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붕&캐붕 있을수도 있음)

어느 날, 금란 모델 1기가 오르카에 합류했다.

허나 그녀는 분명히 금란 모델이긴 했지만, 보통 모델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옛스러우며 우아한 복장. 하지만 저고리와 치마는 오랫동안 입었는지 색이 바랬고 해져있었으며 항상 쓰고 다니는 주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검은 오랫동안 써왔다는게 한 눈에 보일 정도로 칼자루에 감아놓은 천이 닳아 너덜더널해져있었다.

 

인계절차를 거치고 가지게 되는 사령관과의 면담에서, 사령관은 그녀가 멸망 전 개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초와도 같이 고고한, 그리고 우아한. 그것이 모두가 알고있는 보통의 금란이었다. 허나 지금 사령관의 눈 앞에 있는 금란 모델에게서는 마치 맹수와도 같은 분위기가 넘쳐흐르고 있다. 그리고 꾹 닫은 눈에서도 느껴지는 깊은 증오심. 그러나 그것은 사령관을 향한 증오심이 아니었다. 필시 많은 일들을 겪어왔을 것이다.

 

"오르카 호에 합류한 걸 환영해!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을텐데, 혹시 원하는 게 있니?"

 

방황하다 합류한 보통의 바이오로이드들은 같은 부대 동료, 또는 상관과의 해후와 의식주만 보장시켜주면 족하다는 대답을 할 것이다. 사령관도 그렇게 예측했다.

 

"...혹시 여기에는 저와 같은 자매들이 있는지요?"

 

"배틀메이드 말하는거야? 물론이지! 뿐만 아니라 너와 같은 금란 모델도 있어."

 

그녀는 기쁜듯이 싱긋 웃고는 의외의 대답을 꺼냈다.

 

"그렇다면 제 자매와 대련을 해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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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카 호 한 구석에 마련된 트레이닝 룸.

보통은 체력 단련이나 훈련 용도로 자주 쓰이는 곳이지만, 오늘의 사용자들은 상당히 보기 드문 조합이었다.

 

"우선 반갑다는 인사부터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르카 호에 승선하신 것을 환영하옵니다."

 

오르카 호의 금란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저 역시 여기서 자매를 만날 줄을 몰랐사옵니다. 그간 무탈하였는지요?"

 

평범한 인사. 하지만 금란은 그 말 속에 깃들어 있는 미약한 적의 비슷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

 

문답무용이라고 하였나. 말로써 듣는 것 보다 직접 부딪혀 듣는 편이 더 빠르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챈 금란은 말없이 허리춤의 환도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에 호응하듯 맞은 편의 금란도 환도에 손을 올렸다.

 

-------- 그리고 두 금란은 동시에 허리춤의 칼을 빼어들었다.

 

거울과도 같이 고요하고 은은한 빛을 발하는 환도의 검신, 그리고 흠집이나 금 간 부분은 없으나 광택도 사라진 오랜 연륜의 검신이 교차하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두 명의 검성이 서로 뿜어내는 기백은 관전하는 이들로 하여금 엄청난 압박을 선사해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무언의 대치가 지속되던 도중, 금란은 한 가지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검을 쥐는 방법이 다르군요..'

 

같은 모델임에도 검을 쥐는 방식이 다르다. 보통 양산화되는 모델은 내부에 이식되는 전투 데이터 마저 동일하게 복사된다. 즉, 같은 모델이라면 100이면 100 모두 같은 전투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금란이 사용하는 검술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리 고급 기종인 금란이었다지만, 모두 같은 유검(柔剣)을 사용하기 마련이었다.


헌데 맞은 편의 금란은 이때까지 금란 모델이 사용하던 검술에서 한참 벗어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아니ㅡ,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는 없다. 지금은 눈 앞의 상대에게 집중할 뿐이다.


쉿-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르카 호의 금란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찰나 베기""

 

눈 앞의 상대가 베인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신속의 속도로 베어버린다는 찰나 베기.

여지껏 수많은 철충들을 베어왔던 이 기술은, 놀랍게도 칼 한 자루에 막히고 말았다. 

 

"..!"

 

"후후, 놀라셨습니까?"

