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글들


(상편) "걔 완전 븅신같지 않아?"

(하편) "디지는 줄 알았네... 그 븅신..."


(번외편) "빨리 안 오고 뭐해. 븅신아..."

(번외편) "드럽게 크네, 뷰웅신..." 





집요하게 추궁해오는 장화를 참다못한 천아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장화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리며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뭐?"


둘 사이에 싸늘한 냉기가 흘렀다.


그날, 사령관이 주선해 준 자리에서 오갔던 대화를 끝으로 오늘 이 시간까지 둘은 한 마디도 일절 나누지 않았다. 천아도 장화도 사령관이라는 매개가 없으면 서로 굳이 관심을 기울일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아는 궁금점이 해소되었고, 장화는 경쟁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으로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사령관에 대해 관심 없다고 일축했던 것과 점점 상이해지는 천아의 언동은 장화를 점점 불편하게 만들었다. 둘이 만났다는 소식-열받게도 이런 소식은 주로 사령관 본인이 장화에게 직접 밝히곤 했다-이 거듭될 수록 점점 진해지는 스킨십, 사령관과 대화할 때에 잔망스럽게 늘어지는 말꼬리와 거슬리는 콧소리, 무엇보다 그 살살 치는 눈웃음. 장화의 기준에서는, 명백히 접대의 수위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장화는 자꾸만 파고드는 천아가 짜증났고, 그 여우짓을 다 받아주는 사령관이 원망스러웠고, 그걸 누구보다 신경 쓰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하지만 여기서 더 참견하게 되면 자기 안에 싹트다 못해 깊숙이 뿌리내린 그 감정을 인정해버리는 것만 같아 그럴 수 없었다.


'어차피 어중간한 마음으로 다가가면 어중간한 관계에서 끝날 수밖에 없지.' 오직 그 말을 되뇌이며 스스로를 위안삼았다. 저래 보여도 진심에 대해서는 민감한 남자였고, 허울 뿐인 천아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면 스스로 거리를 둘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런 장화를 결정적으로 폭발시킨 계기는 데이트 일정이 겹치는 작은 추돌사고였다. 함내에서는 꽤나 빈번하게 있는 일이라서 더블이나 트리플 데이트도 흔하다고 듣기는 했다. 그래서 사령관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장화도 화는 냈겠지만,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것이다. 추돌사고가 일어난 상대가 그녀만 아니었다면.


"야, 핫팩! 내가 2주 전부터 말했잖아~ 알지? 기대하다가 갑자기 취소되면 개빡치는 거?"


팔에 들러붙어 소중히 껴안고, 슬며시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깍지도 끼고, 그대로 넋을 놓은 것처럼 옆모습을 올려다보는 그 뱀 같은 눈깔. 장화는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장화로서는 모를 일이지만, 천아는 진심으로 다가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럼 그냥 셋이서 볼래? 둘이 저번에 얘기도 잘 하던데... 서로 친하니까 같이 노는 편이 사람도 많고 더 재밌지 않을까?"


그 멍청하고 무신경한 소리를 면전에서 들은 장화는 그대로 사령관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 일이 있고 바로 다음 날인 오늘, 이렇게 장화가 천아를 불러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테이블과 두 잔의 음료를 가운데에 둔 둘 사이에서 오갈 말은 뻔했다. 장화는 천아와 사령관의 관계를 캐물으며 변심한 그녀를 앞에 두고 '혓바닥이 두 갈래라서 한입으로 두말을 한다.'느니, '남자에 눈이 멀어서 헤픈 짓 하는 게 꼴불견이다.'라느니 하는 말로 비꼬아댔다. 


"거 존나게 질척대네..."


문제는 천아도 그런 말들을 듣고 참을 성깔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천아는 굳이 자신이 마음을 왜 바꿨는지에 대해서 구차하게 설명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말해봐야 의미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굳이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장화 앞에서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에...


"그 븅신이 니 남친이라도 되냐?"


