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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당장에라도 쓰러져 그대로 축 늘어지고 싶다.

소년의 육체로 갈아탄 점에 더해 세뇌전파의 영향마저 사령관을 알음알음 좀먹어갔고, 누가 이길지는 그야말로 시간과의 싸움.

끝날 것 같지 않던 나무의 행진이 갑자기 멈추며 드넓은 공터가 드러난다.


"헉...헉...!"


태평하게 공터에서 낮잠을 자는 타이런트의 거체.

사령관이 다급히 달려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미동 하나 없다.

지금 저 너머에선 아스널과 알바트로스가 혼신의 힘을 다해 합체 로봇 거대 알바포스를 막고 있겠지.

늦기 전에 힘을 보태야 한다.


"타이런트!"


온 힘을 다해 외쳐보지만 오만한 공룡은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어서 일어나, 지금 급해!"


재촉도 소용없다.

무력감을 곱씹게 하는 일방적이고도 거대한 장벽. 이 벽은 도저히 넘을 수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당장 등 뒤에선 파멸의 쓰나미가 몰아치는데, 벽만 지나면 평온한 낙원이 기다리는데 이렇게 구경만 하다 끝내야 하나?

긴 사다리도 묵직한 망치도 지금의 사령관에겐 머나먼 신기루일 뿐.


'아!'


그 순간 기지가 번뜩인다.

자신이 사령관인 이유. 인류가 만물의 영장인 이유.

그 어떤 장애물도 끝내 극복하는 판단력이, 지성이 있지 않은가.

반짝거림은 열쇠가 되어 벽을 열어젖힐 답으로 손에 안겨 들어왔다.


"야! 알바가 너보고 약해빠졌대!"


"...뭐라고?"


성공이다.

실로 가소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타이런트가 크르릉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나약한 주제에 멍청하기까지 하다니...진정한 강자가 누군지 확실히 알려주겠다"


결코 움직이지 않은 것만 같던 벽에 멋지게 열쇠가 꽂혀 빙글 돌아갔다.

지축이 흔들리며 분노한 폭군이 걸음을 뗀다.

재빨리 올라탄 사령관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격전의 방향으로 공룡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벌써 지친 건 아니겠지?"


"AGS에겐 지친다는 개념이 없다. 그쪽이야말로 다들 엎어진 가운데 잘도 싸우는군"


호기롭게 받아치는 알바트로스의 대답에 아스널이 씨익 웃었다.

족히 20m는 될 거대한 합체 로봇. 

눈 앞에 놓인 강대한 적을 두고 분전하는 건 알바트로스와 휘하 스파르탄 부대 몇 기, 그리고 아스널이 다였다.

다른 바이오로이드는 세뇌전파의 영향으로 전의를 상실하고 저마다 편한 자세로 바닥에 엎어져 전투를 관전하고 있다.


"파니, 무기 좀 빌리겠다"


"비치발리볼 하고 싶어...."


"이 전투를 무사히 끝낸 후에 하도록 하지"


모래사장에 몸을 파묻은 파니 곁에 놓인 시저 캐논을 집어든다.


"읏샤...선물이다!"


183mm HAVP탄이 멋진 궤도를 그리며 알바포스의 팔을 꿰뚫는다. 금속을 관통하는 시원한 타격음.

하지만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새로 날아온 건물이 망가진 팔을 대신하는 광경에 작은 한숨이 나온다.


"탄약은 충분하지만 적도 쉬이 무너질 것 같진 않군...녹록지 않겠어"


좀 더 막강한 화력을 퍼붓고 싶지만 일손이 부족하다.

해변에 정박한 무적의 용 함대를 장식으로 방치하고만 있어 더욱 아쉽다.

아까는 표적이 작아 주변의 아군이 휘말릴까 포격을 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는데

이제는 표적이 커졌지만 정작 쏠 바이오로이드가 없다.

전파의 영향을 받지 않는 아스널이 아무리 열심히 뛰어다녀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으니.