 

아무리 금란이 위력을 적당히 조절했다곤 하지만, 보통의 바이오로이드였다면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당했을 것이다.

여태까지 찰나 베기를 정면에서 맞받아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눈 앞의 이 금란을 제외한다면.

 

충돌한 검신은 철을 깎아내는 소리를 내며 서로 자웅을 겨루고 있다.

힘의 균형이 조금만 깨져도 어느 한 쪽이 베일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 균형을 먼저 깨는 것은 누구인가.

-----순간, 오르카 호의 금란의 칼자루에 힘이 실렸다.

금란은 검신의 궤도를 살짝 틀어 상대의 검신을 흘려보내 공격을 회피한 후 뒤로 크게 뛰어 거리를 벌렸다.

흘려낸 찰나에 벨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거리를 벌린 것이다.

 

"... 베는 것을 망설이다니, 동정이라도 하는 겁니까?"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같은 자매 기종은 상처입히고 싶지 않사옵니다."

 

그 말을 들은 멸망 전 금란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좋습니다, 그 쪽에서 그렇게 나온다면 이 쪽에서 먼저 진심을 내도록 하지요."

 

"....대련이 크게 번지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만....."

 

말을 끝맺을 새도 없이 멸망 전의 금란이 오르카 호의 금란을 향해 도약했다. 허나..

 

'다른 자매들과 달리 속도가 느리다.'

 

확실히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비교한다면 빠른 축에 속하겠지만, 신속의 속도로 적을 유린하고, 그림자와 같이 주인을 호위하는 금란 모델의 속도라기엔 너무 느렸다. 이대로 내려쳐지는 검신을 흘리고 칼자루로 복부를 가격하여 잠시 기절시키자고, 금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그 안일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된 건 그녀의 첫 합을 받았을 때였다.

 

"카아아아!!"

 

기합과 함께 내려쳐지는 강검(强劍). 그 참격은 트레이닝 룸의 바닥마저 부숴버릴 정도로 부숴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아무리 금란이 유검의 달인이라지만, 이렇게 강렬히 내려쳐지는 검격을 흘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축을 뒤흔드는 엄청난 진동과 파열음. 함께 흩날리는 파편과 흙먼지. 이는 참격이라기보다는 마치 포탄이 터진듯한 광경을 방불케했다. 그럼에도,

 

"...견뎌낸건가."

 

한 번의 참격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일순간에 걷히고, 그 곳에는 아무 상처도 없이 고고히 서있는 금란이 있었다.

 

"명경지수(明鏡止水)로군요, '제 힘'으로는 어찌 해도 도달할 수 없었던 경지."

 

"... 한 가지 여쭙겠사옵니다만, 혹여 자매께서는 전투 모듈을 이식받지 못하셨사옵니까?"

 

"반은 맞사옵니다. 정확히는, 제가 기능을 정지시킨 것이지만요."

 

지면에 있던 검으로부터 이어지는 올려베기는 엄청난 검풍을 생성해내어 금란을 멀찍히 밀어냈다. 

 

"저도 옛날에는 자매님과 같은 유검을 사용했습니다. 주인님을 잃기 전까지는요."

 

오르카 호의 금란은 안정적으로 착지한 후, 멸망 전의 금란에게 돌격하여 검을 맞부딪혔다.

 

"옛 주인을 잃은 것이 저희 자매들의 검술 탓이라고 하실 생각입니까?"

 

검신을 흘려내고 빠른 속도로 내질러진 검격이 멸망 전 금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 머리카락 몇 올을 잘라냈다.

멸망 전 금란은 머리카락 정도는 대수롭지 않은 듯 금란의 검신을 튕겨내고, 검을 크게 쳐든 후 강렬히 내려쳤다.

그 검격은 금란에게 닿지는 않았지만, 검풍만으로 바닥에 금이 갈 정도의 강력무쌍한 것이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는 제가 너무나도 무력했기 때문에 주인님을 잃었다고 생각했을겁니다."

 

"그것이 진정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른다고 했지 않습니까. 격정에 휩쓸린 후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저는 제가 사용하던 검술과 신체 능력을 버린 몸이 되어있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군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어느 순간, 두 금란은 모든 것을 베어가를듯 끝없이 이어지는 검섬의 선을 그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곡선과 강직한 직선이 만날 때마다 청명한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어오르며 주위를 밝힌다.