장화가 그런 것을 따져 물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찔렀다.


"...뭐?"


장화가 당황하느라 공세를 늦춘 틈을 타서 천아의 거침없는 말이 쏟아졌다.


"왜 지랄인지 모르겠네. 그래서 어쩌라고? 와서 보니까 나 말고도 먼저들 물고 빨고 핥고 다 하던데 걔네들한테는 지랄 안하고 어떻게 참았어? 그리고 너는 핫팩이랑 그런 관계까지도 가지 못한 모양이면서, 니가 뭔데 나한테 견제질이야? 핫팩이 니꺼야?"

"...내가 그 녀석 신경 써서 이러는 걸로 보여? 그냥 네 행동거지가 역겨워서..."


자신이 내뱉고도 지리멸렬하다고 생각했다. 천아는 반박할 가치도 느껴지지 않았는지, 대놓고 말을 끊으며 코웃음쳤다.


"하, 야.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뺀다고? 너도 참 답답한 년이다. 차라리 좋아하는 사람 뺏길까 무서운 거 인정했으면 몰라. 대체 어디까지 배배꼬인 거야?"

"닥쳐..."

"자기 마음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싫어, 그렇다고 애먼 남이 솔직하게 다가가는 것도 못 참아. 뭐야, 니가 못 쳐먹을 것 같다면 남도 못 먹게 한다는 심보야?"

"닥치라고 했지."

"닥치게 해봐."

"...못할 것 같아?"


방 안의 기류가 둘 사이로 수렴되었다. 미동도 않고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냥개의 안광이 허공에서 불꽃을 일으켰다. 장화는 손끝을 늘어뜨리고 긴장을 풀며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준비했고, 천아는 손끝을 굳히고 근육을 수축시키며 가장 빠르게 낼 수 있는 손기술을 갖추었다. 그렇게 둘 사이의 공기가 소용돌이치려는 찰나였다.


"...됐어."


먼저 눈을 피한 것은 천아였다. 꼬리를 말며 도망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도, 장화의 가슴에 차오르는 것은 통쾌한 승리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새끼도 아니고... 너랑 추하게 머리채 잡고 뒹굴어서 뭐 하게? 나보고 그만두라고 할 명분도 처음부터 없었으면서 사람 불러서 이런 시간낭비나 하게 만들고 말이야. 너한테 이렇게 버리느니 핫팩 일하는 거 방해나 하러 가고 말지."


고개를 푹 숙인 장화를 앞에 두고 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기 위해 문을 앞둔 천아의 뒤에서, 억지로 쥐어짜는 듯한 장화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렸다.


"...꺼야."

"뭐라는 거야? 좆도 안들리네. 나 나간다?"

"내 꺼라고."

"...뭐?"


천아는 장화를 돌아보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 위에 떠오른 장미넝쿨이 불길하게 가시를 흔들고 있었다.


"내... 꺼니까... 내 남자니까... 손대지 말고 꺼지라고..."


삐걱이는 목소리와 함께 후들거리는 장화의 머리가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희열 같기도, 분노 같기도, 증오 같기도 했다. 희번덕거리는 장화의 눈초리를 마주한 천아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래, 개년아. 그 새끼 내 꺼라고. 내가, 내가 줄곧 찾아 헤매던 진짜라고! 죽, 죽고 죽이는 것 이외에 처음으로 찾아낸 내 삶의 의미야! 여, 여제님도 주지 못한 걸 그 녀석이 나에게 줬어! 빼, 뺏어가거나 방, 방해하려는 새끼는 다, 다 죽여버릴 꺼야..."


