즈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나선다.


'슬슬 들어가 볼까?'


어쩌면 안에 누군가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신중함을 기한답시고 더 기다렸다가 외려 누가 찾아올 수도 있다.

괜찮다, 만약 다른 누구와 마주치면 길을 잘못 든 척하며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빠져나오면 된다.

작게 심호흡을 하고 들어선 방에는 기괴한 기계장치를 두르고 있는 알바트로스가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아무 반응이 없다.

깜박이는 전원과 이따금 들리는 무미건조한 기계음뿐.

자세히 보니 알바트로스와 비슷하지만 다르다.

무시무시한 무기를 여기저기 달고 있는 모습은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이건 틀림없이 끔찍한 살육병기야. 대체 왜 이런 게 여기에 있는 걸까?'


기존의 부작용을 보완하고 오르카를 구성하는 이들에게 한층 헌신하기 위한 

인공지능 학습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이 당돌한 친구가 알 리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앞의 대상을 다진 고기로 만들고도 남을 듯한 험악한 외형에 가슴을 졸이면서 이리저리 시선을 들이대 본다.


"바이오로이드...."


기계 목소리의 또렷한 발음에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중얼거리는 내용은 뭐지?


"오르카...사령관...생명활동...정신...파장...."


설마 제거 대상을 선별하는 걸까? 아까 들었던 게 착각이 아니었다니.

소중한 사령관은 언제부터인가 악당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중요 정보를 술술 불었음이 틀림없다.

물론 탓할 수는 없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었을 테니.

그 믿음직스럽고 자애롭던 세레스티아와 블랙 웜도 오메가의 세뇌 귀걸이에 속절없이 당하지 않았던가.

그래, 신체와 정신이 연약한 소년의 모습으로 변한 것도 분명 이와 연관이 있을 거야.

스노우 페더의 예리한 추리가 번뜩였다.

이제 이 위험천만한 진실을 앞에 두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크든 작든 행동하는 용기가 중요한 거야'


피리를 불던 언덕에서 자신의 노력을 응원하던 사령관의 격려가 떠오른다.

누구든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해야겠지.


'주인님...기필코 구해 드릴게요'


굳은 결의를 품은 스노우 페더가 품에서 시한폭탄을 꺼냈다.

장차 오르카의 적이 될 이 기계 살인마를 지금 이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날려버려야만 한다.


"째깍째깍"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설치를 끝내고 발 빠르게 다른 방을 돌아다닌다. 혹시 남아있는 이가 있다면 내보내야 하기에.

비록 폭탄테러라는 과격한 수단을 동원할지언정 무고한 희생은 있어선 안 된다.

그런 선량한 마음을 하늘이 알고 감복한 걸까, 이 건물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노우 페더가 몸을 밖으로 빼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중앙 통제 시설이 폭발했다.


"이걸로 된 거야...."


성취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뭉게뭉게 치솟는 먼지 구름 안에서 폭발에 휘말렸을 터인 알바포스가 붉은 시야광을 뿜으며 떠오른다.

분명 바로 앞에서 폭탄이 터졌는데 손상 하나 없다.


"인공지능 학습 결과...아군이며 보호 대상인 바이오로이드의 폭력적인 성향 확인...

살덩이의 불안정한 충동은 신뢰할 수 없음...세뇌전파를 증폭시켜 정신을 지배하고 진정한 강철의 지배를 열어야 함이 옳다...."


"...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얼이 빠진 스노우 페더를 두고 불과 파괴로 벼려진 병기가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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