하지만 틈 따위는 찾아 볼 수 없다. 만약 한 쪽이라도 틈을 보인다면 그 사이로 참격이 발해짐은 당연한 이치.

 

"저는 전투 데이터같은 것에 의존하지 않아도 철충들을 베어낼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 속세와 연을 끊고 산 속에 틀어박혔습니다. 부드러움을 추구하는 난초에서 강직하고 올곧은 대나무가 되길 바라며 유검을 버리고 강검을 수련했습니다."

 

'그렇다면 전투 모듈도 없이 이러한 강검을 구사하는 것이란 말인가..!'

 

"저는 하산한 후 제 주인님의 목숨을 앗아간 철충놈들을 보이는 대로 일격에 도륙하고 다녔고,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호위는 위험으로부터 주인의 신변을 지키는 것이 아닌, 그 원인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자매님은 뒤틀려있군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허나 지켜야 할 대상이 없는 호위무사라는 것 자체만으로 저는 이미 존재 의의를 잃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게 적의를 드러낸 것은 어떤 이유인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금란이 내지른 찌르기가 멸망 전 금란의 뺨을 스쳐지나가며 흰 도화지 같은 피부에 한 줄기 붉은 선을 만들어내었다.

 

"그건 적의라기보단 호승심이었습니다. 예전의 저와 지금의 저, 둘 중 누가 더 강할지 비교해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멸망 전 금란은 자신의 뺨을 지나쳐간 검신을 강하게 튕겨낸 후 금란의 허리를 향해 횡으로 크게 베었지만 잔잔히 흘려넘겨졌다.

흘려넘겨진 궤도 그대로 회전하며 발목을 향해 참격을 날렸지만 금란은 이를 예상이라도 한 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섬으로 인해 허사로 돌아갔다. 허나 강검은 지면에 직격하였고, 금란의 발 밑에서 흙먼지와 함께 강렬한 충격파가 발생하였다. 


"..!"

 

충격파로 인해 금란의 균형이 흐트러졌고, 그 틈을 멸망 전 금란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허나 아무래도 저의 승리인 것 같군요. 역시 과거의 저는 나약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멸망 전 금란은 두 손으로 검을 쥐고 머리 위로 높이 쳐든 후..

 

"카아아아아앗!!"

 

------기합과 함께 과거마저도 베어가를듯한 혼신의 일격을 날렸다.

 

"----명경지수(明鏡止水)."

 

검격이 지면에 직격하며 발생한 파열음과 동시에 멸망 전 금란의 등에서 선혈이 솟구쳤다.

멸망 전 금란의 검신은, 오르카 호의 금란이 아닌 허공만을 베어가르고 있을 뿐이었다.

 

"대단하십니다. 자매님의 강검은 아마 제 유검보다 한층 더 우위에 있을테지요. 하지만..."

 

아무리 자매의 검술이 머릿속에는 남아있다 하더라도 명경지수를 사용한 자매에게는 대응할 수 없다.

첫 합의 찰나 베기는 타이밍과 속도를 예측하여 어찌저찌 막아냈지만, 명경지수로 인한 순수한 기량 차이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멸망 전 금란은 만족스러운 듯 웃고 있다.

 

"그거면 된 것이다.. 나는 마침내 과거의 나를 뛰어 넘었으니.."

 

"---그렇습니까."

 

"자아, 오너라! 그 거울 같은 수면마저 내가 갈고닦은 강검으로 산산히 깨부숴보이마!"

 

잔잔하고 고요한 기백과 하늘마저 찌를듯한 폭발적인 기백이 트레이닝 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윽고 두 금란은 서로 자신의 자세- 유검과 강검의 자세를 취했다.

아마 이 일격으로 어떻게든 결착이 날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리라.

유검의 천재와 강검의 범재, 모두 각자의 극(極)에 다다른 지금 이 자리에서 결판이 날 것이다.

 

--깊은 심호흡.

 

------------그리고 두 칼날은 서로 내리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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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 비슷한게 갑자기 쓰고싶어져서 찍 쌈