한번 인정하니, 그 다음부터는 편해졌다. 뱃속에 얹힌 무거운 돌을 덜어낸 것 같기도 했고, 가슴에 박힌 날카로운 가시가 빠져나간 느낌 같기도 했다. 지금까지 부족했던 99에 1이 더해져서 온전히 100으로 채워진 감각이었다. 단 한 발짝의 아주 작은 전진이었지만, 99와 100의 차이는 장화를 송두리째 바꿀 큰 변화이기도 했다. 묘한 상쾌함과 후련한 해방감에 들떠가는 장화는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왜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을까? 바보 같았던 자신을 생각하니 저절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너도... 아니 누구든 우리 둘 사이를 방해한다면,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줘버릴 거야... 다른 년들도 다 필요 없어! 내,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의 크기는 분명 그년들이 지금까지 줬던 어중간한 감정보다는 훨씬 커다랄 테니까... 나도 그 녀석이 필요하고, 그, 그 녀석도 날 필요로 할 테니까 이건 운명일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러니까 다 죽여도 돼... 어차피 그럴 운명이었으니까..."


연산 모듈이 위치한 목 뒤 언저리가 뜨거워지며 머리가 핑 돌았다. 논리도 타당함도 이성도 없는 그저 떼쓰기에 불과한 아이의 어리광이었다. 엉망진창이면서 앞뒤가 맞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래서 더더욱 여과 없는 날것 그대로의 속내였다. 묵은 핏덩이를 쏟아내는 것처럼 곪았던 마음의 고름들을 토해내고 있는 장화 앞에서 천아는 그저 아연하고 있었다. 장황한 고백을 끝낸 장화 앞에서 천아는 간단하게 감상을 남겼다.


"...미친년."

"그래, 나 미친년이야. 미친 년한테 제대로 물려보고 싶어? 그 거슬리게 흔들거리는 꼬리 잘라버리기 전에 내 남자한테서 꺼져."

"얼탱이 없어서 그냥 들어준 거지, 너한테 쫀 거 아니거든? 그냥 중간이 없구나? 지도 관심 없는 척 꽁꽁 숨기다가, 솔직해지라니까 갑자기 혼자 급발진하고... 어디 나사 빠진 구석이 있는 건 짐작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천아는 눈에 띄게 꺼림칙해하면서도 또박또박 할 말은 다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하겠다고? 내가 그 녀석을 사랑하는 만큼 너도 그 녀석을 사랑해줄 수 있어?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눈을 달라면 눈을 줄 거고, 심장을 달라고 하면 심장을 파내 줄 거고, 목숨을 버리라고 하면 버릴 거야. 너는 그럴 수 있어?"

"그... 오글거리는 소리 좀 그만할래? 누가 그딴 소름끼치는 걸 사랑이라고 불러? 그런 일방적인 건 그냥 구질구질한 집착이지. 원하지도 않는 호의 따위, 그냥 불쾌할 뿐이야. 그게 집착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애초에 걔가 널 좋아할 거라는 착각은 왜 하는 건데? 꼬라지 보니까 지금까지 퇴짜만 오지게 박았을 거면서. 그래놓고 좋아해주길 바라는 건 에바 아니야? 그냥 니가 좋아하니까 그만큼 너도 좋아해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되는 망상일 뿐이잖아."

"아, 집어치워."


장화는 짜증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철커덕! 어느새 왼손에 장착된 죽음의 손아귀가 섬뜩하게 번뜩이는 와이어를 자아내고 있었다.


"네가 포기하지 않으면, 내가 포기하게 만들면 되지. 너 처리하면, 다음은 다른 년들도 똑같이 따라갈 테니 외롭진 않겠네."

"너 맨날 이렇게 남들한테 시비 걸고 다녀? 진짜로 이기적인 집착이라는 소리 듣기 싫으면, 그 녀석이 싫어할 짓은 안 하는 게 먼저 아닐까? 그냥 네 감정을 일방적으로 쏟을 쓰레기통을 원하는 건지, 진정한 의미로 상대방을 위하는 건지, 둘중 뭐가 사랑인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지 않아?"

"흐흐흐, 그래서 안 보는 곳에서 하고 있잖아?"

"허얼씨구."