"놀랍네요. 손상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합체 파츠를 교체하는 건 사전에 준비했지만

나노 입자를 활용해 수복하는 건 주입하지 않았는데...학습을 통한 성취가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모양이에요"


"거참 대단해서 할 말이 없군"


전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또 한 명의 바이오로이드인 아자즈가 감탄스럽다는 듯이 해설을 이어간다.

어느새 비키니로 갈아입고 편한 자세로 누워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담대함은 존경스러울 정도다.

저 슈퍼 로봇을 탄생시킨 원흉이라는 점만 치운다면.


"다 잘될 거에요. 시련도 결국에는 순간에 불과할 뿐...마지막에는 승자만이 남겠지요"


어기적거리며 나타난 아르망의 말에 희망을 품어본다.

저렇게 말하는 건 다 방대하고 치밀한 데이터를 토대로 낸 예지 수준의 연산결과겠지.


"그 계산을 믿고 계속 쏴보겠다. 혹시 어디를 쏘면 더 효과적일지 알려줄 수 있겠나?"


"네?!"


공략법을 슬쩍 물을 생각이었는데 이쪽이 더 놀랄 정도로 아르망이 깜짝 놀란다. 가만...?


"설마 그렇진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그럴듯한 말로 적당히 분위기를 잡은 건 아닐 테지?"


"......."


대답이 없다. 망했다.


"하아...위험할지 모르니 저 구석에 가서 얌전히 구경이나 하게"


"전 몰루망이랍니다"


평소 방대한 연산처리를 감당하다 보니 유독 세뇌전파의 악영향을 크게 받은 걸까.

아르망이 풍기는 분위기는 평소와 달리 어벙하기 짝이 없다.


"모두 피해라!"


저쪽에서 빠르게 날아온 알바트로스가 아스널과 아자즈를 잡아채고는 급격히 방향을 꺾는다.

격렬한 반동에 몸이 장난감처럼 젖히지만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를 관통하는 레이저 포격에 불만을 표할 생각이 싹 가셨다.


"신세를 졌군...방금 저거, 거대 로봇 녀석이 쏜 건가?"


"그렇다. 내부에서 급격한 고에너지 반응이 확인돼 작전상 후퇴했지. 저런 걸 만든 녀석은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


"...떨어뜨리지 말아요"


아자즈의 부탁에 알바트로스가 불만스러운 시선으로 답한다. 누가 AGS에게 감정이 없다 했던가.


"공격을 가해도 누적되질 않으니 보람이 없군. 기껏해야 버티는 게 고작이라 재미가 없어. 본체인 머리 부분을 노려볼까?"


"별 소용 없을 거다, 아스널 대장. 방금 내가 공략을 시도했지만 에너지 필드를 전개하더군.

원본이 뭔지 몰라도 보통 비범한 게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아, 그래"


나사빠진 둘이 분위기를 띄워 주는 덕에 최소한 이 골치 아픈 상황에 마냥 매몰되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아까 다급히 달려간 사령관이 멋지게 해결책을 들고 와준다면 정말 좋겠는데.


"크와앙!"


그 순간, 숲을 가로질러 나타난 타이런트가 울부짖었다. 등에 매달린 사령관의 모습도 보인다.


"타이런트...? 그래, 그거야! 역시 사령관이군!"


작고 가녀린 몸으로 바뀌었음에도 깃들어있는 담력과 기지는 알고 있던 그 사령관이 맞다.

AGS라면 세뇌전파의 영향도 받지 않을 테고 전투력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현시점에 오르카가 꺼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카드다.


"저 친구라면 나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도움이 되겠지...그런데 왜 여길 째려보며 입에서 불길이 치솟는 거지?"


알바트로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프라이멀 파이어가 허공을 가르며 발밑의 대기를 화끈하게 익힌다.


"앗뜨뜨!"


"내려와라, 약한 녀석. 이번에야말로 남은 팔도 물어뜯어 주마"


아군이 원호하러 온 줄 알았는데 적이었던 건에 대하여 사령관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타이런트 위에서 사색이 되어 어떻게든 달래려 드는 모습이 뻔히 보이니까.


"아니야! 거기가 아니야!"


"통제는 불필요하다"


"쟤 말고! 시선을 돌려봐.

저기 덩치 큰 거 보이지? 그거 믿고 너 따위는 한방 감이라 거들먹거리더라고"


얕은 술수였지만 그렇기에 효과적이었다.

자신보다 거대한 덩치의 로봇을 보고는 흥미를 느낀 포식자가 크르릉거리며 고개를 위아래로 까닥거렸다.

머리 부분에 낯익은 형태가 보이는 걸 확인하고는 묵직한 덩치로 믿어지지 않는 속도를 내며 달려들기 시작한다.


"콰앙!"


400톤이 넘는 공성추에 알바포스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린다.

연이어 타이런트의 거대한 턱이 몸통을 물고 그대로 피식자를 두 동강 낸다. 김이 빠질 정도로 손쉽게 승부의 향방이 가려졌다.


"시시하군"


"정말 잘했어, 타이런트"


이제 이걸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오겠지.

한바탕 일어난 소동의 뒤처리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야겠지만, 기분 좋게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번을 교훈 삼아 바이오로이드를 존중한다는 게 뭔지도 다시 곱씹게 됐고.


"아...긴장이 풀리니 갑자기 피곤해지네. 일단 좀 쉬어야...."


급박한 상황으로 팽팽하게 땅겨졌던 정신이 화로 위의 떡처럼 맥없이 무너지려던 차, 갑작스레 끼얹어진 찬물로 다시금 딱딱해진다.

몸이 박살이 났지만 머리 부분은 멀쩡했던 알바포스가 다시금 건물들을 불러모아 훨씬 거대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재구축했다.


"이것이 나의 3형태다"


"크르르르...."


호기롭게 재차 달려든 타이런트의 입이 알바포스의 양팔에 붙잡혀 가로막힌다.


"뭐라고...?"


연이어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엔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점점 커진다. 위험할 정도로.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며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고 외친다.


"위험하다!"


하늘에서 들리는 알바트로스의 경고. 동시에 눈앞을 하얗게 채우는 빛.

모든 감각이 일제히 끊긴다.


"...."


조심스럽게 눈을 뜬다.

온통 빛으로 가득 찼던 세상이 알고 있던 해변으로 돌아와 있다.

여전히 타이런트를 붙잡고 있는 거대한 양팔.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알바트로스.


"...찬양하도록. 내가 아니었다면 사령관은 사령관이었던 것이 됐을 거다"


"아...이번만큼은 감사할게"


절묘한 난입으로 에너지 필드를 펼쳐준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엉망이 된 알바트로스의 상태가 설명되질 않는다.

설마 저 레이저 광선이 그 정도로 강력하다면 이는 보통 위협이 아니다.


"건방진 것...!"


타이런트가 거칠게 고개를 휘저으며 알바포스의 양팔을 뿌리친다.

본의 아니게 알바트로스의 도움을 받은 모양새가 됐다는 사실이 심히 불쾌한 모양이다.

아까의 레이저 공격은 역시나 제법 부담이 됐는지 거대한 적수가 비틀거리며 거리를 벌린다.


"알바트로스, 잘 들어.

사령관으로서 전황을 분석해야 해서 묻는 거야. 네 에너지 필드가 뚫린 거야? 왜 상태가 그래?"


"예리하군. 사실 제때 온전히 펼치질 못했다"


"어째서?"


"말하고 싶진 않지만 지금 내 상태는 만전이 아니기 때문이지. 여기 이 타이런트에게 잘근잘근 씹히지 않았나. 

한쪽 팔은 여전히 그때 이후로 수복하지 못했고, 거기에 더해 에너지 필드는 펼친 규모와 지속시간에 따라 충전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제대로 펼치지도 못할 정도로 대규모의 전개를 최근에 했었다는 거야?

아까 알바포스와 싸울 때도 그런 기색은 없었는데?"


"브라우니들이 총을 쏠 때 전력전개 했다"


"야!"


그정도는 그냥 맨몸으로 받아도 되잖아. 어차피 흠집도 안 나는걸.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내뱉진 않았지만 사령관의 속내를 간파했는지 알바트로스가 조용히 한마디를 읊조렸다.


"...총알은 따끔하기 때문이지"


"야!!"