천아의 손가락이 스로잉 나이프의 차가운 손잡이에 걸렸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두 사냥개가 서로 원을 그리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차라리 잘 됐네. 혼자 온갖 고생 다 하는 것처럼 궁상떨고 까오잡는 꼬라지가 보기 싫었거든. 언제 한번 손봐주려고 벼르고 있었지."

"똑같이 더러운 짓 다 하던 년이면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헤헤거리는 상판에 나도 벌집자국 한번 남겨주고 싶었어. 그 어중간하게 찢어진 쎗바닥, 오늘 끝까지 갈라줄게."


그렇게 서로에게 으르렁대던 둘은,


똑똑똑.


"어, 천아랑 장화 둘 다 있지?"

""...""


노크 소리와 사령관의 목소리를 듣고는 동시에 정지해 버렸다. 


반응이 없자, 사령관은 다시 문을 향해 외쳤다.


"여보세요~?"

"아! 핫팩! 에티켓이 없네! 둘이 이야기하는 중이잖아!"


눈치 빠른 천아가 사령관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기 전에 재빠르게 대답했다. 둘의 무장이 샥, 하고 재빨리 소매로 사라졌다.


덜커덕!


문이 열리고, 사령관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어느새 천아는 자연스럽게 장화의 어깨에 팔을 감싸고 있었다. 장화는 올라오는 구역질을 속으로 억눌렀다.


"...큰 소리가 들려서. 둘이 싸우는 거 아니지?"

"뭐래는 거야~ 원래 우리끼리 수다떨다 보면 텐션 올라서 그러는 거 몰라? 한창 재밌을 때였는데 우리 핫팩 눈치 뒤지게 없네."


그 둔감하다는 사령관의 눈에도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둘의 모습은 이상하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천아는 유들유들하게 받아흘리며 낮은 복화술로 장화에게 속삭였다.


"웃어, 웃어."


한껏 굳은 장화의 입매가 억지로 섬찟하게 치켜올라갔다.


"음, 어어... 내가 방해했나? 미안. 안 싸우는 거면 다행이고."

"누가 싸운다고 그래~"

"...얘기는 끝났어?"

"뭐, 할 만큼은 한거 같아. 핫팩이 맥 끊어준 덕분에. 이제 나가려고."

"아하하, 미안..."


은근슬쩍 사령관의 몸에 또 따라붙는 천아를 장화는 아니꼽게 쏘아보았다. 저 어깨 위에 올리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반대방향으로 꺾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장화는 간신히 억눌렀다.


'그 녀석이 싫어할 짓은 안 하는 게 먼저 아닐까?'


왜 저 얄미운 년의 말이 머릿속에 계속 울리는 걸까? 방을 나서던 장화는 맴돌이치는 그 목소리를 머리를 절레절레 저어서 쫓아냈다. 장화에게는 인정하기 죽어도 싫은 사실이겠지만, 결국 천아 덕분에 이 감정과 간신히 마주할 수 있었다. 비록 뒤틀리고 비정상적인 감정이더라도, 그녀도 이제서야 애정전선의 스타트 라인에 서게 된 것이다. 장화는 살의 어린 눈으로 천아가 따라붙은 오른쪽 손을 쏘아보다가, 이내 빈 왼쪽으로 달려들었다. 사령관은 생각지도 못한 장화의 육탄돌격에 당황하면서도 기분 좋게 웃었다.


지금은 마음에 안 드는 저 년을 토막내기보단, 간신히 손에 넣은 이 애틋한 감정에 솔직해지자. 단단한 팔뚝에 볼을 부비며 장화는 천천히 녹아들어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여전히 서먹서먹한 둘을 위해 어설프게 화해를 주도해보겠답시고 사령관은 장화와 천아를 방으로 불렀다. 당연히 단둘인 줄로만 알고 기대감에 가득 차서 호출에 응한 둘이었다. 그리고 천아와 장화는, 어리둥절하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얼마 전에 대판 싸웠던 연적의 증오스러운 면상과, 등신처럼 그 옆에서 뭘 잘했다고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령관을 보고 올라오는 혈압에 이마를 짚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