얘는 비장해야 하는 순간에도 진지함이 없다.

그 순간, 품에 넣고 있던 무전기에서 전에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오래간만이야? 어디서 뭘 하나 했더니 이 섬에 사이좋게 모여들 있었네?"


레모네이드 감마였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족히 수십m는 될법한 알바포스에 이어 감마가 포세이돈 함대를 이끌고 오다니.

저 멀리 수평선을 가득 채운 점이 보인다.

설령 눈앞의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저건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지난번에 제대로 내지 못한 결착을 지어야지?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용. 이미 섬은 포위했고 난 준비됐으니 와보라고"


공개 주파수를 통해 일방적으로 전하는 선전포고.

무적의 용을 향한 집착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고뇌하는 가운데 혀는 껄끄럽고 목은 바싹 타오른다.


"아, 미리 말하겠는데 이번엔 그때처럼 안 당해.

허튼수작을 부리며 내빼려 들었다간 어나이얼레이터의 주포로 섬을 흔적도 없이 날려주겠어"


"...! 그렇소! 할 테면 해보시오!"


""뭐?""


용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감마와 사령관 모두 벙쪘다.


"아마 거기서도 보일 테지. 수십m에 이르는 오르카의 새로운 비밀병기가.

이게 있는 한 그대는 지난번처럼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오. 내가 굳이 함대를 이끌고 맞설 필요조차 없지.

정 바다에서 나와 겨루고 싶다면 이것부터 넘어서야 할거요"


급하게 짜낸 발상치고는 나쁘지 않다.

도발이 성공적으로 먹혔다면 감마의 함대가 알바포스를 향해 포격을 쏟아부을 테고 문제 하나는 해결되겠지.

다만 그 후 대규모의 함대전을 감행해야만 한다.

그때쯤이면 세뇌전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리라 생각하지만, 솔직히 말해 희망 사항일 뿐이고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저 다가오는 파멸에 약간의 유예를 둘 뿐일지도.

목을 조이는 두 올가미 중 하나를 없앨 수 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독단을 용서하시오, 주군...이것 말고는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소.

아아...물개가 되어 파도가 살랑이는 해변을 넋 놓아 보고 싶구려...."


마지막 정신력을 쥐어짜 감마를 자극한 용이 철퍼덕 쓰러졌다.

최소한 해변에서 찰박거리는 파도에 몸이 반쯤 젖고 있으니 소원을 어느 정도 이룬 건 아닐까.


"하...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섬에서 비밀병기라도 연구하고 있었나 봐?

어지간히 자신이 넘치나 본데, 좋아! 그 제안 받아주지!"


입술을 깨문 감마가 주포의 충전을 지시한다.

몇 분 후면 저 거치적거리는 거대 로봇인지 뭔지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리고 그토록 바라던 재결전을 그릴 수 있겠지.


"스파르탄 부대! 당장 주변의 바이오로이드를 멀리 안전한 곳으로 옮겨! 다른 AGS에게도 전하고!"


최고 통수권자가 직접 내리는 명령에 의욕 없이 늘어진 관객들이 하나둘 끌려나간다.

이제 감마로 알바포스를 치워버리기만 하면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지.

사령관도 슬슬 무대에서 퇴장할 시간이다.


"타이런트, 수고했어. 이만 물러나자"


"크르르...."


타이런트?"


맙소사.

이 제멋대로인 폭군은 그저 눈앞의 상대를 확실하게 무너뜨려 누가 진정한 강자인지 자웅을 가리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다.

이대로라면 포격에 휩쓸리고 만다.

그 순간 아까 들었던 웅웅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자극한다.


"안 돼...."


저 멀리 수평선 위로 보이는 검은 점을 바라보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지난번에 접했던 전투 데이터대로라면 감마의 주포는 적지 않은 충전시간을 요하니 몇 분 더 걸리겠지.

그 몇 분을 산채로 누릴 수 있을까?


"사령관, 작전상 후퇴다!"


알바트로스가 잽싸게 사령관을 잡아채 인근의 동굴 안으로 몸을 숨긴다.

비스듬히 나 있는 입구 덕에 타이런트와 알바포스가 대치한 모습이 보인다.


"치욕은 한 번으로 족하다"


짓씹듯 말을 내뱉은 공룡이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든다.

거대한 기계 팔이 기다렸다는 듯 턱을 붙잡고 정면으로 무게를 버틴다.

점점 커지며 다가올 참상을 예고하는 웅웅거리는 소리.

고에너지 반응을 확인했다는 알바트로스의 보고가 쐐기를 박는다.

그 순간, 타이런트의 꼬리가 붉게 빛나며 몸을 거꾸로 타고 오르기 시작한다.

등을 지나 눈에서 작은 태양이 빛난다 생각한 순간, 모든 것을 밝게 뒤덮는 빛이 알바포스에게서 뿜어져 나온다.


"읏...!"


다급히 눈을 감는다. 다시 떠보면 결판이 나 있겠지.

타오르는 열기에 몸이 후끈거린다. 눈꺼풀 너머로 느껴지는 희고 붉은 빛.

붉어?

호기심에 앞서 눈을 떠보니 타이런트의 입에서 뿜어져나온 플라즈마 화염이 레이저 광선과 정면으로 충돌해 힘 싸움을 벌이고 있다.


"크오오...크와아아!"


막대한 반동을 버티고자 앞다리가 땅에 거칠게 박혀 닻이 된다.

누가 섬의 진정한 지배자인지 가리기 위한 일격의 교환은 결국 붉은 화염이 압도하며 거대한 제물을 그대로 남김없이 불태웠다.


"역시 타이런트야! 믿고 있었다고!"


"거짓말하지 마라, 사령관"


알바트로스의 볼멘소리를 가볍게 한 귀로 흘리고 기쁨에 밖으로 뛰쳐나온다.

우뚝 서 있던 거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재와 먼지만이 하늘을 장식하고 있다.


"진정한 강자는 나다"


가소롭다는 듯 말을 남기고 승자가 다시 숲의 공터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 감마를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해야겠지. 표적을 잃은 주포가 그대로 섬에 꽂힐지 모른다.

스파르탄이 오르카의 일원들을 무사히 안전한 곳으로 옮겼길 바랄 뿐.

그렇다 해도 저 주포의 화력이라면 섬을 깨끗하게 날려버린다는 전개도 가능하다.

어떡하지?

북미에서 조우했던 기억이 어지럽게 뒤섞여 떠오른다. 유독 용에게 집착하고 승부를 갈망하던 그 모습.

지금이라도 용이 함대를 이끌고 움직인다면 거기에 반응해 주포를 허공에 쏘진 않을까?

동전이 앞면일지 뒷면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늦기 전에 튕겨보기라도 해야 한다.


"용, 듣고 있지? 미안하지만 당장...."


무전기를 힘없이 떨어뜨린다.

분명 알바포스는 사라졌을 텐데 여전히 저 멀리 해변에 머리를 박고 있는 용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뒤에서 들리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


"위험하다!"


때늦은 알바트로스의 외침.

독수리가 사냥감을 낚아채는 것처럼 알바포스가 사령관을 낚아챈다.

이젠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지만 그럼에도 맹렬한 속도를 자랑하며 섬을 빠져나와 저 멀리 날아간다.


"크윽...뭘 하려는 거야?!"


"전력 면에서 밀린다는 것은 인정하지. 그렇다면 전술로 승부할 뿐"


미친 로봇은 감마의 함대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너, 설마 날 팔아넘길 생각이야?"


"너희의 이해관계는 관심 없다. 기존 권력의 정점을 몰아내고 내가 새로운 질서의 정점이 된다. 이걸 혁명이라 하던가?"


"혁명 좋아하네! 당장 이거 놔!"


"상당히 흥미로운 저 주포 안에 쑤셔 넣은 다음 놓아주지"


이대로 가면 어나이얼레이터의 최대 화력을 온몸에 받고 세포 한 조각조차 남기지 못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안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악! 아아악!'


"...내가 전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가보자 그곳에는 장대한 위협이 기다리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온 질리는 도입부.

어느새 알바트로스가 사령관을 따라잡아 평행하게 날고 있었다.


"알바트로스! 와줄 줄 알았어!"


"주인공은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는 법이다"


지금만큼은 언제나의 입만 산 허당이 아니고 한없이 늠름하게만 보인다.

남아있는 한쪽 팔을 크게 휘두르며 꽂아넣는 모습이 멋있고 또 멋있다.

그 팔이 알바포스에게 보기 좋게 잡혀 그대로 내동댕이쳐지는 모습도 강렬하게...응?


"크윽!"


"야! 임마!"


그대로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다로 가라앉은 무능한 지휘관을 뒤로하고 점처럼 보이던 감마의 함대가 슬슬 윤곽을 드러낸다.


"이것이 현실이다. 한심한 머리를 잘라내고 내가 그 위에 서겠다"


"감마! 들려?! 항복할 테니 일단 나 좀 살려줘!

누구라도 좋으니, 상전으로 모실 테니 제발 구해줘!"


들릴 턱이 없는 절규를 내지르며 무의미한 발버둥을 쳐본다.

소용없다, 저 멀리서 저승사자가 크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게 두 눈에 큼지막하니 들어온다.

안녕, 한 많은 세상아.


"난 최강이다!"


수면이 용솟음치며 알바트로스가 다시금 튀어나와 온몸으로 달려들었다.


"떨어져라, 이 패배자!"


"너야말로 떨어져라! 사령관의 상전이 될 절호의 기회를 놓칠 것 같으냐!"


빠르게 날아가던 와중에 묵직한 거체가 추가로 더해져 주포를 바로 앞에 둔다.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다.


"턱"


거칠게 멱살을 잡아채는 차가운 금속의 손길.

알바트로스가 지긋이 사령관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팔을 크게 휘둘렀다.


"첨벙!"


물수제비 튕기듯 수면에 온몸을 부딪치며 함대로부터 저 멀리 날아간다.

아직 온전치 않은 에너지를 쥐어짜 걸어준 에너지 필드 덕에 타격은 극히 경미했지만, 

급격한 상황 변화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사령관은 어지럽게 돌아가는 시야 속에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었다.




'뭐야, 내분이라도 터진 건가? 왜 서로 싸우고 있지?'


괴상하게 생긴 로봇을 향해 주포를 충전하고 있던 감마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은편에서 달려드는 AGS는 타이런트가 틀림없다. 저 골치 아픈 괴물까지 설마 가지고 있었나.

짧게 혀를 찼지만 그 타이런트가 비밀병기를 불태우는 광경은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타이런트라면 그럴 수도 있나...사령관 녀석이 통제에 실패했나 보군'


어깨를 으쓱하며 화면을 돌린다.

큰소리 떵떵 치길래 내심 기대했는데 이런 맥빠지는 전개라니.

하지만 주포의 충전을 도중에 멈출 수는 없다. 삽질한 대가로 섬을 싹 날려버릴까.

아니, 그건 아깝다.

이 섬을 비롯해 일대에 형성된 군도는 

감마가 자신의 영향권인 태평양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형성한 지역이었다.

PECS의 뛰어난 기술력을 동원해 오랜 시간을 들여 이상적인 환경을 조성해놨고

군사기지뿐 아니라 약간의 여흥을 위한 별장으로도 활용할 계획이었다.

감히 빈집을 차지해 떵떵거리다니.

기분이다, 어쨌든 곧 용과의 진검승부를 벌일 수 있을 테니 개막을 알리는 축포 삼아 섬의 끄트머리만 살짝 날리자.


"준비율 99%...주포 준비 완료"


포세이돈의 시스템이 화려한 인사가 준비됐다고 알린다.


"...발사"


그 때였다. 


"뭐야?!"


엄청난 속도로 날아든 정체불명의 비행체가 지근거리에서 포착됐다. 미처 대처할 겨를이 없다. 스텔스 기능이라도 갖춘 건가?!

전쟁을 방해하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난입. 연이어 하늘을 갈라야 할 주포의 궤적 대신 굉음과 함께 사방을 뒤덮는 폭발. 

감마의 기함이 화염에 휩싸인다.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